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쥐는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지 못하고 도망친다.
검고 차가운 밤공기 위로, 본 적 없는 붉은 글씨가 천천히 쓰였다.
「메인 퀘스트 - 살인이 시작되었습니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메인 퀘스트가 모래알처럼 흩어지더니 왼쪽, 아드리안의 상태창 위에 자리 잡았다. 붉은 글씨로 ‘[메인 퀘스트] 살인’이라고 떠 있는 걸 보니 새삼 공포게임에 들어와 있는 게 실감 났다.
내가 살인을 마음먹기 전까지는 메인 퀘스트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다는 게, 이 게임의 난이도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끝까지 사람한테 손댈 결심을 안 했으면 게임 속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안 떴을 수도 있었다는 뜻이니까. 메인 퀘스트가 총 몇 개인지, 어떤 조건으로 완수해야 하는지 아무 설명 없었으나 필연적으로 게임의 엔딩과 관계있을 것 같았다.
아드리안이 아프겠다, 메인 퀘스트 떴겠다, 미리 봐 둔 제물도 있겠다. 삼박자가 완벽하게 어우러졌으니 나만 마음 단단히 먹으면 된다. 마침 어두컴컴한 밤이고 주변에 사람 그림자 하나 없어 목격자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살인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웅크려 있던 몸을 일으킨 뒤 품에 안고 있던 이불을 야무지게 말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었다.
일단 마음먹긴 했는데 막상 움직이려고 하니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을 진짜 죽여야 하는지, 아니면 아드리안에게 적용되는 룰처럼 어시스트 킬도 인정해 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조금 고민하다가 아드리안을 먼저 살려야 하니까 후자로 생각하기로 했다.
완전히 죽이진 않고 죽기 전까지 만들어 놓은 뒤 아드리안을 업어 와서 막타 치게 하면 되겠지. 하지만 사람을 어떻게 죽기 직전으로 만들지? 머리가 백지다. 에라이, 명색이 메인 퀘스트라면서 치명상 입힐 수 있는 칼 같은 아이템도 안 주냐.
“진정하자, 진정…….”
후하후하 숨을 가쁘게 뱉어 봐도 심장은 청개구리처럼 더 크게 쿵쾅거렸다. 저번에도 생각했듯이, 난 법치국가에서 살아온 평범한 서민이었다. 옆집에 범죄자가 이사 왔다거나 이웃이 범죄를 저지르는 걸 목격했어도, 넌 죽어도 싸다며 죽이러 달려들진 않는다. 보통은 범죄자를 피해 이사 가거나 경찰에 신고하겠지.
조앤이 하도 불쌍하게 굴기에 몇 마디 해 준 것도 현대로 치면 119에 전화 걸어 주는 행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도덕적 책임감도 느꼈지만, 법의 보호를 받으며 법을 믿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저 당연한 행동이었을 뿐.
그렇기에 지금 아드리안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고자 마음먹은 게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도 알고 있었다. 으으, 내가 어쩌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거지. 이건 다 릴리트 때문이야. 애먼 애한테 저주 같은 걸 해서 이 난리야, 난리는…….
마구간을 향해 어둠을 헤치고 한 발짝씩 걸어가는 내내 손이 달달 떨렸다. 켕기는 게 있어서인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간이 콩만 한데 사람을 어떻게 죽인단 말이야?
하지만 내게는 이 게임에 들어온 이후 유구히 써먹은 무적의 주문이 있었다.
“이건 게임이야, 게임. 조금 사실적일 뿐이지, 게임이야…….”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도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것. 이 세상은 게임이라는 합리화. 사실 이 명제는 일찌감치 깨지기 시작해 부스러기밖에 남지 않았지만, 내가 견디기 위해서라면 부스러기에라도 매달릴 수 있었다.
게임이다, 게임. 미친 듯이 그렇게 세뇌하며 커다란 저택을 돌아가니 마구간으로 향하는 긴 자갈길이 보였다. 말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걸 보니 맞게 찾아온 것 같았다.
살금살금 마구간 앞까지 오고 나니 내가 흉기가 될 만한 어떤 도구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차. 살인이라는 행동 자체에 골몰해 있느라 미처 여러 가지를 고려하지 못했다.
다시 돌아가서 무기가 될 만한 걸 가져올까? 부엌에 가서 칼이라도…….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젓고 마구간 근처를 살폈다. 지금 돌아갔다간 겨우 단단하게 먹은 결심이 허물어질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스킬창을 한 번 더 점검해 봤지만, 아쉽게도 살인을 도와줄 수 있는 스킬은 보이지 않았다. ‘감지’나 ‘투시자의 눈’은 말할 것도 없고 ‘숙면’은 전투에는 써먹을 수 없으니까. 결론은 시스템 도움 없이 맨몸으로 싸워야 한다는 거다. 지금 아니면 아드리안을 구할 수 없으니까. 제물이 고작 하나라도 큰 도움이 되겠지.
“이거면 적당할까.”
마구간 옆에 여러 도구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그중 작은 건 제외하고 무기로 쓸 만한 것들 중 골라 보니 삽이 손에 찰지게 달라붙었다. 그리 무겁지도 않고 단단한 데다 끝도 조금 뾰족해 유사시에 잘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삽으로 레티샤를 내려치려다 빗나가서 눈 옆을 길게 찢었다고 하니, 복수도 겸사겸사할 겸.
나는 숨을 잔뜩 죽인 채 마구간 옆 작은 오두막집 앞에 섰다. 무방비하게 열린 문은 바람이 이리저리 치는 대로 열렸다 닫히며 끼이익거리는 소리를 쉴 새 없이 냈지만, 수면에 큰 방해는 안 되는지 드르렁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 숙소 안에는 제드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막타를 아드리안이 쳐야 기여도를 가져갈 수 있으니 정신 못 차리게 반만 죽여야 한다. 삽으로 얼마나 패야 죽거나 기절할까? 주방장이 물고기 손질할 때 보면, 자기 팔뚝만 한 고기 대가리를 큰 칼로 두세 번씩 내려쳐서 기절시키던데. 얘는 물고기보다는 튼튼할 테니까 열 번 정도 패면 될까? 여차하면 내 선에서 죽일 각오도 해 놔야 했다.
“…….”
언제든지 내려칠 수 있도록 삽을 두 손으로 단단히 쥐고 들어 올린 채, 문이 열린 타이밍에 맞춰서 안으로 들어갔다. 오두막 안은 내 방보다 작았다. 한쪽 구석엔 채찍 따위의 말 다루는 도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중앙엔 탁자, 그리고 문 바로 앞이 침대였다. 탁자 위에 놓인 촛불 하나가 드르렁 쿨쿨대며 곯아떨어진 제드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부서지도록 삽을 세게 틀어쥐었다. 조용한 걸음으로 제드 머리맡까지 다가가서 시간을 셌다. 셋 하면 온 힘을 다해 내려치는 거야. 그냥 생선 기절시킨다고 생각하고, 셋 하면 한 방에 기절시키는 거다.
하나…….
“뭐야, 누구야?”
으아아! 깼다! 셋이고 뭐고 모르겠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삽을 휘둘렀고 몽롱한 채로 부스스 일어나던 제드의 머리를 정면으로 강타했다.
까앙! 단단한 두개골과 삽이 부딪치는 맑은 울림에 눈이 번쩍 뜨였다. 와 씨, 성공한 건가? 생각보다 둔한 촉감 때문에 기분이 더러웠지만, 제드에게 정신 차릴 시간을 줘선 안 된다.
선빵필승! 억 소리 내며 뒤로 넘어가는 제드를 향해 한 번 더 삽을 휘둘렀고, 깡 하는 소리가 또다시 울려 퍼졌다.
깡! 까앙! 까아앙! 깡!
시작이 어려웠지, 막상 한 대 먹이자 이후는 눈 질끈 감고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삽을 휘두른 순간 뜨끈한 무언가가 다리에 튀었다. 온몸이 차갑게 식어 버린 탓에 데일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이거 피인 것 같은데…….
「삽 내구도가 떨어져서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골드 -5G」
미친, 내 돈! 이 긴박한 상황에서마저 시스템은 차분하고 착실하게 내 돈을 빨아먹고 있었다. 지금 메인 퀘스트 수행하는 중인데 내구도 손해는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구도 안 떨어지는 도구라도 주든지!
“이 미친년이!”
맞다. 나 제드 기절시키는 중이었지. 내가 다시 머리를 내려치기 위해 삽을 들어 올렸지만, 어느새 정신 차리고 몸을 일으킨 제드의 손에 막혀 버렸다. 다섯 대를 때려도 기절하지 않은 걸 보면 아까 생각한 대로 열 대는 내려쳤어야 하는 모양이다. 해 본 적이 있어야 알지!
“너, 이 빌어먹을 년이, 지금 누구를…….”
아드득 이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삽으로 내려친 게 치명타이긴 했는지 제드의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 갈래로 흐르는 핏물 사이로 악에 받쳐 번뜩거리는 눈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솟구친 경계심에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잠깐 주춤하는 사이 제드는 공격을 막아 낸 손으로 삽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상대가 여자라 쉽게 생각했는지, 무기를 빼앗아 제압할 만한 힘은 아니었다.
삽 뺏기면 다 끝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있는 힘껏 삽을 당겼는데, 내 힘이 훨씬 월등했는지 삽을 빼앗고도 반동으로 넘어질 뻔했다.
이러다 넘어지겠어! 으앗, 앗, 악! 백스텝 몇 번 콩콩 밟다가 겨우 균형을 잡았더니 제드가 험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허리를 숙였다. 침대에서 얇은 뭔가를 집어 든다 싶었는데, 두 갈래로 갈라졌다.
철썩! 뺨에서 굉장한 소리가 나며 고개가 홱 돌아갔다. 눈앞이 번쩍거리고 고막이 다 얼얼했다. 저 미친 새끼는 채찍을 왜 침대에 두고 자는 거냐…….
“후우, 시발. 진짜 죽을 뻔했잖아. 넌 뭐냐? 어느 년 때문에 원한 갖고 찾아온 거냐? 카롤리나? 아델? 알레이? 트리샤?”
저 채찍부터 뺏어야 한다. 내가 움직이려 하자 채찍이 한 번 더 날아들었다. 짝! 유연하게 휜 뱀이 오른쪽 종아리를 때리고 재빨리 뒤로 빠졌다. 무릎 뒤가 차인 듯이 내가 비틀거렸다. 종아리에서부터 허리까지 고통이 찌르르 올라왔다.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윽…….”
아프기는 진짜 더럽게 아프다. 뺨이 얼얼해서 몰랐는데 입 안도 터진 것 같았다. 자꾸만 흐려지려는 눈에 힘을 주어 강하게 치뜨자 핏발 선 눈동자와 마주쳤다. 날짐승처럼 검고 포악한 눈이 집요하게 날 살피고 있었다.
“아니면 레티샤? 그년이 보낸 거냐?”
“그건 댁이 알 거 없고.”
죽을 건데 뭘.
입 안에 가득 고인 핏물을 뱉어 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원거리 공격수가 된 그를 삽으로 공격하는 건 무리였다. 근거리 공격수가 원거리 공격수를 이기려면 몸빵으로 밀고 들어가서 죽어라 패는 수밖에 없었다. 채찍 몇 대 더 맞는 거야 내가 하려는 짓에 비하면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역시 레티샤 그년이었군.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그가 눈가로 흘러내린 피를 소매로 닦는 사이 나는 그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뒤늦게 기척을 느낀 그가 채찍을 휘두르는 바람에 왼쪽 팔을 세차게 얻어맞고 말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가서 그의 팔을 붙들었다. 채찍을 빼앗으려 해도 저항하는 힘이 만만찮았다. 하지만 나도 그에 못지않게 악에 받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팔을 콱 깨물었다.
“아아악!”
이로 팔을 잘라 낼 기세로 깨물었는데도 그는 채찍을 빼앗기지 않으려 끈질기게 버텼다. 말을 길들이며 단련된 근육질의 팔을 물어뜯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 턱이 얼얼하게 아팠다. 조금 전 채찍질로 입 안이 터져서 더 그랬다. 살점을 뜯어내기 직전까지 내몰리자 채찍이 마침내 손에서 떨어졌다.
“이…… 시발, 놔! 못 놔! 돌은 년이!”
이번에는 무릎으로 사정없이 내 배를 찍어 올렸다. 온 호흡이 일시에 다 빠져나가는 듯해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내장이 다 터지는 듯한 아픔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움직이긴커녕 엎드려서 고통이 멎기를 기다리는 게 최선일 듯했다.
“헙, 으읍…….”
나는 반쯤 고꾸라진 채 배를 잡고 물러섰다. 눈앞이 흐려지고 귀가 얼얼했다. 미처 못 보는 사이 뺨을 몇 대 더 얻어맞은 것 같았다. 쿨럭, 쿠울럭! 쿨럭! 핏물 섞인 기침이 울컥울컥 솟구쳤다. 기침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메아리치는 것처럼 먹먹했다. 피로 범벅된 침이 입 밖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드리안도 이렇게 끔찍하게 아팠을까?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이불에 쏟은 피가 엄청나던데. 맞아서 피를 토해 내는 것만으로 아픈데, 맨날 발작하고 정신 잃기를 반복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른 병으로는 또 얼마나 아팠을지…….
“아윽, 아…… 내 팔, 내 팔이…… 이 미친…….”
이를 부드득 갈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를 숙이고 있던 덕분에 그림자가 내 위를 덮는 타이밍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극도의 고통과 피로로 감기려는 눈을 치뜨고 온 힘을 다해 고개를 젖혔다.
아악! 다시 한번 비명이 터졌다. 뒤통수로 턱을 가격당한 그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나뒹굴던 삽을 집어 들고 그를 향해 돌진했다. 어, 어어어. 놀라서 뒷걸음질 치는 그를 벽까지 밀어붙이고, 나무 손잡이로 목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아래로 가라앉던 생존 본능이 되살아나 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삽 내구도가 떨어져서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골드 -5G」
「삽 내구도가 떨어져서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골드 -5G」
“켁…… 큭…….”
죽어, 제발 죽어 줘. 네가 죽어야만…….
필사적인 목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살면서 이렇게 누군가가 죽기를 바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 비인간적인 소망에 숨이 막히는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헐떡거리는 목줄기를 보자 더욱 어지러웠다.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느낌이 끔찍하다. 내가 그의 목을 짓누르고 있는 건데도 반대로 짓눌리고 있는 것 같다. 이성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하지만 지금 아드리안한테는 나밖에 없어. 다시금 떠올리자 시큰거리며 달아오르던 눈가가 가라앉았다. 나는 조금 더 차분해질 수 있었다.
“크윽…….”
꽤 오랫동안 목이 짓눌리고 있는데도 그는 도무지 죽어 주질 않았다. 사람의 명이 이렇게 질긴 건지 처음 알았다. 이 와중에도 놀라운 건 그가 아무리 밀어내려 애써도 나는 어린애와 팔씨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힘이 센 건 알았는데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는걸?
“아아악!”
죽기 전의 발악으로 그가 다리를 휘둘렀다. 나는 두 번 배를 걷어차이기 싫은 나머지 몸통을 틀어 피했다가, 힘의 균형이 무너져 그를 놓치고 말았다.
빨리 좀 죽으란 말이야! 쿨럭거리며 기침을 토해 내는 그를 향해 삽을 내리쳤으나, 아쉽게도 빗나가고 말았다.
그가 요란한 기침을 쏟아 내며 오두막을 뛰쳐나갔는데도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삽이 땅에 푹 박혀 버려 낑낑거리며 당겨도 도무지 빠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오, 힘 조절 좀 할걸.
「삽 내구도가 떨어져서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골드 -5G」
이 심각한 상황에도 흰 글씨는 계속 나타나 분위기를 깨부수고 있었다. 산만해서 싸움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 내구도 때문에 잔액이 점점 줄고 있어 옛날이었다면 눈물을 흘렸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내 일급은 두 배 이상 올랐으니까! 이런 소소한 돈에 연연하지 않게 됐다 이 말이다!
어쨌든 지금은 제드를 쫓아가자.
뽑히지 않는 삽자루는 남겨 둔 채 채찍을 들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직감이 들었다.
마구간 주변은 둘러봐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건 숙소 옆 마구간뿐. 여기로 들어간 게 맞겠지?
내가 채찍을 단단히 쥔 채 마구간으로 들어선 찰나였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손아귀가 불쑥 튀어나와 머리채를 순식간에 잡아챘다. 우악스러운 힘에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히히히, 헤헤헤. 이렇게 쫓아올 줄 알았지. 복수하려 한 거라면 너로는 어림도 없다, 이 조막만 한 년아.”
게걸스러운 웃음이 귓가에 퍼졌다. 머리 가죽이 통째로 쥐어뜯기는 듯한 끔찍한 악력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대비할 새 없이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머리채를 틀어쥐는 힘이 더 거세졌다.
머리끄덩이를 잡다니 이 비겁한 새끼…….
“얻어맞았긴 하지만, 얼굴은 꽤 봐 줄 만한데. 너도 죽이기 전에 먹어 줄까, 응?”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듯 그가 으르렁거렸다. 여기서 이런 강간범한테 죽을 순 없어! 나는 필사적으로 쥐고 있던 채찍의 손잡이 끝으로 그의 발가락 끝부분을 세게 찍어 눌렀다. 최소한 뼈를 으깨 버릴 작정으로 콱. 이건 좀 아플 거다, 강간범아.
“아아악!”
제드가 발을 감싸 쥐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머리가 자유로워진 나는 재빠르게 일어나서 그를 밀쳤다. 커다란 몸이 떠밀리며 울타리에 걸려 넘어지자 와지끈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드가 쓰러지자 놀란 말이 앞발을 높이 치켜들었고, 옆에 있던 말들이 연쇄적으로 반응하며 서로 뒤엉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제드는 사정없이 짓밟히며 정신을 잃은 듯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순백의 고급져 보이는 말이 다른 말과 뒤엉키다가 생채기가 난 것이다.
빌어먹을, 불길하다. 내 돈을 앗아갈 검은 손아귀가 다가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진하게 든다. 이럴 땐 나야말로 신을 찾고 싶었다. 신이시여, 어디든 계신다면 제발 이 게임 시스템 좀 조져 주세요.
“히힝! 히히힝!”
「마구간 울타리를 망가뜨려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골드 -300G」
「팔츠그라프 백작이 아끼는 말의 다리에 생채기가 났습니다.」
「골드 -500G」
「팔츠그라프 백작이 아끼는 말의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아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일급 70G가 10일간 회수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돈을 120골드 빼고 다 긁어 간 것도 모자라 열흘간 일급 회수란다. 일급이 올랐다며 자기 위로를 해 보려던 게 한계에 다다랐다. 적은 돈에 연연하진 않기로 했지만, 이건 좀 연연해야 할 것 같다. 앞으로 열흘간 일급 없이 어떻게 살지? 괘, 괜찮아. 남은 돈이 있으니까…….
“이제…… 끝난 건가.”
온몸의 긴장이 다 풀려 벽에 기댄 채 주르륵 내려갔다. 제드가 정신 잃은 지금이 기회인데, 얼른 가서 아드리안을 데려오든 저놈을 끌고 가든, 둘 중 하나는 해야 하는데, 도무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아픔뿐만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해치려고 직접 행동했다는 데 대한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상대가 설령 죽어도 싼 강간범이라고 해도.
「다친 몸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뺨의 멍과 부기 - 40G
입 안의 출혈 - 30G
오른쪽 종아리의 가벼운 타박상 - 10G
왼쪽 팔의 가벼운 타박상 - 10G
복부의 출혈 - 100G」
아파 죽겠다고 생각한 순간 흰 글씨가 놀리듯이 떠올랐다. 지금 내 전 재산은 딱 120골드. 아쉽게도 아픈 부분 전부를 치료할 순 없었다. 치료를 돈 내고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940골드였던 전 재산 중 울타리 비용과 말 치료비가 먼저 제외된 건 억울했다. 내 몸부터 전부 낫게 하면 좋았을 텐데. 시스템이 원래 그렇지 뭐.
반쯤 해탈한 채 흰 글씨를 다시 읽었다. 부상의 정도가 심할수록 더 높은 치료비가 책정되는 것 같았다.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가장 통증이 심한 복부를 택하고 나면 고작 20골드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일급과 보너스로 열심히 모아 놓은 940골드가 순식간에 0골드로 바뀌는 걸 보면서 울상을 짓는 한편, 복부와 오른쪽 종아리, 왼쪽 팔에서 느껴지는 아픔이 사라져서 숨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얻어터지던 감각만은 뚜렷하게 남아, 여전히 날 소름 끼치게 했지만.
아드리안한테 저 간식거리를 배달해 줘야 하는데, 이래서야…….
“……힐다?”
도저히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끝을 까딱거리고만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귀가 번쩍 뜨였다. 잘못 들은 건지, 바람이 너무나 큰 나머지 환청을 들은 건지 확인하고 싶은데 여전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진짜 도련님이면 참, 좋을 텐데…….
“힐다!”
눈이 서서히 감기려는데 누군가 어깨를 붙들었다. 선명한 푸른 눈을 보자 어슴어슴 멀어지려던 정신이 확 깨어났다. 내가 헛것을 보는 건 아니겠지?
“어? 도련님. 여긴 어떻게……?”
“너야말로 왜 이렇게 다친 거야?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
“여기 오셔도 돼요? 몸 안 좋으시잖아요.”
“나 괜찮아졌어. 하나도 안 아파. 너야말로 왜 이 꼴인지 당장 말해. 말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여 버릴 기세로 그가 살벌하게 속삭였다.
하나도 안 아프다고? 거짓말이다. 뺨이 하얗게 질려서는 쫓아와 놓고 괜찮다니.
발작만 멎었다뿐이지 온갖 병환이 두들겨 패고 있다는 사실쯤은, 왼쪽 아드리안의 상태창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수를 썼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이 꼴이 돼 가는 걸 알아 아픈 몸을 이끌고 온 모양이다.
뜻 모를 웃음이 터졌다. 아드리안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한번 터진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웃겨서 웃는 걸 왜 그렇게 보는지 모르겠다.
악마나 나나 엉망진창이구나.
“힐다, 지금 당장…….”
“도련님, 저기 있어요. 제물.”
온 힘을 다해 겨우 들어 올린 손가락으로 무너진 울타리를 가리켰다. 겨우 진정한 말들이 투레질하며 이따금 바닥을 벅벅 긁고 있었다. 고개를 돌렸다 다시 내게 시선을 주는 아드리안은 꽤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놀라움, 위화감 같은 것들.
“기절시켜 놨으니 마저 죽이기만 하면 돼요. 막타 인정…… 맞죠?”
“힐다, 너,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왜.”
“이러다 깨어나겠어요. 빨리 죽이세요. 기절시키는 데 진짜 힘들었단 말이에요.”
내가 칭얼거리듯 손끝으로 아드리안을 꾹꾹 눌러 밀었다. 저 강간범 새끼 절대 두 번은 상대 못 해. 깨어나면 그냥 머리 박고 뒤질 수도 있다.
“제가 무서워할까 봐 못 죽이겠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저, 저 인간 죽일 작정하고 온 거니까. 고작 죽이는 모습 보는 게 무섭다고 할 리가 없잖아요.”
“…….”
“빨리 가세요. 어서요.”
아무리 재촉하며 손끝으로 밀어도 아드리안은 넋을 놓고 있었다. 이 광경을 직접 두 눈으로 봤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악마가 얼간이처럼 보였다. 내가 직접 목 따서 바치는 걸 원해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거냐고 으름장을 놓고 나서야 그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얼핏 입가에 미소가 맺히는 듯했으나 초점이 잡혔을 땐 몸을 돌린 후였다.
아드리안이 무너진 울타리에 가까워지자 투레질 소리가 멎었다. 동물들은 뭔가를 느끼기라도 하는 걸까. 울타리를 마저 넘어가자 슬금슬금 반대편 구석으로 멀어졌다. 신기하기도 하지.
“힐다, 보지 마.”
그가 돌아보지 않은 채 당부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제 와서 외면하는 건 위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당부는 귓등으로 튕기고, 힘을 주어 부릅뜬 눈으로 그가 제드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떤 방법으로 죽이려나 했는데, 방법은 간단했다. 머리통을 잡고 단숨에 돌려 버린 거다. 우두둑하고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에 나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우아한 몸짓에 비해 섬세하지 못하고 거친 방법이었다.
놀랍게도 감상은 단지 그뿐이었다. 사람이 죽는, 무척 잔인한 광경을 봤는데도 조앤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처럼 충격은 받지 않았다. 두 번째라 그런가, 이런 것도 면역이 생기나? 그러고 보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동물일지도 모르겠다.
“보지 말라고 했잖아.”
한숨을 쉬며 돌아보는 아드리안의 낯빛은 비록 어두웠지만, 확연히 보일 정도로 변해 있었다. 그를 증명하듯 왼쪽에 떠 있던 수많은 질환이 하나씩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제야 나도, 숨을 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메인 퀘스트가 완료됐다는 알림은 뜨지 않았다. 아드리안이 마지막 한 방만 날리거나 살인 보조만 해도 기여도를 인정받아 회복할 수 있듯, 나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처음부터 마무리까지 다 해야 메인 퀘스트가 깔끔하게 완수될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미친 난도다. 이 짓을 또 하라니 엄두가 안 나는데.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는 거보다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게 훨씬 어려운 걸 알아 버렸으니까.
메인 퀘스트를 바꿀 순 없는 걸까. 진지하게 고민에 빠진 나를 달래듯 흰 글씨가 불쑥 나타났다.
「메인 퀘스트를 처음 실패하여 경험치 2000을 얻었습니다.」
「히든 스킬 개방! ‘부관(副官) 호출’ 스킬을 쓸 수 있습니다.」
「레벨 20으로 올랐습니다. (칭호 : 악마의 예비 오른팔)」
「스킬 개방! ‘발자국 추적’ 스킬을 쓸 수 있습니다.」
「부관 호출
히든 스킬
개방 조건 : 메인 퀘스트 실패 시
메인 퀘스트 완수가 힘드신가요? 부관을 이용해 보세요. 총 5명, 당신을 도와줄 사람을 선정할 수 있습니다. 부관이 승낙 의사를 밝히면 목록에 추가되고 언제 어디서든 호출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장소로 오게끔 호출할 수 있으나 시간은 지정 불가능합니다. 대신 도착 10분 전 알림이 뜹니다. 다수의 부관을 동시에 부를 수도 있으니 얼마든지 이용해 보세요!
주의. 호감 대상은 승낙하지 않아도 부관으로 추가할 수 있습니다.
적대 대상은 부관으로 추가할 수 없습니다.」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글자가 이렇게 많담. 부관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볼 기운이 없다.
손끝을 겨우 까딱여서 스킬창을 닫자 걱정스러워하는 아드리안이 보였다. 그는 나 때문에 사람을 못 죽이고 나는 그 때문에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 죽이니 마니 하던 관계보다야 낫지만, 참 묘했다. 정신 차리니 이런 관계가 되어 버리고 말아서, 언제부터였는지 되짚어가다가도 길을 잃고 미아가 되곤 했다.
“저건 같이 파묻도록 해요. 어차피 저택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켜 떠나기로 했으니, 다들 조금 일찍 떠났다고 생각할 거예요.”
사람을 죽이는 건 마무리까지 지저분한 일이었다. 과거 살아온 길이나 죽는 순간, 그리고 죽은 이후 찾을 이들까지 생각해야 하니 그의 생을 통째로 마주해야 하는 거다. 아무리 쳐죽일 강간범이라도 그리워하며 찾을 가족이 어딘가에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좀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원래는 하인인 제가 해야 하지만…… 저놈이랑 싸우느라 힘이 다 빠져서요. 좀 도와주세요.”
“신경 쓸 것 없어. 뒷수습은 닥터 휴버트가 깨끗이 해 둘 테니까.”
“그래도 깔끔하게 처리하고 가는 게…….”
“일어날 수 있겠어?”
내 앞에 내미는 손을 보고 나는 말을 멈추었다. 조금 전 사람을 죽인 살인자의 손인데도 하얗고 길쭉하고 쭉 뻗은 귀공자의 손 그대로다. 그리고 나도. 사람을 죽일 작정으로 공격했는데도 땀으로 젖었을 뿐, 피 한 방울 묻지 않고 깨끗하고 평범하다.
살인자의 손은 그 모양새만으로 잔혹하고 섬뜩한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이제 내 손도, 누군가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평범하게 생겼을 줄은 몰랐다고 말하게 되는 걸까.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지. 눈물이 찔끔 났으나 그와 별개로 마음은 가벼웠다. 악마가 마냥 나쁜 악마로 보이지 않아도, 내가 사람을 죽이려 달려들었다 해도. 평생 학대당하듯 고통에 몸부림쳤던 악마가 아프지 않으니 좋았다. 스스로가 께름칙하게 느껴질 만큼, 이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심지어 시체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미친 게 분명하지.
“닥터를 다시 불러올 테니 우선 내 방으로 가자. 얼굴 상처부터 치료해야겠어.”
손을 마주 잡자마자 멱살이 잡힌 듯 가뿐하게 훅 들렸다. 도움을 받아 서긴 섰는데 여전히 힘이 풀린 다리 때문에 비틀거리고 있자 아드리안이 자연스럽게 부축해 주었다. 평소엔 반대였는데, 한 명 죽였다고 이제 팔팔하신가 보다.
“휴, 휴버트 선생님요? 저 그 선생님 무서운데. 그냥 두면 낫지 않을까요? 자연 치유!”
“힐다, 볼이 퉁퉁 부어서 그런 말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 나중에 거울을 꼭 보도록 해. 꼭 고쳐 달라고 빌게 될 테니까.”
“그…… 그 정도예요? 이건 다 도련님 때문이에요. 도련님이 칼 쓰는 법 제대로 안 가르쳐 줘서 무식하게 삽으로 싸우다 이렇게 됐잖아요!”
“그게 왜 내 탓이야? 나는 분명 똑바로 가르쳐 줬는데 힐다 네가 못 써먹은 거지.”
“가르쳐 주긴 대체 뭘 가르쳐 줬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작은 칼 가지고 온갖 무게는 다 잡더니 갑자기 마을로 가자면서, 실전에 써먹어야 한다는 둥, 결국 자기 혼자 다 할 거면서…… 아, 아! 아야! 아파요! 볼 잡아당기지 마요! 환자한테 무슨 짓이에요!”
「칭호가 변경되었습니다. (칭호 : 악마의 오른팔)」
“아야야!”
“거, 엄살 피우지 말고 입을 더 벌려 봐라.”
“아흐당 아이에요…….”
‘아프단 말이에요’를 눈물 찔끔 흘리며 뭉개진 발음으로 했더니 휴버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조앤 때문에 정면으로 부딪치긴 했으나 그 때문에 짜증 내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나는 더 항변하지 않았다. 새벽에 난데없이 두 번이나 끌려 나온 월급쟁이란. 도련님이고 나발이고 뒤집어엎지 않는 것만으로 살아 있는 부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게 아침에 부르자니까. 아드리안이 내 제안을 차갑게 거절하더니 휴버트를 끌고 왔다. 정중하고 예의 발라서 더 짜증 난다는 얼굴이었는데 아드리안은 무시하는 것 같았다.
“꿰매야 할지 말지 봐야 하는데 피가 많이 나서 보이지 않는구나. 우선 지혈부터 해야겠다.”
“이, 입 안을 꿰맨다고요! 무슨 그런 끔찍한…… 아, 아악…….”
“닥터 휴버트, 아프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렸잖습니까.”
“……네에. 최대한 살살하고 있습니다만, 더 주의하겠습니다.”
험악한 아드리안의 경고에도 휴버트가 다소 성의 없이 대답했다. 새벽 근무하는 월급쟁이는 다들 저렇지. 상사고 뭐고 눈에 안 보이고 집에 가서 자고 싶기만 한 그 마음,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아드리안이 저렇게 유난 떠는 이유도 충분히 알 만하다. 다 죽어 가던 자기한테 만병통치약 같은 걸 갖다줬으니 얼마나 고맙겠어. 그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서라도 잠깐 은혜 갚는 까치가 된 거지.
“흠, 다행히 꿰맬 정도로 찢어지지는 않았구나. 대신 당분간 뜨거운 물과 먹는 걸 조심해야 한다. 뺨에는 부기와 멍을 가라앉히는 연고를 줄 테니 틈틈이 바르거라.”
입 안의 피를 꼼꼼히 닦아 상처를 확인한 그가 말했다. 입 안을 안 꿰매도 된다니 천만다행이다. 다리에 힘 풀릴 뻔했네. 내가 깊게 안도하며 연고를 받아 들자 휴버트가 진료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자, 그럼 모레쯤 상처를 다시 보기로 하자. 다행히 크게 다친 게 아니니…….”
“치료를 다 했다면서 왜 아직 저렇게 벌벌 떱니까? 이 방에 오기 전까지는 저러지 않았는데. 혹시 닥터 휴버트가 아프게 한 거 아닙니까?”
눈 밑이 퀭한 휴버트가 퇴근하려는데 아드리안이 또 훼방을 놨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혀 들었다.
떨고 있다고? 내가? 나 안 떨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내렸는데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허허, 그래도 이렇게 쳐다보시면 부담스럽습니다만.
“……도련님. 저건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겁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괜찮아질 테지만, 정 걱정되시면 벽난로에서 몸 좀 녹이게 해 주시죠. 손발이 아주 차갑던데.”
‘그래도’라며 나서려는 아드리안의 소매 끝을 잡아당겼다. 더 붙잡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는데, 그러고도 입술을 들썩이는 걸 보면 여전히 휴버트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꼴값들 떨고 있다는 얼굴로 휴버트가 겨우 방을 떠났다.
저러고도 제드 시체 뒷수습하러 마저 일해야 한다니, 그가 먹은 수많은 돈이 한 번에 납득되는 순간이었다. 휴버트가 떠난 자리를 딱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자, 은혜 갚는 까치가 주치의의 추천대로 날 벽난로 앞으로 인도해 앉혀 주었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발갛게 피어오르는 불길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이상할 만큼 안정되어 갔다. 뒤이어 까치는 내 어깨에 얇은 모포를 덮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따뜻한 우유가 든 머그잔을 쥐여 주기도 했다.
오, 이 정도면 흥부의 까치를 부러워할 게 아니잖아? 그 까치는 씨앗이나 던져 줬지, 아드리안은 돈과 경험치뿐만 아니라 이런 안락한 생활까지 보장해 주었다. 금수저 까치라니, 대왕문어는 무척 뿌듯하군요.
“저, 도련님. 이제 몸은 괜찮은 거죠?”
아무런 알림이 뜨지 않고 있었지만, 확인차 까치에게 물었다. 금수저를 문 까치가 내 옆에 의자를 당겨 와 앉았다. 음, 자꾸 까치 까치 하니까 진짜 까치로 보이려고 한다. 원래대로 불러야지.
“죽는 줄 알았거든요. 피를 그렇게 쏟은 걸 보고…….”
“권력가 아들의 몸에 악마 영혼이 깃들어 있어.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있겠어?”
아드리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미친 듯이 뜨던 알림창도, 피 토하는 모습도 다 봤는데 센 척해 봐야 통할 리가 없었다. 나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데.”
“……그래. 인간의 몸이 약하긴 하지.”
멋쩍은 건지 벽난로로 시선을 돌리는 그가 아주 조금, 손톱만큼 귀여워 보이려 했다. 에휴, 이젠 별 게 다 귀엽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하지만 힐다, 앞으로 인간을 죽이려거든 마음을 더 단단히 먹고 해.”
“단단히 먹었는데, 마음…….”
“그렇게 덜덜 떨 만큼 무서워하면서 날 돕겠다고?”
아무리 떨고 있기로서니 차갑게 비웃는 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공치사를 바란 적은 없지만, 힘이 빠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때 웬 뜨끈한 달팽이 같은 것이 내 손등 위를 느리게 지나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드리안의 길쭉한 손이었다. 섬세한 악기를 연주라도 하듯 손등뼈를 하나씩 짚어 나가던 손가락이 이내 엄지손가락까지 닿았다.
덮었다. 덮었다기보다 얹어졌다. 아니, 덮었다. 그의 손이 창백하고 길쭉하다는 생각만 줄곧 해 왔던지라 내 손을 다 덮고도 남을 만큼 큰 줄은 미처 몰랐다.
다소 신기한 기분으로 그의 손을 구경했다. 무정물처럼 보이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라니. 악마의 손은 이보다 차가울 줄 알았다. 누군가의 손을 마주 잡기에는 잔혹하게 휘어진 모양으로 비틀려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온기는 뜨끈하고 천진했고, 손목의 맥박은 생동감 있게 뛰며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부드럽고 연약해. 힘주면 깨질 것처럼.”
“…….”
“이 손으로 살린 거구나, 나를.”
그리고 그 또한 어떤 깨달음을 얻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라니. 살인자의 변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크나큰 위안으로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까끌거리는 사포에 속이 쓸리는 느낌도 동시에 들었다. 이제라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범죄자라도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겪은 지금이라면.
하지만 아마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 죽어 가는 그를 위해 칼을 들 거다. 사람을 죽일 기세로 때리던 감각이 송곳 박아 넣듯 생생하지만, 결심은 그보다 더 선명했다.
아드리안을 선택하는 게 아니었다. 아드리안과 다른 무언가가 나란히 있을 때, 그를 외면하는 선택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뜻이었다.
우습게도 내게도 온기가 필요했던지라, 내 손 위를 지분거리는 손을 모르는 척 내버려 뒀다. 적어도 떨림이 가라앉기 전까지는 호기심을 거두지 않기를 바라면서.
손이 떨리는 와중에 온기를 나눠 줘서 고맙긴 한데, 명색이 지체 높으신 백작 가문 도련님 손을 이렇게 잡고 있어도 되나 싶었다. 평범한 일은 아니겠지? 그야 에밀리나 카타리나의 손을 아드리안이 덥석덥석 잡진 않으니까.
“저, 도련님. 손 뺄까요? 이제 괜찮은데.”
“힐다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스러워. 내가 아직 이렇게 떨고 있는데 혼자 괜찮아졌다고 놓을 셈이야?”
“……도련님이 떨고 계신다고요?”
내가 반문하며 시선을 살짝 내렸다. 떨리긴커녕 무섭도록 태연한 손이었다.
“난 방금 사람을 죽이고 왔어. 무서워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내가 슬쩍 손을 빼려 하자 아드리안이 아주 격하게 항의했다. 문제는 항의 내용이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이라는 건데. 그럼 그전에 살인은 손 떨려서 어떻게 했대? 방금도 엄청 능숙하게 하고 왔으면서.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지그시 쳐다보자 그제야 손을 덜덜 떨어 대기 시작했다. 어째 악마가 점점 약삭빨라지는 느낌입니다만.
“아까 그 강간범이랑 싸우다가 피 토하면서 했던 생각인데요. 도련님도 이렇게 아팠을까 싶었어요.”
“피를 토했다고? 어디 봐.”
“아뇨, 아뇨! 지금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말하려던 건 그게 아니라…… 너무 아파서 눈앞이 핑 돌고 기침이 토악질처럼 쏟아지는데, 잠깐인데도 죽을 것 같더라고요. 그러다 생각했죠. 도련님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아팠을 텐데, 매 순간 고통스러웠을 텐데. 손잡아 주는 사람 하나 곁에 없었겠구나. 되게 외롭고 힘들었겠다.”
“…….”
“그래서 도련님이 자기 자신을 살리는 일을 마냥 나쁜 일이라고만 여길 수 없게 되더라고요. 신기하죠. 처음엔 그렇게 무서웠는데…….”
“이번엔 네가 살렸어.”
“…….”
“이 손으로 날 살린 거야.”
마냥 따뜻하기만 했던 온기가 다소 습하게 달라붙었다. 벽난로의 불빛으로 생긴 그림자가 우리의 두 손을 반복적으로 넘나들고 있었다. 악마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살인을 결심했지. 그러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메인 퀘스트가 떠 버렸고, 실패하고 말았고. 아드리안이 이 게임의 주인공이었던 만큼, 그와의 인연은 미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게임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메인 퀘스트가 총 몇 개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아드리안 옆에 계속 붙어 있으면 언젠가 마지막 메인 퀘스트 받아 완료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될까?
이 게임의 주인공인 아드리안은 나를 게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존재일까, 내보내 주는 존재일까. 해답 없는 질문만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사방이 안개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꼭대기에 서 있는 것 같다.
“하, 돌아갈 수 있긴 한 건지…….”
“어딜 돌아간다는 거야?”
들릴 듯 말 듯 작은 읊조림이었는데도 아드리안이 칼같이 물었다. 손에 살며시 힘이 가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름대로 내 손을 짓누르지 않으려 참는 건지, 손가락 끝이 새하얗게 질린 채 손잡이를 짓누르고 있었다. 참, 얘는 숨소리도 들을 수 있는 괴물이었지. 히익, 저러다 손잡이 부서지겠다.
“그런 말 안 했는데요.”
“아냐. 방금 분명 그렇게 말했어.”
“정말 안 했어요. 아아, 머리가 갑자기 아프네…….”
오리발을 내밀어도 통하지 않자 희대의 발연기를 펼쳤는데 반쯤 열리던 입이 도로 닫혔다. 약아빠졌다는 눈빛이 역력했다.
뭐, 왜, 뭐. 님도 맨날 아픈 척, 연약한 척하면서 실속 다 챙기잖아요. 꼼짝 못 하는 아드리안을 보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앞에서 웃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순간 놀라고 말았다.
인생이 원래 이런 건가 보다. 낯선 게 어느새 익숙해지고, 불편하던 것들이 어느 날 왠지 편하게 느껴지고, 도저히 친해질 수 없다고 여겼던 사람과 곁에 앉아 있고.
그 상대가 악마라는 게 기묘하기 짝이 없었지만, 예상외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런 일상도 좋아. 나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문제는 편안하게 눈을 감은 다음에 발생했다. 밤이 늦은 야심한 시간이었던 데다 뒤늦게 피로가 덮쳐 와 깜빡 잠이 들려고 했는데, 시스템 메시지가 뿅 나타나면서 「베개가 없어서 누울 수 없습니다.」라며 수면을 방해했던 거다.
졸린 나머지 방에 가 봐야겠다고 하자 아드리안이 현대로 치면 ‘집에 들어가서 라면 먹고 갈래?’를 시도했는데, 갖은 핑계를 대며 거절해도 고집을 부리는 통에 나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어렸을 때도 몇 번 손잡고 잘만 잤는데 뭐가 문제냐고 우겨 대는 것에는 답이 없었다.
그거야 어렸을 때고 지금은 다 큰 성인이잖아! 늦은 시각까지 함께 머물렀던 것만으로 위험 수위인데 더 위험해질 순 없었다. 아드리안은 무척 실망한 얼굴이었지만, 이것만큼은 넘어가 줄 수 없었다.
그날 밤 제드가 끔찍한 모습으로 꿈에 나타났다. 피를 흘리면서 죽어 가는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나고 말았는데, 한동안 진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려 왔다. 내 죄책감이 만들어 낸 제드는 실제보다 더 끔찍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오늘 밤에는 반드시 ‘숙면’ 스킬을 쓰고 자야지. 전투 시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제약이 아쉽긴 하지만, 생활 속에서 이만큼 도움 되는 스킬이 없긴 하다.
“볼이 아주 엉망이네.”
새벽에 아드리안이 거울 좀 보라고 하더니 왜 그랬는지 알겠다. 새파랗게 피멍이 든 채 퉁퉁 부어 있는데…… 이런 얼굴로 돌아다니면 내 드높은 악명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폭도 아니고. 나는 휴버트가 준 연고를 살살 바르고 넓은 반창고로 피멍을 가렸다.
좋아, 감쪽같다. 이 정도면 치통 때문에 부은 거라고 둘러대도 대충 넘어갈 만하겠어!
보통 치통으로 이렇게까지 붓진 않을 것 같아서 사랑니랑 관련이 있다고 할지, 잇몸이 부었다고 할지 고민하며 숙소를 나갔는데, 지나가다 나를 본 레티샤가 마침 잘 만났다며 빨래 더미를 한가득 맡기고 갔다. 걱정과 달리 그녀는 내 상처에 관해 묻지 않았다. 내 상처는커녕 레티샤의 상처에 관해 물어보기도 전에 바쁘게 가 버렸다.
여름 오기 전에 대청소라도 하는 건가, 왜 저렇게 바빠 보이지? 나야 다행이다만.
“얼른 널어놓고 아드리안이나 보러 가야겠다.”
저택에 있는 모든 침대보를 다 빨기라도 한 건지, 넘겨받은 대야에는 흰 침대보가 수두룩하게 쌓여 있었다. 웃차. 나는 혹여 빨래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단단히 고쳐 들고 걸음을 옮겼다.
빨랫줄이 설치되어 있는 곳은 정원 옆, 볕이 잘 드는 마당. 이른 아침이라 사람도 없겠다,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조용히 빨래 널기 좋아 보였다.
당분간 바쁘게 지내야겠다. 홀로 멍하니 번잡한 생각에 침식되는 것보단 몸이 힘들더라도 일이 많은 게 차라리 나으니까.
“언니, 언니! 오랜만이에요!”
이불보를 널기 위해 하나씩 끌어당기며 정리하다가, 저 멀리서부터 뛰어오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로지였다.
“오늘도 연필 심부름을 왔어요! 며칠간 안 보이셔서 걱정했어요!”
참, 연필 심부름시켜 놨었지. 조앤 사건도 있었고 후작가까지 다녀오느라 한동안 신경을 못 썼다. 후다닥 뛰어오는 그녀의 눈높이를 맞춰 내가 허리를 숙였다. 가만 보면 참 귀여운 어린애인데.
“고마워, 로지. 연필은 어디 있어?”
“‘아무나 가져가세요’ 팻말 앞에 가져다 뒀어요! 언니 안 보이시는 동안에도요.”
“정말? 누구 눈에 띄진 않았어?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심할 텐데.”
여기는 엄연한 백작가다. 상전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저택 내부에 아는 사람이 있더라도 쉽게 들락거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있을 때는 대문까지 나가서 연필만 받고 돌아왔었는데, 없는 동안에도 로지가 심부름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거기다 연필을 팻말 앞에 갖다 두기까지. 이런 내 걱정이 이해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하던 로지가 이내 천진하게 웃었다.
“무슨 말이에요, 언니. 암살에 비하면 이런 건 식은 죽 먹기인걸요.”
“그,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하긴, 얘 엄청난 살인청부업자랬지. 이런 능력자를 연필 배달하는 데 쓰고 있다니 그야말로 재능 낭비였다.
“그런데 언니, 언니는 아무 일 없어요? 요새 무척 흉흉하잖아요.”
“응? 뭐가?”
“아직 못 들으셨어요? 요새 범죄자들을 죽이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요! 우리 조직 내에도 죽은 애들이 벌써 셋이나 돼서 뒤숭숭해요. 무슨 이유에선지 시체에서 죄다 손만 잘라 가고요.”
‘범죄자를 죽이고 다니는 사람’에서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가, 로지의 말이 이어질수록 두근거림이 가라앉았다. 휴, 나 말하는 게 아니었구나.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내 앞에 서 있는 볼이 통통한 귀여운 아이가 걱정됐다.
얘도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범죄로 치면 한 범죄 할 것 같은데.
“저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언니! 오히려 저를 표적으로 삼아 준다면 기쁠 거예요! 손목을 깔끔하게 잘라 낸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거든요. 한번 겨뤄 보고 싶어!”
그 마음을 읽었는지 로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까르르 웃었다. 참, 대사만 빼고 보면 평범하고 귀여운 아이인데 말이지. 그런데 범죄자만 골라서 죽이는 범죄라니. 굉장한 기시감이 드는 한편 과연 범인은 무슨 생각일지 궁금해졌다.
나는 하나 죽이고도 이렇게 벌벌 떠는데 말이지. 그도 그럴까? 아니면 악인을 처단하는 정의의 사도 콘셉트에 심취해 있을까? 모르겠다. 내 일만으로 머리가 아픈데…….
“그래도 로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조심요?”
“응. 몸조심하라고. 범죄자를 죽이는 또 다른 범죄자가 돌아다닌다니, 케이든과 그로버도 안전하지 않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예요, 언니. 어차피 여긴 다 죽고 죽이는 판인걸요. 세상이 쭉 그렇게 굴러왔는데 모르시는 건 아니잖아요?”
“죽고 죽이는 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로지를 바라봤다. 그녀는 왜 모르냐는 듯이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 세상은 범죄자와 방관자뿐이에요. 평화주의자와 피해자는 죽어 사라질 뿐. 방관자 중에서도 기회가 생기면 얼마든지 총칼을 집어 들 수 있는 이들만 남았죠. 그런 인간들이 뒤엉킨 전쟁터에 왔으면 같이 총칼 들고 싸워야죠? 조심하자느니, 평화를 지키자느니 외친다고 누가 듣겠어요?”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건데…….”
“죽이고 싶지 않으면 죽으면 되지요! 마을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언니처럼 말하진 않을 텐데. 이제까지 살아남으신 게 놀랍네요!”
아니, 그러니까 여기선 사람 죽이는 게 큰일이 아니란 소린가. 까르르 웃는 로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멍해졌다.
다들 사람 하나 죽이는 게 대수냐고 내심 생각하고 있다니. 설마 그렇겠냐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 연쇄 성범죄자 제드를 두고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이미 여러 번 여자를 강간해 죽인 제드, 그런 제드를 곁에 두려 한 백작, 백작의 명을 순종적으로 받들며 침묵을 지킨 저택 사람들,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둔 경사들까지. 이게 이 세계에서는 당연시된다 이거지.
내가 살던 곳의 윤리관이 이 세계에 완벽히 들어맞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우리 집에서는 익충(益蟲)인 거미를 죽이지 않지만, 남의 집에서는 쉽게 죽여 버리는 것과 비슷한 걸까?
하긴 공포게임이 진행되는 배경인데 살인이 뭐 대수겠어. 뼈저린 죄책감과는 별개로 참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신선한 충격에 빠진 나와 달리, 콧노래를 부르던 로지는 갑자기 발장난을 딱 멈추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닿지 않을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무서운 왕께서 납시었네요.”
“응?”
“곁에 있어 봐야 좋을 거 하나 없는 분이죠. 전 엮이기 무서우니까 이만 가겠어요. 언니, 안녕!”
인사를 채 건네기도 전에 빠르게 말을 끝낸 로지가 반대쪽으로 후다닥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한 무서운 왕이 누군지는 잠시 후에 시야가 붉어지자 알 수 있었다. 아드리안이었다.
“……힐다, 저런 건 어디서 만난 거야?”
로지가 사라진 방향을 빤히 바라보며 아드리안이 물었다. 아앗, 케이든과 그로버 사건이 다시 떠오르려고 한다. 로지를 연필에 찔리게 만들 순 없어!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뱉었다.
“누, 누구 말씀이신지.”
“아직 어리니 참견하진 않겠지만, 곁에 둬 봐야 좋을 거 하나 없어. 되도록 멀리하도록 해.”
아드리안이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투로 말했다. 둘 다 서로 똑같은 말을 하고 있네. 짜기라도 했나? 아는 사이야, 뭐야.
‘저런 게’ 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대답을 듣고 평정심을 유지할 용기가 나지 않아 참고 넘겼다. 호감도 최대치 찍고 시작했는데 멀리하라니. 호감 대상은 내 쪽에서 빼지도 못한단 말이야.
“힐다, 그런데 왜 그런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어?”
“……저, 도련님. 혹시 말인데요. 전에 계시던, 그러니까 악마들이 살던 곳에서의 윤리관이랄지, 도덕관이 있나요? 갑자기 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