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쥐는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지 못하고 도망친다.
아드리안 짓이 아닐까?
봄볕이 따스한 오후, 아드리안의 방에서 연필을 깎다 말고 악마를 바라봤다. 그는 이따금 바람이 들어와 커튼이 흩날리는 창가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단정한 눈매와 고운 턱선, 창백한 건지 하얀 건지 분간이 안 가는 맑은 얼굴이 귀족적으로 아름답고 우아했다.
평소라면 악마의 정체성을 애써 잊고 감상하려 했겠지만, 의혹이 풀리지 않은 지금은 아니었다. 내 야심만만한 검은돈 사업에 큰 차질이 생겨 버렸으니까!
케이든이 건네주는 검은돈이 없는 지금, 나는 몇 끼를 건너뛴 것처럼 무척 허했다. 생각지 못할 때 들어오는 용돈, 악행이라고도 할 수 없을 귀여운 장난질로 가득했던 부탁 목록이 얼마나 아름다웠는데!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 의해 모조리 사라지고 해맑은 에밀리만 남았다니, 이 건전하고 척박한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괴한은 대체 누구였을까? 뒷골목 양아치? 아니면 진짜 아드리안?
어제 아드리안이 꽤 어색하게 혼자 나가긴 했지. 하필이면 케이든과 그로버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이기도 하고. 듣는 동안 꽤 탐탁잖게 여겼던 걸 생각하면…….
에이, 아니겠지. 그럴 이유가 없잖아. 고작 하인 나부랭이 때문에 저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 마을까지 행차하셨다고? 너무 갔다, 너무 갔어. 이 정도면 자의식 과잉이지. 근데 왜 이렇게 찝찝하담?
“저, 도련님. 어제 마을에 누구 만나러 가신 거예요?”
“응, 정육점에 잠깐.”
알았다. 저 얼굴 때문이었다. 어제 이후로 묘하게 상쾌하고 속 시원해 보이는 저 얼굴……. 순수하게 정육점만 다녀온 사람이 지을 수 없는 표정이다. 분명 뭐가 있는데.
“정육점에 왜요?”
“네가 고기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사러 갔지.”
머리도 좋으면서 왜 이렇게 성의 없는 거짓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말한 건, 님이 마을에 가겠다고 한 이후거든요! 내가 케이든과 그로버의 상태를 원격으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아무렇게나 지어내나 본데. 이렇게 거짓말하니 의심은 더욱더 깊어져 갔다.
“그…… 렇군요. 그래서 굳이 거기까지.”
“항상 네게 선물 받으니까 나도 보답으로 하나 사 본 거야.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아침에 아드리안에게서 받은 ‘선물’을 봤다. 투명한 비닐에 담긴 선물을 받았을 때, 이 정체 모를 것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한참 고민하고 서 있었다. 아드리안이 워낙 대답을 기대하는 눈치라 무척 기쁘다고, 맛있겠다고 호들갑을 떨어 주긴 했는데, 이게 뭔지 알아야 말이지.
나중에 테이블에 놓고 한참 들여다본 다음에야 선물의 정체가 뭔지 알 수 있었다. 반투명한 액체 안에 둥둥 떠 있는 덩어리…… 바로 설탕에 절인 고기였다. 내가 고기와 달달한 음식을 좋아한다고 말해서 직접 사 왔다는데, ‘설마 이거 고기예요?’라고 소리치지 않기 위해 무척 애를 써야 했다.
고기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하얀 설탕 가루가 범벅되어 반짝거리는 덩어리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아드리안 나름대로 ‘좋아하는 것+좋아하는 것=더 좋아하는 것’이라는 논리적 흐름에 따른 것 같기는 한데, 남이 해 주는 것만 먹어서 그런지 아무것도 모르는 거 같다. 설탕에 절인 고기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조합인지.
마음에 들고 말고 저거 먹을 수나 있는 거냐? 악마이자 상사만 아니었어도 고기에 뭐 하는 짓이냐고 쥐어팼다, 진짜. 나한테 호감도가 있었다면 1000은 족히 내려가서 적대 대상에 추가됐을 정도라고.
설탕에 절인 최고급 고기라니. 저걸 어디 갖다 버려야 남들 눈에 띄지 않을까. 그 와중에 육질이 좋은 게 눈에 보여서 마음이 더 아팠다.
“그, 그럼요. 도련님께서 주신 건데 안 좋을 리가요…….”
“다행이야. 정육점에서 단 고기 같은 건 없다고 해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거든.”
협박해서 억지로 받아 냈다는 말을 돌려 하고 있었다. 정육점 아저씨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앞으론 그런 일로 마을에 나가시진 마세요, 도련님. 먹을 건 제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요.”
“알았어. 힐다. 직접 마을에 나가지 않으면 되는 거지?”
“뭐, 네. 그런 셈이죠.”
“그거라면 쉽지.”
초점이 다소 어긋난 것 같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미소가 더욱 화사해졌다. 불길하다. 저런 미소를 본 다음에 좋은 일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더 캐묻기도 뭐 하고 마을에 안 간다니 별문제가 있을까 싶어 나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연필 깎기에 다시 집중했다.
지금 깎고 있는 건 내가 아침에 아드리안에게 준 연필 중 하나였는데, 나머지는 다 깎아 놔서 이것만 마저 마무리하면 지긋지긋한 연필 깎기는 끝이었다. 오늘 고급 연필 다섯 자루를 마저 줘서 호감도가 lv.1 (384/400)까지 오르는 효과를 보였지만, 앞으로는 연필 말고 다른 아이템을 골라 볼 생각이다.
이번에는 꼭 후가공이 필요 없는 물건으로 골라야지. 이 이상의 노동은 사양이다, 사양.
“도련님! 연필 다 깎았는데 어디 둘까요? 지난번에 깎아 둔 다섯 자루랑 같이 두는 게 낫겠죠?”
“응, 힐다. 그중 한 자루만 건네주겠어?”
“네. 여기요.”
책에 필기할 거라도 있나? 깎아 놓은 고급 연필 열 자루를 들고 가서 아무거나 하나 내밀었더니 아드리안이 받아 들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다 똑같이 생겼는데. 어리둥절한 나와 달리 아드리안은 차분히 나머지 아홉 자루를 뒤적거리며 연필심을 유심히 살폈다. 마음에 드는 걸 찾아내고서야 하나 뽑아내고, 처음에 주었던 연필을 반납했다. 연필심을 살피는 눈이 얼마나 살기등등한지 회칼 고르는 조폭인 줄 알았다.
나는 두 연필을 번갈아 흘끔거렸다. 두 개가 뭐가 다른 거지? 아드리안이 고른 연필이 유난히 날카롭게 깎이긴 한 것 같은데, 막상 필기할 때는 큰 차이 없을 텐데?
“저, 그 연필 갖고 다니실 거예요?”
연필을 호주머니에 챙겨 넣는 걸 보고 내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맨 처음에 줬던 일반 연필도 저렇게 주머니에 넣어서 다녔었지. 그 연필은 어디에다 두고 새 연필을 넣는 거지?
“응, 지난번에 받은 연필은 어제 망가져 버렸거든.”
어제…….
“약한 나무로 만들어졌는지 충격을 받고 심이 못 쓰게 되고 말았어, 아깝게도. 이번 연필은 그보다는 튼튼해 보여서 다행이야. 한 번에 망가지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지.”
충격을 받고 망가져…….
“그, 그러시구나. 연필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응, 아주 마음에 들어. 남은 연필 아홉 자루는 하인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도록 해. 반드시 한 명당 한 자루씩. 힐다, 알겠지?”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던 아드리안이 알 수 없는 지시를 내리고 입을 다물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나른하고 몽롱하며 흡족하기도 한 미소. 사냥을 마친 뒤 먹잇감을 발밑에 깔고 앉은 포식자의 만족감이 뚜렷하게 보였다.
나는 태연하게 연필을 챙기는 척, 조금 전 아드리안의 말을 되짚어 보았다. 보통 연필을 두고 저렇게 말하나? 연필심이 진하다든지 필기감이 좋거나 나쁜 정도의 평가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지만, 충격을 받아 쉽게 부서진다거나 이번 건 튼튼해서 잘 부서지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은 처음 들어 봤다.
마침 아드리안을 의심하고 있어선지 어제 부탁 목록에서 봤던 문구도 연이어 떠올랐다. 케이든의 목이 관통당했다고 했지. 뭐로 관통당한 걸까? 설마 아드리안이 가지고 다니던 연필? 으으,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니 뭘 보든 자꾸 그쪽으로 빠지잖아.
여전히 억측이라고 생각했지만, 찜찜함은 가시지 않았다. 증거가 뭐라도 남아 있을 텐데. 어제 입고 나갔던 옷을 뒤져 보면 피 묻은 연필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내가 의심하고 있는 걸 아드리안은 모르고 있으니 증거 관리가 허술할 수 있다.
아드리안이 잠깐 잠들기라도 하면 뒤져 볼 수 있을 텐데.
“……!”
그때 내 머릿속에 좋은 아이디어가 반짝 떠올랐다. 그렇지, 나 아드리안 재울 수 있는 스킬 가지고 있잖아!
나는 아드리안이 책에 집중한 틈을 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팔이 몸에 가려 보이지 않도록 최소한으로 움직여 스킬창을 눌렀다. ‘숙면’과 ‘사용’ 버튼이 어서 써 달라는 듯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숙면’은 전투 상태가 아닌 상대에게 쓰면 하루에 한 번 재울 수 있는 스킬이다. 공략 난도가 낮을수록 길게 재울 수 있다는 게 특징인데, 몇 시간 동안 잔다는 건지 도무지 감이 와야 말이지. 그래서 나는 한동안 하인들을 대상으로 숙면 스킬을 실험했고 그들 대부분이 두세 시간 사이에서 잠들었다 깨어나는 걸 알아냈다. 수면 시간이 가장 짧았던 사람은 레티샤로 한 시간이었고 긴 사람은 에밀리, 3시간 10분이었다.
대부분 한 시간 이상 잠들긴 하니까 아드리안이 아무리 어려운 캐릭터라도 5분, 아니, 3분 정도는 자겠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3분으로 두고 움직이자. 아드리안이 잠들면 ‘투시자의 눈’을 써서 방 안을 확인하고 클로짓으로 가서 어제 입은 옷을 확인해 보는 거야.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다른 단서라도 찾아보자.
그렇게 간략하고 깔끔한 전략을 세운 뒤 빠르게 목표물을 돌아보았다. 목표물은 책에만 몰두한 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지금이 완벽한 기회다! 나는 조심스럽게 ‘숙면’ 스킬을 사용하고 아드리안을 돌아봤다.
악마한테 스킬이 먹힐까. 악마라서 안 먹히는 거 아냐? 사용 버튼을 누르고 스킬이 발동하는 그 짧은 시간, 불안하고 초조한 나머지 발까지 동동 구르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아드리안의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가 감겼다.
책을 든 손도 힘없이 내려가는 걸 보고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뭐야, 뭐야! 악마한테도 먹히네? 처음에 완전 쓸모없다고 욕했는데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악마에게 먹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쓸걸!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뒤져 봐야지.”
설렌 나머지 무릎을 탁탁 치고 있던 손을 멈추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아드리안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걸 뒤져 봐야 한다. 운이 좋으면 휴버트에 관한 단서를 찾을 수도 있고.
나는 클로짓으로 걸어가면서 아드리안 이름 옆에 붙은 스킬 지속 시간을 확인했다. ‘숙면’ 스킬을 쓰면 대상자 이름과 함께 수면 지속 시간이 뜨는데, 이제까지 조사한 수면 시간은 전부 이걸 보고 파악할 수 있었다. 아드리안의 지속 시간에는 ‘계산 중’이라고 뜨는 걸 보아 버퍼링이 걸린 모양이다. 혹시 모르니 먼저 시간 재고 있어야지.
1초…….
“힐다, 거기서 뭐 해?”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가 뒤통수를 후려쳤다. 설레는 심장박동으로 요동치던 몸이 차갑게 식었다. 클로짓으로 향하던 힘찬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방금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다정한 목소리엔 웃음기 하나 없었다. 바로 조금 전에 스킬 썼는데 쟤 벌써 깨어난 거야? 스킬 쓰고 얼마나 지난 거지? 성공했다고 오두방정 떨던 게 길어야 5초 정도? 거기에 1초를 셌으니 총 6초.
맙소사, 6초라니. 최대한 짧게 잡아서 3분 정도로 생각했는데 설마 초 단위였을 줄이야. 저 악마 새끼 공략 난도가 대체 어떻게 돼 먹은 거냐.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몸을 돌렸다. 서늘하게 반짝이는 눈이 나를 진득하게 훑고 있었다. 단지 시선을 마주하는 것뿐인데도 목덜미에 칼날이 드리워진 듯한 섬뜩함. 오랜만에 느껴 보는 공포였다.
“이런 것도 할 수 있을 줄 몰랐어, 힐다.”
반쯤 신기하게 여기는 눈빛이었다. 낮에 잠깐 잠들 수도 있는 건데 왜 그걸 내가 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사실은 맞지만, 어떻게 알아낸 건지 도통 모르겠다. 거의 서른 명을 대상으로 ‘숙면’을 사용해 봤는데 아무도 모르던데. 다들 그냥 깜박 잠들었다가 피곤해서 길게 잔 정도로만 생각하던데.
“무슨 말씀이세요? 하다뇨.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도, 도련님께서 갑자기 주무시던데.”
“아니잖아.”
무표정한 얼굴이 무섭다. 그저 무섭다. 입술이 저절로 벌벌 떨렸다.
“도련님께서 갑자기 눈 감으며 책 떨어뜨리고 주무시던걸요? 저는 그냥 햇볕이 따뜻해서 낮잠 주무시나 보다,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깨울 순 없으니까 자리라도 피해 드리려고 했죠. 피곤하시면 누워서 주무시지…….”
“그거 낮잠 아니었잖아.”
“낮잠인데, 분명 낮잠인데. 낮잠 못 자는 사람도 있나요?”
“감추지 말고 말해. 내 말이 맞지? 힐다. 분명 네가 뭔갈 했어.”
“…….”
“그건, 낮잠이 아니었거든.”
습한 시선으로 꼼짝달싹 못 하게 날 옭아매고는, 그가 몸을 일으켜서 천천히 다가왔다. 악마와 가까워질수록 내 심장은 갈비뼈를 부술 듯이 힘차게 박동했다. 와, 진짜 뭐야. 어떻게 안 건데. 게임 시스템에 대해 알 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른 거냐고.
“힐다, 네가 갑자기 허공을 가리킬 때면 항상 무슨 일이 생기곤 했어. 방금도 그래. 갑자기 허공 어딘가를 가리키자 내가 스르르 잠들었지.”
“그, 그럴 리가요.”
“여기에 뭐가 있는데?”
부드러운 물음과 함께 그가 한 손을 들었다. 벽을 짚어 가는 것처럼 허공을 더듬다 멈춘 손끝에는 정확히 숙면 ‘사용’ 버튼이 있었다.
히에엑…….
스킬을 쓴 후에 창을 닫아 놓지 않은 탓에 아드리안의 검지는 ‘사용’ 버튼을 누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실제로 그에게 스킬을 쓸 때 ‘사용’ 외에도 다양한 버튼을 눌렀는데, 자신에게 유효한 효과를 낸 지점을 정확히 짚어 낸 거다. 심지어 내 눈을 중심으로 거리와 각도까지 계산해서.
분명히 내 쪽을 보지 않고 있었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숨넘어가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갔다. 내가 하얗게 질린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아드리안의 검지는 마침내 ‘사용’ 버튼을 누르기까지 했다!
뭐야, 이거 진짜 작동하는 건 아니겠지? 스킬 사용되는 건 아니지?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진 채 지켜보았으나 다행히 시스템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잔뜩 움츠러들었던 어깨에서 느릿하게 힘이 빠져나갔다.
그, 그래. 아드리안이 유저도 아닌데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을 리 없지. 그래도 그렇지, 와, 진짜 공포다.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저 악마 새끼, 시스템 생긴 거 유추해서 나중엔 진짜 누를 수 있게 되는 거 아냐?
“내가 건드려서는 소용이 없나 보네.”
그는 가볍게 말하며 손을 거두었다. 오해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도 내가 조작해야만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걸 보면 그 존재를 들켰다고 봐야 했다.
나는 오랜만에 비굴해져서 떨리는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손 자를까요? 허공에 손가락질한 손가락을 자를까요? 그럼 용서해 줄래요?
“너무 놀라지 마. 옛날 악령들이 치던 장난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뿐이니까.”
“악…… 령이요.”
“하지만 힐다, 난 그런 장난질은 좋아하지 않으니 적당히 쓰기야?”
“네, 네. 그럼요.”
기세에 짓눌린 나머지 고개가 절로 끄덕거렸다. 얼결에 인정해 버린 꼴이 됐지만, 이제 와 거짓말로 꾸며 봐야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더 내빼지 않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드리안의 눈빛이 진득해졌다.
남발하지만 않으면 기꺼이 속아 넘어가 줄게. 작은 속삭임이 귓가에 훅 불어넣어졌다. 그야말로 악마의 유혹이었다.
당분간 찌그러져서 살자.
저택에서 나오면서 생각했다. 남들은 죄다 두세 시간씩 자는 거, 역대급 망겜 밸런스를 생각해서 3분 정도로 줄인 건데 겨우 6초라니.
게임 밸런스를 지나치게 올려쳤다. 공포게임 최종 보스한테 스킬을 못 쓰면 무슨 소용이냐고, 개발자 개새끼야! 뭐 이딴 스킬을 만드냐고! 울분에 찬 나머지 인적 드문 정원 한편에 숨어서 나무를 마구 걷어찼다.
아무리 그래도 시스템의 존재까지 알아차릴 줄이야. 어차피 스킬 쿨타임 중이라 눌러도 동작 안 했을 테지만, 아드리안이 내 시스템 존재를 알아차린 낌새를 보인 것만으로 충격적이었다. 이러다 언젠간 시스템을 자유자재로 조작하는 거 아니냐고.
아드리안의 무표정한 얼굴이 다시금 떠오르자 어깨가 절로 떨렸다. 낮잠이 아닌 걸 안다고, 이런 것도 쓸 줄 아냐며 느릿하게 다가오던 그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공포였다.
“그렇게 무섭게 굴면서 선물 같은 건 왜 사다 주는 거냐고.”
정체불명의 고기는 여전히 처치 불가능한 상태로 비닐에 담겨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단순히 내가 좋아해서 사 온 거라기엔 켕기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근과 채찍 작전인가? 아니면 경고? 너도 언젠간 이런 생고기 꼴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거지. 흠, 가능성 있는데. 나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고기를 햇빛에 비춰 보았다.
“정들었다는 거 진짠가…….”
나도 미운 정인지 뭔지 모를 것이 들긴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드리안이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직 그를 보면 반사적으로 손발이 떨리고 칼에 찔린 것처럼 움찔하니까. 그런 그가 일부러 선물까지 사다 주자 마음이 무척 이상했다.
나야 호감 작업이라는 신성하고 속물적인 목적이 있었지만, 악마는 아니니까. 일개 하인에게 얻어 낼 수 있는 건 이미 다 가지고 있는 만큼, 다른 의도가 있을 리 없었다.
……아마 그렇겠지? 나는 스스로 생각해 놓고도 자신이 없어져 되물었다. 어느 쪽이든 속내를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연필 나눠 주라는 건 또 어떻고.”
기껏 깎아서 바쳤더니 하인들에게 나눠 주라니. 그것도 한 명당 꼭 하나씩. 설마 이 연필이 보너스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지체 높은 귀족이자 부자인 도련님이 주는 보너스가 고작 5골드짜리 고급 연필이라니, 체면이 안 서잖아. 현실에 대입해 보면 사장이 보너스라고 연필 한 자루 쥐여 주는 건데. 까딱하면 회사 익명게시판 난리 나는 일이라고, 이거.
“힐다! 거기 힐다니!”
이걸 다 누굴 준담. 그렇게 생각하며 손안에서 연필을 굴리고 있는데 누군가 멀리서 날 불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정원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둘 다 본 적 있는 얼굴이라 입이 떡 벌어졌다. 저 사람들이 왜 여기에?
“하, 할머니?”
“힐다! 힐다 맞구나!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어. 그새 며칠이나 지났다고 눈이 침침해져서는, 어이쿠, 얼굴이 보이지도 않아.”
“할머니! 여기 왜 오셨어요!”
정원길을 따라 부축받으며 걸어오는 이는 분명 조앤이었다. 신전에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새 폭삭 늙은 얼굴이었다. 큰 병을 앓고 있다더니, 얼굴이 형편없게 변해 있었다. 얼굴 주름이 깊어도 건강해 보이게 해 주었던 기세는 한풀 꺾여 있었고 낯빛은 타다 말고 남은 잿더미 같았다. 누가 봐도 병환이 위중한 상태였다.
“안녕하세요, 신자님. 우리 구면이죠?”
내가 급하게 뛰어가자 조앤을 부축해 온 사람이 알은체를 해 왔다. 살짝 헐떡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다시 보니 신전에 갔을 때 조앤의 횡령에 관해 이야기해 준 사제였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는데 아마 내 악명 때문인 것 같았다. 이제 저런 눈빛에도 상처받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할머니를 여기까지 모셔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할머니, 여기 왜 오셨어요? 어제 편지 못 받으셨어요? 어제 분명 바로 전달될 거라고 했는데!”
“응? 뭐어? 뭐라고? 더 크게 말해 보렴.”
넘어질 것처럼 조앤의 상체가 내 쪽으로 쏠렸다. 귀를 가져온다는 게 몸이 함께 기울어진 듯했다.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편지요, 편지! 제가 보낸 편지!”
“아아, 편지. 그거라면 어제 받았지, 받았어.”
“읽어 보셨어요? 읽으신 거 맞아요? 그런데 왜 오셨어요? 제가 분명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힐다, 저기 좀 보렴. 모란이 얼마나 예쁜지. 오는 내내 말할 수 없이 아름답더구나. 흰 목련은 또 어떻고? 꽃잎이 마치 천사의 날개 같지 않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신자님.”
조앤이 내 말을 듣지 않고 혼잣말만 하는 가운데 사제가 정중히 인사하며 손을 뗐다. 지지대를 잃어버린 조앤은 내가 부축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할 사람이 생기자마자 내팽개치는 걸 보면 사제도 억지로 왔나 보다.
“조셉!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맙네, 고마워.”
“…….”
조셉이라 불린 사제가 간단히 묵례를 해 보이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니, 그렇게 가 버리면 안 되는데! 조앤이 여기 있으면 안 된단 말이야. 아직 증거 하나 없이 심증뿐이긴 하지만, 난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조앤의 손을 끌고 사제가 걸어간 쪽을 가리켰다.
“저기요, 잠깐만요! 조셉 님! 잠깐 기다려 주세요! 할머니 도로 모시고 가셔야 해요! 할머니, 빨리 저분 따라가세요. 편지에 다 얘기했잖아요.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어머나, 자목련도 있구나. 꽃잎 색이 곱기도 하지. 팔츠그라프 가문 정원이 그리도 유명하다더니 다 이유가 있구나.”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지 조앤은 악착같은 힘으로 저택 안쪽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부축받지 않으면 혼자 걷지도 못하면서 이런 힘을 낼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힘으로 제압해 끌고 갈 수 있겠지만, 아픈 노인을 강제할 순 없었다. 따라가면서 차분히 설득하는 방법뿐.
“할머니, 제발 제 말 들으세요. 조셉 님 따라서 신전에 다시 가셔야 해요. 저렇게 그냥 보내면 안 된다니까요? 이 저택에 들어오시면 안 돼요. 지금은 설명할 수 없지만…….”
“예쁘다, 예뻐. 평생 보지 못한 꽃을 이곳에서 다 구경해 보는구나. 정원이 아주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꾸며졌어. 분명 백작님의 취미겠지?”
“우선 사제님과 함께 신전에 돌아가 계세요. 지금이라도 쫓아가면 사제님을 잡을 수 있을 거예요. 일단 신전에 가서 지내고 계시면 분명 여기보다는 나을 테니까…….”
“이 아름다운 곳에서 눈을 감을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소원이 없겠어. 아이구, 아이구. 다리가 아프구나, 힐다. 잠깐 저기 앉았다가 갈 수 있겠니?”
가면 안 되는데, 조셉을 붙잡아야 하는데. 나는 초조하게 조셉이 돌아간 길을 돌아보면서 조앤이 이끄는 대로 벤치에 앉았다. 때마침 불어온 향기로운 봄바람을 음미하는 것처럼 조앤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이러다 아드리안이나 휴버트 눈에 띄면 어쩌려고!
“힐다, 너는 어렸을 적부터 유난히 나를 많이 따랐지. 어린데도 손이 야무져서 또래들보다 일급을 많이 따 왔어. 가끔 상으로 먹을 거라도 받은 날에는 꼭 쪼르르 쫓아와 반을 나눠 주곤 했지. 어린애들은 늘 거치적거리고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해 왔는데 널 보고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깨달았어.”
“할머니, 이런 얘기는 나중에 하시고 우선 일어나세요. 여기 계시면 안 된다니까요.”
“날 너무 따라서일까. 신전을 떠날 때 즈음 네 양육비와 일급을 떼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른 아이들보다 배로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지. 그래서냐? 이 저택에서 내쫓으려는 게 그때 받은 상처를 앙갚음하려는 거냐 이 말이야.”
아까보다 더 강경하게 조앤을 말리려다가 입이 강제로 다물렸다. 방금 뭐라고? 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조앤을 바라보았다. 그린 듯이 인자하던 미소는 씻긴 듯 사라지고, 거무죽죽한 얼굴 위로 새파란 안광이 번뜩였다.
“왜 모르는 척이냐? 3천 골드를 빼앗긴 데 대해 원한을 갖고 날 편하게 죽지 못하도록 하려는 거 아니냔 말이야! 배은망덕하고 독한 것. 아무리 돈을 뺏겼기로서니, 그래도 키워 준 정이 있는데 죽어 가는 할미를 내쫓을 생각부터 해?”
“잠깐만요. 그런 게 아녜요. 저는 그냥 할머니를 살리려고 한 거라고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래, 설명할 수 없겠지! 할미가 좋은 곳에서 눈을 감지 못하게 하려는 네 고약한 심보 때문이라고 어떻게 말하겠니!”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호통치는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와, 이게 다 무슨 소리냐. 사람이 너무 억울해지면 말도 안 나오는구나.
“네 편지? 그래, 어제 받았다. 받아서 바로 읽어 보았어. 너도 팔츠그라프 가의 은혜를 받아 오랫동안 여기서 지냈으니 나를 환영해 주리라 믿었다. 저택에서 편하게 지내는 걸 도와주겠지, 그래도 저 키워 준 은혜는 알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영 딴판이지 뭐냐. 편지에 쓰인 게 온통 좋은 걸 독차지하려는 심술쟁이의 훼방뿐이었을 줄은! 신전에서 나와 갈 곳 없는 할미를 길에서 굶어 죽게 하려고 작정했을 줄이야.”
“그렇게 작정한 적 없어요. 옛정을 생각해서 할머니를 도우려고 한 적은 있어도, 말씀처럼 굶어 죽게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고요!”
“어디서 큰소리야! 그럼 어디 한번 네가 말해 봐라. 저택에 오지 말라면서 댄 여러 이유가 진실인가 말이야. 여기 어디 경감과 경사가 살벌하게 지키고 있단 말이냐? 편찮아서 앓아누우셨다는 백작 부인은? 다 어디 가고 없는 게야?”
이런.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오로지 조앤을 막기 위해 만들었던 조잡한 거짓말이 지금 나를 곤란하게 하고 있었다.
아니, 그 정도 둘러대면 저택에 안 올 줄 알았지. 최소한 미루기라도 할 줄 알았다. 양육비를 주기적으로 횡령한 죄를 신전이 알고 있는데 경감과 경사가 지키고 있는 곳에 오기 힘든 건 당연하잖아. 그 당연한 상식을 부수고 조앤 할머니가 이렇게 와 있습니다.
“더는 거짓말할 생각 말아라! 저택에 오자마자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니 그런 일은 없다는 대답을 들었으니까! 경감과 경사는 오해가 있어 얼마 전에 잠깐 들른 것뿐이고 백작 부인이 편찮으시긴 하지만 얼마 전에 별장에 내려가셨다고! 저택엔 아무 일 없고 의료원은 오랜만에 새 환자 맞을 준비로 바쁘다고! 어떠냐, 옛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리라 기대했던 영악한 계집이 해 주었던 말과는 완전히 다르지 않니? 응?”
「조앤(선)이 당신에게 불길함을 느낍니다.」
“네게서 돈을 빼돌린 일 때문에 아직도 원망하고 있는 거냐? 그 돈 몇 푼 때문에 할미가 마지막 안식을 얻는 것도 방해해? 정말이지 설마 했는데 힐다, 네가 남을 해칠 마음을 먹을 수 있는 아이인 줄은 몰랐다. 내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독하기도 하지. 천성이 그런 걸 내 어쩌누, 츠츠츠…….”
경멸이 끓어오르는 눈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3천 골드를 빼돌려서 죄책감은 있는 모양인데, 얼마나 제 발 저렸으면 역으로 나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조앤이 사기는 쳤어도 남을 죽일 정도의 악의는 품어 보지 않았는지 선한 캐릭터로 분류됐는데, 내 악명과 충돌이 나서 반발이 더 거센 듯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선 할머니, 전 돈 빼돌리신 거 원망 안 해요. 그래서 신전에서 나올 때 피해 액수도 줄였고요. 저택에 와서도 저는 쭉 할머니가 보고 싶었어요.”
라고 힐다 일기장이 말했습니다.
“뭐? 3천 골드나 뺏겼는데 그게 괜찮다고? 이젠 별 거짓말을 다 하는구나. 할미가 몸이 아프니 정신까지 오락가락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마지막으로 말씀드릴게요. 편안한 안식을 원하신다면 이 저택은 잘못 고르신 거예요. 신전으로 돌아가세요. 정 돈이 없으시면 제가 조금이라도 보탤 테니까요. 힐다…… 아니, 저를 어렸을 때 길러 준 은혜를 보답하는 길이라고 칠게요.”
“바로 그 신전이 날 버렸어! 평생 섬겨 온 신이 날 버렸는데 누가 자비를 베풀어 준단 말이냐! 차디찬 길바닥에서 이, 이이! 배은망덕한 것!”
분을 이기지 못한 조앤이 급기야 내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 봤자 맥없이 허공을 가른 것밖에 되지 않았지만, 벤치에 툭 떨어진 주먹과 용암처럼 부글대는 눈, 씩씩거리며 오르락내리락하는 둥근 어깨를 보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불치병 걸린 건 안 된 일이긴 하지만, 그러게 누가 신전에서 횡령하라고 했나. 오죽했으면 신전도 버렸겠냐고.
3천 골드도 그래, 솔직히 아깝긴 했다. 검은 용돈을 받을 때도 1천 골드를 넘어 본 적이 없는데 3천 골드라니. 전설 베개 세 개 값이 아니냐고 땅을 치기도 했다. 그런 돈을 어렸을 때 뺏겼다니 호구 힐다의 역사가 유구해 황당하기 짝이 없는데, 그래도 힐다를 키워 준 사람이라는 부분에서 어쩔 수 없이 이해했다.
힐다가 유일하게 사랑한 부모 같은 존재인데 10년 치 정도면 몰라도 100일 치 일급이 비싸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거기다 내가 게임에 들어오기 전에 뺏긴 돈이고, 엄연히 선 그으면 힐다의 돈이었으니. 3천 골드가 힐다의 손에 있어 봤자 먼 옛날 일이라 이제까지 남아 있었을지도 불분명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냉정과 평정을 유지하며 힐다의 유일한 양육자에 대한 예의를 지킬 생각이었는데 저렇게 나오면 말이 다르지. 굳이 지옥불로 날아가겠다는 나방을 굳이 계속 말려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도 안 믿고 안 듣는데.
난 놀랍도록 냉정해져서 몸을 일으킨 뒤 조앤을 내려다봤다. 주름진 얼굴이 아직 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씰룩거리고 있었다.
“배은망덕, 배은망덕한…… 쿨럭, 쿨럭!”
그 후로도 두어 번 나를 향해 주먹질한 조앤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피를 토해 냈다. 어, 이번엔 좀 놀라 버렸다. 사방에 왜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많아? 어쩌지? 의사를 불러와야 해, 약을 먼저 줘야 해? 내가 가진 건 아드리안 약이 전부라 무슨 약을 줘야 하는지 모르는데.
“조앤! 조앤 맞습니까?”
그때 휴버트가 어디서 보고 왔는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 아이구. 선생님, 선생님…….”
내게는 지옥문지기로 보이는 휴버트가 조앤에게는 기적의 구원자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녀는 금세 눈썹을 늘어뜨리며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해졌다. 휴버트는 깨끗한 셔츠가 피로 더러워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앤을 부축했다.
“저택에 당도하실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았는데, 모실 준비를 하느라 일찍 나와 본다는 걸 그만 깜박하고 말았습니다. 기특하게도 힐다가 모셔 왔군요.”
휴버트의 호감 가득한 시선이 잠깐 나를 스쳤다. 아이구, 선생님, 아이구, 선생님……. 조앤은 익사하다 구조된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매달리고 있었다. 나를 향해 느끼던 분노와 경멸은 구원자의 등장으로 연기처럼 사라진 후였다.
“힐다, 금방 정리하고 나올 테니 잠깐 여기 있으렴.”
휴버트가 의료원 쪽으로 조앤을 부축해 가다 말고 돌아보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조앤의 뒷모습에서 못내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만하자. 말해 봐야 듣지도 않는데.
씁쓸한 기분에 공연히 정원 흙바닥을 발로 톡톡 차고 있자 오래 지나지 않아 휴버트가 돌아왔다.
“오, 힐다. 정말 기특하구나. 도련님의 손님을 이렇게 직접 모시고 오다니. 사제가 직접 데려다준다기에 중간에 어디론가 빠져나갈까 봐 가슴을 졸이고 있었지 뭐냐. 네가 아는 분이라더니 잘 안심시켜 드린 것 같구나.”
“할머니가 도련님의 손님인가요? 의료원에서 치료받는 거니 선생님의 손님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음, 뭐. 이 저택은 따지고 보면 도련님의 소유가 될 테니 말이다. 저택에 온 모든 사람은 도련님의 손님 아니겠니.”
“그런가요?”
“아무튼 잘했다, 잘했어. 손님을 무사히 안내해 온 건 도련님께 꼭 말씀드리도록 하마. 도련님께서 아마 큰 상을 내리실 거다. 이번만큼 상태가 안 좋으셔서 급하게 사람을 구한 적은 없었으니까. 오는 길에 환자가 내빼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뭐냐, 신전에서 일했다는 말을 듣고 불안했는데. 신앙심이 깊으면 이상한 꿈을 꿨다며 도망치는 것들이 있거든…….”
얼마나 안도한 건지 휴버트는 내 존재도 잊고 혼잣말로 중요한 단서를 흘리고 있었다. 들어도 모를 거로 생각했거나 내가 알아도 상관없거나 둘 중 하나겠지.
“저, 선생님. 이번에도 들키지 않고…… 잘되겠죠?”
두루뭉술하게 슬쩍 던져 봤더니 휴버트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러더니 전에 없이 활짝 웃었다.
“오오, 힐다. 너도 도련님의 특이 체질에 대해 눈치챘구나. 그래, 약을 가져다드리며 매일 뵈니까 당연하겠지. 걱정하지 말렴. 이번에도 조용히 넘어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단다. 아는 분이니만큼 마음이 안 좋을 순 있겠지만, 실질적인 이득을 고려해 보면 그리 큰일도 아니란다. 저분은 이미 죽음이 예정되어 있고……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도련님께서 건강해지시면 너도 좋지 않니.”
“네, 그럼요. 좋죠. 제가 섬기는 건 도련님인걸요.”
“그래, 이 일은 도련님께 낱낱이 보고드릴 테니 포상은 걱정하지 말아라.”
미끼를 잡아 문 물고기가 신나게 퍼덕거렸다. 아무래도 휴버트가 환자를 아드리안에게 제물로 바친다는 짐작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듯하다. 묘한 점은 휴버트가 아드리안을 특이 체질이라고만 여긴다는 거다. 살인해야 건강해지는 체질도 있나? 그걸 특이 체질로 여기는 휴버트가 더 특이했다.
“도련님께서 건강하셔야 이 백작가의 장래도 밝지 않겠니. 너는 이 백작가와 백작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모든 사용인에게 고귀한 헌신을 한 거란다. 갸륵하기도 하지.”
휴버트가 따뜻한 손으로 어깨를 두드리며 조곤조곤 말했다. 인자하게 휘어진 눈에서 광신도적인 집착과 경외가 섬뜩하리만치 강하게 느껴졌다. 크게 흡족해하며 떠난 휴버트의 빈자리엔 기다렸다는 듯 흰 글씨가 떠올랐다.
「선한 캐릭터를 악마의 조력자에게 넘겼습니다! 당신의 악명이 연일 상승 가도를 달리고 있습니다!」
악명 포인트가 착실히 쌓이면서 스킬을 강화할 수 있다며 나불거렸지만, 당연하게도 기분은 좋지 않았다. 혼자 남은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오랫동안 그 자리를 서성였다. 마지막 안식처를 찾아 필사적으로 걸어오던 조앤과 주먹을 휘두르던 조앤이 번갈아 가며 떠올랐다.
불길한 기운에 휩싸인 의료원과 죽은 듯 고요한 저택을 쭉 둘러보고 심호흡을 한 후, 발로 파헤쳐 놓은 흙바닥을 도로 평평하게 만들어 두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떠나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게임인데 뭐 어때!
게임 시스템을 들켰을 때, 내가 얼마나 사색이 됐던지 아드리안에게 특별 휴식 시간을 부여받았다. 저녁 식사 시간까지 쉬고 오라고 했으니 아직 세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세 시간 동안 어떻게 게으르고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나는 팔짱을 끼고 침대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영 까막눈으로 살 순 없어서 에밀리에게 부탁해 받아 놓은 어린이용 글자 공부 책……. 하지만 지금은 공부할 기분이 아니다. 언제 어떻게 해야 공부할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10년 훌쩍 넘게 학생이었는데 게임 안에서도 공부라니 절대 사양하고 싶었다.
레벨업용 잡초 뽑기?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경험치 1씩 먹어서는 세 시간 내내 해 봐야 악마 옆에 붙어 있느니만 못했다. 차라리 도로 아드리안한테 가서 감사와 미안함을 강요하는 게 낫지. 마을에 다녀오기엔 시간이 부족하고…….
“역시 자는 게 최고지.”
몸 쓰는 일을 업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피로를 풀고 몸을 소중히 하는 일만큼 중요한 투자는 없었다. 아드리안에게 충격받고 조앤한테 욕먹은 나에겐 지금 휴식이 절실했다.
좋아.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단이다. 더없이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린 나는 이불을 펼쳤다. 그리고 내구도가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베개를 옮겼다. 대관식에 쓸 왕관을 옮기듯 신성하다.
다른 게임 캐릭터들도 이런 식으로 베개를 대하는 걸까. 아드리안은 좋겠다, 전설 베개가 여섯 개나 돼서. 그런데 왜 베개가 여섯 개나 필요한 거지? 머리, 팔다리 각각, 등에 하나씩 베는 게 아니고서야. 치사한 악마 새끼, 하나만 주지…….
“참, 숙면 써 보려고 했었지.”
아드리안을 생각하다 보니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드리안에게 이미 들켜 버린 거 어쩔 수 없지만, 대체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아직 궁금증이 남아 있었다. 단지 내가 허공을 찌르는 행동만으로 알아차렸다고? 날파리를 잡았을 수도 있는데 억측 아닌가? 차라리 ‘숙면’ 스킬을 써서 드는 잠과 스스로 드는 잠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스킬을 스스로에게 써 보기로 했다!
“게임 내에서 힐다 캐릭터의 공략 난이도가 궁금하기도 하고.”
아직 세 시간 남았으니 충분하겠지. 에밀리가 3시간 10분이었는데 설마 그거보다 길게 자겠어? 끼리끼리 노는 법이니 에밀리보다 짧게 자거나 비슷하겠지. 가볍게 생각을 마치고 침대에 조심조심 경건하게 누웠다. ‘숙면’ 스킬 설명상으로는 침구가 없어도 잠들 수 있다고 했지만, 침대에서 똑바로 자야 어깨 안 결리지. 내 몸은 소중하니까.
왜 이제까지 나 자신한테 쓸 생각은 안 했담? 나는 꿀잠을 잘 생각에 즐거워져서 스킬창을 열었다. ‘숙면’ 옆 ‘사용’ 버튼을 누르자 대상자 리스트에 ‘힐다(나)’와 함께 모래시계 아이콘이 떴다.
몇 시간이 뜨는지 확인한 후에 잠들고 싶었는데 시야가 순식간에 흐려졌다. 모래시계가 숫자로 바뀐 것 같긴 한데 아무리 눈에 힘을 줘도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몰려오는 졸음에 온몸이 무거워졌다. 마취 주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며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까무룩 잠들었다.
망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어두운 창밖을 보고 기겁하고 말았다. 아니, 고작 세 시간 만에 이렇게 어두워진다고? 봄이라서 낮이 긴 편인데? 세상이 날 가지고 놀리는 기분에 시계를 봤다가 그대로 얼어 버리고 말았다.
내가 숙소로 들어와 ‘숙면’ 스킬을 쓴 게 5시 정도였으니 8시 전에 깨어나리라 예상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시침이 8시에 가 있어야 하는데, 분명 그래야 하는데…… 뭣 때문에 12시를 가리키고 있는 거죠?
12 빼기 5는 7. 다시 계산해 보자. 12 빼기 5는 7. 그, 그럴 리가 없어. 12 빼기 5는 7……. 내가 ‘숙면’ 스킬로 일곱 시간을 잤다고?
뭍에 나온 붕어처럼 입이 뻐끔뻐끔 열렸다. 경악한 채 탁자로 달려가 시계를 들여다봤는데 초침은 애석하게도 1초씩 정확히 움직이고 있었다. 시계가 빨리 간 것도 아니라면……. 진짜 일곱 시간 동안 잔 거야?
시계를 도로 탁자에 내려놓고 뒷걸음질 쳐서 침대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저택 인원 명단을 끄집어냈다.
일곱 시간 넘게 잤는데 기억 못 했던 사람이 있진 않았을까. 희망 회로를 마구 불태우며 명단을 들여다봤는데 세 번을 다시 읽어 봐도 내 기억엔 틀림이 없었다. 최소 시간은 아드리안 6초, 최대 시간은 에밀리 3시간 10분이었다. 아드리안이 짧은 시간으로 신기록을 세웠듯 나도 마찬가지였다. 최대 시간의 신기록이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힐다 - 7시간’을 적어 넣었다. 적어 놓고 다시 봐도 비참하고 수치스러웠다. 실험한 하인 중 누구도 네 시간을 넘진 않았는데. 세 시간 넘은 것도 에밀리 하나였는데.
내가 이 저택 최약체였다니…….
얼마나 허탈했는지 내 기억은 처음 게임에 들어왔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악마를 막아 보겠다는 헛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6초 악마 대 7시간 하인……. 공략 난이도로만 보면 이 저택 최강캐와 최약캐의 끝이 뻔한 싸움이었다. 전투 모드 돌입하면 1분은 버틸 수 있었을까?
내가 힐다가 아닌 다른 캐릭터로 게임에 들어왔을 때를 상상해 보았다. 시스템은 같을 테니 호감 대상을 골랐을 테고 숙면으로 난이도를 실험해 보다가 힐다를 부탁 목록에 넣었겠지. 부탁 강도 5가 다 뭐냐. 10으로 골드고 경험치고 다 뽑아 먹다가 호감도 떨어져도 물 한 잔 주면 다시 호감도 올라가서 영원히 뺑뺑이 돌릴 수 있는 수준인데.
힐다 캐릭터가 과거에 얼마나 호구였는지 생각해 보면 공략 난도가 가장 낮은 이유는 알 만했다. 신체 능력치가 좋아 부려 먹기도 좋았을 테고. 시스템이 에밀리를 너무 쉽게 본다며 분노했던 게 새삼 우스워졌다. 누가 누굴 도와줘.
플레이하는 재미보다 자꾸 죽어 버리는 스트레스가 더 커서 절대 안 고를 최약체 캐릭터……. 절망스럽게도 그게 나였다. 악취미가 아닌 한 이런 캐릭터로 플레이하는 유저는 없겠지. 더 어처구니없는 건 어떤 캐릭터로 게임을 할지 선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거다.
짜증 나서 눈물이 다 났다. 이거 뭐, 주인공 버프 같은 건 없는 거야?
그리고 ‘숙면’을 써 보고서야 안 사실인데, 아드리안을 제외한 모든 하인이 그랬듯 보통 수면과 다른 점이 없었다. 마취총을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정신을 잃긴 했는데 이상하게 여길 정도는 아니었다. 아드리안은 그냥 감이 괴물같이 좋은 거였다. 역시 악마 짬밥 어디 안 가는구나.
그나저나 아드리안이 저녁 식사 시간에는 오라고 했는데, 의도치 않게 땡땡이를 쳐 버리고 말았다. 중간에 누군가 깨우러 왔을지도 모르지만, ‘숙면’ 스킬로 잠들면 자의든 타의든 깨어날 수 없어 소용없었을 거다. 부디 이상하게 여기지 말았어야 할 텐데.
이제 스킬을 어림짐작해서 실험해 보는 건 그만두자. 어차피 최약체의 예상 같은 건 맞지도 않으니까. 내가 최약체라니. 나는 잔뜩 시무룩해져서 이마를 짚었다. 온종일 머리를 열심히 굴려서인지 살짝 띵했다. 다행히 아픈 정도는 아니라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최약체가 계속 최약체거려서 거슬릴 수도 있겠지만, 자기가 최약체인지 몰랐던 최약체가 최약체인 걸 알고 최약체처럼 충격받아서 그렇다. 최약체가 그렇지, 뭐. 달리 최약체겠어? 나는 다소 냉소적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얼마나 깊게 잔 건지 커피 2ℓ는 족히 마신 것처럼 눈이 똘망똘망하다. 최약체 오늘 자긴 글렀어요.
“우선 뽑기부터 해 볼까.”
시스템부터 여기저기 눌러 보다가 무료 뽑기 버튼이 활성화된 걸 발견했다. 무지갯빛 번개 치고 행운 크리티컬이니 뭐니 뜨면서 난리가 났는데, 자잘한 속임수 연출은 모두 생략하고 얻은 아이템은 다음과 같았다.
「악마의 네 번째 예술혼
등급 : 영웅
특징 : 아드리안의 호감도를 대량으로 올려 줄 수 있는 ‘악마의 예술 작품’의 네 번째 재료. 단독으로 사용 불가능」
「악마의 다섯 번째 예술혼
등급 : 영웅
특징 : 아드리안의 호감도를 대량으로 올려 줄 수 있는 ‘악마의 예술 작품’의 다섯 번째 재료. 단독으로 사용 불가능」
「만능 약초(3개)
등급 : 고급
특징 : 어떤 약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만능 약초. 단독으로 사용 시, 상태 이상을 1회 정화함」
지난번에 이어 영웅 등급 아이템이 두 개나 나왔다. 이걸로 ‘악마의 예술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네 번째 예술혼이 두 개, 다섯 번째 예술혼이 한 개, 여섯 번째 예술혼이 한 개였다.
네 번째 예술혼이 중복으로 나온 건 안타깝지만, 아직 뽑기 기회가 좀 남아 있으니 운 좋으면 아이템 제작도 가능할 것 같았다. 거기다 만능 약초까지! 그러잖아도 제작소에 재료로 있는 걸 보고 어디서 구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뽑기에서 나오다니 잘된 일이었다.
뽑기가 두 번 연달아 이렇게 잘 나오다니, 내 행운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했다. 유저 골려 먹기에 최적화된 게임에서 순조로우면 불길할 수밖에 없잖아? 볕 들 날 없던 게임 인생에 어느 날 직사광선이 세게 들어 왔는데 모든 걸 다 태워 버릴 것 같았다.
이 게임에서 절대 이럴 리가 없는데. 얼마나 큰 똥을 던지려고 밑밥을 까는 건지 두렵기 짝이 없다.
나는 낯선 행복에 불길함을 잔뜩 느끼며 아이템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어차피 가방도 최대로 늘어난 거, 가지고 다니면 어딘가 쓸 일이 있겠지.
“할 일도 없는데 산책이나 할까.”
저녁 시간에 땡땡이쳐서 내일 엄청 까일 것 같으니 그 전에 마음의 수양이 필요했다. 지금쯤이면 모두 자고 있을 테니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조용히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 최약체 산책 가요! 방을 마저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자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둡고 조용했다. 음, 왠지 으스스한걸. 산책은 좋지 않은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최약체가 이렇지 뭐. 속으로 툴툴거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는데 문득 눈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아니, 누가 이렇게 잡초를 정리하다 말았어?”
마구 파헤쳐진 땅. 그 옆에는 잡초제거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누가 정원에서 일하다 도망이라도 친 걸까? 레티샤가 보면 크게 노할 광경이었다. 파헤쳐진 구덩이 앞에 앉아 흙을 도로 덮었는데 삐죽삐죽 튀어나온 잡초가 영 보기 싫었다. 일꾼의 본능으로 못생기게 튀어나온 잡초부터 골라 휙 빼낸 순간이었다. 흰 글씨가 사르르 나타나 아주 오랜만에 보는 글귀를 만들어 냈다.
「크리티컬!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0을 얻었습니다.」
오? 아드리안 베개 훔쳐 베고 잤을 때 이후로 처음 보는 크리티컬이었다. 이거 혹시 숙면 스킬 부가 효과일까?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8을 얻었습니다. (야간작업 1.5배 가산)」
「크리티컬!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5를 얻었습니다. (야간작업 1.5배 가산)」
「크리티컬!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5를 얻었습니다. (야간작업 1.5배 가산)」
「크리티컬!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5를 얻었습니다. (야간작업 1.5배 가산)」
혹시나 해서 몇 개 더 뽑아 봤는데 높은 확률로 크리티컬이 떴다. 레벨 15가 넘어가니 크리티컬이 몇 번 뜨더라도 하단 게이지가 눈에 띄게 오르진 않았지만, 지지부진하게 올라가던 평소와 비교하면 확실히 큰 변화였다.
거기다 야간작업이라고 수당을 1.5배까지 쳐주다니. 현실에서는 퇴근 처리 누르고 야근하게 하는 회사도 있는데, 이런 면에서는 무척 바람직한 게임이었다. 마침 경험치가 레벨 16 후반부까지 쌓여 있겠다, 17까지는 금방이겠는걸. 어쩌면 이 게임 개발자가 ‘너희만이라도 야근 수당 받으렴’이라는 홍익인간 정신으로 가산 로직을 넣었을 수도 있다. 짠하기도 하지.
「크리티컬!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5를 얻었습니다. (야간작업 1.5배 가산)」
「크리티컬!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5를 얻었습니다. (야간작업 1.5배 가산)」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8을 얻었습니다. (야간작업 1.5배 가산)」
「크리티컬!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5를 얻었습니다. (야간작업 1.5배 가산)」
……
「레벨 17로 올랐습니다. (칭호 : 악마의 예비 오른팔)」
「추가할 수 있는 호감 대상이 늘어납니다.」
이번에는 최약체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넘치는 체력을 무기 삼아 정원의 잡초는 모조리 뽑을 기세로 달렸더니 레벨도 오르고 호감 작업할 수 있는 인원도 늘어났다. 야간작업 가산에 숙면 버프까지 추가되니 이만한 꿀조합이 없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최약체라고 언제까지고 최약체로 남으리란 법은 없다. 타고나길 쉬운 공략 캐릭터라도 육성하기에 따라 천차만별인 법이지! 고렙 힐다는 조금 다를 수 있잖아! 물론 캐릭터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힐다는 절대 선택하지 않을 테지만, 이렇게라도 정신 승리 할 수 있다면! 난 시무룩했던 만큼 잔뜩 신나서 잡초를 뽑았다.
올라가는 게이지에 흥겨워진 나머지 나중엔 노래까지 불러 가며 잡초를 뽑아 댔다. 리듬 게임 감성까지 살려 가며 경험치를 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잠잠하던 감지 스킬이 발동됐다. 시야 한쪽이 붉게 타오르면서 심장박동 소리가 쿵쾅쿵쾅 커지기 시작했다. 경고등이 밝아지고 소리는 점점 커지는데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는 게 신기했다. 얘 뭐 그림자 은신술 같은 거 쓸 수 있는 거 아냐?
“도련님?”
잡초제거기를 내려놓고 일어나서 박동 소리가 큰 방향으로 그를 불러 보았다. 여전히 기척 없이 잠잠하다. ‘감지’가 없었다면 아드리안이 있는지 상상 못 했을 고요함이었다.
“저, 도련님. 거기 계시죠?”
“…….”
“도련님, 거기 계시잖아요. 왜 숨어 계세요?”
감지 스킬 울리는 것 때문에 잡초를 뽑을 수가 없단 말이다. 내가 진득하게 불러 대자 잠시 후 커다란 나무 뒤에서 아드리안이 나왔다. 반은 어둠에 잠겨 있고 반은 달빛에 환하게 드러난 그는 무척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어둠 속에 묻힌 푸른 눈이 반들거리며 빛났다. 쟨 또 뭐가 불만이라서 혼자 공포 영화 찍고 있는지 모르겠다.
“……힐다, 이 새벽에 뭐 하고 있는 거야? 저녁 시간엔 나타나지도 않고.”
그게 불만이었냐. 하지만 그건 내가 잘못한 게 맞았으므로 냉큼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해요, 도련님. 제가 너무 피곤했는지 깜빡 잠들어서 일어나지 못했지 뭐예요. 무슨 벌이든 달게 받을게요……. 급여 차감만 빼고요. 제 충성심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도련님께도 좋은 일이 아니리라 확신합니다.”
“아니잖아.”
나불거리는 말을 아드리안이 칼같이 잘라먹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무 뒤에서 좀 나와 주면 좋겠다. 어둠 속에 숨은 악마를 응시하고 있으니 심장이 또 벌렁거리잖아.
“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