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33)

4-2. 상사에게 사랑받을수록 고달픈 법이다.

찬 바람이 거칠게 불어닥치는 강가에서 눈을 떴다. 여긴 어디야? 아직 게임 속인가?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휘날리며 눈앞을 어지럽혔다. 나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며 주위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나?

“힐다, 정말 실망이야.”

눈으로 그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보다 목소리가 귀에 닿는 게 빨랐다. 헉하고 돌아보자 아드리안이 시야에 꽉 들어찼다. 기품 있고 우아하지만 창백한. 화려하지만 섬약한. 그린 듯이 아름답지만 헤아릴 수 없는 섬뜩함이 섞여 있는 남자. 오직 나만이 아는 악마였다.

“조금쯤은 쓸모가 있을 줄 알았는데. 제물 하나 데려오지도 못하고, 내가 너를 왜 살려 둬야 할까?”

“도련님, 왜 가까이 오시는…….”

“내 약점을 알지만 쓸모없는 전우는 나를 향한 칼날이지. 굳이 곁에 두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잠깐, 그만 가까이…….”

“잘 가, 힐다.”

그는 그저 가볍게 손을 뻗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훅 떠밀려 두 발이 마법처럼 지상에서 떠올랐다. 첨벙! 곧이어 차가운 물보라가 온몸을 내리쳤다. 물살에 따귀를 얻어맞은 듯 귀가 얼얼했다.

방금 아드리안이 떠밀어서 물에 빠뜨린 거? 역시 악마 새끼 따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우왁!”

꼬르륵하며 어둠 밑바닥까지 가라앉자 눈이 번쩍 뜨였다.

낡고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오자,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휴…… 다행이다.

아니, 잠깐. 다행인 거 맞나? 나 어제 살해 현장을 목격했잖아. 으으, 악몽 꾼 게 그래서였구나. 하긴 어젯밤 저택에 돌아와서, 아드리안이 검은 골목에 들어갔다가 피를 잔뜩 묻히고 나왔던 장면만 머릿속으로 백 번쯤 되감기 하다 잠들었는데 악몽을 안 꾸는 게 이상하지.

나는 마른세수를 하다 두 손을 침대 위로 툭 떨어뜨렸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살인 후의 아드리안이, 아드리안이 건네주던 칼이, 내 손에 선명하게 남은 핏자국이 생생히 떠올랐다.

왜 그 장면이 잊히질 않지? 게임할 땐 아무렇지도 않게 잘만 죽였잖아. 머리로는 픽셀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사람처럼 대하고 마는 게 답답할 따름이었다.

“게임 속 인물을 진짜 사람이라고 생각해 봐야 생존에 득 될 것 하나 없는데…….”

절망적인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당장 어제만 해도 그랬다.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아드리안을 막아섰어야 했다. 하다못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내 손에 쥐여 준 명백한 증거물을 경사에게 가져갔어야 했겠지. 하지만 그랬다간 아드리안의 두 번째 표적은 내가 됐을 거다. 어제 일찌감치 죽어 버려 악몽을 꿀 기회조차 없었겠지.

저들을 사람이라고 여기는 시점부터 골치 아파지는 거야. 게임 속에서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인지 부조화가 일어나는데,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일일이 양심의 가책 따위 느꼈다간 아드리안 곁에서 견디지 못할 테니까, 처음 생각했던 대로 쭉 밀고 나가는 게 맞다.

지금은 살아남는 데에만 집중하자.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내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확인한 건 호감 대상의 부탁 목록이었다. 어제 새로 충원한 호감 대상 두 마리가 사고 치고 있지 않은지 확인해 봐야 했다.

『에밀리 : (*´︶`*)❀ 잠을 깊이 자고 일어나 개운해하는 중……. lv.4 (0/40)

케이든 : o(`ㅂ´*)o 지갑을 훔쳐 달아나는 중……. lv.10 (MAX)

그로버 : (*`д´)σ=σ 목격자의 눈알을 찌르는 중……. lv.10 (MAX)』

아니나 다를까, 케이든과 그로버가 서로 협력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세상에, 지갑을 훔치다니, 목격자의 눈알을 찌르다니. 안 되겠다. 아드리안에게 잘 둘러대고 오늘이라도 나가서 부탁 취소해야지……. 내 부탁으로 픽셀 세계의 피해자가 생기면 안 되니까!

「케이든이 부탁을 수행하여 보너스 급여를 23G 획득했습니다.」

역시 돈은 검은돈이 최고지.

벌떡 일어났던 나는 도로 스르르 침대에 앉아, 173골드로 늘어나는 전 재산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상황에 따라 말이 달라지는 것 같지만, 이건 절대 합리화가 아니었다.

어차피 픽셀 인간이 픽셀 지갑 털리고 픽셀 잔고가 바뀌는 거 아닌가? 쟤네가 나처럼 가방이 보이길 해, 노역형을 당하길 해? 아마 돈주머니도 없을 텐데. 데이터에 불과한 그들의 돈이 내 손에 들어오는 순간 진짜 돈이 되는 거다.

대신 의미 있는 곳에 쓰겠습니다. 악마와 함께 세상을 깨끗하고 정의롭게…….

“참, 오늘 무료 뽑기 하는 날이지.”

‘그래도 진짜 이래도 되는 거야?’라는 양심 어린 목소리를 애써 짓밟고 무료 뽑기로 시선을 돌렸다. 양심만 생각했다면 나는 일찌감치 송장이 되어 버렸을 테니까. 이 정도 죄책감은 얼마든지 짓밟을 수 있었다.

오늘은 무료 뽑기에서 또 무슨 환장할 아이템이 나올까? 이제까지 뽑은 건 죄다 풀떼기여서 이젠 기대도 되지 않았다. 버튼 누르는 것조차 귀찮을 뿐……. 희박한 확률을 뚫고 영웅템이 나오기엔 이 망할 시스템에 너무 단련되어 버렸는걸.

「확률업 이벤트!」

이건 또 뭐야.

무료 뽑기를 누르자 갑자기 떠오른 생소한 글자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확률업 이벤트?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악마의 충실한 종이 된 당신을 위해 확률업 이벤트를 개최합니다!

뽑기 5회 동안 뽑기권 2장씩 더 선물하며, 악마를 위한 영웅 아이템이 나올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더욱더 악명을 쌓아 진정한 악마가 되어 보세요!」

사방에서 팡파르가 울려 대고 폭죽이 터지는 등 요란한 효과가 눈과 귀를 어지럽혔지만, 정작 보는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런 거로 신나기엔 당한 게 너무 많았으니까. 무료 뽑기 3회 버튼이 눈앞에서 반짝거리고 있는데 섣불리 누를 수가 없었다.

이거 또 돈 나가는 거 아닌가, 무료 뽑기권 썼다고 악명 높아지는 거 아니냐고. 이 시스템은 조금의 틈만 보여도 뒤통수 앞통수 싸대기 가릴 것 없이 다 때려 버리니 도무지 방심할 수가 없다.

뒤늦게 설명창이 뜨는 거 아닌가 한동안 기다려 보다가 무료 뽑기를 눌렀다. 꿈속에서와 똑같이 빠칭코가 휘리릭 돌아가는데, 무지갯빛으로 찬란히 빛나도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또, 또, 눈속임한다, 또. 이젠 안 속는다니까. 서로 수고스럽게 저런 효과 안 넣어도 되는데.

「악마의 네 번째 예술혼

등급 : 영웅

특징 : 아드리안의 호감도를 대량으로 올려 줄 수 있는 ‘악마의 예술 작품’의 네 번째 재료. 단독으로 사용 불가능」

「악마의 여섯 번째 예술혼

등급 : 영웅

특징 : 아드리안의 호감도를 대량으로 올려 줄 수 있는 ‘악마의 예술 작품’의 여섯 번째 재료. 단독으로 사용 불가능」

「팔목 보호대

등급 : 고급

특징 : 팔 근력을 15% 올려 줌. 중첩 효과 불가」

「영웅 등급 아이템을 처음으로 획득하여 경험치 700을 얻었습니다.」

「레벨 16으로 올랐습니다. (칭호 : 악마의 예비 오른팔)」

뭐? 진짜 영웅 등급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 시스템이 내게 유용한 아이템을 주다니. 악마의 예술혼이라면 제작소에 있던 재료 아닌가? 나는 내 손에 들어온 보라색, 파란색 보석과 팔목 보호대를 보고 입술을 헤 벌렸다.

「악마의 예술 작품 : 악마의 첫 번째 예술혼 0/1 악마의 두 번째 예술혼 0/1 악마의 세 번째 예술혼 0/1 악마의 네 번째 예술혼 1/1 악마의 다섯 번째 예술혼 0/1 악마의 여섯 번째 예술혼 1/1 악마의 일곱 번째 예술혼 0/1」

도저히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아 확인차 제작소를 눌러 봤더니 진짜였다. 네 번째랑 여섯 번째 예술혼 재료가 1/1로 차 있잖아!

맙소사! 뛸 듯이 기쁜 반면, 대체 또 무슨 똥을 던지려고 이런 좋은 아이템을 주는 건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이제 다섯 개만 더 모으면 되는데. 입주 이벤트 동안 확률 대폭 상승이라니 기대해 봐도 되는 걸까. 하, 진짜 손이 다 떨리네.

“나한테 이런 날이 오다니…….”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더니, 직사광선이 아주 쨍하게 들어와 버렸다. 예술혼이 들었다는 보석, 아주 신비하게 생겼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짙고 탁하게 어두워지는데, 밝은 햇빛에 비춰 보면 무척 투명하고 맑게 빛났다. 단독으로 사용 불가라고는 했지만, 아드리안이 보면 꽤 마음에 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잃어버리지 않게 가방에 잘 넣어 두고 나는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앗, 에밀리. 좋은 아침이야. 푹 잤어?”

“응! 정말 잘 잤어. 힐다 너도 잘 잤어?”

옷을 다 갈아입고 나가자마자 마침 방에서 나오던 중인 에밀리와 마주쳤다. 부탁 목록에 쓰여 있던 것처럼 잠을 깊이 자고 일어나 개운한 얼굴이었다. 사실 어제 숙소로 돌아와서 마주쳤을 때 무척 피곤한 얼굴이기에 ‘숙면’ 스킬을 써 주었는데 도움이 된 모양이다. 지금은 ‘감지’와 ‘투시자의 눈’이 쓸모없어 ‘숙면’에 악명 포인트를 몰아주었는데, 그 덕에 재사용 대기 시간이 한 시간으로 줄어들어 에밀리 말고도 한 명에게 더 써 볼 수 있었다.

에밀리와 카타리나. ‘숙면’을 썼을 때 효과 지속 시간이 각각 3시간 10분, 2시간 20분이었다. 이게 공략 난이도라는 거니까, 에밀리가 카타리나보다 공략하기 쉽다는 뜻이었다. 나는 저택 인원 리스트에 시간을 써넣으면서 속으로 울고 말았다.

에밀리, 호감도가 쉽게 오르락내리락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공략 난도가 최하에 해당하는 캐릭터인 모양이다. 괜찮아, 에밀리. 시스템이 널 그렇게 취급해도 난 소중히 다뤄 줄 거니까.

“응, 잘 잤어. 오늘 기분 되게 좋아 보인다, 에밀리.”

“잘 자서 그런가 봐. 같이 나가자, 힐다.”

며칠 전 몸살 기운도 싹 사라진 듯 에밀리가 산뜻한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숙면’ 스킬, 아드리안의 베개를 훔쳐 베고 잤을 때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듯한데 잘만 써먹으면 무척 유용할 것 같다.

“안녕, 에밀리! 안…… 녕, 힐다.”

“에밀리,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네! ……안녕, 힐다.”

에밀리와 함께 숙소를 나서자 지나가는 여러 하인이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밀리와 나를 향한 어투가 사뭇 달랐는데, 그 이유는 잠시 후에 떠오르는 글자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카롤리나가 당신에게 불길함을 느낍니다.」

「클로이가 당신에게 불길함을 느낍니다.」

「제드가 당신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선한 캐릭터가 날 피하고 케이든과 그로버 같은 악한 캐릭터가 친근감을 느꼈듯, 돌이킬 수 없을 정도라는 악명이 저택에서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거였다. 선한 캐릭터일 에밀리는 ‘숙면’의 효과인 건지 아직 내게 불길함을 느끼고 있진 않았다. 제드 같은 강간마가 친근감을 느낀다니 치욕스럽고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무척 유용한 기능이기도 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드리안에게 제물을 바쳐야 할 때, 애꿎은 사람을 넘기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악인이라고 다 죽어도 싼 건 아니지만, 기왕 죽일 거라면 선한 사람보단 악한 사람을 고르는 게 조금이라도 세상에 이롭지 않나.

저택으로 향하는 동안 내게 친근감을 느끼는 인간들은 두세 명밖에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확실히 기억할 수 있었다. 아드리안에게 바칠 제물 인재 후보로!

“어? 앨번 집사님께서 나와 계시네. 같이 계신 분들은 누구시지?”

“응? 누구?”

생각에서 번쩍 깨어나 에밀리가 가리키는 대로 시선을 옮겨 보니, 저택 입구에 앨번과 낯선 차림의 남자 두 명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상찮고 낯선 옷차림이 눈에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걸음이 멈추었다.

“힐다, 힐다! 이리 와 보렴.”

앨번이 멀리서 날 발견하고 손짓했다. 그와 이야기 나누고 있던 두 남자도 자연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중 한 남자의 눈빛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섬뜩하기까지 했다. 요 몇 주간 아드리안 때문에 꽤 단련됐는데도 말이다.

왠지 불길한데, 가기 싫은데…….

“힐다, 앨번 님께서 부르셔. 빨리 가 봐.”

“으, 으응. 가, 가야겠지.”

에밀리만 아니었어도 냅다 튀었을 텐데, 걸렸으니 안 가면 안 되는 거겠지…….

분명 내 발로 걸어가는데 목줄에 매여 끌려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최대한 느리게, 발을 질질 끌어 저택 앞까지 걸어갔다. 가는 동안 살짝 살펴본 결과, 두 남자의 옷차림이 상당히 비슷했다. 검은 재킷에 검은 제복, 가슴 주머니로부터 어깨까지 이어진 흰 줄, 소매의 붉은 선, 겉면은 검정색에 안쪽 면이 붉은색으로 대비되는 망토,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은 부츠, 은색 독수리가 커다랗게 수놓인 검은 모자. 키가 더 크고 나이 든 남자는 망토나 부츠 없이 비교적 편한 복장이었는데, 눈빛이 어쩐지 불길하고 매서웠다.

내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점찍듯 노려보는 게……. 으으,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쪼그라든다.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으로 신발 속 발가락까지 절로 오므라들었다. 그는 앨번에게 꾸벅 인사하고 옆에 설 때까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힐다, 인사드리렴. 해리슨 경감님과 제프리 경사님이시다. 경감님, 경사님. 이쪽은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 힐다입니다. 어제 도련님과 함께 마을에 잠깐 다녀왔지요.”

해리슨 경감이라면 분명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마을의 실종, 살인 사건을 쫓아다니며 용의자들을 잡아 가두었던 인물. 가끔 마을 방범대에 머문다는 상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찾아가려다, 아드리안과 마주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해리슨 경감이 저택에는 왜?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내 머릿속엔 아드리안이 스쳐 지나갔다. 심장이 덜컹 떨어지며 입술이 벌벌 떨렸다. 설마 어제 살인 사건 때문에? 뭔가 알고 온 거야?

“별일은 아니고…… 어제 네가 마을에 다녀왔지 않으냐? 그 일에 관해 물어보러 오신 거란다.”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이봐, 왜 그렇게 벌벌 떨지? 뭐라도 들킨 사람처럼 말이야.”

쇠를 긁듯 낮고 거친 목소리가 비수처럼 귀를 파고들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서슬 퍼런 눈빛을 보고 다시 푹 숙였다.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경찰이 저렇게 바라보면 괜히 무서울 텐데, 저지른 게 있으니 떨림이 점점 더 심해져 갔다. 거기다 저 해리슨 경감은 왜 저렇게 살벌한 건데. 경감이면서 왜 사람 찌를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냐고.

그의 시선이 스르륵 내려와 내 손에 닿았다. 세게 맞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움찔했다. 떨리는 두 손을 꽉 모아 쥐고 하얗게 질리도록 짓눌렀다. 그러지 않고서는 흔들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당황한 나머지 목덜미로부터 미미한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후들거리는지 해리슨 경감 옆에 있는 제프리 경사도 이상하게 쳐다볼 지경이었다.

무서워, 아, 무서워. 뭘 어디까지 알고 온 거지? 여긴 명망 높은 백작가잖아. 증거 없이 불쑥 찾아올 수는 없었을 텐데. 아드리안이 죽이고 나서 뭔가 증거를 남겼나? 여기도 지문 감식 같은 게 있을까?

처음에 해리슨을 찾아가려 한 건, 내가 관계없을 때 아드리안에 대한 힌트를 주기 위해서였다. 저 악마 좀 빨리 잡아 가뒀으면 해서.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다. 내가 동행한 날 아드리안이 사람을 죽였고 나는 흉기까지 옮겨 주고 방관자처럼 지켜봤잖아. 여기서도 방조죄가 있을까?

아니, 그러고 보니 피 묻은 흉기도 나한테 있잖아? 아드리안 이 악마 새끼, 설마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증거 남기고 흉기도 넘긴 거 아냐?

만약 살인범으로 지목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최하층민이나 다름없는 하인이니 의심스러운 정황만으로 감옥에 가둘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형당할지도 모르지. 이 시대에선 사형 도구로 단두대 같은 걸 쓰겠지? 맙소사, 어떻게 죽을지 수없이 많은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긴 했어도 단두대에 목이 잘려 죽는 결말은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부디 칼날은 최대한 날카롭게 해 줘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한 방에 갈 수 있도록…….

“아…… 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어제, 저는…….”

“경감님, 아이를 너무 추궁하지 마십시오. 경감님 같은 분들과 이야기를 처음 해 보는 거라, 순진한 아이라 긴장한 것일 뿐입니다. 힐다, 진정하거라. 우선 진정하고 차분히 말씀드리면 된다.”

“어이, 늙은 양반. 그만 방해하지 그래. 난 이 하인한테서 들을 게 무척 많을 것 같거든.”

“이 아이는 제 보호 아래 있습니다. 경감님께서 이 아이에게 하문하실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자리를 만들어 드리겠지만, 비신사적이고 폭력적인 언행을 취하신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힐다, 원하지 않으면 들어가도 좋다. 도련님께 가던 길이었지?”

차분하고 온화하게 감싸 주는 앨번의 목소리에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인자하게 빛나는 주름진 눈을 보자 후들거리던 손이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반대로 앨번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해리슨이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클클 웃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두꺼운 시가(cigar)를 꺼내더니 입에 삐딱하게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소, 비신사적? 폭력적? 퉤, 빌어먹을. 우리가 귀족님네들처럼 우아하고 신사적이었으면 어떻게 평생토록 흉악한 범죄자 놈들을 상대하겠소? 꼭 이 벌벌 떠는 하인이 아니라도 돼. 소백작이라도 직접 만나게 해 줘. 얼마나 비싼 면상이신지 보고 싶기도 하고.”

“경감님. 저, 말씀을 가려 하시죠. 저희는 소백작께서 혹시 뭔가 보신 게 없는지 참고 조사차 온 거지, 용의자를 체포하러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협력! 협력을 구하러 온 거라고 제가 오는 길에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거기다 여기는 ‘그’ 팔츠그라프 백작저입니다, 팔츠그라프 백작저.”

보다 못했는지 제프리 경사가 나서서 다 들리게 속닥거렸다. 거침없이 돌진하는 상사 때문에 고생하는 부하 직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뭐? 참고 조사차 온 거라고? 그럼 증거가 없는 거네? 사형당할 일도 없는 거고?

그 사실을 깨닫자 온몸을 지배하던 떨림이 뚝 멈추고 눈이 커졌다. 두려움이 가시니 그제야 머리가 차분해지고 정상적인 사고가 이어졌다.

여기서 나는 앞으로의 게임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선택을 해야 했다. 길은 두 개였다. 하나는 피 묻은 칼을 증거품으로 제출하고 아드리안을 고발하는 것, 다른 하나는 아드리안의 죄를 은닉하고 한배를 타는 것.

예전이었다면 조금의 망설임 없이 첫 번째를 택했을 거다. 해리슨이 아는 거 없냐고 말한 순간 곧장 숙소로 달려가서 칼을 가져왔겠지. 아드리안의 방을 가리키며 당당히 외쳤을 거다. ‘쟤가 그랬어요!’라고.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저 해리슨한테 찍혀선 안 된다고, 보통 인간이 아니라고 본능이 외치고 있었지만, 숙소로 가려는 발을 내 이성이 붙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어떻게 마님께 직접 산 찻잎을 건네기도 전에 아드리안이 잡히게 둘 수 있겠어. 사람을 죽여서 그렇지, 그것만 아니면 불쌍한 악마인데. 예술과 식물을 아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아파하는 주제에 저택 사람들은 온갖 사소한 이유로 죽이지 못하는, 보다 보면 괜찮은 놈이라고 하면 내가 너무 무른 걸까?

거기다…….

“네가 울었잖아. 들고 가기 힘들어서 운 거잖아. 네가 싫다는데 내가 들도록 강요하겠어?”

은근히 상냥할 때도 있고.

“내가 처음으로 이곳에서 들인 부하인데 잘해 줘야 하지 않겠어? 장차 나 대신 제물도 가져다줄 인재인데.”

같은 편은 아낄 줄도 알아서 오래 살려 줄 것 같기도 하고.

“손수건은…… 갑자기 왜 주세요?”

“좋아하잖아, 내 체취.”

아니, 이건 갑자기 왜 생각나는 거야?

창피함으로 빨개진 얼굴을 털며 생각을 지워 냈다. 어찌 됐건 여기까지 와 버렸는데 처음과 같은 결정을 내릴 순 없었다. 그 악마, 멀쩡히 숨만 쉬어도 아프잖아. 감옥에 갇혀서 치료도 못 받게 되면 생의 끝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진짜 죽어 버릴 수도 있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아드리안을 살려야 할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이지 망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회생 가능성이 없어. 완전히 조져 버렸다고. 내 게임 인생 글러 먹었어. 아드리안을 택하다니, 나는 이 게임에서 결국 죽고 말 거야. 어쩌면 아드리안의 호감도를 올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공포게임의 역대급 망엔딩이 시작됐을지도 모르겠다…….

“시끄러워, 제프리. 내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봤어? 범죄자가 숨어 있는 곳이면 백작저고 뭐고 다 엎어 버려야지.”

“하, 진짜 제발요, 경감님. 저번 달에도 경정님께 크게 주의받지 않으셨습니까. 모시고 다니는 제가 혼난다고요, 제가!”

“경감님,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도련님은 몸이 좋지 않으셔서 오랜 시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밖에 나가 계시는 게 어려우십니다.”

“그러니까 그 약해 빠졌다는 소백작께서 왜 하필 살인 사건이 일어난 날 마을에 가셨냐고. 난 그걸 알고 싶다고. 소문에 의하면 정원 산책도 오래 하기 힘들 정도라던데. 그렇게 움직이기도 힘든 분이 마을에 가실 만큼 특별한 용무가 뭐냐 이 말이야.”

“하, 진짜 경감님, 제발…….”

“보아하니 늙은 영감은 모르는 모양인데 그만 막고 비키지 그래. 소백작이 머무는 방이 어디 있는지만 알려 줘. 아는 것, 모르는 것 전부 토해 내게 해 줄 테니까.”

“경감니이임…….”

“도련님 만나실 필요 없어요. 마님 드릴 찻잎 고르러 간 거니까요.”

쉼 없이 말을 주고받던 입이 찬물을 끼얹은 듯 멈추었다. 세 쌍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 향했다. 존재감 없이 벌벌 떨기만 하던 하인이 갑자기 말을 내니 살짝 놀란 듯 보였다.

질러 버렸다. 이젠 돌이킬 수 없어.

“힐다, 힘들면 말 안 해도 된단다.”라며 감싸 주려는 앨번을 뒤로하고 내가 해리슨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찻잎? 고작 찻잎 때문에 그 몸을 이끌고 마을에 갔다고?”

해리슨의 두툼한 눈 밑 살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여전히 살짝 떨리는 손을 꾹 내리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궁금하시면 찻잎 가게 앤드류 씨한테 확인해 보세요. 우리 도련님께서 직접 오렌지향 나는 루이보스를 사 오셨으니까.”

“아니, 그걸 왜 직접 가신 겁니까? 심부름할 하인이 저택에 이렇게나 많은데요.”

이번에는 제프리도 궁금했는지 목소리를 냈다. 나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허리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찻잎을 직접 사러 가신 거라고. 저희 마님 매우 편찮으셔서 며칠 전에 저 멀리 별장에 가셨거든요. 마님 돌아오실 때를 애타게 기다리며, 마찬가지로 몸이 안 좋으신데도 불구하고 직접 찻잎을 사러 가신 거라고요. 몸이 아프면, 병약하면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찻잎 사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하시는 건가요?”

“아니, 물론 그건 아니지만…….”

“궁금하시면 마님께서 진짜 별장에 가신 건지 확인해 보세요. 굳이, 굳이 알아보시겠다면 앨번 집사님께서 위치를 가르쳐 주시겠죠. 물론 이 일을 알게 된 백작님께서 어떻게 나오실지는 모르는 일이지만요.”

“아냐, 아닙니다! 그런 무례를! 무례를 저지를 순 없지요!”

꽤 당황했는지 제프리가 눈 둘 데를 찾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나는 차분하게 해리슨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찌를 듯이 기세가 매서워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증거가 없다는 걸 아는 이상 나도 조금은 침착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말이어요, 해리슨 경감님? 말씀을 좀 삼가시는 게 어떨까요? 딱 보아하니 우리 집사님보다 나이가 훨씬 적어 보이시는데 말끝마다 늙은 영감, 늙은 영감……. 아무리 민중의 지팡이라도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쌍욕 먹어요. 아, 욕 많이 먹고 오래 살려고 그러시나? 오래 살면서 범죄자 많이 잡으려고? 대단한 사명감이시네요…….”

“……뭐라고?”

“그리고 여기 금연 구역이에요. 저희 도련님 천식 심하신데 담배 냄새 맡고 발작하시면 책임지실 거예요? 물론 못 지시겠죠. 그 약은 제가 발바닥에 불나도록 뛰어서 갖다드려야 하거든요.”

“…….”

“알아들으셨으리라 믿고 실례하겠습니다.”

공손히 조잘거린 나는 팔을 길게 뻗어 해리슨의 입에 물려 있는 시가를 휙 뺐다. 으, 끝에 침 묻어 있어. 지지, 지지.

시가를 바닥에 패대기치고 발로 살포시 짓밟으며 나는 헤헤 웃는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제프리는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하얗게 질려 있었고 해리슨은 시가를 물고 있던 입술 모양 그대로 굳은 채였다.

그러다 어이없다는 듯 허, 허.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점차 빨라지더니 유쾌한 일이라도 벌어진 양 박장대소로 변했다. 나중엔 웃음을 멈추기 위해 입 안쪽을 짓씹는 듯했는데, 코끝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에 살기가 맺혀 있었다. 끅끅거리며 집어삼키는 웃음소리에선 광기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반응이 심하지 않나. 이 사람 진짜 경찰 맞는 건가. 사람을 사람 같지 않게 바라보는 눈빛이…… 경찰 딱지 떼고 보면 살인마라고 해도 믿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흰 글자가 반짝 떠올랐다.

「해리슨이 적대 대상에 추가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악마와 한패를 먹고 싶진 않았는데. 의도치 않게 한배에 탄 것도 모자라 배에 모터까지 달아 버리고 말았다. 이 정도면 갸륵해서라도 오른팔로 승진시켜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열 받아서 질러 버리긴 했는데, 그 후에 내 안의 쫄보와 소심이가 은근슬쩍 깨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우으으, 무서워. 저 사람 눈빛 좀 봐. 저게 어딜 봐서 경찰이냐고. 피차 볼일 끝난 듯한데 그만 쳐다보시죠. 나는 앨번의 그림자처럼 뒤에 서서 시선을 피했다.

이럴 때 아드리안은 어디 숨어서 나오질 않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최강캐들은 최강캐끼리 붙어야 균형이 맞는 거 아닌가요? 개나 소나 나만 붙잡고 추궁하고 쏘아보니 이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난 일개 하인, 체스로 치면 폰이자 장기로 치면 졸일 뿐인데. 체스판 끝까지 가면 퀸이 될 수 있느니 하는 말은 다 집어치우고, 가장 쉽게 소비되어 판밖으로 밀려날 기물일 뿐이다.

“무슨 일인가, 앨번?”

묵직한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공기를 밀어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분명 전에 한 번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였기 때문에.

“보아하니 손님이 오신 모양이로군.”

“백작님.”

“무슨 일로 저택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앨번이 급하게 허리를 숙이며 물러나자 나도 덩달아 쪼르르 따라갔다. 뚜벅뚜벅. 정갈하고 절제된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며 다가왔다. 그와 함께 백작의 존재감이 사방을 뒤덮었다. 아드리안처럼 악마가 아닌데도 그러한 위세를 내뿜을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악마 난다더니.

갑자기 백작이 나타나자 제프리는 “배배배배백작님…… 어떡해요, 경감님, 진짜 어쩌실 거예요?” 하며 해리슨의 팔을 퍽퍽 치고 있었다. 얌전히 몇 대 맞아 주던 해리슨이 확 째려보자 그조차도 못하게 됐지만. 내가 보기에 제프리, 지금 이 자리에서 목숨 세 개쯤 닳았다.

“배, 배, 백작님. 황송합니다. 세상에, 제 이름은 제프리입니다. 제프리…… 경사입니다. 그, 저, 저희가 이렇게 온 건 다름이 아니옵고, 저…….”

“해리슨. 경감입니다.”

“이 주변의 치안을 담당하시는 분들이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작이 손을 내밀자 해리슨이 가볍게 악수를 받았다. 곧이어 제프리에게도 악수를 청했는데, 시큰둥한 해리슨과 달리 그는 감히 받지 못하고 팔짝팔짝 뛰다가 바지에 두 손을 슥슥 닦았다. 해리슨이 “작작 좀 해, 제프리.”라고 으르렁대기까지 계속 닦고 있었다.

몹시 황송해하며 악수를 받는 제프리를 보며 백작이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여기엔 무슨 일로? 보아하니 저희 집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던 듯한데.”

“아이고, 별일 아닙니다, 백작님. 어제 마을에 사건이 터졌는데 때마침 팔츠그라프 가 소백작님께서 방문하셨다는 소리를 들어 참고 조사차 온 것일 뿐입니다.”

“제프리!”

“……아드리안이 마을에 갔었다는 말입니까?”

해리슨이 급하게 저지했으나 이미 제프리는 백작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은 후였다. 백작의 시선이 앨번에게 스르르 움직이자, 앨번이 제 불찰이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묘하게 흘러가는 기류를 눈치챈 제프리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백작님,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도, 예, 소백작님을 마을에서 목격했다는 진술을 들었는데 조사를 안 할 순 없어서요. 그저 형식차 여쭤보러 온 겁니다. 예, 형식차.”

“하…….”

“그러시군요. 혹 아드리안을 만나 보셔야 한다면 들어오셔도 됩니다.”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백작이 몸을 살짝 틀며 길을 터 주는 시늉을 하자 해리슨이 기다렸다는 듯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럴 수는 없다, 어떻게 우리가 증거도 없이 감히 팔츠그라프 백작가를 뒤지겠느냐’는 당연한 대답을 이어 가려던 제프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던졌다. 와, 진짜 다리 잡고 매달리네.

“아, 아아악! 잠깐만요, 경감님! 들어가면 안 돼요!”

“이거 안 놔? 제프리, 지금 아니면 이 백작가를 언제 뒤질 수 있을지 몰라. 알고는 있겠지? 당장 놔. 나는 자네 상사야.”

“하, 하하하. 경감님. 대체 무슨 말씀을……. 경정님께서 저를 왜 보냈는지 아십니까? 경감님 사고 치실까 봐, 끙, 이렇게 앞뒤 없이 달려드실까 봐 보내신 거란 말입니다. 예?”

“놔. 안 놔? 자네, 명령 불복종으로 옷 벗고 싶은 거야?”

“예에, 예. 경감님의 앞길을 막은 죄, 옷만 벗어서 되겠습니까? 죽어도 싸죠, 싸. 옷을 벗기든 목을 베든 방범대로 돌아가서 하시죠. 예?”

해리슨이 다리에 매달린 제프리를 질질 끌고서라도 들어가려 하자, 제프리가 식겁하며 다른 한 손으로 기둥을 붙잡고 버텼다. 해리슨은 나와 앨번이 하인 신분이라 무례하게 군 게 아니었다. 그냥 일관성 있고 평등하게 무례한 거였구나…….

“경감님, 경사님. 괜찮으신 겁니까?”

“하, 하하. 그럼요, 백작님. 이런 꼴을 보여 드려 무척 송구합니다. 무척요. 부디 이 일은 저희 경정님께 비밀로 해 주셨으면…….”

“하지만 우리 가문이 연루된 문제라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사를 받아야 한다면 성실히 임해야지요. 가택 수색도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아뇨! 아뇨! 백작님! 그럴 필요 없으십니다! 이미 소백작님의 알리바이에 대해선 저 하인이 진술해 준 차였습니다. 마님 드릴 찻잎을 사러 가셨다더군요. 예. 이 부분이 명확해진 이상 직접 뵐 필요가 전혀 없지요.”

“하인……?”

백작이 그제야 앨번 뒤에 숨어 있던 내게 눈길을 돌렸다. 눈이 딱 마주치자 뱀이 쩍하고 아가리를 벌려 잡아먹히는 느낌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백작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생기면 절대 가지 말아야지. 온몸에 위압감을 두르고 다니는 백작, 염소 연쇄 살인마 백작 부인, 진짜 악마 아드리안……. 짧게라도 셋 사이에 끼어 있으면 말라 죽을 게 분명했다.

「루에이리를 호감 대상에 추가하겠습니까? (0/3)

분류 :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백작

특징 : ?」

앗, 그러고 보니 백작을 호감 대상에 추가해야 했는데! 지난번에 만났을 때 실패했었지. 가뜩이나 잘 등장하지 않는 희귀 몬스터인데 이번에도 놓칠 순 없었다.

이미 호감 목록이 가득 차 버렸으므로 백작을 추가해도 곧장 활성화되진 않을 것 같지만, 희귀 몬스터는 우선 추가하고 봐야 했다. 곧장 손을 들어 ‘예’를 누르려고 하는데, 기다렸다는 듯 창이 휙 사라졌다. 또 실패한 거야? 시간제한 너무하잖아요!

「루에이리를 호감 대상에 추가하겠습니까? (0/3)」

엇, 또 나타났다. 이번에야말로 사라지기 전에 누르려고 했는데, 손을 들자마자 다시 휙 사라졌다. 이게 뭐야, 떴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거의 깜빡거리는 수준이잖아!

「루에이리를 호감 대상에 추가하겠습니까? (0/3)」

시스템이 아무리 얄미워도 백작을 포기할 순 없었다. 나는 가만히 허공을 노려보며 글씨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나타나자마자 눌렀다. 아니, 누르려 했다. 미친, 또 사라졌어!

“예에, 예. 그래서 저희도 이만 돌아가려 했는데 백작님을 만나 뵐 줄은 몰랐습니다. 요새 마을에 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있어서요. 다들 예민한 시기라, 관대히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 경감님께서 사명감 하나는 대단하셔서…….”

“좋은 말로 할 때 이거 놓게, 제프리.”

저쪽에서는 아직 아드리안을 본다 만다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는데,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백작을 호감 대상에 추가하는 데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저러다 제프리 말대로 돌아가겠지.

“허허, 경감님께선 아직 의문이 풀리지 않으신 듯한데.”

이번엔 호감 대상 추가 버튼이 시야 오른쪽 밑에 번쩍 나타났다. 요거, 요거! 눌려라!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희가 설마하니 그 팔츠그라프 백작님 일가족을 의심할까요. 감히…….”

왼쪽 위! 얍, 얍!

“글쎄요. 의심받을 정황이라도 있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저희 가문은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자선 사업에 헌신하고 있거든요. 어째서 살인 사건에 이름이 오른 것인지…….”

“참 이상한 일이군요, 백작님.”

“뭐가 말입니까?”

“저희는 백작님 앞에서 살인 사건 때문에 왔다곤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

이번엔 중앙! 눌려라, 눌려!

하, 미친. 또 사라졌어. 너무 짧잖아!

“허허. 경감님. 아이다 마을은 제가 주로 후원하고 돌보는 곳입니다. 거기에 어떤 일이 있는지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지요.”

한 번만 걸리라는 마음으로 시야 여기저기를 미친 듯이 쿡쿡 찔러 봤는데, 방금 눌렀던 곳에 창이 쓱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진짜 혈압 올라…….

“글쎄요. 그래서일까요? 아니면…….”

“경감님, 진짜 왜 이러십니까. 이러다 큰일 나신다고요! 알아낼 건 다 알아낸 것 같으니 어서 돌아가시죠!”

“그래, 가지. 알아낼 건 다 알아낸 것 같으니.”

“……앨번, 손님들이 가신다니 대문까지 잘 모시도록 하게.”

약속이라도 한 듯이 경감과 백작이 동시에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작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나를 조롱하듯 간헐적으로 여기저기서 뜨던 호감도창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언제 또 나타날까, 전투적으로 손가락을 든 채 한참 기다리다 뒤늦게 백작이 떠난 걸 알았다.

백작이 가 버렸어? 그럼 끝난 거야? 진짜? 벌써? 이렇게 허무하게? 하, 이번에야말로 백작을 사로잡고 싶었는데…….

나는 잔뜩 실망한 채 손가락을 내렸다. 정말이지 되는 일 하나 없다. 백작을 호감 대상으로 추가하긴커녕 경감도 가 버리다니. 그사이 그들이 나눈 대화는 오른쪽 귀로 들어왔다가 왼쪽 귀로 흘러 나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힐다.”

“…….”

“힐다, 힐다!”

“네, 네?”

“힐다, 대체 아까부터 뭘 하는 거니? 불러도 대답하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자꾸 허공만 찔러 대고. 괜찮은 게야? 혹시 경감 때문에 크게 충격받은 건 아닌지…….”

정신을 차려 보니 앨번이 무척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백작이 명한 대로 경감을 배웅하러 가려다가 나를 보고 멈춘 것 같았다. 내가 깜짝 놀라며 두 손을 저었다.

“아녜요! 괜찮아요! 날파리가 주변에 얼쩡거려서요. 잡으려고 하다가.”

“그래, 그럼 다행이구나. ……저, 힐다. 아까 경감께 한 언행 말이다.”

“참, 그거 말인데요. 죄송해요. 저는 이곳 하인일 뿐인데,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아니. 그런 게 아니다. 힐다 네가 그렇게 말해서 놀랐다만, 솔직히 속은 시원했단다. 내가 할 말을 대신해 주어 고맙다.”

주의를 들을 각오를 했으나, 막상 혼날 때가 되자 가슴을 졸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고맙다는 감사 인사가 돌아오자 내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앨번은 살짝 멋쩍은 듯 웃어 보이더니,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로 하자고 속삭이고 자리를 떠났다.

왠지 모르게 그의 어깨가 조금 올라간 것 같았다.

“누구세요?”

방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경악해서 물었다. 이제껏 ‘누구세요?’는 아드리안의 방에서 절대 내뱉을 일 없는 말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우선 악마는 냉혹하고 먹잇감과 어울리려 들지 않을뿐더러, 그럴 만한 신분도 아니기 때문이다. 친한 인간이라도 생기면 오히려 방해될 테니 일부러라도 안 만들 테고. 그래서인지 아드리안이 없는 빈방에 낯선 소년이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게 무척 이상해 보였다.

유령은 아니겠지?

“제, 제 이름은 클로드입니다.”

다행히 유령은 아니군. 살짝 안심한 나는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나이는 많이 봐줘야 아홉이나 열 살쯤. 성장기에 영양 섭취를 제대로 못 한 듯 깡마르고 허약해 보였다. 다시 말해서 병약한 아드리안이라도 한 손으로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해 보였다. 어, 저거 설마 먹잇감 아냐?

“도, 도련님께서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셔서요.”

소파에서 엉거주춤 일어난 채,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지도 못하고 어지럽게 방황했다. 클로드……. 못 들어 본 이름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일하는 하인이 아니란 소리였다.

설마 했는데 진짜 먹잇감이었어? 바깥에서 데려올 정도면 작정한 모양인데. 이 악마, 부지런하게 살 거라더니 이제 본격적으로 힘을 되찾으려나 보다.

“저는 돈, 돈 때문에. 가족을 위해 벌어야 해서 여기 와 있어요.”

죽음을 앞둬서인지 클로드는 심하게 떨고 있었다. 불쌍하게도. 가족들을 먹여 살릴 길이 없어서 목숨을 팔아 버린 모양이다. 아드리안이라면 후한 값을 쳐줬겠지. 어려 보이는데 정말 안 된 일이었다.

이런 이른 아침에 들인 걸 보면 내가 보기 전에 재빨리 쓱싹할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악마답지 않게 부지런하기도 하지. 나는 조금 숙연해져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군요. 편하게 앉아 있어요. 도련님께선?”

“잠깐 필요한 물건을 가지러 가셨어요.”

흉기를 가지러 간 모양이다. 무거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가족이 누구누구 있는지 물어봐도 돼요?”

“저, 저보다 어린 여동생이 하나……. 부, 부모님은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신 부모님, 어린 여동생, 몸값. 몇몇 키워드들로 내 머릿속엔 낡고 어두운 시나리오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어린 여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전전하다 끝내 몸을 팔게 된 소년. 여동생의 손엔 오매불망 기다리던 오빠의 목숨값만 덩그러니 남게 되는데, 그 돈을 노리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으니. 피도 눈물도 없는 포주는 돈을 뺏을 뿐 아니라 여동생까지 팔아 치우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는데…….

“정말 괜찮겠어요? 여동생이 많이 보고 싶어 할 텐데.”

“괜찮아요. 제가 갖다준 돈으로 동생이 해, 행복하기만 하다면요. 전 아무래도 좋아요.”

“그래도 힘들어할 텐데요.”

“도련님께서 자, 자비롭게도…… 남은 제 여동생도 돌봐 주시기로 했어요. 걱정하지 말고 떠나도 된다고 하시면서…….”

처연하게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니 동정심이 배가 되었다. 잠깐만, 감정 이입하면 안 되는데.

“저, 주제넘을 수도 있겠지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아무리 잘 돌봐 준다 한들 남이잖아요. 의지하던 오빠 없이 어린 동생이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겠어요?”

“동생이 절 원망해도 좋아요. 제가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니까. 저는 어딜 가든 좋아요…….”

이건 그저 데이터일 뿐이다. 기획자가 입력한 사연일 뿐이다. 아드리안이 클로드를 죽이는 건 픽셀끼리 죽이는 것뿐이야. 아드리안이 사람 죽이는 거, 어제도 봤잖아? 순식간에 끝날 거야. 나는 생존만 생각하면 되는 거야. 데이터다, 데이터다…….

“하지만 동생이 절 너무 보고 싶어 하진 않을지, 가끔은 걱정이 돼요. 처, 천둥 번개를 무서워하는데.”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온통 여동생 걱정뿐이었다. 잠깐만. 나 지금 픽셀한테 감동한 거야? 하 씨, 감정 이입 안 하기로 했는데. 저건 픽셀일 뿐인데.

“클로드, 이게 바로 내가 말한…….”

그때 창가 쪽 방문이 열리더니 아드리안이 나타났다. 나는 재빨리 달려가 그의 팔목을 턱하니 잡고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도련님! 저 좀 보시죠.”

“힐다? 언제 왔…….”

“잠깐 얘기 좀 해요, 도련님. 후…….”

당황한 아드리안을 도로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건 무척 쉬웠다. 우선 아드리안을 벽으로 밀어붙이고, 한 손으로 벽을 탁 짚은 뒤 숨을 골랐다. 그래 봤자 키 차이 때문에 어깨 옆을 짚은 것밖에 되지 않았지만.

“무슨…… 일이야?”

「아드리안이 박력 있는 예비 오른팔에게 놀라고 있습니다.」

「아드리안의 호감도가 10 올랐습니다.」

「현재 아드리안 호감도 lv.1 (74/400)」

“저 방에 있는 클로드 말인데요. 도련님, 제가 사정을 좀 들어 봤는데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뭐가?”

“쉬이잇! 쉬잇! 목소리가 크잖아요, 도련님. 도련님의 중요한 비! 밀! 을 지키기 위해 제가 이렇게 방 안에 모시고 들어온 건데 큰 소리로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와, 저 엄청 충성스럽죠? 이렇게 충성스러운데 제 부탁 하나 정도는 들어주실 거죠? 네?”

“아아, 간지러워. 힐다.”

내 손에 입이 틀어막힌 채 아드리안이 작게 웃었다. 휘어지는 눈매가 어여쁠 만큼 해사했는데……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나는 그에게 더 가까이 가면서 속닥거리는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도련님께서 직접 사냥감을 데려온 건 칭찬해 드릴 만하지만, 아무래도 잘못 고르신 거 같아서요. 저 작은 애를 죽여 봐야 먹을 게 없을 것 같거든요. 살 없는 치킨, 토핑 없는 피자. 뭐 그런 거죠.”

“그래, 클로드가 작긴 하지.”

“그쵸? 그렇죠? 사실 사정도 되게 딱해요. 글쎄, 어린 여동생이 있다네요. 클로드가 죽으면 이 세상에 혼자 남게 되고요. 세상이 어린 여자애한테 어떤 가혹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잘 아실 거 아녜요? 우리 저택 하인 리스트를 떠올려 보셔요. 온갖 핑계 대 가며 이놈도 안 된다, 저놈도 안 된다 하셨잖아요? 그런데 저런 불쌍한 애는 죽이겠다니, 말도 안 돼요.”

“아, 힐다, 간지러우니까 조금만 떨어져…….”

“거기다 클로드는 너무 착해요. 악마에게 목숨을 팔았으면서 끝까지 여동생 걱정뿐이라니까요. 굳이 저 불쌍한 어린애를 죽일 필요 없이 죽여도 싼 사람을 같이 찾아봐요. 우리는 어쨌든 악마의 힘을 되찾아야 하는 거니까 악랄하고 악의에 찬, 건강한 사람일수록 더 큰 힘이 돌아오지 않겠어요? 저 사실 나쁜 놈 많이 알아요. 죽일 놈이 막 쏙쏙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니까요? 어때요, 쩔죠? 대단하죠? 그러니 그 칼 좀 내려놓으시고 클로드는…….”

무심코 아드리안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속사포처럼 쏘아 대느라 미처 보지 못했는데 그가 들고 있는 건 칼이 아니었다.

물감……?

“도련님! 그, 그게 말씀하신 물감인가요? 아까 가지고 나오신 거 맞으시죠?”

쿵쿵쿵! 밖에서 클로드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입을 틀어막은 내 손 위로 아드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해한 거 알았으면 이만 손 치우라는 뜻이었다.

당황한 내가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떨어뜨리자 아드리안이 자세를 바로 했다. 내가 막무가내로 밀치고 들어가는 바람에 구겨진 옷매무시를 다듬고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어린이날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이처럼 기대에 부푼 클로드가 있었다.

“클로드, 자. 네가 가지고 싶다던 유화 물감이야.”

“와…….”

“메일런 산 고급 안료로 만든 물감이지. 실제로 그 물감을 써 본 화공에게 들어 보니 선명하고 깊이 있으며 중후한 색상이 난다고 하던데. 혹시 퇴색이 잘 되거나 하면 곧바로 내게 알려 줘. 물감의 구입처가 영 못 미더워서 말이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도련님.”

“그래, 아카데미 입학을 축하한다.”

유화 물감 세트를 받아 든 클로드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더니 방을 떠났다. 이 모든 상황을 뻘쭘하게 지켜보고 있던 나는 마찬가지로 뻘쭘하게 처음에 잡고 들어왔을 때부터 놓지 않았던 아드리안의 팔을 살며시 놓았다. 그의 얼굴을 감히 올려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와, 이렇게 뻘쭘할 수가…….

“그래서 무슨 오해를 한 거야? 들어나 보자.”

가벼운 한숨과 함께 그가 물었다. 그러니까 클로드는 아드리안이 후원하는 화가였던 모양이다. 후원을 돈이라고 한 거고, 아카데미 입학하는 걸 떠난다고 한 거고……. 이걸 어떻게 설명한담.

내가 아무 말 못 하고 우물거리고 있자 아드리안이 창가로 다가갔다. 창가에는 그새 그가 죽여 놓은 화분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내가 클로드를 죽이는 줄 알았구나.”

담담한 목소리였는데 어딘지 씁쓸하게 들리기도 했다. 애꿎은 사람을 의심한 것 같아 미안해져서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시선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하아, 네. 솔직히 그래요. 오해해서 죄송해요. 어제 마을에서 그런 일이 있어서 무심코 짐작해 버리고 말았어요. 설마 후원받는 걸 그렇게 묘사할 줄은 몰랐거든요. 창백히 질려서는, 떨면서 더듬더듬 말하기에…….”

“클로드는 원래 여동생이 아닌 여자 앞에서 말을 더듬어. 말주변도 심하게 없어지지.”

“그…… 렇군요. 전혀 몰랐어요. 그, 근데 어린 피후원자한테 되게 잘해 주시네요. 놀랐어요.”

“정확히는 저 아이가 미래에 그려 낼 그림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거지. 클로드는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거든. 몇 년만 지나면 숨겨져 있던 재능이 빛을 발할 테고, 그 빛나는 재능이 그려 낸 작품은 죄다 내게 올 테지.”

“그, 그렇군요. 참 잘됐어요.”

“힐다. 네겐 내가 모든 인간을 죽이려고 드는 악마로 보이는 거야?”

갑작스러운 물음에 입이 딱 닫혔다. 그는 손 쓸 도리 없이 죽어 버린 꽃을 들여다보다가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보인다고 하면 섭섭해할 것 같고, 안 보인다고 하면 날 우습게 보냐고 할 것 같고. 그래서 난 의도를 알 수 없는, 중의적인 대답을 돌려주기로 했다.

“그럼 아니에요?”

질문으로 되돌려 줄 줄은 몰랐는지 아드리안이 팔짱을 낀 채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 대다수 인간을 보면 그런 감정을 느끼긴 하지.”

“…….”

“하지만 모두에게 그런 건 아니야.”

자기 진정성을 알아달라는 듯이 말하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어쨌든 그게 그거 아닌가?

“힐다, 너는 지나치게 물러. 클로드의 사연이 딱하니 죽이지 말자니. 어제의 교육은 실패였던 모양이야. 일부러 사람 죽인 척한 보람도 없이.”

“무르다니, 지금 누가 누구한테…… 아니, 근데 뭐요? 사람 죽인 척요?”

“응. 네가 순진하게 놀랐던 그때 말이야.”

태연한 표정에 어이가 함께 가출해 버렸다. 하도 기가 막혀서 목이 밧줄로 매인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참 나, 참 나. 바람 빠진 웃음이 몇 번이나 터졌다.

“그, 그럼 그 골목에서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나오신 게 아니란 말씀이세요? 그럼 그 핏물은 다 뭐예요?”

“힐다,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사람을 허술하게 죽이진 않아. 혈액이야 휴버트의 진료실에 넘치도록 있고.”

“아니, 왜요? 왜 그렇게까지 번거롭게…….”

“네가 영 긴장감 없어 보여서 말이야. 네가 해야 할 일이 뭔지, 내 곁에 있으려면 어떤 일을 감당해야 할지 한 번쯤 실감할 필요가 있었어.”

“와,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생각보다 잘 속던데, 힐다. 밖에 내놓기 무섭게.”

나직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배신감에 파들거리는 나를 호숫물처럼 맑고 푸른 눈이 이채를 띠고 훑어봤다. 도대체,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지 따지고 싶었다. 바로 좀 전에 무서운 경찰 앞에서 악마를 감싸 주고 오는 길이었는데! 나쁜 짓 안 한 거 알았으면 그렇게 쫄 필요도 없었던 거였잖아!

어? 아니, 잠깐.

“잠깐만요. 도련님이 아니라면, 어제 마을에서 일어났다는 살인 사건은 뭐예요?”

“응? 마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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