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33)

3-1. 생존형 ○○로 전직했습니다.

좋아, 이 정도만 빼돌려 놓으면 눈치 못 채겠지?

숙소로 몰래 돌아온 나는 만족스럽게 품 안을 내려다보았다. ‘투시자의 눈’으로 발견한 악의 넘치는 물건 중 같은 종류가 많아 들키지 않을 만큼만 골라 가져온 것이다.

내가 가져온 건 깃털이 다 빠진 깃펜 한 자루, 만년필 두 자루, 검은 가죽 장갑 한 켤레, 목이 없는 여신상, 투박한 기계시계, 두꺼운 역사서, 작은 잭나이프였다. 더 가져오고 싶었으나, 대학 전공 서적만큼 무겁고 두꺼운 역사서 때문에 손이 모자라 그럴 수 없었다. 역사서만 아니면 다른 작은 물건들을 더 가지고 나올 수 있었지만, 역사서를 감싼 악의가 월등히 강해 도저히 두고 올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역사서에 왜 그렇게 강한 악의가 깃들어 있었지?”

역사 선생님이 빡치게 했나? 수업이 너무 지루해서 선생님을 죽이고 싶었나? 아니면 읽다가 어려워서 저자한테 살의가 일었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런 두꺼운 책을 읽으면서 악의와 살의에 불탔다니 아드리안의 부지런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난 이런 책 읽으면 졸려서 아무 생각 안 들던데.

앞으로 책 읽는 아드리안에게는 절대 가까이 가거나 말 걸지 말아야겠다. 어떤 책 어느 대목에서 살의를 느끼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 그럴 때 잘못 말 걸었다 봉변당할 수도 있는 거고.

“이건…… 장갑?”

역사서만큼 강한 악의에 휩싸여 있는 건 하나 더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검은 가죽 장갑……. 이게 뭔데 이렇게 짙은 악의에 물들어 있을까. 새빨갛게 모여든 기운이 붉은 안개처럼 끼어 형체마저 흐리고 있었다.

으으, 흉악해. 음산해. 불길해. 설마 이걸로 사람 목 졸라 죽인 건 아니겠지? 내가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자 눈앞에 하얀 글씨가 사르르 나타났다.

「특별한 장갑을 손에 넣었습니다. 아이템 설명을 보시겠습니까?」

손에 넣은 아이템은 설명도 볼 수 있는 모양이다. 내가 ‘예’를 누르자 장갑 옆에 조금 더 작은 글씨로 설명이 떴다.

「특별한 장갑(고대 마법 물품)

사용 흔적이 남지 않게 설계된 특별한 도구」

“사용 흔적이 남지 않는다고?”

사용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건 중요한 단서였다. 장갑을 끼고 살인하면 살인의 흔적 또한 남지 않는다는 거니까. 거기다 고대 마법이라니. 악마니 마법이니 하는 것들이 실존하는 세상에 내가 있다는 비현실감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이 장갑은 어쩌면 아드리안에게 엄청 중요할 수도 있겠는걸.”

이건 서랍에 따로 숨겨 놓자. 옷장 안쪽에 깊숙이 숨겨 놓은 다른 물건과는 달리, 장갑은 서랍에 넣어 두었다. 옮기는데도 어찌나 찝찝한지, 엄지와 검지 끝으로 겨우 들어 옮겼다. 스킬 지속 시간이 끝나 보이진 않았지만, 악의가 워낙 강렬해 저 새빨간 기운이 내게도 전염될 것 같았다.

조각상, 장갑, 만년필……. 악의가 깃든 것 전부 ‘투시자의 눈’ 스킬이 아니었다면 보는 둥 마는 둥 스쳐 지나갔을 물건이었다. 게임을 하면서 이미 알긴 했지만, 아드리안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도구를 이용해 사람들을 죽여 나갔다. 그 설정을 너무나도 잘 아는 나는 그가 나이프 하나만 들어도 질겁했고, 그래서 유난 부린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고…….

악의 깃든 물건을 가져온 것만 해도 그렇다. 알고 보면 굉장히 정의로운 행동인데, 문제는 그게 ‘알고 보면’이라는 거다. 모르고 보면 좀도둑이 따로 없었다. 이 세상에서는 하인이 주인의 물건을 훔쳐 갔다 들키면 어떤 벌을 받을까. 신분제 사회이니 관대한 처분을 받기는 어렵겠지. 사극 보면 멍석말이해서 두드려 맞던데…….

“아냐, 전부 아드리안에게 켕기는 물건이니까 공개적으로 처벌하진 않겠지.”

값비싸지도, 귀하지도 않아 보이는 만큼 사람들이 ‘굳이 왜 이 물건들을 훔쳤나’라는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 아드리안도 곤란할 테니까. 아마 직접 불러서 일대일로 묻겠지. 상상만으로도 무섭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내 생존 확률을, 나아가 모두의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다면 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거기다 ‘설마 게임이 그렇게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겠어?’라는 다소 안일한 짐작도 한몫했다.

나는 시선을 올려 화면 오른편에 새로 생긴 아이콘을 바라보았다. ‘투시자의 눈’을 상징하는 눈 모양 아이콘이 남은 재사용 대기 시간을 초 단위로 띄우고 있었다. 게임을 하다 보면 필요할 때만 꼭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려서 답답해했는데, ‘투시자의 눈’만은 그럴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악의를 읽어야 할 일이 빈번히 생긴다는 뜻이니까.

다시 생각해도 이 저택 사람들은 나한테 고개 숙여 고맙다고 해야 한다. 살 확률을 이렇게나 올려 줬는데!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힐다, 힐다! 어디 콕 숨어서 안 보이니! 어휴, 얘는 아침에 도련님 약 갖다드리는 일밖에 안 하면서 어딜 이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야?”

실상은 구박덩어리다. 서럽다. 아침마다 아드리안 약 갖다주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갈 때마다 간이 쪼그라들어서 이미 콩알만 해진 지 오래인데. 아드리안과 눈 마주칠 때마다 아주 지옥불에 구워지는 느낌이라고.

“저 방에 있어요!”

나를 찾아 쿵쿵쿵 돌아다니던 발소리가 내 방문 앞으로 돌아왔다.

“빨리 나오지 못해? 오늘 오전부터 하기로 한 창문 대청소를 잊은 거니! 너 혼자 늦었다, 너 혼자!”

“죄송해요. 금방 나갈게요!”

나는 급하게 서랍을 닫으며 방문에 대고 외쳤다. 레티샤가 한숨을 푹푹 쉬며 문에서 멀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 저택은 하인이 워낙 많다 보니 기간별, 조직별로 할 일이 분담되어 있는데, 나는 이 게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스케줄 파악을 아직 하지 못했다. 힐다가 메모를 남겨 두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나는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으니까. 하인으로서 할 일과 본분을 다하다 보면 평생 게임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일하다 늙어 죽을 수도 있다. 늙기 전에 살해당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재빨리 부엌으로 가자 1층 바깥 창문을 닦으라며 스펀지와 비눗물이 든 양동이를 받았다. 새삼 청소하려고 보니 창문에 낀 땟국물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미세먼지도 없는데 창이 왜 이렇게 더럽담.

“힐다, 또 늦었어? 너도 참.”

에밀리는 이제 나의 지각에 놀라지도 않는 눈치였다. 하……. 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남들 모르게 하는 선행이 이렇게 힘든 거였다니.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랬는데, 난 오른손이 기특한 일을 하면 왼손뿐만 아니라 세상에 고래고래 소리 질러 생색내는 타입이라 애초에 틀려먹었다.

“에밀리, 지금 창문 닦는 게 문제가 아니야. 내가 오늘 아침에 뭐 하고 온 줄이나 알아?”

“글쎄, 뭘 했는데? 늦잠 잤니?”

“잘 들어, 에밀리. 이거 들어도 놀라지 마. 진짜 큰일 날 수가 있거든. 들어도 모르는 척해야 해. 나 사실 말이야…….”

“왜, 왜, 뭔데 그래?”

“이 저택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어. 바로 오늘 아침에 말이야.”

“…….”

“너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해.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알겠지?”

나름 중대한 비밀을 알려 준 건데 에밀리는 창문 닦다 멈춘 그대로 날 빤히 바라봤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자기 목숨을 구했다는데 놀랄 만도 했다.

“힐다도 참, 무슨 그런 농담을 하니? 진짜 너무 재밌다.”

그녀는 별 시답잖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꺄르륵 웃으며 창문을 마저 닦았다. 비장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확 풀렸다. 내 말에 놀란 게 아니라 얘가 왜 이러나 살피고 있던 모양이다.

그래, 누구라도 알아줄 거란 기대는 접자. 나 혼자 발에 불붙은 것처럼 뛰어다니면 되지 뭐.

「창문을 닦아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이 와중에도 경험치는 꾸준히 1씩 늘어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무슨 경험치가 이렇게 안 오르나 싶었는데, 레벨이 두 자릿수가 되고 나니 그래도 그동안 꾸준히 오르긴 한 것 같다. 레벨을 올리는 데 가장 도움 준 게 아드리안인데, 새로 얻은 스킬로 그에게 대항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레벨 10이 되어 호감 대상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에밀리를 호감 대상에 추가하겠습니까? (3/3)

분류 : 성실하고 상냥한 하인」

창문에 찌든 때를 박박 문질러 닦고 있는데 처음 보는 선택창이 떴다. 에밀리는 원래 호감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내가 캐릭터를 골라 임의로 호감 대상에 포함할 수 있다는 뜻인 모양이다. 역시 레벨이 깡패다.

「레벨이 오를수록 호감 대상에 추가할 수 있는 인원이 늘어납니다.」

「호감도를 최고 레벨로 올리면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 부탁을 할 수 있습니다.」

에밀리 호감을 만렙 찍었을 때 어떤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지도 가르쳐 주면 좋으련만, 추가적인 설명은 붙지 않았다. 나는 크게 고심했다. 스킬 테크트리 한번 잘못 타면 어떤 직업이든, 얼마나 현질하든 망하는 법인데. 동급의 하인에게 호감 작업해서 과연 쓸모가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1골드라도 아쉬운 상황이니까 밑져야 본전이겠지.

잠깐 고민한 끝에 내가 ‘예’를 누르자 에밀리 머리 위에 못 보던 글자가 떴다.

「에밀리를 호감 대상에 추가했습니다.」

「현재 에밀리 호감도 lv.1 (0/10)」

아드리안은 1레벨에 채워야 하는 호감도가 400, 프리실라 백작 부인은 50이었는데 에밀리는 10이었다. 이 정도면 거저먹기였다. 물론 게임 캐릭터마다 중요도와 역할이 있어, 에밀리 호감도를 만렙 찍었을 때와 아드리안 호감도를 만렙 찍었을 때 기대치는 다르지만, 그걸 참작해도 아드리안의 효율은 썩어 빠졌다. 돈까지 썼는데 아직 2레벨도 안 되는 거 보면 내 등골을 다 빼 먹어야 만렙 찍을 모양이다.

도대체 아드리안은 무슨 시스템을 오픈해 주길래 그렇게 미적대는 걸까? 에밀리 호감도를 올리는 건 굳이 아이템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뻔한데, 그 새끼는 뭘 좋아하는지 찾아다녀야 해서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레벨 겨우 올렸는데 변변찮은 거 내놓기만 해 봐. 악마고 도련님이고 뭐고 같이 지옥 가는 거다.

“에밀리, 목마르지 않아? 오늘도 커피 만들어 줄까?”

“응, 좋아!”

마침 땟국물이 특히 찌든 부분을 닦다가 주저앉아 있던 에밀리가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속으론 땡땡이치고 싶었는데 차마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눈에 띄게 밝아진 에밀리와 부엌으로 향하던 도중, 우거진 나무 너머로 보이지 않던 건물 하나가 보였다.

나는 현관으로 들어가려다 우뚝 멈추었다. 하얀 벽돌로 지어진 작은 집이었는데, 지어진 지 꽤 돼 보였으나 실제로 사람이 출입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자취가 없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에 파묻혀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으니 어쩐지 스산하기도 하고.

“에밀리, 저긴 뭐야?”

“응? 뭐? ……아아, 자선의료원 말하는 거구나.”

“자선의료원?”

“응. 휴버트 님이 운영하셨던 의료원이야. 치료받을 돈도, 돌봐 줄 가족도 없는 불치병 환자들을 데려와 돌봐 주는 곳이지. 이곳과 연이 없는 사람들이 들어오지만, 휴버트 님은 가족처럼 곁을 지켜 주고 평안한 죽음으로 보내 주셔.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야.”

“아하, 호스피스 같은 거구나. 넌 저기 들어가 본 적 있어?”

“아니. 저긴 휴버트 님만 들어가실 수 있어. 환자 수발하는 게 힘드실까 봐 도와드린다고도 했었는데, 전염병 환자도 들락거렸던 곳이라 위험하다고 거절하셨거든.”

에밀리는 커피를 빨리 마시고 싶은 건지 저택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의료원을 응시했다. 무덤처럼 음침하고 적막하다. 이 백작가는 선행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인데, 어쩐지 하나하나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저택 부지 내에서 사람이 죽어 나간다니, 조금 찜찜하지 않나? 까놓고 말해 밀폐된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아. 휴버트가 일부러 사람을 죽이든, 아드리안이 몰래 들어가 죽이든…….

“지금 환자는? 아무도 없는 거야?”

“으응, 몇 년간 사람이 드나드는 걸 본 적은 없어. 휴버트 님이 워낙 바쁘시기도 하고, 도련님이랑 마님을 돌보는 게 중요해서 그렇겠지? 힐다, 빨리 가자. 나 목말라.”

아드리안 감지벨도 잠잠하겠다, 몰래 들어가 봐야겠다 싶었는데 에밀리가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애타는 눈빛이 장난감 사 달라고 하는 유치원생 같다. 의료원은 나중에 몰래 들러 봐야지.

오늘 에밀리에게 만들어 줄 메뉴는 나도 즐겨 마시던 연유라떼였다.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달달하면서 쓴맛은 누구나 중독시킬 수 있었다. 커피에 우유, 연유를 꺼냈을 땐 뭘 하는 건지 동그랗게 눈 떴던 에밀리가 지금은 무척 신기해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우유나 연유의 양을 잴 때 보통 소주잔을 썼었는데, 아쉽게도 여기는 소주가 없으니 비슷하게 생긴 작은 컵을 이용했다.

“잘 봐 둬, 에밀리. 우유는 한 컵 반, 연유는 이 컵의 반 조금 넘는 양만 넣는 거야. 그 위에 커피를 붓고 섞으면 돼. 어때, 쉽지?”

“맛있는 것도 만들어 주고 만드는 법도 알려 주다니. 힐다, 넌 정말 착해.”

한 단계씩 시연하며 자세히 설명해 주자 진심으로 감동한 듯 눈이 그렁거렸다. 먹고 싶을 때 만들어 먹으라는 호의로 받아들인 듯한데, 실제로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던지라 가슴이 뜨끔했다.

호감도 레벨이 올랐을 때 편하게 시켜 먹으려고 가르쳐 준 건데. 안 그래도 나는 레벨 올리느라 바쁜데 맨날 호감도 올릴 아이템만 만들고 있을 수는 없잖아.

“하, 너무 맛있다. 힐다, 이런 건 처음 먹어 봐.”

에밀리가 떨리는 목소리로까지 말하자, 그녀를 어떻게 부려 먹을지만 생각하던 나는 양심이 콕콕 찔렸다.

차마 에밀리를 마주할 수 없어 눈을 피하며 백작 부인에게 갖다줄 양만큼을 따로 담았다. 어쩐지 시스템이 또 날 비난할 것 같아 허공을 흘끗흘끗 살피게 됐다. 게임 시스템을 이용해 노가다 좀 줄이자는 건데, 그게 그렇게 쓰레기 짓입니까? 예?

「에밀리에게 ‘달콤하게 제조된 커피’를 선물했습니다.」

「에밀리가 크게 기뻐합니다.」

「에밀리의 호감도가 50 올랐습니다.」

「현재 에밀리 호감도 lv.3 (20/30)」

“힐다, 너무 고마워서 그러는데 내가 너를 위해 해 줄 건 없을까?”

「호감도가 3이 되어 에밀리에게 부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에서 하나 고르세요.

1. 잡초 뽑기

2. 창문 닦기

3. 커피 제조

4. 마을에 대신 다녀오기」

이런 식으로 부탁할 수 있다는 거구나. 호감도 만렙 되면 여러 가지를 부탁할 수 있다 했으니, 선택지 전부를 고를 수도 있다는 거겠지. 선택지를 하나하나 따져 보면 무척 사소하고 작아 보였으나 내가 매일같이 하는 것들이니 도움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뭐를 찍는 게 좋을까. 커피를 넉넉히 제조해 놔도 좋고 아드리안의 호감을 올릴 아이템을 마을에서 사 오라고 시킬 수도 있었다. 고민하던 나는 마침내 하나를 골랐다.

“에밀리, 나 대신 창문을 닦아 줄 수 있을까?”

「강도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 거의 일을 하지 않는다.

2. 쉬엄쉬엄, 천천히

3. 규칙적으로 쉬면서 적당히

4. 쉬지 않고 열심히

5. 죽도록 열심히」

와, 시스템 악랄한 거 보소. 죽도록 열심히라니. 노동부 신고감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5번이 궁금하긴 했다. 한번 해 볼까? 아니야. 호기심에 던진 돌멩이에 에밀리가 맞아 죽게 할 수는 없지. 에밀리는 착하니까, 많이 도와줬으니까…….

“죽도록 열심…… 아니, 규칙적으로 쉬면서 적당히.”

“그럼! 창문 닦는 건 내게 맡겨 둬!”

「부탁이 수락되었습니다.」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에밀리가 ‘규칙적으로 쉬면서 적당히 창문 닦기’로 얻은 경험치와 골드는 당신에게 귀속됩니다.」

부탁 시스템은 다시 말해 대리 노가다를 뛰어 주는 거구나. 이렇게 좋은 시스템을 꼭꼭 숨겨 놨었다니. 에밀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총총 사라졌고, 조금 더 기다리자 내 시야 하단 경험치 상태바에 ‘+1’이 뜨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게 뭐지, 불로소득?

부탁 시스템을 이용하면 내가 방에서 뒹굴뒹굴하면서 경험치와 골드를 날로 먹을 수 있다니. 잠깐, 지금은 에밀리 하나지만, 레벨 올리고 부탁할 수 있는 호감 대상이 많아지면 정확히 머릿수만큼 배가 되는 거 아닌가? 그럼 내가 일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개미들이 알아서 경험치와 골드를 긁어 오는데 내가 왜 일하겠어?

이 게임, 잘하면 날로 먹을 수도 있겠는데? 나는 단박에 월급쟁이들 부리는 사장님의 마음가짐으로 돌변해서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까딱거렸다.

이 시스템은 정말 악랄한 관리자였다. 시간 맞춰 종이라도 치는 건지 50분 정도 경험치가 쌓이다 10분은 쉬었다. 자로 재기라도 한 듯 ‘+1’이 규칙적으로 뜨는데, 저러다 에밀리가 몸살 나는 거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시스템의 악독함에 재차 질리고 에밀리의 피로가 걱정되는 한편, ‘규칙적으로 쉬면서 적당히’가 이 정도면 ‘죽도록 열심히’는 어느 정도일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호감 대상 세 명을 ‘죽도록 열심히’ 대리 돌리면 쌓이는 골드와 경험치는 대체 몇일까?

그렇게 모인 골드로 베개를 사서 개미들에게 나눠 주면 크리티컬도 심심찮게 뜰 테고. 그렇게 더 모은 돈으로 신화 베개를 사면……. 더할 나위 없는 선순환이었다. 이래서 가난은 가난을 부르고, 부는 부를 부른다는 말이 있나 보다.

이 호감 시스템으로 나중에 아드리안도 조종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아드리안에게 ‘죽도록 열심히’ 잡초 뽑기를 시킬 거다. 잡초 뽑기보다 더 하찮은 일이 있다면 망설임 없이 그 일을 시킬 거다. 죽도록 열심히 일하다 죽어 버리면 더 좋고. 게임 캐릭터 수십 명이 죽는 거보다 그냥 병약한 도련님 하나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야, 아무래도 한 방에 과로사하는 거보다 죽을 듯 말 듯 한 경계에서 오래 괴롭히는 게 더 괴롭겠어. 역시 아드리안에겐 ‘쉬지 않고 열심히’를 선택해야겠다. 게임 캐릭터 주제에 유저를 겁줬으니 그 정도 벌은 받아야지.

머릿속으로 ‘매크로 작업장 사장님의 장밋빛 시나리오’를 A4 서른아홉 장쯤 써 내려가며 나는 잡초를 뽑았다. 잡초를 뽑아 ‘+1’이 되기 무섭게 어디선가 창문을 닦고 있을 에밀리 덕에 ‘+1’이 연이어 떠올랐다.

점심께부터 에밀리와 내가 열심히 일한 결과 내 경험치 상태바는 꽤 차올라 있었다. 이것 참 뿌듯한걸. 혼자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다가 친구랑 같이 캐릭터를 키워 나가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에밀리가 대신 일해 주는데 오늘은 좀 쉴까 생각했지만, 이 게임 안에서 시간 끌어 봐야 좋을 거 하나 없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게 되었다. 시간 생긴 김에 자선의료원 좀 살피려고 했는데, 「의료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는 시스템의 방해를 받아야 했다. 마을처럼 의료원도 누군가의 호감도를 올려 개방해야 하는 모양이다. 역시 쉬운 거 하나 없는 치사한 게임이다.

그런데 이런 게임에서 맘 편히 휴식을 취한다? 그거야말로 망하는 지름길이며 이 양아치 시스템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일 거다. 빨리 경험치 쌓아서 스킬이라도 얻는 게 생존 확률이라도 더 올릴 수 있었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시스템이 참 무섭긴 하다. 경험치를 올리려면 뭘 해야 할지 생각하자마자 몸이 정원을 향해 먼저 움직였으니 말이다. 이 시스템이 날 어떻게 길들이고 학습시키고 있는지 생각하면 소름 끼쳤지만, 애써 외면하고 영혼 없이 잡초만 뽑았다.

경쟁적으로 뜨던 ‘+1’이 차츰 잦아들었을 즈음이었다. 나는 잠깐 잡초 뽑는 걸 멈추고 경험치 상태바를 지켜보았다. 경험치가 자동으로 더 안 오르는 거 보면 에밀리도 일을 접고 숙소로 돌아간 모양이다.

이쯤하고 돌아가서 정말 다행이다. 에밀리 경험치가 정말 무섭도록 쌓여 가서, 얘가 혼자 저택 창문을 다 청소할 생각인가, 가서 말려야 하나, 부탁 철회해야 하나 할 정도였으니까. 오늘 돈 많이 들어오면 에밀리에게 베개를 선물할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다.

“힐다! 어디 있다 이제 오는 거니!”

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하던 레티샤가 나를 보더니 한달음에 달려왔다. 레티샤가 이렇게 급하게 나를 찾을 때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정원 정돈하고 있었어요. 시킬 일이라도 있으세요?”

“낮부터 아드리안 도련님이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단다. 어서 올라가 보렴.”

“음. 오늘은 이미 많이 늦었는데 내일 뵈러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틀림없이 그렇게 말할 거라면서, 언제가 됐든 늦게라도 꼭 올라오라고 하셨단다. 급한 일이신가 보던데. 오늘 내로 안 오면 숙소로 직접 가겠다고까지 하시면서.”

“귀신같은 새…… 아니. 알겠어요. 도련님께서 급한 용무가 있으신가 봐요. 지금 바로 올라가 볼게요.”

“그래, 그러렴.”

레티샤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어딘지 석연찮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저 도련님에게 약 갖다주는 일 말고는 특별할 것도 없었던 아이가, 어째서 오밤중에 언제 어느 때고 찾아가도 괜찮게 된 것인지. 무슨 용무로 도련님이 그리 다급하게 불러 댄 것인지.

아마도 그녀 머릿속엔 신분 차이 로맨스 소설이 펼쳐지고 있을 테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내게 이 게임은 공포 장르에 끼어 있는 극한 서바이벌 생존물이었으며, 극단적인 가난과 핍박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물이었다. ‘이래도 안 죽어? 이래도?’라며 사방에서 두드려 패고 있는데 로맨스가 꽃필 리 없잖아.

“도련님. 힐다예요.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아드리안 방까지는 이제 순간이동 수준으로 빠르게 올 수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잠깐 기다리고 있자, 잠잠했던 감지벨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 이상은 가까이 가지 말라는 듯 심장박동 소리가 쿵쿵쿵 커졌다. 솔직히 나도 이 늦은 밤에 아드리안을 만나기는 싫어서 샛길로 빠질까 잠깐 생각했는데, 직접 부른 이상 그것도 시간 끌기밖에 안 될 거다.

“들어와.”

그가 날 부른 용무가 물건을 빼돌렸기 때문은 아니기만을 빌었다. 만약 맞으면 버그 나고 말겠지, 뭐.

“밤늦게 불러내서 미안해, 힐다.”

내가 방에 들어가자 촛불이 비치는 희미한 불빛 속에 아드리안이 드러났다. 그는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날 바라보고 있었는데, 얼마나 어두침침한지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할 뻔했다. 꼭 저렇게 어두운 곳에 웅크린 짐승처럼 기다리고 있어야 했을까. 누가 악마 아니랄까 봐 이 세상 음침함은 혼자 다 갖고 사는 것 같다.

“네, 네에. 말씀하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살짝 긴장했다. 이 새끼가 미안하다고 할 때는 항상 개 같은 뭔가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오늘 내 방에서 물건 몇 개가 사라졌어. 보기엔 별것 아니지만, 내겐 중요한 것들이거든.”

왠지 모르게 이빨이 딱딱 부딪히기 시작했다. 저 악마는 같이 있기만 해도 방 안의 온도가 5도쯤 내려가는 신비한 존재였다.

“그러세요? 어떤 물건이기에…….”

“묻는 게 아니야. 내 물건을 가져간 건 힐다, 너잖아.”

“…….”

“나는 네게 손대고 싶지 않아. 그러니 하나도 빠짐없이 가져오도록 해.”

“…….”

“내가 인내하는 동안, 부디.”

밤의 장막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을 보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그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느닷없이 돌직구를 던져서 놀라긴 했지만, 어차피 악마라는 정체도 알고 게임 속 인물인걸. 내 눈앞에 4D로 나타나니 실감 나기도 하고 저 새끼가 날 죽이면 난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나는 정말,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어차피 게임 캐릭터일 뿐이잖아. 무섭지, 않다. 무섭지…….

“……힐다, 힐다, 정신 차려.”

“네, 네?”

“너, 방금까지 눈 감고 있었어.”

“제…… 가 그랬어요?”

“갑자기 눈을 스르르 감더니 한참 그러고 서 있었어. 서서 기절한 것처럼.”

자다 깬 것처럼 눈앞이 흐리고 몽롱한 걸 보니, 아무래도 기절하던 중에 저 악마가 무서워서 돌아온 것 같다. 악마의 존재감이란 무의식도 쉽게 이길 수 있었다.

“죄송해요. 별건 아니고 기면증이 있어서요……. 때때로 이렇게 서서 졸곤 한답니다. 아! 도련님 말씀이 졸려서가 아녜요.”

“저런, 기면증이라니. 안타깝네.”

칼로 찔러 버릴 것 같은 눈빛을 하고서 안타깝다고 말해 봐야 설득력이 하나도 없었다.

“어쨌든 힐다, 그 물건들을 내게 가져다주겠어? 소중한 사람에게 받아서 아끼는 것들이거든.”

개소리하고 있다, 그죠? 소중한 사람한테 받은 물건이라서 악의가 그렇게 덕지덕지 붙어 있나? 사람 죽이려고 그런 거지. 하지만 저 새끼는 사람을 죽이는 개니까 무조건 고개를 끄덕여 줘야 한다. 멍멍하면 왈왈해야지.

“그렇군요. 도련님의 소중한 사람에게서 받은 물건이 사라졌다면 무척 속상하셨겠어요. 그런데 말이어요. 제가 훔쳤다는 증거…… 있으세요?”

“방금 뭐라고 했어, 힐다?”

증거 있냐? 증거 있냐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하인의 입장이기 때문에 최대한 공손히 반항했다.

내 말이 괘씸했는지 아드리안의 말투는 여전히 녹아들 듯 상냥하고 달콤했지만, 눈빛은 흉기에 가깝게 험악해지고 있었다. 지옥불에 노릇노릇 구워지는 느낌이다.

그냥 다시 기절해 버릴까. 머릿속으론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 입은 독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가 훔쳤다는 증거요. 아침에 도련님 약 갖다드리러 들르긴 했지만, 휴버트 선생님과 방을 나가신 뒤 거의 바로 저도 따라 나갔거든요. 뒷정리하러 남았어도 말 그대로 아주 잠깐 머물렀을 뿐이에요. 정말 물건을 훔칠 생각이 있었다면 그렇게 티 나게 훔쳤을까요? 도련님의 방에 드나드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저인데, 만에 하나라도 도둑으로 몰리면 제 인생은 끝인걸요? 그런 멍청한 짓을 제가 왜 하겠어요?”

“글쎄,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빼돌려야 할 이유가 있었겠지.”

“정말 물건을 되찾고 싶으시면, 제가 나간 후에 도련님 방에 들어온 다른 하인이 없는지 알아보셔야 해요. 그래야…….”

“증거가 있어야 내가 너를 추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그렇게나 증거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어, 힐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잃어버린 물건만 고스란히 돌려받고 사건을 덮기 위해서야.”

아드리안의 말을 들으니 머리가 띵했다.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라 더 그랬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입각한 대한민국에선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지만, 이 저택에서는 저 도련님 말이 법일 테니.

그보다 시나리오에 반대되는 행동을 했을 때 게임에 오류가 날 거라는 예상이 틀려 버린 데 대한 충격이 컸다. 살인 도구를 잃어버린 아드리안은 도구를 찾으려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협박을 하고 협상도 하려 하고 있었다.

마치 진짜 살아 있는 것처럼.

이쯤 되니 내가 진짜 게임 속에 들어온 게 맞는 걸까 의심까지 될 지경이었다.

……그래, 침착하자. 점점 일그러져 가던 표정을 겨우 가다듬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건 회생 불가야.

“저,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도련님.”

“힐다, 지금 뭘…….”

“정말 잠깐이면 돼요.”

나는 평화롭게 웃으며 내 눈에만 보이는 메뉴 버튼을 눌렀다. 아드리안에겐 내가 허공을 콕콕 점 찍는 걸로 보이겠지만, 이제 곧 다 잊어버릴 테니 이상하게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메뉴를 누르자 단출한 두 개의 버튼이 생겼다. 하나는 ‘New Game’, 다른 하나는 눌러도 동작 안 하는 ‘Exit’…….

사실 이제까지 게임을 리셋할 일은 많았지만, 한 번도 ‘New Game’을 누르진 않았다. 이 게임, 그러잖아도 노가다 심한 게임인데 처음으로 돌아가기까지 하면 이제까지 했던 것들을 다시 하느라 등골 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몰린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리셋하자. 레벨 1로 돌아가더라도 게임 공략하는 법은 많이 터득했잖아? 전부는 아니더라도 스킬이나 호감도 시스템, 초반 경험치 빨리 올리는 법 정도는 파악했으니, 맨몸으로 부딪치던 처음보다는 나을 거다. 돌아가면 일단 아드리안부터 자주 만나서 레벨 올리고, 최대한 빨리 마을을 개방해서 좋은 베개와 호감 작업할 아이템을 사는 거다. 악의 묻은 물건들도 훔치는 게 아니라 지켜보는 데 쓰자. 그럼 지금보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겠지.

‘New Game’을 막상 누르려니 아드리안에게 한 번 더 시선이 갔다. 저 새끼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을까. 어차피 돌아가면 기억 못 할 거잖아? 그리고 빡쳐서 날 죽이려고 들 때 ‘New Game’을 누르면 그만이잖아.

쥐어박으면서 한마디 꼭 해 주고 싶었다. 방금 뭐? 증거를 만들어? 젊은 놈이 속은 아주 시커멓게 악의만 가득 차 가지고. 아무리 악마여도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인생 그렇게 살지 마! 머리가 쥐어박혀 어안이 벙벙해진 그의 얼굴을 상상만 한 건데도 속이 다 후련했다.

내가 자기를 보며 음산하게 웃기까지 하자 아드리안의 표정이 더더욱 기이해졌다. 저게 뭘 또 잘못 먹었느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냥 깔끔하게 가려고 했는데, 저 얼굴을 보니 한마디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손끝만 까딱하면 바로 ‘New Game’이 눌리도록 가까이 갖다 대고, 그 앞에서 최초로 미소 지었다.

“나는 간다, 망할 악마 새끼야. 증거를 만들든 내 방을 뒤지든, 잘 먹고 잘 사세요.”

「아드리안의 호감도가 10 올랐습니다.」

「현재 아드리안 호감도 lv.1 (44/400)」

이 와중에 호감도가 오르다니 이상하기 짝이 없었지만, 10이 오르든 100이 오르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차피 새로 시작할 거, 저놈의 호감도가 다 무슨 소용이랴.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거다.

오랫동안 어깨를 짓누르던 짐을 벗어 던진 것처럼 홀가분한 기분으로, ‘New Game’을 눌렀다.

스치듯 아드리안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알쏭달쏭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차피 돌아가서 다시 만날 테지만 호감도 44의 아드리안은 마지막이라 아련해지기도 했다. 무서워한 만큼 미운 정이라도 든 걸까.

어쨌든 난 진짜 간다, 악마야. 좀 이따 보자. 애정 어린 작별 인사를 속으로 건네기까지 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글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사방을 감싸고, 레티샤의 고함으로 시작하는 아침이 날 맞아 주겠지. 한껏 들뜬 채 새로 시작될 게임을 기다렸지만, 빛이 사방을 감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처음 보는 흰 글씨만이 반짝 떠올랐을 뿐이었다.

「스토리가 일정 이상 진행되면 새 게임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1권 끝. 2권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