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33)

1-2. 한국인은 게임에서도 노가다를 뛴다.

아침이 밝았다.

예전엔 눈 뜨자마자 하던 생각이 ‘출근해야 돼’, ‘출근도 안 했는데 퇴근하고 싶다’, ‘지옥철’, ‘월급은 언제?’였는데, 이제는 ‘아드리안한테 약 갖다줄 시간’, ‘지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남자’였다.

게임이 배경으로 하는 시대에 귀족이 대강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해 보면 약 갖다주는 거야 당연했지만, 그때마다 목숨이 위협받는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아드리안은 무서웠다. 딱히 무섭게 굴지 않는데도 설정만으로 무서웠다. 그가 날 직접 죽이지 않아도 매일 아침 느끼는 생명의 위협이 결국 내 수명을 단축시키고 말 것이다.

이렇게 여러모로 내 게임 속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아드리안인데도, 정작 나는 약 갖다주는 일로 다른 하인들의 시기 질투를 사고 있었다.

아드리안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더라, 정부라도 되기 위해 앞섶을 풀어 헤치고 들어간다더라 등.

어릴 때부터 병약한 몸으로―사실 악마의 힘을 되찾지 못해 비실대는 거지만―가문의 일은 물론이고 사교계엔 발 한번 들이지 않은 아드리안이라도, 그는 엄연히 이 집안의 유일한 후계자였으니까. 그의 눈에 들어 한자리해 보겠다, 이왕 하인으로 시작한 인생, 용의 꼬리라도 되지 못하면 뱀의 머리가 되겠다, 그런 생각을 충분히 품을 만했다.

하지만 정말이지 상대를 한참 잘못 짚었다. 내가 원하는 건 출세도 뭣도 아닌 오로지 생존인데! 정말 억울하고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네가 요새 도련님 약 가져다드리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지?”

“네가 능력 있어 도련님 시중을 드는 게 아니라는 걸 알라고, 응?”

“자격도 없는 게 으스대는 꼴이라니.”

하이틴 드라마에서 보던 왕따 장면 비슷하게, 나는 부엌으로 출근하자마자 뒤뜰로 끌려와서 이런 폭언 아닌 폭언을 듣고 있었다.

나를 둘러싼 이들은 열 명 남짓 되었는데, 주동자들은 따로 있었다. 나는 눈을 까는 척 슬쩍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주동자는 셋. 세레나, 루이스, 델로레스라는 이름을 가진 도트 쪼가리였다.

“자격도 없는 천한 게!”

“어디 너 같은 게 도련님을 꼬셔?”

“주제를 알아야지!”

“백작가에 누를 끼칠 것 같으면 스스로 그만두고 나갔어야지! 염치도 없이, 진드기같이 들러붙어선!”

그들은 도련님의 약 시중은 물론이고 이 저택을 나가겠다고 내가 직접 말하기를 바랐다. 자리가 나면 그제야 똘똘 뭉쳐 있던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겠지. 글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니까! 답답해서 몸이 배배 꼬였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 안달 난 건 나인데!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아직도 입 꾹 다물고 있어?”

“비켜 봐.”

드디어 주동자 중 하나가 움직였다. 델로레스……. 조금 빛이 바랜 듯한 황금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여자였다. 얘도 분명 아드리안의 희생양 중 하나였지.

그뿐이 아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언젠가 아드리안에게 죽임당할 희생양이었다.

갑자기 서글퍼졌다. 다들 창창한데, 불쌍하게도…….

“너를 두고 사람들이 뭐라고 뒤에서 수군거리는지 알지?”

“아니. 뒤에서 수군거리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갑자기 내가 대답할지 몰랐던지 델로레스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렇게 도련님 약 시중을 들고 싶으면 한번 말씀드려 봐. 어제 내가 접시랑 그릇 다 깨부수고 약도 바닥에 떨어뜨렸거든. 그렇게 사고 쳐 놨으니 어쩌면 네가 하게 해 주실지도 몰라. 자격은 충분해. 너도 되게 능력 없잖아. 설거지로 레티샤 님께 몇 번이나 혼나는 걸 봤는걸.”

“뭐, 뭐라고?”

진심으로 빌어 준 것이었지만,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델로레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주변에서 숨죽여 킥킥대자 그녀가 소리를 빽 질렀다.

“무슨 소리야! 네가 감히 날 놀려?”

“놀리는 거 아냐. 나 어렸을 때 신전에서 자란 거 알지? 그때 하도 기도를 열심히 했더니 신기(神氣)가 생겼거든? 그래서 가끔 사람 미래가 막 보이고 그럴 때가 있어.”

힐다의 캐릭터 설정을 떠올리며 내가 말했다. 분명 부모에게 버려져 길바닥에 있다가 사제가 발견했었지. 그래서 팔츠그라프 가문의 하인으로 오기 전, 그녀는 얼마간 신전에서 생활한 전적이 있었다. 다들 아는 설정인지 신기라는 말에 모두 움찔했다.

“신께서 말씀하셨어. 473년, 그러니까 올해 이 저택에 악귀가 돈다고.”

“악귀라니?”

“그래. 너는 이해 못 하겠지만,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냐. 모르겠지만, 공공의 적이 있다고. 죽고 싶지 않으면 절대 혼자 다니지 마. 그래, 특히 너.”

바로 앞에 있는 델로레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또 누가 있더라?

“그리고 너, 너…… 너까지. 아니, 너도 조심해.”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야? 누굴 바보 취급하는 거야?”

“내 말 꼭 명심해. 굳이 악귀가 아니더라도, 저기 위의 화분이 네 머리 위로 떨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

3층 난간에 아슬아슬 걸쳐 있는 화분을 가리키며 말하자, 벽에 기대 있던 세레나가 얼른 떨어졌다. 무시하고 깔보던 시선들이 어느새 무당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믿기 싫은데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그럼 난 곧 도련님께 약 가져다드려야 해서, 이만…….”

“…….”

“늦으면 레티샤 님한테 혼나거든.”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 휭 가 버리자 그들도 꽤 황당했던 모양이다. “뭐야, 쟤. 돈 거 아냐?”, “도련님 약 갖다드리는 핑계로 비겁하잖아.”, “근데 힐다가 원래 저렇게 기 안 죽는 애였던가?” 하는 말들이 따라붙었다.

연쇄 살인마 꿈나무에게 하루에 몇 번씩이나 불려 가는 마당에, 왕따 같은 거 당해 봐야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그보다 더 우울한 일이 기다리고 있기도 했고…….

나는 한껏 어두운 얼굴로, 아드리안의 약과 식사를 쟁반에 담았다. 그새 익숙해진 건지 챙기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오늘도 아드리안 방으로 들어가야겠지? 문 앞에 쟁반을 두고 가면 또 불쑥 나와서 놀라게 하겠지? 어쩌면 명령을 어겨 괘씸하다고 손해 배상 청구를 해 댈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나 게임 안에서나 월급은 통장을 스치고, 잔액은 바닥이고, 상사가 까라면 까야 했다. 눈물겨운 악순환 고리다.

“힐다! 도련님께 약 가져다드리는구나. 잘됐어, 간 김에 나와 함께 도련님 방을 청소하자.”

“예? 처, 청소요? 깨끗하던데.”

“말도 마라. 지금은 아주 엉망진창이란다.”

레티샤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혀를 쯔쯔 찼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둘이서 하기엔 힘이 부칠 테니, 카타리나, 너도 따라나서렴.”

“네, 알겠어요.”

부엌 구석에서 양파를 열심히 까던 카타리나가 잽싸게 일어나 따라붙었다.

“뭘 그리 실실 쪼개고 있는 거야? 빨리 안 따라와?”

“네네!”

밑바닥에서 멱살 잡혀 훅 끌어 올려진 기분이었다. 동행자라니!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죽일 수 없는 게 규칙이니까, 오늘은 아드리안이 날 언제 죽일지 두려워하며 머물지 않아도 된다.

“아침부터 기분 좋은 일 있었니? 왜 그리 싱글벙글이야.”

“아뇨, 아녜요. 레티샤 님과 함께 걸어가니 좋아서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하자 레티샤가 별소릴 다 듣는다는 듯 바라봤다. 하지만 진심인걸. 살려 줘서 고마워요.

“좋은 아침이에요, 앨번.”

“좋은 아침입니다, 레티샤. 도련님 방에 가시는 모양이죠?”

복도에서 마주친 집사, 앨번과 레티샤가 인사를 나누었다. 레티샤가 주변을 슬쩍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님께서는요?”

“의원이 와서 안정제를 놓고 갔습니다. 극도로 흥분하셨던 모양이에요.”

“오늘은 또 뭐 때문에요?”

“꿈을 꾸신 모양입니다. 그날의…….”

“에구머니나.”

“올라가시거든 모르는 척하십시오. 아주 난리가 나서.”

레티샤가 질겁하자 앨번이 주름진 한쪽 눈을 찡긋하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전형적으로 인자하고 유능한, 하지만 엄격한 집사 할아버지 이미지였다. 그는 곧이어 나와 카타리나를 향해 말했다.

“너희들이 오늘 고생깨나 하겠구나. 특히 힐다, 도련님 약을 부지런히 잘 챙겨 드리고 있다고 들었다. 네가 옆에서 잘 좀 챙겨다오. 상심이 크실 거다.”

“……네……에.”

“그래. 네가 힘이 돼 드려야지. 말썽만 부리던 아이가 이렇게 점잖게 큰 걸 보니 뿌듯하구나. 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레티샤 님, 얼른 올라가 보시죠. 도련님께서 약 드셔야 할 시간이니.”

“예, 그럼.”

앨번이 정중하게 길을 비켜 주자 레티샤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앞서 나갔다. 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레티샤와 카타리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날의 꿈? 뭐야, 뭐, 뭔데? 백작 부인과 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건데? 원래 이럴 때 뒷말하고 그런 거잖아?

홀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카타리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거군요.”

“그거인가 보구나.”

“…….”

“그렇지?”

내게도 동의를 구하듯 두 사람이 시선을 모았다.

……그게 뭔데?

“그거인…… 가 보죠?”

“눈치 없는 힐다도 그렇다는 걸 보면, 그게 맞는 모양이야.”

내 눈에 선명한 물음표가 찍혀 있을 텐데도 둘은 “역시 그렇지?”, “그러네요.”라며 자기들끼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럽다. 세상이 날 따돌리고 있다.

“우리 힐다가 도련님을 잘 챙겨 드려야 할 텐데.”

아니, 이 저택에는 하인이 나뿐인가? 왜 죄다 나보고만 챙기래? 아드리안 옆에 있고 싶은 하인들을 오늘 아침에도 수십 명은 봤는데.

골치 아픈 업무는 죄다 내게 떠넘기던 신입 때의 사수가 생각나 순간 울컥했다.

“그래도 참 장하기도 하지. 옛날에 대체 어땠니. 할 줄 아는 거라곤 하나 없어서…….”

“…….”

“바느질하랬더니 천을 망치기 일쑤고, 찬장 정리하랬더니 모조리 부숴 버리고.”

“옛날엔 그랬죠. 그래도 이젠 잘하잖아요? 레티샤 님도 사실 많이 아끼시면서.”

“아끼긴, 얘는.”

아무리 들어 봐도 힐다 캐릭터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던 모양이다. 말도 안 되는 사고도 많이 일으키고, 손해 배상하느라 거지가 됐고.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살짝 기죽은,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레티샤 님, 그럼 저 말고 다른 하인을 데려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도련님 앞에서 또 실수라도 저질렀다간 면목이 없어서.”

“아니, 안 된다.”

신나게 깔 땐 언제고 딱 잘라 거절한다.

“솔직히 말하면 다른 애들은 일할 생각은 않고 도련님께 잘 보이기만 하려고 하거든. 하지만 너는 그렇진 않으니까. 윗사람이라고 무서워하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아뇨, 엄청 무서워하는데요. 지금 이 저택에서 아드리안을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저일 텐데요.

“제가 손이 부족해서…….”

그래서 아드리안 방문 앞에 도착했을 때도 슬금슬금 뒤로 빠졌다. 여러 명이 있을 땐 안 죽는 걸 알아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그러잖아도 무서운데, 방문 앞에 서자마자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한 비상벨과 점점 커지는 심장 소리가 날 더 쪼그라들게 했다.

“도련님, 레티샤예요.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레티샤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카타리나에 이어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간 나는 아드리안의 상태를 살펴볼 겨를 없이 놀라 버렸다.

적막하게까지 느껴지던 방이 난장판이었다. 찢긴 커튼, 박살 난 화병과 컵, 흠뻑 젖은 카펫과 굴러다니는 잉크……. 무엇 하나 멀쩡히 제자리에 있는 게 없었다. 폭풍이 휩쓸고 갔대도 믿을 몰골이었다. 카타리나는 터져 나오는 경악을 막기 위해 입까지 틀어막고 있었다.

“에구머니……. 도련님, 괜찮으세요?”

“좋은 아침이야. 응. 다친 데는 없어.”

“다행이어요, 많이 놀라셨을 텐데.”

“괜찮아. 보는 눈이 많으니 얼른 치워 줘.”

상냥한 듯 오만한 지시였다. 다분히 귀족적이라고 할까. 사람을 부리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예. 저희가 빨리, 아주 감쪽같이 치워 드릴게요.”

“고마워.”

형식상의 인사와 함께 아드리안이 눈부시게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보는 시야가 새빨갛게 물들 만큼 비상벨이 위용위용 마구 울리고 심장 소리도 쿵쾅쿵쾅 커졌다. 아, 정신 사나워.

“약은 여기, 아니, 여기, 아니, 여기…… 둘게요, 도련님.”

비상벨이 시끄럽게 울리는 가운데 나는 쟁반을 둘 만한 자리를 찾아다녔다. 보통은 테이블 위에 두는데 누가 엎어 놨고, 침대 협탁에 두자니 누가 난장판을 만들어 놨고. 결국, 유일하게 남은 곳은 침대뿐이라 아드리안 발치에 두었다. 누구야, 대체? 누군지 당장 다시 불러와서 제 손으로 치우게 해야 한다, 이건.

“어머니께서 하신 거야, 이거.”

“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감지 스킬 때문이 아니라, 진짜 내 심장 소리였다. 놀란 내 얼굴을 보자 아드리안의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비상벨은 빨리 아드리안에게서 멀어지라며 삐용삐용 난리였다.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많이 놀랐어?”

“아…… 뇨. 그다지.”

“오늘은 문 앞에 쟁반 두고 가 버리지 않았네.”

“네, 네……. 그럼요.”

“다행이야. 난 나를 계속 피하는 줄 알았거든.”

아프다. 계속 정곡만 찔려서 아프다…….

아드리안은 싱그럽게 웃으며, 우리가 올 때부터 보고 있던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지 레티샤가 슬쩍 와서 “쟁반을 문 앞에 두고 가다니, 이 건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라고 으름장을 놓고 갔다.

내가 울상을 지으며 서 있는데 옆에서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작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귀를 의심하며 돌아봤지만, 아드리안은 집중해서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저 새끼, 일부러 엿 먹이려고 한 게 아닐까?

“어휴, 이 커튼 꼴이…… 아휴. 세상에, 의자도 찍혀서 흠집이 나 버렸네. 이게 참, 물 건너 귀하게 공수해 온 거였는데…….”

“이 정도면 마님께서 다치지 않으셨을까요?”

“주치의가 들렀다니 다치셨으면 치료했을 거야. 우린 이 방이나 빨리 치우자. 애들 입단속도 해야 하고.”

작게 속닥거려도 다 들릴 것 같은데, 아드리안은 안 들리는 척 혼자 여유로웠다. 방을 이 꼴로 만든 사람이 앞에 있을 때도 똑같이 저러고 있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저렇게 조용히 책만 읽고 있으니까 엄청 평범해 보이는구나. 악마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미형의 귀한 도련님이다. 길게 뻗은 속눈썹 한 올 한 올마저 우아하다고 할까. 머리 위에 호감도가 떠 있다 사라지는 걸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혹시 애먼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호감도는 원래 이 게임에 없는 장치인데 지금 내 눈앞엔 있다. 내가 알던 게임과 완벽하게 같지 않다면 설마 아드리안의 설정도 다를 수 있는 거 아닐까? 악마가 아니라거나, 살인으로 악마의 힘을 얻는 게 아니라거나.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생각에 깊이 잠겨 있다가…….

삐용삐용!

쉼 없이 울려 대는 소리 때문에 짜증이 확 치솟았다. 안 되겠다, 이거. 음소거라도 하고 와야지.

“카펫을 아래에 내려놓고 올게요. 끙차.”

음료를 쏟은 듯 얼룩진 카펫을 돌돌 말아 들자 레티샤가 다녀오라고 손짓했다. 카펫을 들고 부엌에 간 김에 나는 스킬창에서 설정 버튼을 찾아 볼륨을 적당히 낮추었다. 좋아. 이러면 시끄럽지 않겠지.

“힐다, 카펫은 거기 둬. 나중에 같이 빨자.”

언제 따라왔는지 카타리나가 말했다. 쨍강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유리 파편부터 담아 내려온 모양이다. 앗, 지금이 물어볼 기회다.

카펫을 바닥에 내린 뒤 질질 끌어 벽에 세워 두고 나는 얼른 카타리나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유리 파편은 따로 걸러 버리고, 같이 가져온 접시와 찻잔은 이 나간 데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다.

“저, 언니. 아드리안 도련님 방 말인데,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다니? 아까 다 얘기했잖아.”

“말 안 했어. 그거라고밖에…….”

“그러니까 그거. 14년 전에 있었던 일.”

“그러니까 그 일이 뭐냐고. 왜 마님께선 도련님 방을 저렇게 만든 거야?”

게임 설정에 이런 스토리는 없었는데! 아니면 백작 부인이 나올 때까지 플레이를 안 해서 모르는 걸까? 다음 날 출근 생각하지 말고 게임 엔딩을 보고 잘걸.

“뭐야, 힐다 너, 설마 기억 안 나는 거야? 저택이 완전히 뒤집혀서 한동안 난리였는데, 그걸 기억 못 한다고?”

“으응. 사실 그래. 아까 레티샤 님이랑 그랬잖아. 나 머리 나쁘다고. 그새 까먹었나 봐.”

“와, 도저히 믿기질…….”

“무슨 일인데.”

반쯤 어이없어하는 카타리나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답답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던 카타리나가 포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이내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 도련님이 귀한 손이시잖아. 마님께서 몸이 워낙 약하시기도 했고 유산까지 한 번 겪으셨고. 어렵게 다시 임신하셨을 때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레티샤 님은 그때 마님의 기뻐하시는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말씀하곤 해. 백작님께서 워낙 바쁘시다 보니 도련님 돌보는 일은 거의 다 마님 몫이었지만, 그래도 마님은 행복해 보이셨어. 도련님께 세례를 내리려고 하시기 전까지는.”

“세…… 례?”

놀란 나머지 딸꾹질이 났다.

“응. 도련님의 여섯 살 생일 때 마님께서 깜짝 선물이라고 직접 세례를 내릴 사제님을 초대하셨거든.”

“그래서? 세례는 받았어?”

“그게, 도련님께서 거부하셔서 사제님께서도 그냥 돌아가기로 했는데…… 그래도 생일 축하한다며 성수를 남겨 두고 가셨거든. 마님께서 그걸 받아 들고 도련님께 뿌렸는데, 그때부터 난장판이 됐어. 마님께서 말씀하시기로는 성수에 닿자 도련님의 살갗이 타들어 갔다고, 악마가 든 게 분명하다고 하셨는데 본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허, 허어…… 악마라니.”

“그렇지? 이 세상에 악마가 어디 있다고. 그리고 봐, 도련님께서 진짜 악마면 이 저택 사람들이 어떻게 이제까지 멀쩡했겠어? 무슨 일이 생겨도 생겼겠지. 처음엔 마님께서 하도 악마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셔서 덜컥 겁이 났지만, 지금은 다들 마님께서 정신을 놨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때 일하던 사람이 몇 남아 있지 않기도 하고.”

“나머지는? 그만두기라도 한 거야?”

“그만두기도 하고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고. 왜, 알잖아. 일이 힘들면 그냥 도망가 버리는 일꾼들이 많은 거. 그런 사람들은 우리도 굳이 찾을 이유가 없으니까.”

“…….”

“그 이후로 마님께서는 불안증 때문에 대부분 방에서 지내셔. 혼자 계속 중얼거리시는데 가끔 들어 보면 오싹하다니까. 너도 마님 시중들 일 있으면 못 듣는 척하고 나와. 어쩌다 도련님 이야기라도 나오면 또 흥분하시니까.”

“그럼 오늘 도련님 방은…….”

“하필 사람이 없을 때 마님께서 도련님 방에 찾아가신 거지. 거기서 또 악마라며 난동 피우셨을 테고. 이런 일이 있을 땐 다들 쉬쉬해. 안주인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이야기가 새어 나가 봐야 좋을 거 없으니까.”

“잠깐, 그 일을 아는 사람이 이제는 몇 없다고? 언니와 레티샤 님, 나, 에밀리…… 또 누구 있어?”

“음, 백작님과 부인, 앨번 집사님, 델로레스…… 그 정도?”

잠깐 나는 아드리안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았다. 악마인 아드리안은 상식적으로 세례나 성수와 상극일 것이다. 만약 그것들이 정체를 밝히는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면 아드리안은 뭘 할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부터 죽이지 않을까.

“잠깐, 언니. 방에서 언니 혼자 나온 거야?”

“무슨 말이야?”

“지금 그 방에 누가 남아 있어?”

내가 급하게 다그치자 카타리나의 눈이 커졌다.

“어, 도련님이랑 레티샤 님이 계시겠지? 따로 도련님 방에 찾아갈 사람도 없을 테고.”

“세상에!”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마님께서 오셨을까 봐 그래?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느긋하게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카타리나의 손을 뿌리치고 부엌을 달려 나갔다. 아까 나올 때 카타리나가 함께 있어 안심한 건데, 이야기를 캐내는 데 바빠서 아드리안과 누가 남아 있는지는 까먹고 말았다.

‘죽이면 안 돼. 오, 맙소사. 신이시여.’

계단을 두세 개씩 밟으며 뛰어오르자 숨이 금방 차올랐다. 4층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쭉 뛰어 올라갔다. 주방에 내려가 있는 동안 잠잠했던 비상벨이 다시 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쾅!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레티샤는 등을 돌려 앉은 채 찢어진 커튼을 개고 있었고 아드리안은 그녀 뒤에서…….

“레티샤 님!”

비명 지르듯 소리치자 아드리안이 미세하게 멈추어 섰다. 레티샤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손을 뒤로 숨긴 후였다. 느릿하게 몸을 바로 세우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며,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저, 저. 레티샤 님, 저랑 같이…… 부엌에 좀 가 보셔야겠어요.”

“왜? 부엌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 나는 여기 좀 더 치우고 가마.”

두꺼운 커튼을 접는 데 집중한 레티샤는 살짝 돌아보고 말 뿐이었다. 나는 안달이 나 입술을 깨물었다.

“급한! 진짜 급한 일이에요. 지금 가 보시지 않으면 안 돼요.”

“당장?”

“당장요! 지금! 빨리!”

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치자 레티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이 저택은 내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사고가 터진다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녀가 일어나려다, 제 위에 드리운 그림자를 발견했다.

“어머, 도련님. 언제 일어나셨어요?”

“조금 전에. 커튼 개는 게 힘들어 보여서 도와주려고 했어.”

아드리안이 산뜻하게 한 발짝 물러섰다. 내가 잔뜩 긴장한 채 그를 흘끔거리는 동안 레티샤는 감동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도련님께선 마음이 어쩜 이리 고우실까. 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 훌륭한 의원께 치료받고 있으니 마님께서도 곧 정신 차리실 거예요. 기억나세요? 마님께서 어린 도련님을 얼마나 아끼셨는지. 기회만 있으면 도련님을 데리고 정원을 산책하곤 하셨죠…….”

“예, 예에. 그랬죠. 하하, 저도 기억나네요.”

대화를 얼른 얼버무리려는 내게 아드리안의 시선이 꽂혀 들었다. 천천히, 느릿하게 훑어보는 자리마다 불길이 옮겨붙는 것 같았다. 포식자 앞에서 꼼짝 못 하는 먹잇감이 된 기분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은 그저 이 방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하, 하. 정말 좋으신 분이셨는데……. 레티샤 님, 빨리요!”

“알겠다, 알겠어. 정말이지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보채는 거니?”

“어서요, 커튼은 제가 들게요!”

“아이구, 그래. 네가 힘은 참 좋았지. 도련님, 죄송해요. 부엌에 소란이 났다고 해서…… 좀 들여다보고 다시 와서 치우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해.”

“얼른요, 얼른!”

커튼 뭉치를 주워 들고 레티샤의 등을 떠밀자 그녀가 혀를 차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를 방 밖으로 밀치듯이 한 나는 흘끔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두 눈이 형형하게 떠 있었다. 모든 걸 빨아들일 것 같은 위험한 눈빛. 그와 마주치자마자 불에 덴 듯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여럿이 있을 땐 죽일 수 없다는 규칙을 깨고라도 언제든 달려들 수 있을 것처럼 형형한 살기가 느껴졌다.

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방에 들이닥쳤을 때 봤던 광경을 떠올렸다.

쪼그려 앉은 레티샤와 그녀의 뒤로 소리 없이 다가간 아드리안.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두 손은 그녀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마른 목 너머로 침을 꼴깍 삼켰다.

그거 분명 목…… 조르려던 거 맞지?

살리는 게 급해서 호들갑 떨어가며 레티샤를 끌고 오긴 했는데, 문제는 다음이었다. 당연하게도 부엌은 조용하고 평화로웠고, 레티샤가 그리 급하게 내려와야 할 이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접시 상태를 살피던 카타리나가 “어머, 왜 벌써 내려오셨어요?”라고 물으며 한술 더 떠 주었다.

“힐다. 부엌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거니?”

“그, 그게.”

“응? 말해 보렴. 도련님께 실례를 저질러 가면서까지 끌고 나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니. 설마 부엌에 쥐라도 나온 거니? 그런 거야?”

레티샤의 목소리가 점점 내려가더니 바닥을 찍었다. 검은 기운이 온몸에서 솟아오르는 게, 이 공포게임의 주인공은 레티샤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뒷걸음질 치던 나는 곧 다른 하인들에 의해 저지되었고, 분노한 레티샤에게 사흘간의 잔디 뽑기 형에 처해졌다. 사실 내가 자기를 살린 건지도 모르고 말이다. 다시 청소하러 갈 때는 나 대신 손이 더 필요하다며 몇 명을 더 우르르 데리고 간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아니, 잠깐. 다행이라니? 내가 왜 다행이지?

나는 고뇌에 차서 머리를 쥐어짰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같은 도트 쪼가리끼리 죽이고 죽는 건데. 그들은 온기가 없으며 프로그래밍된 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뿐이다. 살아 있는 생명도 아니거니와 설령 죽더라도 ‘New Game’을 누르면 다시 살아날 거다. 내가 감정 이입하고 살리려 할 필요가 없었다. 이 게임에서 죽어도 다시 살아나지 않을 건 나밖에 없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레티샤를 그렇게 티 나게 살리다니. 나를 향했던 아드리안의 눈빛은…… 지금 떠올려 보면 그 앞에서 기절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무서웠다. 역시 들킨 거겠지? 삽 들고 무덤 파고 스스로 들어가 누운 꼴이겠지?

이 게임에서 나가는 건 너무 높은 목표가 아니었을까. 실은 살아남기도 벅찬데 말이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평생 할 고민을 이 게임 속에서 다 하는 것 같았다.

“하, 오늘은 그만 고민하고 좀 쉬자.”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고, 내일의 아드리안은 내일의 내가 상대하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애써 위안하며 방에 들어와 누우려던 때였다. 피곤해서 충혈된 눈앞에 애증의 흰 글자가 떠올랐다.

왜, 뭐. 또 뭐.

「일급이 들어왔습니다.」

「골드 +30G」

「베개를 수리하지 않은 채 방치하여 내구도가 떨어졌습니다.」

「안나에게 수리하러 가시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어젯밤 베개 좀 쥐어팼다고 내구도 어쩌고 하는 안내창이 나왔었지. 아니, 안 가. 왠지 돈 들 것 같아. 겨우 55골드로 만든 내 전 재산을 또 위협받을 순 없다. 가만 보면 이 시스템은 내 재산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람 빡치게 만들면서 갈취해 갈지를 연구해서 만든 듯했다.

수리한다고 하면 100골드나 200골드, 그런 터무니없는 금액을 청구할 거지? 다 알아. 이미 시스템은 다 파악해 뒀다고.

나는 망설임 없이 ‘아니오’를 누르고 베개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원래 베이지색이었던 건지, 흰색인데 때 타서 누레진 건지……. 베고 자기에도 찝찝하고 꾀죄죄한 베개인데, 설마 이것도 내구도 다 떨어지면 손해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걸까? 이거 뭐, 5골드도 안 하게 생겼는데.

이 정도는 나도 살 수 있겠지. 나 일급 받는 여자인데. 픽 웃으며 베개를 툭툭 털어 낸 순간이었다.

「베개 내구도가 떨어져서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골드 -5G」

「베개 내구도가 떨어져서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골드 -5G」

「베개 내구도가 떨어져서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골드 -5G」

「베개 내구도가 떨어져서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골드 -5G」

「베개 내구도가 0이 되었습니다. 내구도가 0이 된 아이템은 수리 불가하며 파괴됩니다.」

「베개가 파괴되어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골드 -50G」

「골드가 부족합니다. 더 이상 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어……. 이게…… 뭐지…….

한 문장을 채 다 읽기도 전에 밑에 쫘르륵 뜨는 메시지 때문에 정신이 멍해졌다. 어, 약하게 툭 쳤을 뿐인데 내구도가 0이 됐네, 파괴됐네, 또 손해 배상금이 청구됐네, 전 재산이 0이 됐네…… 뭐?

내구도가 다 닳았다는 걸 보이기 위함인지 베개는 솔기가 다 터져서 그 사이로 솜이 비죽 삐져나와 있었다.

“뭐? 이게 말이 돼?”

나는 0G라고 선명하게 떠 있는 전 재산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하얀 안내 문구는 곧 연기처럼 사라졌지만, 내게 남긴 충격은 시간이 갈수록 더했다. 충격은 절망이 되고, 절망은 울분과 분노로 바뀌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래! 게임에 들어온 것도 개 같은데, 들어오고 나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잖아! 이게 무슨 게임이냐고!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허공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울분이 풀리지 않아 주먹으로 침대를 팡팡 내리쳤다. 내가 뭐 죄지었어? 뭘 잘못해서 이런 개 같은 일들만 겪어야 해? 나는 그냥!

“술 마시면서 공포게임을 했을 뿐인데……!”

말하다 보니 어처구니없어서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베개 하나 망친 거로 이토록 감정이 격양되는 것도 그동안 쌓인 게 많아서였다. 눈물은 그렁그렁 맺히는데 허탈한 웃음도 동시에 터졌다. 감정을 주체 못 해 웃으며 우는 내 앞에, 지긋지긋한 하얀 글씨가 또다시 나타났다.

「침대 내구도가 떨어져서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골드가 부족합니다. 더 이상 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침대와 겨우 1㎜ 간격을 남겨 두고 주먹이 우뚝 멈추었다. 혹시 내가 일으킨 바람이라도 닿을세라 눈치 보다가 슬그머니 주먹을 풀었다.

누렇게 뜬 저 베개 하나가 50골드인데 침대는 대체 얼마일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시스템에는 화가 났지만, 분풀이해 봐야 불쌍해지는 건 내 소중한 골드였다.

그래, 자자. 일단 자고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 보는 거야. 이 시스템에 화내 봐야 벽 보고 소리치는 꼴밖에 더 되겠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단 누워서…….

「베개가 없어서 누울 수 없습니다.」

“아아아악! 이 미친놈들아!”

침대에 누우려다가 보이지 않는 손에 훅 떠밀렸다. 침대에서 몇 발자국 주춤거리며 떨어진 난 다시 침대로 다가갔다.

「베개가 없어서 누울 수 없습니다.」

“이런 미친! 미친! 미친 거 아니냐고!”

「침대 내구도가 떨어져서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골드가 부족합니다. 더 이상 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침대 내구도가 떨어져서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골드가 부족합니다. 더 이상 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재산을 갈취당한 데 이어 눕지도 못하게 되자 분노가 치솟았다. 베개가 없으면 눕지도 못하다니, 무슨 이런 규칙이 있나 싶다. 세상에 베개 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애써 속을 가라앉히며 침대를 마구 차던 발을 내렸다. 침대 내구도를 더 떨어뜨렸다간 정말 빚이라도 져야 할지도 모르고, 이 말도 안 되는 규칙에 정식으로 항의해 볼 생각에서였다.

누구한테 항의하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시 침대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베개 없이도 잘 수 있어. 그러니 눕게만 해 줘.”

「베개가 없어서 누울 수 없습니다.」

“침대에 눕게만 해 주면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눕게만 해 달라고!”

「베개가 없어서 누울 수 없습니다.」

침대에 누워 보려다 다섯 번쯤 뒤로 훅 떠밀리고 난 뒤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틀렸어. 이 시스템은 설득 가능한 상대가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설정으로 유저 스트레스만 주는 겜, 망겜, 똥망겜, 이러니 유저가 없지…….

나는 옷장 앞에 쪼그려 앉아, 솔기가 터진 베개와 침대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까 수리할 거냐고 물었을 때 수리했어야 했는데. 어차피 돈 전부 뺏길 거, 쉬기라도 하고 뺏길걸. 피곤한 거지보다 건강한 거지가 될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후회와 욕을 끌어다가 중얼거리는 동안 밤은 점점 깊어졌다.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졸다가 옷장에 머리를 박아 깨어났지만, 짜증 낼 여력도 없어서 무릎 사이에 이마를 대고 또 꾸벅꾸벅 졸았다. 깊이 잠들라치면 옷장에 박아서 깨고, 또 잠들라치면 휘청거리고. 너무나 자고 싶었던 나머지 옷을 둘둘 말아 베개 대용으로 써 보려고 시도하거나 팔베개까지 해 봤는데 베개가 아니라는 완강한 방해만 받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 깨어날 때마다 시스템 알림은 뻔뻔하게도 내 눈앞에 계속 나타났다.

「피로도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체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주의! 적절한 시간을 자지 못하면 다음 날 노동이 불가합니다. 일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시스템은 온갖 메시지를 연속으로 띄우며 자라고 잔소리해 댔다. 나는 분노 조절 장애가 온 것처럼 또 울컥했다. 내가 뭐 노느라, 즐거워서 안 자고 있나?

“베개가 없으면 침대에 못 눕는다며!”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나왔다. 네가 원하는 게 바닥에서 이불도 없이 자는 거냐고!

그래도 일급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내 마음을 또 움직여, 다시 비척비척 일어나 침대에 누워 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런 내 노력을 비웃듯 하얀 알림창은 다시 떴고, 보이지 않는 손은 날 밀쳐 냈다. 베개가 없어서 누울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그놈의 베개, 베개, 베개! 빌어먹을, 빌어먹을…….

나는 우는 동시에 화내면서 다시 옷장 앞에 쪼그려 앉아 잠을 청했다. 딱딱하고 차가운 나무 바닥에 엉덩이가 배겨서 아프다, 뭐 이런 게임이 다 있어, 한참을 투덜대던 나는 이내 까무룩 잠이 들었다.

“오, 맙소사! 힐다!”

곤히 자는 나를 누군가 마구 흔들어 깨웠다. 귀찮아, 저리 좀 가. 한껏 짜증 내며 손을 쳐 냈으나 상대는 끈질기게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졸려서 그런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졸려서 눈이 떠지질 않았다.

“힐다, 정신 좀 차려 봐! 힐다!”

“으으…….”

“힐다! 정신이 좀 들어?”

내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고 생각했는지 에밀리가 아주 열렬히 내 뺨을 치기 시작했다. 눈앞이 번쩍거리는 아픔이 수면의 늪에 묻힌 나를 끌어당겼다. 문제는 내가 깨길 원하지 않는다는 거였지만.

“뭐야……. 벌써 아침이야?”

눈 잠깐 감았다 뜬 것 같은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뒤척거리고, 자다 넘어져서 깨고, 욕하고, 침대에 다가갔다 튕기는 시간을 다 빼면 두 시간이나 잤나 싶다. 지금 내게 눈꺼풀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덩이였다. 살인적인 졸음이 쏟아졌다.

“응, 해는 한참 전에 떴어.”

“아드리…… 아니, 도련님한테 약 갖다드려야 하는데……. 후아암.”

“얘는, 일어나자마자 하품이야. 오늘은 네가 도련님 약 안 갖다드려도 돼. 레티샤 님이 일찌감치 갖다드리고 왔거든.”

“뭐? 왜?”

오늘부터 잡초 뽑는 벌 말고 돈 벌 만한 일은 아드리안에게 약 갖다주는 업무뿐인데, 그거까지 뺏기다니.

“새벽에 아드리안 님께서 갑자기 각혈하셨거든. 의원님이 오셔서 요즘 약을 제때 안 드신 거냐고 물으시던걸. 그건 아니지? 네가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에 갖다드리고 있었잖아, 그치?”

“그, 그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양심이 찔리는 게 느껴졌다. 일정한 시각에 갖다줬다기엔 쟁반을 방 앞에 두고 도망치느라 먹었는지, 내다 버렸는지…….

“그치? 그럴 줄 알았어. 레티샤 님이 널 또 혼내신다기에 내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했거든. 그런데 힐다, 너 몸이 안 좋은 거야? 왜 바닥에서 자고 있어?”

“나, 베개가 없어서…….”

말하다 보니 또 울컥한다. 이런 하찮은 이유로 이렇게나 피곤해야 한다니. 게다가 아무리 게임 캐릭터라도 베개가 없어서 못 잤다는 말에 공감할 리가.

“저런. 베개 없으면 침대에서 못 자지. 나도 그런 적 있어.”

그 게임에 그 캐릭터라고, 에밀리가 끄덕거렸다. 아니, 너는 이게 이해돼? 베개가 없으면 못 자다니, 어디든 누울 곳과 몸뚱이만 있으면 엎어져서 자면 되지! 베개가 없다고 왜 못 자! ……라고 따지고 싶었으나 피곤해서 혀를 움직이기도 싫었다.

“도련님 약 이미 갖다드렸으면 나 오늘 쉬어도 돼? 에밀리, 네 베개 좀 빌리자. 잠깐만 쓰고 돌려줄게.”

“불쌍한 힐다. 잠 못 자서 피곤해서 그러는구나. 하지만 안 돼. 이번엔 레티샤 님이 정말 화내실 거야.”

“제발, 한 시간만…….”

“안 돼, 힐다.”

에밀리는 착했지만, 레티샤의 엄격함은 그대로 빼다 닮은 것 같았다. 하, 하긴 방에서 뭉개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전 재산 0골드인 나는 이틀 전 300골드를 가진 나보다, 어제 25골드의 나보다 더 쉴 자격이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이제 잃어버릴 재산이 없다는 거다. 그럼 내일은 오늘보다 쉴 자격이 있겠지.

에밀리는 퀭한 얼굴로 정리하고 일어나는 나를 딱하게는 여겼지만, 일에서는 칼 같았다. 그녀는 내 손에 잡초제거기를 쥐여 주면서, 며칠간 일할 일터를 친절히 소개해 주었다.

“여기야. 이쪽부터 저쪽까지 잡초 뽑으며 정리해 두라고 하셨어.”

운이 좋게도, 내 방보다 친숙한 곳이었다. 게임에 들어온 첫날 엉덩이 뭉개고 일했었으니까.

그리고 여기에 어떤 함정이 있는지도 훤히 꿰고 있다, 이 말이야.

나는 잡초제거기를 단단히 쥐면서, 잡초 사이사이에 함정 카드처럼 숨어 있는 핫핑크 꽃송이를 노려봤다. 저 칼랑코에 몇 송이 때문에 내 골드가 몇이나 깎였던지, 다시 생각해도 피눈물이 난다. 차라리 잘못을 저질렀으면 바로바로 알림이 뜨면 좋을 텐데, 하루가 다 끝나고 일급이 들어올 때 한꺼번에 정산이 되니 나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열심히만 일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도 이 게임 시스템을 겪을 대로 겪어 봤으니―엿 먹을 대로 먹어 봤으니―저런 뻔한 함정엔 걸리지 않는다 이거다. 오늘 내가 얻을 건 경험치와 골드! 이제 내가 가진 건 무엇이든 시스템에 뺏기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는 나라를 구하러 전쟁터로 나서는 군인이 된 기분으로 비장하게 잡초제거기를 들었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힐다가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야. 그럼, 열심히 해!”

에밀리는 청춘 만화에서나 나올 만한 대사를 치더니 발랄하게 뛰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 이내 잡초 뽑는 데에 집중했다. 오늘 내 목표는 멀쩡한 일급과 경험치! 아드리안에게서 안전해진 이 며칠간, 스킬이든 레벨이든 얻어 놔야 했다.

하지만 어젯밤을 거의 새다시피 보내서일까. 조금만 주의가 흩어지면 눈이 스르르 감기려 했다. 나는 화들짝 깨어나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데서 자다가 걸렸다간 진짜 이 저택에서 거지꼴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럼 현실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아내지 못한 채 노숙자로 길가에서 죽어 가겠지……. 그건 절대 안 돼!

“하지만 너무 피곤한데…….”

잡초제거기를 쥔 손에서 은근슬쩍 힘이 빠졌다. 지금 당장 누워 잘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텐데. 내가 늘어지게 하품하며 뻐근한 목과 어깨를 두드리고 있자, 기다렸다는 듯 눈앞에 하얀 글자가 떠올랐다.

「피로도가 높아 일이 잘 안 됩니다.」

“응? 아냐, 아냐. 다시 생각해 봐. 나 안 피곤한데? 일 잘하고 있는데?”

나는 얼른 눈을 부릅뜨면서 잡초를 뽑아냈다. 와, 어젯밤에 거의 못 잤는데 하나도 안 피곤하네? 힐다가 타고난 일꾼 체질인가 봐. 일만 하면 이렇게 정신이 말짱해지네! 나는 허공에 들으란 듯이 외치며 빠르게 잡초제거기를 돌렸다. 빈틈을 보이면 안 된다. 저 시스템에 꼬투리 하나라도 잡히면 또 어떻게 날 엿 먹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소리를 하건 시스템은 완강했다.

「잡초 뽑기 성공률이 떨어집니다.」

「잡초 뽑기에 실패했습니다.」

나는 망연자실하게 그 글자들을 보았다. 잡초 뽑을 때마다 떴던 경험치 알림도 이번에는 뜨지 않았다. 이제 그 손톱만 한 경험치 1마저 안 주는 거야?

「잡초 뽑기 성공률이 떨어집니다.」

「잡초 뽑기가 80% 성공했습니다.」

「일급이 감소합니다.」

「경험치 획득량이 감소합니다.」

「잡초 뽑기 성공률이 떨어집니다.」

오기로 잡초를 뽑을수록 피로도 때문에 실패하고 성공률과 일급이 떨어진다는 알림만 주르륵 나열되었다. 그만둘까 싶다가도, 계속 시도하면 혹시 성공률이 올라가지 않을까, 경험치가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접을 수가 없었다.

「잡초 뽑기 성공률이 0이 되었습니다.」

「일급이 20%로 감소합니다.」

하지만 오후 늦게까지 열심히 잡초제거기를 돌린 결과는 겨우 이것뿐이었으니……. 내게 남은 건 일급도, 경험치도 아닌 정점을 찍은 피로도뿐이었다. 이게 전부 베개 하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데에 허탈한 웃음만 터졌다.

“힐다! 정원을 어떻게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니!”

시스템에서 계속 뱉어 낸 실패 알림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 끝날 때 즈음 맞춰 온 레티샤가 정원 꼴이 이게 뭐냐며 잔소리 폭격을 날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속으로 사고를 쳐 대니 반항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듯도 했다.

원래 죄 중에 가장 무서운 게 괘씸죄인데.

“힐다, 대체 요새 왜 이러는 거니? 무슨 죽을병에라도 걸린 거니? 아니면 내게 섭섭한 게 있어?”

레티샤는 결국 내 손을 잡고 호소하듯이 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생각해 보면 이 게임의 장르는 공포가 아닌 것 같았다.

이건 피폐물이었다. 피폐물 중의 피폐물.

크고 대단한 일이 아닌, 일상적이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로 피를 말리는데 당해 낼 재간이 없다. 긁지 못하는 곳을 계속 간질여 대는 것처럼 신경 쓰이고 번거로웠다. 작정하고 피폐물로 만들려고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이 죄다 엉망이 될 수 있을까?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이건 진심이었다. 난 이 게임에 들어와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했지, 일을 망치려고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더 억울한 것도 있었다.

“휴, 그래. 네가 그럴 리가 없지. 심성이 나쁜 아이는 아니니……. 그냥 일이 잘 안 풀렸다고 생각하마.”

“정말 죄송해요.”

“……그래. 여긴 내가 마저 정리할 테니 어서 올라가 쉬렴. 참, 방에 돌아가기 전에 하나 부탁할 일이 있다.”

뒷정리를 맡기는 데에 대한 미안함으로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좀 피곤하긴 하지만, 간단한 일 하나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새벽에 난리가 났다는 건 너도 들어 알고 있지? 그 일로 도련님 침대보가 더러워져서 빨아 널어놓았단다. 지금쯤 다 말랐을 테니 가져다가 다시 씌워 두렴.”

“이렇게 늦게요? 쉬고 계실 텐데. 어쩌면 벌써 주무시고 계실지도 모르고요.”

“도련님은 오늘 늦게까지 서재에 계신다고 했단다. 도련님 방은 오늘 내내 비어 있었으니, 지금도 그럴 거야.”

“네, 그렇게 할게요.”

아드리안이 방에 없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낮 동안 햇볕에 바싹바싹 말려진 침대보를 걷어 4층으로 올라갔다.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온 지금이 저택이 가장 바쁠 때다. 백작과 백작 부인, 아드리안은 항상 따로 식사하기에, 끼니마다 만드는 음식이나 설거지 양이 세 명 한꺼번에 식사할 때보다 훨씬 많다. 그래서 지금은 하인들이 가장 분주하게 움직여 서로에게 관심 없을 때였다.

서빙 카트가 드르륵거리며 빠르게 움직이는 가운데 나는 조용히 계단을 올라갔다. 아드리안 또한 지금 식사를 하고 있을 테니, 방에서 공교롭게 마주칠 일은 없겠지. 으으, 정말 다행이다. 만약 레티샤를 피신시킨 걸 눈치챘다면, 둘만 있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하기 싫었다.

“도련님?”

끼이익 열리는 문 사이로 고개만 쏙 내밀고 방 안을 휙휙 둘러보았다. 다행히 인기척 하나 없이 촛대의 촛불 세 개만 일렁대고 있었다. 몇 번이나 왔지만, 이 방은 참 뭣도 없이 축축하고 음산했다. 해가 가장 잘 드는 방이라는데 이상도 하지.

아드리안이 돌아오기 전에 빨리 끝마치고 도망가야겠다.

나는 살짝 겁에 질린 눈으로 방 안과 복도를 휘휘 살피고는 살금살금 들어갔다. 침대보를 순식간에 갈고, 잠깐 치워 두었던 침구를 끌어와 하나씩 정리했다. 어디 호텔에서 보던 것처럼 베개 여러 개를 헤드에 기대 둔 뒤 이불을 펼쳐 깔자 꽤 그럴싸했다. 이것도 일급으로 쳐줄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아드리안 오기 전에 얼른 도망가야지.”

걸리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거둬 낸 침대보를 팔에 감아 들어 올렸을 때였다. 하얗고 통통한 무언가가 내 시선에 들어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내 턱을 잡아 돌려 강제로 ‘보게 했다’.

“……베개…….”

홀린 듯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러 베개 중에서도 유독 내 시선을 잡아끄는, 크고 통통한 베개. 먹을 것도 아닌 베개가 이렇게 탐스러워 보이는 건 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팔에 감아 놓은 침대보도 바닥에 떨어뜨린 채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잘게 떨리는 손을 베개에 살며시 가져갔다가, 덜컥 겁이 나 움츠러들었다.

딱 한 번만 만져 보면 안 될까? 진짜 부드러워 보여서 그래.

잠깐 만져 보기만 하는 건데 뭐가 어때? 아드리안은 한창 식사 중일 테고.

움츠러들었던 손이 끝내 손가락을 뻗어 베개에 닿았다. 내 얼굴은 놀라움으로 물들어 갔다.

“이 세상 감촉이 아니야…….”

내구도가 형편없던 내 베개와는 차원이 달랐다. 천사의 날개처럼 부드러운 감촉, 푹신함, 그리고 내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내구도. 이런 내구도라면 내가 몇 대 친다고 솔기가 터지는 일은 없을 텐데. 새끼 고양이 다루듯 살며시 쓰다듬어 보니 너무 부드러워 손바닥이 녹는 것 같았다.

나는 큰맘 먹고 베개에 살짝 머리를 기대 보았다. 이어서 밀려오는 만족감을 견디지 못하고 똑바로 누워 벤 뒤 이불까지 덮어 보았다.

얼마나 편하고 푸근한지, 새벽부터 쌓였던 모든 피로가 확 풀리는 느낌이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

만족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한동안 나타나지 않던 흰 글자가 깜박거렸다.

「피…… 도가…… ……을 …………모드로………….」

뭐야, 뭐라는 거야?

이제는 양아치가 따로 없는 흰 글자를 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왜 글자가 보이질 않지? 울지도 않는데 눈물이 맺힌 것처럼 눈앞이 그렁거리고 있었다. 뿌옇게 흐려진 글자를 읽기 위해서는 눈에 의식적으로 힘을 줘야 했다.

피로도가…… 다음을 읽을 수가 없다. 물을 통째로 엎어 버린 수채화처럼 흐릿하기만 하다. 대체 뭐라고 쓰인 거야?

“피로도가…… 체…… 력을 넘…… 어…… 하아암, 수면, 모드로…….”

문자 그대로 읽기는 읽었지만, 정작 무슨 뜻인지는 와닿지 않았다. 이미 현실의 나는 완전히 분리되어 저 멀리 떠난 것처럼. 졸리고 편하다. 얼마나 졸린지, 생각 속에서도 하품을 하고 있었다. 벽면을 기웃거리는 촛불 그림자처럼 의식이 가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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