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33)

2-2. 스킬은 주지만 맘대로 써도 된다고 한 적은 없다.

아드리안은 집요했다.

내가 개인적인 볼일은 다음에 보겠다고 하자 같이 돌아가자고 권했고, 마차가 있다고 하자 자기가 타고 온 마차가 더 좋다고 했다. 하인 주제에 어떻게 동승하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내가 타고 온 마차가 돌아갔다는 걸 깨닫고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정원 가위를 들고 오밤중에 터덜터덜 저택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길도 모르거니와 이제는 피로도도 확실히 관리해야 하는걸.

어쩔 수 없이 마차에 올라 편하게 돌아가긴 하지만, 아드리안 앞에 있는 나는 쨍쨍한 햇볕에 내놓은 선인장처럼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백작 부인이 내어 줬던 마차보다 훨씬 푹신하고 탑승감이 좋다고 감탄할 새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입 다물고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마차에 마주 보며 앉고 나서는 아드리안은 쭉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 둘 사이에는 적막만이 흘렀고, 가끔 들려오는 채찍질 소리와 흙바닥을 밟는 말굽 소리만이 공기를 채웠다.

그나마 아무 말 않고 조용히 있으니 견딜 만했다. 무기는 나한테 있으니 여차하면 방어용으로 사용해도 되고.

“……무거우면 내가 들게. 이제라도 이리 줘.”

줄곧 정원 가위를 들었던 팔이 뻐근해 톡톡 두드리고 있자 아드리안이 불쑥 말했다. 눈 감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알았나 싶어 또 덜컥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위를 내 쪽으로 바짝 당겼다.

“아뇨! 무거우니까 더더욱 도련님께 드릴 수 없죠. 이건 아까 약속한 대로 저택에 돌아가면 가져다드릴게요.”

악마가 무기를 되찾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군.

절대 뺏기지 않을 심산으로 품에 꼭 안자 아드리안이 포기하고 손을 거두었다. 그나저나 이 무거운 걸 아드리안이 들고 다녔다니 믿기지 않았다. 병약하다는 거 순 거짓말 아닐까. 실은 그동안의 살인으로 평범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했는데 사람들을 방심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생각하다 보니 일리 있는데?

“힐다.”

“네! 네?”

아드리안 생각을 하다가 아드리안 목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드리안은 놀란 나를 또다시 빤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뭐, 왜.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내가 어떻게 해야 네가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네?”

“며칠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어. 너를 계속 놀라게만 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그걸 물어보려다 또 놀라게 해 버렸네.”

전혀 공감 안 가는 물음이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끔벅거리고만 있었다. 놀란 인간을 죽이면 안 되는 규칙이 있었나? 힘을 덜 얻나? 무엇보다도 날 심장 마비로 죽일 생각이 아니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이제까지 한 짓 보면 그럴 의도가 다분했는데.

“전 원래 잘 놀라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 앞에 나타나지만 않으시면 놀랄 일도 없어요.’라는 대답을 간신히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고 말했다. 하지만 충분한 대답이 되지 않았던지 그는 팔짱을 끼며 의자 깊숙이 기대었다.

“원래는 그러지 않았어. 오히려 무던했지. 그렇게 말도 많지 않았고…….”

“…….”

“원래는, 그러지 않았어.”

내게 향하던 말이 혼잣말로 변하며, 시선도 사선으로 내려갔다.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이다. 예전의 힐다와 지금의 나를 비교라도 하는 것처럼. 아, 안 돼. 뭔가 눈치채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제 걱정해 주실 필요 없어요, 도련님. 요즘 삶이 꽤 팍팍했거든요. 그래서 예민해졌을 뿐이에요.”

“팍팍해?”

“네. 노동자란 힘든 거랍니다, 도련님. 베개가 없으면 침대에서 자지도 못하고, 그렇게 잘 못 자면 다음 날 일급이 깎여 버리고요. 뭐라도 잘못 손대면 내구도가 깎인다고 난리지, 물건 망가지면 손해 배상금 청구해 대지. 베개 때문에 복수하겠다는 사람이 있질 않나. 이래서야 누가 마음 편히 살 수 있겠어요? 베개를 여섯 개씩 쓰지 않으면 못 주무시고, 약도 누가 가져다줘야 드시는 도련님께선 이해 못 하시겠지만…….”

“베개 때문에 복수하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그게 누구지?”

“도련님께 말씀드릴 만한 건 아녜요. 아무튼, 매일 밤 돈 뺏기지, 할 일은 넘쳐 나지, 오늘은 또 마님이 자장가를 부르시는데 무서워서 원…….”

“어머니가 왜?”

나는 두 번째로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 시스템에 시달려 온 스트레스가 누적된 탓일까. 상대가 아드리안인데도 털어놓고 싶었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마님 이야기까지 꺼내면 안 됐는데, 이 파멸의 조동아리 같으니.

“그냥, 옛날에 뵙던 모습이랑 달라져서 마음이 아파서요.”

아무리 상대가 악마더라도 편히 죽으라는 자장가를 부르는 걸 들었다는 말을 어떻게 해. 위장이든 아니든 백작 부인을 위해 정원을 가꾸겠다고 가위를 사러 온 그다. 들으면 홧김에 죽이러 갈 수도 있다.

“그래, 그렇구나.”

의외로 쉽게 수긍하고 넘어가자 더 불안해졌다. 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그때 마침 마차 속도가 느려지더니 천천히 멈춰 섰다. 침묵 반, 헛소리 반으로 시간을 보냈더니 어느새 도착한 모양이다. 밖에서 마부가 “도착했습니다, 도련님!”이라고 외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젖은 밤안개 냄새가 마차 안으로 습하게 몰려왔다.

아드리안은 정제된 자세로 앉은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인사치레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저어, 여기까지 태워 주셔서 정말 감사…….”

“감사 인사는 됐어.”

아니었다니 의외였다. 어정쩡하게 내려간 상체를 다시 세우며 인상을 찌푸렸다. 화장실 갔다 손 안 씻은 것처럼 찝찝했다. 나는 용감하게 그를 바라보고 물었다.

“저기, 저도 여쭤볼 게 있는데요.”

“물어봐.”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세요?”

“고작 마을에서 저택까지 마차 태워 주고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마을에서 마주친 하인들 전부 마차에 태워 주실 거 아니잖아요. 먼저 알은척까지 하셨으면서.”

“할 말 없어지게 만드는 특기가 있구나, 힐다는.”

그는 깍지 낀 손을 다리에 내려놓으며 착하게 웃었다.

“그래. 팔츠그라프 가에는 하인이 차고 넘치지. 누가 누구인지 이름도 다 기억 못 할 정도로 말이야. 그래서 마을에서 마주쳤더라도 마차에 태워 주진 않았을 거야. 먼저 알은척할 일도 없었겠지.”

갑자기 너무 솔직해져서 할 말을 잃었다. 보기 좋게 둘러쓰고 있던 도련님의 얼굴을 한 꺼풀 얇게 잘라 내 버린 것 같았다.

“옛말에 적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친구보다 가까이 두라는 말이 있지.”

들어 본 적 있는 말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드리안이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나는 사실 적을 무척 아껴, 힐다.”

“예……?”

“얼치기들은 적을 공격하고 해치면서 승리감에 도취되고 자신의 강함 따위를 느끼지. 누군가는 적의 수급을 보란 듯이 전시해 놓기도, 상대를 어떻게 전멸시켰는지 무용담을 떠들어 대기도 해. 하지만 적은 그렇게 다룰 존재가 아니야. 나를 비출 거울이자, 강력한 단서가 되기도 하니까.”

“…….”

“산 채로 곁에 두는 게 나아. 자르고, 꺾어서라도.”

단정한 얼굴에 불길한 미소가 덧그려졌다. 분명 웃고 있는데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뭘 자르고, 뭘 꺾는데요……?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스쳤다. 더 무서워졌잖아. 하여간 얘랑은 대화하면 안 된다니까.

“그래서 난 너한테 잘해 주고 싶어, 힐다.”

“…….”

“그것뿐이야. 다른 의도는 없어.”

적이라니, 대체 왜 내가 그의 적인지 알 수가 없다. 따지고 보면 그의 적은 이 세계 경찰들 아닌가?

도통 이해 안 되는 말을 늘어놓고 그는 깨끗하게 웃었다.

다른 의도가 없다기엔 의도가 무척이나 많아 보이세요. 일부러 잘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차라리 모르는 척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제 내려도 돼, 힐다. 자, 여기 네 장바구니.”

“아, 감사…….”

그가 내미는 장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마차에서 내릴 채비를 했다. 어깨엔 장바구니, 손엔 정원 가위, 품엔 고급 베개가 안겨 있어 아드리안이 손수 마차 문을 밀어 환하게 열어 주었다. 발로 문을 밀어젖히려다 그걸 보고 슬그머니 내렸다.

진짜 왜 이러는 거지. 왜 이렇게 찝찝하게 친절한 거지. 악마의 정체성에 문제가 생겼나.

“참, 힐다. 네 방 앞에 누군가 있어.”

“예……?”

“무척 화가 나 보이는데, 아마 그 베개의 주인인 모양이야. 볼일이 있다면 먼저 처리하고 방에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내 숙소 앞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대답이 두려워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이런 놈을 막겠다고 나섰다니…….

“그럼 내일 보자, 힐다.”

내가 경악하든 말든 제 할 말을 끝낸 아드리안이 빙긋 웃고 마차 문을 닫았다. 숙소에서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나는 단숨에 여러 가지를 깨달았다.

저토록 무방비하게 웃을 수 있는 인간임을. 악마의 힘을 조금이나마 되찾았음을.

저 손에는 이미 여러 사람의 피가 묻었음을.

“드디어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아드리안이 말한 대로 내 방문 앞은 화난 델로레스와 그 잔당들이 지키고 있었다. 에밀리와 카타리나까지 있는 걸 보니 내 숙소가 이 구역의 핫플레이스인 모양이다.

복도에 멈춰 서자 열 명에 가까운 하인들이 일제히 내 쪽을 바라봤다. 사방에서 관심이 쏟아지니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저 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될까요?

“힐다…….”

에밀리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장바구니를 카타리나에게 넘기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이렇게 내 방에 모여 있어?”

“방문 열어, 당장.”

방문 바로 앞에 있는 델로레스가 위압적으로 말하며 문고리를 툭툭 쳤다. 피로도 때문에 오늘 내내 고생 좀 했는지 눈이 판다 같았다. 판다는 귀엽기라도 하지.

“열라고. 말 안 들려?”

“왜 내 방을 보여 줘야 하는데?”

“그야 네가 내 베개를 훔쳐 갔으니까! 너 때문에 내가 오늘 얼마나 곤란했었는지 생각만 하면……!”

델로레스가 주먹까지 쥐고 부들거렸다. 독기가 보통 서린 게 아니다.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데 괜한 시비까지 걸려 골치가 아프다. 마을에서 들은 이야기와 아드리안에 대해 생각하기도 바쁜데.

“빨리 열어! 문 부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서슴없이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델로레스는 모아 둔 돈이 많은 모양이다. 나는 물건 하나라도 잘못 건드리면 손해 배상 때문에 조심하게 되던데, 무려 부순다고 하니…… 문 한 짝 정도는 거뜬히 배상할 재산이 있는 모양이다. 부럽다.

그래도 오늘 방에 들어섰을 때 들어올 일급이 기대되는걸? 그만큼 크리티컬이 터졌으니 일급보다 더 들어오긴 하겠지? 얼마나 더 들어올까? 10골드? 20골드? 설마…… 30골드? 일급의 두 배를 받을 수 있다면 정말이지 이 시스템의 개돼지가 될 수 있었다.

만약 진짜 60골드가 들어오면 그걸로 뭐 하지? 희귀 베개에 투자할까? 60골드 중에 50골드나 쓰는 거지만, 경험상 이만한 안전 투자가 없었다. 베개야말로 보장 투자, 빛과 소금,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 아닙니까? 꿀잠 자면 크리티컬도 많이 뜰 거고, 그럼 일급도 계속 오를 테고.

상상만 해도 행복해져 문을 열면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하루 중 가장 즐겁고 기쁜 시간, 일급 들어오는 시간! 지금 내 가슴은 첫사랑에게서도 경험한 바 없는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가득했다.

“뭐야, 쟤 갑자기 즐거워 보이는데?”

“좀 이상해…….”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이 행복을 방해할 수 없었다. 처음엔 오로지 생존만이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바뀌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문을 열었다. 기대로 가득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자 잠시 후 흰 글씨가 나타났다.

「일급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얼마? 얼만데? 1초가 10분처럼 길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꼭 맞잡고 다음 알림을 기다렸고, 곧 글자는 모래알처럼 모여들었다.

「골드 +60G」

“맙소사! 진짜 두 배잖아!”

그냥 해 본 말인데 진짜 두 배가 들어오다니! 달랑 0골드였던 재산이 60골드로 늘어나자 억만장자가 된 기분이었다. 며칠 전까지는 도저히 구제 못 할 피곤한 거지였는데, 이젠 피곤하지도 않고 거지도 아니었다. 무려 60골드나 있다고! 이제 저걸로 베개에 투자할 수 있어!

게임 진짜 열심히 할게요. A컴즈의 개돼지가 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게임 개발사가 동서남북 중 어느 쪽일까? 아예 다른 세계겠지만, 알기만 한다면 그쪽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싶었다. 만수무강하세요, 하고 어느 쪽이든 절을 올리려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퍽 치고 지나갔다. 완전히 잊고 있던 델로레스였다.

“이것 봐! 이거 내 베개잖아!”

침대에 고이 모셔진 베개를 집어 들고 이리저리 보더니 그녀가 고함쳤다.

재산 불리기에 성공한 기쁨은 잠시 접어 두고 시선을 돌렸다. 델로레스가 어제까지 자기 것이었던 베개를 소중하게 안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쟤가 내 베개 훔쳐 간 거라고.”

델로레스는 나를 마구 손가락질하며 같이 끌고 온 무리에게 일러바쳤다. 그들은 눈을 부라리면서 팔짱을 끼고 한마디씩 가시 돋친 말을 던졌다.

“힐다, 너 정말 델로레스 베개를 훔친 거니? 오늘 델로레스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기나 해?”

“신전에서 컸다더니 양심은 거기 두고 온 거니? 좀도둑질이라니!”

“이 일은 날이 밝자마자 레티샤 님께 보고드릴 테니 그리 알아. 너처럼 손버릇 안 좋은 애 때문에, 같은 주인을 모시는 하인들끼리 서로 못 믿게 되어서야 쓰겠니?”

“어서 델로레스에게 사과해! 잠을 못 자서 본 손해는 네가 당연히 보상해 줘야 할 거야!”

“보상이라니?”

내가 불쑥 물을 줄은 몰랐던지 하인 무리가 서로 눈치를 봤다. 뒤에서 잠자코 보고 있으려던 델로레스가 답답하다는 듯 나섰다.

“당연히 피곤해서 일을 제대로 못 한 데 대한 보상이지! 내가 깨 먹은 접시와 오늘 일급 깎인 만큼 내놔. 그러지 않으면 이 일을 낱낱이 레티샤 님께 보고하겠어!”

“뭐? 그러니까 나한테, 지금, 돈을 내놓으라는, 그런 말이야?”

60골드로 하늘 끝까지 솟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목소리 음이 한 단계씩 낮아지다 바닥을 내리찍었다. 내 표정이 심상찮게 살벌해지자 델로레스는 조금 당황해서 친구들을 흘끔거렸다.

“그, 그래! 깎인 일급과 깨 먹은 접시 비용까지 하면…… 60골드! 60골드 내놔.”

저 도트 쪼가리가 감히 내 전 재산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60골드를 얻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대부분 베개로 이루어졌지만, 어쨌든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힘겹고 고된 싸움이었다. 칼랑코에, 손해 배상, 뉴 게임, 접시 등등.

상상만 해도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 같다. 그런 극한의 고행길을 걸어 겨우 얻은 일급을, 저 도트 쪼가리가 감히 내놓으라고 하는 거다.

이게 어떻게 얻은 60골드인데, 절대 안 돼. 잠깐이나마 아드리안의 베개를 베고 자서 일급 두 배 크리티컬이 뜬 거지, 일반 베개나 고급 베개로는 어림없을 게 분명하다. 이제부턴 기껏해야 일급 30골드에 한 푼 두 푼 까여서 들어오겠지.

그런데 가진 걸 다 내놓으라고?

절대 사양이다. 또다시 피곤한 거지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어……!

“증거 있어?”

“뭐?”

“갑자기 내 방에 쳐들어와서 다짜고짜 남의 베개 가지고 자기 베개라고 우기더니, 손해 배상까지 청구해? 증거가 있으니 그렇게 자신만만하겠지?”

내 명예, 자존심…… 다 내놓을 수 있지만, 손해 배상 청구는 못 참아!

“증거라니? 저 베개가 내 거라는 증거를 어떻게 대? 그냥 딱 보면…….”

“‘딱 보면’이라니? 설마 그걸 증거로 대면서 내게 돈을 뜯어 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 그건…….”

돈을 뺏길 수 없다는 일념 아래, 지극히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반박을 하자 델로레스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그래, 솔직히 맞는 말이지.’라는 분위기로 패거리끼리 웅성거리자 델로레스는 당황한 나머지 입술을 들썩거렸다.

그녀가 악의적으로 내 베개를 숨겨 놨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과거 일이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게 전혀 아니었다. 저 도트 쪼가리가 힐다 골탕만 안 먹였어도 초기 자본금이 300골드보단 많았을 거잖아? 쟤 때문에 잃은 내 일급도 아까운데, 돌려받기는커녕 나더러 배상하라니? 이게 게임입니까?

“그래, 이 침 자국! 이 침 자국이 내 거야!”

어찌할 바 모르고 눈을 굴리던 그녀가 문득 베개를 보더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뭐? 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카타리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베개 한쪽 면에 한 부분이 유독 짙게 물들어 있긴 했다. 침 흘려서 생긴 자국이 맞다면, 저 자리에만 집중적으로 침 흘려야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델로레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모두가 다소 무리수라는 눈빛으로 델로레스를 봤지만, 그녀는 확실한 증거를 들이민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이것 봐, 딱 내가 이렇게 베고 입 벌리면 이 자국 즈음에 침을 흘리게 돼 있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아니거든, 그거 내 침 자국이거든?”

내가 선언하듯 던진 말에 카타리나가 휙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어처구니없는 눈이었는데, 손해 배상 이야기를 들은 이후 나도 델로레스 수준으로 내려가 버린 지 오래였다.

“나도 침 흘리면서 자. 나도 베개에 침 자국 진하게 남긴다고. 이건 단언컨대 내 침 자국이야!”

“아닌데, 저건 내 침 자국인데……!”

“그만들 좀 해. 어휴, 더러워서 진짜…….”

네 침이니 내 침이니 싸우고 있자 카타리나가 나서서 중재했다. 어이없는 싸움이긴 하지만, 델로레스나 나에게는 지금 무엇보다도 진지하고 중요한 주제였다.

카타리나는 하인들 사이에서도 연장자에 속해,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땐 누구도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가 델로레스를 휙 돌아봤다.

“네가 상관없는 애들까지 끌고 와서 난리 치기에 일단 두고 보긴 했는데, 처음부터 짚어 보자. 정말 네 베개가 없어지긴 한 거니?”

“당연하지! 내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거야, 지금? 베개가 없어진 게 아니라면 내가 온종일 실수투성이였겠어?”

“어, 델로레스. 너 원래 별일 없어도 식기 깨 먹잖…….”

“조용히 못 해!”

델로레스가 씩씩거리며 빽 소리 지르자 나머지가 입을 딱 다물었다. 카타리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런 시답잖은 일에 엮인 것부터가 짜증 난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힐다가 네 베개를 훔쳐서 쓰고 있단 거 아냐. 그럼 우선 네 베개가 사라졌다는 것부터 증명해야지. 다짜고짜 훔쳐 갔다며 힐다 방에 쳐들어와, 아무 베개나 잡고 이건 원래 내 거라고 말하는 건지 어떻게 알아?”

“내가 그럴 인간으로 보여!”

“네가 그런 말 할 처지가 못 될 텐데.”

카타리나가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넌 옛날부터 힐다를 싫어했지. 힐다가 이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말이야. 베개를 건드린 건 힐다가 아니라 네가 먼저일 텐데?”

“흐, 흥! 친하다고 편들기는! 그래, 내 방으로 가! 까짓거 증명해 주면 될 것 아냐!”

“델로레스,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이쯤에서 그만둬. 이대로 물러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쳐줄게.”

나름 진심으로 델로레스에게 충고한 건데 그녀는 나를 잠깐 쳐다보더니 보란 듯이 비웃음을 던졌다. 뭐, 대강 저 표정을 풀어써 보면 ‘쫄리면 뒤지시든가’였다. 하, 이래서 평소에 마음을 착하게 먹고 살아야 한다는 거다. 자기 속내가 검으니까 남들도 죄다 새카만 줄 알잖아? 선의로 한 말도 엿 먹이려는 건 줄 알고 말이야.

“자, 봐! 내 방! 여기 어디 베개가…….”

자신 있게 앞서간 그녀는 문을 확 밀어젖히며 외치다 말끝을 흐렸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그만두자니까.

“뭐야? 베개 있잖아?”

먼저 침대를 보고 딱딱하게 굳은 델로레스를 밀쳐 내며 카타리나가 나섰다. 델로레스가 입술을 들썩거렸다.

“뭐야, 이게 왜 있지? 분명, 분명 어제는 없었는데…….”

“너 그게 할 말 전부니? 네 거짓말로 힐다를 도둑으로 만들었으면서?”

“아닌데, 이럴 리가 없는데…….”

침대에 얌전히 놓인 베개를 멍하니 보다가 델로레스가 몸을 홱 돌렸다. 나를 노려보는 눈에 독침이 박혀 있었다.

“너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내가 밤에 찾아갈 건 어떻게 알고 베개를 갖다 놓은 거냐고!”

“델로레스, 너 진짜 이제 그만해.”

“빨리 말 안 해?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놓고 어쩜 말 한마디 안 하고 쏙 빠져 있어!”

황당한 상황인 건 알지만, 델로레스는 착실히 자기 무덤을 파고 있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지금 저렇게 반응해 봐야 더 불리해지기만 할 텐데. 조금은 똑똑한 줄 알았더니, 자기가 어떤 처지인지 파악도 못 한 상태였다.

“델로레스! 너 계속 이렇게 억지 부릴 거야? 베개가 멀쩡히 있는 걸 들키니까 이젠 힐다가 몰래 갖다 놨다고 해?”

“나도 이상해, 이상하다고!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응? 네 방에 있는 베개, 내 거 맞잖아. 근데 어떻게 똑같은 베개가 내 방에 있을 수가 있는 거냐고!”

델로레스는 혼란에 휩싸여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굳이 설명해 주진 않겠지만, 간단했다. 아드리안이 내 방 앞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다기에, 내 방에 들르기 전 델로레스가 열어 놓고 간 방에 가서 베개를 놓고 온 것뿐이었다. 침 자국도 좀 발라 주고…….

그녀가 오리라 예측하고 베개를 산 건 아니었다. 그냥, 전날 밤에 못 자 피로도 때문에 깨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미안해져서. 좋은 베개는 아니더라도 적당한 걸 돌려주고 싶었던 거다.

“됐어. 얘기 끝났어. 델로레스, 이번 일은 레티샤 님께 보고할 테니까 그런 줄로 알아. 아무리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도 그렇지, 어떻게 도둑질로 누명을 씌울 생각을 해?”

“아닌데, 정말 아닌데…….”

“너, 힐다 근처에는 이제 얼씬도 하지 말도록 해. 못돼 먹어선.”

정말로 분노했는지 카타리나는 독하게 쏘아붙인 후 방을 떠났다.

델로레스가 데려온 무리도 이렇게 되자 자리를 지키기 어려워져, 서로 눈치 보며 방을 빠져나갔다. 착한 에밀리조차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델로레스를 보다가, 내 팔을 살며시 잡고 속삭였다. 손바닥에 조금 땀이 밴 걸 보아 많이 긴장한 모양이다.

“가자, 힐다.”

“으응.”

에밀리는 델로레스를 스쳐 가기 전 흘끗 보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나는 한 박자 늦게 뒤따르다 잠깐 멈추었다. 델로레스는 두 손을 꽉 쥔 채 홀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도돌이표 찍는 질문에 한숨이 나왔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

“뭐? 네가 지금……!”

“밀회는 다른 데서 하는 게 좋을 거야. 평소에 문도 좀 잘 잠가 두고. 안 그러면 누가 또 베개 훔쳐 갈지 몰라.”

저거 5골드나 하는 건데.

예전 베개랑 똑같은 베개라는 걸 보면 내 방에 있는 것도 고급 베개인 모양이다. 베개에 투자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영혼이로고. 예전의 힐다조차 희귀 베개를 썼던데…….

“지금 나 약 올려? 가만두지 않겠어, 너!”

나는 내 방에서부터 쭉 진심으로 충고하고 있었는데, 듣질 않아서 섭섭해지려고 한다. 딱히 미움 살 만한 일도 안 한 것 같은데, 난 델로레스에게 준 거 없이 미운 사람인가 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같은 적을 둔 같은 편이건만.

“도둑이 문단속 잘하라고 말해 봐야 조롱하는 것밖에 더 돼? 나는 이렇게 골탕 먹여 놓고 너는 훔친 베개로 마님 마차까지 타고 마을에 놀러 다녀오고! 아드리안 도련님께 꼬리 치고!”

“마님 마차는 내가 만든 콜드브루라떼 덕분인데.”

“콜드부…… 뭐?”

“힐다, 얼른 나와!”

이야기가 길어지자 밖에서 기다리던 에밀리가 날 불렀다. 착한 에밀리는 혹시 델로레스가 내게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인 모양이다. 나는 붉게 상기된 델로레스의 얼굴을 스치듯 보고 방을 나섰다.

어둠 속 복도 끝에서부터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왔다. 잊고 있던 한기에 어깨가 부르르 움츠러들었다.

「호감 대상 외 친구에게 처음 선물을 건네 경험치 1000을 얻었습니다.」

에밀리와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오자 흰 글자가 날 반겨 줬다. 선물이라면 델로레스에게 준 베개 말하는 건가? 이 시스템에서 친구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졌다. 머리끄덩이만 안 잡았을 뿐이지 원수 대하듯 살벌했던 것 같은데.

그사이 후반부에 머물러 있던 상태바는 끝까지 차더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Lv 9가 Lv 10으로 바뀌자 흰 글씨가 좌르륵 떴다.

「레벨 10으로 올랐습니다. (칭호 : 양심 없고 성실한 일꾼)」

「스킬 개방! ‘투시자의 눈’ 스킬을 쓸 수 있습니다.」

「럭키백이 개방되었습니다.」

양심 없는 건 끝까지 안 뺄 건가 보다. 이 구역에서 누가 제일 양심 없는데?

하지만 지금은 아무 쓸데없는 칭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새 스킬이 생겼잖아! 침대에 앉아서 찬찬히 들여다봐야겠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베개를 침대 중앙에 끌어다 놓고, 충격이 조금도 가지 않도록 경건하게 침대에 올랐다. 자다가 뒤척이기만 해도 늘 끼익거리는 소리가 나는 낡은 침대라, 내구도가 더 떨어지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했다.

좀도둑처럼 살금살금 움직이다 뚝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잠시 기다려도 다행히 침대 내구도 운운하는 흰 글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스킬창을 띄워 우선 감지 스킬 설정부터 바꾸었다. 볼륨은 지난번에 조종한 거로 괜찮은데 불빛은 여전히 거슬려서 거의 꺼 놓다시피 했다. 아드리안 앞에 있을 때 비상벨이 켜지면 얼굴이 반쯤 붉게 물드는데,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조정을 끝내고 새로 생긴 스킬을 두근거리며 눌러 봤다.

‘투시자의 눈’이라. 무려 10레벨에 얻은 스킬이니 ‘감지’보다 생존에 더 도움 되는 스킬 아닐까. 오늘 내내 크리티컬이 심심하면 터진 덕에 얻은 스킬이라, 이 공을 아드리안의 베개에 돌리고 싶었다.

“어디 보자, 스킬 설명이…….”

감지 스킬은 패시브에다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직관적이어서 굳이 설명을 읽지 않아도 됐는데, ‘투시자의 눈’ 스킬은 곧장 와닿질 않았다. 스킬 옆 ‘+’ 버튼을 누르자 꽤 긴 설명이 주르륵 떴다.

「투시자의 눈

개방 조건 : Lv 10

지속 시간 : 5분

재사용 대기 시간 : 3시간

선의와 악의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투시자의 눈’은 상대의 의도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스킬을 사용했을 때, 악의가 담긴 물건 주변으로 붉은 기운을 보게 됩니다.

독이 발린 칼날, 위장된 암살 도구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생활 속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악의를 찾아보세요. 상대방의 악의를 빨리 알아차려야만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주의. 악의란 사람을 해칠 정도의 강하고 악한 감정을 뜻합니다.

악의를 가진 사람은 투시할 수 없습니다.

해를 끼치는 물건이라도 악의가 담겨 있지 않으면 투시할 수 없습니다.

벽 등에 가려 보이지 않는 물건의 악의는 투시할 수 없습니다.」

“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스킬이잖아? 이걸 10레벨에 준다고?”

아드리안이 누군가를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도구를 쓰면 곧장 분간해 낼 수 있는 스킬이라니. 시스템이 잠깐 착각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해를 끼치는 물건이라도 악의가 담겨 있지 않으면 투시 불가’라는 조항이 걸리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똑같은 칼이라도 의도에 따라 일상적으로, 혹은 그 반대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 아무리 아드리안이라도 빵을 자르기 위해 나이프를 들었을 때 누군가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진 않을 텐데, 지금 내 눈에는 죄다 악의로 가득해 보여서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헛짚는 경우가 많으니 괜히 유난스럽고, 사방을 경계하느라 정작 아드리안이 진지하게 움직이려 할 때는 오히려 놓치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이 ‘투시자의 눈’만 있으면 아드리안이 진짜 악한 의도를 가졌을 때만 정확하게 골라내어 움직일 수 있다는 거지.

아드리안에게 가장 중요한 것도 은밀함이니까, 왠지 이 스킬이 생존에 큰 역할을 할 것 같은 좋은 느낌이 들었다.

“내친김에 한번 써 볼까?”

뭐가 좋을까. 주변을 돌아보는데 마침 딱 좋은 게 눈에 들어왔다. 오늘 아드리안이 들고 있다 내게 뺏긴 정원 가위. 사람을 찌를 악의를 담고 이걸 샀으면 붉은빛으로 보인다 이거겠지.

나는 조심스레 정원 가위를 들고 ‘투시자의 눈’ 스킬을 써 보았다. 분명 설명대로라면 붉은 기운이 돌아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깨끗하다.

“……뭐야, 아련한 눈빛으로 백작 부인 운운한 게 진심이었어?”

연기자를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악마라도 효자일 수 있구나. 악의도 없었던 물건을 억지로 빼앗았다니 입맛이 썼다. 정원 가위는 내일 돌려줘야지.

“럭키백은 또 뭐야? 행운의 가방?”

쪼렙 구간을 벗어나니 숨겨져 있던 시스템이 하나씩 개방되는 모양이다. 정원 가위를 내려놓고 상단에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가방을 누르자, 이번에는 흰색 글씨 대신 꽤 꾸민 듯한 이미지가 떴다. 궁전 벽에서나 보던 고풍스러운 장식으로 테두리 쳐진 박스 안에 새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3일에 한 번 무료로 아이템을 뽑을 수 있습니다.

아이템 획득 등급 : 일반~영웅

레벨이 더 오르면 고급 뽑기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소싯적에 RPG 말고도 수집형 게임 또한 즐겨 했던 나다. 이런 무료 뽑기에서는 유용한 아이템이 목록에 존재하긴 하지만, 평생 뽑아도 나오지 않을 극악의 확률을 자랑하는 법이다. 그래도 무료이니 뽑아 보긴 하겠지만, 진짜 무료라고?

나는 뽑기 버튼을 누르려다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시야 구석구석을 훑어보았다.

뭐가 됐든 이 게임이 유저한테 유리한 시스템을 제공할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진짜 이거 무료 뽑기 맞아? 돌리기만 무료고 나머진 유료 아냐? 뽑았는데 ‘-10G’가 나와서 내 돈 갈취해 가는 거 아냐? 애초에 공포게임에 뽑기 시스템이 왜 있는 거야.

나는 빛나는 ‘무료 뽑기’를 누르기 전, 주변에 숨겨진 문구가 없는지 샅샅이 뒤졌다. ‘뽑기 결과에 따라 결제될 수 있다’, ‘버튼을 누르는 건 유료 결제에 동의한 것과 같다’와 같은 함정성 문구 말이다.

시스템에 하도 당한 게 많다 보니 새로운 걸 보면 이렇게 경계부터 하게 되었다.

하지만 진짜 무료 뽑기이기는 한지, 아무리 찾아봐도 특별히 보이는 문구는 없었다. 뽑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하얀 글씨만 노려보고 있었다.

뽑기 효과가 나오자 순간 카지노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템이 여럿 나오고 룰렛이 휘리릭 돌아갔다.

빠칭코……?

뭐 적당히 쓸모없는 아이템이나 나오겠지. 보통 게임 확률표가 일반이 97%, 고급이 2%, 희귀가 0.9999999%, 영웅이 0.0000001%니까.

‘나는 다를 거야’, ‘설마’ 하며 평생 뽑아 봐야 일반 아이템만 나오는 게 뽑기다. 왜냐면 게임 개발사는 유저에게 재미도 줘야 하고, 먹고살기도 해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심드렁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황금 번개가 번쩍 떨어졌다. 뭐야, 뭔데 효과가 저렇게 화려해?

“설마 나 한 방에 영웅템 먹는 거야?”

다른 색도 아니고 황금색이다. 일반 등급 아이템에 저런 효과가 뜰 리 없잖아. 뭐지? 뭘까? 설마 진짜 영웅템? 영웅 베개?

이렇게 게임 인생 한 방에 역전하는 겁니까? 아드리안을 마주했을 때를 월등히 뛰어넘는 박동 소리가 귀를 메웠다.

이내 룰렛이 멈추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이템이 내 손바닥 위로 깃털처럼 떨어졌다.

대체 뭐기에 효과가 이렇게 거창한 걸까? 눈이 휘둥그레진 채 지켜보는 가운데 찬란한 빛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점점 형체를 잡아 가며 내 눈에 들어오는 건…….

「잡초를 획득했습니다!

특징 : 쓸모없음」

말 그대로, 잡초였다. 하늘 끝까지 날아올랐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에 처박혔다.

쓸모없는, 잡초…….

왜 잡초 따위가 나오면서 황금색으로 빛난 건지 황당해서 웃음이 터졌다. 수집형 게임에서 자주 보던 걸 여기서 당하다니! 한순간이나마 황금색 효과에 속은 내가 진 거다. 확률표도 잘 알고 있었으면서!

나는 미친 것처럼 허공에 대고 크게 웃다가 잡초가 부스러지도록 꽉 쥐었다. 그리고 힘껏 바닥에 패대기쳤다.

무료 뽑기일 때부터 알아봤어!

“도련님, 약 가지고 왔어요.”

문을 똑똑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와도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아드리안의 방에 도착한 건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각이었는데, 어떻게든 빼먹을 수 없을지 부엌에서 미적거리지 않고 곧장 오니 지금이었다. 이전까지는 아드리안이 날 언제 어떻게 죽일지 몰라 전전긍긍했다면 지금은 ‘투시자의 눈’ 스킬이라는 뒷배가 있어 조금은 편안해졌다. ‘살인에 사용할 만한 도구를 모두 치워 버리자’는 전략을 세우자마자, 딱 쓰기 좋은 스킬을 얻은 셈이다.

이제 아드리안이 무슨 물건을 가지고 있든 대처할 수 있다. 빨갛게 빛나면 어떻게든 뺏거나 자리를 피하고, 아니면 가만히 있고. 별것 아닌 일로 오두방정 떨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서 뺏은 정원 가위는 도로 가지고 왔다. 이걸로 살인할 생각이 없다는 게 밝혀졌으니 돌려줘야지. 어차피 아드리안 방에는 매일 오니, 혹시 붉은빛으로 빛나면 가지고 돌아가면 되겠지.

‘투시자의 눈’과 함께라면 난 무적이다. 그런 희망에 부푼 채 문을 활짝 열었다.

“힐다 왔구나.”

처음 보는 사람이 아드리안의 침대 옆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겨 인상이 깔끔한 노년의 신사였다.

큰일이다. 누구인지 모르겠다. 게임할 땐 저런 캐릭터가 없었는데, 설상가상으로 힐다와 가까운 사이로 보여 이름을 물을 수도 없었다.

“안…… 녕하세요.”

딱히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우물거리고 있는 나를 아드리안이 유심히 바라봤다. 내 떨떠름한 반응에 노년의 신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원, 녀석. 아직도 인사 없이 멀리 왕진 다녀왔다고 삐져 있는 거로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이번엔 정말 급하게 다녀와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단다. 그동안 도련님께서 아침저녁으로 드실 약을 지어 두는 데만도 바빴지 뭐냐. 도련님 약은 잘 챙겨 드리고 있었는지, 어디 보자.”

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가 든 쟁반을 받아 들고 작은 종지 그릇에 담긴 약을 하나씩 살폈다.

“개수 딱 맞게 잘 가져왔구나. 처음엔 그렇게 실수를 하더니, 힐다.”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요. 익숙해져야죠.”

“어이구, 말대꾸하는 거 보니 삐진 게 그새 풀렸나 보구나. 나중에 내 방으로 한번 오렴. 왕진 다녀오면서 특별히 기념품을 사 왔으니. 그럼 금세 옛날처럼 휴버트 선생님, 휴버트 선생님 하며 따라다니겠지?”

“그런 거 안 받아도 섭섭해하지 않아요, 선생님. 먼 길 다녀오신 선생님께 어떻게 그러나요.”

나는 냉큼 그의 말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단서를 주워서 대꾸했다. 휴버트의 눈이 휘어지며 눈가에 깊은 주름을 그려 냈다.

“원, 녀석도. 그런 기특한 말도 할 줄 알고. 도련님 앞이라고 새침하게 구는 거냐? 응?”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도통 모르겠단 표정으로 멀뚱거리자 휴버트가 다시 크게 웃었다.

“요 녀석, 모르는 척하는 거 봐라. 어렸을 때 생각 안 나는 거냐? 너, 이곳에 온 첫날 어쨌는지 말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진짜 몰라서 말한 거였는데 내 표정이 구겨질수록 휴버트의 얼굴은 점점 짓궂은 장난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불안한데.

“도련님이 너무 잘생겼다고, 결혼하고 싶다고 울면서 떼를 썼지 않니.”

“아니, 뭐라고요?”

한순간 노인 공경을 잊고 멱살을 잡아 올릴 뻔했지만, 내 살벌한 표정을 보고도 휴버트는 멈출 줄을 몰랐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도련님의 부인이 되겠다며 백작 부인께 매달려 얼마나 떼를 썼니. 어린 게 멋도 모르고 약속해 달라면서 소리 지르며 우는데, 다들 얼마나 당황했던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식은땀이 나는구나.”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아드리안은 옛 기억을 되살리려는 것처럼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나는 이 게임에 갇히고 처음으로 욕을 뱉을 뻔했다. 경험치 통째로 날렸을 때도, 베개 때문에 못 잘 때도 욕은 하지 않았으니 지금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짐작했으리라 믿는다.

누가, 저, 살인마, 악마랑…… 뭐?

순식간에 난 식은땀 때문에 등 뒤가 흠뻑 젖었다.

“휴, 휴버트 선생님. 어, 어휴. 대체 무슨 말씀을……. 책임지지 못할 말씀은 하는 게, 아니에요, 하하, 하하…….”

“아무리 철이 없는 어린아이라도 하필 도련님을 상대로 그런 망언을 했으니 목이 잘려야 마땅했지만, 마님께서 넓은 아량을 베푸셔서 너를 아드리안 도련님 곁에서 한번 재워 주셨지. 어린 게 뭘 알았던지, 손만 잡고 자겠노라고 큰소리 떵떵 쳐서 마님을 또다시 당황하게 했었어. 너는 어렸을 때도 참 당돌했지, 하하. 그 뒤로도 한동안 도련님 뒤를 졸졸 따라다녔고.”

그만해, 그만! 제발 그만하라고! 아드리안 쟤 표정이 이상해지고 있잖아!

나는 휴버트의 입에 주먹을 쑤셔 넣어 틀어막을 상상까지 하고 있었다. 손끝이 움찔거리는 걸 보면 실행해 옮기기 바로 직전이다.

“게다가…….”

“도련님! 참! 이거! 돌려드릴게요! 어제 드리기로 한 거! 정원 가위!”

휴버트의 입에서 뭐가 또 터질지 몰라 말을 끊고 들어갔다. 쟁반은 휴버트에게 얼렁뚱땅 밀어 버리고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가 정원 가위를 내밀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가위로, 조금 전의 망언을 죄다 기억에서 잘라 내 버리고 싶다.

“돌려주다니, 의외인걸.”

밀랍 같은 무표정으로 그가 읊조렸다. 나한테 향한 거라기보다 혼자 중얼거린 것에 가까웠지만, 나는 냉큼 대답했다. 휴버트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택 와서 꼭 드린다고 했잖아요.”

“글쎄, 말은 그렇게 해도 저택에 가져가서 묻어 버리겠다는 표정이었거든. 본인은 정작 쓸 데도 없으면서, 이상하기도 하지.”

“그, 그, 그럴 리가요.”

“어제는 억지를 써 가면서 정원 가위를 가져갔지. 이게 내 손에 들려 있는 것부터 두렵다는 듯이. 그런데 오늘은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 다시 가져오고. 잘 모르겠어. 내 어디가 힐다를 항상 겁에 질려 있게 하는 걸까.”

기다란 손가락이 가위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왜 겁에 질려 있는지 모르겠다니. 저 악마는 이미 제 입으로 나에게 적이라고 선언한 걸 벌써 잊어버렸나 보다. 상냥하고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고 그 내용까지 상냥하진 않았는데.

내 대답 같은 건 애초에 듣지 않는 눈치라, 잔머리를 굴려 거짓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규칙적으로 손잡이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추었을 때, 그가 나를 올려다봤다.

“……괜찮아, 말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으니까.”

“…….”

“어쨌건 잘 가져왔어.”

눈빛은 차갑게 샅샅이 훑는데 입술은 빙긋 올라간다. 식은땀이 또 흘렀다. 설마 얘도 ‘악마의 눈’ 같은 스킬을 가지고 있어서 내 의도를 다 읽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닥터 휴버트, 시간 되시면 정원 한 바퀴 산책하시죠. 의논할 것도 있고.”

아드리안이 가위를 침대 옆에 밀어 놓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잽싸게 뒷걸음질 쳐 두 사람이 편하게 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다. 휴버트는 내가 떠넘긴 쟁반을 근처 협탁에 내려놓았다.

“예. 가시죠, 도련님.”

“안녕히 다녀오세요, 도련님. 휴버트 선생님도 안녕히 가세요!”

얼른 쟁반을 정리하는 척하며 인사를 건네자 두 사람이 동시에 뒤돌았다. 휴버트의 굵은 눈썹이 휘어 올라갔다.

“무슨 소리니, 힐다. 나는 이 저택에 살지 않니.”

“그, 그러니까요. 오랜만에 뵀으니 숙소까지 조심히 가셨으면 해서요.”

“참, 힐다. 아까 닥터 휴버트가 말한 거 말인데.”

아드리안이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며 휴버트에게 눈짓했다. 휴버트가 눈치 빠르게 물러나 이윽고 문가에서 보이지 않게 됐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끔벅거렸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아드리안의 표정은…… 설명할 수 없이 묘했다.

“날 그렇게 보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

또 그 얘기냐.

“도련님,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저렇게 부끄러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 노친네가 진짜…….

뒤로 물러난 줄 알았던 휴버트가 다시 불쑥 끼어들자 아드리안은 쉿 하며 다시 그를 물렸다. 이번에 휴버트는 꽤 멀리까지 물러난 것 같았다.

욕만 나온다. 실제 게임 중이었으면 샷건(게임을 하다가 화가 날 때 키보드나 책상 등을 내려치는 것, 키보드를 부수기도 함) 치고도 남았다. 당황스럽고 창피하고 수치스러워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니에요. 진짜로 아니에요. 휴버트 선생님께서 잘못 기억하고 계신 것 같은데, 하하, 하하, 노망나신 거 아닐까요?”

“안 그래도 돼, 힐다. 나도 다 기억났으니까.”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래서 그렇게 말했구나. 두근거려서 날 보기 힘들다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위기의 순간마다 나불대며 뱉었던 허풍이 하도 많아,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아드리안을 만날 때마다 외모를 기계적으로 칭찬하긴 했지. 그게 또 그렇게 연결되냐?

“그런 마음도 모르고 내가 너를 아침마다 불러들였으니, 한동안 힘들었겠다.”

아니, 근데 어째…….

“혹시 내 침대에서 자고 있던 것도…….”

점점 이상해지는데…….

“설마 속옷 가게에 들르려던 것도?”

걷잡을 수가…….

“안 돼, 힐다. 우리는 다 큰 성인이라, 어렸을 때처럼 손만 잡고 자는 거로 끝나지 않아.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딱한 사정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날 측은하게 보고 있었다. 저건 또 새로운 표정이잖아.

나는 귀 끝까지 새빨개진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아, 수치스럽다. 코 골고 침 흘리며 침대에서 뒹굴고 있던 걸 들켰을 때보다 배는 수치스러웠다.

왜 그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는지, 잘생겼다고 칭찬해 댔는지 설명할 수도 없고…….

하하, 그냥 창문으로 뛰어내릴까? 그래, 그게 깔끔하고 나을 것 같아.

“아니에요, 도련님. 아까 선생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정말 오래전 이야기예요. 그때는 워낙 철이 없어 도련님이랑 결, 결, 결…… 후우, 결…… 혼하겠다고 떼썼지만, 하하, 정말 미쳤죠? 제가 생각해도 정신 나갔네요. 지금은 제 주제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답니다. 언감생심, 어, 어떻게, 도련님의, 부, 부인, 참 나, 하, 하하, 입에 담기도 끔찍…… 망측하네요.”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

진심으로 안도하는 듯 보여서 순간 자존심이 상했다. 누가 지금도 자기랑 결혼하고 싶은 줄 아나? 내 쪽에서 사양이다!

“먼저 가세요, 도련님. 저는 뒷정리 좀 하고 따라 나갈게요.”

속에선 뜨겁게 달구어진 쇳물이 끓어올랐지만, 겉으로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쟁반을 정리해 놓는 척 찻잔을 잡았는데, 창피함과 당황으로 손이 떨려 쉼 없이 달그락거렸다.

“……그래, 그럼.”

그는 나가기 전 한 번 더 나를 돌아봤는데, 측은하게 여기는 눈빛은 여전했다.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몇 번 달싹이기까지 해서, 나는 홱 고개를 돌리고 외면해 버렸다. 아무리 수치스럽다고 말해도 모자랄 수치였다.

쳐다보지 마, 말하지 마, 동정하지 마!

동정하려거든 차라리 돈을 줘!

‘미쳐, 진짜!’

아드리안과 휴버트가 계단 밑으로 내려가는 소리를 끝까지 들은 후에 나는 바람 소리뿐인 비명을 질렀다.

수치…… 수치스러워! 수치사라는 게 진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사람 보는 눈도 없지. 세상천지 남자가 반인데 하필이면 아드리안을 점찍어서 그 소동을 피워?

어떻게, 왜, 하필이면! 그 악마 새끼인 건데? 이상한 오해까지 다 사 버렸잖아!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협탁을 내리치려다, 문득 현실을 깨닫고 멈추었다. 이거 비싸 보이는데, 내구도 떨어졌다간 손해 배상금 장난 아니겠다.

어디 마음껏 팰 만한 거 없나? 한국이었으면 당연히 베개를 쥐어팼겠지만, 이 게임에서 베개의 위상은 백작가 저리 가라 할 정도였기 때문에 참았다.

다른 건 다 패도 베개만은 팰 수 없지.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내구도를 떨어뜨리거나 부숴서 내 재산으로 배상이 가능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죄다 비싼 것들로만 가득해서.

나는 하는 수 없이 허공에 마구 주먹질하며 이 울분을 푸는 수밖에 없었다.

아까! 아드리안! 표정 봤냐고! 휴버트 그 인간 갑자기 뭐야! 왜 옛날 일을 들춰서 사람을 이렇게 쪽팔리게 만드는 거냐고!

힐다도 그래! 골라도 어쩜 저런 인간을!

“헉, 헉…….”

보이지 않는 샌드백을 마구 후려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멈추었다. 딴엔 분노한 건데 어째 꼴은 춤추는 바람 인형 같아서 우스워졌다. 주로 새로 개업한 가게 앞에서 손 흔들고 있는 그 바람 인형 말이다…….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다 보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후후, 후후후…….”

귀신 소리를 내며 웃다보니 조금씩 이성이란 게 돌아왔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가끔 게임 시스템이 이성을 잃게 하지만, 나는 인간이다. 고로 생각한다.

휴버트 때문에 내 인간적인 체면이 다른 세계로 떨어지고 말았지만, 여기는 현실이 아니야. 게임 속이다. 게임 캐릭터들한테 동정이란 동정은 다 사고 꼴이 우습게 됐지만, 여긴 현실이 아니니까 견딜 수 있다.

그래, 진정하자. 하기로 한 일부터 끝내고 얼른 가는 거야.

“후…….”

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침착함으로 냉정해진 후, 주변에 누가 없는지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투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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