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33)

Side Story (2) 아드리안 카이사르 폰 데어 팔츠그라프

연약하고 상냥할수록 무너지기 쉽다.

아드리안의 피부가 성수에 닿아 타들어 가는 걸 보고 나서 프리실라의 세상은 완전히 부서졌다. 생의 유일한 위안이자 의미였던 아드리안이 사라지자 신조차 소용없었다. 잠들기 무섭게 비명을 내지르며 깨어나고 악마를 쫓아내야 한다며 아드리안의 방에 가서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방에 있는 온갖 물건을 때려 부수다가도, 아들이 다가오면 질겁하며 물러났다.

“오지 마라! 오지 마! 그 얼굴도, 어머니라고 부르는 목소리도 소름 끼치니까. 죽어 버려! 지옥에나 떨어져!”

금방이라도 아들을 안고 동반 자살할 기세였다. 뒤늦게 쫓아 들어온 하인들이 마님과 도련님 사이를 막아서고야 사태가 조금씩 진정됐는데, 하인들은 아드리안을 안쓰럽게 여기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두렵다니, 전혀 아니었다. 바닥까지 무너진 사람을 두고 그런 감정이 들 리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리실라의 방은 아드리안의 방과 가까워서, 가끔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대부분은 기도문을 외거나 악마를 저주하거나 아드리안을 불러 대는 목소리였는데, 루에이리 백작이 방문한 밤에는 특히 더 커졌다.

“루에이리, 제발 부탁해요. 저 악마가 제게 다가오지 않게 해 줘요. 아드리안의 껍질을 둘러쓴 악마가 오지 않도록 도와줘요. 우리 아드리안을 구해 줘요.”

“하…… 부인, 제발 정신 좀 차리시오. 아드리안의 모습을 한 악마라니. 고약한 악몽을 꿨나 본데, 꿈과 현실조차 구분을 못 해서야…….”

“우리 아드리안의 관을 짜 줘요. 아드리안의 묘비를 세워 줘요. 아무도 모르는 새에 죽임을 당한 불쌍한 아이. 이 땅 어딘가 추운 곳을 떠돌고 있을지 모를 내 아이를 추모하게 해 줘요.”

“미친 소리도 정도껏 하지. 멀쩡히 살아 있는 아들의 묘지를 만들란 말이오? 정말 정신을 완전히 놓아 버린 거요? 그 빌어먹을 신전에 계속 가도록 내버려 둬선 안 됐는데, 사기꾼 같은 사제 놈들이 헛바람만 잔뜩 넣어선…….”

아드리안은 눈을 감고 베개로 얼굴을 덮었다. 더는 듣고 싶지 않은데, 예민한 청력은 그들의 대화를 속속들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루에이리, 제발 들어줘요. 저 아이는 우리 아들이 아녜요. 성수에 반응해서 살갗이 타들어 가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나라고, 나라고…… 이 사실을 인정하기 쉬웠는지 알아요? 얼마나, 내가 얼마나 저것을 사랑했는지…….”

“세례 세례 하더니 이젠 악마라고 하는군. 애초에 진짜 악마라면 저런 약한 몸으로 태어날 리가 없잖소. 차라리 악마였다면…….”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니오.”

“제발, 루에이리. 이렇게 무릎 꿇고 빌게요. 내 아들을 찾아 줘요. 흐윽, 내 아들을…… 차라리 당신이 빼돌렸다고 해 줘. 내 아들의 영혼을 찾아 줘요. 묘비를 세워 줘, 장례식을…….”

“미쳤어. 완전히 미쳐 버렸군.”

혀를 차며 돌아 나오는 루에이리. 그를 붙잡다가 주저앉아 우는 프리실라. 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생생했다. 가슴 한쪽이 뻐근했다. 이건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깨닫기 두려워 알기를 거부하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성수 사건 이후 아드리안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오늘은 어머니가 악몽을 꾸진 않았는지,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져 만날 수 있진 않을지. 저 멀리 들여다보다 물러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손을 용기 내어 잡아 주고 싶다. 당신이 그토록 아드리안을 그리워한다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아드리안의 조각으로 마주 보고 싶었다. 설령 기만일지라도 당신이 행복해한다면 진짜 아드리안도 기뻐할 테니까. 그 정도 위로는 해 줄 수 있기를. 열이 끓어 죽어 갈 때 당신의 손은 무척 따뜻했고, 우습게도 그 온기에 큰 위로를 받았으니까.

그녀가 미쳐 있는 동안에도 종종 유자나무를 보러 갔다. 나무 몇몇 개는 이미 가지치기해야 할 시기가 지나 버렸는데, 혼자 힘으로는 정원 가위 하나 들 수 없었다. 프리실라가 있었다면 함께 들어 주었을 텐데.

몇몇 하인들이 온화하던 마님이 왜 저렇게 됐는지 수군거리며 지나갔다. 하늘이 유독 맑은 날이었다.

아드리안은 문득 모든 걸 내려놓고 저택을 나섰다. 수년 동안 창밖으로 저택을 둘러보았으므로 보초병이나 하인들이 언제 어느 곳을 비우는지 알았다. 저택을 나와 물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끝없이 걸어갔다.

걷고 또 걷자 이윽고 커다란 강에 이르렀다. 바다처럼 드넓은 강은 쏴아아, 쏴아아 소리를 내며 하얀 물보라를 머금고 있었다. 이 하찮고 작은 몸뚱이는 금세 집어삼킬 수 있는 넉넉한 품이었다.

죽기 좋은 날이야.

언젠가 죽을 날이 있다면 이런 날을 택하리라 상상한 적이 있었다. 죽음을 초월한 사탄이었기에 죽음이 또 다른 낭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죽을 이유는 딱히 없었으나 살고 싶은 이유도 없었다. 릴리트는 모든 힘을 잃고 소멸해 버렸으니 복수심에 기대어 힘을 찾아 나갈 수도 없었다.

지쳤다. 피곤했다.

사탄의 강인한 육체로 살아갈 동안에는 타고난 강함에 기대어 살았는데, 인간의 생은 너무나 번잡하고 고단했다.

공포와 경멸에 젖은 프리실라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그가 아드리안의 몸을 차지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고통에 무감해지지 못하고 괴로워했으며 배척하는 눈에는 상처받았다. 걸레짝만 못한 몸을 평생 끌어안은 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자 절망스러웠다.

부지불식간에 덮쳐 온 수많은 감정이 그를 놀라게 했다. 연약한 생물로만 취급했던 인간의 감정에 사탄의 영혼이 흔들리고 있었다. 천 년 넘게 지탱해 오던 고요가 깨지고 말았다.

인간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사탄은 더 이상 강하다고 할 수 없었다. 수많은 세월 배척당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강하기 때문이었는데, 이젠 셀 수 없이 많은 약점을 껴안은 인간일 뿐이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게 나았다.

거대한 강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인간의 눈은 아주 다양한 색을 볼 수 있었지만, 그에게 세상은 검은색이거나 흰색이었다. 그리고 세 개의 세상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제각기 검거나 하얘서, 각자 머물 곳이 있었다.

그는 홀로 잿빛이었다. 검지도 희지도 않은 회색이어서 평생 어디에도 머물 수가 없었다.

나는 사탄의 기억이 스며든 아드리안인가? 아드리안의 기억이 남은 사탄인가?

아니면 병약한 몸을 견디지 못해 사탄이라는 망상을 만들어 낸 미치광이인가?

그조차 알지 못하는 덜떨어진 잿빛. 갈기갈기 찢긴 채 너덜거린다.

그는 그대로 강으로 몸을 던졌다. 첨벙! 덤벼든 건 그인데, 이상하게 물살이 때리는 따귀를 온몸으로 맞는 듯했다. 순식간에 몰려든 물이 귀와 코와 입을 막았다. 시린 물살에 체온이 빠르게 떨어지며 손끝부터 마비되기 시작했다.

흐르는 푸른 강물 위로 희미한 빛이 보였다. 팔다리에서 힘이 금세 쭉 빠지는 게 마음에 들었다.

강물 안은 춥고 고독했다. 낮은 끝으로, 어둠 속으로. 요란하지 않고 고요한 끝이었다. 악마는 죽이기 쉽지 않아서 죽음이 매양 요란했는데, 인간은 숨을 못 쉬기만 하면 죽는다니 이처럼 수월할 수가 없었다.

그가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흰 거품을 일으키며 거대한 파도가 치더니 수면 위로 물기둥이 솟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직선이 곡선으로 유연하게 휘어지고는, 땅 위에 아드리안을 뱉어 냈다.

“쿨럭! 쿨럭, 쿨럭, 큽…… 크, 윽…….”

매운 연기를 마신 듯 기침이 쏟아졌다. 코고 귀고 할 것 없이 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흠뻑 젖은 채로 내동댕이쳐지는 바람에 온몸이 흙투성이다.

아파.

온몸이 난도질당하는 듯 아팠다. 입 밖으로 쏟아 내는 물이 점점 붉어졌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도무지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법을 몰랐다.

거친 기침을 쏟아 내며 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잠잠하고 평화로웠다.

고통을 무시하고 다시 강물에 몸을 내던졌으나, 번번이 같은 방식으로 육지로 밀려났다. 나중에는 일어설 기력조차 없어서 흙바닥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눈앞이 가물가물해지자 사탄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리석은 것. 태초신이 최고의 창조물인 너를 죽게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 죽음조차 너를 거부했는데 이제 어쩔 셈이지?

“하…….”

힘없는 웃음이 터졌다. 이러고도 살라니…….

이 꼴이 되고도 생을 이어 가라는 건 조롱의 의미밖에 없었다. 이런 자신이 태초신에게서 가장 사랑받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가장 경멸하는 상대가 아닐까 싶은데.

아드리안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여기 아이가 쓰러져 있다는 고함이 귓가에 왕왕거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침대에 누운 채였다. 아드리안의 방. 다신 돌아올 리 없다 여겼던 그곳이었다.

강물에 몸을 내던진 덕에 그는 또다시 길게 앓아눕고 말았다. 병환은 훨씬 깊어져서 잠들 새도 없이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고, 혀를 깨물 힘조차 없어 개처럼 헥헥거렸다.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소멸한 릴리트라도 다시 불러들이고 싶을 지경이었다. 막상 약한 모습을 보면 더한 경멸을 느끼며 죽여 줄지도 모르니까.

그는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침대에서 살았다. 수많은 진통제를 삼키고 겨우 일어난 날, 죽어 가던 하인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쭉 그렇게 살았어야 했을 것이다.

하인을 죽이자 아드리안의 한쪽 팔에 옅은 흉터가 드러났다. 사탄의 날개가 남긴 자상 흉터. 그 흔적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죽지 못한다면 온몸을 찔러 대는 고통을 줄이는 게 급했다. 아드리안은 릴리트의 예언을 해석하며 차분히 살인을 계획했다.

【가장 열등하게 여기던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그들의 생명력을 갉아먹지 않고는 연명하지 못하게 되리라.】

이건 인간을 죽여서 건강과 악마의 힘을 되찾으라는 뜻.

【돼지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으로 영겁의 시간을 견뎌라. 무리 지은 파수꾼들이 당신을 발견하거든 갈기갈기 찢어 먹도록 하리라.】

인간에게 기생하는 인간으로 평생을 살되, 살인을 들키면 이 세계의 파수꾼인 경관들이 죽이러 온다는 뜻.

이 규칙에 따라 몰래 살인을 해 왔지만, 천적에 관한 세 번째 저주는 전혀 해석할 수 없었다. 그가 절대 죽여선 안 되는 이를 ‘천적’이라고 칭하는 듯한데, 그런 존재가 생길 리 없잖은가. 다행히 하나 분명한 건 악마의 힘을 되찾아 갈수록 건강을 되찾고 사탄의 인격도 강해져서 자살 의지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전히 외롭고 고단하며 배척받는, 잿빛 삶이었으나 이어 나갈 만했다. 오로지 고통을 줄인다는 목적에만 집중하니 살아남기도 쉬웠다.

그렇게 다섯 명을 죽이며 시간을 버텨서야 겨우.

“그냥 정들어서 그런 거였어요. 정들어서. 됐죠?”

“정?”

“그래요, 정. 도련님은 정 모르죠? 우리가 이제껏 나눈 대화가 몇 번이고 같이 쌓은 오해가 몇 겹이며 주고받은 체취가 얼마나 진해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정이란 건 그렇게 가볍고 단순한 거예요. 주제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정이 들어서, 친해진 것 같아서. 도련님께서 잡혀가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불편해질 것 같았어요. 그게 다예요. 도련님은 정 같은 거 모르겠지만…….”

“아니, 알아.”

“…….”

“정확히는 원래 몰랐지만, 이제 확실하게 알겠어. 나도 정들었나 봐. 너한테.”

실체를 알면서도 곁에 머무는 인간이 하나 생겼다. 사람 죽이는 악마인 걸 알면서도 정들었다고 말하는, 시끄럽고 이상한 여자가.

“닥터 휴버트, 정이 뭡니까?”

“정요?”

맥박을 재 보다 말고 휴버트가 되물었다. 아드리안이 살인 외의 일을 묻는 건 드문 일이라 의아한 눈초리였다.

“정이야 뭐…… 친근감 아니겠습니까. 자주 보기만 하면 생기는 단순한 친근감.”

“그럼 호감은 어떻습니까? 호감도 정과 비슷한 거겠죠?”

“아니죠, 그건 좀 다르지요. 호감은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이니 정보다 훨씬 나아간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뒤로 휴버트가 자기 아내와 어떻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연애를 시작하게 됐는지, 첫 키스와 프러포즈, 달콤했던 신혼 생활까지 줄줄 읊어 댔지만, 아드리안은 이미 ‘호감이 정보다 훨씬 나아간 감정’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상해 듣지 않고 있었다. 힐다는 제게 정이 들었다고 하면서 마을에서 알게 된 친구들에게는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기껏 처음으로 정든 인간이라고, 죽이지 않길 잘했다고까지 했는데. 이렇게 가벼운 감정이었다면 정들었다느니 할 때 말 얹지 말 걸 그랬다. 정이 아니면 뭐냐는 질문에 딱히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어쨌든 억울한 기분만 들었다.

이게 좋아하는 걸까? 아마 아닐 것이다.

릴리트는 사탄을 사랑한다며 식욕을 느꼈고, 힐다는 체취가 좋다느니, 가운에 코를 박고 킁카킁카거리고, 도련님을 좋아해서 그런다느니 하며 지옥에서도 본 적 없는 꼴로 들이박았다. 그런 게 좋아하는 거라면 아드리안은 죽을 때까지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릴리트보단 힐다가 비위를 덜 상하게 했지만…… 어쨌든 그런 게 좋아하는 감정이라면 양쪽 다 거부하고 싶었다.

“약을 바꿨더니 어제보다는 숨소리가 더 나아졌군요. 다행입니다. 하지만 언제 다시 심해질지 모르니 제물은 빨리 준비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택에 경감이 찾아왔다던데. 일을 진행해도 괜찮겠습니까?”

생각을 잠깐 접고 휴버트에게 물었다. 파수꾼인 경관들이 저택 주변에 얼씬거린다는 건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 인간을 죽여 왔다. 그 덕분에 그는 어렸을 때처럼 고통에 몸부림치진 않았지만, 살인을 들키면 언제든 파수꾼에게 찔려 죽을 각오로 하루하루를 넘겨야 했다. 살인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만큼 경계심이 그 자리를 메웠다.

“허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도련님. 경관들이야 늘 저런 모습을 보여 주려고 노력하잖습니까. 팔츠그라프 가를 방문한 목적도 대개 뻔하게도, 돈 달라고 시위하는 거니까요. 그들이 돈 받고 범죄자 풀어 주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 해리슨 경감이라는 작자는 조금 다른 듯하더군요.”

“아버지를 만나 보고도 저택 안에 들어오고 싶어 안달 나 있었습니다.”

“허허, 그렇군요. 해리슨 경감은, 글쎄요. 최대한 상대 안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범죄자에 대한 증오도 대단하기로 유명하고. 유능하고. 윗선에 미움받는 바람에 출셋길은 막힌 듯싶지만, 직함이 중요한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다루기 까다롭겠지만…….”

“유능한데 왜 윗선에 미움을 받습니까?”

“몇 달간 밤새 가며 힘들게 잡아넣어도 위에서 비밀리에 돈을 받고 풀어 주니까요. 귀족 신분이면 더 큰 돈을 받을 수 있으니, 다들 꽤 활용해 왔는데 해리슨 경감이 크게 반발했다더군요. 능력으로 치면 우두머리가 되어 있어야 할 인재인데, 자꾸 문제를 일으키니 계속 미끄러진 것이죠. 그리고 이번 방문은 힐다가 진술을 워낙 잘해 주어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

“허허, 흉악한 범죄자들도 그 앞에선 꼼짝 못 한다고 하던데. 대들기까지 했다니 놀라울 따름이죠.”

‘목숨 걸고 도련님 편을 들었다’라며 유난히 생색내던 하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같은 인간을 죽이는 데에 거리낌 없이 비정한 휴버트가 만만찮다고 평할 정도인 경감을 상대로 했다면 칭찬해 줄 만했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겁쟁이인 걸 알기에 더 그랬다.

진료를 끝내고 휴버트가 떠나자 아드리안은 일과를 마저 보내기로 했다. 바로 화분에 물을 주는 일이었는데, 주먹만 한 모종을 적당히 키워서 정원에 옮겨 심을 때면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요즘 그에게 새로 생긴 고민이 있으니, 최근 키운 화분이 자꾸 갈색으로 변하며 말라 간다는 거였다.

“왜 자꾸 죽는 거지?”

아드리안은 몹시 섭섭해하며 화분에게 말했다. 악마의 꽃은 이렇게 쉽게 죽지 않았는데. 물과 비료를 전혀 주지 않아도 쑥쑥 자랐는데, 지상의 꽃과 나무는 툭하면 죽었다. 악마의 꽃을 키우며 식물을 잘 돌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지상에 태어나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도련님. 그 화분 말인데요. 이리 내세요. 압수예요.”

“화분을? 왜?”

“화분을 이렇게 다 죽여 놓고 왜냐니요. 저번에 가져간 화분도 아직 다 못 살렸는데, 어디서 자꾸 가져와서 죽이시는 거예요? 진심으로 식물을 아끼시는 거 맞아요? 번번이 죽이시는 거 보면 식물 킬러의 재능이 있으신 거 같거든요. 둘 다 압수예요.”

아까 힐다에게 화분을 빼앗기기도 했었지. 식물 킬러가 아니냐는 험한 말을 건네긴 했지만, 저번에도 화분을 살려주겠다고 가져가기도 했으니 믿고 맡기긴 했다. 식물의 친구인 정원사를 죽이자고 할 때는 참으로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해였던 모양이다.

살려 두길 잘했다.

그는 거듭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고 방해만 되는 데다 유난히 두려워하는 눈빛이 거슬려서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심지어 고분고분하지도 않아서 여러 차례 고민했고 실제로 마음먹기까지 했는데, 그러지 않기를 잘했다.

처음 죽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 저택의 모든 인간은 그에게 정수리만 보이며 굽신거렸는데, 힐다는 얼굴을 들고 있었다. 악마인 걸 알고 두려워하면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언제까지 버틸까? 신기해서 계속 지켜보고 싶었다.

곁에 두고 보다 보니 힐다의 생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의 곁에서는 모두가 죽거나 자살하거나 식욕을 느끼거나 집착하거나 피하거나 경멸했는데. 이 하인은 조금만 위협해도 겁먹으며 움츠리다가도 금세 어깨를 펴고 생기발랄하게 떠들어 댔다. 기가 죽지 않아 오히려 귀여웠다. 체취가 좋다며 달려들 때는 그 기세에 눌리기도 했는데, 이처럼 극적인 감정의 변화를 본 적이 없어 관찰용으로 두기 좋았다.

하지만 하나 걸리는 게 생겼다. 하인의 마음이 지나치게 무르고 약하다는 점이었다. 저렇게 심약해서, 지상으로 올라온 악마들을 우연히 만나면 어쩌나 우려가 되었다. 가뜩이나 릴리트가 일으킨 거대한 전쟁 때문에 중죄를 지은 악마들의 영혼 몇몇이 지상으로 쫓겨났는데 말이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이미 지상으로 내쳐진 영혼이 생겼으니, 사탄과 릴리트가 사라진 후에는 얼마나 더 많은 악마가 쫓겨 올라왔을지 모를 일이었다. 비록 힘은 모조리 잃었겠지만, 악마의 악의는 무시할 게 못 되니까.

인간은 너무 놀라면 심장이 멎어 죽기도 한다고 했다. 하인의 긴 수명을 위해 그 심약한 마음을 강하게 단련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얼마 전엔 호신술로도 쓸 수 있는 몇 가지 동작을 가르쳐 주었다. 처음이라 허둥대는 듯했지만, 신체 조건이 워낙 좋아 잘 써먹으리라 생각하면서.

내친김에 다음 날 마을에 가서 실전으로 써먹어 보자고도 제안했다. 지옥에 머물 때 악마 부하들은 어디든 데려가 달라고,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배울 수 있다며 애원했으니까. 힐다는 지상에서 가장 가까이 둔 부하였으므로,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고 싶었다.

아쉽게도 그녀가 배운 걸 직접 해 보진 못했지만, 무척 값진 경험이었던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힐다, 괜찮아? 얼굴이 창백해.”

“괘, 괜찮아요. 괜찮…….”

부하 악마들은 사탄의 가르침을 간절히 원했고, 뭐든 가르쳐 주면 무척 황송해하며 고개를 조아리곤 했다. 입술을 저렇게 떠는 거로 보아 힐다 또한 감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가르치는 방식에 대해 몇 번인가 투덜거렸지만, 크게 중요한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충분히 황송해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하인의 심약함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성장이 느린 부하지만 ‘정’이라고 명명한 어떤 것이 들긴 했으니 잘 다독여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연약한 마음이 놀라운 감정을 전해 주기 전까진.

“잠깐만요, 도련님! 잠깐만! 가져갈 게 있으시잖아요! 손 줘 보세요. 손요. 두 손 다 내밀어 보세요.”

“…….”

“자요, 도련님 상비약. 종류별로 챙겨 놓은 건데 혹시 모르니까 다 가져가세요. 제가 옆에 없을 테니 아프면 곧장 찾아서 드시고요. 각각 무슨 약인지는 알고 계시죠?”

혼자 마을에 다녀오기로 한 날, 하인이 아드리안의 두 손에 약을 가득 쏟아부었다. 약이야 매일 아침저녁 가져다주긴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아니, 언제부턴가 달라졌다. 정기적이고 의무적인 심부름에서 벗어나, 그가 아플 때면 그 자신보다 더 빠르게 알아차리고 약을 내밀었다. 언제, 어떻게 아픈지 다 안다는 듯.

넌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걸까.

종류별로 야무지게 챙겨 놓은 약봉지를 보자 이상할 만큼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약한 것들은 살아남기 위해 교활해지게 마련인데, 너는 약하지만 영악하지 않았다. 맑고 곧은 배려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모두가 사탄이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불길한 존재고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지를 따져 왔는데, 그녀는 그의 아픔을 들여다보았다. 사탄이니 당연히 악할 것이고, 사탄은 강하니 고통이나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거라고, 심지어 자신조차 그렇게 생각해 왔는데 너는…….

닿지 못할 거리에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다. 손 닿을 거리에 네가 있다. 어색함에 숨이 멈추었다. 묘하게 허가 찔린 느낌이라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물까지 챙겨 드릴 필요는 없겠죠? 도련님께서 마을 중앙에 서서 ‘물!’이라고 외치기만 하면 양동이째로 떠다 바칠 사람 많아 보이던데.”

“…….”

“도련님? 도련님? 듣고 계세요?”

힐다에게 잘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마을로 향했다. 무얼 해 줄까 마차에서 고민하다 보니 주머니 속 연필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힐다는 유급 휴가인지, 무급 휴가인지 신경 쓸 정도로 돈에 집착하는 데 반해 그 돈을 죄다 그의 선물 사는 데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인의 재정 상황이 염려되는 한편, 똑같이 선물을 사서 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아드리안은 곧장 정육점으로 향했다.

“달달한 고기 주십시오.”

힐다는 그의 식사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면서 단것과 고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니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선물은 단 고기일 것이다.

팔츠그라프 가 도련님이 오셨다며 두 손을 모은 채 주문을 기다리고 있던 정육점 주인이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달달하다는 힐다의 표현이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다.

아드리안은 조금 더 쉽게 풀어 설명하기로 했다.

“설탕에 절인 고기 주십시오. 케이크처럼 달았으면 좋겠습니다만.”

“도련님, 송구합니다. 그런데 그런 고기는…… 없습니다. 별로 찾는 손님도 없고 말입니다, 네…….”

“당신! 도련님께 무슨 소리야?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드려야지! 호호,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도련님. 금방 만들어 오겠습니다. 방문해 주신 것만 해도 영광이어요.”

땀을 뻘뻘 흘리며 거절하려는 주인의 등을 후려친 여자는 아마 아내인 듯했다. 안에서 쩔쩔매며 달달한 고기를 만드는 걸 보니 저택 주방장들을 시킬 걸 그랬나,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힐다가 늘 그랬듯 선물은 직접 사 와야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잠시 후 완성된 고기를 떠밀리듯 받았다. 팔츠그라프 가 도련님께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냐며 한사코 거절하는 통에 선물을 공짜로 사고 말았다.

힐다가 좋아해야 할 텐데.

아드리안은 손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선물을 보며 생각했다.

“케이든! 오늘도 한 건 해낸 거야? 누님께서 좋아하시겠어.”

선물을 가지고 마차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두 블록 너머 뒷골목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걸음이 멈추었다.

케이든……. 머릿속으로 수백 번은 족히 되뇐 이름이었다. 힐다가 호감……. 정이 아닌 무려 호감을 느낀 상대가 저기 있었다. 정 따위보다 훨씬 발전된, 호감을 느끼는 상대 말이다. 어떻게 할지 머리가 답을 내리기 전에 몸이 먼저 홱 틀어졌다. 그는 이미 케이든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뭐야? 거기 누구야?”

검은 골목 속에서 위협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둠을 꿰뚫어 보는 눈이 두 남자를 훑었다. 한쪽은 산만 한 덩치에 얼굴에 칼자국 흉터가 있었고, 다른 한쪽은 마르고 키가 컸다. 목소리로 미뤄 보아 마르고 키가 큰 쪽이 케이든인 듯 보였다. 차림새에 비해 값비싸 보이는 지갑은 훔쳐 온 게 분명해 보였다.

“귀족 같은데, 귀족은 건드리면 성가시기만 해. 본거지로 돌아가자.”

“잠깐만, 우리를 계속 쳐다보고 있잖아. 이봐, 무슨 볼일 있어?”

“…….”

“보아하니 귀한 집 도련님 같은데, 한 대 얻어맞기 전에 꺼지지 그래? 아니면 너도 이 지갑을 노리기라도 한 거냐? 그래?”

죽일까?

아드리안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은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자기들끼리 저속한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있자니 묘한 살의가 들끓었다. 품위라곤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좀도둑들에게 어쩌다가 호감까지 주게 되었을까. 내게도 주지 않는 호감을, 고작 이놈들에게.

힐다가 평생 저택에서만 일하는 바람에 세상 물정이 어두워 속아 넘어간 게 분명하다. 항상 좋지 않은 재정 상태로 보아 저 건달들에게 돈을 뜯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아끼는 하인이 순진하게 속고 있다는 생각에 또 다른 분노가 일었다. 몹쓸 양아치들이 계속 힐다 곁을 맴돌도록 둘 순 없었다. 고작 정만 붙은 자신으로서도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주인이 반대로 하인을 지켜 줘야 할 때도 있는 법. 분노와 평정심 사이를 번갈아 오가던 그가 냉정하게 결정했다.

“이것 봐, 귀가 먹었나? 아까부터 마음에 안 드는 눈으로 쳐다보기나 하고 말이야……. 한 대 맞아야 울면서 꺼질 모양이지? 그래?”

역시 죽여야겠다.

아드리안은 제 멱살을 틀어쥔 손을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쉽게도 가진 건 주머니 속 연필이 다였지만, 연필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미리 날카롭게 깎아 둔 건 잘한 일이었다.

“이, 새끼가……!”

참다못한 케이든이 주먹을 휘둘렀을 때였다. 간발의 차로 상체를 살짝 젖혀 피하자 크게 휘청거린다.

아드리안은 균형을 잃은 틈을 타 한쪽 팔로 목을 단단히 감은 후, 연필을 목젖 아래에 박아 넣었다. 콰득. 살이 꿰뚫리는 생생한 감각과 함께 구멍에서 솟구친 피가 손을 적셨다. 끔찍한 비명이 검은 골목 안에 메아리쳤다.

“케이든, 케이든!”

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또 다른 남자가 놀라서 소리쳤다. 손에 힘을 주어 연필을 계속 밀어 넣으며 비틀자 구멍이 벌어졌다. 왈칵왈칵 쏟아지는 피를 보자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관통하기에 연필이 터무니없이 약했던지, 목 안에서 연필심이 부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칼이라도 들고 올 것을, 아쉬운 일이었다.

“아아…… 아아악!”

케이든이 아드리안의 팔을 뿌리치며 골목 안쪽으로 비틀비틀 도망쳤다. 이 또한 아쉬운 일이었으나 고통에 몸부림치는 남자를 계속 붙들고 있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빌어먹게 약한 몸. 아드리안이 혀를 차며 연필을 땅에 내버리고는 다시 골목 안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허리를 구부린 채 기침을 쏟아 내고 있는 케이든을 몸집 좋은 남자가 업으려다 말고 멈칫거렸다. 뱀을 마주친 쥐가 얼어붙은 꼴이었다.

저놈도 죽일까?

마을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라고 했으니 저 남자도 한통속이겠지.

죽여야겠다.

걸음을 옮겨 가려던 아드리안이 뒤늦게 손에 들린 선물의 존재를 인식했다. 이미 케이든의 피가 몇 방울 튀어 있었다. 금세 닦아 냈지만, 이 이상 더럽힌 선물을 힐다 손에 쥐여 줄 순 없는데. 게다가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호감…… 을 가졌던 상대 두 명이 동시에 죽어 버리면 그 심약한 힐다가 충격받을 수도 있다.

죽이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다만 힐다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조치할 필요는 있겠지.

“잠깐만, 잠깐만!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인마, 케이든, 어서 일어나! 우리 이대로면 죽는다고!”

목을 꿰뚫린 상처가 치명적이었던지 케이든이란 놈이 먼저 쓰러지고, 덩치 큰 남자는 그런 그를 깨우기 위해 흔들고 있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동료를 남겨 두고 도망치지 않는다니, 참으로 갸륵했다. 하지만 고작 갸륵함으로 죄를 없앨 수는 없는 법이다.

“……!”

섬광처럼 빛나는 푸른 눈과 마주치자 그들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아드리안은 잘 차려진 정찬을 먹듯 그들 앞에 멈춰 서서 오만하게 내려다봤다. 그에겐 고작 최면 능력밖에 남지 않았다. 최면으로 상대의 생존 본능을 이길 순 없지만, 사용하기에 따라서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로 만들 수 있었다.

형체 없는 손이 두 남자의 머릿속에 침입했다. 상처를 헤집듯 손쉽게 비집고 들어간 칼날이 보이지 않는 칼집을 마구 내놓았다. 기억의 탑은 사정없이 붕괴시키고 의식은 짓눌러 터뜨렸다. 눈이 돌아가 흰자위만 보였다. 이제 그들은 힐다 앞에 나타나기는커녕 정상적인 사고조차 이어 나갈 수 없을 터다.

아드리안이 눈을 깜빡였다.

맥없이 흔들거리던 몸이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엎어진 채 미동 없는 두 남자를 내려다보며 아드리안이 혀를 찼다. 지옥에서 내리던 징벌에 비해선 어린애 장난 수준이다. 하지만 이 몸에 아무런 능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어쩌다 이렇게 되어선…….

다소 씁쓸하게 뒷골목에서 나왔는데 묘하게 상쾌한 기분도 동시에 들었다. 달달한 고기를 받으면 힐다가 얼마나 좋아할지 기대가 컸다. 마차로 향하는 발걸음이 몹시 가벼워졌다.

가끔 힐다에게선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악령들이 치는 장난질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악령의 장난질을 이용해 자신을 한 번 재우기도 했다. 단 6초 정도인 듯했지만, 능력이 먹힌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경계할 만했다.

아드리안은 힐다에게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뜻에서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크게 놀랄 수도 있으니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상세히 설명까지 해 주었는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 힐다가 사색이 됐다.

눈과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그녀의 시야 속에 뭐가 보이는지 대강 파악됐지만, 그 얼굴을 보니 모른 척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힐다가 악령에게서 얻어 가는 힘을 차단하는 게 좋을까?

방법은 간단했다. 목적성이 보이는 행동, 혹은 반복적인 행동을 차단하는 것.

본인은 몰랐겠지만, 그녀는 만사 귀찮은 얼굴로 게으름을 피우다가 가끔 하늘에서 뭔가 떨어진 것처럼 횡재했다는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잡초를 원수 대하듯 뽑거나 창문을 깨뜨릴 듯 닦거나……. 아무리 인간에 대해 잘 모르는 그조차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반복적인 행동을 하곤 했다.

다른 인간들은 단순히 일을 열심히 한다고 여기는 모양이지만, 악령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그로선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야 할지 고민이 됐다.

미리 차단하자는 쪽으로 기울다가도, 파랗게 질린 힐다가 떠오르자 고개를 젓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케이든 일행을 건드린 건 힐다에게 들키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로 준 연필을 그런 식으로 썼다는 걸 알면 섭섭해할 수도 있으니까. 겁이 많으니 무서워할 수도 있고…….

그녀가 무서워하는 건 하기 싫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기껏 선물을 사 왔지만, 아쉽게도 힐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온종일 일하고 생고기를 직접 구워 먹는 건 또 다른 노동이겠지. 아무래도 선물을 잘못 고른 것 같다. 그는 잠깐 고민에 빠져서 과거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옥에서도 군주가 그의 선물 감각을 지적하러 온 적이 있었다. 정성껏 키운, 사실 정성과는 아무 관계 없이 악마의 꽃이 피었을 때, 크게 감격해서 방문자들에게 꽃 한 송이씩 나눠 주었을 때였지.

꽃을 선물 받은 악마 중 1/3 정도가 돌아가는 길에 머리가 뽑혀 죽었고, 나머지 1/3이 무사히 돌아갔으나 뒤늦게 신체 일부가 크게 다치고 말았다. 나머지 1/3은 시체조차 찾을 수 없어 꽃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일로 사탄의 저택을 방문한 군주는 악마의 꽃에서 느껴지는 음침함에 크게 흠칫했다.

“사탄, 저것들을…… 대체 왜 기르는 건가? 아니, 아니. 자네 취향을 절대 무시하는 건 아니네만. 나는 모든 악마의 취향을 존중해. 이해한다는 건 아니지만…….”

“아름답지 않습니까? 저 영롱한 꽃잎이 마치 태초신이 자아낸 예술 작품 같군요.”

“영롱하긴 개 같은…… 아니, 개같이 영롱하다는 감탄이었네. 사탄, 식물을 사랑하는 자네 마음은 알겠지만…… 이제껏 저 꽃에 공격받은 악마가 몇인지 아나? 솔직히 저 악마의 꽃은 악마 대적용 무기나 다름없어. 천사들과의 전투에서보다 더 많이 죽은 것 같단 말이야.”

“악마 대적용 무기라니 너무한 말씀이십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식물에게 그 무슨.”

“아니, 뭐든 좋으니 제발 나 좀 살려 주게. 민원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피곤해 죽겠어. 벌써 며칠째 잠을 못 잤단 말이야. 벨제부브가 저 악마꽃 때문에 얼마나 난동 피웠는지 알기나 하나? 나한테도 한번 머리 씹혀 보겠냐고 꽃을 들고 와서……. 물론 사탄, 자네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건 알고 있네. 악의가 없으니 더 문제지, 이건 뭐 처벌도 못 하고 진짜 확 그냥……. 하하, 방금 말은 농담이네, 농담이야.”

“……알겠습니다. 의도가 좋았다고 해서 선물이 전부 의미 있진 않겠지요. 꽃을 선물하는 건 그만두겠습니다.”

“고맙네, 고마워. 하하, 그런데 말이야. 이참에 그냥 전부 불사르는 건 어떤가? 자네가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있으면 내 당장 뿌리째 뽑아서 지옥의 불에 던져 버릴 텐데……. 하하, 하하. 장난이니 그리 무섭게 쳐다보지 말게. 사랑스러워서 그렇지. 빌어먹게 사랑스러워서.”

지옥에서의 아련한 기억이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그때 한 약속 때문에 악마의 꽃을 더는 나눠 주지 못하게 됐지만, 사탄에겐 항상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꽃의 아름다움은 저 혼자 보기엔 아까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군주께서도 기계적으로 웃긴 했으나, 실은 악마의 꽃을 더할 나위 없이 아끼리라 확신했다. 악마는 지극히 탐미적인 존재니까 눈이 있다면 그 아름다움을 봤겠지. 지금이라도 가능하다면 저택으로 다시 돌아가 정원을 확인하고 싶지만, 이제는 불가능하니…….

어쨌든 과거의 경험에 비춰 봐도 선물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드리안은 즉시 주방장을 불렀다. 아무리 좋은 선물이라도 상대에 따라 의미는 얼마든지 달라지는 것. 힐다에게 가장 특별한 선물은 특이한 식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요리일 거다. 고기로 달콤한 디저트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들은 주방장은 ‘그런 괴상한 걸 드신다고?’라는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이해했다.

도련님이 항상 식사를 남기는 걸 두고 요리사들은 부족한 능력 때문이라고 자책해 왔다. 아무리 조리법을 바꾸고 메뉴를 다양하게 만들어도 세 입 이상 먹는 일이 없어 얼마나 좌절했던가. 어떤 요리사는 요리 수행하러 속세를 떠나겠다며 홀연히 사라져 버리기까지 했으니, 남은 요리사들은 도련님을 만족시키는 건 죽을 때까지 불가능할 거라는 데에 좌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련님이 실은 해괴한 입맛의 소유자였다니! 그럼 그렇지, 백작님이나 마님은 매번 극찬을 아끼시지 않는데 도련님만 유독 가리시는 게 이상하더라니. 이제야 미스터리가 풀린 거다.

고기로 어떻게 달콤한 디저트를 만들지 막막하긴 했지만, 도련님의 남다른 입맛을 확인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요리사는 구름 위를 걷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고, 아드리안은 힐다의 입맛을 다시금 괴이쩍다고 여기며 읽다가 만 책에 눈을 돌렸다.

그날 저녁 식사부터 요리사들은 곧장 해괴한 음식들을 내왔다. 정상인의 입맛이라면 절대 먹지 않을 디저트들이었지만, 흥미롭게 관찰하는 눈을 보니 마음에 쏙 드신 모양이다. 고기 다쿠아즈라니, 스스로 감탄할 정도로 창의적인 요리다.

“어떻습니까, 도련님. 마음에 드시는지요?”

“나가.”

“예?”

“나가라고 했어.”

아니, 도련님께서 생애 최초로 맛있게 드시는 모습은 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단호한 명령에 우물쭈물하던 요리사들은 어쩔 수 없이 방을 나섰다. 아무리 그래도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나중에 빈 접시로 돌아오면 성공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그런 요리사들의 소원과는 관계없이 아드리안은 하인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괴상한 입맛을 맞춰 줄 요리를 준비했으니 이번만큼은 기뻐하리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힐다는 숙소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일급에 집착하는 만큼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기에, 혹시 악령이 나쁜 장난을 친 건 아닌지 우려가 됐다.

그래서 힐다의 숙소에 처음으로 찾아갔다. 상전이 일꾼을 만나기 위해 직접 움직인다는 건 지극히 드문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쓸데없이 눈에 띄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힐다의 방만 따로 옮겨 버릴지 잠깐 짜증스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커어어어.”

“…….”

힐다는 자고 있었다. 예전에 베개를 훔쳐 베고 잘 때만큼, 기가 막힐 정도로 깊숙이…….

왜 이 시간에, 누가 방에 들어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든 걸까. 이상하게 여긴 찰나 악령의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힐다는 악령의 힘을 자주 빌리고 있었다. 이름을 몇 번 불러 봤으나 눈꺼풀 한번 움찔하지 않는다. 그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서 책을 읽었다.

식사 시간으로부터 네 시간 정도 지난, 모두가 잠든 야심한 자정이었다. 정원에서 힐다의 숨소리가 들렸다. 보통 사람의 숨소리는 시끄럽고 산만하기 짝이 없어 대부분 차단하곤 하는데, 힐다에게는 요새 자주 귀 기울이곤 했다. 유독 생명력 넘쳐서 좋았다. 비슷한 맥락으로 식사하는 걸 지켜보기도 흥미로웠다. 온갖 병에 시달려 온 탓에 좀처럼 식욕이라는 걸 느껴 볼 새가 없었으니까.

야밤에 정원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힐다를 찾아가 또다시 주의를 주었다. 악령의 힘을 조금 더 조심해서 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녀는 이번에도 입술을 달달 떨었고 관대한 상전인 그는 얼마든지 황송해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황송해하는 게…… 아닌가?

처음으로 의문을 가지고 턱을 쓸었다. 그러고 보니 부하들이 보이던 모습과는 다소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우선 저 슬금슬금 물러나는 걸음. 툴툴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웃으면 늘 저렇게 물러나곤 했었지. 그럴 때마다 매번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겼는데, 어느새부턴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휴버트가 바친 제물 이야기를 잠깐 나누고 방으로 돌아왔다. 물러나는 발걸음이 이상할 만큼 눈앞에 어른거려 쉽사리 잠이 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저기, 도련님. 할머니는 살려 주면 안 될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힐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치란 말이야?”

오랜만에 제물이 준비된 날, 힐다가 처음으로 아드리안에게 부탁이란 걸 했다. 다른 부탁이었다면 하인을 아끼는 마음으로 관대히 들어주었겠지만, 이 문제에서만큼은 불가능했다.

사람을 죽이는 건 그에겐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으니까. 사람을 죽여야만 끝없는 죽음의 그림자와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이 동물을 도축하듯 그는 사람을 상대로 할 뿐이다. 그나마 인도적인 방식을 택해, 늙고 병들어 죽음에 다다른 인간만 죽인다는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에 힐다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사람이기 때문에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거라고. 현명한 대답이었으나 상대가 틀렸다. 악마의 영혼을 가진 그가 굳이 인간다워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아악! 아, 아아, 악마! 아아악마! 신이시여! 왜,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번 제물은 꽤 시끄러웠다. 병으로 다 죽어 가면서 목청은 방금 태어난 인간처럼 쩌렁쩌렁했다. 저 인간이 어떻게 알고 악마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금방 죽을 테니까.

아드리안은 항상 하던 대로 했다. 살인 흔적이 남지 않는 장갑을 끼고 목을 쥐었다. 팔딱거리는 맥박이 생생하게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이대로 힘만 주면 죽을 것이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대수로울 것 없는 죽음을 맞겠지.

철컹 철컹! 노인이 죽을힘을 다해 버둥거리는 통에 결박해 놓은 벨트가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신이시여! 가까이 오지 마! 아악! 아…… 악! 케…… 엑. 히, 힐다…….”

단지 두 손에 힘을 주었으면 끝날 일이다. 살인의 오랜 공백기를 메우고 점점 심해지는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 망설임 없이 해치우던 일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힐다의 부탁을 떠올리며 망설이고 있었다. 부탁하며 머뭇거리던 얼굴, 그리고 혹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희망의 빛이 꺼지지 않던 눈까지.

“크…… 으, 켁…… 힐…… 다, 힐다! 힐다야! 살려다오!”

죽일 수가 없어.

“어…… 헉!”

죽일 수가 없다…….

손이 떨어졌다. 노인의 죽음은 이미 악마의 손에서 떠나 신에게 넘어가 있었다. 지금쯤이면 평생 섬겼다는 신의 품에 안겨 있으리라고, 그가 어렴풋이 생각했다. 곁에서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휴버트가 당황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냈다.

“도련님? 방금 도련님께서 죽이신 거, 맞는지……?”

“……닥터 휴버트.”

몽롱한 목소리가 잇새에서 흘러나왔다. 저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 끔찍한 저주에라도 걸린 게 아니고서야.

“예, 도련님.”

“저는 이제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앞으론 다 죽어 가는 환자를 끌어들일 필요 없습니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휴버트는 불치병으로 죽어 가는 환자를 꾀어내 악마에게 제물로 바치고 수수료를 챙기는 일을 하고 있었다. 막대한 수수료는 아내의 희귀병을 치료하기 위한 연구 자금으로 쓰이고 있으니만큼 아드리안의 선언은 그에게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별다른 설명 없이 장갑을 벗어 던진 뒤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힐다.”

“히익!”

죽인 게 아니라고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어깨를 살짝 붙드는 것만으로 그녀가 기겁하며 엉덩방아를 찧는 바람에 말문이 막혔다. 움찔하며 손을 물렸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그를 마주 보았다.

익숙한 눈이었다. 모든 걸 결론 내린 눈, 두렵고 무서워하는 눈…….

아니야. 아드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힐다, 내가 안 죽였어. 믿어 줘. 내가 안 죽였어. 아니, 못 죽였어. 정말 안 죽였어…….

평생 변명해 온 역사가 없었기에 얼간이처럼 더듬거리기만 했다. 온갖 변명하는 말이 우글거리는데 단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상황 설명 하나 없이 내가 안 죽였다는 멍청한 소리만 되풀이했다. 설명할수록 점점 공포에 질리는 얼굴을 보자 기분이 놀라울 만큼 안 좋아졌다.

그녀가 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세상에 두려운 건 오로지 너 하나뿐이라고 말하듯이.

왜 계속 나를 무서워해? 정들었다고 했잖아. 네 입으로 직접 정들었다고 말했는데, 왜? 설마 거짓말이었던 거야?

“……그만 가 봐, 힐다.”

참지 못하고 그녀를 밀어냈다. 지금은 힐다도 당황하고 저 또한 정상이 아니니 조금만 진정하고 모든 걸 설명하리라 생각했다. 조금만 더 진정하면…….

하지만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는 법.

방으로 돌아온 아드리안은 더 큰 혼란에 빠져 버렸다.

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을 죽이지 못했다. 단지 힐다가 부탁했다고 해서……. 살인을 못 한다는 건 그에겐 생사를 건 큰 문제였다. 그 벌로 별안간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고 피를 토할 거다. 어쩌면 창문을 통해 정원을 구경하는 게 유일한 낙인 생활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겠지.

가장 큰 문제는 그게 후회스럽지 않다는 점이었다. 온몸이 쪼개지는 고통을 느끼는 한이 있어도 힐다 앞에선 살인하기 싫어졌다니. 원하면 가만히 누워 죽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이 나약한 면모가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웠다. 인간의 약한 마음에 마음껏 휘둘리라는 릴리트의 계략에 걸려드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멈춰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힐다를 애초에 죽여 버렸다면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 살려 두길 잘했다고 여겼을 때는 이런 혼란을 가져오리란 건 몰랐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죽여 버리자.

하, 부탁 한번 했다고 다 죽어 가는 노인 하나 못 죽이고 쩔쩔맸으면서 당사자는 퍽 잘 죽이겠구나.

상반된 두 개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려 댔다.

그녀를 붙잡고 어떻게든 설명하고 싶기도 했다. 징그럽겠지만, 나는 이렇게밖에 살아남지 못한다고. 이게 내 생존 방식이라고. 사탄이었을 시절, 어렸을 적. 그 모든 걸 설명하면 너는 이해해 줄까?

“아마 더 무서워하겠지.”

그가 절망스럽게 읊조렸다. 누구에게도 이해를 바라지 않던 일인데, 그녀에게는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있나. 살기 위한 살인 따위 이해할 리가…….

고민 끝에 힐다를 전속 하인에서 해고하기로 마음먹었다. 항상 곁에 두고 보는 바람에 이런 쓸데없는 감정이 생긴 게 분명하니까. 예전처럼 평범한 하인으로 돌아가서 약 받을 때만 드문드문 보면 이런 감정 따위 금세 사라질 거다.

우리에겐 거리가 필요해. 악마가 감정을 가지면 대개 끝이 좋지 않으니까.

“어딜 갔다고?”

다음 날 아침, 힐다가 아닌 다른 하인이 약을 가지고 나타났다. 어째서 힐다가 오지 않았는지 물었다가 돌아오는 대답에 눈이 부릅떠졌다.

오늘 만나면 차분히 이야기 나눌 생각이었다. 노인은 제가 죽인 게 아니며, 노인이 원하던 대로 신의 품에 안겼고, 힐다 너는 원래대로 저택의 하인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그런데 힐다가…… 제 발로 저택을 나갔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 모든 계획이 무산되었다. 고뇌와 혼란으로 가득했던 머리가 텅 비어 버리고 무시무시한 살의가 치솟았다. 누구를 향한 살의인지는 알 수 없었다. 관자놀이를 조각조각 깨부수던 두통조차 방해하지 못할 분노였다.

“힐다가, 어딜 갔다고?”

적나라한 동요에 속이 불편했다. 어떻게든, 이것을 게워 내야, 이것을…….

“저, 저저, 저…… 마, 마…….”

델로레스라고 이름을 밝혔던 하인은 단지 그의 분노를 마주하는 것만으로 오줌을 지리기 직전이었다. 분명 마르쿠트 후작가라고 했지. 날카로운 경계가 가시처럼 일어났다.

“히, 히, 힐다가 마르쿠트 후작가…… 에, 흐끅,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었는데, 다들 그것 때문에 간 거라고 오늘 대신하는 사람이, 히끅, 도련님의 다음…… 전속 하인이 될 거라고…….”

목소리는 커졌다가 작아지며 끊기길 반복했지만, ‘마르쿠트 후작가’와 ‘스카우트 제의’만은 분명히 들렸다. 그녀가 내뱉은 단서를 정리해 보면 마르쿠트 후작가에서 일해 보라는 제안을 이번 일로 받아들이게 된 듯했다.

아냐, 힐다. 넌 오해하고 있어. 난 그러려던 게…….

새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이 눈앞에 스쳤다. 그는 이미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르쿠트 후작가에 들어서자 몇몇 하인이 막아서서 누구인지부터 물었다. 그들 모두를 최면으로 넘겨 버리고 그가 빠르게 저택으로 향했다. 살인마저 실패한 지금 힘을 쓰는 건 몸에 큰 부담을 안길 테지만, 그런 걸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번거로워 닫아 두었던 모든 감각을 해방했다. 들리지 않던 소리가 귀로 빨려 들어오고 보지 못하던 것이 시야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풀잎 위를 기어가는 벌레의 발소리, 주방에 접근했다가 후다닥 돌아 나오는 하인, 그리고 힐다의 숨소리, 당황하는 목소리.

“도련님, 왜 제 엉덩이를 만지세요?”

“만지긴 누가 만졌다고 그래. 벌레 같은 게 붙은 거 아냐?”

익숙한 숨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온 신경을 집중하자 남자 목소리가 같이 들려왔다. 아드리안은 빨리 걷다 못해 거의 뛰다시피 걸음을 재촉했다.

“촉감이 마음에 들어, 너. 우리 저택에서 일할 생각 없어? 일급 많이 쳐달라고 당부해 둘 테니까. 내가 부를 때마다 방에 오면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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