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Story (1) 아드리안 카이사르 폰 데어 팔츠그라프
세계를 창조하기 전, 태초신은 첫 번째 창조물을 만들어 냈다.
사악함과 교활함을 담은 육체에 신성함과 고결함으로 자아낸 날개가 달린 그 존재는, 이후에 만들어진 천국과 지옥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수많은 천사와 악마, 그리고 그들을 중재할 하급신이 태어나 제자리를 찾아갈 때까지도 유일무이한 존재로 남았다.
그를 어디 살게 해야 할지, 태초신은 큰 고민에 빠졌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천국에 있기에는 잔혹하고 지옥에 있기에는 자비로웠다.
그는 고민 끝에 가장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는 천국에 두었다. 그러자 그가 지닌 악마적인 힘에 천사들의 땅이 오염되기 시작했다.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천사들은 사악함에 물들었고 스스로의 악의에 당황해서 우왕좌왕했다. 몇몇 천사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끊어 소멸했다.
태초신은 당황하며 그를 지옥으로 보냈다. 지옥을 가득 채운 악의가 그의 선한 기운을 마저 오염시키지 않을지 크게 우려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악마들 또한 도무지 선해지지 않았으니 문제가 없었다.
지옥으로 내려온 바로 그날.
그는 제 손으로 양 날개를 뜯어내고 스스로를 사탄이라고 칭했다.
태초신이 120일간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아름답고 신비로운 날개였다. 온전히 천사로 태어난 이들조차 그처럼 신성한 날개를 가지고 있지 못해, 어떤 천사는 사탄의 악의에 오염될 것을 각오하고 신이 조각한 최고의 작품을 보러 가기도 했다.
신체 일부나 다름없는 날개를 뜯어내는 건 두 팔을 생으로 뽑아내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나, 가차 없었다. 우두둑거리며 날개가 등에서 떨어지기 시작하자, 찬란하게 빛나던 깃털이 일제히 칼날로 변해 본체를 공격했다. 본체에 붙어 있기 위한 필사적인 방어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칼날이 온몸을 베어 냈으나 사탄은 끔찍한 힘으로 뜯어냈다.
그로 인해 사탄의 몸엔 영혼이 소멸할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수천 개의 칼날 자국이 남게 되었다.
태초신이 조형한 최초의 존재. 악마와 천사가 뒤섞인 그는 온전한 악마로, 다른 악마와 동등하게 지옥에 머물기를 바랐다. 또한, 태초신이 가장 아꼈던 날개를 뜯어냄으로써 신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 냈다.
태초신은 밤낮을 울며 안타까워하다 사탄에 대한 애정을 겨우 내려놓았다. 신의 사랑을 거부한 그의 뜻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주렴. 내 사랑하는 아이야. 나는 그저 안타깝도록 너를 사랑했다는 것을.
“스승님, 스승님. 어디 있어?”
덩굴이 자라난 벽 옆으로 한 여자아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투명한 자색 눈동자를 도르르 굴려 스승의 자취를 찾았다. 돌아오는 대답 없이 조용한 가운데 덩굴 사이에 숨어 있던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났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릴리트. 지옥 군주의 유일한 딸이자 ‘밤과 저주, 호색의 악마’라는 칭호를 받을 악마였다. 그녀가 자아를 가졌을 무렵부터 사탄의 유일한 제자가 되었는데, 뛰어난 재능이 완벽한 스승을 만나자 더욱더 만개했다.
사탄이 기거하는 저택은 지옥에서 가장 특이했다. 보통 악마들은 싸우거나 서로의 육체를 탐하거나 게으름 피우기에 최적화된 곳을 선호했지만, 그는 식물이 잘 자라는 공간을 원했다. 아쉽게도 지옥에는 식물이 다양하지 않았던 탓에 악마의 꽃과 풀밖에 키우지 못했는데, 무시무시한 성장력으로 사탄의 저택을 휘감았다. 심지어 이 악마의 꽃은 생명체를 보면 아가리를 벌려 먹어 치우려고도 했는데…….
“어딜.”
제 머리를 향해 수십 개의 이빨을 들이미는 꽃을 한 번에 소멸시키며 릴리트가 혀를 찼다. 팔다리를 마저 물어뜯으려 달려들려던 꽃들이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느끼고 스르르 뒤로 물러났다. 앞을 가로막는 풀떼기를 불사르며 나아가다가, 갑자기 발밑이 허전해지는 바람에 낙하할 뻔했다.
뭐야, 벨제부브랑 싸우다 저택의 반이 날아갔다더니 정말이네. 당황한 틈을 타 꽃이 다시 공격하고 숨어 버렸다. 이씨, 피가 나잖아. 얼마 전 방심했다가 손등에 생채기가 났던 일까지 떠오르자 이가 절로 갈렸다. 덩굴을 헤집으며 찾아다니는 것도 한계다. 이제는 못 참겠다!
“스승님! 계속 대답 안 해 주면 나 이 꽃 전부 불태워 버릴 거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이 보이지 않는 의자를 만들어 그녀를 앉혀 옮겼다. 폭풍처럼 휘몰아친 끝에 릴리트는 사탄에게 이를 수 있었다.
만년설과 가혹한 추위, 자정의 악마.
사탄은 악마의 꽃에 정성스레 물을 주고 있었다.
릴리트가 다리를 꼬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대체 물은 왜 주는 거야? 그런 거 없이도 괴물처럼 잘 자랄 텐데. 지옥을 죄다 악마의 꽃으로 뒤덮을 셈이야?”
“릴리트, 스승님께 인사부터 해야지.”
단조롭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그녀의 불평을 가볍게 제압했다. 내가 이 저택에서 저것들에게 몇 번 깨물렸는지 아느냐고 한바탕 쏟아 내려던 릴리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했다.
“잘 지냈어? 스승님, 벨제부브가 찾아왔었다며? 괜찮아?”
“이제야 물어보다니 예의 바르기도 하지. 보다시피 아무렇지도 않단다.”
“벨제부브는 목뼈가 부러졌다던데?”
“군주께서 말리지 않으셨으면 파리 닮은 면상만 남겼을 텐데, 아쉬운 일이지.”
스승이 차갑게 웃었다. 특유의 붉은 눈이 냉혹하면서 무감정하게 반들거렸다. 릴리트가 다리를 앞뒤로 흔들거리며 입술을 내밀었다.
“어휴, 벨제부브가 화날 만도 하지, 생각해 봐. 스승님 만나러 왔다가 악마의 꽃에 공격받아 머리뼈가 으스러졌다잖아. 꽃을 죄다 불태우려고 덤빌 만했지. 벨제부브뿐만이 아니야. 저 꽃에 잡아먹힌 악마가 한둘이 아니라고. 아버지께서도 슬슬 걱정이셔.”
“꽃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자는 어리석지. 릴리트, 너도 세 번의 탈피기를 더 거치고 어엿한 악마가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모르는 소리 마. 내 눈에는 스승님이 가장 아름다운걸. 아마 세 번의 탈피기를 더 거쳐도 그러겠지. 릴리트가 눈을 빛내며 스승의 강인한 육체를 응시했다.
“스승님. 기왕 저택이 허물어진 거, 우리 성에 들어와 사는 게 어때? 있지, 그럼 우린 밤낮으로 볼 수도 있고, 내가 이렇게 찾아오지 않아도 되고…….”
“저택 어디가 허물어졌다는 거지?”
어? 아까까진 없었는데. 릴리트가 제 눈을 의심하며 비볐으나 진짜였다. 벨제부브와의 싸움으로 날아갔던 저택 반이 감쪽같이 돌아와 있었다.
몸에 가려 보이지 않던 스승의 다른 쪽 팔이 슬며시 내려가는 게 보였다. 스승은 강대한 힘을 기척 없이 유연하게 써먹을 줄 알았다. 약 올리는 거야, 뭐야. 릴리트가 양 볼을 크게 부풀렸다.
“성에 들어오기 싫으면 싫다고 말해. 씨이.”
나직하게 웃은 사탄이 릴리트의 머리카락을 짓궂게 흐트러뜨렸다. 대답을 얼버무리기 위한 행동인 건 알았지만, 손끝이 닿은 것만으로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악마. 릴리트가 홀린 듯 사탄을 응시했다.
천사의 피가 함께 흐르고 있기 때문일까. 욕정과 악의에 미쳐 날뛰는 악마들과 그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욕정과 욕망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즐기진 않았다. 불필요한 피는 보지 않되 자비를 베푸는 일 없이 잔혹했다. 깔끔하고 우아하며 기품 있는 악마. 순결한 악. 첫 번째 탈피기를 거치기 이전부터 릴리트는 그를 평생의 동반자로 점찍어 두었다.
지금으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여섯 번의 탈피를 마쳤을 때, 온전한 악마로 곁에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당신을 가질 거야. 단호한 결심으로 그녀가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것 좀 봐, 릴리트. 지상으로 올라가 겨우 구해 온 건데…….”
“어라, 뭐야. 다 죽었잖아.”
스승이 조심스레 안쪽에서 내오는 걸 보고 릴리트가 곧장 말했다. 드물게 설레는 얼굴이었던 사탄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이게 죽은 거라고? 환경이 바뀌어서 색깔이 바뀐 게 아니라?”
“응. 갈색으로 말라붙은 게, 죽은 지 오래된 것 같은데. 얼마 전에 루키페르가 흥미롭다고 데려온 인간이 저렇게 말라서 죽은 걸 봤어. 지옥의 음기를 견디지 못하면 저렇게 된다던걸.”
“…….”
“근데 또 지상에 갔던 거야? 분명 아빠가 가지 말라고…… 어, 어디 가? 스승? 스승님?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하는 건데?”
군주의 냉철한 검, 사탄이 고작 지상에서 구해 온 꽃 한 송이가 시들었다고 슬퍼서 두문불출했다는 걸 누가 믿을까.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악마들은 그럴 리 없다며 의심했지만, 릴리트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봤으니까! 얼마나 낙심했는지 저택 근처에 사흘간 밤이 내려앉을 정도였다.
“스승! 스승님! 진짜 나 안 볼 거야? 응? 스승님, 좀 나와 봐!”
단단히 걸어 잠근 문을 두드리며 릴리트가 소리쳤다. 아무리 속상하기로서니 나한테서마저 모습을 감추는 건 너무하지 않아? 애초에 그깟 꽃이 뭔데? 그거 하나 시든 게 나 보는 거보다 더 중요해?
문을 쾅쾅 두드리던 손이 심상찮은 기운을 느끼고 멈칫했다. 안에서 느껴지는 건 분명 시공을 왜곡하는 힘이었다. 설마, 설마. 릴리트가 경악한 채 두 손으로 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스승님! 설마 그 안에 인간계 일부를 구현하려는 거 아니지? 아니라고 한마디만 해 줘! 제발!”
릴리트는 애타게 외쳤지만, 불행하게도 그녀의 예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았다. 꽃이 시들어 크게 실망한 사탄이 지상의 정원을 통째로 소환하려던 거다. 시공을 비트는 방대한 힘에 놀란 군주가 놀라 들이닥치지 않았더라면 정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사탄은 뒤늦게 힘을 회수하며 왜곡된 틈을 닫았지만, 그 짧은 순간 우연히 지옥을 들여다본 인간이 생기는 바람에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기억을 지우러 갔는데 이미 심장 마비로 모두 죽어 버렸더라고, 돌아온 그가 산뜻하게 말했다.
뒤늦게 천국에서는 지옥의 선전포고가 아닌지 떠들썩해졌지만, 군주가 땀을 뻘뻘 흘리며 뒤처리한 덕에 잠잠해질 수 있었다.
“왜 그토록 방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스승님은 군주가 되지 않아?”
릴리트의 똘망똘망한 질문에 사탄의 입가에 웃음이 픽 그려졌다.
이 순간이 죽도록 좋았다. 그가 저를 향해 미소 짓는 찰나의 순간들이 모이고 모이면 사랑이 되었다. 아름다워. 그를 갖고 싶다. 품에 안기고 싶다. 그는 마치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았다. 숨 쉬듯, 쉴 새 없이 매혹당했다.
“성에 들어가면 악마의 꽃 같은 건 키우지 못하기 때문이지.”
“고작 그런 이유로?”
“쉬이. 이건 네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란다. 악마의 풀을 성에 들였다간 악마들이 아주 야만스럽게 날뛸 테니까. 지옥에 혼란을 가져오는 일을 나는 못 하게 되어 있거든.”
“왜? 어째서? 스승님처럼 강한 악마가?”
“그건 릴리트, 네가 크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군주의 자리에 오른 순간, 필연적으로.”
검지가 입술을 살짝 누르고 떨어졌다. 입가에 걸린 은밀한 미소에 시선이 빼앗겼다. 그게 뭔지 알려 달라고 아무리 졸라 대도 소용없었다. 군주의 자리에 오른 악마와만 공유할 수 있는 비밀이라고 했다.
그때부터일까. 탈피기를 마저 끝내지도 않은 릴리트가 군주의 자리를 원하게 되었다. 사탄을 갈망하는 만큼 크나큰 욕망으로, 절실히.
사탄의 힘은 지옥을 짓누를 수 있을 만큼 강대했기 때문에, 군주는 일찍이 그에게 계약의 사슬을 걸어 놓았다.
첫째, 현 군주에게 충성을 바칠 것.
둘째, 다음 순위인 군주의 핏줄에게 충성을 바칠 것.
셋째, 이 계약은 오로지 현 군주인 악마와 사탄, 둘 사이에서만 공유될 것.
따지고 보면 사탄에게만 불리한 조항들이었으나, 사탄 또한 지옥에서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으므로 흔쾌히 승낙했다. 이 계약이 어떻게 제 발목을 잡을지는 생각조차 못 하고.
“또 실패했어.”
릴리트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벌써 183번째. 사탄의 꿈에 침입하여 유혹하려다 실패한 횟수다. 여섯 번째 탈피기를 끝내고 몽마의 능력을 모두 깨우치게 됐을 때부터 부단히 노력해 왔으나 사탄에게만은 좀처럼 통하지 않았다.
아버지인 군주에게조차 반쯤은 통했는데, 사탄의 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면 강대한 벽에 가로막힌 듯 도무지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사탄이 금세 나타나 손가락을 튕겼는데, 그것만으로 릴리트는 역풍에 떠밀려 꿈의 입구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또 재밌는 장난을 치는구나, 앙큼한 제자야. 아직 천 년은 이른데도, 포기하지도 않고.”
곧 다가온 그가 입구 모서리에 부딪힌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면, 정말이지 분이 올라 견딜 수 없었다. 그 다정한 미소에 또다시 속절없이 반해 버리고 말아서. 나 혼자만. 또 나 혼자만! 릴리트가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손잡이를 내리쳤다.
사탄의 정신체는 너무 강해. 무슨 방법 없을까. 꿈에 침투할 수만 있으면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볼 수 있을 텐데.
초조한 나머지 릴리트가 손톱을 까득까득 깨물었다. 불과 얼마 전에 스승의 꿈에 들어가려다가 내쫓긴 기억이 떠올랐다. 분하고 조급한 나머지 스승에게 외쳤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오래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다고.
잠깐의 침묵을 깨고 사탄이 말했다.
“착각한 걸 거야, 릴리트. 네가 아직 어리고 미숙해서.”
“웃기지 마. 나 이제 500살은 족히 넘거든? 나는 스승님을 사랑한다고 했지, 내 감정을 무시할 권리까지 주진 않았어!”
“날 먹고 싶지, 릴리트? 그건 사랑이 아니라 식욕이라는 거다. 강한 개체인 나를 보고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감정이지.”
“스, 스승님. 나는…….”
“당황할 것 없어. 악마 대다수가 내게 그런 감정을 품으니까.”
“…….”
“악마로서의 경외, 강한 개체에 대한 식욕, 천사에 대한 혐오로 극대화된 갈증. 네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이야. 그렇지?”
“왜 그런 눈으로 봐? 악마들의 사랑은 그래! 악마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란 말이야! 그, 그렇다고 스승님을 먹진 않을 거야! 그런 욕망은 물론 들겠지만……!”
릴리트에게 사탄은 가지고 싶은 상대임과 동시에, 죽어서도 이해 못 할 존재였다. 식물 같은 약해 빠진 걸 사랑하는 스승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강하고 아름다우면서, 약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게 있는 법이라고 말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거센 대꾸에도 사탄의 무표정엔 미동 한 점 일지 않았다. 릴리트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스승님은 이해 안 돼? 악마라면 당연히 느끼는 이 감정들을 전혀 이해 못 하는 거야? 어떻게? 나는, 난…….”
“이해 안 돼.”
“말하고 있잖아, 사랑한다고! 사랑해. 당신을 사랑해! 당신과 나라면 절대 무너지지 않을 왕국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이해 안 돼.”
“사랑한다고…….”
“이해 안 돼.”
이해 안 되는 건 이쪽이었다. 악마는 본능적으로 가장 강한 개체와 짝짓기 바란다. 지옥에서 가장 강한 여체는 그녀였기에 마땅히 함께하길 바라야 했다. 오히려 그쪽에서 먼저 원해야 했다. 그런데 악마의 사랑 방식부터 이해 못 하겠다니, 악마라면 저럴 수 없었다. 악마라면.
“반쪽이 천사니 그런 거겠지. 저놈이 악마인 우리를 살아 있는 생명으로나 취급하겠어?”
“스승님을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아이쿠, 무서워라.”
온통 검은색인 몸이 릴리트의 허리 아래에서 움직였다. 허벅지 안쪽부터 혀로 은밀하게 핥아 올리는 감각을 그녀가 잠깐 눈을 감고 음미했다. 정적 위에 살짝 얹어지는 감미로운 신음이 마음에 드는지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천사 놈들은 우리를 곤란하게 만드는 데 타고났지. 어떤 악마든 천사를 만나고 오면 넘치는 식욕을 자제하지 못해서 날뛰곤 하니까. 너도 봐, 여섯 번째 탈피기를 끝내자마자 애태우고 있잖아.”
“그를 사랑해. 그를 사랑하는데 어떡해? 갖고 싶어. 미치도록 갖고 싶어. 이런 절실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스승님도 나를 원했으면 좋겠어. 내가 더 아름답고 강했더라면…….”
“넌 이미 충분히 아름다워, 릴리트.”
“흐응…….”
“다만 그가 더 강하고 아름다울 뿐이야. 수컷 악마인 나조차 눈독 들일 정도로 말이야.”
“미친 소리 하지 마, 위리놈.”
몸 위로 실려 오는 무게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목을 젖히면서 릴리트가 으르렁거렸다. 그건 흡사 영역을 침범하는 침입자를 경계하는 짐승의 위협처럼 들리기도 했다. 기나긴 손가락이 그의 몸에 난 수많은 상처를 훑어 늑대의 이빨 자국이 가장 선명하게 난 흉터에 이르렀다. 그 또한 위협이었지만, 위리놈은 멈추지 않고 킬킬거렸다.
“사탄을 볼 때마다 그놈의 등 뒤가 보여. 걸칠 것으로 가려 놔도 날개를 뜯어낸 자리, 세로로 찢긴 검은 흉터가 보인단 말이야. 흔적만으로 이렇게 군침이 도는데, 날개가 달려 있었을 때는 어땠을지 상상도 못 하겠군. 차라리 우리 둘이 나눠 먹는 건 어때? 그 단단하고 강인한 육체를 경외하면서 오래도록 씹어 먹는 거지. 분명 너도 만족할걸.”
“하지 마.”
“기억나? 그가 지옥에 처음 왔을 때를 말이야. 천사였던 반쪽을 버리고 완벽한 지옥의 일원이 될 수 있는지 증명하란 뜻에서,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을 고문하고 징벌하는 역할을 맡겼잖아. 천국으로 도망칠 거라고 다들 예상했는데, 대단히 잔혹해서 근사하고 아름다웠지.”
“…….”
“그거 알아? 난 그 모습을 보기 전까지, 아름답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어. 정말이지 흥분해 버리고 말았지. 그가 더 이상 징벌하지 않는 게 유감스러울 만큼…….”
“하지 말라고!”
비명처럼 폭발한 목소리와 함께 와드득하는 소리가 울렸다. 툭툭거리며 피가 덩어리째 떨어졌다. 한쪽 귀가 반이 잘려 나가 너덜거리는데도 위리놈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낯이었다. 그 머리통 속에 아직 사탄의 잔상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니 나머지 귀도 마저 뜯어내고 싶어졌다. 여우의 살갗으로 덮인 귀를 퉤 뱉어 내고 릴리트가 그를 쏘아봤다.
“내 앞에서 멋대로 혀를 놀린 죄야.”
“너 같은 핏덩이는 아무리 고백해 봐야 사탄은 들으려고도 않을 거다.”
“핏덩이 몽마한테 홀려 버린 악마는 개나 주고?”
“큭, 그럴지도 모르지.”
자조적인 웃음이 터졌다. 릴리트가 위리놈의 꿈을 뚫고 정신을 홀려 놓은 것이 다섯 번째 탈피 이후였다. 꿈에서 한바탕 뒹굴고 눈을 떴을 땐 이미 릴리트의 노예나 다름없었는데, 한때 마신이라고 추앙받던 악마의 정신을 그처럼 쉽게 뚫은 걸 보면 타고난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떨어져.”
적잖이 노했는지 릴리트가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어깨를 밀어내는 발을 조심스럽게 잡고 위리놈이 그 끝에 입을 맞추었다.
“화내지 마, 나의 여왕님. 하지만 너도 알잖아. 그 천사 놈에게 넌 군주가 맡긴 짐일 뿐이야. 천국에서 쫓겨난 반쪽이 어디에서든 지내기 위해 고개를 조아리는 것뿐,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기지 마. 스승님은 날 아껴. 스승님 입으로 직접 말했다고.”
“사랑한다고는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
“…….”
“크,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말이야. 사탄이 반려자로서 받아 주지 않는다면 다른 악마는 어쩔 수 없지만, 너는 다르지.”
“당장 설명해.”
느긋하게 다리를 애무하고 있던 검은 몸뚱이가 순식간에 밑에 깔렸다. 두 손목이 침상 위에 짓눌린 채 꼼짝달싹 못 하게 된 위리놈이 킥킥대며 웃었다. 쉽게 흥분하는 고약한 여왕님을 상대하는 건 골치 아프지만, 매력적이다. 그러니 네가 사탄을 못 가지는 거야, 릴리트. 네가 네 생각과 기분만 밀어붙이니까. 하지만 알려 주진 않을 거야. 애타서 어쩔 줄 모르는 네 모습이 날 적잖이 흥분시키니까.
“일주일. 일주일 동안 여기서 뒹굴게 해 주면 말해 주지.”
“나흘.”
“일주일.”
“나흘……. 이씨, 어서 말하지 못해!”
남은 귀를 마저 잡아 뜯으려고 달려드는 그녀를 슬쩍 피하곤 위리놈이 교활하게 웃었다.
“영리한 악마가 웬일로 머리를 굴릴 줄 모르는군. 너의 몸엔 군주의 피가 흐르고 있잖아.”
“더 자세히.”
“그 대단한 힘을 가진 사탄이 군주의 명을 듣는 게 이상하지 않아? 군주도 마찬가지다. 그 또한 악마인데, 악마의 본성을 모를까. 사탄이 얌전히 있겠다고 맹세했어도 믿지 못할 거란 말이지. 사탄이 제 방에 인간계 일부를 소환하려 했던 때 기억나?”
“그럼. 아버지께서 얼굴이 새파래져서 헐레벌떡 뛰어왔는데 기억 안 날 리가 없잖아.”
“바로 그거야. 얼굴이 새파래져서 헐레벌떡 뛰어왔다는 거. 내가 군주였다면 곧장 군대를 모아 사탄의 저택을 공격했을 거다. 그만큼 방대한 힘을 쓰는 건 반역이라면서 말이야. 그러지 않은 건, 군주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지.”
“둘 사이에…… 맹약 같은 게 있을 거란 뜻이야?”
“사탄이 힘을 못 쓰게 묶어 둘 정도면 아주 강력한 맹약이겠지. 그 정도의 맹약이라면 사탄을 네 반려자로 두는 건 일도 아닐 거다.”
“위리놈!”
“어이쿠.”
릴리트가 갑자기 달려들어 와락 껴안는 바람에 숨이 콱 막혔다. 커다란 검은 몸 위에서 그 반만 한 몸이 기쁨을 견디지 못하고 방정맞게 들썩거렸다. 얼마나 설레는지 얼굴과 눈에서 보석이 쏟아지는 듯했다.
“고마워! 고마워!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군주의 자리를 더 빨리 이어받으면 되겠지!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당장이라도 군주의 자리를 받겠어. 그리고 맹약으로 내 옆에 묶어 둘 테야! 이걸로 사탄은 완전히 내 반려자가 될 테지! 그도 끝내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야, 지옥에서 가장 강한 여체니까 당연하지!”
“그래? 군주께서 그렇게 쉽게 자리를 넘길까?”
“아버지가 내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는 거 알고 있잖아? 안 되면 되게 할 테야. 어차피 이어받을 자리라는 건 아버지나 나나 잘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내가 준비를 끝내고 먼저 말하길 기다리고 계신 건지도 몰라. 오늘이라도 당장 말씀드리겠어. 내가 군주가 되더라도 가끔은 만나 줄 테니 너무 아쉬워하진 마.”
빨갛게 달아오른 두 뺨을 감쌌다가, 고민에 빠졌다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방방 뛰었다가. 사탄을 반려자로 만들 방법이 있단 말에 릴리트는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상상 속에선 이미 사탄과 영원의 맹세라도 나눈 모양인데, 글쎄, 그게 그렇게 쉽게 될까? 사탄의 힘이 어마어마하다뿐이지 군주 또한 만만치 않은데. 엄연히 악마들 머리 위에 군림하고 있는 악마가, 딸이라고 해서 제 자리를 탐하는 악마를 곱게 보고 넘어가 줄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래, 릴리트. 하지만 넌 아직 덜 자라서 그런지 차분히 현실을 통찰할 능력은 없는 것 같구나. 위리놈이 길게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하긴 우리 악마들은 어쩔 수 없지. 가질 수 없는 상대를 원하곤 해. 상대가 멀어지고 벗어나려 할수록 집착이 더욱 커지는, 이상한 종족이란 말이야.
그런 욕망은 필연적으로 상대를 망쳐 버리게 마련이라, 악마들의 사랑은 대개 끝이 좋지 않아. 그리고 이게, 내가 널 망치는 이유야. 킬킬거리며 웃던 위리놈이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부디 네 말대로 되길 바랄게, 사랑스러운 릴리트.”
“너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위리놈의 예상대로 딸의 철없는 요청은 가차 없이 거부당했다. 여섯 번째 탈피를 이제 갓 끝낸 풋내기 악마에게 군주의 자리를 넘길 수는 없다고 설명했지만, 릴리트는 끝까지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자신이 군주가 되어 사탄을 반려자로 삼으면 지옥에도 큰 이득이지 않으냐는 주장에 군주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겨우 그것 때문이냐는 의아함, 허황된 꿈에 대한 안쓰러움. 군주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우리가 잡아 놓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가 완전한 악마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잖느냐.”
“내 말이라면 스승님도 들을 거야! 맹약 따위 없어도 사탄을 잡아 놓을 수 있다면 지옥에도 그만한 이득은 없잖아?”
“네가 어째서 그 맹약에 대해…… 아, 아니지. 그래도 안 된다. 네가 어엿한 악마로 자라난 걸 부정하는 건 아냐. 하지만 너무나 빨라. 성장이든 마음이든 지나치게 앞서 나가면 주변을 못 보게 되기 마련이지. 릴리트, 당장 방으로 돌아가서 겸손하게 주변을 돌아보도록 해라. 네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사탄은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
“아버지!”
“당장 방으로 돌아가래도!”
거센 노호와 함께 순식간에 방까지 밀려 나갔다. 쾅 닫힌 문 위에 군주의 주술이 새겨졌다. 릴리트는 씩씩거리며 문 너머의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왕좌를 넘기지 않는 것도 모자라 사탄까지 만나지 못하게 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사탄을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분노에 초조함이 더해졌다. 스승님이 왜 자길 보러 오지 않는지, 제일 불안하고 초조했다. 스승님이 날 외면할 리가 없는데. 손톱이 깨지도록 깨물며 그녀가 생각했다. 군주가 일부러 막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왕좌를 지키고자 했으니까. 자신은 맹약으로밖에 묶어 두지 못했던 사탄을 딸이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그 모습을 악마들에게 보여 주는 것만으로 자신보다 딸이 더 큰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니까.
방에 갇히고 1년이 지났을 무렵, 릴리트는 아버지를 군주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로 했다. 정당한 후계자보다 잔혹한 찬탈자가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릴리트는 닫힌 문을 부수는 대신 꿈에서 수하들과 접선하여 반역을 도모했다.
군주의 자리만 넘겨받으면 사탄을 네 반려자로 만들 수 있을 거야. 세뇌 같은 속삭임이 정신을 지배했다. 몽마에 이어 워울프, 헬하운드, 이프리트, 켈베로스, 발록……. 손에 꼽히는 강자들을 포섭한 날, 릴리트는 성을 탈출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수백 년간 지속할 치열한 전쟁을.
“딸아, 너는 굳이 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때가 되면 당연히 네게 넘어갈 자리를, 반역자의 이름으로 가져가려 하는가.”
“마땅히 가져야 할 왕좌, 제 손으로 이어받겠습니다. 옛 왕이여.”
지키려는 자와 쟁취하려는 자. 굳건한 왕좌와 뒤흔들려는 자 간의 전쟁. 릴리트는 사탄이 제 편이 되어 주길 바랐으나, 사탄은 군주의 검, 찬탈자를 벌하는 철퇴로서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현재의 왕과 미래의 왕. 많은 종족이 미래의 왕을 택하여 따랐지만, 군주의 오랜 벗과 총사령관인 사탄을 따르는 악마가 많아 양쪽 수는 비등했다. 전장에 나선 사탄을 볼 때마다 릴리트는 배신과 울분에 차 울부짖었지만, 동시에 더 깊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붉은 하늘을 등지고 떠 있는 그는 홀로 아름다웠으니까.
“총사, 켈베로스 부대가 오고 있습니다. 공격합니까?”
이번 전투의 부사령관인 아가레스가 총사령관을 향해 물었으나 이상하게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허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공포를 이기지 못해 넋을 놓았다고 착각할 만큼 흐릿한 눈이었다.
우두두두두! 켈베로스의 발소리가 공기를 사납게 흔들었다. 조바심 난 아가레스가 한 번 더 물었으나 사탄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가. 머리 셋 달린 개들은 겁이 없고 도무지 지칠 줄 몰랐으며, 한번 문 상대는 놓아주는 법 없이 집요해서 상대하기 쉽지 않다. 제압하려면 지금뿐인데.
“총사, 명령을…….”
“조용히.”
차분히 말한 사탄이 허공에 선을 그었다. 길게 한 줄, 짧게 한 줄.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깃든 빛이 곧이어 활 모양의 형체를 이루었고, 사탄은 익숙한 듯 손에 쥐었다. 화살은 단 하나. 활대에 걸린 채 힘껏 당겨진다. 화살의 촉은 달려오는 켈베로스 대신 하늘을 향해 예리하게 빛났다.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아가레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켈베로스들을 쏴 죽이시는 줄 알았는데? 왜 다른 악마들을 시키지도 않고, 허공을 향해 겨눈단 말인가? 아무리 사탄이 강하다곤 하지만, 고작 화살 한 발로 파도처럼 밀려오는 개떼를 막기는 무리였다.
몰려드는 적군을 눈앞에 두고도 명령이 없자 투지를 다지고 있던 악마들도 당황한 듯싶었다.
뭐야, 왜 명령 없이 잠잠해? 제길, 개새끼들이 몰려들고 있잖아. 난 저놈한테 물렸다가 팔 하나가 날아갔다고. 명령 없이 나가서 싸우면 안 되는 거냐고! 이렇게 조마조마하느니 차라리 뒤엉켜 주먹질하는 게 낫겠어! 난폭한 술렁임이 악마들 사이로 어수선하게 퍼지자 아가레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총사, 부디 진격 명령을, 그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두려운 건가? 두려워서 판단력을 잃은 건가? 악마 군단의 아우성이 커지고 아가레스 또한 곁에서 채근했으나, 사탄은 활대를 당긴 그대로 침묵을 지켰다.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인내하고 지켜보며, 차분히 판단했다. 그의 눈은 다른 악마들이 보지 못하는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진격을 명해 주십시오! 지금도 늦었습니다!”
아직 이르다. 때는 곧 올 것이다. 조급해하거나 지체하는 건 패배하는 길이다. ‘그들’이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 온 바로 그때.
“케에엑!”
가장 몸집이 큰 켈베로스가 사탄을 향해 입을 쩍 벌린 순간이었다. 피잉. 가볍게 시위를 떠난 화살이 순식간에 열두 개로 늘어났다. 하늘로 솟구친 화살이 순식간에 방향을 틀었다. 허공을 가르고 지나갈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아무것도 없던 곳에 화살이 멈추며 숨기고 있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났다.
“아악!”
“몽…… 마?”
아가레스가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언젠가 들어 본 적은 있었다. 어떤 몽마들은 현실을 꿈처럼 만들고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다고. 하지만 이번처럼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을 정도는 아니라 놀라울 따름이었다.
얼굴에 화살이 박혀 발을 동동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몽마들을 아가레스가 멍하니 지켜보았다. 길잡이를 잃은 켈베로스들은 뒤엉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화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 박자 늦게 추락한 화살 여덟 개가 어미 켈베로스의 머리통을 동시에 관통했다. 어미 켈베로스는 비명도 못 지르고 즉사했는데, 무리의 우두머리까지 잃게 되자 켈베로스들이 험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지시를 내릴 우두머리가 없는 이상 그들의 새파란 송곳니도 무용지물이었다. 비명이 허우적거리고 사방에 피가 튀었다.
“잊지 마, 아가레스. 몽마는 늘 우리의 적이야. 그들은 꿈을 침입할 수 있지만, 어디서든 꿈을 만들 수도 있지. 싸우는 동안 명심해야 할 거야.”
아가레스의 입이 벌어졌다. 몰랐다.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사탄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 은밀한 기척을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꿈에 빠져드는 건 대개 그런 법이니까.
홀로 몽마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화살을 맞추다니. 군주가 사탄을 신뢰하는 건 순수하게 그의 힘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길잡이를 잃어버린 켈베로스들이 날뛰며 전열을 이탈할 걸 예측해서 나머지는 뒤늦게 떨어지도록 조절까지 했다. 흥분한 켈베로스, 모습을 감춘 몽마와 싸웠다면 이쪽 손실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피 한 방울 보지 않고 판을 뒤집었다……. 피를 보기 위해 싸우기도 하는 악마의 방식에서는 다소 벗어났지만,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이익을 끌어내야 하는 총사령관으로서는 더없이 뛰어난 선택이었다. 악마답지 않은 수를 쓸 수 있는 유일한 악마가 바로 그였다.
“전열! 전열 유지!”
뒤늦게 쫓아온 다른 몽마가 외쳤으나 켈베로스 무리는 완전히 통제를 잃은 후였다. 아가레스는 진격하라는 사탄의 명령을 들었는데도 한참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휙. 곁을 스치는 바람이 느껴졌다.
“총사보다 진군이 늦을 셈인가?”
반쯤 고개 돌린 사탄은 옅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언제 소환됐는지 모를 악령의 검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지옥으로 떨어진 영혼들을 고문하고 가둬 놓은 악령들이 투명한 검날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평소엔 검은 연기로 넘실거리던 영혼들이 피 냄새를 맡고 날뛰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신 차린 아가레스가 진군 명령을 내리자 수천의 악마들이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몽마 부사령관이 낭패한 얼굴로 릴리트에게 향했다. 반역의 군주 또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릴리트 님, 전투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부디 퇴각 명령을.”
“…….”
“이대로는 승산이 없습니다. 릴리트 님! 부디 명령을!”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보렴.”
조급하게 나서는 몽마를 한 손으로 저지하며 릴리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시간 끌 때가 아닌데. 이대로는 중요한 전력 대부분을 잃고 만다. 하지만 초점 잃은 채 하늘을 응시하는 릴리트는 정작 전투의 향방 따위는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너에게도 보이니? 그가…….”
꿈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그 눈은 환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릴리트 님.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그를 봐. 너무나 근사하지 않니?”
스르르,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뱀이 먹잇감을 옥죄려 꼬리를 뒤트는 모양새로.
“사탄은 신이 가장 사랑한 피조물이었다지. 그 마음을 조금은 알겠어. 지옥으로 떠나보낼 때 얼마나 슬펐을까. 날개를 뜯어냈다 해도 저토록 완벽한 존재인걸.”
틀렸다. 사탄에게 홀린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언제 정신이 돌아올지 전전긍긍하는 사이, 릴리트는 황홀한 눈으로 사탄의 모습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전장에서의 그는 더욱 아름답고 강했다. 그녀가 바라는 이상적인 악마를 그대로 빚어낸 듯했다. 벌떼처럼 몰려드는 켈베로스들을 향해 악령의 검을 크게 휘두르자 바람에 밀려 나뒹굴었다. 사탄이 일으킨 불의 폭풍에 악마들이 낙엽처럼 떨어졌다. 그 순간 어느 악마의 눈엔 이미 뜯어 없앤 천사의 신성한 날개가 보였다고도, 또 다른 악마에게는 악마의 검은 날개가 보였다고도 했다.
“장관이구나.”
릴리트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천사의 것이기도 한 사탄의 힘은 검붉은 하늘 속에서 한줄기 축복처럼 비추었다. 어마어마한 힘의 폭포가 쏟아져 수만 년을 버티고 있던 지옥의 문까지 녹였다. 실로 무자비하고 아름다운 힘이었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가릴 것 없는 힘. 세상에 다시 존재할 리 없는 전지전능함.
콰앙, 콰아앙…….
거대한 불구덩이들이 땅에 박히며 튄 잔재가 멀리 있는 릴리트의 팔을 할퀴고 지나갔다. 폭풍이 전장을 휩쓰는 모양이었다. 이내 폭풍의 중심에 선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멀리서부터 뻗어 온 살기에 목덜미까지 소름이 돋았다.
이거지. 릴리트가 중얼거렸다. 광기 어린 웃음이 입가에 피어났다.
“이거지, 이거지. 이거야, 내가 바란 모습. 이거야, 이거라고.”
압도적인 공포, 그 위에 있는 사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끓는 듯 울컥울컥 올라왔다.
호적수에 대한 경탄과 분노, 살의에 가까운 사랑. 눈, 코, 입을 통째로 잡아 뜯을 기세로 그를 응시했다.
당신을 사랑해. 먹고 싶어. 사랑해. 먹고 싶어. 완벽한 하나가 되고 싶어.
릴리트가 땅을 박차고 하늘로 향했다. 도저히 그에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막아서는 몽마 서넛은 목을 날렸다. 이윽고 그들이 마주쳤을 때, 콰아앙, 지옥이 울렸다.
“사랑해. 나와 함께해 줘.”
“넌 아직도 그 소리구나.”
다소 피로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그가 보였다. 이제껏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인 후라 우아하지는 않았으나, 흩날리는 잿빛 머리카락과 핏물을 담은 듯 붉은 눈이 세상에 둘 있을 리 없었다. 서로의 무도한 힘을 이기지 못해 릴리트는 만신창이가 되어 땅을 기고 있었고, 늘 깔끔하게 차려입던 사탄의 옷은 군데군데 찢겨 있었다.
릴리트의 눈이 찢긴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흉터를 핥았다. 저것들이 날개를 뜯어내며 얻은 흉터구나. 아름답기도 하지.
“네가 왜 이러는지 알아.”
한숨에 가까운 말이었다. 악마 중에서도 다소 온건한 편인 사탄에겐 이 모든 전투가 고단했을 터였다. 퇴각하는 척 초승달 진영을 만들어 포위하고, 릴리트의 모든 전력을 격파한 지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당신은 몰라. 절대 이해 못 해.”
다소 절망에 휩싸인 채 릴리트가 읊조렸다. 왕좌의 자격을 증명하는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드높은 자존심 또한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위리놈이 네 침소에 들락거리는 건 알고 있었어. 그가 꼬드긴 거겠지. 군주가 되면 날 가질 수 있으리라 속삭이면서. 그 세 치 혀를 일찍이 잘라 버렸어야 했는데.”
“사랑해.”
“그만.”
“악마들의 사랑은 이래. 다들 이렇게 생겨 먹었다고. 우리들의 아이는 강하고 아름다울 거야. 당신과 나를 꼭 닮았겠지. 그러니 지금이라도 내게 돌아와. 날 사랑하지 않는 그 눈을 파내기 전에!”
“네게는 좋은 짝이 있을 거다, 괘씸한 제자야.”
대화를 나누는 새에 눈으로 쇄도하는 칼날을 사탄이 간단히 쳐 냈다. 다른 악마에게는 통했을 예리한 공격이었으나, 사탄에게만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이 터무니없이 작게 느껴질 만큼 사랑한다.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당연하게, 타고난 것처럼 사랑하게 되었다. 당신이야말로 내 살아 있는 약점인데.
“나와 함께 가자. 군주께서 널 기다려.”
“하하, 하하! 날 무시하는 거지? 악마에게 자비라니 우습기 짝이 없지. 아버지께 가면 보란 듯이 처형당할 텐데, 내 발로 가라니.”
“…….”
“나는 당신만 있으면 됐는데, 당신만…….”
“어리석은 꿈을 꿨구나, 릴리트. 내가 네 반려가 되는 일은 없을 거야. 설령 네가 군주가 됐더라도 마찬가지였겠지.”
“뭐……?”
눈물 맺힌 눈이 흐릿하게 사탄을 찾았다. 반란의 시작을 통째로 뒤흔드는 말이라,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군주가 됐더라도?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러면 당신은…….”
“지옥에 있을 수 없게 되겠지. 나는 네가 군주가 되기 전에 떠날 생각이었어. 예정보다 훨씬 늦어지긴 했지만.”
“반역이 성공했더라면…….”
“반역이 성공했더라도 마찬가지였겠지. 나 하나 얻겠다고 이런 전쟁을 일으키다니 비효율적이기도 하지. 아무리 나라도 너 같은 군주를 모실 수는 없지.”
전혀 예상 못 한 말이었다. 힘없이 벌어지던 입술이 급하게 말을 토해 냈다.
“말이 돼? 떠나다니, 어디로? 당신이? 나를 두고? 당신이 갈 데나 있어? 왜, 말라비틀어져서 어딘가 굴러다니고 있을 날개라도 찾아서 등에 붙이고 천국에 다시 가기라도 할 셈이야?”
“글쎄, 천국도 지옥도 안 된다면 지상으로 가는 수밖에.”
“지상이라니, 하하! 하! 그 나약한 인간들이 당신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차라리 천국으로 가서, 악의를 이기지 못한 형제자매들이 죽어 가는 꼴을 지켜보는 게 나을걸!”
“그런 말로 도발하려 해 봐야 소용없어, 릴리트. 네 작은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굴러다니는지 정도는 뻔히 보이니까. 하지만 스승님 앞에서는 예의 바르게 굴어야지?”
“아윽…….”
심기를 적잖이 거스른 건지 칼날이 박힌 손등을 그가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이미 깊게 난 상처를 날붙이가 후벼 파자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 외에도 수많은 상처가 나 있었지만, 그보다 마음이 훨씬 아팠다.
군주의 자리만 얻으면 그 또한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구보다 강한 그를 보고 사랑에 빠졌듯, 그 또한 언젠간 그러리라 믿었는데.
“나, 날 떠나겠다고. 당신이, 날…….”
눈가가 시큰거리며 아파 왔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입술이 떨려 왔다. 선을 넘어 버린 감정이 알 수 없는 곳까지 복잡하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스스로가 자제되지 않을 정도로.
“널 떠나는 게 아냐. 애초에 네 곁이었던 적 없으니까.”
사탄이 무릎을 굽혀 앉고, 멍하니 초점 잃은 시선을 잡아챘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때려 박듯 속삭였다.
“잘 들어, 릴리트. 나는, 누구의 것도, 되지 않아.”
“…….”
한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오로지 하나의 염원을 가지고 여기까지 내달렸던 릴리트는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걸 잃어버리고 말았다.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조차 경험해 본 바 없는 상실감이 노도처럼 덮쳐 왔다.
인정 못 해. 그럴 리 없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당신이 날 떠나다니, 내 반려자가 될 리 없다니.
그래, 옛날부터 당신은 그랬으니까. 늪 같은 목소리 중 선명한 목소리 하나가 화살처럼 솟아올랐다.
당신은 옛날부터 그랬다. 지옥에 속했으되 속하지 않은 채로, 홀로 존재했지. 악마지만 악마답지 않았다. 그래서 악마가 무슨 짓을 할지 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무얼 할 건지 모두 예상하고 나보다 앞선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하지만 이건 예상하지 못했을걸? 당신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 당신은.
“어딜.”
스스로 피를 내어 저주를 만들어 내려는 손을 사탄이 가차 없이 짓밟았다. 릴리트가 천진하고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피를 내는 방법은 손뿐만이 아니지.
“위리놈이 말했어. 우리 악마들은 욕망에 너무나 약해서 스스로를 망쳐 버리는 짓을 쉽게 하고 만다고.”
“……너.”
“설령 죽더라도 놓아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다니, 나는 어쩔 수 없는 악마인가 봐.”
툭, 툭. 잇새에서 흘러내린 검은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언젠가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끝까지 당신을 원하고, 당신은 끝끝내 나를 거부하는. 우리의 끝이 그러지 않기만을 바라며 수백 년간 마주칠 때마다 아주 미세하게 저주의 그물을 만들어 나갔지. 거미가 촘촘하게 지어 나가는 거미줄처럼 세심하게 만들어 나갔다. 단단한 바위가 오랜 세월 동안 바람에 깎여 나가듯 느릿해서, 늘 악마들의 악의에 둘러싸여 전투를 치러야 했던 당신은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
고고하고 숭고한 당신이기에, 불로 뛰어드는 부나방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원망이 이토록 쉽게 분노로 변한다는 사실도, 가질 수 없을 바엔 망가뜨리는 게 나은 마음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지상에 보내 줄게.”
혀를 깨물고 죽음에 이르며 낸 피가 은밀한 저주를 완성해 나갔다. 멀리 올올이 걸쳐져 있던 실타래가 팽팽하게 당겨져서 순식간에 사탄을 제압했다. 죽음으로 완성해 나가는 저주의 그물이 그를 옭아맸다.
【내 스승이자 친구이며, 배신자이자 적의 수장. 당신에 의해 모든 것을 잃었듯 당신 또한 잃게 하리라.】
바닥으로 떨어지는 핏물이 악마의 언어로 변해 흩날렸다. 뒤늦게 릴리트의 속셈을 알아차린 사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릴리트가 유쾌하게 웃었다.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스승을 보자 이렇게 기쁠 수 없었다.
난 이미 몇백 년간 당신 때문에 괴로웠거든. 그래서 당신이 이 괴로움을 알아줬으면 했거든.
【가장 열등하게 여기던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그들의 생명력을 갉아먹지 않고는 연명하지 못하게 되리라.】
이건 당신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
【돼지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으로 영겁의 시간을 견뎌라. 무리 지은 파수꾼들이 당신을 발견하거든 갈기갈기 찢어 먹도록 하리라.】
이건 당신의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마침내 당신 손으로 죽일 수 없는 천적을 만나게 되리라. 그러고도 죽인다면, 당신의 세계가 기어이 끝나도록 하리라.】
나는 당신의 고통이 되고 비참함으로 가라앉아 곁에 머물 것이다. 나를 잊지 마. 내 목소리, 내 눈빛, 내 삶의 끝. 생명을 모조리 쏟아부은 모든 저주의 언어를 당신 머릿속에 새겨. 평생토록 저주를 되새기며, 이날을 후회하면서 살아.
가장 하등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인간의 나약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 언제 어느 때고 너의 ‘세상’이 끝날지 몰라 두려워하렴. 파수꾼이 몰려와 칼로 쑤실 때가 언제일지, 강인한 육체로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공포와 절망, 고통에 평생을 몸부림쳐.
그럴 때마다 당신은 날, 내 목소리를 떠올리겠지. 그렇게 괴로워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았던 걸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영원히 당신을 가지는 순간이겠지.
당신이 아무리 강했다 한들, 수백 년간 촘촘히 걸고 죽음으로 완성한 저주를 돌이킬 순 없을 것이다. 내 힘으로는 힘을 틀어막는 정도가 고작이지만, 무척 기뻤다.
죽어 가는 눈을 치뜨고 사탄의 마지막을 응시했다. 피가 터지도록 온몸의 힘을 쥐어짜, 이 순간을 기억하려 애썼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인간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광경 아니던가.
뒤틀리고 왜곡된 웃음이 터졌다.
세월도 부술 수 없을 우리만의 왕국. 단단하고 굳건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담벼락이 지어지고 있었다.
붉은 눈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분노의 본질은 사랑이다.
봐, 당신도 날 사랑하지?
릴리트는 제 선택이 옳았음을 깨닫고 환하게 웃었다.
기쁘다. 이제야 당신이 온전히 내 것이구나.
릴리트가 목숨을 바친 저주. 저주를 완성하고 고꾸라지는 그녀를 보았던 게 사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드리안의 몸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의 기억은 오로지 그게 다였다. 아팠다. 아프다는 말밖에 튀어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팠다.
처음에는 이게 고통인지조차 몰랐다. 강인한 육신에서 사탄으로 군림하던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이었으니까.
사탄은 죽음으로부터 초월한 생명체였다. 죽음, 고통, 질병, 아픔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
그의 육체는 칼로 베어도 흠집 하나 안 날 만큼 단단했고 몽마의 왕인 릴리트도 뚫을 수 없는 정신체가 깃들어 있었다. 람몬이 쏘아 올린 천둥과 번개도, 뱀 악마 보티스의 독니도, 어릿광대 니바스의 환각도, 불의 왕 플뤼톤의 불꽃도 사탄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그런데 이 몸은 대체 뭔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름 없는 질병까지 모조리 끌어모아 이 몸뚱이 하나에 쏟아부은 것만 같다. 수백 개의 송곳으로 온몸이 쑤셔져도 이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입을 벌리자 평생토록 들어 보지 못한 아기 울음소리가 귀를 찢었다. 안개 낀 듯 흐려진 시야에 답답함을 느낄 새도 없이, 온몸을 찌르는 듯한 아픔에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선생님, 선생님! 도련님께서 또!”
“이런, 또 발작이 왔군……. 하, 우리로선 할 수 있는 게 없네. 이미 허용치를 넘는 약을 주사했단 말이야. 이 이상 진정제를 투여하면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
숨을 쉴 수가 없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목을 짓누르는 것처럼 숨을 뱉을 수가 없다. 눈앞이 빙빙 돌아 혼절했다 울면서 깨어나길 수십 번이었다. 할 게 없다고 지켜만 보는 인간에게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찢어발기고 싶은데 지금 할 수 있는 건 고작 손톱만 한 요람에 누워 살의를 불태우는 것뿐이었다.
죽인다, 죽여 버릴 테다. 몸을 가눌 수만 있다면, 사탄의 힘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는 다시 혼절했다.
고통에 몸부림치고 발작하고 피를 토하며 혼절하고 깨어나기를 반복하며 몇 개월이나 지났을까. 아드리안은 울기를 멈추었다. 무자비하게 몸을 구타해 대는 아픔은 여전했으나, 먹을 것 하나 자발적으로 넘기지 못하는 상태에서 울며 힘 빼 봐야 득 될 것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실제로는 이 악물고 참아 내는 것에 불과했지만, 이 모습을 보고 인간들은 병이 다 나은 게 아니냐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오히려 증상이 더 심해졌다는 의원의 진단에 단번에 스러지고 말았지만.
“그런데 도련님 말이야……. 울지도 않고 이상하지 않아? 표정도 없고.”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저 나이 때 어린애들은 시도 때도 없이 우는데 말이야.”
야심한 밤, 방을 정리하며 하인 둘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워. 아드리안이 신경질적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겨우 우유를 몇 모금 마셨는데, 마시자마자 피와 함께 토해 버리고 열이 펄펄 끓는 바람에 무척 지쳐 있던 차였다.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면 말 못 하는 언어 장애가 생긴 건 아닐까? 에구, 우리 마님 불쌍하기도 하지. 재작년에 유산하시고 겨우 아이를 가져서 낳았는데, 매일같이 오늘내일하다니. 그간 태교에 얼마나 정성을 쏟으셨어? 푸훗, 조금 우습지 뭐야.”
“얘, 말조심해!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