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상사에게 사랑받을수록 고달픈 법이다.
잠에서 깨자마자 나는 멀뚱멀뚱 흰 천장만 바라보았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더라.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천천히 기억을 돌려 보았다. 독약, 지하 감옥, 협박, 예비 오른팔……. 덜컥거리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며 나는 눈을 감았다.
아냐, 이건 잘못된 기억이다. 분명 꿈이겠지. 내가 악마 따위의 오른팔이라니, 선량한 시민일 뿐인 내가. 이건 말도 안 되지. 그래, 역시 꿈이야. 내가 뭘 할 줄 안다고 악마가 오른팔로 삼아? 아닐 거야.
나는 애써 침착해져서 상태창을 눌러 보았다. 제발, 내 눈에 보이는 게 ‘악마의 하수인’이길. 어제 일이 꿈이길…….
「힐다
직업 : 하인
호칭 : 악마의 예비 오른팔
레벨 : 11
보유 스킬 : 2개」
“아아아안 돼…….”
꿈 아니었잖아. 진짜였잖아. 이렇게 선량한 시민인 내가 악마의 오른팔이라니, 인간 제물을 찾아서 갖다 바쳐야 하다니.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한참 괴로워하다가 한숨 쉬며 팔을 툭 내렸다.
게임에서 나가고 싶은데, 나가려면 게임의 메인 무대인 이 저택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데, 점점 이 저택에서 떠나고 싶어졌다. 매일 생명이 깎여 나가는 위협을 받는 것치고 일급도 짜고 말이야. 어제는 지하 감옥 체험까지 했잖아? 노동자 복지 및 배려가 아주 쓰레기다, 이 말이야.
하지만 여기서 떠나면 난 노숙자 신세겠지. 저금해 둔 돈도, 가진 돈도 없는 데다 실업 급여도 없을 테니까. 게임 안에서 현실보다 더한 가난을 맛보다니. 돈지랄은 꿈도 안 꿀게요. 생명의 위협 없이 먹고살게만 해 주세요…….
“내 힘을 되찾게 해 줄 먹잇감을 데려와. 그럼 믿어 주지.”
내 생각을 비웃듯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물을 어디서 무슨 수로 데려와? 저택 사람을 냅다 끌고 갈 수도 없고, 길 가는 사람 기절시켜서 끌고 올 수도 없고.
암담하기 짝이 없지만, 그보다 더 암담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곧 그 아름답고 음산한 악마를 만나러 가야 하는 현실이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돼 버린 걸까. 게임에서 깨어나자마자 약 배달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밀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까. 아예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래도 날 죽이려고는 하진 않았으니까…….”
나직이 읊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그것만이 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드리안이 진심으로 날 죽이고 싶었다면 둘만 남아 있을 때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을 거다. 연약한 인간 따위 빠르게 쓱싹하고 악마의 힘이나 조금 더 되찾고 말았겠지. 굳이 번거롭게 독약으로 두 번이나 시험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흥미를 결정적으로 끌어낸 게 ‘투시자의 눈’인 모양인데, 그 외에 다양한 스킬로 자신을 도와줄 거로 생각했다면 그거야말로 큰 오산이다.
저는요, 이 게임에 잡혀 들어온 불쌍한 유저일 뿐이고요, 이 망겜은 레벨도 안 오르고 스킬도 잘 안 줘서요. 새 스킬 받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어요……. 왠지 변명할수록 처량해지기만 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이제 남은 희망은 호감 작업뿐일까? 아이작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걱정 반, 궁금증 반으로 나는 부탁 목록부터 눌러 보았다. 이때 내 얼굴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불쌍하기 짝이 없는 이모티콘 (´;ロ;`)으로 대신 설명할 수 있었다.
『에밀리 : (´._.`) 힐다를 걱정하며 기다리는 중……. 몸살 기운. lv.4 (0/40)
아이작 : ヽ(o´∪`o)ノ 짝사랑 상대 창문 앞에서 구애의 춤을 추는 중……. lv.3 (20/30)』
에밀리, 어제 내가 끌려가는 걸 보고 울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더니. 그거 때문에 몸살까지 온 거야? 에밀리에겐 염려스럽고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지만, 바로 그 밑에 아이작의 상태를 확인하자 지옥불을 씹어 먹은 것 같은 분노가 끓어올랐다.
저 새끼, 저택에 올 생각이 며칠째 티끌만큼도 없잖아? 구애의 춤이라니? 지가 무슨 학이야? 공작새야? 이쯤 되면 내 돈 떼먹고 도망간 건 아닌지 의심될 지경이다. 과일 장수한테도 사기 치던데, 뭔들 못하겠어.
아이작을 기다릴 바엔,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내가 직접 마을 가서 연필 사는 게 훨씬 빠를 것 같다. 간 김에 아이작 찾아서 강도 5로 일 시키는 벌도 내려야지.
잔뜩 화가 난 나는 (`ヘ´) 표정으로 옷을 갈아입고 숙소를 나섰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내가 나오자마자 숙소 앞에 삼삼오오 모여 재잘거리던 하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빛을 피해 사사삭 구석으로 사라지는 바퀴벌레 떼를 보는 것 같았다.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으로 향하는 내내 지나가는 하인들이 숙덕거리며 나를 돌아봤다.
하나같이 두려워하면서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는 눈빛이었는데, 그래도 우르르 몰려와 캐묻지 못하는 걸 보면 윗선의 지시가 따로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드리안이 어떻게 뒤처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무리는 잘 안 된 게 분명했다. 으, 아직 식사하기 전인데 체할 것 같은 기분이야.
“오, 이게 누구야. 힐다 아냐?”
비실비실 걸어서 저택에 들어서려는데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다들 네 얘기만 하던데. 마님과 도련님을 독살하려 했다지? 정말 대단해. 이 저택 인간은 죄다 겁쟁이뿐이라 답답했는데, 너처럼 화끈한 여자가 있을 줄은 몰랐어.”
“네에……. 그런데 저 지금 부엌에 가야 해서요. 좀 비켜 주시면…….”
“잠깐, 잠깐. 이렇게 그냥 가 버리면 섭섭하지.”
갑자기 나타난 덩치가 산만 한 사내는 내 앞을 가로막고 도무지 비켜 주질 않았다. 오른쪽으로 쏙 빠지려고 하면 오른쪽으로 한 발짝 성큼하며 막았고, 왼쪽으로 가는 척하면서 오른쪽으로 다시 가려고 해도 또다시 턱 막아섰다.
“좀 비켜 주시죠. 저 부엌 가서 약 챙겨야 하거든요.”
나는 얼굴을 잔뜩 구기고 짜증 나는 티를 팍팍 냈다. 악마 약 챙겨 줘야 하는데, 안 그래도 하기 싫은데 가로막히기까지 하니 짜증이 더 치솟아 올랐다. 도대체 누구인가 싶어 나는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굵은 눈썹 밑에 자리한 녹색 눈동자가 나를 핥듯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내 눈은 도로 내려가 그의 갈라진 턱에 고정됐다. 중간이 움푹 들어간 게, 꼭 엉덩이처럼 생겼다.
“약? 독약 말이야?”
“저기요. 뭔가 단단히 오해하신 모양인데.”
“너 같은 여자가 평범한 약 심부름 따위 할 리가 없잖아. 나는 얌전하고 순종적인 거보다 너같이 망아지처럼 날뛰는 천방지축 여자가 더 취향이더라. 길들이는 맛도 있고 말이야.”
“이거 놔요!”
미친놈이 내 팔목을 붙들고 혀를 할짝거렸다.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 여자 취향을 주르륵 늘어놓으며 말이다.
여기요! 게임에 성희롱범이 있는데요! 말 그대로 왕짜증 난 나는 그에게 잡힌 팔목을 확 뿌리쳐 버렸다. 그냥 손만 떼어 낼 생각이었는데, 예상외로 남자는 휘청거리며 뒤로 밀려나기까지 했다.
뭐야, 저 근육 전부 장식이야? 겨우 몸을 추스르는 남자를 나는 다소 황당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힐다의 몸이 다년간의 잡초 뽑기와 창문 닦기, 그 외 수많은 집안일로 다져졌긴 하지만, 남자 하나 거뜬히 떼어 낼 수 있을 정도인지는 몰랐다.
“호오, 정말 흥미로운데. 재미있어. 바락바락 대드는 암컷을 채찍과 손맛으로 길들이는 게 진짜 재미지. 너는 어떤 표정으로 복종할지 꼭 보고 싶은데, 어때? 따분한 일 그만두고 나와 환상적인 시간을 보내는 게.”
하지만 그게 조금 잘못된 지점을 건드렸는지, 사내는 벌레 등껍질처럼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를 호감 대상으로 지정해 죽을 때까지 강도 5로 뺑뺑이 돌릴까 고민했다가 빠르게 접었다. 이놈한텐 호감 작업할 연필 한 자루도 주기 아까우니까.
“힐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레티샤 님이 찾으셔! 어서 들어와!”
“쳇.”
이 광경을 보고 급히 나온 듯 에밀리가 멀리서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하인장 이름이 나와서인지 그는 하릴없이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러나 걸음을 재촉해 에밀리에게 가는 도중에도 음흉하고 시커먼 시선은 거미처럼 들러붙었다. 모퉁이를 돌고 나서야, 집요한 시선을 끊어 낼 수 있었다.
“힐다, 어디…… 다친 덴 없어? 괜찮아? 지하로 끌려가던 거 보고 얼마나 걱정했었다고.”
부엌에 들어가기 전 에밀리가 날 붙잡았다.
두 손을 따뜻하게 꼭 잡으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은 부탁 목록에 있던 이모티콘과 완전히 똑같은 얼굴이었다. 지하 감옥에 끌려가던 때만 떠올리면 아직도 손이 덜덜 떨렸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끌려가면서 어떤 거래를 했는지 말하면 에밀리가 얼마나 힘들어할지 상상할 수 없었다.
“응, 그냥 작은 오해가 있었던 거뿐이야. 금방 아니라는 거 알고 도련님이 구해 주러 오셨었어.”
사실 반협박성 스카우트였지만.
“정말 다행이야. 도련님께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응, 울지 마. 걱정도 하지 말고. 그런데 아까 그 엉덩이 턱은 누구야? 기억이 잘 안 나서.”
“어, 엉덩이 턱……. 푸훗, 그 사람, 마구간지기 제드잖아. 그러잖아도 너 건드리는 거 보고 놀라서 달려간 건데. 그 사람한테 당한 여자 하인들이 많으니 조심해야 해.”
“당하다니?”
“맙소사, 힐다. 기억 안 나? 저 사람 여자 하인들 꼬셔 내서 강제로 나쁜 짓 하기로 유명하잖아. 그러다가 애를 가지기라도 하면 시치미 뚝 떼고 말이야. 몰래 애 떼는 수술받았다가 죽은 친구들이 얼마나 많았니?”
뭐! 말하는 폼이 범상치 않다 싶었는데 강간범이었어?
“저런 인간이 어떻게 이 저택에 있을 수 있어? 말도 안 돼.”
“처벌하고 싶어도 증거가 없었거든. 그래도 네 명이나 죽어 나가는 걸 보고 도저히 안 되겠다고, 레티샤 님이 해고 통지를 보내신 모양이야. 하지만 아직 가지 않겠다며 버티는 중이래.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고, 해고당할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냥 내쫓아 버리면 되잖아?”
“그렇긴 하지만, 누구 하나는 마구간을 관리해야 해서 말이야. 후임으로 온 마구간지기를 미친 듯이 괴롭혀서 쫓아내는 바람에 그것도 여의치 않아. 알잖아, 백작님 말이 다루기 엄청 까다로운 거. 이미 여러 명이 어떻게든 대신해 보려고 붙어 봤는데 쉽지 않았나 봐.”
“미쳤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순 악질이잖아.”
“레티샤 님은 돈을 후하게 쳐서라도 내보내실 생각이신 것 같아. 소란 일으키지 말고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어두운 얼굴로 얘기하는 걸 보니 이 저택의 적잖은 골칫거리인 듯했다. 그래도 인사권자인 레티샤는 두려워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딸인 에밀리나 카타리나에게 손대진 않겠지.
“힐다…… 왔니?”
내가 부엌에 들어서자 삽시간에 공기가 어수선해졌다.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하던 말을 멈추고 내게 시선을 모으는데, 할 말이 입 안에 우글거리는 것처럼 입술을 들썩거리고 있었다. 에밀리만이 내 지지대가 되어 주겠다는 듯 팔을 꼭 잡아 줬는데, 얇고 가는 손이 이토록 든든하게 느껴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여기서 빨리 나가 주는 게 낫겠다 싶어 에밀리 손 위에 손을 포개어 꼭 잡아 준 뒤, 아드리안의 약을 담기 위해 쟁반을 꺼내 들었다. 약을 빨리 챙겨서 나가려고 보관함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레티샤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힐다! 괜찮다. 도련님의 약은 내가 챙겨 드리마.”
뭐지? 이제까지 약을 빨리 챙겨 드리라는 재촉은 받았어도 그 반대는 없었는데. 나는 엉거주춤 서 있다가 수프를 담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럼 전 식사 준비를…….”
“아니, 아니! 식사도 우리가 따로 준비할 테니 너는 바로 도련님께 가면 돼. 앞으로도 쭉, 매일 그럴 거란다.”
“네, 그럼 물이라도 제가 준비할게요.”
“넌, 아무것도 손대지 마!”
벽력처럼 내질러진 고함이 주방에 찬물을 끼얹었다. 갑자기 큰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란 나머지 쟁반을 손에서 놓치기까지 했다. 고요한 공기 속에 쟁반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만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내가 얼어 버린 채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보자, 레티샤는 달달 떨리는 볼을 숨기지 못하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히, 힐다. 네게 어제 큰일이 있었잖니. 아직 힘들 텐데 네게 일을 시킬 수는 없지.”
먹거나 마실 것에 손댔을 때 레티샤가 보인 반응에, 나는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드리안이 뭐라고 하면서 감옥에서 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인들의 내부 재판에서는 이미 유죄 판결을 땅땅 받아 버린 거다.
독살 사건의 진범도 찾을 생각이 없겠네? 확신범이 여기 떡하니 있으니 말이다.
“저, 레티샤 님. 말씀하신 대로 하인들의 숙소를 다 뒤져 봤습니다만, 독약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처리했거나, 아니면…… 아주 숙련된 암살자 같습니다.”
내 의문에 대답이라도 해 주듯, 마침 보초병이 들어와 레티샤에게 속닥거렸다. 그러면서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를 응시했다. 하인들 숙소를 아무리 뒤져 봤자 독약이 발견될 리가 없지. 범인은 고귀한 도련님이시니까. 나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 혹시 도련님 방도 뒤져 보셨나요? 거기서 독약이 나올지도…….”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니, 힐다! 도련님께서 마님과 함께 마실 차에 독약이라도 탔다는 거니! 맙소사, 분명 혐의점이 있던 네게 큰 자비를 내려 주신 은혜도 모르고!”
희대의 배신자를 보는 듯한 눈초리가 사방에서 쏟아지자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네! 바로 그거예요! 그 악마가 어머니랑 함께 마실 차에 독을 탔다니까요? 목 끝까지 올라오는 말을 겨우 집어삼키면서 나는 주워 든 쟁반을 꽉 쥐었다.
손에 힘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손잡이에 달려 있던 작은 장식이 순식간에 뚝 떨어져 버렸다. 쟁반을 훼손했다며 시스템이 손해 배상 10골드를 청구했지만, 나는 애써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 진정하자. 진정.
“……큰 소리 내서 미안하다, 힐다. 나도 놀라서 그래, 놀라서. 아까 말했듯이 약과 식사는 우리가 준비할 테니, 너는 도련님께 가 보렴. 오늘 일찍 일어나셔서 정원에 계실 거란다. 늘 계시던 곳이니 알고 있지?”
“네.”
“그래. 어서 가 보렴.”
충격이 크긴 했는지 레티샤는 파리한 얼굴로 창가까지 걸어가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런 그녀에게 억울하다고 말해 봐야 더욱 참신하게 괘씸한 하인이 될 뿐이니,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흑흑, 그래도 억울해. 내가 독 탄 거 아닌데.
다소 풀 죽은 채 저택을 나섰을 때였다. 언젠가 타 본 적이 있는 으리으리한 마차가 입구 앞에 세워져 있고, 백작 부인이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오르고 있었다. 아드리안 앞에서 웅크린 채 벌벌 떨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다행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아직 창백하신데, 이른 아침부터 어딜 가시는 걸까?
“어…… 도련님?”
마차 문이 닫히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무심코 시선을 돌렸는데, 정원 근처에서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고 말았다. 뭐지, 진짜 아드리안이잖아.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나 비비고 다시 봤지만, 아드리안이 맞았다. 심지어 내가 저택에서 나오기 한참 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 같았다.
다행히 백작 부인은 눈치채지 못한 듯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하염없이 마차를 바라보는 아드리안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곧 출발한 마차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나는 끝까지 마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아드리안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대체 어떤 마음으로 백작 부인을 보고 있는 건지, 하도 창백하고 무표정해서 생각 읽기가 쉽지 않다.
“……어머니께선 잠깐 별장에 다녀오신다고 해. 요즘 부쩍 불안해하셔서.”
말을 붙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아드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별장이라면 언제 돌아오시는 거예요?”
“그건 잘 모르겠네. 곧 생일이니 어쩌면 좋은 선택일지도.”
악마에게도 생일이 있겠구나. 그나저나 백작 부인, 별장 가서도 염소 목 잘라서 안고 있으면 안 될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인형을 더 빨리 만들 걸 그랬다.
“보아하니 힐다 너도 고달픈 아침을 보낸 모양이야.”
“네?”
“얼굴에 다 쓰여 있잖아.”
차가운 손끝이 내 미간에 닿았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던 모양인데, 악마가 손을 댈 줄은 전혀 몰랐던 터라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히익. 나도 모르게 바람 새는 소리를 내자, 그 때문인지 아드리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윽고 손을 거둔 그가 등을 돌리고 정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래서, 죽일 인간은? 데려왔어?”
“아니, 어제 말씀하셔 놓고 벌써요?”
오전에 일 지시해 놓고 점심시간 끝나자마자 마무리됐냐고 물어보는 팀장을 다시 만난 것 같아서 순간 울컥했다. 이런 악덕 상사 같으니라고.
“나는 성미가 급해.”
“도련님, 아무리 건강과 힘을 되찾기 위해서라고 해도 그렇지, 죽일 만한 인간을 하루아침에 대령하라뇨. 피치 못하게 도와드리게 되긴 했지만, 제가 선량한 소시민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선 안 돼요. 도련님, 힐다는 선량한 소시민이다. 눈 떴을 때랑 점심 식사 후, 그리고 자기 전에 세 번씩 되뇌도록 하세요.”
“하지만 대강이라도 구상은 해 봤을 거 아냐. 언제든 네가 제물을 대신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거, 모르지 않을 텐데.”
부드러운 음성에 잠깐 혼이 빠져 있었는데, 마지막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참, 그랬지.
“도, 도련님! 마, 말은 끝까지 들어주셔야죠. 벌써 물어보셔서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생각 안 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녜요.”
“그래? 그래서 언제 데려올 건데? 나는 너로도 충분하긴 해.”
와, 저 말을 당사자 앞에서 하다니 인성 보소……. 역시 악마에게는 동업자 사이의 신뢰나 배려 같은 걸 기대하기는 무리인 모양이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말고요, 도련님. 잠깐 이거 한번 봐 주세요. 제가 어젯밤에 돌아가는 길에 마침 이 저택 사람들의 명단을 받아 놨거든요? 누구를 죽이면 좋을지, 의논 한번 해 봐요.”
사실 누굴 호감 대상으로 추가할 건지 고르려고 사진이 붙은 버전으로 미리 받아 둔 건데,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네. 주머니 속에서 명단을 꺼내어 들이밀자 아드리안의 걸음이 멈추었다. 주변에 누가 없는지 잠깐 살핀 그가 종이를 받아 들더니 다른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저택 안에서 찾겠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그렇죠. 어장 속 물고기를 잡는 게 더 쉽지 않겠어요? 그래서 말인데, 이 중에서 죽일 만한 사람을 추려 봤는데요…….”
“앨번은 안 돼, 빼.”
내가 앨번의 이름을 가리키지도 않았는데 아드리안이 칼같이 말했다. 누굴 살려 주자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라서, 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예? 왜요?”
“앨번만큼 눈치 빠르고 행동력 있는 집사 구하기 어려워. 이 저택 하인들을 통솔하는 게 그니까, 앨번은 빼.”
“네? 그런 이유라면 레티샤 님도 제외해야죠. 하인장님 아니면 이렇게나 집안을 섬세하게 살피실 분이 안 계실 거예요. 저희뿐 아니라 마님까지도 얼마나 살뜰히 챙기시는데요.”
나는 얼른 앨번과 레티샤 사진을 찾아 줄을 쭉쭉 그었다. 앨번 밑에 쓰인 수많은 이름을 쭉 훑어보던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엘론, 헤이거, 그리고 클레멘트도 제외해.”
“그분들은 왜요?”
“내가 심사숙고해서 고용한 요리사니까. 특히 헤이거가 만드는 로스트비프에 와인을 곁들여 마시면 일품이지. 엘론은 야채 스튜를, 클레멘트는 생크림 크레페를 잘 만들어. 어머니께서 좋아하는 음식이지. 밖에선 절대 찾을 수 없는 맛을 내는 요리사들이야. 그러니 제외해.”
“그럼 전 에밀리랑 카타리나를 제외할게요. 제 친구들이거든요. 아니면 휴버트 선생님은 어떠세요? 매일 만나는 데다 가까이 올 테니 공격하기에 딱 좋을 것 같은데.”
“주치의를 바꾸면 진찰도 처음부터 새로 받아야 하잖아. 번거로워. 휴버트도 제외하도록 해.”
번거롭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 힘을 되찾는 게 급한 거 아니었나. 되게 주관적이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휴버트 이름에도 줄을 직직 그었다.
“케드릭과 그레이엄도 제외할게요. 얼마나 잡초를 잘 뽑는지, 얘들 없으면 정원 정돈할 때 뽑아야 하는 잡초 양이 무지 늘어날 거예요.”
“그 밑은 어때. 클로이……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인데.”
“클로이는 이불 세탁 장인이에요. 이불 빨 때만큼은 레티샤 님도 함부로 못 건드리시는걸요. 도련님 이불이 항상 하얗게 유지되는 데는 이 아이 공이 무척 크다고요. 매튜? 이 사람으로 할까요? 다른 나라에서 온 생김새라 완전 딱인데.”
“매튜는 내가 후원하는 바이올리니스트야. 저택엔 잠깐 머무를 뿐이고 곧 떠날 텐데, 재능 많아. 이 나라 음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인물이야. 안 돼. 그 밑은?”
“누구요? 설마 카롤리나요? 얜 절대 안 돼요. 친동생이랑 항상 붙어 다녀서 빼내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화장실도 같이 가는 사이인걸요. 그 밑에 레너드는 어떠세요?”
“그는 솜씨 좋은 정원사야. 관엽식물 가지치기를 그토록 보기 좋게 해내는 정원사도 드물지. 나무와 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볼 때마다 나무를 안고 있던걸. 그 모습에 나조차 무척 감격하고 말았지. 식물의 친구를 죽이자고 하다니, 힐다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스러워.”
“참 나, 누구 죽일지 생각해 보라던 건 도련님이시거든요. 그럼 전 얘요. 얘 뺄게요.”
우리는 어느새 ‘누구를 죽일지’보다 ‘누구를 죽이지 않을지’ 골라내는 데 골몰했고, 경쟁적으로 이름을 지워 갔다. 이 사람은 이래서, 저 사람은 저래서……. 온갖 다양한 이유로 빼다 보니 어느새 모든 이름에 선이 그어지고 말았다. 이래서야 저택에 제물로 쓸 인간이 하나도 없는 거잖아.
이건 다 아드리안 때문이다. 내가 게임할 땐 이렇게 느슨하고 자비롭게 하지 않았는데! 답답해진 내가 고개를 들었다. 거울을 보듯, 아드리안은 나와 완벽히 일치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힐다 너, 도울 마음이 있기는 한 거야?”
“도련님, 대체 힘 되찾을 생각이 있으시긴 한 거예요?”
아니, 뭐 다 죽이지 말래? 이렇게 다 빼 버리면 대체 누굴 죽이란 거야? 기가 막혀서 정말.
“안 돼. 이렇게는 일 못 해요. 도련님이 죽이면 안 된다고 한 사람 중에 몇 명 좀 빼 보세요.”
“뺄 사람 없어, 안 돼.”
불성실한 악마는 목록을 확인하는 시늉도 하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정 그러면 네가 선택한 사람 중 빼는 게 어때? 대부분 보잘것없는 이유던데.”
“세상에, 보잘것없다뇨. 제가 제외한 사람은 전부 친구이거나 제가 일하는 데 있어서 큰 영향을 주는 사람들이에요. 그에 비하면 도련님이야말로 이유가 보잘것없죠. 고작해야 뭐, 예술? 식물의 친구? 그런 것들이잖아요.”
“그런 것들이라니, 불쾌한데.”
아드리안이 눈썹을 휘어 올리며 대답했다. 평소 같으면 찔끔하며 물러났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매튜 어때요, 매튜? 바이올리니스트? 완전 딱인데, 이 사람으로 해요. 평생 바이올린만 켰으면 세상 물정 잘 모를 거고, 이 저택의 후원을 받고 있으니 위해를 입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못 할 테고, 꼬셔 내기도 쉽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불러내 부지깽이로 뒤통수 쳐서 기절시켜 버려요. 순식간에 쓱싹, 네?”
“말했지. 매튜는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재능을 타고났다고. 예술 없이 사는 삶은 야만인이나 다름없어. 예술가를 핍박하는 인간이야말로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아드리안은 내게 ‘저 야만인 같으니’라는 눈빛을 쏘아 댔다.
“아무리 그래도요, 도련님. 인간적으로 너무 많이 제외하셨잖아요. 목록을 봐요. 도련님이 빼신 게 다 몇 명이에요? 하나, 둘, 셋…… 열…… 마흔……. 와. 100명 넘는 인원 중에 60명이나. 선량한 시민인 저보다 많이 빼셨잖아요. 진짜 악마 맞아요?”
“힐다, 네가 악마보다 더한 거겠지.”
“…….”
“괜찮아. 악마보다 더한 인간은 곳곳에 널려 있으니까. 그중 하나가 된다고 해도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그, 그럼 이 사람은 어때요? 마구간지기요. 듣자 하니 여자 하인들을 막 강제로 건드리고 다닌다던데.”
할 말 없어진 내가 마침 제드를 발견하고 가리켰다. 아까 아드리안이 제드를 제외하라고 했는데 이유가 기억나지 않았다. 같잖은 이유로 빼라는 게 한둘이어야지.
“하긴 강간은 악마들의 지옥에서조차 용서받지 못할 중죄긴 하지.”
“그쵸? 그럼 이 인간을…….”
“하지만 그는 말을 잘 다뤄. 아버지의 말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라 건드렸다간 시끄러워질 거야.”
“아쉽네요. 그럼 일단 보류해 둘게요. 어차피 후임 구하면 떠난다고 했으니, 그때 노려 보도록 하죠.”
그 쓰레기 같은 악질도 할 줄 아는 게 있다고 당장 죽이지 못하다니. 이게 바로 ‘음악으로 보답하겠다’의 마구간 버전인가. 그래, 너는 당분간 말 먹이 잘 챙겨 주는 거로 보답해. 나는 ‘제드’ 이름을 마저 지운 후 다시 목록을 훑어봤다. 혹시 자기가 뺀 사람을 먹잇감으로 간택하진 않을지 경계하는 눈초리가 따라왔다. 끝내 나는 한숨을 쉬며 종이를 접었다.
“협상의 여지가 없으니 저택 안에선 안 되겠네요. 우리 상도를 지켜서, 서로 뺀 사람은 건드리지 않기로 해요.”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그런데 말이죠. 사람을 죽이면 악마의 힘을 되찾는다는 거,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어요? 제대로 알아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예를 들면 제가 사람을 거의 초주검으로 만들어서 데리고 왔어요. 그리고 도련님이 막타를 쳤다면 킬수가 오르나요?”
“막타?”
“마지막 타격요. 막타 분배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거든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드리안과 이런 대화를 나누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사람 일이란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냐. 기껏 사람 하나 찾아서 죽였는데 킬수 안 오르면 억울해서 잠도 안 올 것 같다.
“해 보진 않았지만, 딱히 안 쳐줄 이유는 없을 듯해.”
“그 반대는요? 도련님께서 99% 죽여 놨는데, 제가 막타를 쳤다면요?”
“기여도 정도는 인정해 주겠지.”
“죽이는 방식은요? 불태워서 죽이거나, 찔러 죽이거나…… 상관없이 한 명으로 치나요?”
“한 명으로 치지만, 고통이 클수록 돌아오는 힘은 더 커져. 힘은 누적되어 쌓여도 살인 공백 기간이 길어질수록 병증이 심해지지.”
“그런……. 사는 게 정말 피곤하시겠어요.”
나는 진심으로 동정하며 방금 들은 것들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넣었다.
막타 인정, 킬딸 인정, 어시스트 킬 인정, 킬수에 따른 힐양은 동일, 고통 버프, 공백기 디버프…….
게임할 때 이런 조건은 없었는데, 생각보다 상세하잖아. 잠깐, 공백이 길어질수록 병증이 심해진다면 지금 아드리안은 마지막 살인으로부터 얼마나 지난 거지?
“저, 도련님…… 어?”
그걸 물어보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조금 전까지 앞에 있었던 아드리안이 저 멀리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째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스템 메시지가 좌르륵 뜨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의 지병 ‘호흡 곤란’이 발동합니다.」
「아드리안이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드리안의 지병 ‘빈혈’이 발동합니다.」
잠깐만, 지병은 두통과 천식, 기침만 있는 거 아니었어?
“저기, 도련님. 몸이 안 좋으시면…….”
「아드리안의 지병 ‘어지러움’이 발동합니다.」
「아드리안의 지병 ‘발작’이 대기합니다.」
「아드리안의 지병 ‘손발 마비’가 대기합니다.」
참, 얘 아침 약 안 먹었지!
“약! 약 가지고 올게요! 여기서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순식간에 창백해진 아드리안이 가슴을 붙잡고 손을 뻗었다. 소름 끼치게 웃는 거 말곤 거의 변한 적 없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빈혈, 손발 마비, 발작……. 하나만으로도 무서운 병증들이 그 밑으로도 끊임없이 뜨려고 하고 있었다.
놀란 나머지 발을 동동거리다가 얼른 부엌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약 먹을 시간이 지나 버렸잖아! 나 대신 가져다준다더니, 아직 안 갖다주고 뭐 하고 있는 거냐고!
“헉, 허억…….”
순식간에 부엌으로 뛰어가서 아드리안의 약 보관함을 찾았다. 앞에 모인 하인 서너 명이 뭔가 즐겁게 재잘거리며 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약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었다. 나는 뛰듯이 걸어가 쟁반을 콱 붙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스템 메시지는 끊임없이 아드리안의 상태를 생중계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의 지병 ‘전신 마비’가 대기합니다.」
「아드리안의 지병 ‘피부 발진’이 대기합니다.」
“뭐, 뭐야!”
갑자기 나타난 내가 쟁반을 뺏으려 하자, 그녀가 당황해하며 자기 쪽으로 당겼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치켜떴다.
“약 빨리 안 갖다드릴 거면 내놔. 도련님 지금 약 없어서 많이 아프셔.”
“너 지금 약 시중 뺏겼다고 나한테 이러는 거니? 불만 있으면 레티샤 님께 가서 말씀드려! 이제 나한테 도련님 약 시중들라고 시키셨으니까! 손 못 놔? 놔!”
잊고 있었다. 아드리안의 약 시중은 이상할 만큼 부러움과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자리라는걸. 그녀는 절대 뺏길 수 없다는 듯 악을 쓰며 쟁반을 잡아당겼으나, 지금은 옥신각신할 시간 따위가 없었다.
나는 쟁반 위에 흩어진 알약을 모조리 손에 쓸어담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약을 씹어 삼킬 순 없으니 주방을 나서기 전에 커다란 유리 주전자에 물을 가득 퍼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약! 쟤가 도련님 약을 들고 갔어요!”
“저거, 저거! 힐다 잡아라!”
“헉, 헉……. 너무, 빨라……. 너무 빠릅니다!”
약을 뺏겨 버린 여자 하인들이 뒤늦게 날 쫓아오며 악을 썼다. 마침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본 알베르트가 날 보고 쫓아오기 시작했지만, 거리가 좁혀지진 않았다.
나, 알베르트, 보초병 두어 명, 그 뒤로 헉헉대는 하인 몇 명이 일렬로 뛰어가는 진풍경이 펼쳐졌는데, 정작 나는 눈앞에 쉴새 없이 뜨는 아드리안 상태 메시지에 더 마음이 급해졌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진짜 그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드리안의 지병 ‘호흡 곤란’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도련님!”
“하윽, 하…….”
앉아 있기도 버거웠는지 아드리안은 엎드린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손발 마비가 오기 직전인 듯 핏기 하나 없는 손이 고장 난 기계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숨은 또 얼마나 거칠게 몰아쉬는지 숨통이 다 찢어져 나간 것 같았다.
어떡해. 어떡해. 저러다 진짜 죽는 거 아냐? 아드리안이 가끔 발작을 일으킨다는 말을 전해 듣긴 했지만, 곁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듯 쿵쾅거렸다.
“도련님, 약 가져왔어요. 일어나서 좀 드셔 보세요.”
“으윽, 윽…….”
“약 못 드시겠어요? 정 힘드시면 휴버트 선생님 불러올까요?”
“가져와, 이리…….”
녹슨 쇠끼리 문지르는 듯 탁한 목소리였다. 피라도 토해 낼 것처럼 거친 숨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쉼 없이 떨리는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약과 주전자를 내밀었다. 뛰어오면서 반 이상 쏟는 바람에 주전자에선 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주전자를 들 수는 있을까. 고개 젖히게 해서 물을 부어 줘야 하는 거 아닐까. 나는 그와 주전자, 약, 허공에 멈춰서 고장 난 손을 번갈아 보았다.
“도…… 련님!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알베르트와 보초병, 하인들이 뒤늦게 도착해 외마디 비명을 질렀지만,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귀가 튕겨 냈다.
아드리안이 기어가듯이 주전자를 받아 들고,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혹여 손에 힘이 빠져 떨어뜨릴까 싶어, 주전자를 살짝 받쳐 주기도 했다. 목젖이 울컥 파도치면서 알약 여섯 개가 한꺼번에 넘어갔다.
나는 자연스럽게 주전자를 넘겨받으며 다음 메시지가 뜨기를 기다렸다. 약효가 들기 전까지는 언제든지 응급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하나라도 뜨면 곧장 휴버트를 부를 생각이었다.
쌔액, 쌔액……. 그의 거친 숨소리와 내 숨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침묵은 길었다.
「아드리안의 지병 ‘발작’이 대기 취소됩니다.」
“하…….”
한참 뒤에 뜬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나는 겨우 참고 있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드리안은 여전히 테이블에 엎어져 있었지만, 혹시 죽은 건 아닌지 조마조마하며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고통스럽게 가슴을 쥐어짜던 손은 무릎 위로 떨어지고,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던 등도 원래의 리듬을 찾아가고 있었다.
맥이 탁 풀리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핑 돌았다. 진짜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잖아.
「아드리안의 지병 ‘호흡 곤란’이 나아지고 있습니다.」
「아드리안의 지병 ‘전신 마비’가 대기 취소됩니다.」
「아드리안의 지병 ‘피부 발진’이 대기 취소됩니다.」
「아드리안의 지병 ‘어지러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드리안은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생존 상태로 진입합니다.」
“……여긴 왜 왔어?”
한참 만에야 아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위기는 벗어났다지만 발작의 잔재는 남았는지 쇳가루가 갈려 나가는 듯한 숨소리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내 뒤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던 이들을 향해 말한 것임을 알았다. 알베르트를 포함한 모두가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도,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힐다가 약을 훔쳐 갔다기에 놀라서 쫓아온 건데, 도련님께서 이렇게 되셔서……. 혹시 이것도 저 아이가 한 겁니까?”
“힐다가 가져온 약으로 방금 겨우 살아난 거, 보지 않았어?”
“하, 하지만 그게.”
“아침에 힐다가 약을 가져오지 않는 걸 보고 이상하다 싶었지. 어제 일로 그 어떤 불이익도 주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말하기조차 귀찮다는 듯 목소리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부상 입고 웅크린 짐승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알베르트가 질끔 놀라는 게 통쾌하면서도 조금 불쌍하기도 했다. 아드리안이 살벌하게 굴 때는 진짜 무섭긴 하니까.
그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숨은 아직 거친 데다 이마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다 죽어 가던 아까보다는 나아 보였다.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이 알베르트를 향했다.
“돌아가.”
그는 오만한 왕처럼 명령했다. 뒤에 선 하인들은 이미 아드리안의 냉기 어린 목소리에 하얗게 질려 울먹거리고 있었다. 찌를 듯 예리한 눈빛에 알베르트는 어찌할 바 모르고 쩔쩔매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도련님, 저 하인이 또 무슨 짓을 할지, 혹시라도…….”
“돌아가라고 했어.”
지쳤지만, 힘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최면을 사용했다는 걸 깨달았다.
알베르트를 포함한 모두가 움직임을 뚝 멈추더니 같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귀신에 홀린 듯 흐리멍덩한 표정을 하고서 팔다리를 맞추어 움직이는 걸 보자, 산 사람을 실에 매달아 조종하는 걸 보는 느낌이라 아주 묘했다. 최면에 걸리면 저렇게 되는 거구나.
“왜 날 살렸어?”
뜬금없는 물음이 뒤통수를 때렸다. 돌아보니, 숨을 고르며 날 바라보는 아드리안이 보였다. 보기 드문, 생소한 짐승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넌 날 무서워하잖아. 죽게 내버려 뒀으면 편했을 텐데, 왜?”
“아니, 그걸 말이라고…….”
“난 너를 죽이려고도 했고 제물로 바칠 인간을 데려오라고도 했어. 당연히 무리하고 힘든 요구겠지. 내가 죽었으면 그 모든 족쇄로부터 해방되는 건데, 그 기회를 놓쳐? 그 정도로 어리석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그런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어요. 당장 눈앞에서 숨넘어가게 생겼는데, 약만 주면 되는데 어떻게 안 살려요? 안 도와주면 살인인 수준인데. 사람을 뭐로 보고……. 전 도련님처럼 숙련된 살인마가 아니라고요.”
“…….”
“도련님이 귀한 몸이신 건 알지만, 남들이 가져다주지 않아도 약은 잘 좀 챙겨 먹어요. 시간 맞춰 안 먹으면 그렇게 아프면서, 얼마 전엔 피 토하고 발작도 일으켰다면서,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억울하시면…….”
“빨리 나으시든지?”
“풋, 뭐예요. 왜 제 말 따라 해요? 그래서 지금은요? 좀 괜찮으신 거예요?”
자학이 취미도 아니고 말이야. 괜히 사람 놀라게 만들고. 아드리안의 말에 잠깐 웃고 말았던 나는 볼멘소리로 툴툴거렸다. 지나고 보니 조금은 아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사라졌다. 아드리안이 쓰러졌던 때로 돌아가더라도 아마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무섭고 살벌한데 연약한 살인마라니. 이런 건 또 처음 봐서.
“괜찮아. 아주 어렸을 적에는 이보다 더한 고통에도 죽지 않았으니까. 몸 안의 장기가 모조리 제자리에서 벗어난 적도 있었는데, 이 정도 발작은 아무것도 아니야.”
얘는 왜 자기 아픈 거 말하는데도 살벌하냐. 몸 안의 장기가 모조리 자리에서 벗어나다니, 그러고도 살아남는 게 가능해? 고통이 너무 크면 사람이 쇼크사하기도 한다던데. 오히려 그에겐 죽지 못하고 고통을 견디는 게 형벌일 수도 있겠다. 병약한 아드리안의 몸으로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온몸이 사슬에 묶여 고문당하는 느낌일 테니까.
으으, 암울해, 암울해. 뭐라도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는 타이밍 같은데.
“그, 그래도 어렸을 적엔 마님께서 따뜻하게 돌봐 주셨을 테니 힘이 많이 되셨겠어요.”
“…….”
옆에서 돌봐 주는 사람이 있었던 과거에는 덜 외로웠을 거란 추측에 꺼내 본 말인데, 아드리안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얼굴이 파리하다 못해 풀빛이다. 선택지를 잘못 택했나? 어째 발작 왔을 때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이는데.
「아드리안이 ‘어렸을 적 백작 부인과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아드리안이 씁쓸해합니다.」
미워하고 증오하는 게 아니라 씁쓸해한다고? 이번만큼은 나도 조금 놀라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백작 부인만큼 위협적인 존재는 없었을 텐데 살려 둔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성가신 장애물이지만 방해를 받아 제거할 수 없었다, 백작 부인을 죽이면 의심이 짙어질 수도 있어 일단 보류했다. 이제까진 그런 이유로 추측해 왔는데 정반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실시간 악마 상태 감지’ 능력, 정말 유용하다니까. 예전엔 아드리안만 보면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 전전긍긍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 없어졌으니 말이다. 악마의 하수인 루트를 탄 걸 잘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조금 전은 수고했어, 힐다.”
「아드리안이 예비 오른팔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보너스 경험치를 3000 획득했습니다.」
「보너스 급여를 500G 획득했습니다.」
그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악마가 답지 않게 공로를 치하하는 발언을 하더니, 요새 볕 들 날 없던 경험치와 재산에 쨍하고 햇빛이 든 거다. 전 재산이 610골드로 확 올랐을 뿐만 아니라 경험치 상태바도 쑥쑥 차올랐다. 지지부진하게 머물러 있던 레벨이 순식간에 15까지 치고 올라가자 내 눈이 띠용하고 커졌다.
「레벨 15로 올랐습니다.」
「스킬 개방! ‘숙면’을 쓸 수 있습니다.」
「‘다락공방(제작소)’이 개방되었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레벨이 높아졌어? 돈은 또 어떻고? 610골드라니, 게임을 하면서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액수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큰돈을 내가 가져도 되는 건가, 시스템의 함정이 아닌가. 빚에 쪼들려서 한강 다리까지 내몰린 사람이 갑자기 복권 당첨된 기분이 이런 걸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단지 아드리안이 고마움을 느꼈다고 해서 이만한 경험치와 골드가 뚝 떨어진 거야?
턱이 달달 떨렸다. 스킬 설명을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아드리안을 바라봤다.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운 정찬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왜 또 그렇게 봐?”
그가 흠칫하더니 일어나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경험치 밭이 말을 한다. 골드 패키지가 말을 한다…….
“힐다, 네가 그런 눈으로 바라볼 때 나는 정말 불길해져.”
“도련님, 이리 와 보세요. 무서워하지 마시고 제게 더 가까이…….”
“……지옥에서조차 이렇게 두려운 악마는 없었는데…….”
저도 이 게임에 들어와서 님처럼 탐스러운 경험치 골드 밭은 처음 봐요. 미소가 짙어질수록 아드리안은 창백해졌고, 내 머리는 저 악마에게 어떻게 경험치와 골드를 뽑아 먹을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어쩐지 이 거지 같은 게임 시스템에 대항할 수 있는 좋은 무기를 찾은 것 같았다.
겨우 찾은 경험치 골드 밭을 쉽게 놔줄 순 없었다. 어제 거대한 떡고물을 받아먹은 뒤 한껏 격앙된 나는 늦은 밤까지 아드리안에게 들러붙어 있었다. 어떻게든 내게 고마움과 다른 여러 감정을 느끼게 하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그를 꽤 피곤하게 만들었는지 잠자리에 들 때쯤엔 양 볼이 푹 파여 있기까지 했다.
“내일 뵐게요, 도련님! 푹 주무세요!”라고 인사했을 때는 ‘진짜 내일 또 올 거야?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는데.’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나와 버렸다.
전속 하인으로 임명한 건 아드리안이잖아? 한배를 타는 건 자유지만, 내리게 하는 건 아니란다. 악마가 쏟아 내는 경험치와 골드를 맛본 지금은 더더욱!
악마와 함께라면 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도련님!”
“……그래, 힐다. 좋은 아침이야.”
약 먹는 시간에 맞춰 힘차게 쳐들어가자 경험치 밭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표정으로 보나 어조로 보나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반가움은 아니었으나 이 또한 무시했다.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고, 골드와 경험치를 뽑아 먹는 게 더 중요했다.
어제 아드리안이 조금씩 떨어뜨린 돈과 경험치를 주워 먹으니 최종적으로 700골드와 레벨 15 중반을 찍었는데, 700골드란 숫자가 너무나 아름다워 보인 나머지 당장 저택을 뛰쳐나가 누구라도 하나 기절시켜 잡아 올 뻔했다.
단순히 약 갖다줘서 고마워하는 것만으로 경험치 3000과 보너스 500골드를 쥐여 줬는데, 대신 사람 죽여 주면 얼마나 고마워하겠어? 얼마나 큰 콩고물이 떨어지겠냐고…….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뭘 쓰면 사람을 단번에 기절시킬 수 있을까? 톱? 도끼? 삽? 막타는 아드리안이 쳐야 하니까 방까지 끌고 오는 동안 안 깰 만큼 확실히 보낼 만한 도구가 필요해.
어젯밤 그런 생각을 하며 살인 도구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뒤늦게 ‘핫…….’ 하고 정신 차렸다. 아무리 경험치와 골드에 미쳐도 그렇지, 사람 죽일 생각을 어쩜 이리 쉽게 해? 이래서 자본주의가 무섭다는 거다. 애먼 사람 공격하지 말고 악마나 탈탈 털어야지.
“약 가져왔으니 어서 드세요, 도련님.”
나는 밝게 웃으며 쟁반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아드리안에게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쟁반에 놓인 약과 내 얼굴을 스쳤다. 나는 숨겨진 뜻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했다.
“어제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던 데다 도련님께서 한 번 더 주의 주셔서, 약 시중은 다시 제가 맡게 되었어요. 어제는 제때 못 먹어서 큰일 날 뻔했는데 이렇게 시간 맞춰 온 거 고맙죠? 완전 고마우시죠?”
빨리 고맙다고 말해!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마운 마음을 강요했다. 약을 세 차례에 나눠서 넘겨 먹은 아드리안이 컵을 내려놓으며, 이상하게 여기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고맙다는 소리를 듣지 않고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자,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래, 고마워.”
고맙다고 말했다! 방금 분명 고맙다고 했지! 이번엔 경험치와 골드가 얼마나 들어올까?
첫사랑한테도 느껴 보지 못했던 설렘으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하지만 웬걸. 아무리 기다려도 경험치와 돈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라, 왜 돈 안 줘? 버그 났나? 다시 해 봐야지.
“저, 도련님! 얼마나 고마우세요?”
“얼마나 고맙냐니.”
“약 갖다드린 거요. 어제의 담당자처럼 농땡이 안 치고 제시간에 갖다드렸잖아요. 매우 고마우시죠? 네? 막 일급 올려 주고 싶을 정도로요.”
“힐다, 너 왜……. 후, 그래. 아주 고마워. 이제 됐지?”
「아드리안이 예비 오른팔에게 손톱만큼 고마워합니다.」
「보너스 경험치를 1 획득했습니다.」
「보너스 급여를 1G 획득했습니다.」
이 악마 영혼 없는 거 보소.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말투가 불안했는데, 진심이 아니면 돈도 경험치도 안 떨어지나 보다.
어제 폭탄처럼 떨어진 이후로는 계속 찔끔찔끔 오르기만 해서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그렇게 찔끔찔끔 흘리는 거 받아먹기만 해도 내 일급보다 많아서 불평할 수가 없었다.
이건 일종의 퀘스트였다. 악마에게 진심이란 걸 가르쳐 주고 경험치와 골드로 돌려받기!
“고맙다고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도련님. 저 같은 하인이 도련님을 위해 봉사하고 일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요. 비록 복지도 안 좋고 일급도 짜지만요. 요즘 같은 실업 시대에 매일 보장된 금액이 들어온다는 게 얼마나 감사해요? 저는 진심으로 도련님께 감! 사! 해요. 한마디 말이라도 진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죠, 도련님?”
“…….”
“제가 생색내긴 했지만요. 사실 약은 아무것도 아니죠. 아침에 한 번 약 갖다드리는 게 어디 큰일이겠어요. 평소에 뒤에서 하는 일들이 훨씬 많거든요. 예를 들면…….”
“……힐다. 오늘 오전에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분명 들었던 것 같거든.”
“네? 아뇨. 아무것도 없어요. 자리를 비울까 봐 걱정되시나 본데, 전속 하인이 어딜 가겠어요? 온종일 도련님 곁에 딱 달라붙어 있을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 악마가 내게 더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경험치와 돈을 쏟아 냈으면 좋겠다. 털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털어먹어야지.
단단히 다짐하며 방긋 웃어 주었는데, 어쩐지 아드리안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서 가만히 응시해 와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어, 저 표정은 분명…….
“도련님, 혹시 지금 저한테 최면 걸고 계세요?”
“…….”
“최면 걸고 계시는 거 맞죠? 입 다물라고.”
저 악마, 최면 걸 때 얼굴이 항상 똑같았다. 눈썹을 30도로 올리고 눈싸움하는 것처럼 눈을 절대 깜박이지 않는 표정, 언뜻 보면 마려워하는 것 같은 표정…….
“수십 번을 시도해도 네겐 정말 안 통하는구나.”
“저 입 다물까요?”
“응.”
안 먹힐 거 알면서 최면까지 걸 정도면 조용히 있고 싶었나 보다. 혹시 해서 물어본 건데 대답이 칼같이 돌아왔다. 와, 조금의 망설임도 없네. 예비 오른팔 섭섭하게.
“진짜요? 진심이세요?”
“응, 진심이야.”
“네. 그럼 뭐, 입 다물게요. 꼭 다물게요. 지금 바로 다물까요? 진짜 다물었으면 하시는 거 맞죠? 네, 다물게요. 다문다는 말도 안 하고 다물게요. 지금부터 정말 다물어요.”
“…….”
“생기발랄한 걸 좋아하시는 줄 알았죠. 조용히 있고 싶으셨으면 말씀을 하시지. 입 다물게요. 이젠 진짜예요.”
“…….”
“…….”
“……후.”
구구절절한 예고 끝에 겨우 입을 닫고 시간이 좀 지나서야 아드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평화를 되찾은 얼굴이었다. 그와 함께 내가 애타게 기다렸던 흰 글씨가 사르르 떠올랐다.
「아드리안이 예비 오른팔에게 고마워합니다.」
「보너스 경험치를 10 획득했습니다.」
「보너스 급여를 10G 획득했습니다.」
옳지. 악마가 이제야 내게 고마움을 느낀다.
거, 처음부터 10골드 치만큼 고마워했으면 서로 피곤해질 일 없었잖아요. 역시 사람이나 악마나 바닥을 찍어 봐야 행복한 줄 안다니까. 최악을 맛봐야 고마운 걸 아는 법이지. 711골드로 늘어난 전 재산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저 악마, 말 많은 거 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