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33)

3-3. 생존형 ○○로 전직했습니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내 방 천장이었다. 어제 내가 이 방에 어떻게 왔더라. 가물가물 흐려지는 눈을 비비면서 천천히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백작 부인의 방에서 공포의 각기춤을 보고 나온 후, 아드리안의 방에 가서 이른 퇴근을 하사받고 방에 돌아온 것까진 희미하게 기억나는데. 방에 들어오자마자 거의 정신을 잃었다가, 베개 없인 잘 수 없다며 방해받는 통에 침대까지 기어 올라온 것 같다.

으, 백작 부인의 팝핀댄스가 또 생각나 버렸어.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나를 붙잡고 흔드는 손이 젖은 종이처럼 들러붙어서 더 오싹했다. 차갑고 나약하지만, 흔들어도 떨어지질 않아서.

맵을 개방해 주는 역할이라 안 만날 순 없는데, 만날 때마다 심정지 올 것 같아 감당이 안 된다. 백작 부인이 신전에 가자고 했는데, 또 어떤 공포를 선사할지 두근두근했다. 나가다 부정맥 와서 죽느니, 갇혀서 건강한 심장으로 팔딱거리는 게 더 옳은 최선은 아닐까?

한숨을 쉬며 다시 눈을 뜨자 어제와 달라진 몇 개가 보였다. 먼저 0골드로 쪼그라들었던 전 재산이 60골드로 늘어나 있었고, 경황이 없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탁 목록’이 생겼다는 점이다.

부탁 목록을 눌러 보자 새로운 창 하나가 떴다. 그 창에는 내 레벨에 추가할 수 있는 인원 대비 고용한 일꾼 숫자(2/3)와 일꾼들이 현재 뭘 하고 있는지 표시되어 있었다.

『에밀리 : -_- 잡초 뽑기 진행 중……. lv.3 (20/30)

아이작 : ^0^~♬ 마을 사람들과 쓸데없는 잡담 중……. lv.3 (20/30)』

이 상태창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경험치바에 ‘+1’이 뜨는 걸 보니 에밀리 혼자 일하고 있는 모양이다. 강도 3일 때는 그래도 가끔 휴식 시간은 가지던데, 강도 4는 어림없이 일만 하게 하나 보다. 유저에게나 NPC에게나 가혹한 시스템이었다.

근데 아무래도 에밀리 옆에 떠 있는 표정 ‘-_-’가 걸렸다. 바로 밑 아이작이 즐거워 미치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더 비교됐다. 그러잖아도 두 번째 부탁했을 때 에밀리 표정이 심상찮아서 마음에 걸렸는데, 상태창에서마저 저러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안 되겠다. 특별 제조한 커피 한잔 먹이러 가 봐야지.

나는 얼른 일어나 부엌에서 커피를 만들어서 정원을 헤매고 다녔다. 정원을 반쯤 돌아도 보이지 않아 내내 이곳에 있었을 정원사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저, 정원사님! 혹시 에밀리 못 보셨어요?”

“에밀리?”

사다리 위에서 나무를 가다듬다 말고 정원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대강 묶어 내린 머리를 한 움큼 쥐고 위로 들어 올렸다.

“네! 머리를 이렇게 단정하게 묶고 눈은 녹색인 제 또래요. 눈매가 특히 순한 앤데, 아마 혼자 잡초만 뽑고 있었을 거예요.”

“아하, 잡초라니 생각나는구나. 딱 너만 한 여자 하인이 새벽부터 나와 잡초를 뽑고 있는 게 하도 이상해서 누가 시켰는지 아무리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더란 말이야. 잡초 정리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할 필요 없다고 말려도 대답도 하지 않고 잡초를 뽑더라고. 잡초가 부모님 원수라도 되는 줄 알았지 뭐냐.”

“지금 어디 있어요? 보셨어요?”

내가 다급하게 묻자 정원사가 먼 곳을 두리번거렸다.

“글쎄, 한 시간 전쯤 저어기를 지나가는 걸 보긴 했는데.”

“감사합니다!”

인사를 내던지듯 하고 정원사가 가리킨 쪽으로 얼른 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 수풀 소리를 따라가니 마침내 찾을 수 있었다. 허리를 둥그렇게 말고 미친 듯이 잡초를 뽑고 있는 에밀리를. 왜 조금 전 정원사가 부모님 원수라도 되는 줄 알았다고 했는지, 저 모습을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에밀리!”

마치 내가 주문이라도 왼 것처럼 에밀리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뽑고 있던 잡초를 쥔 채, 그녀가 느릿하게 일어나 나를 돌아보았다. 피부가 하얘서인지 눈 밑 그늘이 유난히 짙어 보였다. 매크로도 일을 너무 많이 시키면 분노하는구나. 이거 그냥 넘길 일이 아니잖아.

“에밀리, 새벽부터 나와서 일했다며?”

“……네가 「부탁」했잖아.”

에밀리가 딱딱하고 기계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표정 한 점 변화 없이 입만 움직이는 게, 복화술용 목각 인형처럼 보여서 일순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그녀의 형편없는 꼴을 보았다. 항상 단정했던 머리는 부스스하고 옷은 앞치마고 뭐고 할 것 없이 죄다 흙투성이였다. 이렇게까지 하란 소린 아니었는데! 내가 입만 뻐끔거리고 있자, 에밀리는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나 잡초 뽑아야 해. 네가 「부탁」한 대로.”

“아냐, 에밀리. 아냐! 잡초 그만 뽑아, 그만 뽑고 좀 쉬어. 너 지금 꼴이 말이 아니야.”

「부탁을 취소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취소해야지! 애가 저 꼴인데! 창이 뜨자마자 ‘예’를 누르자, 잡초 뽑으러 앉으려다 말고 에밀리가 우뚝 멈추었다. 맹목적으로 잡초를 뽑아야 한다고 쳐다보지도 않던 그녀가 태연하게 잡초제거기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와, 공포게임 아니랄까 봐 노동 시스템조차 공포냐.

「부탁이 강제 종료됩니다.」

“에밀리, 많이 힘들지? 이것 좀 마시라고 가져왔어.”

“응, 고마워.”

당이 당길 것 같아 특별히 휘핑크림까지 회오리 모양으로 듬뿍 담고 초콜릿 시럽도 넣었는데, 어쩐지 표정이 얼음장처럼 굳은 채 풀리질 않는다. 특별히 제조된 커피로 호감도가 올랐다느니 하는 메시지도 뜨지 않았다. 대신 처음 보는 흰 글씨가 에밀리 위에 떠올랐다.

「호감도에 비해 무리한 강도로 부탁하여 호감 대상의 피로도가 급증했습니다.」

「피로도가 높아 호감도가 50 내려갔습니다.」

「현재 에밀리 호감도 lv.1 (0/10)」

「호감도가 더 하락하면 호감 대상에서 제거됩니다. 한번 호감 대상에서 제외된 인물은 다시 호감 대상에 추가할 수 없으며 호감도 대신 적개심이 오를 수 있습니다. 적개심이 높은 인물들끼리 동맹을 맺을 수 있습니다.」

뭐요? 적개심이요? 동맹요? 요컨대 에밀리의 호감도가 더 낮아지면 그때부터 내가 하는 행동에 따라 적개심이 오를 수 있고, 기존에 내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다른 게임 캐릭터와 합심할 수 있다는 뜻인가?

내 유일한 친구 에밀리가……. 나는 조금 우울해져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커피는 마음에 드는지 홀짝홀짝 마시고는 있지만, 밤샘한 것처럼 퀭하고 눈 밑이 거멨다. 늘 나만 보면 환하게 웃던 그녀가 이젠 알은척도 안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무척 섭섭하고 슬퍼지려 했다.

레벨 3에 강도 4가 무리한 부탁이었다니, 이렇게 힘든 강도인 걸 알았으면 절대 시키지 않았을 텐데. 설명이라도 좀 달아 주지, 왜 직접 똥밭에 굴러 보지 않으면 모르게 해 둔 걸까?

“저, 에밀리…….”

“……나 이제 방에 가서 좀 쉴게.”

어느새 커피를 다 마신 에밀리가 컵을 내게 떠넘기고 자리를 떠났다. 잠깐 얘기 좀 하자고 붙잡고 싶었지만, 나를 보고 밀랍처럼 굳어 버리던 표정이 떠올라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 ‘쉬지 않고 열심히’는 너무했지. 다 먹고살려고 하는 건데, 왜 일하면서 쉬질 않아. 내가 너무했네. 염치가 없었네. 염치가 없으면 픽셀 쪼가리도 친구를 버리는구나……. 큰 교훈을 얻었다.

나는 아쉬운 눈으로 에밀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조금 시간을 두자. 아직 호감 관계가 끊어진 건 아니니까, 사과하고 잘해 주면 다시 픽셀 친구가 되어 주겠지. 나는 조금 기죽은 채 터덜터덜 저택으로 돌아왔다.

“힐다, 도련님께서 아침부터 차를 드신다고 말씀하셨으니 빼먹지 말고 챙겨 가거라.”

부엌에서 아드리안의 약을 챙기고 있자 레티샤가 나타나 재빠르게 말하고 지나갔다. 내게 말할 때 레티샤와 얼굴을 잠깐 마주했는데, ‘레티샤를 호감 대상에 추가하겠습니까? (1/3)’라는 글씨가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다.

백작을 호감 대상에 추가할 거냐는 글씨보다는 조금 더 머무르다 사라졌는데, 이제 보니 캐릭터 가치가 높아질수록 호감 대상에 추가하기 어려운 듯했다. 백작은 거의 나타나자마자 사라지는 수준이더니. 싼 몬스터볼로 희귀 몬스터를 잡으려 하면 튕겨 나가던 게임이 생각났다.

요컨대 에밀리와 아이작은 일반 몬스터, 레티샤는 희귀 몬스터, 백작은 전설 몬스터와 같다는 건가. 백작을 호감 대상에 넣어 부탁하면 어떻게 될까? 하루 만에 얼마나 많은 돈과 경험치를 가져다줄까? 명색이 백작이니 나 같은 하인 나부랭이의 연봉보다 많은 돈을 하루에 벌어 올지도 모른다. 그럼 다른 호감 대상으로 공장을 돌리지 않아도 될 테지. 난 신화 베개로 도배된 침대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 행복해져서, 아드리안 감지 스킬 때문에 시야 한쪽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데도 헤벌쭉 웃으며 문을 열었다. 상상만으로도 내 인생 황금기 같고, 막 부자가 된 것 같고……. 곧 아드리안을 만날 텐데 이렇게 기분이 둥둥 뜬다는 건 드문 일이었다.

바보같이 웃으며 방에 들어갔는데, 바로 아드리안과 마주치지 않아 기분이 더 좋아졌다. 파티션 너머로 기척이 들리는 걸 보니 한창 씻고 있는 모양이다.

약과 찻주전자, 찻잔과 찻잎이 차례로 놓인 쟁반을 협탁에 내려놓고 나는 홀린 듯 스르르 침대에 누웠다.

탱탱하고 부드러운 베개가 머리에 닿자 그간의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르르 녹으며 눈이 절로 감겼다. ‘투시자의 눈’으로 봤을 때 거의 유일하게 악의에 물들지 않은 물건이 바로 이 베개였다. 하긴 이런 베개를 베면서도 악의를 불태울 수 있다면 인간이 아니지, 아니야. 참, 걔 악마였지.

“하, 이렇게 10분만 잤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아니, 5분만…….”

지난번 아드리안의 베개를 베고 잤을 때 어땠더라. 알게 모르게 쌓여 있던 피로도가 모조리 증발하면서 손대는 일마다 크리티컬이 터졌었지. 어쩌면 이 베개만 있으면 에밀리를 괴롭히는 부탁 같은 건 안 해도 될 거다. 나 혼자 두 명분의 일을 해내는데 뭐 하러. 물론 에밀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열심히 굴리겠지만…….

그때였다. 달칵 소리와 함께 파티션 뒤에서 문이 열렸다. 내가 들어온 걸 몰랐던 아드리안은 가운을 입은 채 방으로 들어왔고,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와 내가 거의 동시에 흠칫했다.

차이가 있다면, 내 눈은 ‘아, 악마다’, 아드리안은 ‘벼, 변태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도…… 련님.”

이 꼴을 또 들키다니. 아드리안이 이 모습을 뭐라고 생각할지 민망해짐과 동시에, 이틀 전 그의 가슴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던 내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솔직히 체취가 매력적이긴 했지.

내가 얼굴을 붉히자 아드리안이 크게 움찔했다. 가까이 오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인간의 존엄성 어디 갔나요?

“힐다, 너 또 내 침대에서…….”

‘가운으론 부족해?’라고 말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비참했지만, 나는 본래의 목적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참자, 견디자. 하수인에서 해고되는 그날까지 수치심이란 건 잊어야 한다.

“세상에, 도련님, 씻고 나오셨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핥아먹어도 될까요?”

하늘도 감동할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나는 두 손을 기도하듯 맞잡고 아드리안을 그렁그렁 바라보았다. 그가 질겁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우윳빛깔 도련님에게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우유 맛이 날까요? 밀크 맛이 날까요? 하…… 상상만 해도 달콤해…….”

“힐다. 너, 내 침대에 자꾸 눕는 행동, 잘못한 거 알기는 하는 거야?”

표정 하나 안 변하고 개소리를 쏟아 내고 있자 아드리안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죄송해요, 도련님. 잘못한 건 아는데 제가 제지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여서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도련님. 제게 가운 대신 베개를 주시면 안 될까요? 베개에 도련님 머리카락 냄새가 짙게 묻어 있어서 제가 자꾸 눕는 것 같거든요!”

“베개를?”

“네, 두 개면 더 좋겠어요. 사실 제 마음속에는 한 사람 더 살아서, 잘 때 하나씩 베야 하거든요. 그게 누구냐고요? 바로 도, 련, 님!”

“……그만하고 약이나 가져와, 힐다.”

“네, 도련님.”

말 돌리는 거 보니 베개는 끝까지 안 주겠다는 거네. 치사한 새끼, 돈도 많으면서. 저런 베개는 손가락만 까딱해도 살 수 있으면서 하나쯤 하인에게 하사해 줄 만도 한데 말이야. 전속 하인에게도 짜게 구는 저 악마가 자선 사업이라니, 기부 천사라니 우스운 일이다. 하여간 이 악마 새끼는 나한테 도움이 안 된다니까.

속으로 끝없이 구시렁대면서도, 겉으론 애써 웃으며 쟁반을 가져가자 아드리안이 약을 집어 들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려던 그가 문득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다시 돌아봤다. 어, 왜, 왜? 칼에 찔린 듯 뜨끔했지만, 나는 공들여 웃어 보였다. 뭘 시키려나 했는데, 그의 입에서 조금도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오늘 힘이 없어 보이네.”

“네…… 예?”

“웃고는 있는데, 평소보다 힘이 없어 보여서.”

“어…… 네. 사실, 가장 친한 친구와 사소한 문제가 생겨서요.”

조금 전 그런 망측한 발언을 쏟아 냈는데도 힘이 없어 보인다니. 내가 온 힘을 다해 연기하고 있긴 하지만, 실상 전혀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알아챈 게 신기한데……. 이놈, 실은 투시 능력 있는 거 아냐?

“제가 실수를 저지른 게 있어서요. 여기서 유일하게 기대던 친구인데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해 버렸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금 막막해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흐음.”

말하다 보니 속마음이 줄줄 새어 나왔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한숨을 쉬고 있자, 아드리안은 흘끗 쳐다볼 뿐 곧 별 감흥 없다는 듯 등을 돌려 버렸다. 사람이 고민하는 것 같으면 말이라도 좀 들어주라. 악마야.

「악마의 하수인 고유 능력 - 악마의 상태가 중대하게 변할 때마다 실시간으로 알 수 있습니다. 활성화하시겠습니까?」

그때 못 보던 흰 글씨가 휙 떠올랐다. 에밀리에 대해 깊게 고민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실시간 상태 감지? 이런 기능이 있었단 말이야? 아드리안의 상태를 알 수 있으면 나야 땡큐지. 내 말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강이라도 알 수 있으면 생존하는 데도 도움이 될 테고. 내가 가차 없이 ‘예’를 누르자 글씨가 사라졌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딱히 눈에 띄는 알림은 오지 않았다.

‘중대한 변화’가 뭔지 궁금한데.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막 알약을 넘기는 아드리안을 향해 말을 걸었다.

“세상에, 도련님은 약 드시는 것도 어쩜 그렇게 시원하고 멋있게 드세요! 우울하던 기분이 싹 날아가네요!”

“……쿨럭, 윽…….”

내 말에 약을 넘기다 목에 걸렸는지 그가 잔기침을 뱉어 냈다. 귀가 살짝 빨개진 그에게 나는 쉬지 않고 연타를 날렸다.

“그거 아세요, 도련님? 도련님이 잘생긴 거 아는 사람 손가락 접으라고 했는데, 글쎄, 세상이 반으로 접혀서, 세상 반대편 사람들과 인사하지 않았겠어요? 도련님과 함께라면 세계 평화도 이뤄질 것만 같아요!”

「아드리안의 지병 ‘두통’이 발동합니다.」

“힐다, 쿨럭, 나가서, 바람 좀, 쿨럭, 쐬고 와.”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우윳빛깔 도련님을 두고 어떻게 혼자 바람을 쐴 수 있겠어요.”

「아드리안의 지병 ‘두통’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힐다, 진정하고, 그 우유…… 어쩌고는 그만 좀 말해.”

“어떤 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 윳, 빛, 깔, 아, 드, 리, 안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거. 그리고 나가서 산책 좀 제발…….”

“안 돼요, 도련님. 전속 하수인…… 아니, 전속 하인의 사명감으로 무장한 저는 절대 그럴 수 없어요. 도련님 차 우리시는 모습도 감상해야 하는걸요?”

「아드리안이 절망하고 있습니다.」

아드리안이 기겁할 만한 말을 줄줄 쏟아 내며 나는 흘끔흘끔 흰 글씨를 읽었다.

호오, 이런 식으로 악마의 기분과 상태를 알려 주는 거구나. 모처럼 유용하고 쓸모 있는 시스템이잖아. 그러나 살아남는 데 도움 되긴 하겠지만, 얼굴 보면서 짐작하던 걸 글자로 확인하니 기분 나쁜 부분도 있었다.

절망이라니, 나 참. 생각해 보니까 어이없네. 전속 하인으로 지정해서 피차 피곤하게 만들어 놓고, 막상 오래 마주하니 힘들어서 내보내려 해? 이참에 악마에게 인내심과 경각심을 가르쳐야겠다. 주인공 주제에 엄마한테 밀리기나 하고 말이야. 군기가 그렇게 빠지니 당연하지. 쉬는 시간 따위 꿈도 꾸지 말아라.

“참, 도련님. 말씀하신 다기들을 챙겨 왔어요. 찻잎 더 필요하시면 말씀하시고요.”

내가 냉큼 테이블에 찻주전자와 찻잔, 찻잎을 대령하자 아드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파티션 뒤로 갔다.

충성스러운 하인의 모습으로 잠시 기다리자 옷을 갈아입은 그가 나왔다. 머리에서 흐르는 물방울 어쩌고 했기 때문인지 푹 젖어 있던 머리도 깔끔하게 다 닦고 나왔다. 그래, 그래야지. 바닥에 물방울 뚝뚝 흐르면 그거 다 내가 닦아야 한단 말이다. 앞으로 머리는 잘 말리고 나오겠지?

「아드리안의 지병 ‘두통’이 나아집니다.」

정말 차 우리는 걸 좋아하는 건지, 조용히 찻물을 우리는 것만으로 아드리안의 낯빛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얼마나 신중하고 정제된 손길로 차를 다루는지, 찻주전자와 찻잔이 도자기로 되어 있음에도 유리 부딪히는 소리 한번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타이머를 맞춰 두고 시간 재는 게 아닌데도 찻물을 붓고 우리는 간격이 규칙적이었다. 좋은 찻잎이 솜씨 좋은 다도인을 만나서인지 방 안에 퍼지는 차향에 평온해질 정도였다.

어제와 오늘 아드리안을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는 나무와 꽃, 예술과 차를 사랑하는 병약한 도련님이었다. 이 사실이 믿기 힘들어 ‘투시자의 눈’ 스킬을 몰래 써서 지켜봤는데, 찻물, 찻주전자, 찻잔 그 어디에도 악의는 묻어나지 않았다. 붉은 기운 하나 없는 청정 구역이다.

뭐야, 진짜 찻물 우리는 게 취미였어? 독극물을 타는 건지 의심했는데, 찻물 섞는 비율을 고민하던 게 진심이었다고? 뭐 이런 백수가 다 있는지.

“자, 마셔 봐. 힐다.”

한동안 차 우리고 섞는 데 집중하던 아드리안이 뜬금없이 내게 찻잔을 내밀었다. 그가 방금 섞으면서 만족스러워하던 찻물이 맑게 찰랑거리고 있었다. 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어제 섞는 비율을 고민하던 차인데, 네가 마시고 감상을 들려줬으면 좋겠어.”

아무런 사심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데, 왠지 모르게 수상하다. 뭔가 있는 게 분명해. 수상해. 악마가 아무 사심 없이 내게 이런 걸 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악의나 속셈이 있다면 왜 ‘투시자의 눈’으로 잡히지 않는 걸까. 스킬은 아직 켜져 있는데. 저 악마가 주는 거라면 새빨갛게 물들어야 정상인데.

“그럼, 감사히 마실게요. 도련님.”

순수하게 권한 걸 사양할 이유가 딱히 없어 찻잔을 들긴 했는데, 아무래도 찝찝해 몇 번이나 찻물을 빛에 비춰 보며 관찰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가늘게 뜨고 찾아봐도 이상한 게 없었다. ‘투시자의 눈’이 괜찮다고 했으니 마셔도 되는 거겠지? 진짜 호의로만 준 거겠지?

“맛은 어때?”

“생각보다 더 달콤하고 맛있어요.”

한 모금 조심스레 마시자 아드리안이 물었다. 조금 기다려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감상을 말했다. 그는 퍽 만족스러워하며 찻주전자 뚜껑을 들었다. 그리고 팔에 가려 보이지 않던 곳에 놓여 있던 찻잔을 기울여, 내용물을 쏟아 넣었다.

어라, 저건 내가 가져온 게 아닌데.

“그래? 그럼 이것도 마셔 봐.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니까, 꼭 마셔 줬으면 좋겠네.”

“네? 선물이라니…….”

“찻잔 내밀어 봐.”

찻주전자를 들고 빙긋 웃으며 말하기에 나는 엉거주춤 찻잔을 내밀었다. 짧은 찰나 그가 낮게 웃는 것 같았는데, 찻주전자가 기울어지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거기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찻잔을 채우며 올라가는 찻물에, 붉은 악의가 함께 쏟아졌기 때문이다. 표면까지 찰랑찰랑 차오른 찻물은 악의로 가득해 내 손까지 붉게 물들였다.

이걸 지금 나보고 마시라고?

나는 경악하며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해사하게 웃고 있는지, 세상이 그로 가득한 느낌이었다. 악마적으로 아름다운 사람. 눈가를 사르르 접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꼭, 마셔 줬으면 좋겠어.”

뭐를, 사약을?

연기로 가장했던 얼굴에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손에 든 찻물을 그의 얼굴에 흩뿌리고 도망치고 싶은데,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바닥에서 기어 나와 다리를 옭아매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신 차리자.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여기서 냅다 사약을 들이마실 순 없지.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시스템을 살폈다.

독극물을 마시라고 줄 정도면 내게 살의를 가진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아드리안이 내게 살의를 가졌다는 경고는 뜨지 않았다. 하지만 ‘투시자의 눈’은 이 찻물에 분명 살인할 정도의 악의는 담겨 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살해하려는 의도는 없는데, 독극물을 건넸다?

아, 설마.

작은 가능성이 내 머릿속을 강타하며 입이 헤 벌어졌다.

설마 이 악마, 지금 내가 악의를 구별하는지 확인하는 거야?

나는 빠르게 그의 팔꿈치 언저리를 살폈다. 가려져서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악의는 숨겨진 찻잔으로부터 왔다. 아마 독약이겠지.

멀쩡한 차를 먼저 마시게 한 후 독극물을 건넨다. 독극물이 들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마시는지 지켜본다…….

이제야 아드리안의 시나리오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딱히 거절할 명분도, 빠져나갈 구멍도 없었다.

어쩌지, 안 마시면 의심할 텐데. 눈 딱 감고 마시고 뒤질 수도 없고. 나는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찻잔을 내려다봤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손이 덜덜 떨려 찻물에 진동이 일고 있었다. 애초에 저 악마가 주는 걸 받아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 줄 알고 덥석 받아 마셨담.

아마 ‘투시자의 눈’으로 물건을 골라 가져간 데 대한 의문이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내 생존 방식이었던 변태 짓에 질겁하면서도, 속으로는 내 비밀을 어떻게 밝힐지 고민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드리안은 과연 확신하고 내게 독극물을 건넨 걸까? 내가 악의를 완전히 구분 못 하면 어쩌려고?

답은 하나였다. 죽어도 그만이라는 거겠지.

“저, 도련님. 도련님께서 그렇게나 고민해서 만드신 차를 하사받아 정말, 너무, 기가 막히게 기쁜데요. 성은이 너무나 망극하여 차마 이 차에 입을 댈 수가…….”

“그럴 필요 없어. 이 차는 오직 너를 생각하며 만든 거니까.”

독극물 타서 줘 놓곤 청혼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네. 독 섞을 생각이었으면서 찻물 비율은 왜 고민했는지 모르겠다. 기왕 죽을 거, 맛있게 먹기라도 하라는 건가.

“저, 그럼 도련님께서 먼저 시음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힐다, 지금 나와 협상하겠다는 거야?”

예쁘장하게 웃기에 통했나 싶었는데 대놓고 비웃는 거였다. 얄짤없네, 이 새끼. 에라, 모르겠다 싶어 찻잔을 드는 척하다가 바닥에 주르륵 전부 흘려 버렸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순식간에 털어 버리고는 뒤늦게 안타깝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아앗! 찻물이! 죄송해요, 도련님. 친히 타 주신 차인데. 손에 힘이 빠져 버려서 그만!”

찻잔을 실수로 놓쳐서 깨 버리는 게 더 자연스러웠을 테지만, 그랬다간 또 손해를 입혔다며 손해 배상을 청구할 테니 어색하더라도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헤매는 척하며 얼른 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았다. 아직 ‘투시자의 눈’이 발동 중이라 찻물이 스며든 걸레에도 붉은 악의가 덕지덕지 들러붙기 시작했다.

“아휴, 어떡해요. 귀한 차인데, 제가 실수로 그만.”

“괜찮아. 한 잔 더 따라 주면 되지.”

“…….”

“찻잔 이리 줘.”

독한 새끼. 이렇게까지 빼면 봐줄 만도 한데.

“왜 안 마셔? 내가 타 준 차가 맛이 없어?”

들리진 않았지만, ‘감히?’라는 말이 덧붙여진 것 같았다. 나는 새로운 사약으로 충전된 찻잔을 들고 만지작거렸다.

“미천한 저에게 한 잔 더 따라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쩌죠, 조금 전에 한 컵 다 마셨더니 이제 목이 안 말라서요. 이건 뒀다가 나중에 목마르면…….”

“새로 탄 차잖아. 맛이 색다를 거야. 정 그러면 한 모금이라도 마셔 봐.”

한 모금만 마셔도 뒤질 만큼 강력한 독약을 탄 거겠지. 저렇게 집착하는데 계속 빼다간, 진짜 장희빈처럼 강제로 입 벌리고 사약을 들이켜야 할지도 모른다.

정말 어쩐다.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할지 아까부터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지만,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이번만큼은 아무리 변태 짓을 해도 악마가 넘어가 줄 것 같지 않았다. 낱낱이 훑어보는 시선이 따갑다.

이대로 죽어야 하는 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게임이 리셋되나? 다시 살아날 수는 있는 거야?

“마셔, 빨리.”

아드리안이 오만하게 명령했다. 도트 쪼가리 주제에 위압적이고 무섭기까지 해서 무슨 변명을 하려다가도 도로 쑥 들어갔다. 아이참, 가슴이 쿵쾅거리고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게, 스릴감이 장난 아니잖아.

솔직히 아드리안이 이렇게까지 추리하고 압박하고 시험하려 들 줄은 몰랐다. 내 계산대로였다면 아드리안은 이미 프로그래밍 로직 외 상황을 맞닥뜨리고 같은 행동만 무한 반복하고 있었어야 했지만, 그는 이미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아무리 기계 학습이 가능한 인공 지능이라도 지금의 게임에서 구현 가능한 수준으로는 저렇게까진 못한다.

아드리안 수준의 인공 지능이 구현 가능했으면, 라이브 이슈가 터져도 개발자들은 야근과 밤샘을 줄줄이 안 해도 되겠지. 정기 점검부터 연장 점검, 임시 점검, 긴급 점검에 이르는 3대 명검을 뽑을 일도 없을 거고. 하물며 이 게임은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온라인 게임도 아니고 패키지 게임인데…….

그래, 꾹 참고 한 모금이라도 마시자. 독약이 참는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목숨이 위험해지겠지만, 내가 쓰러져 죽어 가도 이 게임은 베개 없이 눕는다고 바닥에서 밀쳐 내겠지만…… 독 먹고 죽든, 저놈한테 몰려서 죽든 시기의 차이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에게 대적할 여러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선 안 된다. 만약 알게 되면 스킬을 교묘히 피해 가면서 일을 꾸밀 테니까.

그래, 마시자. 눈 질끈 감고, 이 꽉 깨물고 한 모금만 마시는 거다. 한 모금만 마시는데 뭐, 죽기야 하겠어?

흡! 기합을 넣고 딱 한 모금만 마시려 눈을 질끈 감았는데, 찻잔을 쥔 손이 도저히 올라오지 않는다. 올라와. 찻잔을 입에 갖다 대란 말이야. 그래야 의심을 피할 수 있는데……!

“하…….”

내 손은 마비라도 된 듯 멈춘 채 올라오질 않았다. 이성이 내 생존 본능을 이겨 내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벽에 걸린 듯 턱턱 막혔다.

하, 역시 난 이따위 악의 덩어리는 한 방울도 입에 댈 수 없다.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죽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죽어야 해? 죽더라도 누구 하나는 끌어안고 같이 죽어야지, 혼자는 절대 못 죽어!

“왜 차를 마시지 않지? 문제라도 있는 거야?”

“마시기 싫어서요.”

“뭐?”

“이 차, 마시기 싫어요.”

그린 듯한 눈썹이 휘어 올라갔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 계속 거절만 하는 게 아드리안의 수작에 넘어가는 것임은 알고 있었지만,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게 있는 법이다.

이제 저 악마가 어떻게 나올까? 너는 방해물만 될 뿐이라며 목을 조르려 들까, 눈빛으로 쏴 죽일까, 입을 억지로 벌리게 해 독극물을 쏟아 넣을까? 어찌 됐든 상상되는 시나리오가 죄다 죽이는 것뿐이라 다시 식은땀이 났다. ……혀라도 한번 담갔다 뺄 걸 그랬나?

그때였다. 똑똑, 하고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아드리안은 내 얼굴에 시선을 꽂은 채 한 치의 움직임도 없었다. 찬찬히 뜯어보는 눈길 그대로, 그가 입술만 움직였다.

“누구야?”

“레티샤입니다, 도련님.”

“중요한 일 아니면 나중에 다시 와.”

목소리가 한겨울 서리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안 돼! 가지 마! 살려 주세요……. 나는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겨우 내리누르면서 발뒤꿈치를 들썩거렸다.

도망갈까? 그냥 냅다 뛸까? 병약한 몸뚱이라 따라오지도 못할 것 같은데. 뒷덜미를 후려쳐? 배워 둔 호신술 몇 개를 여기서 써 봐?

“……저, 그게. 방해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셨지만, 힐다를 당장 데려오라는 마님의 분부가 있으셔서요.”

“……하.”

“데려갈 데가 있으시답니다. 힐다가 아니면 안 된다고, 당장 데려오라고 하셔서요.”

아드리안은 짜증 난다는 듯 한숨과 함께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이 방에서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소풍 가기 전 유치원생처럼 눈을 똘망똘망 뜬 채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 후 그가 의자에 등을 깊게 묻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올려다보는 것 같은, 기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손으로 더듬으면 만질 수도 있을 만큼 형형하고 또렷했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힐다, 너는 참 운이 좋아. 어머니께서 친히 부르시는 거라니 가 보도록 해. 차를 못 마셔서 안타깝지만, 기회가 또 있겠지.”

악마가 하는 말이 내 귀에는 ‘네 비밀을 알아낼 기회가 또 있겠지’라고 자동 변환되어 들렸다. 포기하기엔 아직 한참 이르다는 듯한 말투가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 여기를 벗어날 수 있게 된 것만으로 기뻐서 입이 귀에 걸릴 정도였다.

살아남아서 기쁜 것뿐만 아니라, 병약한 환자를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대한 안도감도 있었다. 아드리안은 내게 운이 좋다고 말했지만, 반대로 아드리안이야말로 오늘 운이 좋은 거다.

내가 겁이 많아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악마에게 달려들어 우격다짐할 수도 있다. 듣고 있나, 아드리안? 나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라고! 다음부터 조심해!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도련님. 저 귀중한 차는 도련님께 양보할게요.”

주인 뒤에 숨어서 깡깡거리며 짖는 작은 개처럼 마구 속으로 외쳐 대고는, 레티샤가 문을 열자마자 쪼르르 뛰쳐나갔다. 등 뒤로 살벌한 시선이 화살처럼 꽂혀 들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하아아. 오른쪽 시야의 감지벨이 조금씩 잦아들자 간신히 호흡할 수 있었다. 숨 막혀 죽을 뻔했네.

“빨리 가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대기하고 있으렴. 마님께서 왜 너를 콕 집어서 데려가시겠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다 필요가 있어 그러시는 거겠지. 신전에 가는 거니까 몸단장 단정하게 하고, 마차 안에서도 마님께서 쉬실 수 있도록 조용히 있으렴.”

“네, 레티샤 님.”

“신전은 꽤 머니까 바느질거리라도 들고 가면 시간이 잘 갈 거란다. 혹시 신전에서 다른 귀족과 마주치거든 알아서 처신하렴. 마님께서 마음이 살짝 아프신 거, 너도 알고 있지? 이번 나들이로 허튼 소문이라도 따라붙었다간 네게 책임을 물을 테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알겠니?”

계단을 내려가면서 레티샤는 미리 준비해 온 듯한 잔소리를 줄줄 쏟아 냈지만, 살아남은 데 대한 안도가 더 컸던 나는 싱글벙글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무렴요. 제게 책임을 물으셔야죠.

“저, 레티샤 님, 정말 감사해요.”

“응? 갑자기 뭐가 말이니?”

“설명할 순 없지만, 그런 게 있어요.”

살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호신술이니 가만두지 않겠다느니 큰소리쳤지만, 솔직히 하나도 자신 없었어요. 키보드 배틀이면 몰라도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고마움을 일방적으로 전하며 나는 레티샤 옆에 바짝 붙었다. 더운 여름철의 느티나무 그늘, 풀꽃 사이 서 있는 단단한 기둥, 든든한 손……. 그녀 옆에 있으면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지금만큼은 아드리안이 다시 쫓아와도 그녀가 보호해 줄 것 같았다. 보호색으로 감싸 주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기도 하지.

“너도 참. 싱겁기도 하다. 어머, 얘! 더 들러붙지 마. 벌써 더워지려는데!”

“헤헤, 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티샤에게 더 가까이 달라붙었다. 그녀는 여전히 덥다며 짜증도 내고 신전에서 백작 부인을 제대로 보필하라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나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갈색 반점이 거뭇거뭇 자리 잡은 팔뚝을 살짝 잡아 보았다.

게임에 들어와 최초로 느껴 본 온기에 문득 코가 찡해졌다.

신전까지 백작 부인을 보필하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지난번에 마을로 갈 때 탔던 으리으리한 마차를 이번에도 탔는데, 외제 차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승차감에 놀라면서도 언제 백작 부인이 미쳐 날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저번처럼 핏발 선 흰자위를 보이면서 내 애가 죽었니, 아드리안을 죽일 거라느니 고래고래 소리치면 어쩌지. 이 좁은 마차 안에서 백작 부인이 홱 돌아 버리기라도 하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의외로 백작 부인은 가는 내내 조용했다. 조용했을 뿐만 아니라 행색이 놀랍도록 단정했다. 목 잘린 염소 따위 없이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마치 정상인처럼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핼쑥한 걸 제외하면 그녀는 빚어 놓은 듯 아름다웠다. 항상 헝클어진 채 귀신처럼 늘어져 있던 백금발은 단정하게 묶어 올리고, 늘 눈물에 젖어 있던 속눈썹은 하늘로 뻗어 있었다.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휜 눈썹과 꿀을 녹여 담아낸 듯한 금색 눈동자. 살짝 내리감은 눈은 청초하기까지 했다.

와, 누가 아드리안 친엄마 아니랄까 봐. 세월도 울고 갈 외모였다.

백작 부인은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는데, 나는 바느질을 하면서 틈틈이 그녀의 외모를 감상했다. 정상적인 백작 부인은 앞으로도 보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

시선을 의식한 걸까. 백작 부인이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무래도 상전 얼굴을 미술 작품처럼 감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뜨끔해서 고개를 내렸다. 도로 열심히 바느질하는 척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많이 닮았지? 그 아이와.”

“네? 아, 네.”

굳이 누굴 말하는 건지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드리안은 조금 더 어리고 남성적으로 바뀐 백작 부인일 정도였으니까. 무심코 고개를 끄덕거리고 만 나는 입을 가리고 숨을 삼켰다.

백작 부인 또 내 아이의 거죽을 둘러썼니 뭐니 하면서 발광하는 거 아냐? 마차 안에서 각기춤 보긴 싫은데…….

“그건 언제쯤 완성되겠니?”

하지만 예상외로 백작 부인은 차분히 눈을 내리깔고 또 다른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내가 만들고 있는 염소 인형을 뜻하는 걸 깨닫고 나는 얼른 들어서 보여 주었다.

“이대로라면 2주일 내에 가능할 것 같아요. 크기는 어떠세요? 실제 염소 머리랑 똑같이 만들려다가 아무래도 실용성이 좀 떨어질 것 같아서, 안기 좋게 만들어 봤는데요.”

내가 목표로 만들고 있는 건, 무릎에 놓고 책을 보는 용도로도 쓸 수 있는 말랑말랑한 쿠션이었다. 안거나 베기에도 딱 좋은 크기와 높이라, 완성되면 온종일 안고 있을 백작 부인의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백작 부인은 볼 때마다 공포물을 최고난도로 찍곤 했지만, 사정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면 이해가 안 가진 않으니까. 조금이라도 상처가 치유된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인형은 처음에 며칠이면 완성하겠거니 생각했는데, 바느질을 많이 안 해 본 데다 재봉틀도 없어서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얼마나 솜씨가 없는지 몇 바늘 꿰매지도 못하고 손가락을 자꾸 찔리곤 했는데, 다행히 손이 죄다 두꺼운 굳은살로 도배되어 있어서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내가 염소 인형을 들어서 보여 줬지만, 백작 부인은 마음에 든다 만다 말도 없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음, 뭐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괜찮다. 아직 완성되려면 멀었으니까. 염소 인형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혈흔 아니겠어? 목선을 따라 새빨갛게 색칠해 주면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다.

다시 바느질에 돌입해 손가락을 열댓 번쯤 찔렸을 때였다. 규칙적으로 다각거리는 말굽 소리가 멈추고 마부가 마차 문을 열어 주었을 때, 비로소 신전에 도착한 걸 깨달았다. 백작 부인이 에스코트 받아 마차에서 먼저 내리자 나도 얼른 염소 인형을 챙겨 따라 일어났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신전을 올려다보았는데, 입이 절로 벌어졌다.

“와.”

신전이라니 특별한 게 뭐 있겠냐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신전은 마치 태양처럼 빛을 뿜으며 존재하고 있었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만큼 높은 기둥엔 신의 말씀과 성물이 섬세하게 조각돼 있었고, 기다란 천장을 따라 프레스코화가 성스러움을 뽐내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타고난 악으로 사방을 어두침침하고 차갑게 만든다면, 신전은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성스럽고 따사롭게 느껴졌다.

여기가 바로 힐다가 자랐다는 신전이구나.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백작 부인을 뒤따라 신전에 들어섰다. 희거나 노란 사제복을 두른 이들이 다들 두꺼운 책 하나씩은 낀 채 걸어 다니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신의 말씀을 해석하며 의견을 나누었고, 또 어떤 이들은 신상 앞에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사제들의 얼굴이 죄다 평화와 안식, 깨우침으로 가득했다.

대충 살펴보니 신전에서는 유일신을 섬기는 모양인데, 거대한 복도를 따라 늘어져 있는 수많은 조각상은 신을 형상화한 건데도 죄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쁜 얼굴, 평온한 얼굴, 사악하고 노한 얼굴…… 심지어 사람이 아닌 동물 모습이나 식물, 자연재해로 형상한 조각상도 많았다. 신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우리 옆에 있다, 그런 뜻일까?

백작 부인이 얼마나 신실한지는 모르겠으나, 종교가 없는 나조차 신전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아무 조각상에다 대고 두 손을 모았다.

아무 신이든 좋으니 제발 우리 집 악마 좀 데려가세요. 선착순으로 먼저 데려가 주는 신을 믿을게요. 어때요, 딜?

“프리실라 님.”

“프리실라 님. 오셨군요.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주교님께서 연락받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무엄하게도 신과 거래를 트다가, 도로 정신 차리고 백작 부인 곁에 붙어서 섰다. 백작 부인에게 다가온 이들은 젊은 사제 둘이었는데, 그녀가 오길 기다렸던 것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백작 부인이 먼저 그들을 향해 공손히 예를 갖추자 그들은 기도로써 답했다. 나도 어설프게나마 따라 했다.

“지난번 방문 이후로 발길이 끊겨 대주교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습니다. 요즘 가뜩이나 연쇄 살인으로 어수선하지 않습니까. 대주교님께선 함께 사는 ‘것’이 일을 저지른 건 아닌지 우려하셨습니다.”

“부인께서 부탁하신 걸 준비해 두었다고……. 아, 여긴 듣는 귀가 많으니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 나누시죠. 대주교님 알현실로 모시겠습니다.”

두 사제가 급하게 말을 쏟아 내다 말고 멈추었다. 옆에서 멀뚱멀뚱 서 있는 나를 뒤늦게 발견한 탓이다. 그들은 상아를 깎아 세운 듯한 기둥 사이로 걸어 들어가며 백작 부인을 안내했다. 그녀는 그들을 따라 걸어가기 전, 뒤돌아 내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렴.”

레티샤가 그녀 곁을 한시도 비우지 말라고 했지만, 잠깐 대주교를 만나고 오는 건데 괜찮겠지. 대주교씩이나 되는 사람이 백작 부인에 관한 소문을 낼 리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도 지금 백작 부인은 정상인 것처럼 보이니까. 언제 홱 돌아 버릴지 모르겠지만…….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나는, 여기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신전 구석에 웅크려 앉았다. 이곳에서 상서로운 빛을 쬐며 평화로운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어쩐지 죽음에 대한 위험도 시스템의 협박도 죄다 남 얘기 같다. 이대로 여기 눌러앉아 버릴 순 없겠지? 설마 신전에 있는데 아드리안이 쫓아와서 악의 넘치는 차를 입에 쑤셔 넣으려 하겠어? 알맹이가 악마니까 신전에 들어서면 괴로워하겠지. 여기는 공기마저 신성할 정도인데…….

“으…… 또 독 먹이려고 들면 어쩌지.”

아까는 운 좋게 레티샤가 방해했다지만, 이런 행운이 두 번 생긴다고 장담할 순 없었다. 상비약으로 해독제를 갖춰 놔야 할까? 여차하면 찌르고 도망갈 수 있는 칼? 쌍절곤? 하, 뭐든 돈이 만만찮게 들 텐데. 뽑기라도 있으면…….

잠깐, 뽑기 시스템이라면 있었지. 사흘에 한 번 영웅 아이템까지 뽑을 수 있는, 확률형 뽑기. 지난번에 쓸모없는 잡초 뽑고 감정이 상해 며칠 지났는지 세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무료 뽑기를 다시 할 수 있는 사흘이 지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뽑기 시스템에 사활을 걸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광범위 해독제 같은 아이템이 있으면 좀 주라. 아드리안에게 대항할 수 있는 무기나 스킬 조각 같은 거라도 좋아. 제발.

한 자락 희망을 품고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가방 아이콘을 누르자, 언젠가 봤던 안내 문구가 떠올랐다.

「3일에 한 번 무료로 아이템을 뽑을 수 있습니다.

아이템 획득 등급 : 일반~영웅

레벨이 더 오르면 고급 뽑기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원래 중대한 뽑기나 확률 합성을 할 때는 제물을 몇 개 바쳐야 하는데 말이야. 아쉬운 대로 신전의 성스러운 기운을 뽑기 도박에 걸어 보기로 했다.

사제들이 들으면 신성 모독이라며 기절할 결심을 단단히 굳히며, 기를 모은 손가락으로 ‘무료 뽑기’를 눌렀다. 신전을 배경으로 나타난 빠칭코가 무엄할 만큼 힘차게 돌아갔다.

휘리릭 돌아가던 빠칭코는 영웅 아이템에서 멈출 듯 말 듯 하며 애간장을 태웠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제발 좋은 아이템 하나만 주세요, 네? 이왕이면 영웅 등급으로, 뭐라도 생존하는 데 도움 될 만한 아이템 하나만 주시면 게임 진짜 열심히 할게요. 불평 안 하는 충성 유저가 될게요. 시스템이든 신이든 누구라도 좋으니 제 소원 좀 들어주세요. 나 좀 살려 줘…….

「행운 크리티컬!」

불쌍한 유저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처음 보는 글씨가 룰렛 위에 짠 나타났다. 뭐야, 뭐야. 크리티컬 터졌대. 크리티컬이면 대박 난 거 아냐? 영웅템 먹는 거 아냐? 아직 영웅템 가질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대에 차서 지켜보는 가운데 무지갯빛 번개가 쾅쾅 내리쳤다. 황금 번개보다 무지갯빛 번개가 더 좋은 거겠지? 이번엔 진짜 좋은 거 나오려나 보다. 드디어 내 게임 인생에도 볕 들 날 찾아오는 걸까?

이내 룰렛이 멈추고, 간절히 모은 두 손 위에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아이템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빛이 천천히 사그라지면서 형체를 잡아 갈수록, 내 얼굴도 함께 일그러졌다.

「향기로운 허브를 획득했습니다!

등급 : 희귀

특징 : 백작 부인의 마음을 1/10,000 정도 치유할 수 있음」

무슨 대단한 거라도 주는 양 하얀 글씨가 당당하게 나타났다.

뭐야. 또 풀이잖아……. 나는 도토리 뺏긴 다람쥐처럼 처량해졌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다. 1/10,000 정도 치유라니, 게다가 ‘정도’를 붙여 놓으니 확신도 없어 보인다. 1/10,000 정도라면 치유되긴 하는 건가?

크리티컬이니 뭐니 사람 잔뜩 기대하게 해 두고 결국, 똑같은 잡초잖아! 화가 난 내가 허브 쪼가리를 바닥에 패대기치려 했지만, 뽑기 효과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손에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설명은 끝까지 읽으세요.」

내가 허브를 내던지려고 손을 파닥거리고 있자 흰 글씨가 내게 경고했다.

「끓는 물에 허브를 넣은 후 뚜껑을 덮고 15분 후에 마시는 것이 좋음」

난데없이 차 우리는 방법을 늘어놓은 시스템은 ‘그럼 나는 이만!’이라고 말하듯 깔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이 순간 나는 단단히 결심했다. 만약 이 시스템이 사람 형상을 하고 나오는 날이 있다면 내 모든 불운을 걸고 주먹부터 날리겠노라고. 진짜 이놈의 풀떼기 지긋지긋해 죽겠다.

잔뜩 뿔이 난 채로, 쓸데없이 살랑거리는 허브를 내동댕이치려다가 겨우 참고 손을 내려놓았다. 이런 풀떼기라도 아이템이니까 일단 가지고 있자. 아이템은 다 돈이니까…….

「희귀 등급 아이템을 처음으로 획득하여 경험치 500을 얻었습니다.」

「레벨 11로 올랐습니다. (칭호 : 악마의 성실한 하수인)」

상태바가 확 차오르는 걸 본 나는 허브를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그래, 내 팔자에 무슨 영웅템이야. 아이템 무료 뽑기에서 좋은 게 나오리라고 기대한 게 바보지.

왠지 처량한 기분이 들어 몸을 웅크린 채 염소 인형과 바늘을 집어 들었는데, 그 순간 누군가 내 등을 짝 후려치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루, 룰렛 돌리는 걸 들켰나? 신성 모독이라고 쫓겨나는 거 아닐까? 흠칫하며 뒤를 돌아봤는데, 노파의 주름진 눈과 코앞에서 마주쳐서 소스라치게 놀라 버렸다. 으악!

“힐다! 이게 얼마 만이냐!”

놀란 나머지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는데, 노파는 주름진 입술을 휘어 올리며 크게 반가워했다. 오랜만에 손자를 만난 시골 할머니처럼 환하게 웃는데, 누구인지를 모르니 당황해서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었다. 노파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무릎을 굽혀 앉았다.

“이제껏 얼굴 한번 안 비치고 뭘 한 게야? 팔츠그라프 댁으로 갈 때 그리 좋아하더니, 얼굴 한번 안 보여 줄 정도로 그리 좋았던 게야?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편지라도 좀 하지 그랬니. 할미가 섭섭해서, 원.”

“죄, 죄송해요. 일이 워낙 바빠서,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그래, 안다, 알아. 나라에 큰일 하시는 분이 계시는 저택인데 당연히 바쁘겠지. 할미도 그렇게 생각해서 딱히 찾아가 보지 않았단다. 언젠가 한 번쯤 생각나면 편지라도 한 장 보내 줄 거라고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지나 버렸어.”

이런, 힐다의 할머니인가 보구나. 내가 놀란 표정을 가다듬고 마주 보자 주름진 눈이 애정을 담고 부드럽게 휘었다.

“우리 힐다, 그동안 잘 지냈니? 신전에 막 들어와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던 걸 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정말이지 다 컸구나. 어엿한 숙녀가 다 됐어. 좋은 사람 있으면 시집가도 되겠는걸.”

“네, 잘 지냈어요. 연락 소홀히 해서 죄송해요. 건강은 좀 어떠세요? 아픈 곳은 없으세요?”

“괜찮다, 괜찮아. 이렇게라도 봤으니 됐지. 몸이야 뭐, 나이가 나이니 어디 하나 멀쩡한 데가 없긴 하단다. 얼마 전에 배가 하도 아파서 참다 참다 의원님을 찾아가 봤는데, 글쎄, 배 안에 혹덩이가 생겼을 거라지 뭐니.”

“세상에, 그래서요? 치료 가능하대요?”

게임 설정 완전 디테일하네. 내가 살짝 놀라 묻자 노파가 자기 배를 둥글게 어루만졌다.

“슬프게도 그렇지 않더구나. 하지만 어느 좋으신 의원님께서 고통을 줄여 줄 수 있는 약을 주셨단다. 침 한번 삼키기 힘든 아픔을 이제 어느 정도 견딜 수 있게 됐지.”

“정말 좋은 분이네요. 그런데 그렇게 몸이 안 좋으신데 계속 여기서 일해도 괜찮으세요? 이제 쉬셔야 하는 거 아녜요?”

“그러잖아도 조만간 일을 그만두고 신전을 나가기로 했단다. 진통제를 지어 주신 의원님께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시기로 했지. 팔츠그라프 가문에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마련된 작은 요양원이 있다는데, 거기서 지내라고 하시더구나.”

저택에 있는 작은 요양원이라면, 휴버트가 과거에 운영했다는 호스피스용 의료원을 말하는 듯했다. 분명 휴버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했었지. 선행을 위해 지어진 곳인데 지나갈 때마다 왠지 모를 불길함에 소름이 돋곤 했다. 과거에 사람이 여럿 죽어 나간 곳이라 그렇겠지?

“정말 감사한 분들이지. 이 할미가 신전을 나가면 돈이 있니, 가족이 있니. 팔츠그라프 가문이 아니었다면 길바닥에서 죽어 가다, 악마를 만났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평생 신을 모시며 봉사해 온 일꾼이 고통스러운 끝을 보내지 않도록 신께서 직접 사도를 내려 주신 거겠지.”

“악마…… 요? 에이, 그런 게 있을 리가요.”

악마는 존재하지만, 신전 골목까지 들여다볼 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