6-2. 가는 사랑이 곱다고 오는 사랑도 고우리란 법은 없다.
아드리안 생일 아침이다!
시계가 7시를 가리키기도 전에 눈이 번쩍 뜨였다. 오늘은 기대하고 고대하던 아드리안의 생일 파티가 열리는 날! 나는 침대에서 튕기듯이 일어나서 얼른 씻고 전설 메이드복부터 챙겨 입었다. 사실 12시 지나자마자 축하해 주고 싶었는데, 어제 이상하게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계획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생일 축하도 가장 먼저 건네고 선물도 줘야지! 내가 가진 인내력을 요 일주일간 다 써버린 것 같다. 아드리안 옆에 있을 때면 주머니 속에 굴러다니는 선물이 유독 분명하게 느껴져서, 그냥 일찍 줘버릴까 하는 충동을 견디느라 힘들었단 말이다.
읏차! 힘차게 전설 메이드복을 장착하자, 잠옷을 입은 동안 떨어졌던 능력치들이 두둥 소리를 내며 올랐다. 업무 효율, 물리 방어력, 마법 방어력……. 언제 봐도 흐뭇한 템빨이다. 나는 전설 메이드복이 부여해 준 최고 속도로 숙소를 나섰다.
참, 아드리안을 보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일주일 전에 물벼락 맞았던 바로 그 스프링클러. 아드리안이 지나갈 수 있는 지점이니만큼 제대로 고쳐졌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그 후로 매일 아침에 들러 봤지만, 특이한 점은 찾지 못했다.
아무리 건드려도 동작하지 않기에, 한동안 스프링클러를 고치러 돌아다녔던 에밀리에게 보여 주기도 했다. 멀쩡하던 기계가 갑자기 고장 난 건 이상하지만, 완전히 동작하지 않는다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스프링클러가 말썽인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며. 다른 기계들도 죄다 고장 나 있는데 왜 유독 이것에만 신경 쓰냐고 물었다.
“흠…… 괜찮은 건가?”
나는 발로 툭툭 쳐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물 폭탄이 꽤 아팠는데. 만에 하나 아드리안이 맞기라도 하면 곧장 골로 갈 세기였단 말이다. 에밀리가 괜찮아 보인다고까지 했는데 난 왜 이렇게 신경 쓰인담. 혹시 해서 ‘투시자의 눈’까지 써 봤는데 특별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에이, 이제 신경 쓰지 말자. 과보호하는 엄마도 아니고.”
평범하게 고장 난 스프링클러 같은데, 이게 터져서 아드리안에게 해를 끼칠 거라는 망상에 시달리다니. 과몰입이다, 과몰입.
“힐다, 거기서 뭐 하는 거냐?”
“휴버트 선생님? 이런 이른 아침에 웬일이세요?”
마침 정원을 지나가던 휴버트와 마주쳐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가끔 외부 진료 나갈 때만 제외하면 늘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아드리안의 진료는 매일 오후인데, 오늘은 파티 때문에 일찍 하러 나온 걸까? 차림새를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외부 진료 가세요?”
“아직 소식 못 들었구나. 나는 이 저택을 떠나기로 했단다.”
저택을 떠난다고? 그럼 아드리안 진료는 누가 하는 거지?
“도련님께서 더는 ‘그 치료’를 받지 않으신다고 하니 떠날 수밖에. 도련님의 건강이 걱정되긴 하지만, 내게도 사정이란 게 있어서 말이다.”
“그 치료라면 혹시…….”
“너도 잘 알고 있잖느냐, 힐다.”
휴버트의 눈이 음산하게 빛났다. 나이 든 불치병 환자를 넘기는 대신 돈을 받아 챙기는 게 아드리안을 위한 치료법이라고 말하는 건가. 한 환자가 다른 환자의 치료제가 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보니 저 머릿속에는 환자가 계급별로 나뉘어 있는 모양이다.
“도련님께서 더는 안 한다고 하셨다고요? 언제요?”
“지난번 일이 있고 나서부터였지. 축하한다. 잘 이어 나가던 치료를 성공적으로 망치다니 말이다. 연구에도 차질이 생겼으니, 내 아내와 같은 병을 앓는 환자들에게도 불행한 소식이 아닐 수 없지.”
“글쎄요. 치료법을 발견한대도 과연 그 환자들이 휴버트 선생님께 치료받을 수 있을까요? 돈 없으면 안 될 텐데.”
“허허, 맹랑한 것.”
금방이라도 진료 가방을 열어 메스로 찔러 버릴 듯한 눈이다. 하지만 아드리안 곁에서 웬만한 공포는 죄다 맛봐서 무섭게 느껴지진 않았다. 이렇게 공포게임의 고인물이 되어 가는 건가.
“뭐, 나도 네게 딱히 나쁜 감정은 없단다. 약은 충분히 만들어 뒀으니 이제까지처럼 잘 챙겨 드리렴. 이 저택에서 주치의에게 지급하는 봉급은 꽤 많은 편이니 솜씨 좋은 이를 금세 구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사실 실력 따위 아무 상관 없을 테지. 도련님께 필요한 약이 무언지 너도 잘 알 테니까.”
“잠깐만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데 정말 이대로 보내도 되는 건가. 잠깐 고민하고 있는데 그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도련님이 잡혀가시면 나는 이미 사형당하고 없을 테지. 그럼 내 아내도 죽은 목숨일 텐데, 뭘 걱정하는 거냐?”
하긴 환자를 갖다 바치고 사망 사유에 대한 진단서를 조작해 온 건 휴버트니까. 같이 죽자는 심산이 아니고서야 아드리안을 고발할 이유가 없었다. 죽고 못 사는 아내 때문에 같이 죽자는 마음도 못 먹을 테고. 환자를 팔아먹는 냉혈한 의사가 참사랑꾼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잘 지내거라.”
짧은 작별 인사를 남기고 그는 저택을 떠났다. 의사로서 최악이긴 해도 아드리안에게 휴버트만큼 유용한 인재는 없었는데. 후임자가 올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없냐고 묻고 싶었지만, 얼마 전 내가 받은 인센티브를 떠올리니 염치가 없어졌다. 아드리안이 그날 하루 쓴 돈만 해도 몇만 골드인데 휴버트는 공물 여럿 바쳐 놓고도 1만 골드도 못 받았잖아. 불공평한 인센티브는 직원의 퇴사를 부르게 마련이지.
약을 많이 만들어 놓은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락공방 시스템에서도 만능 약초로 온갖 약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급할 때 이용해야겠다. 만능 약초를 많이 사 놓길 잘했지. 다음에 마을 가면 더 사놔야겠다. 여러모로 쓸모있는 것 같으니까.
아드리안이 아침 약을 챙길 겸 살펴보았는데 정말 많이 만들어 놓고 갔다. 딱 봐도 몇백 알은 족히 넘어 보이는데, 아드리안은 이 정도로 약이 필요한 상태라는 걸 말해 주었기 때문에 살짝 우울해졌다. 아프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좋은 아침이야, 힐다.”
약을 가지고 방에 가자 아드리안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아침 인사를 건넸다. 몸이 더 안 좋아진 걸까. 어제보다 얼굴이 더 창백했다. 두통이 유독 심하다는 알림과 함께 들뜬 기분이 살짝 가라앉았다.
창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는 정장풍의 깔끔한 바지와 긴 소매 셔츠를 입은 채였다. 흘끔 눈을 돌려 보니 검은 테일 코트는 파티션에 길게 걸쳐져 있었다. 팔츠그라프 가와 가깝다는 가문 사람들도 참석하는 만큼 제대로 차려입을 생각인가 보다.
“약 가져왔어요, 도련님. 그런데 이게 다 뭐예요? 무슨 물건이 이렇게 많이 쌓여 있어요?”
쟁반을 협탁에 내려놓고 살짝 놀라서 물었다. 어제까지 못 보던 것들이 파티션과 책장 사이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극히 일부는 상자가 열려 있었지만, 나머지는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였다.
살금살금 다가가 열려 있는 상자를 기웃거리자 금색 회중시계가 번쩍거리며 눈을 공격했다. 헉, 저거 설마 진짜 금인가? 테두리를 따라 화려하게 양각으로 새겨진 물결무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딱 봐도 1천, 아니, 3천 골드는 족히 넘는 물건이었다.
“직접 선물을 가져다줄 순 없으니까. 제 몸 끌고 다니기도 무거운 고귀한 신분들이시라.”
다소 냉소적인 말투였다. 하긴 귀족들이 제 손으로 선물을 가져다주긴 볼썽사나울 테니까. 으, 으음. 생일 선물 맨 먼저 주기는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다. 귀족들은 무슨 선물을 줬나, 경쟁자를 경계할 겸 살짝 살폈는데, 여기서는 금이 유행인지 죄다 금빛이다.
저 중에서 가장 값싼 선물을 꼽아도 포장까지 40골드짜리인 내 선물보다 비쌀 것 같았다. 가격 면에서 차이가 심하다. 당당하게 주머니에 넣어서 온 손목시계가 갑자기 철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가져가도 돼. 난 필요 없으니까.”
선물 더미를 살피고 있는 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그가 말했다. 평소라면 곧장 비싸 보이는 몇 개 골라 가서 되팔았을 테지만, 지금 내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해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
돈 조금만 더 모아서 살걸. 일급 잠금도 풀린 데다 케이든과 그로버가 소소하게 벌어다 줘서 210골드는 있는데. 오늘 가서 다시 살 수도 없고 어쩐담. 이렇게 비싼 선물들을 일상처럼 받는데 고작 30골드짜리 손목시계가 눈에 찰 리 없지. 받아서 똑같이 선물 더미에 집어 던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정말 그러면 마음의 상처를 좀 받을 것 같은데…….
에잇, 그냥 줘 버려! 선물인데 마음이 더 중요한 거지! 가격이 뭐가 중요하다고.
“도련님, 이 만년필은 뭐예요? 책상에서도 몇 개 본 것 같은데.”
머릿속에선 이미 아드리안에게 가서 손목시계를 당당히 내밀었지만, 현실에선 아직 선물더미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혹시 해서 책상을 다시 봤는데 진짜 똑같은 만년필이다. 다 똑같아 보이는데 왜 저렇게 많지?
“그건 아버지께서 보내신 선물이야. 매해 같은 색이지.”
“아녜요, 도련님. 이번엔 녹색인데요? 책상엔 죄다 남색이랑 주황색인데. 색깔을 바꿔서 써 보라는 아버지의 깊은 배려 아니겠어요?”
“미리 사놨던 남색 만년필을 매년 한 자루씩 주다 보니 동난 모양이야. 예상보다 오래 살아서 다른 색을 새로 사들이셨나 본데. 이미 두 번쯤 색이 바뀌었지. 이번엔 몇 개나 사 두셨을지 궁금하네.”
“…….”
신문기사를 읽듯 무심한 어투였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숙연해져서 만년필을 도로 내려놓았다. 얜 왜 사연마다 비장하고 우울하냐.
「아드리안의 지병 ‘두통’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약! 도련님, 약! 아침 약 드셔야죠.”
아프다는 알림에 깜짝 놀라 약을 들고 얼른 튀어갔는데, 평소라면 얌전히 약을 받아먹었을 아드리안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두통 심해지고 있는데, 빨리 먹어야 하는데.
본인보다 더 조바심내는 내게 그가 스르르 상체를 기울였다. 툭. 머리끝이 내 배에 살짝 기대왔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가기 싫어.”
시선이 창밖 정원에 고정되어 있었다. 약보다 심리 치료가 필요한 단계인 것 같다. 나는 물컵과 약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고개를 기울였다. 얼굴을 보려 했는데 살짝 숙이고 있는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 많은 곳은 가기 싫어. 시끄럽고…… 성가셔.”
“그래도 도련님 생일 파티잖아요. 마님께서 특별히 정성스럽게 준비하셨다는데 가셔야죠.”
“악마가 태어난 날을 인간들이 축하하다니 우습기도 하지. 차라리 혼자 보내던 생일이 나아.”
얘기가 또 그렇게 되나. 그의 목소리가 진심으로 피로하고 회의적이었으므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한다는 말은 건네 봐야 소용없을 듯했다.
나는 시끄러운 게 싫어, 정말로……. 작게 속삭이며 그가 조금 더 기대온다.
얼마 전 정원을 청소하다가 우연히 만난 작은 길고양이가 불현듯 떠올랐다. 주방에서 먹을 것을 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려 준 고양이는, 순식간에 먹어 치운 후 내 다리에 머리를 비비고 떠났다.
그의 정체와 전혀 어울리진 않았지만, 이럴 때면 꼭 연약하고 작은 짐승이 품을 파고드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나는 손끝으로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햇빛을 받아 밝아진 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전 좋은데요. 저 말고도 도련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잖아요.”
“……저 말고도?”
“물론이죠. 저렇게나 선물이 많은데…….”
“그 뜻이 아니야. 너도 내 생일이 기쁘단 거지?”
“그럼요, 당연하죠.”
아드리안이 이상한 부분을 집었다. 우리가 아무리 그래도 왜 태어났냐고 할 사이는 아니잖아? 그러자 그가 호흡을 고르듯 깊은숨을 쉬었다.
“응, 그렇게 말하니까 오늘이 조금은 좋아지려고 해.”
“그럼요. 마님께서 고생하셨을 텐데, 마님을 위해서라도 즐겁게 지내셔요. 실은 어머니 많이 위하시잖아요.”
“…….”
“성수 사건이 있기 전까진 다정하셨으니까요. 그렇죠?”
그렇지 않고서야 아드리안이 이렇게까지 위할 리가 없으니까. 머리카락을 손끝에 감아 배배 꼬면서 내가 생각했다.
“우습지? 악마가 감정에 휘둘리는 꼴이라니.”
“어머니 애틋한 거야 당연한 건데 누가 비웃어요? 하나도 안 우스워요.”
“…….”
“가시기 전까지 잠깐 저랑 쉬어요. 약 드시면 몸도 나아지실 거예요.”
「아드리안의 지병 ‘두통’이 나아지고 있습니다.」
약 먹지도 않았는데 나아지고 있네. 그래도 오늘은 완만히 보내야 하므로 끈덕지게 약을 내밀었다. 아드리안은 조금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더니 약을 받아먹었다. 좋아, 이러면 좀 안심이다.
본격적인 생일 파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으므로 나는 아드리안의 기분을 풀어 줄 겸, 함께 시간을 보내 주었다. 전속 하인이라는 타이틀을 생각하면 농땡이겠지만, 주인의 성공적인 생일 파티를 위해 나름대로 비위 맞추려는 거다.
아드리안이 먼저 일어나서 피아노로 향했다. 그와 시간 보내 주는 것이란 피아노를 배우는 걸 뜻했다. 나도 허구한 날 멍하니 앉아 있다가 졸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아드리안이 꽤 피아노를 잘 치는 것 같기에 배울 수 있냐고 물어봤는데, 예상외로 무척 기꺼워하는 눈치였다.
우아하게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그의 손과 달리 처음에 나는 힘 조절을 못 해서 시끄럽게 쾅쾅 쳐 댔는데, 그 꼴을 보고도 잘 친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혹시 귀에도 병이 있는 건가. 청력에 문제가 있나. 자학적인 질문을 던지며 한동안 귀에 관한 질병을 알림 목록에서 찾아다니기도 했다.
“도련님, 이제 가셔야죠.”
한참 피아노를 뚱땅거리며 티격태격하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생일 파티를 곧 시작할 것 같아서 물었는데 아드리안은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도련님.”
띵. 내 검지 위에 얹어진 검지가 건반을 눌렀다.
“못 들은 척하지 마시고요. 어서요.”
“으응.”
띵. 이번엔 엄지 위에 얹어진 엄지가 건반을 눌렀다.
칼부림 때와는 달리 피아노에서 그는 꽤 좋은 스승이었다. 건반 위에서 헤매고 있을 때는 이렇게 자기 손을 얹어 대신 쳐주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내가 진짜 잘 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뚱땅뚱땅. 아드리안이 건반 몇 개를 더 눌렀다. 가끔 피아노 가르치는 것보다 내 손 누르는 게 더 재밌어 보인단 말이지.
하, 그런데 이렇게 미적거리다간 파티에 한참 늦겠는데. 창문 밖을 흘끔 보니 정원은 이미 손님들로 복작거리고 있었다. 안 되겠다. 이렇게까지 늦장 피운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도련님, 지금 가시면 오늘 밤에 같이 산책하러 나갈게요.”
“정말? 너 요즘 나가기 싫다고 했잖아.”
건반을 누르는 데만 집중하던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귀가 쫑긋거리는 걸 보면 제대로 된 미끼를 던진 것 같다. 저런 아드리안 때문에 요새 하인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다.
“슬슬 벌레 많아질 때라 그런 거죠. 날벌레들 허공에 무리 지어 있는 거 보면 소름 끼친단 말이어요.”
“그래? 그럼 숙소를 옆방으로 옮기자.”
“얘기가 왜 거기로 빠져요? 싫어요.”
이 악마가 방심한 틈에 은근슬쩍 자기 원하는 걸 끼워 넣네. 나는 곧장 거절 의사를 밝혔다. 아드리안이 이미 몇 번이나 꺼낸 주제라 웬만하면 들어주고 싶지만, 이것만은 넘어가 줄 수 없었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염려스러운 건 둘째 치고, 원래 교통 편하다고 직장 근처에 집을 잡아서는 안 되는 법이거든. 새벽이나 주말에 일 생기면 거리상 가깝다는 이유로 제일 먼저 불려 나오게 마련이다. 이것 때문에 처음엔 무조건 회사 근처에 살 거라던 신입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은근슬쩍 거리 있는 곳으로 이사하곤 한다.
거기다 상대는 아드리안이잖아? 퇴근해서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5분도 안 되어 노크할 것 같단 말이지. 요새 아드리안과 친해지긴 했지만, 퇴근 없는 삶은 싫다 이거다!
“힐다, 우리 진지하게 얘기 좀 해.”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 하며 그가 미세하게 얼굴을 굳혔다. 칼 같은 거절을 할 때마다 저런 반응이었다. 왠지 험난한 대화가 예상된다.
“넌 8시가 되면 칼같이 내 방에서 떠나잖아. 네 숙소에 찾아가면 다른 하인들 눈에 띄면 어쩌냐고 화만 내고. 그래서 피치 못하게 산책하러 나간 건데. 이젠 벌레 많아서 싫다고 하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
“뭘 어떻게 해요? 밤엔 각자 여가를 즐기면 되죠. 애초에 그 시간이 아니더라도 하루 내내 붙어 있잖아요?”
“힐다, 너는 하루 내내 보는 거로 충분해?”
섭섭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눈망울에 어이가 상실됐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달싹거리는데 못마땅한 기색이 점점 짙어졌다.
“인간 마음은 갈대라더니.”
“…….”
“나는 그저 시구에 쓰는 관용적 표현인 줄로만 알았지. 진짜일 줄은 몰랐어. 내 체취가 좋다고 달려들 땐 언제고.”
“……잠깐만요, 도련님. 잠깐만. 이건 나중에 마저 얘기하고 나가요. 오늘 밤에 산책하러 가기 싫으면 더 말씀하시고요.”
다행히 아드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아이고, 머리야. 점점 이상하게 구는 그 때문에 내가 도리어 두통이 생길 지경이다. 오늘 밤에 산책하면서 얘기 좀 해 봐야지.
내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아드리안이 눈치 좋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피아노 가르쳐 준다고 소매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 소매를 내리던 중, 지난번에 깃털 칼을 주면서 보여 주었던 흉터가 눈에 띄었다. 팔꿈치로부터 손바닥까지 나뭇가지처럼 길게 뻗어 있는데, 가만 보니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다. 악마였을 때 생긴 흉터가 인간의 몸인데도 나타나는구나.
“힐다,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정말 방 옮길 생각 없어?”
검은 테일 코트를 걸치며 그가 다시 물었다. 늘 셔츠 차림이다가 정장풍으로 차려입자 제법 태가 나서 감탄하고 있었는데, 저 말을 들으니 머리가 다시 아프려고 했다. 너 때문에 흥이 다 깨져 버렸으니까 책임져.
“네에, 네. 마지막으로 몇 번 물으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제 대답은 똑같아요. 옮길 생각 없어요. 진짜요.”
“내 베개 하나 준대도?”
아, 이건 좀 솔깃한데.
사상 최고로 혹했지만, 야간 연장 근무에 관한 나쁜 기억을 떠올리며 겨우 참아 냈다. 베개조차 먹히지 않자 아드리안은 진지한 고민에 빠진 듯 보였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일주일 전에 생각한 대로 얇은 모포를 챙겨 들었다.
봄바람이 차가울까 봐 모포까지 챙기다니. 병약한 주인님을 모시고 살다 보니 평생 신경 쓰고 산 적 없는 것들이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기특한 하인이 또 어디 있게요. 그러고 보면 인센티브가 마냥 과한 것 같지만은 않다.
“아드리안! 왔구나!”
정원 앞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던 백작 부인이 크게 반기며 다가왔다. 그녀 특유의 천진난만한 미소 덕분일까. 언뜻 보기엔 내 또래의 아이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미모였다. 중앙을 길게 터놓은 치마가 발목 근처에서 나풀거렸다. 아드리안, 그리고 아드리안 판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미인이 나란히 있으니 눈이 홀린다.
나뿐만 아니라 마침 들어온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드레스가 예쁘지 않냐며 마차에서 빙그르르 돌던 귀족 아가씨조차 둘을 보더니 멈칫했다. 정말이지 주변 사람 기죽이는 미모들이군.
“힐다도 같이 왔구나. 오늘 내내 손님이 많아 고될 텐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쉬어가며 하렴.”
귀족가 사모님이 대놓고 농땡이 피우라고 시켰다. 그러잖아도 가끔 농땡이 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합법적인 근거를 대주시다니 자비롭기도 하셔라. 속마음과 달리 내가 공손히 인사하자 프리실라가 여린 붓꽃처럼 웃었다.
백작 부인은 주인공의 팔짱을 끼고 생일 파티가 마련된 정원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가면서도 아드리안은 날 보고 애탄 눈빛을 보냈다. 그 의미야 뻔했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너무 오냐오냐하면 버릇 나빠진다.
“아버님, 저분이 그분이신가 봅니다. 어서 가 보아요. 어서요.”
막 마차에서 내린 또 다른 귀족 아가씨가 방방 뛰며 아버지를 재촉했고, 오빠로 보이는 또 다른 남자가 “그까짓 팔츠그라프 가가 뭐라고.”라고 중얼거리며 시큰둥하게 저택을 돌아보고 있었다.
연이어 들어오는 마차들 죄다 팔츠그라프 가의 마차에 비견될 만큼 대단히 값비싸 보인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비슷한 지위의 귀족들만 불러모았나 보다. 여자들이 유독 많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힐다, 이쪽이다. 이쪽! 어서 와서 식기를 나르렴!”
멀리서 손짓하는 레티샤를 보자 정신이 들었다. 잔소리 폭격이라도 맞을까 싶어서 얼른 뛰어갔는데 새삼 생일 파티 규모에 놀라고 말았다. 아드리안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몇만 골드씩 쓰는데 이번에는 손님들을 대거로 초대하는 자리니 당연하긴 했다.
“혹시 식사가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빨리빨리 움직이도록!”
부엌에서 곧 식사가 나오므로 테이블을 빠르게 세팅해야 했다. 정원 곳곳에서 하하 호호 웃으며 구경 다니는 손님들의 우아한 식사를 위해 모든 하인이 총출동했다. 나 또한 그중 하나로, 다른 하인이 종류별로 식기를 담아 주면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세팅하는 역할이었다. 점심 식사 한번 할 뿐인데 챙길 게 왜 이렇게 많담. 1인당 식기를 대체 몇 종류를 쓰는지 모르겠다.
“힐다, 이쪽도! 이쪽도 놔줘!”
“네, 네!”
생일 파티라기에 손님 좀 오나 보다, 다른 하인들 많으니 서서 시간 좀 보내다 보면 끝나겠지.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는데 이런 미친, 개바쁘잖아! 결혼식 세 개가 동시에 진행되는 홀에서 일하는 웨이터도 이만큼 바쁘진 않을 거다. 이 정도면 가산 수당으로 두 배는 더 받아야 한다.
내가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이 아드리안도 백작 부인을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었는데, 그동안 사교계에 얼굴을 내비치는 일이 없었던 만큼 오늘 하루 만에 온갖 인연을 만들어 주려는 것 같았다. 멋들어진 옷차림의 귀족들이 아드리안 주변을 공연히 서성거리거나 대화의 자리를 만들어 보려 발을 동동 굴리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아드리안이 아무리 섬세한 귀공자처럼 생겨도 주변에 떠다니는 저 검은 기운이 보이지 않는 건가? ‘접근하지 마’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데.
거기다 미처 보내지 못했다며 마차에 싣고 온 선물이 정원 한편에 쌓여 있었는데, 벌써 내 허리만큼 높다. 귀족들 간에 주고받는 선물이라 그런지 규모 한번 어마어마하다. 이것들을 언제 다 버리냐며 미간 찌푸릴 아드리안의 모습이 선했다.
잠깐 여유가 생긴 김에 둘러보다가 깨달은 건데, 이번에는 참석하겠다던 팔츠그라프 백작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크게 연 생일 파티라면서. 아들 생일에 만년필 하나 던져 주고 얼굴 한번 안 내비치네. 정말 무정한 아빠가 아닐 수 없다.
“힐다, 어서 세팅 끝내고 저쪽에 쌓인 보면대를 설치하렴.”
내가 남들보다 유독 바쁜 이유를 깨달았다. 레티샤가 준 업무를 끝내고 잠깐 쉴라치면 올리비아가 귀신같이 나타나 어마어마한 양의 일을 맡기고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마침 할 일 끝내고 쉬고 있는 하인들도 있는데 왜 굳이 날 시키지? 의아해하며 올리비아를 봤지만, 침착하고 단정하게 정리된 그녀의 얼굴에선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한두 번은 몰라도 이 이상은 못 참아!
“죄송하지만 보면대 설치는 직접 하셔야겠어요.”
“……뭐라고?”
“저는 아드리안 도련님의 직속 하인이에요. 제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건 직속 상관인 도련님, 그리고 사용인들을 통솔하시는 레티샤 님뿐이죠. 제게 업무를 맡기려거든 그 두 분을 통해서 해 주세요. 올리비아 님은 제게 직접 지시할 아무 권한이 없으시니까요.”
올리비아는 백작 부인의 직속, 나는 아드리안의 직속이니 엄연히 말하면 타 부서라고 볼 수 있었다. 원래 타 부서 사람에게 업무를 시킬 땐 팀장을 통하는 게 순서인 법. 딱히 내 말이 틀린 건 아니라 올리비아도 딱히 반박하지 못했다.
“어머나, 힐다. 손님이 많아 정신이 없지?”
그때였다. 우리 둘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백작 부인이 불쑥 나타났다. 그녀는 급하게 예의를 차리려는 나를 붙잡으며 다정하게 시선을 맞추었다.
“많이 고된 건 안단다. 하지만 오늘만 올리비아의 부탁도 함께 들어주면 안 되겠니? 네가 손이 빠르고 일을 잘하는 걸 알아서, 특별히 내가 말해 두었거든. 바쁘면 네게 부탁해 보라고 말이야. 쉬엄쉬엄하라고 말해 놓고는 미안하구나.”
“…….”
“나를 봐서라도, 응? 대신 내일은 특별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쉴 수 있도록 아드리안에게 말해 두마.”
아드리안과 꼭 닮은 얼굴로 미안함을 뚝뚝 떨어뜨리며 부탁하는데……. 으으,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백작 부인이 무척 고마워하며 자리를 뜨자 올리비아가 기다렸다는 듯 보면대를 설치하라고 다시 지시했다. 그녀가 내 상전인 양 구는 건 짜증 났지만, 사회생활이 다 이런 거지. 작은 일 하나하나에 감정 섞고 화내면 끝이 없는 법이다.
테이블 맞은편에 쌓여 있는 보면대를 펴고 세우고 고정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됐다. 손님들이 테이블에 단란하게 둘러앉아 식사하는 동안에도 낑낑대며 보면대를 설치했다. 내가 중노동 한복판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에 아드리안의 염려 섞인 시선이 계속 따라왔다. 정작 본인이 더 피곤해 보이는데, 걱정이다.
“힐다, 힐다! 이건 내가 마저 할 테니까 뒤로 가서 좀 쉬어.”
들고 있던 보면대를 누군가 휙 낚아챘다.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들어 보니 에밀리가 햇살처럼 웃고 있었다.
“누가 보기 전에 얼른. 정원 뒤편에 가서 쉬고 있어. 누가 너 어디 갔냐고 물으면 적당히 둘러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냐, 차라리 같이하자. 이거 혼자 다 못 해.”
“넌 지금까지 혼자 하고 있었잖아. 좀 쉬고 와. 그러다 몸살 나겠어. 남들은 다들 뒤로 가서 적당히 쉬면서 하는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올리비아까지 쪼아대는 통에 조금 서러웠는데, 에밀리에게서만은 날 위해 주는 진심이 느껴져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힘들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이번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에밀리…….”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어서 일어나서 숨어. 누가 보기 전에, 응? 빨리 가.”
팔꿈치로 쿡 찌르며 재촉한다. 하던 일을 맡겨 두고 혼자 튀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다 이해한다는 듯 에밀리가 활짝 웃어 줘서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흑흑, 돈 열심히 모아서 에밀리 전설 메이드복 사 줘야지.
“으으, 찌뿌둥해.”
다른 하인들이 없어 조용하지만, 아드리안은 볼 수 있는 정원에 숨어들었다. 사람이 북적거리는데 돌아다니느라 피로감이 몰려오긴 했지만, 전설 아이템이 체력을 올려 준 덕분인지 주저앉아 쉴 정도는 아니었다.
팔과 다리를 길게 늘이며 적당히 몸을 푼 다음, 다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보았다.
손님들 사이에서도 유독 아드리안이 눈에 띈다.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친 그는 진심으로 피곤해 보였다.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기가 쭉쭉 빨려 나가는 게 보였다. 스트레스성 두통과 빈혈, 어지럼증, 저혈압이 위험 수위라는 알림이 이어지는 걸 보니,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기 위해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모양이다.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자 하인들이 교대로 배를 채울 시간이 다가왔다. 내 차례에 대충 주워 먹고 다시 와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으니 어느새 5시가 훌쩍 넘어 버렸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아드리안은 ‘쉬고 싶어, 힐다’라고 눈빛으로 속삭였다. 애처롭기도 하지.
“바쁜 시간 내어 참석해 주신 여러분, 기쁜 자리를 더욱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아드리안. 어서 나와서 손님들께 감사의 인사 한마디 해야지.”
입가심용 차를 따르다 말고 박수 소리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좌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백작 부인이 아드리안을 불러내고 있었다. 손님 중 몇몇이 엉덩이를 슬쩍 들어 아드리안을 훔쳐보았다. 백작 부인의 권유를 거절할 수 없었던지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나도 찻주전자를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 시시각각 안색이 시체처럼 변해 가는데 백작 부인은 무슨 생각인 걸까. 아드리안 몸 안 좋은 건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참석해 줘서 고맙다는 의례적인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였다. 아드리안을 쭉 훑어내린 시선이 근처 잔디에 머물렀다. 정확히는 잔디 사이에 숨겨진 은색 장치, 스프링클러를 응시했다.
차칵.
아드리안의 목소리, 손님들의 수군거림, 바람에 잔디가 휩쓸리는 소리. 다양하게 섞인 소음 속에서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유독 선명히 들렸다.
내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저게 갑자기 왜…… 돌아가지?
차칵, 차칵.
기다렸다는 듯 스프링클러가 두 개 더 돌아갔다.
“……조심히 돌아가시길…….”
콰아아!
내가 봤던, 아니, 그보다 더 거센 물 폭탄이 터졌다. 손님들의 비명이 아드리안의 목소리를 순식간에 묻어 버렸다. 스프링클러가 세 개가 동시에 터진 덕에 멀리 있던 내 위로도 비가 길게 내렸다.
보석 가루를 뿌려 놓은 듯 허공에서 반짝거리는 물방울……. 언뜻 보기엔 평범한 물과 다를 바 없지만, 난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맙소사, 이거 성수잖아.
아드리안!
그를 떠올리기 전에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모포를 집어 들고 우왕좌왕하는 손님들 사이를 헤치고 뛰어갔다. 어깨를 험하게 밀치고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그에게 다가가는 게 쉽지 않았다.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부딪히고 허우적거리는 인파를 겨우 뚫고 나가자, 정원 중앙에 주저앉은 아드리안과 그를 멀찍이서 지켜보는 백작 부인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흠뻑 젖은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뽀얀 볼 위로 흘러내리는 액체가 성수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잘 만들어진 미소를 지운 그녀가 처음 봤을 때의 광기로 방방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전부 봤지! 내 아들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사는 저것이 뭔지 봤지!”
콰아아. 스프링클러는 아직 거대한 소리를 내며 성수를 쏟아 내고 있었다. 백작 부인의 웃음소리가 빗줄기를 찢어 낼 듯 울렸다.
아드리안에게 곧장 뛰어갔다. 손에 들고 있던 모포를 넓게 펼쳐서, 주저앉아 웅크린 그 위에 덮어 주었다. 누구 본 사람은 없겠지? 물 폭탄을 맞아 쓰러진 거로 생각하겠지? 다행히 손님들은 물벼락을 피해 도망치느라 이쪽을 살필 겨를이 없어 보였다.
“드디어, 하하! 내 아이의 껍데기를 둘러쓴 게 죽는구나! 하하! 죽일 거라고 했지! 내가! 죽일 거라고 분명히 말했지! 죽어! 악마 새끼, 죽어서 지옥에나 처박혀!”
기뻐하면서, 울면서, 환희에 차서, 비참함에 함몰되어 비명 지른다. 어흐흑, 어흐흐흑. 허덕거리는 웃음소리는 얼핏 흐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와 지독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보랏빛 드레스가 푹 젖은 채 거칠게 나부낀다.
인두처럼 달궈진 눈으로 아드리안을 노려보았다. 손끝이 길게 빛나고 있었다.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새파란 날을 세운 단검이었다.
반사적으로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다. ‘맹독의 날’ 손잡이가 떨리는 손바닥에 차갑게 스며들었다. 놀라울 만큼 냉정해져서 그녀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달려들면 얼마든지 맞받아칠 생각이었지만, 높게 치켜든 검날이 돌연 반대쪽으로 빙글 돌아갔다. 검 끝은 아드리안을 향해 있지 않았다.
“하하, 하, 하하…… 그리고 나도…….”
성수에 젖은 어깨가 힘없이 들썩였다. 살아가든, 견디든, 비난하든, 미워하든……. 뭐든 해낼 의지를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칼날이 은색 잔상을 그리며 허공을 찢었다. 품위 넘치게 살랑거리던 드레스 위로 핏물이 튀었다. 한 손으로만 쥐고 있던 손잡이 위에 다른 쪽 손을 마저 얹는다.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멈춘 칼날을, 손잡이까지 죄다 집어삼키려는 듯 밀어 넣는다. 연약한 몸으로 내는 힘이 악착같았다. 입가로 흐르는 피 위로 성수가 흘러내리며 붉게 번져 갔다.
“마님, 마님!”
천천히 기울어지는 몸을 올리비아가 황급히 뛰어와서 받쳐 들었다. 백작 부인의 자살이라는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지만, 지금 저쪽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얼른 고개를 숙여 모포 아래로 속삭였다.
“도련님. 저예요. 제 목소리 들리세요?”
“아, 아으…… 으…….”
“여기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야 해요. 도련님. 제가 모포로 잘 가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성수로 젖어 있긴 하지만 가릴 만한 게 이것뿐이라…… 일어날 수 있겠어요?”
대체 얼마나 다친 걸까. 아무리 불러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니까.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고 모포 위를 더듬어 잡았다. 상체를 일으킬 때까지만 해도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었는데, 있는 힘껏 부축해 주자 그나마 한 걸음씩 겨우 뗄 수 있는 정도였다.
“도련님, 조금만 참으세요. 방에 금방 갈 테니까요. 얼른 가서 치료해요. 약 많으니까, 아파도 조금만 참아요…….”
조금만 참아. 조금만. 주문을 외듯 미친 듯이 중얼거리며 그를 거의 들다시피 해서 저택으로 갔다. 조용히 빠져나가는 우리를 신경 쓸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은 없었던 데다, 아드리안과 산책하며 익숙해진 덕분에 외진 길만 골라 저택으로 몰래 돌아갈 수 있었다.
탕, 찰칵. 아드리안 방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단단히 잠갔다. 성수에 쫄딱 젖었기 때문인지 그의 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침대로 걸어가다 말고 기어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그가 침대 옆에라도 기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바쁜 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수건 가져왔어요. 어서 닦아요. 아니지, 모포부터…….”
수건을 있는 대로 품에 쓸어 담은 채 돌아왔다. 성수부터 닦아 내야겠다는 생각에 모포를 끌어 내리려는데, 안에서 튀어나온 손이 내 손을 거세게 쳐 냈다. 아픔을 느낄 새 없이 눈이 크게 뜨였다.
손이, 손이…….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새빨개진 살갗 위로 성수가 흘러내리며 붉은 줄을 남기고 있었다. 치이익. 살갗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손끝에서부터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반쯤 녹아 버린 손톱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살점이 검게 변해 잿가루처럼 흩날렸다.
성수가 그의 몸을 태우고, 녹이고 있었다. 무너뜨리고 부수고…….
소리 없는 비명이 터졌다. 아, 아아. 안 돼.
「아드리안의 피부 전층이 타들어 가고 있습니다.」
「피하의 근육, 힘줄, 신경이 손상되고 있습니다.」
「체표면적의 62% 화상을 입었습니다.」
「뼈가 손상되고 통증과 감각이 사라집니다.」
「위험! 아드리안의 생명력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아, 으으…… 아, 아윽…….”
모포를 둘러쓴 채 아드리안이 뒤로 질질 물러났다. 그러다 협탁에 턱 부딪혀, 침대 사이 모서리에 웅크렸다. 또다시 움직이지 않는다. 가느다란 신음만이 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아드리안은 웬만해서 소리 내서 아파하는 일이 없었다. 시스템에서 아프다는 알림을 쉴 새 없이 띄워도 정작 그는 신음 한번 흘린 적이 없었다. 그나마 아프다는 티가 나는 건 기침 소리와 창백한 낯빛 정도여서, 시스템 버그가 아닌지 몇 번이나 의심하다가 말곤 했다.
치이익. 모포에서 뚝뚝 떨어진 성수가 발목을 태우며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물집이 잡히고 터지며 진물이 질질 흘러나왔다. 검게 변한 살갗을 보자 내 눈이 다 따가웠다. 그는 지금 산 채로 불타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의사…….
아니다. 이건 의사를 불러서 될 일이 아니야.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속이 울렁거렸다.
“도련님, 죽는 거…… 죽는, 거…… 아니죠? 아니, 아니죠……?”
「체표면적의 71% 화상을 입었습니다.」
희미한 희망이 떠올랐다가 금방 꺼져 버렸다. 입술이 벌벌 떨렸다. 명색이 사탄이라며. 악마라며. 부잣집 도련님 몸에 악마가 들렸는데 쉽게 죽겠냐고 으스대던 때는 언제고 설마 이대로 죽는 건 아니지?
모포를…… 성수에 젖은 모포부터 거둬야…….
얼음물을 통째로 뒤집어쓴 것처럼 이가 딱딱 부딪혔다. 무릎을 질질 끌어 그에게 가까이 가서 모포를 집었다. 검게 타들어 간 손이 또다시 튀어나와 내 손을 쳐 냈다. 그러고는 허공에 우뚝. 느릿느릿 다가온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치이익, 치이익. 쉴 새 없이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가는 손이 내 어깨를 툭 건드린다. 가볍게 들러붙었다가 거미처럼 목으로 기어 내려갔다.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서 생명력을 탐하는 게걸스러운 호흡이 느껴졌다.
「아드리안의 살의가 오릅니다.」
「아드리안을 설득하여 살의를 낮추세요.」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죽습니다.」
「아드리안의 살의 72%」
흰 글씨가 도망치라고 강력하게 경고했지만, 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손만 응시했다. 살점이 녹아 사라지며 손등뼈가 훤히 드러난 손. 그 손을 잡아 주고 싶은데, 내 손도 성수에 젖어 있어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닿으면 더 아플 테니까.
「아드리안의 살의 79%」
점차 올라가는 살의가 내게 도망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래, 도망쳐야지. 날 죽이려 한다는데 당연히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그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내가 물러서는 걸 보고 또다시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
「아드리안의 살의 92%」
검은 손이 내 목을 감싼다. 이대로 조르려는 건지 손가락 끝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내가 미쳤나? 왜 도망가지 않아? 진짜 죽을 수도 있어. 다급하고 절박하게 헐떡이는 숨결이 느껴졌다. 그러다…… 떨어진다. 어깨를 거세게 밀어내고서 불에 덴 듯 화드득 물러났다.
예상치 못하게 떠밀리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목을 조르려던 선명한 살의가 등줄기를 긁으며 사라졌다. 숨이 헐떡거리며 치고 올라왔다.
“가.”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내게서 멀어졌다. 더 멀어질 수 없는데도 멀어졌다. 절벽 끝까지 떠밀렸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이 저미도록 아팠다.
“가 버려, 제발 가. 너한테…… 손대고 싶지 않아. 네 무서워하는 얼굴도…… 보기 싫어. 나는, 너…… 식량으로 생각 안 해.”
「아드리안의 살의가 내려갑니다.」
「아드리안의 살의 0%」
「당신은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생존 상태로 진입합니다.」
“내가 널 죽이려 들면…… 찌르라고 했잖아. 찌르라고 준 거 있잖아.”
“…….”
“방금 너에게 손댔으니…… 힐다, 그걸로 날 찔러. 찔러 죽여 버려.”
모포 사이에서 죽어 가는 눈이 보였다. 물기에 젖어 들어가는, 푸른 호수 같은 눈이었다.
눈가가 시큰거리며 달아올랐다. 백작 부인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심 한없이 들떴던 그 얼굴과 눈빛이 떠올랐다. 그렇게 기대했는데.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행복해하는 게 다 보였는데.
피를 토하듯 후회했다. 백작 부인과 올리비아에게서 이상함을 느꼈을 때 더 적극적으로 의심해야 했다. 나만이 아드리안을 지킬 수 있었다면 더 철저히 경계했어야 했는데. 어머니와 다시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나 커진 나머지 단서를 전부 놓치고 말았다.
햇살 속에 서 있던 그가 떠올랐다.
큰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니다. 단지 행복하기를 바랐다. 적어도 고통 속에서 살지 않기를 바랐다. 어두컴컴한 그늘 속으로 떠밀려 혼자 아파하지 말고 햇빛 아래 온전히 섰으면 했다. 하지만 세상은 계속 그를 고독하고 아프게만 만든다.
그렇다면 내가 그를 위해 움직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겠지.
세상이 그를 대하는 방식이 철저하게 잘못되어 있다면, 나만은 그 곁에 서야지. 외로운 손을 잡아 줘야지. 세상 모든 사람이 등 돌려도 나 하나쯤은.
“……도련님, 저 믿죠?”
“…….”
“저도 도련님 믿어요.”
그러니까 죽지 마.
“열쇠는 제가 가지고 갈게요. 누가 문 두드려도 절대 열어 주시면 안 돼요.”
“…….”
“금방 돌아올 테니 조금만 버텨요.”
나만이 유일하게 그를 도울 수 있다면, 선택을 망설여서는 안 된다. 내가 결심하지 않으면 죽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그를 살릴 길이 없다. 지금으로선 도저히 살릴 길이…….
살릴 길이 없다면 만들 수밖에.
흐려졌던 시야가 깨끗해졌다. 나는 웅크린 아드리안 앞에 수건을 밀어 놓고 일어났다. 힘이 풀려 후들거리던 다리가 어느새 단단해져 있었다. 다소 홀린 듯이 손을 움직여 부관 리스트를 띄우고 연달아 ‘호출’을 눌렀다.
「부관 ‘토르벤’이 호출되었습니다.」
「부관 ‘패트릭’이 호출되었습니다.」
「부관 ‘노버트’가 호출되었습니다.」
「부관 ‘리산드르’가 호출되었습니다.」
나눠 짊어질 수 있다면 부디,
「메인 퀘스트 - 살인이 재시작되었습니다.」
그의 고통을, 나에게로.
“도련님.”
“…….”
“도련님, 일어나세요.”
“…….”
“정신이 드세요?”
조심스럽게 아드리안을 흔들어 깨웠다. 파란 눈이 반짝 뜨이며 곧장 나를 찾아들었다. 다행이다. 눈을 떴어. 늘 호수처럼 고요하던 눈이 격랑에 일렁이고 있었다. 불안으로 흔들리는 눈을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많이 아프죠? 이제 괜찮아요.”
“…….”
“이 칼로 마무리만 하시면 돼요. 독이 퍼져서 이미 움직이지도 못하거든요.”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손에 칼자루를 쥐여 주고, 바로 옆에 준비해 놓은 제물의 목을 내리 찔렀다. 피가 솟구쳐 우리 둘의 손을 흠뻑 적셨지만, 이곳은 산속인 데다 날이 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마른 수건 사이에 초점 없는 눈이 나를 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우선 한 명.
“이게 두 명째예요.”
“…….”
목에 구멍이 뚫린 사체는 옆으로 밀어내고, 또 다른 제물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아드리안 옆으로 질질 끌고 왔다.
“……힐다, 이것들은 다 어디서…….”
“이러다 독으로 먼저 죽겠어요. 얼른 죽이세요.”
아드리안은 처음 내가 업어서 내려놓은 그대로, 멍하니 나무에 기대 있었다. 나는 또다시 그의 손에 단단히 칼자루를 쥐여 주고 제물의 목을 찔렀다. 습한 공기 속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확 번졌다. 두 명째까지 성공이다.
“힐다, 너…….”
“잠깐만요. 도련님.”
나는 옆에 밀어 놓은 ‘맹독의 날’을 들어 땅을 향해 내리찍었다. 사실 땅이 아니라 세 번째로 준비해 둔 제물의 손이었다. 독에 취해 죽어 가는 중에도 무슨 속셈인지 아드리안에게 슬금슬금 기어오기에, 칼로 찍어 버렸다. 손등이 반으로 갈린 채 부들거리던 손이 툭 떨어졌다.
이런, 죽여 버렸네.
“죄송해요, 도련님. 도련님이 죽이도록 해야 했는데.”
「메인 퀘스트 - 살인을 완료했습니다.」
“사실 뒤에서 저 제물이 기어오고 있었거든요. 으음, 적어도 셋은 죽였어야 했는데 둘뿐이네요. 하나 더 오는 중이니까 괜찮아요. 오늘 세 명은 채울 수 있겠네요.”
나는 맹독의 날을 칼집에 조심스레 넣어 두었다. 이 단검을 이용하면 딱히 살인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관을 섭외하는 건 로지가, 그들을 특정 장소로 불러내는 건 ‘부관 호출’ 스킬이 해 주니 어려운 일이 없었다.
물론 그들이 저지른 범죄가 무엇인지 먼저 묻는 건 잊지 않았다. 동업자로서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범죄 행각들을 미주알고주알 읊어 댔기 때문에 판단은 쉬웠다. 그가 파렴치한 범죄자에다 법망을 피하며 살아왔다면 주저 없이 ‘맹독의 날’로 찔렀다. 찌르는 데 성공하면 오른쪽에 독이 퍼지는 시간이 떴다. 그렇게 비슷한 시간에 모인 부관 세 명을 차례로 찌르고, 독으로 죽기 전에 아드리안을 업어왔다. 제드 하나 때려죽였을 때보다 훨씬 수월한 진행이었다.
“저번에 말씀드렸죠? 나쁜 인간들이 저 좋아한다고. 죽어도 싼 인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참에 다 나아 버려요. 여기로 얼마든지 불러올 수 있으니까…….”
이 사체들은 다 어떻게 처리하지. 고민에 빠진 채 중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아드리안이 내게 팔을 뻗었다. 뒷덜미를 감싸 당긴다. 몸이 기울어진다 싶었는데 어느새 그의 품이었다. 차가운 공기에 어울리지 않는 상냥한 따뜻함이었다.
“그만해, 힐다. 이제 그만해도 돼. 대신 울지 마. 내가 방심해 버린 탓이야. 전부 내 탓이니까 제발…… 울지 마.”
운다니? 난 울고 있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 안 나는데 울지 말라니. 나는 인상 찌푸리며 품에서 벗어나려 바르작거렸다.
“저 안 울어요.”
“아냐, 너 울고 있어.”
등을 조이는 힘이 강해져서 가슴이 짓눌렸다. 머리를 헤집듯 쓰다듬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나 안 우는데. 이따금 흐느끼는 소리만 잇새에서 새어 나올 뿐, 눈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울지 마. 네가 우니까 병이 더 심해져. 아파. 너무 아파.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도련님이 죽어 갔잖아요.”
안 운다는데 자꾸 왜 그래요. 내 생각과 달리 원망으로 얼룩진 목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도련님이, 죽어 가고 있었어요.”
“…….”
“그래서 할 수밖에 없었어. 정말 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를 향해, 또는 누군가를 향해 멍하니 변명했다.
“죽어 가고 있어서, 도련님이…….”
“진정해. 나 안 죽었어. 네가 살렸잖아. 네가 날…… 이번에도 살렸잖아.”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목덜미에 코를 파묻은 꼴이 되었지만, 분명 아드리안의 살 냄새였다. 모포 대신 덮어 놓은 수건은 뒤에 떨어져 있었다.
목덜미, 귀, 볼, 손……. 시선으로 더듬어 내렸다. 군데군데 붉은 물집이 잡히고 새까맣게 타들어 가던 피부색이 돌아온 게 보였다. 길게 쭉 뻗은 손가락, 곱게 깎인 손톱. 기대오는 무게는 진짜였다.
살았어.
숨이 몰아서 터졌다. 아드리안이…… 살았어.
“살았어요?”
“응.”
“진짜…… 살았어요?”
힘찬 심장박동 소리가 쿵쿵거리며 내 몸을 지배했다. 리듬을 잃어버린 채 제멋대로 뛰던 내 심장을 진정시키고, 느릿하게 서로 박자를 맞춰 간다.
“응. 난 살아 있어, 힐다.”
분명한 목소리로 그가 속삭인다. 살아 있어. 다시 한번 절절하게 깨닫는다. 화상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 살결이 부드럽다. 아까와 달리 온기로 가득한 그의 몸을 쓸고, 또 쓸었다. 지금은 그저 그가 살아난 데에 감사하고 싶었다.
순간 눈물이 울컥 솟아올랐다. 단단하게 막고 있던 둑이 무너진 듯 막을 새 없이 쏟아졌다.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에 도트 그래픽이 입혀졌다고 생각했던 그의 손과 품이 인간적이고 따뜻해서. 내 사람을 위해 남을 죽이는 데 서슴지 않게 된 손이 징그럽게 느껴져서.
그다음은 사실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품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린 것 같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방이었으며, 눈 뜬 나를 반겨 주는 아드리안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 일이 들키면 어떻게 될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아드리안은 높은 지위 덕분에 살아남고 나 혼자 죽을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우리 둘 다 목이 잘려 어딘가에 나란히 걸릴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리 두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마자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