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33)

5-2. 쥐는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지 못하고 도망친다.

연필 배달은 다음 날 아침부터 시작됐다. 며칠 푹 쉬다가 깎아 줘도 괜찮다고 했는데, 참 못 말리게 헌신적인 양아치들이다.

“언니, 언니! 그 연필로 뭐 하시는 거예요? 아이참, 언니를 위해 일한다니 정말 설레요!”

깎은 연필 열 자루를 소소하게 갖다주면서 로지가 눈을 빛냈다. 암흑가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것처럼 뿌듯해하기도 했는데, 차마 진실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저는 그냥 테크트리 잘못 탄 하인일 뿐인데요.

“어머, 사탕이라니! 달고 맛있어서 독살에 무척 효과적이겠어요!”

이른 아침부터 심부름시킨 게 미안해 사탕을 쥐여 줬더니 반응이 심상치 않다. 사탕에 감쪽같이 넣을 수 있는 독초를 연구해 보겠다며 발랄하게 뛰어가는데, 로지가 주는 사탕은 절대 먹지 않기로 했다. 파릇파릇 자라나는 귀여운 꿈나무인 줄 알았는데 독나무였다니.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 착하게 살아야 하나 보다. 악명 한번 잘못 쌓으니 주변이 죄다 살벌해졌잖아.

받은 연필을 저택 앞까지 걸어와 ‘아무나 가져가세요’ 팻말 앞에 내려놓고 부탁 목록을 눌러 보았다. 암살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인데 잘 들어가는 건 확인해야지.

『에밀리 : (⁎ᵕᴗᵕ⁎) 러브레터 받고 수줍어하는 중……. lv.4 (0/40)

케이든 : __φ(..) 깎은 연필로 낙서하는 중……. lv.10 (MAX)

그로버 : ___〆(・∀・) 깎은 연필로 낙서하는 중……. lv.10 (MAX)

로지 : (ノ´✪▽✪`)ノ 힐다의 악명을 찬양하며 돌아가는 중……. lv.10 (MAX)』

저 별 모양 눈알은 로지의 정체성인 모양이다. 그로버가 찌르기 좋아하겠는걸.

그런데 에밀리한테 러브레터라니. 얼마 전에도 받았댔는데 이번엔 또 누구야, 어느 놈이야. 내 허락 없인 연애 못 한다, 에잉떼잉……. 언제나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부탁 목록을 닫았는데, 그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누군지 확인하자마자 턱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힐다.”

반대로 조앤은 나를 보더니 무척 반가워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방금 무덤에서 일어난 것처럼 꼴이 형편없었다. 보조 보행기에라도 의지해 의료원 밖으로 나온 게 용할 정도로 말이다. 그녀가 급하게 보조기를 틀어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고 내가 몸을 일으켰다. 반대쪽으로 걸어가려 하자 조앤이 주름진 손을 뻗었다.

“히, 힐다! 잠깐만! 기다려다오!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내 말을 들어줘! 어이쿠!”

쿵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보행기가 앞으로 밀려 있고 조앤은 그 뒤에 넘어져 있었다. 마음이 앞선 나머지 보행기를 더 빨리 밀어 버려 걸음으로 따라가지 못한 듯했다. 놀라서 다가가려는데 바닥을 짚은 손이 떨리는 걸 보고 도로 멈추고 말았다. 흐느끼는 울음이 그녀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미안, 우욱, 미안하다. 그러니 아아, 아가, 제발, 제발 나 좀 살려다오……. 허으윽.”

갑자기 뭐야? 조앤의 급작스러운 사과와 눈물에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불과 며칠 전에 괘씸하다느니 천성이 독하다느니 악담을 퍼부었는데 만나자마자 사과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경멸과 분기로 가득했던 눈이 떠올라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다. 지난번에 못 때려서 죽기 전에 앙갚음하러 나온 건 아닌지, 넘어진 게 날 유인하려는 술수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

“미안하다, 우욱…… 미안해……. 네 말을, 흐읍, 들었어야 했는데, 우욱…… 쿨럭!”

“저기…… 괜찮으세요?”

“으흐읍, 우욱! 쿨럭, 쿨럭! 쿠읍, 쿠울럭!”

줄곧 입 안에 머금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은 피가 바닥 위로 촤악 쏟아졌다. 조앤이 입을 틀어막았는데도 핏덩이는 계속 울컥울컥 솟아올랐다.

헉, 장난이 아니잖아. 기침은 마치 거대한 해일처럼 조앤에게 들이닥쳤고, 콩벌레처럼 잔뜩 웅크린 몸은 잔인한 해일에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와, 저러다 진짜 죽겠다. 주춤거리던 걸음을 재촉해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약 있으세요? 약 갖다드려요? 아니면 휴버트 선생님을 불러 드려요?”

“어흐, 어흐흑. 힐다, 힐다……. 제발 날 살려다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되는지…….”

“살려 줘, 힐다. 살려다오. 미안하다, 미안해. 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입을 틀어막았던 손이 순식간에 내 팔목을 붙들었다. 거미줄처럼 엉겨 오는 손가락이 징그럽도록 습했다. 떨쳐 낼 수 없는 수증기가 들러붙는 느낌이었다. 매달리는 게 고작인 힘이라 더욱 뿌리칠 수 없었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저기 벤치 가서 이야기 나눌까요? 몸이 안 좋으시면 나중에 해도 괜찮아요.”

“아니다, 아니야…….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고맙단다. 다음은…… 아마 없을 수도 있어. 내가, 난…… 우욱.”

“일단 도와드릴 테니 일어나 보시겠어요? 조심하세요, 조심. 최대한 저한테 기대시고요.”

다리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거의 안아 올리다시피 했는데도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혼자서는 걸을 수 없을 정도라 부축하는 거보다 업고 가는 게 훨씬 편했다. 나는 그녀를 벤치에 데려다 놓고 저 멀리 밀려간 보조 보행기를 끌고 오면서 깊은 명상에 빠졌다.

“힐다, 너는 지나치게 물러.”

아드리안이 딱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을 때, 이 세상 최강 무른 악마인 주제에 사돈 남 말 한다고 속으로 비웃었는데 할 말 없어졌다. 게임 캐릭터끼리 싸워 죽이는 거 알 바 아니라고, 게임인데 뭐 어떠냐고 생각한 게 언젠데, 할머니가 넘어져서 울었다고 해서 금세 물러져서는…….

“힐다야, 힐다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내가 네 말을 듣지 않고, 흐윽, 들어오는 바람에…….”

“갑자기 왜 그러시는데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벤치에 앉아 오매불망 기다리던 조앤이 보조 보행기를 받아 끌어당기며 다시 눈물을 훔쳤다. 가까이서 자세히 살펴본 그녀는 언뜻 본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얼어붙은 겨울에 말라붙은 나뭇가지 같다. 아드리안과 나란히 두고 누가 먼저 죽을지 내기해 봐도 될 정도다.

“흐읍, 어흐흑, 꾸, 흐윽, 흑, 꿈을…… 어흐흐.”

“꿈요? 꿈을 꾸셨어요?”

내 물음에 봇물 터지듯 조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가련할 만큼 애처롭게 떨며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이 저택, 우웁, 이 저택에 들어온 후로, 아, 아아, 악마가, 흐윽, 우욱…… 나, 나를, 죽이러 오는 꿈을 꿔. 하루도 빠짐없이…….”

악마라니. 갑자기 허가 찔린 기분이었다.

“흐윽, 어으윽……. 히, 힐다. 나는, 나는 너무나 두렵고, 흐읍…… 무섭다. 40년 넘게, 으흑, 신전에서 봉사해 왔는데, 신의 곁에서 잠들 수 있을 거로 생각해 주, 죽음도 무섭지 않았는데, 아, 아아……. 악마를 만나게 되는 걸까. 악마에게 목숨을 빼앗겨 영혼이 불에 타 버리는 걸까. 신을 만나러 갈 수도, 다시 태어날 수도 없는 걸까…….”

“…….”

“기부금과 양육비를…… 횡령하는 중죄를 저질렀지만, 자비로우신 신께 용서받은 게 아닐까. 이, 이 저택에서 나가라는 마지막 계시를,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건 아닐까.”

평생을 신전에 바쳤다면서 횡령은 왜 해요, 할머니. 그러니까 쫓겨나서 이런 데나 오지.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눈물 콧물 범벅된 사람한테 차마 할 수 없어서 꾹 눌러 삼켰다. 저택에 들어오고부터 악마가 나오는 꿈을 매일같이 꿨다니, 정확해서 놀랐지만 안타깝기도 했다. 어차피 맞이할 끝이라면 모르는 게 나았을 텐데. 롤러코스터도 탈 때보다 타기 전이 더 무서운 법이니까.

“힐다, 날 좀 도와다오.”

그때였다. 경황없이 눈물만 주룩주룩 쏟아 내던 조앤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온기가 델 것처럼 뜨거워 화드득 물러나려 했지만, 조앤의 손이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건 알아. 충분히 알고 있단다. 하지만, 흐윽,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힐다…….”

“죄송해요, 전 그럴 수가 없어요.”

“왜, 어째서…… 힐다, 이렇게 부탁한다. 제발…….”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의료원에 들어오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불가능해요. 죄송해요.”

안된 일이지만, 지금 조앤을 밖으로 빼돌리는 건 진짜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며칠 전 마주쳤을 때 돌아가기만 했어도 억지로 말을 만들어 내서라도 모면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미 아드리안은 조앤을 먹잇감으로 인식했고 그의 몸 상태도 요즘 심상찮았다. 한껏 굶주린 흡혈귀가 손안에 들어온 핏덩이를 놓아줄 수 있을 리 없잖아. 만약 핏덩이를 빼앗아 도망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놈 숨통부터 끊어 놓겠지. 게임에서 빠져나가지도 못한 채 악마 손에 죽는 건 사양이다, 사양.

“힐다! 힐다! 그러지 말고 도와다오. 제발 날 살려 줘. 이렇게 부탁한다. 늙은 할미가, 으흡, 어흐으…… 미안하다. 진심으로 사죄하마. 이렇게, 이렇게…… 무릎이라도 꿇으마. 이렇게라도 네게 지은 죗값을 치를 수 있다면……!”

“왜, 왜 이러세요? 세상에, 일어나세요.”

내가 강경하게 거절한다 싶었는지 조앤이 갑자기 벤치에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말이 좋아 꿇은 거지, 거의 벤치에서 굴러떨어져 무릎을 찍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 맹렬한 기세에 나는 기가 눌리고 말았다! 이 할머니 보통이 아닌데?

“힐다, 제발! 제발 이 늙은이에게 자비를 베풀어다오! 그래, 옳지. 이걸 주마. 어렸을 때 예쁘게 빛난다고 가지고 싶어 했잖니? 어서 받으렴.”

“아니, 잠깐만요. 아…….”

“네게서 뺏었던 3천 골드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할미가 기억 안 나던 어린 시절부터 지니고 살아온 거란다.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어머니께 받은 듯싶지만, 이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니. 사양하지 말고, 자, 어서 받으렴.”

손가락에 꽉 끼어 있던 반지를 좌우로 비틀어 빼내고 내민다. 저걸 받으면 왠지 모든 게 망해 버릴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기겁하며 물러나는 이상으로 조앤이 반지를 가까이 들이댔다. 사약을 앞에 둔 장희빈처럼 거절하는데도 기어이 반지를 손가락 틈새로 밀어 넣었다. 반지를 떠넘기는 데 성공하자 도와준다는 대답을 들은 양 얼굴이 밝아졌다.

손바닥을 들여다보자 숨통이 콱 막혀 왔다. 장식이라곤 하나 없는 금반지지만, 평생 문지르고 만진 듯한 손길이 묻어 있었다. 깃털처럼 가벼운데 그 속에 스민 세월 때문에 무겁다. 어째 손가락까지 통째로 잘라 넘겨받은 느낌이었다.

하,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모르는 척할걸. 이미 악마가 작심한 걸 나더러 어쩌라고. 할머니 보내면 그다음은 나일 텐데…….

“그래, 늙은이가 노망난 거로 보이겠지. 이게 전부 괜한 의심일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 저택은…… 정말이지 이상하단다. 저택에 오기 전 만난 의원이 치료만 잘하면 적어도 석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아아, 나는 분명 느낄 수 있어. 이 저택에 들어온 이상 내일, 아니,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걸.”

외면하자, 외면하자. 아무리 불쌍해 보여도 외면하는 거야. 게임인데 뭐 어때.

“네게는 이 모든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 당연히 그럴 거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 말을 좀 믿어 주겠니? 내게 남은 희망은 너뿐이란다. 네가 버리면 난 그대로 죽어.”

그래, 잘하고 있어. 잘 외면하고 있어! 이렇게 외면하다 가 버리는 거야! 내가 사는 게 제일 중요하지! 조앤 밑에서 어린 힐다가 자라긴 했지만, 지금의 내가 위험을 감수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

“신을 모시면서 정작 내 잇속을 챙겼던 일, 저택에 들어와 네게 욕한 일…… 전부 사과하마. 어떤 말로 비난해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단다. 원한다면 뭐라도 내놓을 테니 제발 저택에서 내보내 주기만 해다오. 제발…….”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리던 조앤이 내 발밑에 머리를 조아렸다. 이마가 땅에 닿도록 바짝 엎드리고서 손을 모아 싹싹 비는데, 몸도 성치 않은 노인분이 이렇게 나오자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덩달아 내가 흙바닥에 꿇어앉아 조앤을 일으키려 해 봤지만, 그녀는 완강하게 버텼다. 곤란함보다 동정심이 더 커져서 곤란했다. 외면하자. 세뇌하듯 되뇌던 말은 어느새 흐려지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가면…… 가실 곳은 있으신 거예요?”

한참 머뭇거리다 내가 물었다.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다. 이미 악마에게 잘했다고 칭찬받고 착수금까지 넉넉하게 챙겼는데 할머니를 저택에서 내보내면 상도덕에 어긋나는 거잖아.

“신전 앞에 내버리고 가다오. 찬 길바닥이라도 좋아. 얼어 죽어도 좋다. 내 평생을 보낸 신전 앞에서 죽게 해다오. 쓰레기처럼 소각되어도 좋아. 매일 아침 기도드리던 여신상을 향해 머리를 두고 죽을 수 있다면……. 오, 힐다. 제발. 부디 내게 자비를 베풀어다오. 신이시여…….”

두 손을 모으고 싹싹 비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다. 빌어먹을, 불쌍해서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조앤에게 주먹질 당할 때는 있지도 않았던 정까지 모조리 다 떨어지더니, 막상 저런 모습을 보자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캐릭터 성향이 ‘선’인 걸 보니 사기는 쳐 왔어도 사람 해칠 생각은 안 했던 거 같은데.

돌겠다.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무시하려고 했는데 머릿속에서 이미 그녀를 구할 명분을 슬금슬금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살려 줘, 힐다. 이렇게 빌 테니 한 번만 구해다오. 너마저 거절하면 나는 정말로 죽는 수밖에 없어.”

으윽, 마음이 계속 약해진다.

조앤은 악마에게 목숨을 빼앗기면 영혼이 불에 타 버리는 거로 알고 있다. 신을 만나러 가지도, 다시 태어나지도 못한다고 얘기했으니까. 실제론 게임 데이터 하나가 바뀌거나 삭제될 뿐이겠지만, 적어도 조앤에게는 자신이 믿는 게 사실일 거다.

조앤이 부정을 저지른 건 맞다. 하지만 자기가 믿는 가장 최악의 끝을 맞이할 만큼 잘못했을까? 거기다 가장 큰 피해자였던 어린 힐다는 일찌감치 조앤을 용서했잖아. ‘할머니가 보고 싶다. 할머니 사랑해!’라고 일기장에 도배되어 있었고 말이야.

아악, 모르겠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아프잖아. 거기다 이 할머니, 내가 거절하면 왠지 앙심 품고 죽어서도 꿈에 나올 것 같은데. 날 마구 저주하며 베개 빼앗는 거 아닐까.

몰라! 할까 말까 고민할 때는 하고 후회하는 게 낫지! 나중의 일은 나중의 내게 넘긴다! 미래의 나야, 알아서 잘해 봐!

“……알겠어요. 같이 나가요.”

“뭐? 정말이니? 정말이니, 힐다?”

예상 못 한 대답이었는지 조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휘둥그레진 눈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신 신전으로 돌아가시면 진심으로 회개하셔야 해요. 기부금 횡령한 거, 어린애들한테 돈 뺏은 거 전부요.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그 애들에게 편지 하나씩은 남겨 주도록 하세요.”

“그럼. 당연히 하다마다……!”

미쳤지, 미쳤어. 내 코가 석 자인데 지금 누굴 돕겠다는 건지 나야말로 믿을 수 없었다. 이 일로 아드리안이 얼마나 살벌하게 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죽일까? 죽이겠지? 겨우 조금씩 날 믿어 가는데, 가끔 웃어 주는 그 얼굴을 이제 영영 못 보리라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시무룩해졌다.

“일단 저택 밖으로 나가요. 걷는 거 도와드릴 테니까 지금 바로요.”

“뭐? 지금 바로? 히, 힐다. 잠깐 의료원에 들렀다가 가면 안 되겠니? 거기에 내 경전과 목걸이, 여신상, 깔개를 두고 와서 말이다.”

“으, 으음. 신전에 가서 새로 구하시면 안 되겠죠?”

저택을 나가기로 한 이상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데 휴버트가 있는 의료원에 들렀다가 가겠다니, 다분히 위험한 짓이었다. 내 말에 조앤의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신전에 들어온 직후부터 늘 떼놓지 않던 물건들이라. 길바닥에서 죽더라도 그 물건들만큼은 나와 함께였으면 좋겠구나. 눈 감는 순간까지 신께서 곁에 머물러 주시는 기분일 테니까…….”

“그래도 의료원에 들르는 건 위험해요. 휴버트 선생님도 계실 테고.”

“휴버트 선생님은 이 저택 도련님을 진료하러 가신다고 자리를 비우셨단다. 그래서 나도 지금 나올 수 있었지. 평소에는 복도 밖을 벗어나면 난리를 부리시니 그럴 수 없었거든.”

그야 그렇겠지. 먹잇감이 감시 범위 밖으로 벗어나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

“도련님 진료 가시면 거의 반나절 동안 자리를 비우신단다. 빨리 다녀오마. 응? 힐다. 그것들이 없으면 정말로 불안할 것 같아 그런다.”

마치 분신이라도 떼어 놓고 온 듯 다시 눈가가 촉촉해졌다. 잘 모르겠지만, 신앙심이 깊은 만큼 평생 써 온 기도 용품이 자기 애처럼 중요하긴 한가 보다. 나는 빠르게 저택 4층을 훑어본 후 또 한숨을 내쉬었다. 아드리안 상태가 좋지 않은 만큼 요즘 휴버트의 진료 시간은 꽤 길었다. 걱정되긴 하지만, 잠깐 들르는 건데 큰일 있겠어?

“알겠어요. 대신 시간 끌면 안 돼요. 저는 의료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최대한 빨리 챙겨서 나오셔야 해요.”

“오냐, 그래, 그래. 힐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아직 무릎 꿇고 있는 조앤을 일으켜 업다시피 하고 다른 손으론 보조 보행기를 끌며 의료원으로 향했다. 이 몸의 체력과 근력이 대단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세 걸음도 가지 못하고 주저앉을 뻔했다.

「의료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뜰 때까지 나는 계속 걸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밀리자 그제야 조앤을 놔주었다. 보조 보행기를 끌고 의료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까치발을 든 채 저택 입구 쪽을 멀리 내다보았다. 마차 하나쯤은 비밀로 하고 빌릴 수 있겠지?

“아이고, 아이고. 다리야…….”

보조 보행기의 도움을 받아도 혼자 걷기는 쉽지 않았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다리와 배가 욱신거리는 아픔을 부여잡고 조앤은 의료원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과 완전히 단절되기라도 한 듯 의료원 안은 스산한 공기로 가득했다.

무덤 같은 고요함.

복도를 따라 병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데 사람의 온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만나는 사람이라곤 휴버트뿐인, 문이 열린 감옥. 치료라지만 감금이나 마찬가지다. 죽을 자리를 봐 두었으니 숨 쉬는 송장이나 다름없는 꼴이다.

거기다 휴버트는……. 머릿속에 잠깐 떠올리는 것만으로 서늘한 감각이 돌았다. 항상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꿈에서 만난 악마보다 더 비인간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를 보고 의료원에 따라온 건 크게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었다…….

경전을 찾아 얼른 신전으로 돌아가야겠다. 여기서 눈을 감을 바엔 신전 옆 골목에서 죽어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게 나았다. 무거운 돌덩이 같은 몸을 이끌고 겨우 병실에 도착했다. 보조 보행기를 옆에 세워 두고 침대 밑에 챙겨 둔 경전과 여신상을 조심조심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침대를 짚고 일어난 순간이었다.

“뭘 하고 계십니까?”

와 있는지도 몰랐던 휴버트가 인자한 미소를 띤 채 조앤을 지켜보고 있었다. 쇳덩이 같은 차디찬 회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싸한 감각이 전신을 훑었다.

“경전은 왜 챙기고 계십니까? 꼭 이곳을 떠나기라도 할 것처럼.”

“에, 에구머니나.”

“누우시죠. 아직 치료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서, 선생님! 저, 이곳을 나가겠습니다. 갈 곳 없는 저를 선생님께서 받아 주신 건 감사하지만…….”

이불을 반쯤 걷어 낸 손이 우뚝 멈추었다. 천천히 올라오는 회색 눈동자가 꼭 먹에 담갔다 뺀 것처럼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눈으로 보일 만큼 선명한 노여움이 조앤을 직시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갈 곳이 없어 이곳에서 지내시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눈 감는 순간까지 제가 돌봐 드리겠다고도 했고요.”

“그게…… 갈 곳이 생겼습니다. 힐다 아시지요? 그 아이가 편히 머물 곳을 알아봐 주었답니다. 착하기도 하지. 여기에서 일하는 아이니 얼마나 착한지 선생님도 아시지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저를 잘 따랐는데…….”

“힐다가요?”

아는 이름이 나와서인지 휴버트가 잠깐 생각에 잠겨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이때다 싶어 조앤이 온 힘을 다해 보행기를 끌며 문으로 향했다.

“네에, 네.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도 같이 나가시겠어요? 아휴, 이렇게 나가게 되어 어찌합니까.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는데요.”

“허허, 아뇨. 조앤. 그렇게는 안 되지요.”

“예에? 아, 아, 악, 왜, 왜 이러십니까……. 악!”

전심전력을 다해 도망친 게 무색하게도 휴버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보행기를 잡아당겼다. 드르륵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보행기가 멀리 굴러가고, 지지대를 잃은 조앤이 가방을 놓치며 쿵 넘어졌다.

“서, 선생님. 살려 줘…… 살려 주세요. 아악!”

“옛날에 딱 한 번, 그런 인간이 있었지. 신앙심이 깊은 놈이었는데 어째서인지 마지막 순간 도망을 쳐 버리더라고. 꿈에서 신이 계시를 줬니 마니 헛소리를 해 대면서 말이야.”

바닥에 넘어진 채 떠는 조앤을 휴버트가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조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너희 같은 것들을 홀리고도 남을 미끼가 뭔지 알아.”

“흐으, 으으, 살려…….”

“그물을 빠져나가려는 물고기는 즉시 잡아서 배를 가르는 수밖에.”

주사기에 약물을 채워 넣은 휴버트가 조앤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살려, 살려 주세요. 두려움에 떨리는 손이 바짓자락을 붙잡자마자 그가 가차 없이 쳐 냈다. 맥없이 내쳐진 팔이 바닥 위로 툭 떨어졌다. 뚜렷한 경멸을 담은 눈이 노인을 스쳤다.

“웃기지 않나? 신인지 뭔지, 자길 떠받들었던 인간이면 횡령이니 뭐니 해도 계시를 주는 걸 보면 말이야. 내가 신이라면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고 지켜볼 텐데. 생에 대한 집착, 돈에 대한 욕심의 굴레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을 구경하는 일은 몹시 흥미로울 테지. 계시라니 어림도 없지.”

“천벌을, 천벌을…….”

“천벌 받을 죄였다면 일찌감치 받았겠지.”

그는 무심하게 대꾸하며 주사기를 조앤에게 꽂아 넣고 약물을 주입했다. 덜덜 떨리던 손이 경련을 멈추면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조앤이 의료원에 들어온 이후 그는 줄곧 병의 진행을 빠르게 하는 약물을 주입해 왔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이번엔 재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아쉽지만 세상은 악인이 더 잘사는 법이거든. 내가 살아 있는 게 그 증거란 말이야.”

정신을 잃은 조앤을 병상에 누이자, 13년 전부터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내가 떠올랐다. 희귀병을 치료하는 약물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어마어마한 돈이 휴버트를 이 길로 이끌었다. 그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언젠가 건강해지리란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녀와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희생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건강해진 아내가 저를 보고 웃어 주기만 한다면 모든 죄가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 테니까.

그는 자상한 손길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휴버트가 짙은 눈을 빛냈다.

“힐다.”

배신자를 만날 시간이었다.

「강한 살의를 가진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흰 글씨에 내가 고개를 돌렸다.

강한 살의라니, 누가?

나는 당황해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감지’ 스킬이 발동되지 않는 거로 봐서 아드리안은 아닌데. 그가 아니더라도 주변엔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람이 나올 만한 곳은 하나뿐이었다. 의료원.

“힐다.”

낮디낮은 목소리가 칼날처럼 드리워졌다. 나는 숨을 삼키며 의료원 입구를 바라봤다. 뒷짐 진 채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휴버트는 마치 먹에 푹 담갔다 꺼낸 것처럼 시커멨다. 숨골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얘 왜 분위기 최종 보스야? 의사 캐릭터 맞아? 공포게임 패치 받고 저 꼴이 된 건가?

“힐다,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니?”

뒷짐 져서 보이지 않는 손이 무척 의심스럽다. 뭘 숨기고 있는 거지?

“선생님, 도련님 진료 가신 거 아니었어요?”

“오, 도련님 진료 말이냐. 원래라면 오후 내도록 도련님을 진찰할 생각이었는데 깜박하고 약을 안 가져왔지 뭐냐. 약을 가지러 도로 의료원으로 왔는데 잡아 놓은 쥐새끼가 빠져나갈 준비를 하는 걸 봤지.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

“……할머니한테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무슨 짓을 하긴. 잘못된 선택을 하려 하기에 차분히 설득해서 재워 드렸지. 의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니겠니.”

“거짓말이군요. 할머니는 더 이상 이 의료원에서 치료받기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경전을 챙기러 들어가셨는데 그새 생각이 바뀌었을 리가 없잖아요.”

“허허, 이래서 눈치 빠른 놈들은 귀찮다니까.”

목소리가 심상찮게 낮아지더니 밑바닥까지 내리깔렸다. 음산한 악의로 조각된 얼굴이 짜증스럽게 찌푸려졌다.

“힐다, 일을 방해하려던 걸 옛정을 생각해 모른 척 넘어가 주려 했는데 이렇게 꼬치꼬치 트집을 잡다니. 정말 실망스럽구나. 내 일을 방해한다면 네 할머니와 똑같이 만들어 줄 수밖에 없어. 너도 할머니 옆에서 잠들고 싶은 거냐? 도련님께서 각별하게 여기시는 것 같아 두고 볼 수밖에 없었지만, 자꾸 이러면 나도 방법이 없단다.”

「휴버트의 살의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선생님, 환자를 돈 받고 팔고 있는 거죠?”

정곡이 찔리자 휴버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뒤이어 작게 들렸다.

“……그걸 알아내다니 제법이구나. 이젠 제법, 진심으로 방해가 될 것 같아.”

“그렇게 돈 모아서 뭐 하시려고요? 이미 환자를 여럿 속여서 팔아넘기지 않았나요? 그 사람들은 전부 선생님을 믿고 치료받으러 왔을 텐데!”

“내 양심을 자극해서 할머니를 빼내 보려고 하는 거라면 소용없단다. 나는 그런 것 따위 버린 지 오래니까.”

효과가 영 없진 않았던지 목소리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노기가 느껴졌다. 뒷짐 진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손에 쥔 물건을 꽉 쥐었다 놓는 것 같았다.

“힐다, 안된 일이다만 삶이란 늘 네가 살고 싶은 대로 살 수만은 없는 법이란다. 살다 보면 원치 않는 길을 가야 할 이유가 생기게 마련이지. 하지만 걷다 보면 썩 나쁘지만도 않다는 걸 깨닫기도 해. 자, 이제 불필요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도련님을 모셔 오거라. 또 허튼수작 부리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 정도는 해낼 수 있겠지?”

조곤조곤 타이르는 듯한 어조에 나는 그저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피를 쏟아 내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이, 악마를 두려워하던 얼굴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아무리 죽을 날이 정해져 있는 사람이라도 그렇게 죽이는 건 너무하잖아. 내가 차마 조앤을 두고 발을 떼지 못하고 있자 휴버트가 그늘진 입구에서 한 발짝 나왔다.

“인간적인 연민에 휩싸여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마라, 힐다.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면 도련님께서도 네 공로를 모르는 척하시진 않을 거다. 내가 직접 말씀드릴 테니 현명하게 생각해 보렴.”

“…….”

“도련님을 모시고 오거든 너도 함께 들어오렴. 저분이 널 키워 주셨다면서. 눈 감는 마지막 순간 너를 보고 싶어 하실 수도 있지 않니.”

「맵 개방! 팔츠그라프 저택 내 의료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노골적인 호의가 가득한 얼굴 위로 하얀 글씨가 떴다. 불이 들어온 듯 환하게 밝아진 의료원을 허무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나는 저택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참을 수 없는 무력감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휴버트가 와 달라고 했단 말이지.”

“네.”

“준비가 끝난 모양이네. 알겠어. 힐다, 너도 함께 가겠어?”

나는 대답 없이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책을 덮고 일어나 의료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챙긴 건 검은 장갑. 언젠가 나도 손에 넣은 적 있는 아이템이었다. 만일에 대비해 켜 놓은 ‘투시자의 눈’ 덕분에 장갑은 붉은 악의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특별한 장갑(고대 마법 물품)

사용 흔적이 남지 않게 설계된 특별한 도구」

“응? 힐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아드리안이 다가와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푸른 눈이 의문을 담은 채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장갑을 끼고 조앤을 죽일 거냐는 물음을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다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아드리안에게 부탁 한번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옛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이지만, 지금의 아드리안은 어쩌면 내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슬며시 생겼다.

악마가 자기 입으로 정들었다고도 했고, 우리 사이에 피치 못할 서사가 쌓이기도 했으니 어쩌면…….

“저기, 도련님. 예전에 후원하신다던 어린 화가 말이어요. 이름이 클로드였나? 방에 덩그러니 있는 거 보고선 죽이려고 데려온 줄 알고 말린 적 있잖아요.”

“응. 얼마 전에 아카데미에 무사히 입학했다고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어. 미래가 기대되는 아이지.”

“그때 살려 달라고 부탁하면서 제가 나쁜 놈 많이 안다고 했잖아요? 죽일 놈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고. 밖에 나쁜 놈들 많거든요. 그러니 할머니는 살려 주면 안 될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힐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치란 말이야?”

아드리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건 대부분 안 좋은 신호라 살짝 움츠러들었지만, 그래도 시스템이 야단법석 피워 가며 글씨를 띄우지 않아 한 번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때 클로드는 너무 작아서 살 없는 치킨, 토핑 없는 피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어, 이번 할머니는 조금 다른 의미로 먹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신앙심이 너무 깊어서, 신의 계시도 받은 것 같던데 그런 사람을 죽였다가 혹시 체하시진 않을지 걱정도 되고…….”

“진짜 이유를 말해 봐, 힐다. 너를 어렸을 적부터 키워 준 사람이라서 그래?”

“알고 계셨어요?”

눈을 내리깐 채 주절대다가 살짝 놀라 그를 보았다. 아드리안은 다소 태연한 낯이었다.

“응, 닥터가 알려 줬어. 하지만 네 양육비를 빼앗고 아무리 만나고 싶어 해도 만나 주지 않았다던데. 그런 인간을 용서하고 살려 달라고 하는 거야? 너 왜 이렇게 착하고 물러 터졌어?”

“……그야 사람이니까요.”

“사람이라서?”

“이건 착하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녜요, 도련님. 귀찮아질 거 아는데, 도와줄 이유가 없는데, 이렇게 호소하다가 손해만 볼 거 뻔한데 차마 외면 못 하는 거. 사람이니까 그 ‘차마’를 어찌할 수 없이 갖게 된다고요. 사람이니까.”

죽어 가는 사람의 요청을 못 본 척할 수 있을 만큼 비정했다면, 악마가 산 제물을 갖다 바치라고 할 때 제일 유인하기 쉬운 호감 대상부터 갖다 바쳤겠지, 뭐 하러 목숨 걸고 악마를 협박했겠어.

조앤이 과거에 지은 죄가 있다 쳐도, 신전 입장에서는 이미 생의 마지막에 내쫓음으로써 단죄를 끝낸 거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그녀의 죄는 내가 반드시 도와줘야 할 이유가 아니듯, 마냥 외면할 이유도 되지 않았다.

“……흐음, 그래. 여전히 이해 안 되지만, 힐다 네가 그렇다면.”

“그럼…… 살려 주시는 거예요?”

악마가 진짜 내 말을 들어주는 건가? 가느다란 희망을 품고 똘망똘망 바라보자 아드리안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힐다, 내 처지에서 생각해 봐. 나는 인간을 죽여야 살 수 있는 몸이야. 앞날이 밝은 젊은 사람보단 살 만큼 산, 죽음을 앞둔 노인의 목숨을 거두는 게 오히려 인도적인 방향 아니겠어?”

“그건, 그건…… 미처 생각지 못했네요. 하지만 저를 키워 준 사람이니 조금 더 자비롭게 보내 줄 수는…….”

“죽을 게 분명한 사람을 죽이는 게 뭐가 문제야?”

그 짧은 물음이 우리 사이 거리를 확 벌려 놓았다. 바닥에 보이지 않는 선이 생겨 우르르 무너지며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사람이니까, 사람이라서 노인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며 시각적인 죄책감과 동정심을 느끼지만, 악마인 아드리안은 그저 산술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다. 결과적으로 죽는 건 같으니까. 사람에겐 당연한 감정을 악마에게 완벽히 설명하는 건 무리였다.

어떻게 이해시켜, 이 어마어마한 차이를…….

“알겠어요. 도련님으로선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네요. 의료원으로 바로 가실 거죠?”

“……응, 그래.”

아드리안은 시선을 피한 나를 잠깐 살피는 듯하더니 곧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에게 잠깐이라도 가졌던 희망까지 꺼지자 의료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사람 죽이러 가는 건데 꼭 같이 가야 하나. 휴버트가 훌륭한 살인 조력자 역할을 해 줄 것 같던데, 배 아프다고 드러누워서 가지 말까. 하지만 명색이 전속 하인인데 벌건 대낮에 내뺄 순 없겠지? 악마 하수인으로 산다는 건 이다지도 고달프다.

휴버트가 개방해 준 덕에 나도 아드리안과 함께 의료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마을에서 골목으로 들어갔을 때와 같이,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 맵 이동을 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의료원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서늘하고 어두웠다.

뚜벅뚜벅. 생명의 온기라곤 하나 없이 오직 아드리안과 내 발소리만이 복도에 울렸다. 감옥 같은 적막. 복도를 걸어 들어갈수록 싸늘한 어둠과 냉기에 소름이 돋았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어둠 너머의 휴버트가 아드리안을 반기며 문을 열어 주었다. 아드리안은 병실로 한 걸음 내디디려다 멈추고 날 돌아봤다. 살인을 앞둔 이의 눈동자는 뼛속까지 에일 정도로 차가워 보였다.

“힐다, 같이 들어가겠어?”

“아뇨! 전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물론 허락해 주신다면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얼른 대답하고 혹시 무례할까 싶어 뒤에 단서를 붙였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는 의도를 나름대로 강하게 표출한 건데 제대로 전달이 안 된 건지 악마가 잠깐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나는 눈치 없는 악마를 향해 힘차게 고개를 젓는 것으로 병실 문 앞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데 얼마나 걸릴까?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지만, 지금만큼은 그 시간이 최대한 짧기를 바랐다. 휴버트는 의사니까 약물을 주입해서 기절시켜 놨겠지? 그런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아드리안이 어떻게 죽여도 무의식 속에서 갈 수 있으니까.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눈을 감았다.

나는 할 만큼 다했어. 여기서 내가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기껏 저택에서 나가는 걸 도와준다고 했더니 경전 찾아야 한다고 붙잡혀 버린걸. 내 살길만 생각하자. 조용히 금방 끝날 테니까…….

그때였다. 쥐죽은 듯 조용하던 병실에서 절망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아아악! 아, 아아, 악마! 아아악마! 신이시여! 왜,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어떻게 깨어났는지 조앤이 쉰 목소리로 발악하고 있었다. 용암처럼 들끓는 두려움에 나까지 동화되어 희게 질렸다. 아드리안이 악마인지 어떻게 알았지? 설마 신의 계시라던 꿈에서 아드리안 얼굴까지 봤던 건가?

“신이시여! 가까이 오지 마! 아악! 아…… 악! 케…… 엑. 히, 힐다…….”

아니나 다를까 조앤이 느닷없이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문밖에 내가 있는 걸 아는 건가? 젠장, 의료원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끔찍한 기분이었다. 병실로 향하려는 건지, 의료원 밖으로 도망치려는 건지 움찔거리는 다리를 겨우 바닥에 붙여 놓고 나는 귀를 막았다.

“크…… 으, 켁…… 힐…… 다, 힐다! 힐다야! 살려다오!”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처참한 비명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고막을 찢어 냈다. 손톱으로 정신을 마구 긁어내는 것처럼 괴로웠다.

나는 이가 부서지도록 턱을 악물었다. 금방 끝날 거야, 금방. 날개가 바스러진 새처럼 버둥거리는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 헉!”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적막이 찾아왔다. 보지 않는데도 어째서 그녀가 파르르 떨며 죽어 가는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전을 메웠다.

다…… 끝난 건가? 슬며시 귀에서 손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벌컥 열렸다.

“힐다.”

다소 조급하게 그가 나를 불렀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곧 후회하고 말았다. 뜻하지 않게 조앤과 시선을 마주치고 만 것이다.

주, 죽은 건가?

아직 초점이 사라지지 않은 눈, 온 힘을 다해 일그러진 얼굴은 죽은 순간의 고통을 생생히 전하고 있어 소름이 끼쳤다. 게다가 그녀의 목이 기이한 각도로 틀어져 있었는데, 문밖을 투시한 것처럼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창백한 납빛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날 부르려는 것처럼 열려 있다. 미친, 아무리 공포게임이라도 이건 좀 아니잖아.

“괜찮아?”

정신이 없는 와중에 걱정스레 물어보는 악마 때문에 어이가 없어졌다. 너 같으면 괜찮을 거 같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잡고 일어나라며 내민 손에 눈이 갔다. 번진 것처럼 흐려진 시야 속에서 오로지 그가 끼고 있는 검은 장갑만이 뚜렷이 보였다.

아까보다 더 짙은 악의로 둘러싸인 저 장갑은 내가 훔쳤다 돌려준 물건이다. 저 장갑으로 흔적 없이 사람이 죽어 버렸다. 돌려주지 말걸. 명백한 살인 도구였는데. 잃어버렸다고 안 돌려줬으면 할머니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다시 조앤을 봤다. 목이 졸려 죽은 건지 목둘레가 선명한 악의로 둘러싸여 있었다. 미처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은 눈가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죽은 생선 눈알처럼 흐리멍덩한 눈.

“살려다오, 힐다. 제발 날 좀 살려다오…….”

나는 애써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되찾았다.

괜찮다. 이거 다 게임이잖아. 게임인데 뭐 어때. 저장, 불러오기가 활성화되어 있어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원하는 횟수만큼 살릴 수 있는 NPC잖아.

하지만 아까 전까지 나와 눈 맞추고 얘기하고 있었잖아. 죽는 게 무섭다고, 살려 달라고 빌며 눈물 흘리기까지 했다.

게임인데 뭐 어때. 데이터 쪼가리들인데 목숨이라고 하기에도 웃기지. 모든 유저에게 똑같은 말, 똑같은 행동을 수천, 수만 번하도록 프로그래밍 돼 있는 픽셀인데.

살려 달라고 해서 살려 주려고도 했다. 생의 끝에서 참회하고 용서를 빌며, 악마를 두려워하는 그녀에게 인간적인 동정을 느껴서.

게임인데 뭐 어때.

게임인데.

도저히 게임 같지 않아…….

“힐다.”

“히익!”

어깨를 살며시 붙드는 손길에 나는 기겁하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조심스레 다가왔던 손이 움찔하며 물러났다.

안 돼. 무서워하는 티를 내선 안 된다. 나는 덜덜 떨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보기에 굉장히 괴상망측한 표정이겠지만, 아드리안은 내 얼굴이 아니라 손을 보고 있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은 완전히 제어 밖이었다.

“죄, 죄송해요. 도련님. 아는 분이라 제가 좀 놀라서.”

“……내가 무서워?”

낮은 목소리로 묻는 아드리안은 비 오는 날 버려진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금 사람을 죽였다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표정에 더 질리고 말았다.

그가 내게 정이 들었다곤 하지만, 날 키워 준 사람이라고 했는데도 자비 없이 목 졸라 죽였다. 그럼 나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겠지. 우리 둘 사이에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듯, 정들었다는 의미도 천지 차이일 테니까. 그래, 악마한테 정이 다 뭐냐.

따지고 보면 나는 양식장에서 기르는 물고기 중 썩 마음에 드는 정도일 거다. 무지갯빛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어도, 생긴 게 마음에 들어도 결국 물고기라는 거지. 여차하면 잡아서 구워 먹을 수 있는 대체 식량.

겨우 그런 의미일 뿐인데 악마에게 부탁하면 들어줄지도 모른다니, 무슨 미친 생각을 한 거야?

“아…… 녜요. 그럴 리가요. 방으로 모실까요?”

“내가 무섭구나.”

당연히 무섭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무서웠는데, 살인하는 모습을 본 지금은 배로 무섭다. ‘살인할 수도 있음’에서 ‘살인을 내 앞에서 했음’으로 변한, 딱 그만큼.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턱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으아아, 뭐가 이렇게 실감 나는 건데!

“힐다, 하지만 내가 안 죽였어.”

거짓말.

나는 곧장 속으로 대답했다.

장갑의 악의가 짙어진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조앤의 목에 묻은 악의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산술적인 이유로 노인을 죽이는 게 낫다고 말했잖아. 안 죽일 이유가 없다. 부탁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죽였다가 내가 너무 놀라서 도망칠까 봐, 뒤늦게 걱정돼서 거짓말하는 거 아냐?

“믿어 줘. 내가 안 죽였어. 아니, 못 죽였어.”

“…….”

“안 죽였어. 정말 안 죽였어. 마지막 순간에…….”

세상에 아는 말은 그것뿐이라는 듯 아드리안이 거듭해 말했다.

슬슬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왜 거짓말하는 거지? 내가 뭐라고 거짓말하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거짓말할 이유가 없는데. 아니면 아드리안 말이 진짜인 걸까? 자기도 거의 죽어 가면서 진짜 안 죽였다고? 왜?

“내가 아무리 말해도 넌 믿지 않는구나.”

「아드리안이 섭섭해합니다.」

“넌 언제나 날 무서워했어. 내가 노력해도…….”

「아드리안이 억울해합니다.」

“네가 나를, 무서워하는 걸 보면 난…….”

「아드리안의 지병 ‘두통’이 발동합니다.」

이 두통쟁이, 또 두통 왔다. 주머니에서 두통약을 꺼내서 주고 싶은데 아직 떨림이 가라앉질 않아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 악마가 끊어 말하는 바람에 도통 이해가 안 되는데, 딱 하나 어이없는 게 있었다. 악마 씨, 무섭게 하려고 노력해 온 거 아니었어요? 내가 님 때문에 심장 마비 걸릴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근데 이 정도로 억울하고 섭섭해하는 거면 진짜…… 안 죽인 건가?

아닌데. 조앤이 비명도 질렀고 아드리안 논리대로라면 안 죽일 이유가 없는데.

“왜?”

어딘지 모르게 멍한 아드리안이 허공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데다 대고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거기 보이지 않는 누가 있어요?

“이게 왜 내게 큰 문제로 느껴지는지 모르겠어.”

아드리안이 진지하게 읊조리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와, 저 악마 착한 척하느라 얼굴 잘 안 구기는데. 자기만의 세계에서 무지 기분 나쁜 일이 있나 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봤다가 미간을 모았다가 턱을 쓸었다 이마를 짚기를 반복했다. 이만큼 풍부한 표정은 본 적이 없어서 두려움마저 잠깐 잊고 신기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흩뿌리는 음산한 기운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는 거지만. 님 살벌하거든요. 그만하시죠.

“……그만 가 봐, 힐다.”

드물게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아드리안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간 과정 없이 순식간에 도달한 결론에 나는 황당해지고 말았다. 뭐가 문제인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얘 왜 뜬금없이 삐진 거 같냐.

“저 혼자요? 방으로 모셔다드릴게요.”

“아냐. 오늘은 가서 쉬도록 해.”

“그럼 나중에 식사할 때 다시 올게요.”

“안색이 안 좋아. 오늘은 혼자 알아서 할 테니 숙소에서 쉬도록 해.”

“…….”

“왜 안 가고 있어?”

“……저, 도련님.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질문은 아니지만, 유급 휴가인 거죠?”

나는 조앤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주섬주섬 일어났다.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이왕 휴가받는 거 확실히 해야 했다. 오늘 이 개고생을 했는데 일급도 못 받으면 세상의 공정성을 비판하느라 잠을 못 잘 것 같았다.

돌아보는 아드리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다.

침묵은 긍정.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며 꾸벅 인사한 뒤 의료원을 비척비척 나섰다. 다리가 후들거리긴 했으나 다행히 걸을 만했다.

“레티샤 님이 다쳤다고? 누구랑 다퉜길래?”

모처럼 유급 휴가를 받았으니 경험치나 한바탕 모아 볼까 했는데, 저녁쯤 잠깐 들른 부엌에서 카타리나에게 의외의 소식을 들었다. 레티샤가 누군가와 다투다 다치는 바람에 치료를 받고 있다는 거였다. 치료는 휴버트가 해 주고 있는 거겠지? 조앤의 시신은 눈에 안 띄는 곳에 잘 숨겨 뒀을까.

“휴, 누구겠어. 제드지. 어휴, 이름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말하기도 싫어.”

카타리나가 질색이라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에 내 눈이 커졌다.

“제드라면 그 마구간지기……?”

“그 개자식이 아델을 건드리려 했지 뭐야. 이번만큼은 레티샤 님도 단단히 화가 나셔서 저택에서 즉시 나가라고 요구했는데 못 나간다고 드러누웠나 봐. 레티샤 님이 사람들을 시켜 끌어내라고 하니, 흥분한 제드가 삽을 휘둘렀어. 거기에 맞아 버리신 거지.”

“세상에, 많이 다치신 거 아냐? 아델이라면 열여섯 살이잖아? 그 어린애를 건드렸다고?”

내가 경악하며 묻자 카타리나가 이를 갈며 장식장을 주먹으로 쾅쾅 쳤다. 안에 있는 접시와 컵이 깨질 것처럼 흔들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거 다 비싼 건데.

“그러니까 개자식이란 거지! 레티샤 님은 삽을 살짝 빗맞아서 왼쪽 눈 옆이 찢어지는 거로 끝났어. 머리를 정통으로 맞았으면 위험했을 수준이지. 만약 그랬다면 내가 가만 안 둬.”

“제드는? 저택을 나갔겠지?”

따지고 보면 조앤보다 제드가 아드리안의 제물로 더 적합하지 않나? ‘악’ 성향의 강간범인 걸 보면 죽일 작정으로 달려들었나 본데. 죽여도 싼 새끼를 죽이는 건 큰 잘못이라고 할 수 없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난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엄연한 법치국가의 국민으로서 범죄자를 두고 직접 죽일 생각부터 하는 건 말도 안 된다. 경찰에 신고해서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게 정상이지. 근데 여기도 그런 법이 있나?

“……아니, 사흘간 정리할 여유를 주기로 했다더라. 알다시피 그 인간이 유일하게 백작님 말을 돌볼 수 있어서 꽤 총애받고 있잖니. 다음 거처를 구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백작님이 특별히 지시하신 모양이야. 그래도 레티샤 님이 당하셨으니 내보내는 거지, 다른 하인이었으면 이번에도 그냥 넘겼을걸. 경사들한테 말해 봐야 시큰둥했으니 여자애들 몇 명이 더 죽어 나갔을지 몰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래도 그런 법은 없나 보다. 내가 입술을 말며 생각에 잠긴 동안 카타리나가 복잡한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아마 레티샤가 치료받고 있을 의료원을 건너다보는 듯했다. 하긴 어머니가 크게 다쳤으니 걱정이 클 만하지. 나야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 밑에서 커서 기억이 희미하다만.

“그런데도 레티샤 님은 오늘 후작가에 가서 딸기잼을 받아 오기로 했는데 어쩌냐, 백작님께서 매일 아침에 드시는 건데 늦으면 안 된다고 걱정만 하고!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 내가 지금 다친 어머니 두고 심부름 가게 생겼냐고!”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카타리나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테이블에 내팽개쳤다. 얼마나 분하고 화가 나는지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작은 쪽지를 집어 들었다. 레티샤가 심부름시키며 건넨 쪽지겠지. 다쳤으면서도 저택 일을 우선시하는 게, 일과 중엔 어머니로 부르지 못하게 할 정도로 직업의식이 투철한 레티샤다웠다.

“저, 언니. 괜찮으면 내가 대신 다녀올까?”

“뭐? 정말?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젖은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가 다쳤다는데 대신 심부름 한번 못 다녀올 정도로 각박한 사람 아니다, 나. 레티샤에게 여러모로 고마운 게 많기도 했지만, 사실 이 저택을 잠시나마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저택 안에선 잠을 자도 꿈에 조앤이 나올 것 같고 정원을 거닐어도 의료원에 눈이 가서 우울해질 것 같으니까. 모처럼 바깥바람도 쐬고 잘됐지.

“물론이지. 그냥 딸기잼만 받아 오면 되는 거야?”

“고마워, 힐다. 정말 고마워! 응, 응! 마차는 준비시켜 놓을게!”

「맵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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