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33)

2-1. 스킬은 주지만 맘대로 써도 된다고 한 적은 없다.

편하다. 온몸이 침대에 눅진하게 녹아든다는 게 이런 걸까? 잠들어 있으면서도 잠에서 깨기 싫었다. 꿈도 안 꾸고 푹 잔 덕에 피로가 싹 풀린 게 느껴졌다. 이렇게 두 발 뻗고 푹 잠든 게 대체 얼마 만이지? 모르긴 몰라도 이 게임에 끌려온 이후에는 없다는 게 분명했다.

“하아아…….”

나는 실크처럼 부드러운 이불을 한 아름 품에 안고 얼굴을 묻었다. 햇볕에 바짝 말린, 바삭바삭한 냄새가 났다.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흐으응, 하고 나른한 한숨마저 흘려보냈다. 매일 이 침대에서 잘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안 되지, 안 돼. 이게 누구 침대인데. 이렇게 잠깐 있는 거면 몰라도 절대…….

응? 누구 침대?

잠자면서도 속으로 떠들어 대던 나는 뭔가 이상한 생각의 흐름에 눈을 반짝 떴다.

이게 누구 침대더라?

아직 몽롱해서 당장 답이 떠오르진 않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 고풍스러운 천장은, 내가 매일 아침에 보던 천장이 아니라는 걸.

뭐야, 여기 어디야…….

“헉!”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고개를 돌렸다가 심장 마비 걸릴 뻔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 아, 아드리안이 의자에 앉아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침대 가까이 의자를 끌어당겨서 턱을 괸 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턱 밑까지 축축하게 흐른 침을 닦고 침착하게 물었다.

“거, 거기서 뭐 하세요, 도련님…….”

공포 영화 찍으세요?

새카만 어둠 속에서 불빛에 얼굴만 희미하게 보이는 악마라니, 이건 진짜 공포 영화감이다.

“힐다, 너야말로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얼핏 상냥하게 들리지만, 차갑고 감정 없는 목소리에 등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니까 여긴 아드리안의 방이지. 나는 침대에서 곯아떨어져 있었고…….

미쳤다, 미쳤어. 나 아드리안 침대에서 지금까지 잔 거야?

“정말 죄송해요. 면목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설명이 될지 모르겠는데, 어제 베개가 없어서 잠을 못 잤거든요. 잠이 부족한 채로 정원에서 일하다 보니 피로가 누적돼서…… 침대보만 갈러 온 건데, 깜박 잠들어 버리고 말았어요.”

그러고 보니 나 낮에 정원에서 잡초 및 시스템과 사투를 벌였지. 그래서 못 봐 줄 정도로 흙투성이가 됐고. 흙투성이인 채로 잤다는 건, 설마…….

“헉…….”

어두웠지만, 분명 보였다. 먼지 하나 없던 침대보와 이불이 내가 자고 일어나서 흙투성이가 돼 버린 게.

그러잖아도 어두웠던 내 미래가 완전히 새까매졌다. 틀렸어. 이건 소생 가능성이 없다. 아군을 부활시키는 부활 힐러가 와도 살릴 수 없어. 당장 아드리안이 날 저택에서 내쫓아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보통 귀족의 이미지라면 당장에라도 ‘네까짓 게’, ‘감히’, ‘내가 누군지 아냐’라는 대사를 날려 댈 법한데, 아드리안은 그저 형형한 눈으로 날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누가 보면 초능력으로 최면이라도 거는 줄 알겠다. 진짜, 말도 안 나올 정도로 심하게 빡쳤나 보다. 그래. 충분히 그럴 만하지. 베개가 침에 흥건하게 젖어서 자국까지 났는데……. 세상에, 민망하기도 하지. 안 볼 때 살짝 뒤집어 놔야겠다.

“저, 의도치 않게 침대를 더럽혔는데, 침대보랑 베개 다시 빨아 올까요? 언제 주무실 생각이신지…….”

“가만히 좀 있어 봐, 힐다.”

“시, 싫으시면 저랑 침대 바꾸실래요? 비록 베개는 없지만…… 여기보단 깨끗해요. 잠깐 가서 쉬고 계시면 제가 얼른 정리하고 다시 도련님을 모실게요.”

“……정말 안 통하는 건가?”

“그것도 싫으시구나. 으, 으음. 그럼 어떻게 할까요. 머리 박을까요?”

살려 준다면 머리는 얼마든지 박을 수 있었다. 자존심이 조금 상하긴 했지만, 자존심이 밥 먹여 주진 않으니까.

나는 언제든 박을 준비를 마쳤지만, 어째서인지 아드리안은 말없이 계속 날 노려보기만 했다. 내 이마에 구멍 뚫릴 때까지 저렇게 쳐다보는 건 아니겠지.

침대 어쩔 거냐고 노발대발 펄펄 뛰는 것보다 저 반응이 더 부담스럽고 무서웠다. 죽이고 어떻게 요리할지 궁리하는 거 같잖아!

“……진짜 안 통하나 보네.”

반쯤 허탈한 듯 그가 고개를 돌렸다. 진짜 이마에 구멍 뚫으려고 한 거 아냐?

“됐어, 가 봐.”

“어, 하지만 침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가 봐.”

다소 맥 빠지고 피로한 목소리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얘가 지금 나 살려 주는 거야? 나는 기쁘다기보다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하인이 지체 높으신 귀족 도련님 침대에서 나뒹굴다가 잠까지 잤는데 그냥 보낸다고?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뒀다. 생각해 보니 이유가 없었다면서 죽이려고 들 수도 있으니까. 보내 줄 때 얌전히 가야지.

“그럼 전, 이만…….”

혹시 내 발소리가 심기를 거스를세라 발끝까지 들고 살금살금 움직였다. 저 살아남았어요! 그렇게 외치며 문을 나서려는 순간, 머릿속에 하얀 글자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이 게임 시스템은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값을 매겨 칼같이 재산에 더하고 뺐다. 안 그래도 오늘 피로도가 어쩌니 하며 일급을 왕창 깎아 버렸잖아. 도련님의 침대보와 이불, 베개는 얼마짜리일까? 모르긴 몰라도 내 첫 전 재산 300골드보다 비쌀 것 같은데, 저 비싼 침구들의 손해 배상이 뜨면 내 재산은 소생 불가다. 개인 회생 신청조차 안 될 거다.

거지로 쫓겨나 굶어 죽는 거나, 여기서 악마의 밥이 되는 거나…….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잡았던 문고리를 참담한 심정으로 놓았다.

지속적인 가난은 사람을 이렇게나 돌게 만드는 법이다.

“도련님, 저 이대로는 못 가요. 침대를 저렇게 만든 벌을 내려 주세요.”

“……벌이라니?”

아드리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하지만 모든 벌을 다 받을 수 있는 건 아녜요. 특히 돈요. 돈으로 물어내라는 건 못 해요. 일급을 깎는 것도요. 그것 말고는 다 할 수 있어요.”

“…….”

“잘못해서 벌 받겠다고 자처한 마당에 무슨 사족이 그렇게 많냐고 생각하시겠지요. 이렇게 당당할 주제 안 된다는 거, 잘 알아요. 제가 말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걸요. 하지만 사람이 절벽 끝까지 몰리고 몰리다 보면 이렇게 될 수도 있네요. 부디 저 침대를 더럽힌 죄에 상응하는 벌을 내려 주시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요.”

“누가 힐다 너를 절벽 끝까지 몬단 말이야?”

“양아치 있어요. 매일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를 찾아와서 갖은 이유를 대 가며 돈을 싹 긁어 가는 양아치.”

빌어먹게도 그 양아치는 24시간 내 옆에 꼭 붙어 있었다.

“그런 인간이 들락거린단 말이야? 여기에?”

“네. 워낙 양심도 없는 양아치라, 제힘으론 쫓아낼 수도 없어요. 어쨌든 도련님께 정정당당히 죗값을 치를게요. 당사자와 해결하면 양아치도 별달리 꼬투리 잡지 않을 거예요. 아마도요. 참, 레티샤 님께도 비밀로 해 주세요. 요새 저 때문에 편두통이 온 것 같아서 조심하려고요.”

“…….”

“저희 저택은 하인장님 없으면 안 되잖아요.”

저 형형한 눈빛에 손끝이 떨리고 등골이 서늘한데, 입은 평생 안 죽을 것처럼 신나게 움직였다. 피곤한 거지가 이렇게나 용감할 수 있구나.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후…….”

레티샤에 이어 아드리안에게도 편두통이 오게 한 모양인지 그가 이마를 짚고는 이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날렵한 턱선과 콧날, 우수에 젖은 눈동자……. 껍데기로만 보면 비주얼 연예인이 따로 없었다.

“돈은 못 준다고 말하고.”

“그럼요.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드려요. 있으면 드리겠지만, 정말 한 푼도 없거든요.”

“머리는 박게 해 봐야 가치도 없고.”

“그건…… 좀 너무하시네요.”

나는 조금 속상해져서 투덜거렸다. 그래도 큰맘 먹고 말한 건데.

“그럼 내 질문에 대답하는 거로 하지.”

“네? 겨우 그런 거로 괜찮으시겠어요? 저 침대랑 이불, 베개 전부 비싸 보이는데.”

“네게서 들을 수밖에 없는 대답이야. 대신 솔직하게 대답해.”

“뭐, 뭔데 그러세요?”

“날 쳐다보지 않는 이유가 뭐야.”

다 눈치채고 있었구나. 하긴 그렇게 티 나게 피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하지? 애초에 일개 하인 따위가 귀족 도련님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게 버릇없는 거잖아?

침대를 더럽힌 죗값치고 싼 거였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아드리안이 악마고 사람을 죽여서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잖아. 그래서 그 앞에만 서면 오금이 저리고 미치도록 무섭고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난 솔직한 대답을 원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는지 촛불이 확 커지며 그의 얼굴 위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옅은 쌍꺼풀과 우아하고 기다랗게 뻗은 속눈썹…….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번쩍 이유가 생각났다.

전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그래도 거짓은 아닌 이유를.

“그야, 잘생겨서죠.”

아드리안은 이 게임의 주인공으로, A컴즈에서 가장 실력 좋은 원화가가 그렸을 테니 비주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상을 아는 나한테는 오싹하기만 하지만.

“제가 오래전부터 여기서 일해 왔지만, 도련님 성장하시면서 진짜, 너무 잘생겨지신 것 같아요. 병약 미소년이라니, 딱 제 취향. 어느 순간부터 도련님만 보면 두근거리고 손발이 떨려서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었답니다.”

“…….”

“솔직히 거울 보면서 가끔 생각하지 않으세요? 오늘도 난 잘생겼구나. 어떻게 이렇게 생겼지? 부모님께선 날 어떻게 이 얼굴로 낳아 주셨을까. 평생 감사해야겠다.”

나는 준비된 대본을 읽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줄줄 읊어 댔고, 아드리안은 내 대답이 의외였던지 조금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 옆머리를 살짝 넘겼다.

“뭐, 가끔 그러긴 하는데.”

“그, 그쵸. 그러실 만하죠. 국보급 얼굴인데…….”

뭐야,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왕자병이었네. 게임할 땐 그런 설정 없었는데…….

“그래서 그게 다라고?”

“그게 다예요.”

“……날 보면 두근거려서 피했다고?”

“네. 가까이 갈수록 귀가 터져 버릴 것처럼 심장이 쿵쾅대요. 그래서 되도록 멀리 있고 싶었던 거예요. 젊어서 심장 마비 걸려 죽긴 싫었거든요.”

심장이 쿵쾅거렸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감지 스킬 때문에 아드리안만 보면 심장 소리가 엄청 울렸으니까.

떠오르는 대답이 이것뿐이라 던지고 봤는데 이걸로 될까? 살인마의 심기를 거스른 건 아닐까? 이 대답에 내 목숨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데. 뒤늦게 살짝 소심해져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때였다. 24시간 내 옆에 붙어 있는 양아치가 말을 걸었다.

「아드리안의 호감도가 1 올랐습니다.」

「현재 아드리안 호감도 lv.1 (3/400)」

아니, 뭐라고?

예상치도 못한 결과에 나는 잠깐 멍해졌다가 아드리안을 슬쩍 훔쳐봤다. 워낙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고, 얼굴을 반쯤 돌리고 있어 확실하진 않았지만, 살짝 웃는 것도 같았다.

이렇게 티 나는 아부도 통하는구나.

이것 참, 아부 좋아하는 악마라니. 좋아해야 하는지, 절망해야 하는지…….

“됐어. 이제 정말 가 봐도 좋아.”

아드리안이 손끝 하나 안 댄 채 돌려보내 준다고 하고, 서로가 인정한 가치로 교환이 성립됐으니 이제 나에겐 방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이대로 물러서야 하는 걸 알고 있는데,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근데 도련님,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 베개 말인데요.”

“베개?”

도저히 두고 갈 수 없었다. 나를 천상의 수면에 들게 해 준, 통통하고 탐스러운 베개를.

“저 침 묻은 베개, 저에게 버려 주시면 안 될까요? 베고 주무시기에도 찝찝하실 텐데.”

“돈 없다면서.”

“네. 빈털터리죠. 뒤져서 1골드라도 나오면 처맞을게요.”

“그런데 나한테 빚을 지겠다고?”

“…….”

“그 대가로 내가 뭘 요구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힐다?”

“뭘 요구하실 건데요?”

보통 여기까지 대화가 진행됐으면 무서워서라도 도망갔겠지만, 베개에 대한 집착이 날 계속 여기 머물게 했다.

내 대답이 의외였던지 아드리안은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렸다.

“나는 베개가 여섯 개 없으면 못 자는 체질이거든.”

고개를 돌려 보니 침대 위에 희고 통통한 베개가 여섯 개 있긴 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누구는 한 개도 없어서 밤에 잠도 못 잤는데!

“뭐 그런…… 아니, 네. 그러시군요.”

“베개 하나가 없어진 그 자리를 힐다 네가 대신할 수 있겠어?”

왠지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며, 해사하게 눈꼬리가 휘었다. 사르르 녹아드는 듯한 눈웃음이었으나 정작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더러 베개를 대신하라니, 무슨 뜻일까?

네 가죽을 벗겨 베개로 만들어 베겠다, 뭐 그런 건가?

“맙소사, 도련님. 그런 거 베도 편하게 못 주무실 거예요. 차라리 침 묻은 걸 베세요.”

그런 끔찍한 걸…….

“글쎄, 무척 따뜻하고 부드러울 것 같은데.”

“진짜 죄송합니다. 조용히 꺼질게요.”

악마를 상대로 상식적인 교섭을 시도해 보려던 내가 바보였다. 잘생긴 또라이라니. 그래, 이미 사람 몇 죽여 봤으니 제정신일 수가 없지. 천천히 뒷걸음질 쳐서 그와 거리를 벌린 후, 얼른 문을 열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등 뒤로 작은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분명 기분 탓일 거다. 기분 탓.

돌은 게 분명하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어떻게 거기서 곯아떨어질 수 있어? 그 살인마 눈에 더 띄어 버렸잖아.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자책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최대한 조용히 단서를 찾아 이 게임에서 나가는 게 목표였는데, 요즘 내 행동을 돌아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눈에 안 띄는 게 없었다.

아드리안 앞에서 썼던 말투, 행동이 진짜 힐다답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도 뒤늦게 떠올렸다. 더는 돈을 뺏기지 않을 거라는 오기가 결국 본능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이긴 것이다.

그래도 이 와중에 천만다행인 건, 방에 돌아와도 아드리안의 침구를 더럽힌 데 대한 손해 배상은 뜨지 않는다는 거였다. 오늘 80% 깎여 들어온 6골드가 이렇게 소중하고 빛나 보일 수 없었다.

만약 아드리안의 침대와 이불, 베개를 물어내라고 떴으면 내 쥐꼬리만 한 일급으로는 평생 일해도 불가능했을 거다. 이 게임에서 다른 의미로, 사채업자한테 쫓기는 빚쟁이의 마음으로 빨리 나가기를 바라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도 다행이다. 당사자와 이야기해서 잘 풀었으니.

침구를 망친 대신이라기엔 ‘왜 안 쳐다보냐’는 질문은 너무 가치 없긴 했지만.

일부러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는 걸 아드리안이 의식하고 있었음이 오히려 의외였다. 아드리안에게 나는 ‘지나가는 하인 58번’ 정도인 줄 알았는데. 그도 그럴 게, 하인도 워낙 많고, 나는 그저 그렇게 생긴 평범한 하인이고.

“모르겠다. 피곤해. 그냥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 보자.”

아드리안 방에서 푹 자긴 했지만, 공포도 이겨 낼 수준의 피로를 다 풀기엔 무리였다. 먼저 흙 묻은 작업복을 벗고 씻고 온 뒤, 신성하고 경건하게 침대로 가서 누우려 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기다렸다는 듯 내 등을 반대쪽으로 떠밀었다.

「베개가 없어서 누울 수 없습니다.」

참, 이걸 잊고 있었네.

저 망할 흰 글씨야말로 이 모든 사달의 원흉이었다. 애초에 저게 날 빡치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베개를 패서 내구도를 떨어뜨릴 일이 없었다. 내구도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피로도가 솟구칠 일도 없었을 테고, 아드리안의 방에서 자 눈에 띌 일도 없고, 앞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을 확률도 훨씬 높아졌겠지.

내 인생이 ‘아드리안이 악마의 힘을 되찾는 데 쓰인 주춧돌 1’로 끝나게 된다면, 이 시스템에도 반 이상 책임이 있었다.

“들었어? 내가 만약 여기서 죽으면 너한테도 반 이상 책임이 있는 거야!”

시스템은 대꾸 없이 조용했지만, 비록 무생물일지라도 양심의 가책이 들 만큼 적극적으로 비난했다. ‘다 너 때문이다’, ‘너는 양심이 없냐’,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또 베개가 없으니 누울 수 없다고 하는 거냐’, ‘노예 착취, 악덕 고용주, 사기꾼, 양아치’ 등등. 내가 아는 모든 표현을 이용하여 양심의 가책을 주고 났더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어쩐지 시스템도 좀 잠잠해진 것 같고.

“그럼 나 이제 침대에서 자도 되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설마 또 베개가 없다느니 하진 않겠지?

「베개가 없어서 누울 수 없습니다.」

이 시스템 정말 양심 없다. 예전에 수집형 게임을 할 때, 5성급 캐릭터 하나 뽑겠다고 50만 원 꼬라박고 아무것도 못 뽑았을 때보다 훨씬 억울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서 베개를 구해 오라고!”

오늘도 베개가 없어서 못 자면 피로도가 쌓일 테고, 내일 일은 공칠 테고, 또 어떤 트집을 잡아 손해 배상을 청구해서 내 소중한 6골드를 가져갈지 모른다. 그럼 돈이 없어 베개를 못 살 테고, 베개가 없어 돈을 못 벌 테고…….

이 악마의 순환 고리를 끊으려면 당장 뭐라도 해야 한다.

나는 자고 있던 에밀리를 깨워 안나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힐다…… 너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으, 으응. 기억이 잘 안 나서. 요새 기억이 오락가락해서 큰일이야.”

“너도 참……. 후아암.”

한참 자던 중에 깨어난 에밀리는 구태여 따지고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안나는 왜?”

“그…… 베개를 살 수 있을까 하고.”

베개 내구도가 떨어졌을 때 흰 글씨가 말한 적이 있었다. 베개를 고치기 위해서 안나를 찾아가겠느냐고. 베개를 고칠 줄 안다면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힐다. 안나는 베개 안 팔아. 솔기가 터지면 감쪽같이 꿰매 주지만.”

“뭐? 그럼 어디서 살 수 있어?”

“마을로 나가서 사야지, 물론.”

마을이라…….

“알려 줘서 고마워, 에밀리. 깨워서 미안해.”

“우리 사이에 별소릴 다 해.”

에밀리는 가슴 한쪽이 찡하게 아파질 만큼 배시시 웃었다. 에밀리는 힐다를 무척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행동, 태도, 눈빛만 봐도 느껴졌다. 그런데 그런 친구를 내가 뺏어 간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런 게 아닌데…….

“잘 자고 좋은 꿈 꿔, 힐다. 내일 보자.”

“응, 잘 자.”

에밀리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마음이 이상하게 불편했다. 내가 원해서 들어온 건 아니지만, 힐다에게 가지고 있던 호의를 내가 본의 아니게 이용하는 것 같아서.

“……괜한 생각하지 말고 베개부터 구하자.”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나는 어두운 저택을 나서 정문으로 향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정원은 넓고, 마을로 가려면 또 얼마나 걸어야 할지 몰랐으나, 망설이지 않고 직진했다. 어차피 베개 없어 못 자든, 베개 구하러 가다가 못 자든 결과는 같았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니 시도는 해 봐야지.

열심히 걷고 걸어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 저택 입구에 도착했다. 멀리서 보는 것보다 훨씬 위용이 느껴지는 거대한 철문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끝이 뾰족하게 잘 갈린 창살은 하늘을 찌를 것처럼 오만하게 솟아 있다.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넘어갈 수 있을까 기웃거리자 시스템이 대답했다. 그래, 이럴 줄 알았어. 방해할 줄 알았다고. 이 게임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도록 내버려 둘 리가 만무했다. 이 시스템은 내가 이대로 포기하고 또다시 오늘과 같은 내일을 보내기를 바라겠지만, 뜻대로 되게 해 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대로는 못 살아!

나는 올 때보다 훨씬 빨라진 걸음으로 숙소로 되돌아갔다.

이 저택의 하인으로 지내면서 가장 좋은 점은, 인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각자 잘 방이 한 개씩 주어진다는 거다. 운이 나쁘면 2인 1실에 들어가야 하지만, 숙소에 아직 방이 남아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하지만 프라이버시가 잘 지켜지는 만큼, 생겨선 안 되는 일도 발생하기 마련이니…….

어젯밤을 새다시피 보내던 중, 그동안 칼같이 잠드느라 듣지 못했던 망측한 소리를 창문 너머로 듣고 말았다.

“아, 아읏, 아아!”

노골적인 신음, 그리고 질펀하게 젖은 살끼리 철썩거리며 들러붙는 소리, 서로의 입술을 뜨겁게 빨아 대는 소리…….

세, 세상에. 이거 공포게임이라면서. 잔인해서 19금이라더니 이렇게 끼워 넣기야?

나는 빨개진 얼굴을 부채질하며, 우연히 열어 놓은 창문을 조용히 닫아 주었다.

그래, 뭐. 조선 시대도 아니고 연애 금지가 다 뭐람. 이 저택에서 맨날 똑같은 얼굴만 마주하다 보면 정분이 날 수도 있고, 새벽에 몰래 만나 사랑을 나눌 수도 있는 거지. 레티샤에게 들키지만 않아야 할 텐데.

그때는 그렇게만 생각하고 다시 잠을 청했는데, 지금은 그 기억이 내게 큰 단서를 주고 있었다. 다들 일찍 잠이 들 무렵, 방을 비우는 사람이 반드시 하나는 생긴다는 것.

먹잇감이 방심하기를 노리는 포식자처럼, 나는 창문을 열어 놓고 때를 기다렸다.

째깍, 째깍, 째깍…….

시간이 흘러 이윽고 바람 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지는, 야심한 시각이 되었을 때였다. 작은 인기척을 시작으로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아흣, 아…… 거길 그렇게 만져 버리면…….”

열렬한 정사가 시작되자 나는 살금살금 방문으로 걸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둡지만, 복도 끝 방의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분명 보였다.

저기다!

속으로 터질 듯한 환호를 삼키며, 살얼음 위를 걷듯 복도를 걸어갔다. 어차피 쟤들 한번 시작하면 좀처럼 끝나지 않으니 저들에게 들킬 일은 없었다. 다만 뜬금없이 다른 문이 열릴까, 그것만 조심하며 복도 끝으로 향했다.

정분난 사람을 만나러 가느라 너무 설렌 나머지 문을 닫는 것도 깜박한 모양이다. 나는 소리 나지 않도록 문을 슬쩍 밀고 들어간 다음, 목표물을 찾았다. 이윽고 침대에서 발견한 ‘그것’은 아드리안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황홀한 밤을 보낼 수 있을 만큼 탐스럽고 통통했다.

나는 누가 볼세라 얼른 집어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내 완벽 범죄를 입증이라도 하듯 창문 밖에서는 계속 신음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느끼는 만큼의 만족감으로, 내 품에 안은 걸 내려다보았다.

“이게 얼마 만의 베개야…….”

감격으로 입술이 다 떨렸다. 나는 베개를 얻은 기쁨에 겨워 얼굴도 파묻어 보고, 비벼 보고, 뽀뽀도 했다. 더 이상 베개 때문에 고통받고 시스템에 괴롭힘당하지 않아도 된다.

베개의 원래 주인에겐 미안하지만, 원래 게임을 하다가 잘 안 풀리면 NPC에게 대화를 걸거나 해서 힌트를 얻곤 하잖아? NPC의 존재 이유가 유저를 위해서이니만큼, 유저가 원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설령 NPC가 원하지 않더라도.

“자, 이제 본격적으로 자 볼까?”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을 누를 길이 없다. 맹세컨대 첫사랑을 봤을 때도 이만큼 심장이 뛰진 않았다.

나는 신을 모시듯 경건하고 신성하게 베개를 침대에 올려놓은 다음,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베개가 없다며 침대에서 밀쳐 내곤 했던 손길이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그대로 풀썩 침대 위에 누웠다.

“내가 침대에 눕다니……!”

감격에 젖어 눈물마저 글썽이고 있는데, 흰 글씨가 또 나타나 내 눈앞에서 너울너울 춤을 췄다.

「당신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칭호가 ‘양심 없는 하찮은 일꾼’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아무리 자고 싶었어도 남의 베개를 훔치냐고, 양심 없다고 내게 손가락질하고 싶은 모양이다.

“기가 막혀. 지금 누가 누구한테 양심 없대? 베개 없으면 침대에 누울 수 없다고, 갖은 핑계 대 가며 사람 괴롭힌 게 누군데?”

「당신의 양심이 티끌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래, 그래. 밤새 마음껏 욕해라. 난 침대에서 푹 자면 그만이야.”

그깟 양심 버리면 그만이지. 누가 와서 날 잡아갈 것도 아니잖아?

나는 베개 끝을 꼭 쥐고 휙 돌아누웠다. 흰색 글씨가 집요하게 눈앞에 따라왔지만, 코웃음 치며 눈을 꽉 감아 버렸다. 단지 베개를 벴을 뿐인데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충족감이 들었다. 나는 얼굴을 비비고 묻기도 하면서, 잠들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베개를 마음껏 만끽했다.

오늘 아침, 게임에 잡혀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개운하게 눈을 떴다. 햇살은 어찌 그리 화창하고 반짝거리며 새들은 맑게 지저귀는지.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내 초라한 재산 6골드나 양심 운운하는 시스템조차 내 행복을 방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힐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에밀리! 좋은 아침! 잘 잤어?”

게임에 들어온 내내 죽 쑤는 모습만 보여 줬던 에밀리에게도 처음으로 아침 인사를 건넸다. 에밀리가 코를 살짝 찡그리며 귀엽게 웃었다.

“응. 아침에 웃는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아지네.”

“정말 오랜만에 두 다리 뻗고 편하게 잤거든. 그래서 그런가 봐.”

내 상황은 거의 나아진 게 없는데도, 아니, 오히려 나빠지기만 했는데도 이렇게 상쾌할 수 있다니. 게임에서의 내 인생은 베개를 훔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고, 감히 생각했다.

에밀리는 다행이라며 싱긋 웃고는 함께 숙소를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는 능숙하게 머리를 땋아 내렸는데, 장식이라곤 하나 없는 회색 치마조차 새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수한 옷차림인데도 에밀리는 예쁘장하게 빛났다.

“그럼 힐다, 오늘도 열심히 해!”

“응, 너도…….”

몸조심해. 특히 아드리안을 조심해. 그 새끼 실은 악마야. 사람 죽일 생각밖에 없어. 나도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살아남았다니까?

“……점심때 봐.”

나는 목구멍에서 우글거리는 말을 억지로 삼키며 손을 흔들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야, 할 말 있는 것처럼 하고서 싱겁긴. 오전에 일 끝나면 도와주러 갈 테니까 무리하지 말고 일하고 있어!”

에밀리는 정말 착하다. 게임에서 이렇게 날 걱정해 주고 챙겨 주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그저 프로그램된 대로 말하고 움직이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녀의 인생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좋은 사람은 해피 엔딩으로 맞아야 세상이 공정하지 않을까?

저택으로 쪼르르 사라지는 그녀를 보다가 나는 정원으로 눈을 돌렸다. 어제는 악마의 텃밭으로 보이던 일터가 지금은 경험치가 담긴 선물 상자로 보였다. 잡초 하나당 겨우 경험치 1이지만, 1짜리도 쌓이고 쌓이면 무시 못 하는 법이다. 나는 이 경험치로 레벨을 올려 게임 세계 최후의 1인이 될 생각이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피로도가 낮아 일이 잘됩니다.」

「피로도가 낮아 일이 무척 잘됩니다.」

「잡초 뽑기 성공률이 대폭 올라갑니다.」

「일급이 증가합니다.」

「경험치 획득량이 대폭 증가합니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5를 얻었습니다.」

와, 잡초 하나에 경험치 5라고? 1을 줄까 말까 했던 어제를 생각해 보면 이건 파격적인 임금 상승이었다. 컨디션에 따라 이렇게 경험치와 일급이 좌지우지되다니, 앞으로 베개만은 목숨 걸고 사수할 이유가 생기고 말았다.

의외로 이 게임을 공략하는 데 필수적인 아이템은 베개가 아니었을까? 갑작스럽게 내구도가 떨어질 때를 대비해 몇 개 사 두는 것도 좋겠는걸.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5를 얻었습니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5를 얻었습니다.」

「크리티컬!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0을 얻었습니다.」

생각에 잠긴 채 손으론 기계적으로 잡초를 뽑고 있자니 흰 글자가 쫘르륵 떴다. 크리티컬이라니, 리듬 게임도 아니고 나 참.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은근 재미가 붙어 손을 열심히 움직였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5를 얻었습니다.」

「크리티컬!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0을 얻었습니다.」

「크리티컬!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0을 얻었습니다.」

뭐야, 이거 진짜 재밌잖아. 개미 오줌만큼 오르던 경험치 상태바가 눈에 띄게 휙휙 오르자 묘한 뿌듯함에 가슴이 뜨거워지기까지 했다. 내가 RPG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또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거지? 게다가 잡초 뽑기가 성공 혹은 대성공이 떴기 때문인지, 내 손이 닿은 부근이 눈에 띄게 깔끔해지고 있었다. 단순히 잡초 뽑기가 아니라, 거의 새로운 정원을 창출해 낸 수준이었다.

이건 절대 나 혼자 자아도취해서 호들갑 떠는 게 아니었다. 점심께에 나를 찾으러 온 에밀리의 감탄이 그 증거였다.

“와, 힐다……. 여기 정말 네가 다 정리한 거야? 세상에, 완벽해.”

“완벽하기는, 쑥스럽게.”

“어제는 완전 엉망으로 만들어 놓더니 오늘은 어쩜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해 놨어? 앤시어 님이 몰래 와서 도와주신 건 아니지? 아니지. 마님 정원에 새로 꽃을 심느라 바쁘실 텐데 그럴 리가. 정말이지 레티샤 님이 놀라 까무러치시겠어.”

“뭘, 그렇게까지…….”

“힐다, 난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에밀리가 순수하게 빛나는 눈에 눈물까지 달고 바라보았다. 잡초 뽑기 하나로 가장 자랑스럽고 대견한 친구가 되다니. 스스로도 어처구니없었지만, 괜히 입가가 올라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었나. 나는 보란 듯이 마지막 잡초를 뽑은―크리티컬이 떴다! 잡초를 완벽하게 뽑았다며 에밀리가 감탄의 눈물을 쏟았다―다음, 그녀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오전에 있었던 일을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돌아오는데, 접시 깨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와장창 들려왔다. 한 장도 아니고 수십 장은 동시에 깨뜨린 것 같은 큰 소리였다.

“빨리 가 보자.”

먼저 뛰어가는 에밀리를 따라 나도 걸음을 재촉했다. 살짝 열린 부엌 창문을 통해 레티샤의 날 선 목소리가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델로레스! 너 대체 오전 내내 뭣 하는 짓이야! 어휴, 접시 좀 봐. 이게 다…… 아휴.”

“죄, 죄송해요. 레티샤 님…….”

“오늘 네가 깨뜨린 접시만 몇 개인지 알고서나 그렇게 멍하니 정신 빼고 있는 거야! 서서 조는 거 몇 번이나 봤지만 모른 척해 줬는데 기어이 일을 이렇게 내!”

조는 걸 못 본 척해 주다니, 레티샤 꽤 좋은 상사였잖아. 만약 팀원이 졸고 있는 모습을 우리 부장이 봤다면, 점심시간 내내 ‘○○ 씨는 요새 일이 없나 봐요. 능력이 좋아서 일찍 끝냈나? 아니, 능력이 그렇게 좋은데 왜 이 회사에 있어, 그래? 창업을 하지. 내가 너무 귀한 분을 밑에 두고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응? 아냐 아냐, 밥은 맛있게 먹어야지, 어서 먹어. 편히 먹어.’라며 갈궈서 결국 체하게 만들었을 텐데.

“죄송해요, 레티샤 님. 그, 그게, 잠을 잘 못 자서…….”

“잠은 왜 못 자! 숙소 제공해 주고 시간 맞춰서 일 끝내 주는 게 다른 걸 위해서인 줄 알아!”

에밀리는 벌써 부엌에 들어가 깨진 접시를 정리하는 걸 돕고 있었다. 델로레스가 누군가 했는데, 날 뒤뜰로 불러내 귀찮게 하던 도트 쪼가리였군.

레티샤는 정말 화났는지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붉으락푸르락했고 델로레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손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베개가, 흐윽, 갑자기 없어져서…….”

델로레스가 베개의 주인이자 창밖 밀회의 여주인공이었군.

나는 쪼그려 앉아 에밀리가 접시 치우는 걸 도왔다. 단순히 깨진 조각을 치우는 일인데도 크리티컬이 몇 번 터지며 경험치가 쌓였다. 에밀리가 존경에 가까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거 참, 게임할 맛 나는데.

“뭐? 베개가 없으면 잠을 못 자지 않니! 베개를 어디 버려뒀길래 없다는 거야? 얼마나 간수를 못 했으면!”

“모르겠어요. 밤에 잠깐 방을 비웠다가 돌아왔는데 사라져서, 잠을 전혀 못 자 피로도가…….”

베개가 없어서 못 잔다는 설정뿐 아니라 피로도 시스템도 게임 내 캐릭터에게 적용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 게임 개발자에겐 틀림없이 베개 없이 자다 죽은 귀신이 붙어 있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베개 하나로 이렇게 여럿 불행할 이유가 어디 있겠냐고.

레티샤는 한숨을 푹 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말해 뭐 하냐는 표정으로 자리를 뜨려는 그녀를 델로레스가 붙잡았다.

“저, 레티샤 님. 제 베개는 누가 훔쳐 간 게 분명해요. 저를 골탕 먹이려고요! 범인을 밝혀내는 걸 도와주시면……!”

“시끄러워! 뭘 잘했다고 이 난리야! 네가 간수를 못 한 걸 누굴 탓하려고!”

“레티샤 님!”

“시끄럽다고 했어! 네가 깨 먹은 접시 정리나 돕지 못해!”

정말로 화내고 몸을 돌리는 레티샤를 아무리 델로레스라도 붙잡지는 못했다. 그녀는 억울한 듯, 분노가 치미는 듯 눈물을 몇 방울 흘리다 이내 씩씩대며 고개를 휙 돌렸다. 정확히는 이쪽을 바라봐서, 몰래 훔쳐보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친 나는 뜨끔했다.

“네가 그랬지!”

델로레스가 때려죽이기라도 할 듯 씩씩거렸다. 이번에는 조금 당황해 버렸다. 난 줄 어떻게 알았지?

“무슨 소리야, 델로레스! 증거도 없이 이렇게 다짜고짜 사람을 의심하는 법이 어디 있어? 우리 힐다는 그런 애 아니야!”

사실 나 맞아, 에밀리.

“딱 두고 봐, 너.”

으드득 소리 날 정도로 이를 간 델로레스가 주방을 뛰쳐나갔다. 접시 안 치우고 그렇게 가는 거니?

“델로레스 말은 신경 쓰지 마, 힐다. 그냥 지레 찔려서 저러는 거니까.”

“왜 찔려?”

“쟤, 틈만 나면 네 베개 가져다가 숨겨 놨었잖아.”

뭐? 그랬단 말이야?

“힐다…… 너 대체, 그렇게 화냈으면서 어떻게 잊어?”

“아냐. 옛날 일이 떠오르니까 분노가 치솟아서 잠재우고 있었어.”

“그랬어? 미안해. 신경 쓰지 마. 어쨌든 인과응보잖아.”

뭔갈 엎어 버릴까 봐 걱정됐는지 에밀리가 내 등을 두드리며 살살 달랬다.

나는 분노를 견디는 척 길게 숨을 고르면서 깨진 조각을 마저 주워 담았다.

하긴, 예전에 레티샤가 일하는 데 실수가 잦다고 말했을 때 의아하긴 했다. 이렇게 힘세고 쉽게 지치지 않는, 타고난 일꾼인 힐다가 왜 실수가 잦은가 했는데 이제야 원인이 밝혀진 거다. 오늘 델로레스가 보낸 하루를 힐다는 이미 몇 번이나 겪었다는 뜻이다.

서로 주고받은 거지, 뭐.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넘기기에는 델로레스의 눈빛이 걸린다. 그러잖아도 난도 헬인 이 게임에서 아군은커녕 적을 만들어 난도를 더 높일 필요는 없으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힐다, 점심 먹자.”

좋아. 일단 먹고 생각해 보자.

“힐다, 식사하는데 미안하다만 마님께 차를 좀 챙겨 드리겠니? 오늘 너무 바빠서 말이다.”

오늘은 하는 것마다 잘 풀리는 날이라 그런지 식사조차도 크리티컬이 터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이 뚝 떨어졌다. ‘왜 내가?’라는 생각으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데 에밀리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쟁반에 찻잔과 찻잎이 능숙하게 올려지는 소리가 다각다각 울렸다.

“역시 힐다는 대단해. 나라면 무서워서 안 가겠다고 할 텐데.”

그녀가 분주하게 챙기는 사이 나는 부엌 안을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이제 게임에 적응을 어느 정도 했다 보니, 배가 부르자 은근슬쩍 커피가 생각났다. 카페 아르바이트하던 대학생 시절에는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었지.

앗, 그러고 보니.

나는 새삼 고개를 돌려 넓은 부엌을 살폈다. 백작과 백작 부인, 아드리안이 식사를 마친 직후라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말은 즉, 내가 뭘 가져가든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잘나가는 백작가이다 보니 없는 게 없었다. 커피 원액에 우유, 백설탕까지. 어디 보자. 이것저것 섞으면 비슷하게 만들 수 있겠는데.

나는 기다란 컵을 가져와 설탕과 우유를 넣고 숟가락으로 표면을 두드려서 거품을 만들었다. 프렌치 프레스를 썼으면 금방 거품이 났겠지만, 아쉬운 대로 노동으로 때우니 그럭저럭 거품이 올라왔다.

“힐다, 뭐 해? 이 거품은 뭐고?”

“응, 커피에 올릴 거야. 기다란 유리컵 있으면 가져올래? 맛보게 해 줄게.”

“으, 응.”

에밀리가 엉거주춤 쟁반을 내려놓고 유리컵을 가져왔다. 각 얼음이 딸랑거리며 떨어지고 그 위로 커피가 흘러들어 가자 향긋한 커피향이 코를 감쌌다. 그리고 거품 우유를 나머지 반 채워 넣자, 커피 원액과 섞이며 마블링이 예술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건 본 적 없을 에밀리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힐다!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예전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일단 마셔 봐.”

무심코 대답하던 나는 재빨리 얼버무리며 잔을 넘겨주었다. 얼결에 넘겨받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녀가 한 입 조심스레 맛보곤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맛있어!”

“정말? 다행이다. 그거 너 다 마셔. 나중에 내가 마실 것도 만들어야겠네.”

재료가 어설픈 콜드브루라떼였지만, 이곳 커피 원액이 나쁘지 않아 나온 맛이었다. 내가 즐거워하며 만드는 동안 에밀리는 연신 감탄하며 남은 걸 들이켜고 있었다. 내가 만든 커피를 누군가 맛있게 마시는 건 언제든 기분 좋은 일이었다.

“참, 힐다. 마님께 가져다드릴 차야. 찻잎은 넣어 놨으니 올라가서 차망만 빼내 식히고 따라 드리면 돼. 마님께서 다 마시기까지 기다렸다가 쟁반 들고 돌아와야 하는 거 알지?”

사실 몰랐지만, 친절히 읊어 주는 에밀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우유 거품이 그녀의 입술 위에 수염처럼 묻어 있었다. 그러나 에밀리는 그것도 모른 채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다녀올게, 에밀리.”

“응, 펄펄 끓는 물이니까 손 조심하고! 2층 복도 끝 방, 알지? 문 두드린 뒤 차 가져왔다고 말씀드리고, 대답 없어도 들어가면 돼.”

“커피 또 만들어 줄 테니까 그렇게 안 아껴 마셔도 돼. 다녀올게.”

나는 생글 미소 짓는 에밀리에게 마주 웃어 준 다음, 쟁반을 들고 백작 부인의 방을 찾아갔다. 2층 복도 끝 방, 2층 복도 끝 방……. 에밀리가 알려 준 대로 찾아가다가 문득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나라면 무서워서 안 가겠다고 할 텐데.”라고 했었지. 그렇게 말하면서 에밀리는 분명 몸서리치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백작 부인은 악마가 아닌 평범한 인간인데 왜? 뭐가 무섭다는 걸까?

“차 가져왔습니다, 마님.”

문을 똑똑 두드렸지만, 안에선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에밀리가 말한 대로 잠깐 기다렸다 문을 열고 한 발짝 들어서는 순간, 나는 아드리안을 봤을 때보다 더 놀라고 말았다.

“헉…….”

무슨 방이……. 온통 핏빛에다 심한 악취가 났다. 벽지에 손으로 직접 치덕치덕 바른 듯한 빨간 액체에서 나는 냄새 같았다. 오래되어 썩었지만, 비릿한 피 냄새. 그러다 시선을 돌려, 피에 흠뻑 젖은 염소의 몸통이 벽에 걸린 걸 발견하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맙소사, 벽에 발라 둔 게 전부 염소 피였단 말이야? 근데 목은 어디로 가고 몸통만 걸려 있지?

하인 중 누군가가 감히 백작 부인의 방에 이런 짓을 해 놨을 리는 없으니 범인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잘 돌아가지 않는 목을 끼릭끼릭 움직여 보자, 넓은 창문 앞 흔들의자에 앉은 백작 부인이 보였다. 그녀는 뭔가를 담요에 말아 품에 안은 채, 낮은 목소리로 자장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맙소사……. 거지 같은 시스템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이 게임 장르가 공포였지. 하지만 무서운 건 아드리안 때문이지, 백작 부인 때문은 아니었는데!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끼이익, 끼이익.

앞뒤로 흔들거릴 때마다 나는 소리와 낮게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어우러져서 더욱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심장이 단숨에 쪼그라들었다.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 찻잔과 받침대가 쉼 없이 달그락거렸다.

괘, 괜찮아. 진정하자. 그냥 조금 미친 것뿐이잖아. 차만 빨리 드리고 도망치자…….

나는 침착하게 쟁반을 내려놓고, 에밀리가 미리 우려 놓은 찻주전자의 찻물을 잔에 따랐다. 쪼르륵 흘러내리며 얼그레이의 진한 차향이 풍부하게 올라왔지만, 비릿한 공기에 섞이자 코를 더 강하게 찔렀다. 눈까지 매워져서 눈물이 찔끔 났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백작 부인은 내가 덜덜 떨며 찻물을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포 영화에서 보면 저렇게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빰! 하는 큰 효과음을 울리면서 달려들던데.

……상상하니 더 무서워졌다. 할 일 빨리하고 가자.

“드, 드세요, 마님.”

“…….”

“차는 여기 탁자에 둘게요. 전 다 드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테니 천…… 천히 드세요. 흐…… 읍.”

손이 떨리는 걸 최대한 억누르며 찻잔을 탁자 위에 놓다가, 백작 부인이 안고 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언제 잘린 건지 모를, 부패한 염소 목 주변으로 파리가 왱왱대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도대체 그런 걸 왜 안고 계세요…….

“자장, 자장…… 우리, 아가…….”

마시라고 내려놓은 찻잔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동공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눈으로 나만 응시했다. 10초가 10년처럼 느리게 지나갔다. 아니, 지나가긴 하는 걸까. 이래서야 어떻게 백작 부인이 차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려?

차라리 날 죽여 줘.

“자장, 자장…….”

“저, 마님. 혹시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실까요?”

터져 나오는 비명을 간신히 억누르며 물었다. 시킬 일이 없으면 쳐다보지 말란 뜻이었는데 씨알도 안 먹힌다. 어, 없으시구나.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물러나도 시선은 끈질기게 따라왔다. 끔찍하다. 분위기로만 치면 아드리안이 백작 부인보다 훨씬 나았다.

두려움이 한계를 넘자 원망스러운 사람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레티샤는 왜 하필 나를 대타로 보낸 거지? 힐다가 타고난 일꾼이지만 겁 없는 거랑은 다른데! 에밀리도 그래. 자기는 무섭다면서 난 왜 보낸 거야? 거기다 차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라고 하다니. 내가 커피까지 타 줬는데, 이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가…….

“…….”

그런데 잠깐. 백작 부인이 보고 있는 게 나 맞나? ……혹시?

나는 생각을 잠깐 멈추고 쟁반 위에 놓인 커피와 백작 부인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니라 가슴팍 즈음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긴 하다. 혹시 커피를 보는 건가? 나중에 마시려고 만들어 둔 건데.

“저, 혹시 마님, 커피 좋아하세요? 이거 제가 직접 탄 건데, 한 잔 드셔 보시겠어요?”

“…….”

“어, 찻물 버리고 조금 따라 드릴게요. 입맛에 맞으실는지 모르겠지만요.”

찻물을 버린 뒤 커피와 우유 거품을 함께 따라 주자, 백작 부인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잔을 받아 들었다. 금세 호로록 마시는 걸 보니 차 대신 커피를 원했던 모양이다. 그런 거면 말을 하지, 무섭게 쳐다보기나 하고. 달려드는 줄 알았잖아…….

「프리실라에게 ‘희귀하게 제조된 커피’를 선물했습니다.」

「프리실라가 크게 기뻐합니다.」

「프리실라의 호감도가 300 올랐습니다.」

「현재 프리실라 호감도 lv.4 (0/200)」

언젠가 아드리안과 첫 대화를 나누고 레벨이 5로 올랐을 때처럼, 프리실라 머리 위의 게이지가 확확 차더니 호감도가 올라 버렸다. 이 방의 비주얼에 짓눌려 미처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머리 위에도 호감도가 둥둥 떠 있다 사라지긴 했다.

백작 부인 이름이 프리실라였구나. 그런데 백작 부인에게 호감도를 얻어 봐야 무슨 이득이 있지? 이미 정신도 온전하지 않은 사람인데.

“……힐다라고 했니?”

“네, 네에.”

처음으로 듣는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생크림처럼 부드럽고 달달해서 조금 놀라 버렸다. 빈 찻잔을 내려놓고 바라보는 눈길 또한 더없이 자상했다. 품에 안은 염소 머리 때문에 체할 것 같은 기분은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그녀가 지닌 따스한 눈빛을 보자 조금은 안쓰러워졌다.

원래의 백작 부인은 저렇지 않았을 텐데. 여리고 상냥한 사람이라 더 무너지기 쉬웠을 거다.

“마을에 가 보렴.”

“네?”

“마을은 구경할 게 많단다. 찻잎 가게 앤드류 씨가 오렌지향 나는 루이보스 찻잎을 멀리서 귀하게 구해 왔다고 했는데, 아직 가 보지 못했어. 지금은 잘 계신지 모르겠구나.”

「맵 개방! 아이다 마을로 갈 수 있습니다.」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 흰 글씨가 떠올라 멈칫했다. 어제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며 막혔는데, 그걸 백작 부인이 풀어 줄 줄은 몰랐다. 심장이 멎을 뻔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레티샤가 대신 보내지 않았으면 지도가 풀리지 않아 계속 저택 안에 묶여 있을 뻔했다.

경험치를 얻어 스킬을 해방하는 것 말고도 게임 내 주요 캐릭터들과 교감하여 호감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한 줄은 미처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주워서 아드리안에게 줘 볼 걸 그랬다. 주요 캐릭터니까 호감도를 올리면 더 좋은 혜택이 주어지지 않을까?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정신이 돌아왔던 건 아주 잠깐이었던지, 백작 부인은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꿈속에서 헤매듯 몽롱한 목소리와 이 붉은 방이 어우러지자 더욱 오싹하고 으스스했는데, 조금 전 백작 부인의 표정을 떠올리자 두려움보단 불쌍하단 느낌이 앞섰다.

이상하기도 하지.

아마도 그녀의 사연과 아드리안이 악마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일 거다.

아드리안의 실체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백작 부인이 미쳤다고 손가락질해 대니까.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 진실을 혼자 외치다 끝내 부서져 버린 사람. 빈방에 갇혀 허공에 소리치다가, 저 스스로 빈방이 되어 버린 사람…….

“또 올게요, 마님.”

“자장, 자장…….”

“그때는 마을에서 재료 몇 개 더 사 와서, 더 맛있는 커피 가져올게요.”

정리한 쟁반을 들고 문을 나서기 전, 고개 숙여 꾸벅 인사했다. 백작 부인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지만, 축 처진 어깨가 무척 외로워 보였다.

내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이전보다 낮게 깔린, 음산한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로운 노래를 불렀다.

“편히, 죽으렴, 자장, 자장…… 우리, 아드리안…….”

문을 닫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나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다시 문을 당겼으나, 노랫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백작 부인의 목이 나뭇가지처럼 꺾인 걸 보니 그새 잠이 든 모양이다.

잘못…… 들은 건가? 아드리안 이름을 들은 것 같았는데.

이유 모를 으스스한 공포감에 나는 겁에 질린 채 복도를 둘러봤다.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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