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33)

3-2. 생존형 ○○로 전직했습니다.

「스토리가 일정 이상 진행되면 새 게임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뭐!

산사태가 일어나 내 머리 위로 모조리 쏟아지는 느낌이 이런 걸까. 생각지도 못한 문구를 맞닥뜨리자 숨이 멎었다.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니던 온갖 생각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리셋이 왜 안 돼? 첫날 손에 불이 나게 잡초 뽑은 날은 멀쩡히 리셋됐었잖아. 우리 사이좋았잖아. 갑자기 이러면 나는 어쩌라고. 아냐, 이럴 리 없어, 이럴 리…….

「스토리가 일정 이상 진행되면 새 게임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스토리가 일정 이상 진행되면 새 게임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스토리가 일정 이상 진행되면 새 게임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믿기지 않아 여러 번 눌러 봤으나 여러 번 사형 선고를 마주하게 될 뿐, 내가 원하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게임은 새로 시작되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레벨 10 중반의 힐다였으며, 창가에서 눈빛으로 날 죽이려는 악마는 호감도 44의 아드리안이었다.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에, 언젠가 읽었던 베스트셀러의 첫 문장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난 완전히 좆 됐다.

“할 일이 끝난 것 같네. 이제 뭐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부드러운 음성이 귀에 꽂히고 심장을 후벼 팠다.

……아까 그냥 기절해 버렸어야 했는데.

“조금 전 한 말부터 설명해 볼까? 간다니, 어디로 간다는 거야?”

버튼 누르고 지를걸. 버튼 누르고, 리셋되는지 확인하고, 흰빛에 싸여 사라지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를걸.

학생 때 선행 학습도 안 했으면서 왜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질러 버렸을까. 전자레인지에 삼각김밥 돌릴 때 비닐도 뜯지 않던 내가 왜 지금은 먼저 입을 놀렸을까. 왜 그랬을까…….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아드리안의 눈치를 봤다.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바라보는 모습이 천재 조각가가 일생을 바쳐 빚어낸 예술품 같았으나, 실상은 살의에 불타는 검은 악마였다. 반들거리는 눈은 오로지 나만을 향해 있다. 먹잇감을 잡기 전 몸을 바닥까지 낮추고 지켜보는 표범처럼.

“……저, 도련님. 제가 조금 전에 기면증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기면증이 심해지면 눈 뜨고 잠들기도 하고, 잠꼬대도 곧잘 하거든요. 남들이 들으면 멀쩡하게 들려서 잠꼬대라고도 생각 못 하는 그런 말요. 제가 어딜 간다고 했나요? 하, 하하. 분명 꿈나라를 얘기한 걸 거예요.”

“흐음. 나를 악마 새끼라고 욕한 게 잠꼬대였다?”

“세상에, 제가 그런 말을 했어요? 세상에, 세상에. 요, 요 버릇없는 조동아리를 그냥! 제가 당장 이 조동아리를 혼내 줄게요. 도련님이 보시기엔 흉한 장면일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여기서 푹 쉬고 계세요. 그럼 전 이만…….”

“돌아와, 힐다.”

“……용서해 주세요, 도련님. 그래도 잘 먹고 잘 사시라는 진심 어린 덕담도 했잖아요?”

“잠꼬대라 기억 못 하는 거 아니었어?”

아차.

“제가 습관적으로 하는 잠꼬대라, 이번에도 했겠거니 했어요. 하하, 하……. 찍은 건데 맞아 버렸네요…….”

「아드리안이 당신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던지 흰 글씨가 모래알처럼 모여들었다. 그래, 저지른 짓이 있으니 의심할 만하지. 대놓고 악마라고까지 해 버렸으니. 탱커도 아닌데 어그로를 거하게 끌어 버렸다.

그래도 머리는 쥐어박지 않아서 참 다행이지 뭐야. 진짜 쥐어박았으면 나는 여지없이 괘씸죄로 목 잘렸을 거다. 지금도 조금 달랑거리는 것 같지만. 하하, 하…….

「아드리안을 설득하여 살의를 낮추세요.」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죽습니다.」

글자는 곧 흩어져 사라졌지만, 마지막 말은 가슴에 쿵하고 박혀 떠나질 않았다.

죽습니다, 죽습니다…….

늘 아드리안이 날 죽이지 않을까,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게 아닐까 마음 졸였는데 시스템에서 이런 확실한 경고를 받은 건 처음이다.

죽는다니. 이번엔 장난이 아니라 진짜였다. 두려움이 솟지만 어이가 없기도 했다. 뭐야, 이렇게 알려 주는 줄 알았으면 일일이 히이익거리지 않아도 됐잖아. 별것 아닌 일에 괜히 수고스럽게 히이익거리고 있었네.

“나는 힐다, 네가 남들이 알지 못하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만 같거든.”

「아드리안의 살의 67%」

조용한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흰 글씨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67%! 살의가 자그마치 67%라니! 저 정도면 죽여서 얻는 경험치가 짜다거나 귀찮다고 안 죽일 수준이 아니잖아.

67%까지 치솟은 살의를 잠재울 변명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내 인생 모토가 ‘포기하면 편해’였지만, 지금 포기했다간 목숨도 같이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맹렬하게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조금 전에 했던 말부터 수습하자.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이듯 아드리안의 살의도 1%부터 줄여야 한다.

“악…… 마 새끼 때문에 그러신 거라면 정말 죄송해요.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어요. 마님 시중을 들면서 자주 듣는 말이라. 애, 애정을 담아 부르는 애칭이랄까요. 제일 친한 하인한테도 오늘 장난으로 그렇게 불렀어요. 야, 악마야…… 라고.”

“흐음.”

「아드리안의 살의가 오릅니다.」

「아드리안의 살의 71%」

젠장, 괜히 말했어. 4%나 더 올랐잖아.

“너도 그 말을 믿었구나. 그거참 실망이야.”

“그렇다기보단…… 도련님의 외모가 워낙 출중하셔야죠. 사람을 홀리는 악마가 아니고서야 그렇게 잘생길 수는 없다고 자주 생각했어요. 그래서 무의식중에 그런 말을…….”

「아드리안의 살의가 오릅니다.」

「아드리안의 살의 76%」

평소에 잘 먹히던 아부도 안 먹힌다. 100% 되면 죽는 거겠지? 이제 24%밖에 안 남았는데. 조졌다. 거의 죽이기로 한 거나 다름없는데 저걸 어떻게 되돌려? 저 살의를 낮추려고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거보다 유서를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아드리안의 살의가 오릅니다.」

「아드리안의 살의 80%」

이젠 아무것도 안 하고 존재만 하는데도 살의가 오르는구나. 나는 언젠가 배워 놨던 호신술 몇 개를 떠올렸다. 이 건강하고 튼튼한 힐다의 몸이면 저 병약한 도련님을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진심으로 죽이겠다고 덤벼들면 사람이든 악마든 당해 낼 자신은 없다.

그냥 도망갈까? 그래, 그게 좋겠다. 어차피 저 악마 놈은 방 밖으로 나와서까지 날 죽이려 들 수는 없으니까. 폐활량은 내가 앞설 테니,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는 거보다 쫓아오다 지치게 해서 살의를 낮추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냥 죽여 버리고 싶은데, 궁금한 게 아직 남아서 말이야.”

말했다, 말했어! 죽여 버리고 싶다고 말했어! 언제는 뭐, 천적은 살려서 두는 게 이득이라고 얼굴에 힘줘 가며 나불대더니! 역시 날 방심시키려던 전략이 분명했다.

그래도 궁금한 게 남았다니 다행이다. 없었으면 바로 죽였을 거 아냐.

“왜 하필 지금, 몇몇 개만 골라 빼돌렸을까. 내 방은 수백 번도 더 들어와서 청소했을 텐데.”

머릿속에 떠오른 변명은 단 두 개였다. 첫째, ‘제가 사실 도벽이 있어서요’. 이런 변명을 댔다간 저택에서 쫓겨나 밥줄이 끊어지게 되겠지. 게임 감옥에 갇힌 것도 억울한데 노숙자 꼴로 죽어 가는 건 더 억울하다.

둘째, ‘네가 그 물건들로 사람 죽일 거 알아서요’. 그런 말을 했다간 ‘그래? 그럼 네가 먼저 죽어.’라며 악의 깃든 도구를 친히 실험해 볼 테지.

하, 좋은 변명거리 없나. 이 상황을 완벽히 설명하고 살의도 낮출 수 있는.

“뭐, 궁금하긴 하지만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변명을 채 생각하기도 전에 아드리안 쪽에서 먼저 움직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궁금한 거 있다며! 대답도 안 듣고 날 죽이겠다고?

깜짝 놀란 나는 쫓기는 것처럼 뒷걸음질 쳤다. 프리실라 백작 부인을 만난 후, 잘린 염소 머리가 꿈에 나온 적이 있었다. 피를 질질 흘리며 따라오는 염소 머리를 피해서 도망치다가 끝에 몰려 깼는데, 얼마나 무서웠는지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코앞까지 다가와 멈춘 그가 몇 배는 더 두려웠다.

등이 벽에 닿을 때까지 주춤주춤 물러났다. 내가 물러난 이상으로 빠르게 다가오던 아드리안이 멈추었다. 우리 둘 사이의 텅 빈 공기에 정적이 가라앉았다. 감히 한 줌의 숨도 풀어 놓을 수가 없다. 누군가 숨통을 잔인하게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다.

바닥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 숨을 쉬는지조차 의심될 정도로 미동 없는 가슴. 어둠 속에서 빛나는 기이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손끝에서부터 소름이 쫙 올라왔다. 여기 사람 죽어요. 누가 좀 살려 줘, 제발…….

“왜 그렇게 봐, 힐다. 내가 뭘 할지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아드리안의 살의가 오릅니다.」

「아드리안의 살의 87%」

짐작은 짐작으로 끝났어야 했는데.

“무서울 텐데, 눈 가려 줄까?”

「아드리안의 살의가 오릅니다.」

「아드리안의 살의 89%」

적당히 불그스름하던 글자는 이제 감지벨처럼 새빨간 색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내 목숨이 위험해지니 시스템이 온몸으로 도망치라고 외쳐 대는 것 같았다. 사람 엿 먹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난리라니,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불쌍하면 ‘New Game’이나 가동되게 해 주든지. 바다에 밀쳐 빠뜨려 놓고, 익사하기 직전이니 얼른 나오라고 소리쳐 대는 꼴이잖아. 상황 수습은 항상 유저한테 맡겨 놓고 말이야.

살의 89%라니 이제 다 틀렸다. 뭐라고 변명하든 통하지 않을 테고……. 아니, 잠깐. 하나쯤 생각나긴 한다. 의심을 줄일 수 있지만, 어지간히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짓.

부작용도 상당할 게 뻔해서 곧장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과연 통하긴 할까. 그 짓이…….

「아드리안의 살의가 오릅니다.」

「아드리안의 살의 91%」

맨정신에 그 짓을 어떻게 할지 아찔하기까지 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떠밀리듯 심호흡을 뱉었다. 그리고 목을 조르려는 것처럼 손끝을 움찔하는 아드리안을 독하게 쏘아보았다.

“도련님이 자꾸 이렇게 나오시면 저도 참지 않을 거예요.”

“뭘, 참지 않는다는 거야?”

“진짜, 자꾸, 이러시면……!”

내가 씩씩대며 격양된 얼굴로 외쳤다. 아드리안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져 가는 게 보였다. 어떤 가소로운 짓으로 자신에게 대항할지 흥미로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아, 모르겠다! 밑져야 본전이지!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아드리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좁은 거리였지만, 내가 갑자기 황소처럼 돌진하자 도리어 그가 깜짝 놀라 물러났다. 왜 자꾸 피하는 건데! 나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어 말 그대로 와락 안겼다.

반사적으로 벗어나려는 그를 두 팔로 꽉 끌어안고 가슴팍에 코를 박았다. 그 와중에 가슴판은 단단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정원에서 삽질하고 있을 때 은은하게 피어오르던 장미향.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섞여 들던 향기로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으니 그의 몸이 한껏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아드리안이 거센 힘으로 날 밀쳐 버렸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마저도 빗나갔는데, 나는 있는 힘껏 내쳐져서 바닥에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내가 정말 아픈 것처럼 비명까지 내지르자 아드리안의 어깨가 크게 흠칫했다.

“미…… 안해. 밀쳐서.”

“아녜요. 갑자기 달려든 제가 잘못이죠.”

“그런데…… 방금 뭐 한 거야?”

많이 당황한 건지, 한 치의 오차 없던 표정에 금이 가 있다. 이 방에 들어왔을 때 들었던 ‘미안하다’와 판이한 어조였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개처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죽어도 하기 싫은 말을 읊조렸다.

“하…… 진짜 도련님 체취 너무 좋아……. 장미향…….”

“…….”

“진짜 너무하세요. 아침에 전부 들으셨잖아요. 이제야 겨우 도련님에 대한 마음을 접어 가고 있었는데 가까이 와서 그윽한 눈빛을 쏴 대고. 너무해요. 그런 악마처럼 잘생긴 얼굴로 가까이 오시면, 저는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요.”

나는 수치를 모른다. 부끄러움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아드리안의 지병 ‘천식’이 발동합니다.」

“쿨럭, 쿨럭!”

「아드리안의 살의가 내려갑니다.」

「아드리안의 살의 85%」

“손에서 도련님 향기가 다 날아가 버리고 말았어요. 도련님, 무례하지만 딱 한 번만 더 안겨서 맡아 봐도 될까요? 더는 욕심내지 않을게요.”

“잠깐, 거기 서서…… 다가오지 마.”

「아드리안의 지병 ‘두통’이 발동합니다.」

“으…….”

「아드리안의 살의가 내려갑니다.」

「아드리안의 살의 72%」

「아드리안의 지병 ‘천식’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드리안의 살의가 내려갑니다.」

「아드리안의 살의 60%」

“쿨럭, 잠깐, 힐다. 쿨럭, 그, 기구를…….”

지나치게 당황하게 했던지 아드리안이 괴로워 보이는 기침을 쏟아 냈다. 음식을 잘못 삼켰을 때 튀어나오는 재채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통스러운 소리가 났다. 폐를 끝까지 쥐어짜는, 기관지를 긁어내는, 발작적으로 온몸을 흔드는 그런 기침이었다.

천식 환자들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기에 나는 냉큼 침대 옆 협탁에서 흡입기를 가져와 그에게 건네주었다.

흡입기를 입에 문 그가 색색거리며 몇 번 호흡했다. 나는 그가 괜찮아지는지 걱정하는 척하면서, 안개처럼 모여드는 흰 글씨를 주시했다.

「아드리안의 지병 ‘천식’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드리안의 살의가 내려갑니다.」

「아드리안의 살의 51%」

「아드리안의 지병 ‘천식’이 나아집니다.」

「아드리안의 살의가 내려갑니다.」

「아드리안의 살의 42%」

「당신은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생존 상태로 진입합니다.」

온통 새빨개져서 위기라고 외쳐 대고 있던 시스템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감지벨이 아직 작은 소리로 왱왱거리고 있긴 하지만, 조금 전보다는 시각적으로 훨씬 편안해졌다. 살의가 0%까지 떨어지지 않더라도, 어느 선 이하로 내려가면 생존 상태로 간주하는 모양이다. 1% 오를 때마다 숨통을 조여 오던 아드리안의 살의 계기판도 이젠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머리 위까지 드리웠던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자 맥이 탁 풀리며 졸음마저 왔다.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는지 회의감도 함께 밀려왔다.

“그래서…… 물건을 왜 훔쳐 간 거라고?”

그새 호흡이 편해진 아드리안이 지친 얼굴로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러고 보면 쟤도 참 불쌍하긴 하다. 악마 세계에서는 군주가 될 수도 있었던 강인한 악마였는데 릴리트의 저주로 한순간에 저 병약한 몸뚱이에 갇힌 거니 말이다.

천하가 우스웠던 강자가 작은 기구 하나 없으면 호흡조차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릴리트고 뭐고 다 때려 부수고 싶었을 거다. 쟤도 여기에 있으니 몰래 인간을 죽일 수밖에 없는 거지, 원래 있던 세계에서는 악마를 대놓고 죽일 수 있었을 텐데. 따지고 보면 아드리안은 릴리트의 희생양인 셈이었다.

그렇다고 날 죽여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 제 입으로 또 말씀드려야 하다니 정말 섭섭하네요. 정말 몰라서 물어보시는 건 아니죠?”

“……그러니까 체취를.”

“도련님께 가진 마음을 접긴 했지만, 소중한 추억 몇 개쯤은 간직하고 싶었어요. 도련님이 자주 쓰셔서 향기가 많이 스며든 것들만 골라서요. 정말 이것만은 끝까지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하…….”

길고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마에 팔을 얹은 채 고개를 젖히는 걸 보니 아직 두통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발작이 일어날 만큼 내 행동이 급작스러웠다는 건 알지만, 이쪽도 수치사하기 일보 직전이니 비기는 셈이다. 오그라든 손발은 나중에 펼 수나 있을까.

“힐다. 그 마음은 알겠지만, 훔쳐 간 물건들은 도로 가져오도록 해.”

“네, 알겠어요……. 그런데 도련님, 검은 장갑요. 장갑만 저 주시면 안 될까요?”

고대 마법까지 걸린 악의투성이 장갑을 그대로 돌려주긴 아무래도 찝찝했다. 팔 아래 숨겨져 있던 아드리안의 고매한 눈매가 살짝 드러났다.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에 한 대 툭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내 눈동자가 다시 내려갔다.

“그, 특히 체취가, 많이…….”

“……클로짓에서 내 가운을 꺼내 와.”

장갑 얘기하고 있는데 왜 뜬금없이 가운 얘기야? 속으로 투덜대며 나는 창문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황금실로 수놓인 고풍스러운 꽃무늬 파티션 뒤로 돌아가자 클로짓이 보였다. 잘 개어진 보송보송한 가운을 들고 아드리안 앞에 다시 가자, 그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거라도 가져.”

“……예?”

“내가 목욕 후에 항상 걸치는 거니까, 장갑보다 더 유용할 거야.”

가운 먹고 장갑 내놓으란 말이었다. 하, 이거 딱 봐도 살의 하나 없어 보이는데 어디에다 써먹으라고. 아무리 역사책 읽다가도 살의를 느끼는 부지런쟁이라고 해도 금방 목욕 마치고 와서 살인 계획을 세우진 않겠지. 가운으로 사람을 죽일 리도 없고 말이야.

“왜? 더 필요해?”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이상하게 여겼는지 그가 물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가운을 바라보던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운을 보물이라도 되듯 꼭 껴안았다. 수치로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아드리안 눈에는 기뻐서 견딜 수 없는 거로 보이겠지.

“아니에요. 이걸로도 충분해요. 정말, 너무 좋네요. 가보로 간직해야 할 정도예요.”

“그래, 그러니 장갑은 가져오도록 해.”

“네…….”

어쩔 수 없다. 이 핑계로는 여기까지가 한계다. 이보다 더했다간 급하게 꺼 놓은 의심에 다시 불을 지피는 거겠지. 어찌저찌 말도 안 되게 넘어가긴 했는데 아드리안을 완전히 속였는지는 자신이 없었다. 처음에 위기라며 알림이 떴을 때부터 살의가 절반은 넘어 있었는걸.

“이에 대한 벌은 달게 받을게요, 도련님.”

“힐다, 벌 받고 싶은 거야?”

왜 희미하게 웃는지 알 수가 없다.

“도련님을 섬겨야 할 하인으로서 감히 주인의 물건에 손을 댔으니까요. 하지만 저택에서 내쫓지는 말아 주세요. 전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고 여기서 퇴직금을 받지도 못할 테니까요. 거리에 나앉으면 저 정말 굶어 죽을지도 몰라요, 도련님. 대신 제게서 약 시중이라는 고귀한 일을 거두어 주세요. 어떤 허드렛일도, 잡초 뽑기나 마구간 똥 치우기도 좋아요. 도련님을 아침마다 못 뵙게 되는 게 제게 가장 큰 형벌일 테니까요.”

이 저택의 주인이니 아예 보지 않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매일 정기적으로 마주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내게 살의가 남아 있다는 걸 아는 지금은 더더욱, 피하고 싶어졌다.

“……됐어. 그 마음을 받아 줄 수도 없는데 가혹한 일까지 시킬 순 없지. 나에 대한 마음이 또 어떤 방향으로 튈지도 모르고 말이야.”

아드리안은 또다시 한숨을 쉬더니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냐. 거기로 가는 거 아냐. 유턴해, 유턴.

“좋아. 이제 내 시중은 힐다, 네가 들도록 해. 약 갖다주는 일뿐만 아니라 전부 다. 기한은 네가 마음을 접었다고 내가 판단할 때까지야.”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건 대체 무슨 날벼락이야. 아침에 마주치는 것만으로 수명이 반씩 잘려 나가는데 내일부턴 온종일 님 얼굴만 보고 있으라고요? 말이 좋아 시중이지, 24시간 저 악마 놈의 감시망에서 살란 소리였다.

“도, 도련님. 저 진짜 다 잊었어요. 가운! 가운도 주셨잖아요. 도련님이 너무 그리워지면 가운에 얼굴 묻고 살게요. 말똥 치우는 일이든 뭐든 좋아요. 못 먹는 떡이 눈앞에 있는 게 더 고문이에요. 물건도 안 훔칠 테니 제발…….”

“내 말대로 하도록 해.”

썰어 내듯 단호한 말에 혀가 잘린 듯했다. 아드리안과 몇 번 얘기하다 보니 나름대로 대화 요령이 생기긴 했다. 이 이상 토 달면 안 된다는 선 같은 게 보인달지.

하……. 이제 밤낮없이 저 악마를 보게 생겼다. 늪에서 겨우 벗어나니 낭떠러지 앞에 선 꼴이다. 악마가 직접 죽이지 않더라도 조만간 분명 말라 죽어 버릴 거다. 나는 악마에게서 되도록 멀어지고 싶은데, 자꾸 사방에서 악마의 손이 튀어나와 아드리안 앞으로 끌어다 놓는 것 같다. 가운을 안은 채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데, 잊고 있던 흰 글씨가 날 조롱하듯이 떠올랐다.

「칭호가 변경되었습니다. (칭호 : 악마의 성실한 하수인)」

방으로 돌아온 나는 아드리안의 물건들을 하나씩 도로 꺼냈다. 이 게임 세상 캐릭터들을 구할 영웅이라면서 으스대며 가져왔던 것치고 초라한 결과였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하긴 아쉬워 장갑은 내 방 옷장에 있던 것과 바꿔치기해 가져갔는데 아드리안은 그걸 또 알아차렸다. 또 죽일 듯이 살벌하게 굴길래 냉큼 다시 갖다줬다.

저것만은 돌려주면 안 됐는데……. 나는 아쉬운 눈으로 장갑을 바라보다가 재빨리 계획을 수정했다. ‘투시자의 눈’으로 확인한 악의 넘치는 물건을 아드리안이 사용하려고 들 때를 노리는 거로. 아쉽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일급이 들어왔습니다.」

「골드 +30G」

「‘에밀리의 부탁’ 보너스 골드 +20G」

시야 위쪽에 흐릿하게 떠 있던 금색 동전이 환해지며 60골드가 110골드로 바뀌었다. 뜯기는 거 없이 멀쩡하게 일급이 들어온 데다 ‘부탁’ 시스템으로 보너스까지 들어왔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고 축축 처졌다. 돈이 있는데도 기쁘지 않다는 건 무척 드문 일이었다. 세상이 망할 징조나 다름없다는 거지.

내일부터는 내내 악마 옆에서 벌벌 떨며 살아야 하는데 돈이 다 무슨 소용이야. ‘악마의 성실한 하수인’이라는 칭호 또한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악마의 하수인이라니, 그 와중에 성실하기까지 해서 더 싫다.

나는 언젠가 했던 게임에서 악마의 하수인으로 나오던 별 한 개짜리 임프(Imp)를 떠올렸다. 귀가 뾰족하고 이마에 뿔이 달려 있었고, 우람한 몸에 척추뼈는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소악마. 배는 불룩하고 고약한 성미에 무엇보다도 못생겼다.

내가 그 난쟁이 똥자루라고? MMORPG 게임을 하면 캐릭터 외모 빚느라 네다섯 시간씩 보내던 나인데, 게임 속에 들어와서는 변태 임프라니, 살인마 하수인이라니…….

“하……. 사표 내고 싶다.”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사표 하나씩 가슴에 품고 출근한다지만, 지금은 정말이지 진심이었다. 이 저택, 복지도 안 좋고 연봉도 별로고. 연봉 협상은커녕 툭하면 손해 배상 청구에, 집단 따돌림에, 이젠 살해 위협까지.

마을 아주머니들이 백작저에서 일할 수 있도록 힘써 달라며 청탁하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아주머니 딸 여기 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몰라요…….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레티샤가 하인 모두를 불러들였다. 그녀는 하인들 사이에 끼어 있는 나를 보더니 말하려던 걸 잠깐 멈추었다. 그러더니 어딘지 뒤숭숭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중요한 지시 사항이 있어 너희들을 불렀다. 아드리안 도련님께서 특별히 지시하신 내용이니, 잘 듣고 한 치의 오차 없이 따라 주길 바라.”

하인들 사이에서 아드리안은 마치 위험하고 신비로운 신과 같은 존재였다. 정해진 그의 방에 존재하되 쉽게 볼 수 없다. 컨디션이 좋을 땐 산책하러 밖에 나오기도 하지만, 그 시간 동안 하인들이 정원에 접근하는 건 엄격히 금지되기 때문이다. 그가 사실 악마라는 백작 부인의 폭로 때문에 불길하지만, 몸이 약한 탓에 안쓰러움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기묘한 인물. 그 신비로움이 선망으로 변하고, 선망은 곧 동경이 되어 하인 대부분은 아드리안을 환상적 존재로까지 여기고 있었다. 신이 빚어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외모도 한몫하겠지만.

“아드리안 도련님께서? 웬일이야.”

“혹시 약 시중을 바꾸시려는 거 아닐까? 힐다, 얼마 전에 와장창 다 깨 먹었다던데.”

키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웃는 시선이 내 볼을 찔렀다. 아드리안에 대한 경외심이 큰 만큼, 나를 괴롭히는 목소리도 컸다. 다른 시중은 최소한의 인원 사이에서 번갈아 가며 들지만, 아침에 약 시중 드는 것만은 내가 고정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약 시중이랄 것까지도 없는 게, 쟁반에 약 챙겨서 갖다주는 게 전부인걸. 내가 물을 먹여 주길 해, 입으로 약을 넘겨 주길 해? 이렇게 황당한 시기 질투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부럽고 좋으면 너희나 하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나는 살고 싶으니까…….

“……앞으로 아드리안 도련님의 모든 시중은 힐다 혼자 맡는다.”

기대로 잠시 들떠 있던 분위기가 찬물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이제 힐다가 도련님의 전속 시종이니, 나머지는 도련님 방 근처엔 되도록 얼씬도 하지 말도록. 이상.”

“…….”

“…….”

“……뭐야, 진짜야?”

“힐다가? 세상에. 이러다 진짜…….”

“진짜 아드리안 도련님의 뭐라도 되는 거 아냐?”

큰 충격을 받고 한동안 조용하던 하인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쟤가 결국 아드리안 도련님께 꼬리 친 거다.’, ‘지금이라도 힐다한테 잘 보여야 하는 거 아니야?’, ‘힘만 무식하게 센 하인이 뭐가 좋다고 도련님은!’ 등등, 커져 나가는 수군거림 속에 온갖 추측과 비웃음, 염려, 부러움이 다 섞여 들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다들 부러워하는 눈빛이었다. 악마의 하수인 지원자가 저렇게나 많다니 세상 말세다.

노려보는 시선 중에 델로레스가 눈에 밟혔다. 베개 사건으로 패거리는 잃었으나 복수심은 남았는지 달려들어 죽일 기세다. 그녀 옆엔 건장한 체격의 남자 하인이 있었는데, 아마 새벽에 창밖에서 민망한 짓을 벌였던 상대로 보였다. 껌 좀 씹게 생겨서, 질이 안 좋아 보였다. 당분간 잘 피해 다녀야지.

“힐다, 뭐 하고 있니! 빨리 도련님께 가 보지 않고.”

나를 빨리 이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게끔 도와주려는 듯, 레티샤가 단단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 또한 확신이 없는지 심란한 얼굴이다. 나를 입에 넣고 부수고 조각내느라 혼잡한 이곳에서 나라고 오래 있고 싶을 리 없었다.

유일하게 에밀리의 염려 어린 위로를 받고, 나는 자리에서 벗어나 주방으로 갔다. 하인 무리와 멀어질수록 억울함과 울분은 커졌다.

나라고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닌데. 나만 좋으라고 악의 어린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닌데. 모르는 새에 자기들도 죽을 위기를 넘긴 건데 그것도 모르고 헐뜯다니.

싫다는 데도 아드리안이 머리끄덩이 잡아당겨서 옆에 앉힌 걸 보면, 진짜 감시하려는 의도처럼 느껴져서 찝찝하단 말이다. 뭐라도 꼬투리 하나 잡히면 바로 물어 죽일 것 같은 눈이라고.

“그래, 이렇게 된 바엔 더 확실하게 하는 수밖에 없어.”

어제가 부족했다면 앞으로 더한 짓을 해서 믿게 만들면 된다. 기왕이면 도저히 옆에 두고는 견딜 수 없게 해야겠다.

두 번 다시 꼴 보기 싫을 만큼, 확실히.

속으로 단단히 다짐한 나는 약을 마저 챙겨서 부엌을 나왔다. 곧장 아드리안의 방으로 향하는 대신 내 방에 들러서 어제 받았던 가운을 챙겼다. 아드리안이 바라는 대로 가운이나 먹고 떨어질 순 없지.

“도련님, 힐다예요. 약 가지고 왔어요.”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드리안은 얇은 셔츠 차림으로, 금으로 수놓아진 파티션 옆 문 앞에 서 있었다. 윗단추 몇 개는 풀어 헤친 모습에, 솔직히 눈이 홀렸다. 나는 얼른 허리를 굽혀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도련님. 오늘 햇살이 무척 좋은데요. 좋은 꿈 꾸셨나요?”

“……응. 약은 협탁에 두도록 해. 씻고 나와서 먹을 테니까.”

“네. 분부대로 할게요, 도련님.”

나는 또박또박 고분고분하게 대답하고 침대를 가로질러 협탁으로 향했다. 돌돌 말아서 겨드랑이에 끼우고 온 가운을 티 나게 과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멀찍이서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그가 가운을 보자마자 물었다.

“가운은 왜 도로 들고 온 거지? 가지라고 했는데.”

“아, 이 가운 말이죠.”

“말해 봐, 힐다.”

쟁반을 내려놓고 내가 수줍게 가운을 꼭 안자, 아드리안이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온몸에 난 닭살을 애써 외면하며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게, 이거 없이는 어제처럼 도련님께 달려들 거 같아서요. 도련님 체취가 워낙 중독성 있어서.”

“…….”

‘어제처럼 또?’라고 말하는 듯이 아드리안이 조금 충격받은 얼굴로 한 발 물러났다. 널찍한 방 안에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있는데도 그에게는 이 거리마저 짧게 느껴졌나 보다. 어제처럼 포커페이스에 금이 가진 않았지만, 안색은 새파래져 있었다. 순진한 도련님 성희롱하는 치한이 된 것 같아 얼굴이 미미하게 달아올랐으나, 지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저, 그런데 도련님. 방금 씻는다고 하셨죠?”

“……그랬지.”

“목욕 시중 필요하세요, 도련님? 제가 들어드릴까요?”

자기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후회하는 듯한 어조에, 금방이라도 뛰어갈 듯 들떠서 물었다. 그러자 아드리안이 황급히 손을 들었다.

“아니, 혼자 할게. 거기 가만히 있어.”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도련님 혼자, 시중도 없이 목욕하시게 둘 수 있겠어요……?”

“……원래 시중 없이 목욕을 해 왔으니까. 나와서 갈아입을 옷이나 준비해 놔.”

“네에…….”

나는 잔뜩 풀이 죽어서 대답했다. 아드리안이 들어간 후에는 금세 얼굴을 풀었지만. 아무래도 저 악마는 타인의 관심과 사랑에 큰 거부감이 있는 모양이다. 어제만 해도 내가 엄청 들이대니까 천식이랑 두통이 몰려와서 살의를 가라앉혔잖아.

아드리안이 매번 질색한다는 점에서 자존심이 약간 상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내게 대항 무기가 생겼다는 것. 쓸 때마다 나도 같이 상처 입는 느낌이었지만, 쓸 만했다.

아드리안이 갈아입을 옷을 파티션에 걸어 둔 뒤 한참 기다리자, 목욕을 마친 그가 가운을 입고 나왔다. 나를 스치듯 본 그는 파티션 안쪽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는데, 그 과정에서 벗어 던진 가운을 얼른 주워 들었다.

보란 듯이 새 가운에 코를 묻고 킁카킁카하고 있자, 다 갈아입고 나온 아드리안이 흠칫했다. ‘그러고 싶진 않은데, 이걸 물어봐야 할지…….’라는 얼굴로 잠깐 고민하던 그가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내가 준 가운은 어쩌고? 어차피 같은 냄새가 날 텐데.”

“그게 말이죠. 어젯밤에 하도 맡았더니 체취가 다 날아가 버렸지 뭐예요. 이건 오늘의 도련님, 방금 막 묻은 체취니까 틈틈이 맡아 놔야죠.”

“…….”

“어제처럼 덮칠까 봐 걱정돼서 저 나름대로 미리 방어하는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도련님. 도련님 곁에 있으려면 이 정도는 노력해야죠.”

“……그래. 뒷정리만 잘해 두도록 해.”

약간 쉰 목소리로 대답한 그는 내게서 다시 멀어져서 침대로 향했다. 협탁에 놓인 약을 집어 먹은 뒤, 책갈피가 꽂힌 책을 들고 어디 앉아서 읽을까 잠깐 고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시선이 마주친 난, 얼른 가운에 얼굴을 파묻었다.

처음엔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내가 개인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맡다 보니 진짜 좋은 향기가 났다. 독하지도 않고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장미향이 마치 고급 향수를 시향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아드리안에게 한 말이 100% 거짓말은 아니었다. 자면서 뒤척거리다 좋은 향기에 이끌려 가운을 안고 자긴 했으니까……. 깨어나서 보고 에구머니나, 하며 던져 버리긴 했는데 금세 다시 주워 들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오로지 향기 때문이었다, 향기.

“힐다, 오늘 할 일이 별로 없을 테니 여기 앉아서 책을 읽어도 좋아.”

어느새 침대 옆에 마련된 테이블에 자리 잡은 그가 앞자리를 눈짓하며 말했다. 제발 가운에 그만 집착하라는 말로도 들렸는데, 이 게임 배경이 신분제 사회라는 걸 고려하면 무척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종일 옆에 서서 대기하는 게 당연한 하인에게, 옆에 앉으라 자리까지 권하다니.

거기다 그는 파티션 옆 책장을 눈짓하며 읽을 책을 골라 보라는 의도도 비치고 있었다. 의외의 제안에 어안이 벙벙한 채 나는 주춤주춤 책장으로 다가갔다.

“뭐든 괜찮아. 난 다 읽은 것들이니까.”

“정말 감사해요. 감사한데…….”

나는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게임 세계에 속한 책이라 그런지 죄다 알 수 없는 문자로 적혀 있었던 거다.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이세계 문자로 적힌 책을 내가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어휴, 뭐 재밌는 거라도 있을까 했는데.

약간 아쉬워하는 한편, 표정을 싹 바꾸어서 아드리안을 뒤돌아보았다.

“도련님, 배려는 감사하지만, 제가 사실 까막눈이라서요. 괜찮으시다면 지금 읽고 계신 책을, 도련님의 그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읽어 주시겠어요? 제겐 마치 천상의 노랫소리처럼 들릴 거예요.”

“…….”

내 몇 마디 말에 아드리안은 금세 게걸음으로 도망칠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어제 익히 경험했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로 미쳤을 줄은 몰랐다는 눈초리였다.

상습적 성추행범이 된 나는 창피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괜히 발끝으로 원을 그리며 수줍어했다. 판타지 소설에서 보면 마족이나 악마들은 모조리 색을 밝혀서 온종일 침대에서 반라로 나뒹굴고 쓰리썸하고 그러다 싸움하고 그러던데.

악마도 변태는 싫나 보지…….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지만, 오로지 생존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반응을 보니 며칠, 아니, 하루 이틀만 이렇게 집착하면 전속 하인 타이틀은 벗어던질 수 있을 것 같으니.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자존심 따위, 자존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 방법으로 91%까지 치솟은 살의도 잠재웠잖아.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남았는데 우연히라도 죽으면 무척 억울할 것 같았다.

이제 날 죽이려 들면 누구든 같이 뒤지는 거여.

지금까지 아드리안의 일정은 이러했다.

오전 8시 기상

8시~9시 목욕 및 느긋한 티타임

9시~10시 독서 및 음악 감상

10시~12시 자선 사업 검토

12시~오후 1시 30분 점심 식사 후 가벼운 산책

1시 30분~3시 닥터 휴버트의 정기 진료

지금은 정확히 3시 27분으로, 휴버트가 돌아간 후 아드리안은 다시 독서 모드로 돌입해 있었다. 책을 마저 읽고 나면 피후원자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고 그들이 보낸 신작을 감상한다고 한다. 그 이후엔 음악 감상과 티타임, 목욕, 산책. 중간중간 약 복용, 그리고 또 산책…….

집, 회사, 게임, 잠의 무한 반복이었던 내 생활보다 더 인간적이고 문화적으로 풍부했지만, 이 일상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나는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다.

안 어울리게 왜 이렇게 건전해? 사람은 언제 죽이는 거야?

“저기, 도련님. 오늘 종일 저택에만 계시는 거예요?”

“응. 별다른 계획은 없어.”

참다못해 물었지만, 그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책만 읽으며 대답했다. 막힌 변기 앞에서 급한 사람처럼 나는 다리를 배배 꼬았다. 실제로 게임할 때는 아드리안을 마우스로 움직이며 사람을 살해하고 다니는 박진감이 있었는데, 막상 ‘악마 옆에서 대기하는 하인 1’이 되자 세월아 네월아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한국은 스겜의 민족 아닌가요?

아까는 직접 차를 우려 마시겠다기에 찻잎과 물, 찻주전자를 가져다 대령했는데, 여러 종류의 차를 우려내어 블렌딩하듯 섞다가 찻잔을 빤히 바라보는 게 아닌가. 찻물 우리다 갑자기 왜 저러나, 혹시 찻잔에 살의를 느끼고 있나, ‘투시자의 눈’을 써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 블렌딩은 실패야.”

“실패요? 좋은 향만 나는데…….”

조금 전까지 정성스레 우리던 캐모마일, 페퍼민트, 레몬그라스, 루이보스를 찻주전자에 부어 넣고 뚜껑을 덮어 버렸다.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차 우리는 솜씨가 대단해 내심 감탄하고 있었는데, 실패라고 하자 당혹스러웠다.

“바닐라향을 추가했으면 더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네.”

“가져올까요?”

“아니, 블렌딩 비율을 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

그렇게 말하더니 아드리안은 다시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나는 햇빛을 머금고 빛나는 찻주전자를 어안이 벙벙하여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악마가 너무 건전하다. 혼자 방에 있으면 살인 계획만 주야장천 세우거나 살인 도구를 모을 줄 알았는데. 찻물 섞는 비율이나 고민하고 있다니…….

하……. 이런 게 아닌데. 이 게임 이렇게 재미없지 않았는데. 물론 허구한 날 누구 죽이러 바쁘게 돌아다니면 그것대로 곤란하지만, 그래도 지나치게 지루했다.

맨날 속으로만 악의를 느끼고 정작 실천하진 않는 걸까. 이렇게 게을러서야 언제 악마의 힘 다 찾을지 내가 다 걱정이었다. 너 이렇게 워라밸 지켜서야 악마 자리 찾겠어? 응?

찻주전자를 치우고 따분해 죽어 갈 때쯤 간단한 디저트를 먹고 정원으로 나가긴 했는데, 아드리안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30분도 안 돼 돌아오고 말았다. 천식 때문인지 조금만 거닐어도 아드리안에게선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났고, 호흡이 답답한지 가슴을 몇 번 내리치곤 했다.

그런데도 나아지지 않아 방으로 돌아와 흡입기를 입에 물었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원하는 대로 밖에 나가지 못하는 그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려움과 동정이 함께 느껴진다는 건 무척 희한한 느낌이었다.

몸 상태가 저러니 외부적인 활동은커녕 다른 귀족과 친분을 다지는 일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러니 애 성격이 어두워질 수밖에. 악마가 아니라 사람이더라도 충분히 어두워질 법했다.

호흡이 좀 진정된 후에는 음악을 듣는다기에 드디어 잠 깰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하필 죄다 클래식류라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선 채로 꾸벅꾸벅 졸다가 침을 흘리는 바람에 양탄자를 진하게 물들이기도 했다.

설마 보진 않았겠지? 슬쩍 눈치 보며 구두로 문질러 봤는데 어째 번지기만 했다. 비싼 양탄자 같아서 괜히 더 찔렸다.

「양탄자 내구도가 떨어져서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골드 -20G」

그리고 양심이 찔린 만큼 시스템은 착실하게 돈을 뺏어 갔다. 거, 침 좀 흘렸다고 20골드나 받아 가는 건 너무한 거 아니오?

잠깐 분노가 일었지만, 해일처럼 일어난 지루함에 금세 덮여 버렸다. 식사한 지 꽤 지났는데도 햇볕이 좋아 눈이 자꾸만 감겼는데, 참다못해 한동안 감았다가 뜨면 귀신같이 눈치챈 아드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럼 있는 힘껏 자지 않은 척 눈을 부릅떠야 했다.

내가 전속 하인이 됐다고 부러워하고 시기하던 눈들이 떠올랐다. 게네는 이렇게 벌 받듯 서 있으면서도 권력가의 전속이라고 행복해했을까?

으으, 난 싫어. 차라리 죽여 줘, 2배속, 4배속, 스킵, 건너뛰기 버튼 좀 만들어 줘……. 지루하다 못해 파김치가 돼 가고 있는 중, 갑자기 아드리안이 말을 걸었다.

“힐다, 피곤하면 앉아도 돼.”

산책 다녀온 후엔 쭉 서 있었는데 빨리도 권한다.

“아녜요. 제가 감히 어떻게 도련님과 마주 보고 앉을 수 있겠어요.”

“그래, 두 번 권하지는 않을게.”

“베풀어 주시는 관용에 감사하며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냉큼 자리에 앉아 다리를 두드렸다. 사실 힐다의 다리는 무척 튼튼했지만, 기분상 아픈 것 같아서 정성스레 주물러 주었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나에게 장사 밑천이라곤 이 몸뚱이가 다였으니까. 소중히 다뤄 줘야 한다.

한참 종아리를 조물거리다 문득 테이블 한편에 쌓인 책 중 하나를 조심스레 가져와 봤다.

오전에 책 읽어도 된다고 했으니 슬쩍 봐도 괜찮겠지? 비록 이세계 언어로 쓰여 있긴 하지만, 막상 읽으려고 하면 게임 시스템이 번역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몇 아이템 설명창이 뜨는 것처럼 책도 마찬가지로 동작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리 책을 펼쳐서 손가락으로 콕콕 찍어 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혹시 했는데 못 읽나 보네. 디테일이라곤 하나 없는 망겜 같으니.

책 읽는 것도 포기하니 또다시 따분해져서 눈이 슬슬 감겼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꾸벅꾸벅 졸다가 나도 모르게 두꺼운 책을 베개 삼아 테이블에 엎드렸다. 잠결이지만, 여기까지 시스템의 방해가 없다니 놀랍고 짜릿했다.

언제는 베개가 없다고 눕지 못하게 하더니, 베개 대신 책을 베는데 엎드려지잖아.

그래, 모든 행동에 그 거지 같은 제어를 다 넣진 못했겠지. 좋아. 이 틈에 피로도를 회복해야지.

행복에 젖어 스르르 눈을 감으려던 때였다.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감기려는 눈꺼풀을 잡고 위로 당겼다.

뭐야……. 뭐가 자꾸 내 눈을 건드려…….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다시 스르르 눈을 감으려는데, 또다시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눈이 뜨였다.

뭐지? 예전에도 경험해 본 듯한, 익숙하게 더러운 기분은…….

「베개가 아니라서 잠들 수 없습니다.」

아…….

「베개가 아니라서 잠들 수 없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하얀 글씨가 눈앞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베개 없이도 엎드릴 수 있다고 좋아하던 날 정면으로 조롱하는 글귀에, 나는 아드리안 앞인 것도 잊고 폭주할 뻔했다. 또, 또 베개야! 엎드리게는 해 주지만 자지 못하게 한다는 건, 음식을 입에는 넣되 씹지는 말라는 말과 같다. 정도로만 보면 이게 훨씬 악질이었다. 화가 나서 잠이 다 깨 버렸잖아.

책도 때로는 베개가 될 수 있는데, 이놈의 시스템은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책을 읽는 걸 도와주는 디테일은 하나도 없으면서, 괴롭히는 데 있어선 온 힘을 다 바친 듯 생생했다.

망겜, 망겜, 드러운 망겜…….

또다시 망겜무새가 되어 게임을 욕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앞쪽이 조용한 게 불안해 슬쩍 눈을 굴렸다. 앞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든 아드리안은 책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대체 몇 시간 동안 독서만 하는 건지, 또 애먼 책 보고 살의를 불태우고 있는 건 아닐까.

“힐다. 아까부터 왜 계속 내 얼굴만 봐.”

그가 시선도 들지 않고 말했다. 저놈, 이마에 제3의 눈이라도 달린 거 아닐까. 눈도 안 돌리고 모든 걸 보고 있네.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고 솔직히 말할 순 없어서 또다시 흥분한 듯 숨을 몰아쉬었다.

“죄송해요. 도련님을 보고 있으면 현실감이 안 느껴져서요. 쳐다보는 게 절제가 안 돼요. 도련님 얼굴에 김 묻은 거 알아요? 잘생김. 제가 아주, 아주! 미칠 것 같아요. 돌아 버릴 것 같아…….”

“……침착해. 침착하고…….”

그러잖아도 창백한 얼굴이 한층 더 생기를 잃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풀어놓으면 위험해서 목줄로 묶어 놓은 짐승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악마도 피하는 변태 전법’으로 살아남긴 했지만, 그 부작용으로 마주하는 내내 저런 눈빛을 받아야 했다. 아무리 아부해도 호감도가 올라가지 않는 걸 보면 이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모조리 성희롱으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나도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 무표정한데 질색하는 저 얼굴이 수치스러운데…… 어떤 상황이든 구렁이처럼 넘길 수 있는 변명이 이것밖엔 없었다. 거기다 희롱하는 말이 이상하게 잘 튀어나오기도 하고. 혹시 체질인가.

“자. 진정하고 연필이나 깎아.”

잠깐 고민하던 그가 연필을 주머니에서 꺼내 내 앞으로 굴렸다. 뭐지, 한 올 한 올 연필 깎으며 정신 수양이라도 하라는 건가. 웬 연필인가 했는데, 언젠가 마을에서 1골드에 사서 줬던 일반 연필이었다. 이걸 주머니에 넣어서 가지고 다니고 있었어?

솔직히 놀랐다. 아드리안은 궁극의 신화 베개도 원하면 쉽게 가질 수 있는 재력가 집안 귀족이다. 조금만 눈을 돌려 봐도 몇천 골드씩 해 보이는 만년필이 잡동사니처럼 굴러다니고 있는데, 이런 볼품없는 일반 연필을 아직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금방 버리겠거니 했지만, 호감 작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쥐여 준 건데 의외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자 감동이 밀려왔다. 내 1골드는 헛되이 버려지지 않았어!

“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쓰기 편하게 깎아 드릴게요, 도련님.”

보람에 차서 내가 방긋 웃었는데, 아드리안의 입가가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그게 무슨 징조인지는 생각도 않은 채 나는 책상으로 달려가서 뭐든 연필을 깎을 만한 걸 찾아봤다. 한국이었으면 흔한 은색 기차 모양 연필깎이를 썼을 테지만, 여긴 그런 건 없을 테니까.

필기구 옆을 뒤적거리다가 현대의 휴대용 연필깎이와 비슷하게 생긴 나무토막을 찾아냈다. 작은 나무토막에는 원뿔 모양의 홈이 나 있었는데, 홈 한 면에 칼날이 붙어 있어 연필을 넣고 깎을 수 있는 식이었다.

좋아, 이거라면 금방 깎을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홈에 연필을 넣고 돌렸다. 그런데 작게 우두둑 소리를 내며 흑연 끝이 부서져 버렸다. 1골드짜리 일반 연필이라 그런지 약하긴 엄청 약하다. 공장에서 잘 만들어져 나오는 한국에서완 달리, 이곳 연필은 긴 나무 막대에 흑연 심을 단순히 박아 넣은 형태에 불과했다. 흑연도 울퉁불퉁하여 질도 좋지 않아 보였다.

연필 상태가 이렇다 보니 연필깎이가 편리해 보여도 깎기 쉽지 않았다. 칼날만 닿으면 바로 흑연이 부서져 버리는데, 마을로 돌아가서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최대한 칼날에 닿는 둥 마는 둥 살살 달래 가며 깎으니 얼핏 연필과 비슷하게 보이게는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게 뭐라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아드리안에게 결과물을 내밀었다.

“도련님, 다 깎았어요.”

“더 날카롭게, 다시 깎도록 해.”

그가 여전히 책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고 명령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연필을 어떻게 더 날카롭게 깎냐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 쓰레기 같은 연필을 선물해 준 게 나였기 때문에 닥치고 다시 깎았다.

흑연이 부서지고 나무가 갈라지며 편축이 기울어지는 등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나는 결국 그가 원하는 만큼 날카롭게 깎아 낼 수 있었다. 비록 결과물은 몽당연필에 가까워졌지만, 아드리안도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얼굴이었다.

“그래, 잘했어.”

그가 그렇게 말하면서 연필을 주머니에 쏙 넣어 버린다. 만년필도 아니고, 흑심이 뾰족하게 깎인 걸 왜 들고 다니려는 거지? 주머니 안이 시커메질 텐데 연필이 그렇게 좋은가 보다. 다음에 몇 개 더 사다 줘야지.

연필 깎는 일까지 다 끝내서 다시 한가해진 나는 마침 쿨타임이 끝난 ‘투시자의 눈’을 발동시켰다. 재사용 대기 시간이 세 시간씩이나 되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이 게임에서는 스킬 강화 같은 거 없나. 대기 시간 줄이는 강화 시스템이 있으면 열심히 할 텐데. 역시 세 시간은 너무 길어.

‘투시자의 눈’을 발동시키자 다시 대기 시간이 초 단위로 표시되는 버튼이 생기고, 방 안은 수없이 많은 루비가 박힌 듯 붉게 빛났다. 오늘도 악마답게 수많은 악의로 둘러싸여 있군. 혹시 물건이 없어진 게 있는지, 새로 생긴 게 없는지 스캔하고 있는데 문득 창가의 무언가가 눈에 걸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창가로 포르르 쫓아갔다.

“어머, 도련님. 이거 처음 보는 화분인데요!”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건데, 악의는 역사서 못지않게 서려 있었다. 화분에 심어진 식물은 바이올렛으로, 꽃과 이파리보다 토분이 훨씬 큰 편이었다.

이거이거, 밑에서 누가 지나가면 밀어뜨려서 머리 깨려고 했던 거 아니야? 일반 화분이 아니라 단단하면서도 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