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가는 사랑이 곱다고 오는 사랑도 고우리란 법은 없다.
이럴 수는 없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절망에 휩싸여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사실 게임에서 까막눈이라는 걸 알고부터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 왔다. 물론 숙면 스킬 버프로 효율을 높여 반쯤 날로 먹긴 했지만, 책상에 앉아 집중해서 봐야 한다는 건 똑같다. 직장인이 퇴근 후에 책상에 앉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 사람은 다 알잖아.
어린애 걸음마 배우듯 기본 문자부터 시작해 단어를 하나씩 외워가던 차였다. 비록 뜻은 모르더라도 단어와 문장을 익히고 발음하게 됐을 때 얼마나 뿌듯했는데.
“그 마음을…… 이렇게 엿 먹여?”
방금 무료 뽑기에서 나온 아이템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번역기였다. 사용하기만 하면 게임 내 모든 문자를 읽게 되는 마법의 아이템.
이런 게 있었으면 처음 게임 들어왔을 때부터 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걸 왜 이제야 주는 거냐고! 농락하냐! 허탈하고 열 받은 나머지 소리 없는 비명을 마구 질렀다.
이번에 내가 뽑은 아이템은 다음과 같았다.
「번역기
등급 : 희귀
특징 : 사용 시 게임 내 언어를 유저가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 줌」
「지푸라기
등급 : 고급
특징 : 말린 볏단. 꼬아서 밧줄을 만들 수 있음」
「맹독의 날
등급 : 희귀
특징 : 날에 맹독이 발린 칼. 내구도가 떨어지지 않는 강철 소재」
“후아, 후아, 후아…….”
온 힘을 다해 한참 허공 주먹질을 하다 보니 금세 숨이 차올랐다. 됐다, 됐어. 망겜 상대로 화내 봐야 내 입만 아프지. 망겜, 똥망겜, 이러니 유저가 없지……. 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뽑기에서 나온 아이템들을 다시 쭉 둘러보았다.
우선 번역기…… 는 열 받고 지푸라기는 어디 써야 할지 몰라 가방에 처박아 넣었다. 내구도가 떨어지지 않는 칼이라니, 제드 죽일 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손가락이라도 베이면 큰일 나니 잘 보관해 둬야겠다. 맹독의 날에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가죽 칼집에 넣고 가방을 슬쩍 들여다봤다.
사흘마다 꼬박꼬박 뽑기를 한 덕에, 최대치로 늘어난 내 가방에도 아이템이 꽤 쌓여 가고 있었다. 사실 사흘 전 뽑기에서 악마의 첫 번째, 두 번째, 네 번째 예술혼이 나란히 나왔는데, 아무리 확률업이라도 영웅 아이템이 잘 나오는 게 운이 너무 좋다 싶으면서도 동시에 운이 안 좋다고 느꼈다. 그도 그럴 게, 세 번째와 일곱 번째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채로 네 번째 예술혼만 벌써 세 개째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웅템이라도 같은 부위만 계속 쌓이면 소용이 없잖아요! 예전에 장비 뽑기 할 때, 내가 필요한 건 장갑인데 뽑기에선 모자만 나오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결국 서비스 종료할 때까지 모자만 스무 개 쌓이고 장갑은 0개였는데, 이번에도 그런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설마 그러겠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스킬창을 눌렀다. 20레벨로 오르면서 스킬이 하나 추가됐는데, 살인 미수를 저지르고 워낙 정신이 없어 여태껏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New’ 아이콘이 붙은 ‘발자국 추적’을 누르자 언제나처럼 스킬 설명창이 떴다.
「발자국 추적
개방 조건 : Lv 20
지속 시간 : 2시간
재사용 대기 시간 : 24시간
적을 쫓아갈 일이 생겼나요? 아니면 의심스러운 사람의 뒤를 밟을 일이 생겼나요? ‘발자국 추적’은 그런 당신에게 큰 도움을 줄 겁니다. 스킬 사용 후 추적 대상을 정하면, 사용 시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 12시간의 경로가 나타나며 이후 12시간 동안은 움직인 대로 남겨져 쫓아갈 수 있게 됩니다. 대상이 발자국을 남긴 지 오래될수록 색이 옅어집니다.
‘발자국 추적’과 함께라면 당신은 어떤 표적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의. 사람별로 고유한 발자국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자국은 겹칠 수 있습니다.」
오, 그러니까 내가 사람을 콕 집으면 행적을 전부 알 수 있다는 거네. 이 스킬도 마찬가지로 제드랑 붙을 때 있었으면 유용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싸우다 중간에 도망쳐 버린 그를 쫓아가다가 도리어 공격당했으니까.
그런 면에서 시스템은 점점 살인에 쓸 만한 스킬과 아이템을 주고 있는 셈이었다. 왠지 메인 퀘스트를 깨라고 응원해 주는 느낌이란 말이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인이 메인 퀘스트인 건 너무하잖아. 죽여도 싼 놈을 건드리고도 이렇게 죄책감이 드는데, 매번 꿈에 나오는 바람에 ‘숙면’ 스킬 없이는 잠들지 못하게 됐는데, 그 짓을 또 하라고?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평생 게임에서 못 나갈지도 몰라.
나는 한껏 어두워진 얼굴로 스킬창을 다시 열었다. 폭행과 살인 미수 덕분에 쌓인 악명 포인트로 스킬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딱히 눈에 띄는 스킬이 없어 ‘투시자의 눈’에 죄다 투자했더니 새로운 옵션이 생겼다.
「스킬 강화 옵션 : 사람별로 악의의 색이 달라집니다.」
‘투시자의 눈’을 쓰면 사람의 악의를 붉은 연기로 바꿔 볼 수 있는데, 이젠 악의의 소유자가 누구 것인지 구분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드리안의 악의를 읽어야 할 일이 더는 없겠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꽤 쓸모 있을 것 같다.
이제 더 정리할 건 없겠지? 나는 시스템 창을 한번 쭉 돌아본 후 가방을 챙겨서 방을 나섰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사용할 스킬이나 강화 옵션, 얻는 아이템이 많아지니 시스템을 돌아보는 시간도 길어지는 것 같다. 앞으론 짬 날 때마다 부지런히 정리해 놔야지.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를 나와 아침 햇살을 맞으며 기지개를 켰다. 날씨 끝내주게 좋다. 이런 날은 고기 싸 들고 소풍 가는 게 최고인데. 배 두둑하게 채우고 강바람 맞으며 자전거 타면 그만큼 기분 좋을 수가 없거든. 아드리안도 참 좋아할 것 같은데. 워낙 몸이 약하니까 내 자전거 뒷자리에 태워 주는 게 좋겠다. 게임에 자전거가 없는 게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개발자 양반, 자전거 하나 만들어서 업데이트 좀 해 줘요. 우리 병약한 악마 태우고 다니게.
“어머, 저기 있다. 힐다, 힐다!”
세상 쓸데없는 생각에 잠긴 채 걸어가고 있는데, 정원 쪽에서 에밀리 목소리가 들렸다. ‘앗, 에밀리다!’ 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에밀리의 손을 잡고 꺄르륵거리며 오는 여자아이를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니, 저게 뭐야. 로지잖아.
“에, 에밀리. 그 아이는 어떻게……?”
“으응, 정원에서 서성거리고 있기에 말을 붙여 봤는데 힐다 너를 찾아왔다지 뭐야.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데려다주려고 했지.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야? 이렇게 귀여운 애를.”
에밀리가 무척 사랑스럽고 따뜻한 눈으로 로지를 내려다봤다. 로지 또한 에밀리가 마음에 쏙 드는지 함박웃음을 지은 채 통통한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어, 걔, 내 악명에 이끌려서 만났거든. 저래 봬도 천재 살인청부업자야. 어렸을 때 군인이기도 했대. 지금도 어린데 대단하지……?
“그냥…… 오다가다.”
“언니! 오늘도 심부름 잘했어요. 오늘로 심부름은 마지막이어요! 더 시키실 일은 없으세요?”
“어머, 이렇게 어린데 기특하기도 하지. 얘, 집은 어디야? 혼자 돌아갈 수 있겠어?”
누가 들어도 사랑스러워할 목소리로 씩씩하게 외치자 에밀리의 눈에서 애정이 넘쳐흘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혼란에 빠진 채 입만 들썩거리고 있었다.
아냐, 에밀리. 그거 아냐. 걔 위험해, 떨어져…….
호감 대상 중 최대선과 최대악의 접선이라니. 상상하지 못한 조합이었다.
“에, 에밀리! 로지는 내가 데려다줄 테니 안심하고 가.”
“응? 그래도…….”
“레티샤 님! 레티샤 님이 얼른 주방으로 와 보라고 부르셨어. 로지는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안심하고, 응? 빨리 가 봐.”
“이름이 로지인가 보구나. 이름까지 사랑스럽기도 해라. 언니가 지금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하는데, 다음에 꼭 또 만나자? 그땐 언니가 맛있는 거 만들어 줄 테니까…….”
“에밀리, 빨리 가. 빨리.”
쓸데없는 연을 만들려고 하는 에밀리를 겨우 떠밀어 보낸 뒤, 로지를 바라봤다. 귀여운 여자아이는 에밀리를 향해 웃는 그대로 박제된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는 건 아니겠지?
“놀라울 만큼 선하네요. 영혼도 참 맛있을 것 같아.”
“로지, 부탁인데 쟤는 해치지 마. 내 친구란 말이야.”
“흐응, 알겠어요. 아쉽지만, 언니 부탁이니까요. 그런데 이제 시키실 건 없으세요?”
로지가 겨우 에밀리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제 더 깎을 연필은 없으니 저택에 올 필요도 없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뭔가 떠올라 멈칫했다. 로지를 넣어 두면 무척 편할 무언가가 생각나 버렸다. 나는 로지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붉게 보일 정도로 진한 다홍색 눈동자가 반지르르하게 빛나며 나를 향했다.
“저, 로지. 갑작스러운 부탁이긴 한데, 혹시 내 부관이 되어 줄 수 있겠어?”
“부관요?”
“응, 부관. 지금과 크게 달라질 건 없어. 시도 때도 없이 부르지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렇다면 좋아요! 언니의 부탁이라면 뭐든!”
「호감 대상 ‘로지’가 부관으로 추가되었습니다.」
“그럼 로지, 네 주변 동료들에게 내 부관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전해 줄래? 동료 중에서도, 음, 아주 악명 높은 범죄자로만 골라서 말이야. 살인에 죄책감이 없었으면 더 좋겠는데. 네 명 정도만 골라서 말 좀 전해 주겠어?”
“그럼요. 언니 이름만 대면 다들 서로 하겠다고 나설걸요? 제가 동료 중에서 경관들도 학을 떼는 악인들로 잘 골라 볼게요. ‘부관이 되어 달라’고만 전하면 되는 거죠?”
“응, 그렇게 해 줘. 부탁이야.”
“맡겨만 주세요!”
해맑은 웃음을 까르르 터뜨린 로지는 소풍 가는 유치원생처럼 뛰어가기 시작했다. ‘부관 호출’ 스킬 설명에 따르면 부관이 승낙 의사를 밝혀야 한다고 했지만, 면대면이라는 조건은 붙지 않았다. 이렇게 말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부관으로 추가할 수 있겠지.
나는 호감 대상 리스트 밑에 새롭게 추가된 부관 리스트에 로지의 얼굴과 이름이 반짝거리며 떴다. 밑에 남은 네 칸은 로지가 고른 범죄자로 채워지겠지.
죽은 제드를 떠올리면 아직도 온몸의 피가 식었지만, 혹시 모르니 부관을 미리 추가해 두고 싶었다. 살인에 무감각한 범죄자라면 제드 같은 놈을 죽일 때 도움을 받기에도 좋을 테고, 여차하면 제물이 되어 줄 수도 있을 테고……. 프로필 확인은 한 번 더 해 봐야겠지만, 로지가 악랄하다고 꼽을 만큼이면 객관적으로 죽여도 싼 놈일 테니까.
하지만 웬만하면 그런 식으로 쓸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내가 어렴풋이 생각했다.
저택은 오랜만에 떠들썩했다. 백작 부인이 쾌차하여 돌아오는 데다 아드리안의 생일이 코앞이었기 때문이다. 아드리안 생일……. 아드리안에게도 생일이 있었구나. 어느 날 공기의 존재를 느끼듯 무척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그래, 악마라도 생일은 있겠지.
생일 선물 챙겨 줘야겠다.
선물이야 호감 작업용으로 이미 여러 번 줬지만, 이번에는 호감과 관련 없는 물건으로 고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정들었으니까 아드리안이 진짜 좋아하는 선물로 골라 봐야겠다. 하, 근데 돈이 모자란데. 모자란 정도가 아니지, 마구간에서 싸우고 상처 치료한다고 전 재산이 털린 데다 그깟 말 다쳤다고 일급까지 몰수당하는 바람에 통장 잔고가 0이었다.
거지라서 우울한 건 둘째치고, 별 볼 일 없는 선물은 사 주기 싫어서 더욱 고민이 됐다. 1골드짜리 일반 연필 주고도 고맙다는 대답을 듣긴 했지만, 그건 기계적인 호감 작업이고 이건 생일 선물이니까. 어쨌든 같은 선물이었지만, 아무래도 의미가 달랐다.
받고 기뻐할 만한 선물을 주고 싶다. 아드리안 선물을 챙겨 줄 사람은 딱히 없을 것 같으니까, 작은 선물이라도 행복해할 만한.
욕심은 이렇게나 굴뚝같은데 별다른 선물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돈도 많고 온갖 희귀한 물건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역시 안 주는 게 나을까? 내가 몇 푼 모아 겨우 사 줘 봐야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줄 수 있다고. 선물이 별 볼 일 없다며 비웃을 수도 있다. 호감 작업용 아닌 아이템은 싫어할 수도 있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악마였다.
나름 진지한 고민에 휩싸인 채 노크하려고 손을 들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아드리안이 나왔다. 방금까지 머릿속에만 있었던 그가 갑자기 실물로 나타나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몇 발자국 물러나는 나를 그가 붙잡더니 다짜고짜 걸음을 옮긴다. 아드리안의 갑작스러운 행보에 발이 엉켜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왜, 왜 그러세요? 어디 가요? 도련님, 약 드셔야 할 시간인데요?”
“어서 이리 와 봐, 힐다.”
무슨 일이 있기에 저렇게 눈을 빛내는 걸까? 약 먹고 가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돌아보는 얼굴이 햇살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 말문이 막혔다. 뭐야, 뭔데 그렇게 기대 가득한 얼굴인데. 크리스마스 선물 까러 가는 어린애 같다.
대체 어딜 가나 했는데, 아드리안이 식사하는 동안 나는 옆에서 멀거니 서 있곤 하던 다이닝룸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목을 놓아준 후 테이블을 가리켰다.
“자, 힐다. 이것들을 얼마든지 먹어도 좋아.”
이게 다 뭐야. 평소보다 훨씬 더 성대하게 차려진 테이블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자, 아드리안이 의자까지 이끌어 앉혀 주었다. 그러더니 자기는 테이블을 빙 둘러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내게 향하는 눈에서 별이 우르르 쏟아질 것 같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뭘 얼마든지 먹으라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내렸는데, 맙소사,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들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봤을 땐 성대하게 차려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다…… 뭐예요?”
“어때, 마음에 들어?”
케이크엔 고기가, 애플파이엔 정어리가, 찐빵엔 딸기잼이 있다. 심지어 바로 앞에 놓인 접시에는 고기 마카롱이 있었다. 맙소사. 고기와 마카롱에 대체 왜 이런 몹쓸 짓을 한 거지. 혹시 요리사들이 아드리안을 싫어하는 건 아닐까?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나는 포크로 마카롱 꼬끄를 살짝 들어 보았다. 고기가 잘게 조각난 채 아몬드 필링 여기저기에 박혀 있었다. 누가 이런 고급 음식 쓰레기를 만든 거지? 인생에 무슨 불만이 있어서.
“어서 먹어 봐, 힐다. 널 위해 특별히 준비했어.”
“…….”
고기 마카롱에 이어 아드리안이 건넨 말이 날 경악하게 했다. 설탕물에 동동 띄워진 고기를 선물로 줬을 땐, 그래, 정들었다고 하니 하나 사서 던져 줬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이어지자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특별히 준비하다니, 왜? 단순히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라기엔 너무 정성스럽잖아. 한낱 하인을 위해 주방장까지 움직일 이유는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여차하면 널 이런 고기 조각으로 만들어 주겠어’라는 살인 경고 정도로 해석했겠지만, 이젠 아니다. 신종 괴롭힘? 괴상한 음식을 계속 주면서 괴롭히는 걸까?
아니야. 달콤한 것과 고기를 섞어 준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다. 조금 더 은유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드리안에게 달콤한 건 인간의 목숨일 거다. 고기는 사람일 테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절로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맙소사. 이제 알았다. 아드리안은 지금 제드와 같은 공물을 더 바치라고 명령하는 거다.
“마음껏 맛있게 먹어.”
배불리 먹고 힘내서 공물을 바치라는 뜻일까. 그래, 다 죽여 놓은 사냥감을 눈앞에 배달해 줬으니 얼마나 편했겠어? 일을 마무리 지은 후에 겁나면 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막상 몸이 낫고 보니 생각이 바뀐 거겠지.
하지만 어쩌지? 나 진짜 살인은 더 못 하겠는데.
디저트를 앞에 두고 내가 울상을 짓자 별처럼 빛나던 아드리안이 그대로 굳었다.
“……표정이 왜 그래?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거야?”
“그게…….”
차마 못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 죽어 가는 걸 봤는데 어떻게 안 도와주겠다고 할 수 있겠어. 그런데 정말 살인만은…… 물론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아드리안을 살리는 길을 택할 테지만, 흔쾌히 말할 수는 없었다.
“마음에 안 드는구나. 네가 단 고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준비한 건데. 또 잘못 짚었나 봐.”
내가 우물거리고 있자 아드리안이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을 환하게 밝히고 있던 불빛이 깜박거리다 완전히 꺼져 버렸다. 무척 실망한 눈치라 오히려 내가 놀라고 말았다.
공물을 바치라는 뜻이…… 아닌가?
“정말요? 그것뿐이에요?”
“그것뿐이야. 달리 뭐가 있겠어?”
달리 뭐가 없는 게 더 이상한데. 나만 이상해요? 네?
이건 좀 의외다. 살인 청부가 아니라 진짜 내가 좋아하기만 하면 됐다는 거야?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저렇게 실망한 거고? 왜? 어째서? 왜?
다섯 살짜리처럼 속으로 ‘왜?’만 되뇌다가 시선을 내렸다. 접시 위의 마카롱은 여전히 해괴망측했지만, 꼬끄나 필링이 고급스러워 보이기는 했다. 오로지 괴롭히기 위해서라면 이런 수고를 들일 이유가 없다는 데에 생각이 이르자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아드리안이 뭔갈 하면 할수록, 나름대로 평이해져 가던 게임 난이도가 요동치고 있었다. 메인 퀘스트를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해야 하는데, 아드리안이 자꾸 엉뚱한 짓을 벌이며 교란하고 있었다. 악마야말로 이 게임을 클리어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채 포크 끝으로 꼬끄를 툭툭 밀어서 떨어뜨렸다. 그리고 포도 씨 골라내듯 필링에 콕콕 박혀 있는 고기를 슬쩍슬쩍 긁어냈다. 이게 무슨 짓인지 한탄하며 작업을 끝낸 필링에 꼬끄를 올려 먹었더니 의외로 나쁘지 않다. 미처 빼내지 못한 고기가 씹히면서 괴이한 맛을 자아냈지만, 달콤한 필링 맛으로 무시할 수 있는 정도였다.
식기가 접시를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낙심해 있던 아드리안도 고개를 들었다. 그가 다소 조심스레 물었다.
“맛있어?”
“도련님도 드셔 보실래요?”
보쌈 싸듯 꼬끄에 필링을 얹어서 작은 접시에 건네주자 아드리안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난제를 앞에 둔 천재 수학자 같은 얼굴이다.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로 괴상한 음식을 나 먹으라고 준비해 놨단 말이지…….
“우욱, 힐다. 이건 좀…….”
비위 약하신 우리 도련님은 한 입 먹어 보더니 금세 낯빛이 새파래졌다. 저럴 정도는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미식가이신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저 정도로 다양한 취향을 존중해 준다는 건데…….
내가 한숨을 푹 내쉬자 그제야 뭔가 단단히 착각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눈을 굴린다. 도르륵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도련님.”
“으응.”
“저 괴롭히시려는 거 아니죠?”
“……괴롭혀? 내가 널?”
반응 보니 진짜 아닌 것 같다. 괴롭히려는 게 아니었다니 나름대로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럼 역시 상인가? 공물을 바친 데 대한 상?
“도련님, 저 이런 거 안 좋아해요. 단 거 따로 고기 따로 좋아하는 거지, 이런 괴상한 혼합물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기껏 이렇게 준비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을게요’라는 말이 목 끝에서 걸렸다. 아드리안이 가진 마음이 뭔지 알고 그런 말을 해.
정이 들었다곤 해도 쟤는 악마다. 거기다 설정상 악마 중에서도 고위급 악마였잖아. 저런 무해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있다가도 언제 돌변해 달려들지 몰라. 경계를 완전히 풀어선 안 돼. 여기는 정체불명의 아마존 같은 곳이니까. 예쁘고 아름다운 건 모조리 독버섯이야. 만지면 안 돼, 먹어서도 안 되고 넘어가서도 안 돼.
“이제 이런 건 그만…….”
“힐다, 나한테 만회할 기회를 줘.”
“네?”
“이번엔 정말 잘해 볼게.”
대체 뭘 잘해 본다는 건지. 의욕에 불타는 그는 마치 정어리 레몬파이 같았다. 차라리 살의를 갖고 죽이니 살리니 하는 게 더 어울리지, 내 마음에 드는 짓을 해 보겠다고 애쓰는 모습은…… 정말 그답지 않았다.
모르고 독버섯을 주워 먹기라도 한 걸까? 악마가 이상해졌다.
만회할 기회를 달라며, 이번엔 잘해 보겠다고 말한 그는 단단히 다짐한 얼굴로 방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멀뚱히 보고 있다가 준비를 도와주겠다고 뒤늦게 따라갔는데 단박에 거절당했다. 준비는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먼저 마차에 가 있으라는 거다.
거기다 대고 차마 마차까지 부축하지 않아도 되냐, 오다 쓰러지는 거 아니냐고 물을 순 없어서 먼저 내려왔다. 저택을 나서자마자 아드리안의 방 창문을 몇 번이나 올려다보았다.
“약 먹으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는데 제대로 먹었는지 모르겠네. 먹는 거 확인하고 나올걸.”
정신이 온통 딴 데 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말이지. 한 달 새에 마을을 몇 번이나 가는 거야? 제드를 죽였다지만, 기껏 제드 하나다. 지병이 도졌다고, 악마가 아파하고 있다는 알림창이 지금도 심심찮게 뜨는 거 보면 여전히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무리한 외출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굳이 마을까지 가지 않아도 아드리안이랑 정원 산책하고 맛있는 디저트 먹는 것만으로 즐거운데.
혹시 아드리안이 나오면 우연히 마주친 척하기 위해 마차로 갔다 저택으로 조금 되돌아가고, 다시 마차로 향하다 되돌아가길 반복했던 때였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하얀 건물이 문득 눈에 띄었다.
자선의료원……. 얼마 전에 사람이 죽어 나간 바로 그곳이었다. 처음 볼 때부터 마냥 으스스하게만 느껴지던 자선의료원 앞에는 평소와는 달리 작은 추모관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드리안이 조앤을 위해 설치해 주겠다던 추모관이 바로 저거구나.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무척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드리안은 다 죽어 가는 노인을 죽이는 게 인도적이라고 말할 정도였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 죄책감은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죽이지 말아 달라는 내 부탁을 생각지도 못하게 들어주었고, 그것도 모자라 널 키워 준 사람이니만큼 작은 추모관까지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아드리안의 배려는 뜻밖이었다. 다 차려진 밥상을 마다한 것도 모자라 추모관까지 만들어 줄 줄이야. 나조차 그렇게까지 해 줄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아드리안이 그만큼 나를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살짝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정작 나는 아드리안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할머니를 구한 걸 후회하고 말았는데 말이다. 생전에 사기라도 안 쳤으면 후회라도 덜 할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망자를 탓하는 건 소용없는 짓이었으므로, 나는 조앤의 초상화 앞에 꽃을 꺾어다 올려놓고 간단히 명복을 빌어 주었다. 내친김에 제드의 명복도 잠깐 빌었다.
으음, 제드 씨. 한 방에 죽여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살인 경험이 없다 보니 의도치 않게 긴 고통을 줬던 것 같네요. 물고기도 먼저 기절시키고 회 뜨는데 말이에요. 당신이 비록 죽어 마땅한 짐승이라지만, 굳이 종을 따져 보자면 인간에 속하니까요.
충분히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면 합법적인 약물이라도 써 봤을 텐데, 워낙 경황이 없고 급해서 때려죽이게 됐어요. 삽으로 머리 여러 번 내려쳤을 땐 많이 아팠죠? 현실에서 못 치른 죗값, 지옥에서 치르고 있을 텐데 그 아픔만큼은 가감되길 빌게요. 부디 지옥에서는 여자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시길. 다시 한번 한 방에 못 죽여 줘서 미안합니다.
“여기서 누가 죽었나 보지?”
내가 눈을 감고 제드를 향해 인도적인 명복을 빌어 주고 있을 때였다. 나무 껍데기처럼 거친 목소리가 느닷없이 귀를 긁었다.
깜짝 놀라 옆을 봤다가 기척 없이 다가와 있는 남자를 보고 심장이 쿵 떨어지고 말았다. 남자는 시가를 질겅질겅 깨물면서 조앤의 초상화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제드의 명복을 빌어 주느라 보지 못했던 ‘「적대 대상이 접근하고 있습니다.」’라는 시스템 메시지가 사르르 사라지는 게 보였다.
이 남자가 갑자기 왜 여기에?
“팔츠그라프 가 자선의료원은 여러모로 유명하지. 늙거나 돈이 없는 병자들을 모아다가 생의 마지막을 안식 속에서 맞이하게 해 준다니 말이야. 늘 궁금했지. 제법 쓸 만한 건물을 지어 놓고 왜 한 번에 꼭 한 명씩만 들여보내는지 말이야. 항간에서는 그조차 선행의 일부라고 칭송하던데. 이거야 원, 끔찍한 세뇌라도 건 것 같단 말이지.”
“경감님께서…… 갑자기 여긴 웬일이세요? 백작님께 허락은 받고 들어오신 건가요?”
손끝이 살짝 떨렸다. 해리슨의 눈빛은 여전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 같지 않은 저 살기……. 흉악 범죄자들을 많이 상대하다 보면 경찰도 자연히 저렇게 되는 걸까? 우으, 무서워.
“당연히 허락받고 들어왔지. 여기가 어디 아무 이유 없이 대문 두드리면 열어 주는 곳은 아니잖아. 경정 영감도 이름만 들으면 벌벌 떠는, 지체 높으신 팔츠그라프 가문인데 말이야. 아, 오늘은 시가에 불 안 붙였으니 부디 빼앗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얼마나 씹어댔는지 끝이 다 짓이겨진 시가를 보여 주며 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예전에 내가 시가 뺏어서 바닥에 패대기친 걸 아직 기억하고 있나 보다. 보기보다 뒤끝이 길잖아.
“나는 여기서 사람이 죽었다기에 사인을 확인하러 온 것뿐이야. 의원이 더럽게 꼼꼼하게 서류를 작성해 놓은 덕분에 꼬투리 잡을 게 없더군. 팔츠그라프에서 후원하던 아이 몇몇이 실종된 것도 모자라 여기서 일어난 실종 사건도 겸사겸사 확인하고 싶은데 도무지 수사 허가가 나지 않으니……. 빌어먹을 놈들, 범죄자를 잡겠다는 의지라곤 쥐뿔도 없지.”
“실종 사건요?”
“제드라는 남자 말이야. 여기 마구간지기였다던데.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더군. 혹시 아는 것 있나?”
느닷없이 배를 찔린 기분이다.
제드를 죽이기로 하고 마구간에 찾아갈 때 보았던 어둠, 뭐가 효과적일지 무기를 고를 때의 신중함, 삽으로 머리를 내리칠 때 손바닥으로 스며들던 둔한 감각과 다리에 뜨겁게 튀던 피, 도망친 먹잇감을 바삐 쫓아가면서 오로지 죽일 생각밖에 없었던 몰입. 모든 게 물결처럼 밀려들어 간담이 서늘해졌다.
경감은 어디까지 알고 온 거지? 범인이 나랑 아드리안이라는 사실도 알고 온 걸까? 아냐, 분명 휴버트가 깨끗하게 뒤처리했다고 했어.
이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게 있었으면 막무가내로 달려들었겠지, 이렇게 평화롭게 물어보지 않았을 거야. 진정하자, 진정……. 떨면 의심만 더 살 거야.
“그런 거…… 없어요. 하인들의 숙소는 마구간과 따로 떨어져 있고 저는 주로 저택에서만 일해서 마주칠 기회가 없었어요. 저택에서 문제를 일으켜 떠나기로 했다는 소식만 들었고요.”
“그래도 같은 저택에서 지냈으면 한 번쯤은 스치면서 봤을 법한데. 갑자기 보이지 않으면 누구 입에서든 이야기가 나왔을 테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그 사람은 여자 하인들을 빈번히 건드려 왔어요. 저택을 떠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다들 기뻐했는데요. 그런 사람이 사라졌다고 찾아 나서겠어요? 조금 일찍 저택을 떠나서 다른 데로 갔나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죠.”
“그렇군. 그런데 너는 왜 나만 보면 그렇게 떨지? 꼭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말이야.”
“경감님, 보시다시피 저는 이 저택에서 일하는 일개 하인일 뿐이에요. 매일 약 갖다드리고 설거지하고 창문 닦고 잡초 뽑는 게 지상 최대 과제인 일꾼이라고요. 그런데 경감님이 와서 느닷없이 사람 죽은 얘기하고 실종 운운하니까 얼마나 떨리겠어요? 말 한번 잘못 하면 얼마든지 제 평화로운 생활을 박살 낼 수 있으신 분인데요. 찔리냐고 은근슬쩍 유도신문 하시기도 하고요.”
“큭큭, 벌벌 떨면서 입만 살았어. 정말 웃기는 하인이란 말이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작정하고 의심한 거라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입만 살았다는 건 솔직히 인정하지만, 저 인간한테 들을 말은 아닌 듯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손을 꽉 누르고 있자 해리슨이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 손 위에서 굴려 댔다.
“그러고 보니 이 연필, 내가 가져가도 되지? 저택 앞에 딱 하나 남아 있던데.”
“……네. 물론이죠.”
케이든과 그로버가 열심히 깎아서 로지가 배달한 고급 연필 중 한 자루가 그의 손에 있었다. 하인들한테 나눠 주기 귀찮아서 저택 앞에 뒀던 건데, 하나둘씩 사라지는 거 보고 금세 다 가져가겠거니 했는데 하필 이 인간이 왔을 때 한 자루 남아 있었을 줄이야.
언뜻 보기엔 별것 아닌 물건이지만, 악마가 지시하고 범죄자가 깎아서 둔 연필이 경찰 손에 들어가 있으니 뜨끔했다.
“참 날카롭게 잘 깎였단 말이야. 이걸로 잘하면 사람 목도 찌를 수 있겠는걸.”
해리슨이 갑자기 연필심 부분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뭐야, 아드리안이랑 똑같은 방법으로 연필을 이용할 생각을 하네. 경찰이라는 사람이…….
“이봐, 너무 놀라지 마. 잡으려는 놈은 원래 잡히는 놈 앞에 가서 기다려야 하는 법이거든. 범죄자들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어야 잡을 수 있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연필로 사람을 찌르고 다니는 범죄자가 있다는 말씀이세요?”
“아직 신고 들어온 건 없지. 아직은. 하지만 있을 법하다는 이야기야. 어지간히 미친놈 아니고서야 그럴 리 없겠지만.”
아드리안은 이제 해리슨 공식 인증 미친놈이 됐다. 근데 걘 악마라 그렇다 치고 님은 뭔데요.
웃긴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 해리슨이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며칠 면도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거뭇거뭇한 수염과 눈 밑에 검게 자리 잡은 그늘을 보자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해리슨은 다음에 보자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는데, 저택 입구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고도 소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때 무슨 이유에선지 나를 향한 시선이 동시에 느껴져, 몸을 휙 돌렸다. 거대하고 음산한 저택. 5층 창문이 휙 움직였다. 다시 보니 창문이 움직인 게 아니라 커튼을 친 거였다.
저게 누구 방이지? 왼쪽에서 하나, 둘, 셋, 넷…… 네 번째 방. 딱 중앙 계단 앞에 있는 방이다. 예전에 에밀리가 설명해 줬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저 방은 분명.
“백작의 방이잖아…….”
백작이 나와 해리슨 경감을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물론 저택 내에 경감이 돌아다니는 게 신경 쓰일 수 있긴 한데, 왠지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백작은 대체 뭘까? 같은 저택에 있으면서도 마주친 횟수가 단 두 번인 걸 보면 희귀하게 출현하는 인물인 건 알겠다. 문제는 내가 아들에게 딱 붙어사는 전속 하인이라는 거지.
아버지라면서 어떻게 단 한 번도 아드리안을 보러 오지 않을 수 있지? 심지어 아드리안이 피를 토하거나 아파할 때도 그림자 한번 내비친 적 없었다. 차라리 정신 나간 백작 부인이 아드리안에게 더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러고 보면 아드리안은 이 저택에서조차 의지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잖아. 엄마는 정신 놨지 아빠는 보러오지도 않지, 그나마 곁에 있는 휴버트는 돈 받고 일하는 의사지. 몸은 저렇게 약하니 귀족들의 사교생활도 못 즐겼을 테고, 또래 친구도 없을 테고. 악마가 아니더라도 비뚤어질 만한 환경이잖아. 아니, 오히려 악마라서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아드리안이 악마라서 무섭기만 했는데, 이제는 악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의 기이한 행동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다음에 백작을 만나면 반드시 호감 대상에 추가해 둬야겠다. 뭐라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 나는 커튼으로 꽁꽁 가려둔 백작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마차로 향했다.
“힐다, 여기서 갖고 싶은 거 다 사.”
여기서라니요? 나는 귀를 의심하며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여느 때보다 훨씬 잘 차려입어서 날 살짝 놀라게 했던 그가 마을 입구에 서서 빙긋 웃고 있었다. 엷은 바람에 금빛 앞머리가 살짝 흐트러질 때는 잠깐 멍해지고 말았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인간을 시각적으로 홀리라고 저런 외모를 내린 게 분명하다…….
“여기서, 라면.”
“마을 전체 어디든.”
“다라고 하시면…….”
“뭐든 다. 네가 갖고 싶은 거 전부.”
악마가 유혹을 제대로 하기로 한 모양이다. 이 마을에서 전부 다라니? 아무리 팔츠그라프 가 도련님이라서 가끔 상인들이 와서 물건을 바친다지만, 내가 갖고 싶은 거 전부를 공짜로 주긴 어려울 거다. 그 말은 즉 내가 뭘 집든 돈을 내주겠다는 뜻이다.
혹시 아드리안의 금발은 금수저를 뜻하는 걸까? 언젠가 연봉 인상할 때 봤던 금빛 후광이 아드리안 등 뒤로 찬란하게 퍼졌다. 한낮 아스팔트에 쨍하게 반사된 뙤약볕에 두 눈이 쏘이는 것 같다. 으윽, 눈부셔……!
“정말요? 진심이세요? 제가 원하는 거 전부요?”
“정말로, 진심으로, 네가 원하는 거 전부.”
“후회 안 할 자신 있으시고요?”
“후회를 왜 해, 네가 갖고 싶다는데.”
아드리안은 부호의 인자한 미소를 띤 채 내 말을 또박또박 따라 했다. 이번엔 또 뭔데. 왜 그러는데. 상이지? 공물을 바친 데 대한 상인 거지? 공물 하나 더 바치란 뜻 아니지?
나는 아직 해소하지 못한 물음을 속으로 되풀이하며 애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심증 99.9%를 찍는 이 물음을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0.1%의 확률로 아니었을 경우 아드리안이 상처받는 얼굴을 보기 싫어서였다.
요새 내 말에 자주 낙심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 어딘가 따끔따끔한 게, 양심이 찔려서인지 기분이 아주 별로였다.
아드리안은 상벌이 확실할 뿐이다. 이건 공물을 바친 데 대한 상! 그렇게 결론지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뭘 사지? 막상 판 깔리면 개그 못 치는 개그맨이 이런 걸까. 평소엔 돈 없어서 서럽더니 지금은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전 재산이 0G인 채로 며칠이 지나자 무언가를 살 의지가 흔적 없이 소멸한 탓이었다.
뭐 사지, 뭘 사야 잘 샀다고 소문이 날까. 무조건 비싼 거…… 아니지, 내 물주를 빈털터리로 만들면 나도 같이 거리에 나앉을 수도 있으니 적당한 걸 사야겠다. 사고 싶었는데 내 돈으로 사기 아까웠던 아이템 위주로 사는 거야.
홀린 듯이 걸음을 옮기는 나를 따라 아드리안이 흡족해하며 뒤따랐다. 아마 고기 마카롱을 제대로 만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눈에 띄는 물건 세 개쯤 샀을 때 즈음, 아드리안이 가만히 있다가 물었다. 참다못해 던지는 물음인 듯했다.
“힐다. 정말 그것만으로 괜찮은 거야?”
“예? 이게 어때서 그래요? 맛있는데.”
나는 솜사탕을 돌돌 말아 입에 넣으며 물었다. 왜 시원찮다는 표정일까. 솜사탕, 우표, 만능 약초 100개……. 죄다 내가 갖고 싶었던 것들인데.
우선 솜사탕은 먹고 싶었던 1순위 주전부리였고 우표는 게임 세계에 들어온 기념으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우표엔 무려 으리으리한 왕성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나라 수도에 있다는 성인 것 같다. 여기엔 왕족들도 사는 거겠지, 신기하다.
나중에 현실로 돌아가면 기념으로 가지고 있다가 손주 손녀한테 물려주면서 ‘후, 할미가 말이야. 악마의 하인이 되는 게임을 아주 실감 나게 한 적이 있었는데. 글쎄, 내 눈에 보이는 건 게임이었지만 거기도 실존하는 세계 같았단 말이지. 이거 보렴, 우표가 증거란다.’라며 거들먹거릴 수 있을 거다. 만능 약초는 아드리안이 언제 누굴 또 상태 이상으로 만들지 모르니 넉넉하게 사 둔 거고.
쓸 만한 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뽑기로 나와 버려서 이젠 살 필요가 없어졌고……. 원하는 물건 다 사고 있는 건데?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아드리안을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문득 우리가 잡화 상점을 지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맞다, 생일 선물 사야지!
“잠시만요, 도련님. 저 잡화 상점에 좀 들를게요. 잠깐만요! 따라 들어오지 마세요. 여긴 저 혼자 들어갈게요.”
“왜? 또 어디 가려고?”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아이참, 본인 생일 선물 사는데 데리고 들어갈 순 없잖아.
“그런 게 아녜요. 이유는 나중에 알려드릴 테니까, 영 못 미더우시면 입구 지키고 계시면 되잖아요. 네? 그럼 됐죠?”
“…….”
여전히 뚱한 얼굴의 아드리안을 두고 잡화 상점으로 휙 들어갔다. 휴, 다행히 안 따라오네.
“어서 오세요. 앗, 팔츠그라프 가의 아이구나! 무슨 물건이든 골라 보렴!”
친절히 인사하는 잡화 상인을 지나 진열대를 찬찬히 돌아보았다. 잡화 상점이라는 이름에 맞게 다양한 아이템이 종류별, 크기별로 진열되어 있었는데, 내가 특정 아이템에 시선을 줄 때마다 ‘이 아이템을 아드리안이 좋아합니다’라는 설명창이 뿅뿅 튀어나왔다. 하지만 저건 순전히 호감 작업을 위한 아이템일 뿐, 이번엔 호감 작업과 상관없는 진짜 선물을 사 주기로 했으니까. 잘 골라 봐야지.
단단히 마음먹고 돌아보았지만, 아드리안 선물 고르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부잣집 아들내미 아니랄까 봐, 잡화 상점에서 파는 아이템 중 없는 게 거의 없었던 탓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아이템에서 호감 작업용과 값비싼 아이템까지 빼자 후보군이 다섯 개도 되지 않았다. 선물 선택지에서마저 가난하다니…….
“이거면 좋아하려나?”
한참 고민하다 골라 든 건 30골드짜리 손목시계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물건을 통틀어서 내가 준 연필을 제외하고 이만큼 값싼 건 없겠지만, 그, 그래도 선물은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도금이라 값쌌지만, 다행히 내구성이나 이음새, 마감은 흠잡을 데 없었다.
문제는 이걸 무슨 돈으로 사냐는 건데.
“저, 여기서 물건을 팔 수도 있나요?”
“그럼! 어떤 물건을 팔려고 하니?”
잡화 상인이 친절하게 매입을 해 주는 게임이다. 나는 가방을 열어서 팔 만한 아이템이 뭐가 있는지 살폈다.
악마의 예술혼은 조각이라 못 팔 것 같고 맹독의 날이나 번역기, 팔목 보호대는 쓸 일이 있어 보여서 제외했다. 잡초나 지푸라기는 팔아봤자 1골드도 안 나올 테고 백작 부인의 향기로운 허브는 백작 부인 줘야 할 것 같고.
팔 만한 건 성수뿐인가? 그나마도 작은 병에 담긴 거라 손목시계를 살 만큼의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새삼 돈 없어서 눈물이 다 나네.
“저, 이것도 팔 수 있을까요? 신전에 직접 가서 받은 성수라서 진짜거든요.”
“어머나, 이건 성수구나. 요새 성수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어디 보자. 이 정도 양이면 50골드는 쳐줄 수 있을 것 같구나. 괜찮겠니?”
“팔게요, 당장 팔게요! 그리고 이 손목시계 주세요. 아! 선물할 거니까 포장도 예쁘게 해 주세요.”
“그래, 포장은 10골드란다. 그럼 네게 10골드를 내어 주면 되겠지?”
“네, 그럼요!”
생일 선물 샀다! 나는 싱글벙글해져서 고개를 마구 끄덕거렸다. 일급도 없는 판에 생일 선물도 사고 포장도 했으며 10골드까지 남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할머니한테 성수 몇 개 더 받아둘 걸 그랬다. 비상시에 이렇게나 쓸모있는 걸!
“자, 보아하니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려나 본데, 좋아했으면 좋겠구나.”
“좋아하는 사람 아닌데요.”
좋아하다니 무슨 그런 막말을 다 하시나. 나는 순간 정색했다가, 예쁘게 포장된 손목시계를 받고 금세 바보처럼 웃어 버렸다. 기왕 산 건데 아드리안이 받고 기뻐하면 좋겠다. 지금 줄까? 선물 받았을 때 반응 보고 싶어서 막 안달이 나는데. 눈 딱 감고 지금 줄까? 어? 확 줘 버려?
아니지, 아니야. 조금만 참자. 어차피 며칠 안 남았는데 당일에 주자. 명색이 생일 선물인데 당일에 줘야 의미가 있지. 으으, 받았을 때 표정 궁금한데, 궁금한데! 막 좋아서 우는 거 아닌지 몰라. 그럴 리는 없겠지만, 상상만으로도 흐뭇하다!
“기분이 아주 좋은가 봐.”
혹시 포장지라도 접힐까 고이고이 선물을 가방에 넣으며 나왔는데, 아드리안의 차가운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엇,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는데요. 왠지 모르게 악마가 화가 난 것 같습니다. 님 생일 선물 사서 기분 좋은 거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생일 당일에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으므로 꾹 참았다.
“마음에 안 들어.”
나는 급하게 바보 같은 미소를 지웠지만, 이미 녹아내리던 얼굴을 봤는지 아드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 밖에서 기다리게 했을 뿐인데 얜 왜 절대영도까지 내려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 따뜻한 봄 날씨에 갑자기 서리 내리고 고드름 달릴 것 같잖아.
“네가 말해 봐. 내가 어떻게 해도 넌 그렇게 즐거워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뭘…… 말할까요? 도련님.”
“몰라서 물어? 네가 가장 갖고 싶은 걸 말하란 말이야.”
“도련님, 근데 지금 화나신 거예요?”
“그건…… 아냐, 힐다. 화난 것처럼 보였다면 미안해. 하지만 여전히 네가 원하는 걸 말해 줬으면 좋겠어. 단, 1천 골드 미만은 제외야.”
사고 싶은 거 다 샀다고 대답하려다가 입이 벌어졌다. 최소 1천 골드짜리 갖고 싶은 걸 고르라고요? 이건 마치 서울 지도 보여 주면서 ‘여기 중 어디에 살고 싶어? 별건 아니고 집 한 채 주려고.’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무슨 이런 돈지랄이 다 있나 싶은데 주체가 내가 되니 자본주의 만세를 외치게 되었다. 최소 1천 골드 넘는 아이템 중 생각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전설 베개……!
“베개는 안 돼.”
“왜요? 베개는 왜 안 돼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칼같이 돌아오는 대답에 반사적으로 반발하고 말았다. 베개가 얼마나 귀중한 아이템인데!
“네가 내 방에 있으면 베개만 보잖아. 그래서 싫어.”
하하, 무슨 농담도. 웃으면서 말하고 싶었는데 진지함이 넘쳐흐르는 얼굴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진짜요? 그래서 베개를 안 사 준다고요? 아드리안 방에 있을 때 아드리안보다 전설 베개를 더 자주 본 건 사실이었다. 오동통하고 탱글탱글한 베개를 보고 시선 안 뺏기는 사람이 어디 있게요?
정 그러면 베개는 일단 사 달라, 베개를 보게만 하고 만지지는 못하게 하니까 그랬던 거 아니냐, 앞으론 베개를 안은 채 도련님을 보면 되지 않느냐고 설득하려는데 아드리안이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다짜고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따라가며 애탄 눈빛을 뒤통수에 쏘아 댔다. 어디 가는데요? 베개 사 주러 가는 거죠? 네?
“들어가자, 힐다.”
역시 침구 가게인가요! 기대에 찬 얼굴로 고개를 들었는데 내 눈에 들어온 건 완전 다른 가게였다. 에이, 뭐야. 옷가게잖아……. 김빠진 얼굴로 서 있는데 아드리안이 안쪽에서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내 목숨줄을 쥐고 있는 악마라 말을 안 들을 수도 없고.
“웬 옷가게예요? 도련님 옷 사시게요?”
“네 옷 고르러 온 거야. 뭐든 골라 봐. 아까 내건 조건은 명심하도록 하고.”
아드리안은 온 점원의 환대를 한 몸에 받으며 거울 근처에 비스듬히 기대섰다. 아까 내건 조건이라면 1천 골드 미만 아이템은 살 수 없다는 뜻이겠지. 대체 1천 골드짜리 옷은 뭐 하러 사냐고요.
어차피 작업복 외에 다른 옷은 입을 일도 없는데, 그냥 베개나 사 주지. 효율 올라가서 일 잘하면 부려 먹는 쪽에서도 좋은 거 아닙니까?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일반 옷과 고급 옷 사이에 끼어 있는 남색 옷에서 유독 빛이 나고 있었다. 내가 홀린 듯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 아이템 설명창이 옆에 떴다.
「전설 메이드복 - 1,000G, 내구도가 무한인 메이드복. 갑옷류. 전설의 메이드 빅토리아가 착용했다는 설이 있다. 업무 효율을 50% 향상해 주어 하인으로서의 능력을 비약적으로 올려 준다. 방수, 방화 기능 있음
전설 머리띠 - 1,000G, 내구도가 무한인 머리띠. 투구류. 마법 방어력 30% 향상해 주어 마법사가 주인을 공격하더라도 맨몸으로 맞서 싸울 수 있게 해 준다. 방수, 방화 기능 있음
전설 앞치마 - 1,000G, 내구도가 무한인 앞치마. 액세서리류. 물리 방어력 30% 향상해 주어 전사가 주인을 공격하더라도 맨몸으로 맞서 싸울 수 있게 해 준다. 방수, 방화 기능 있음
전설 장갑 - 1,000G, 내구도가 무한인 장갑. 장갑류. 손놀림의 최대 속도를 20% 향상해 주어 하인으로서 최상의 속도로 업무를 보도록 해 준다. 방수, 방화 기능 있음
전설 구두 - 1,000G, 내구도가 무한인 구두. 신발류. 걷거나 달리는 최대 속도를 20% 향상해 주어 하인으로서 최상의 속도를 내게 해 준다. 방수, 방화 기능 있음
전설 메이드복 세트 효과 : 효율 20% 향상, 근력 20% 향상, 체력 20% 향상」
전설 메이드복이라니, 전설 앞치마라니……. 그래, 세상에 신화 베개, 전설 베개도 있는데 메이드복이라고 없으리란 법은 없지.
근데 저 메이드복을 만든 장인은 하인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 걸까. 업무 능력이나 손놀림은 몰라도 물리 방어력이랑 마법 방어력은 왜 오르는 건데. 하인이 경호원 역할도 같이 하라는 건가?
전설의 메이드는 또 뭐지, 뭘 했길래 전설까지 된 건데……. 전설 메이드가 있으면 신화 메이드도 있는 건가?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전설 세트 효과가 어마어마해서 탐이 나기는 한다.
이런 전설 메이드복은 누가 입고 일하는 거지. 전설은 꿈도 안 꿀 테니 고급 메이드복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업무는 장비빨, 육아는 장비빨이듯 게임도 장비빨 아니겠어?
근데 세트 맞추려면 내 일급으로 며칠 모아야 하는 거지? 머릿속 계산기를 미친 듯이 두드려 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드리안이 옆에서 불쑥 나타났다. 깜짝이야.
“그게 마음에 들어?”
“아뇨. 이거 너무 비싼데…….”
“이거 전부 주시죠.”
일급 며칠치인지 단순히 계산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대답하려는데 아드리안이 선수 쳤다. 눈이 절로 휘둥그레졌다. 이걸 산다고? 악마가 입으려는 건…… 설마 아니겠지. 나한테 이렇게 비싼 걸 사 준다고? 악마가 가격을 모르는 건 아닐까?
「전설 갑옷을 처음 획득하여 경험치 2000을 얻었습니다.」
「전설 투구를 처음 획득하여 경험치 2000을 얻었습니다.」
「전설 장갑을 처음 획득하여 경험치 2000을 얻었습니다.」
「전설 신발을 처음 획득하여 경험치 2000을 얻었습니다.」
「전설 액세서리를 처음 획득하여 경험치 2000을 얻었습니다.」
「레벨 24로 올랐습니다. (칭호 : 악마의 오른팔)」
잠깐만! 아직 산 거 아니거든!
「전설 세트 효과를 처음 획득하여 경험치 2000을 얻었습니다.」
「레벨 25로 올랐습니다. (칭호 : 악마의 오른팔)」
「스킬 개방! ‘몸통 박치기’ 스킬을 쓸 수 있습니다.」
아오, 몸통 박치기는 또 뭐냐고. 진짜.
“……도련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이거 전부 다 사면 5천 골드인데요!”
혹시 점원이 들으면 아드리안의 체면이 구겨질까 봐 속삭이듯 소리 질렀는데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다른 옷 좀 더 골라 봐. 저기 괜찮아 보이는 게 있는데.”
5천 골드……. 내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대단한 금액이 쟤한텐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다. 와씨, 쩔 받는다(고레벨 유저가 저레벨 유저와 파티를 맺어 몬스터를 사냥해 주는 것. 쫄작이라고도 부른다)는 게 이런 건가? 레벨도 순식간에 25로 오르고 새 스킬도 얻긴 했지. 근데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거야?
“힐다, 이건 어때 보여?”
“도련님, 당장 내려놓으세요. 저 그런 원피스 입을 일도 없단 말이어요. 거기다 가격이…… 흐읍.”
“그래도 하나 가져. 나랑 외출할 때 입으면 되잖아.”
아드리안의 미소가 화사해지는 한편, 나는 그가 들고 있는 전설 원피스 옆에 뜬 가격 설명창을 보고 식겁하는 중이었다. 저 손바닥만 한 천 쪼가리가 1,200골드라니. 5천 골드짜리 작업복도 모자라 1,200골드짜리 원피스도 사겠다고…….
와, 얜 진짜 사람 잘못 만나면 다 털리겠다. 하인이랑 좀 친해졌다고 이 정도면 미래의 백작 부인 후보라도 만나면 저택을 통째로 넘기겠네. 저렇게 호구인 줄은 몰랐는데. 현실로 돌아가기 전에 사기꾼 조심하라고 철저히 교육해야겠다.
“그런 옷 진짜 필요 없어요. 저런 거 입었다간 다른 하인들 반응이 어떨지…….”
“이것도 사는 거지?”
내 말 따윈 귓등으로 반사한 아드리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