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33)

1-1. 한국인은 게임에서도 노가다를 뛴다.

“아…… 지겨워. 뭐 할 거 없나?”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게임을 좋아하는 평범한 겜순이였다. 재미있어 보이는 게임은 사서 해 보고, 게임 내에서 현질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만 하는. 취직한 후에는 회사 생활에 집중해야 했기에 하던 게임을 많이 접었지만, 그래도 새로 출시되는 게임은 꼭 한 번씩 해 보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하루가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퇴근길에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을 사 왔고, 몇 잔 마시지도 않고 취하는 바람에 ‘공포게임’ 리뷰를 눌렀다. 겁이 많아 평소 잘 들어가 보지도 않던 그 카테고리 말이다.

“공포게임도 이렇게 신작이 많이 나오는구나.”

나는 마우스 휠을 내려가며 메인 페이지에 빼곡하게 차 있는 게임 타이틀을 쭉 훑어봤다. 대체로 새까맣고 빨간 괴물과 귀신이 음산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맨정신이었다면 무섭다며 곧장 창을 닫았을 테지만 술기운 덕인지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왜 공포게임을 하는 걸까?

자학하는 취미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그런 걸 즐기는 게 평소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만큼 은근한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성의 없이 리뷰를 클릭하거나 게시물을 쭉 내려 보던 나는, 아까부터 계속 반복적으로 보이는 단어에 화면을 멈추었다.

‘팔츠그라프 백작가의 살인자’

“흠, 이거 아까도 본 게임 아닌가? A컴즈 신작…….”

다 마신 맥주 캔을 찌그러뜨려 대강 던져 놓은 난 다시 리뷰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A컴즈는 마이너한 감성이지만, OST나 시대 배경, 스토리 등을 공들여 내놓기로 유명해 신작 출시 때마다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곤 했다. 그래서인지 시장에 많이 나오는 양산형 게임보다 훨씬 좋은 작품을 내놓아도, 기대가 워낙 높으니 혹독한 평을 듣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출시되기를 기다렸다가 나오자마자 샀는데 별로다, 망이다, 실망이다……. 안 좋은 평을 보고 있으니 궁금증은 더 커져 갔다.

뭐 얼마나 망작이기에 죄다 망겜이래?

아니지, 실제론 망작이 아닐 수도 있다. 자고로 유명 인터넷 게임 커뮤니티에서 망겜이라 불리면 대부분 명작이었다. 망무새들이 많을수록 게임은 더 잘되고 매출 순위가 높다.

이상한 법칙이지만 진짜 그랬다. A컴즈 작품은 더 그랬고.

“궁금하네. 한번 해 볼까…….”

그렇게 말하면서 벌써 내 손은 A컴즈 사이트에 들어가 결제를 누르고 있었다. 다운받고 켜질 때까지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게임을 클릭하자마자 커다란 화면 전체를 검붉은 피가 물들였다. 우르릉 쾅쾅 하는 고전적인 천둥 번개 빗소리와 함께 으리으리한 저택이 나타났다.

아트 디테일에 유달리 집착한다는 A컴즈답게 저택은 어느 영화에서나 볼 법한 유럽풍으로 고상하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원화가를 갈아 넣은 수준이군.

나는 남은 안주용 과자를 무심하게 씹어 넘기며 오른쪽에 나온 메뉴를 봤다.

★New Game

★Exit

단출한 메뉴 중 첫 번째를 누르자 또다시 화면은 새카매졌고, 낮은 첼로 선율과 더불어 장엄하고 음산한 오케스트라 OST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때.

“아! 깜짝이야!”

끔찍한 비명과 함께 한 남자의 얼굴이 모니터에 가득 찼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뒤로 넘어갈 뻔했지만, 얼굴이 작아지자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고 제대로 앉을 수 있었다.

핏줄이 다 비칠 정도로 창백한 남자, 아니, 남자라기에는 조금 더 앳된…… 청년이 나를 정확히 바라보며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그게 여자의 잘린 목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피에 젖어 엉겨 붙은 머리카락, 죽기 직전의 공포가 고스란히 남겨진 표정, 미처 감기지 못한 눈……. 원화가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는 바람에 사진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급기야 그가 여자의 머리를 으적으적 씹어 먹기 시작하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지, 좀 마이너한 감성인가……. 징그럽긴 하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행동이 느려지면서 모니터에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게임의 세계관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는 내용이었는데, 줄거리는 대강 이랬다. 지하에 존재하는 악마 세계는 오랜 시간 군주가 군림하며 지배해 왔는데, 그의 딸 릴리트가 봉기를 일으키며 진영이 반으로 쪼개졌다고 한다. 사실상 지옥의 최강자라고 할 수 있는 사탄은 군주의 진영에 서서 릴리트에게 대항하기로 한다. 악마 세계는 사탄과 릴리트, 두 진영으로 나뉘어 지루한 소모전을 이어 가게 되는데…….

압도적인 힘으로 릴리트를 완전히 무너뜨린 날, 그녀는 온 생명을 바쳐 사탄에게 끔찍한 저주를 퍼붓는다. 모든 힘을 잃고 나약한 인간의 몸에 깃들어 눈을 뜨게 된 사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흡혈귀처럼 인간을 죽여 생명력을 흡수하는 것뿐.

그는 살인하고, 또 살인할 것이다.

모든 힘을 되찾고 완전한 존재가 될 때까지, 혹은 반대로 살인자로 사형당하기 전까지.

플레이어는 이 백작가의 도련님, ‘아드리안 카이사르 폰 데어 팔츠그라프’가 되어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완전한 힘을 얻기 전 사형당하거나, 게임 규칙을 어기면 곧바로 게임 오버였다.

“세계관 참 우울하네.”

시체를 뜯어 먹는 일러스트라니……. 지나치게 그로테스크했다.

역시 괜히 샀나. 지금 환불해 버릴까.

잠깐 고민한 끝에 화면을 클릭하자 웬일로 모니터가 밝아졌다.

로비 화면에서 봤던 으리으리한 저택은 햇볕 아래서 더욱 커다란 위용을 뽐냈다. 빛바랜 부분 하나 없이 새하얀 벽면, 섬세하게 새겨진 신들의 조각상, 딱딱하고 곧은 직선을 조화롭게 꾸며 주는 곡선 기둥. 온종일 걸어도 반은 돌아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커다랗고 잘 꾸며진 정원.

평생 월급과 야근비를 모아도 집 한 채 못 산다는 이 대한민국, 이제 막 중소기업에 취직한 사회 초년생은 꿈도 꾸지 못할 크기였다.

“하, 이런 데서 한번 살아 봤으면 소원이 없겠네…….”

새삼 내 원룸을 돌아보며 우울해져 있는 동안 화면에 차례로 인물 소개와 대사가 뜨기 시작했다.

★레티샤 : 얘, 힐다! 힐다! 어서 일어나지 못해!

레티샤. 다른 나라에서 이민 온 그녀는 팔츠그라프 가문의 충실한 하인장이다. 그녀 사전에 팔츠그라프 가문을 배신하는 일이란 없다.

★레티샤 : 힐다! 또 늦잠 자는 거야! 어서 아드리안 도련님께 약을 가져다드려야지!

★힐다 : 벌써 일어났어요.

힐다. 천애 고아로 길바닥에 버려진 그녀는 한 사제에게 구해져 이 팔츠그라프 가문의 하인으로 보내진다.

★레티샤 : 힐다, 약!

★힐다 : 네, 네. 카타리나 언니는 어디로 갔담.

★레티샤 : 카타리나에게 넘길 생각 말고 네가 잽싸게 다녀와! 에그, 우리 아드리안 도련님……. 불쌍하기도 하지. 밖에 잘 나다니지도 못하시고,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병이라니. 요즘 아무리 밖이 흉흉하대도 또래들처럼 자유롭지 못한 건 참 안되셨어.

★힐다 : 밖이 흉흉하다니요?

★레티샤 : 소식 못 들었니? 이 앞에서 칼을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더구나. 실제로 누군가 찔렸다는 소문도 있어. 아니, 근데 너 아직도 아드리안 도련님께 안 간 거야? 어서 일어나 가지 못해!

★힐다 : 아야야. 다 챙겼어요. 가요, 가!

힐다의 투덜거림과 함께 장면이 복도로 바뀌었다. 밝지만 어딘지 으스스한 느낌이 감도는 복도 끝에 커다란 문이 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힐다의 대사가 다시 떴다.

★힐다 : 도련님, 약 가지고 왔습니다.

★??? : 들어와.

끼이익. 이 으리으리하고 비싸 보이는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아드리안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 게임의 주인공이자 백작가의 병약한 도련님, 사탄이 씌었다는 소백작이었다. 스무 살 정도 됐을까,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는 피를 뒤집어쓴 인트로 화면에서의 인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힐다 : 오늘은 좀 어떠세요?

★아드리안 : 햇살에 눈이 조금 부셔.

★힐다 : 커튼을 닫아 드릴게요.

★아드리안 : 그럴 필요 없어. 약은 테이블에 두고 가. 고마워.

★힐다 : 고맙기는요, 도련님. 어서 나으세요. 레티샤 님이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 물론 저도요.

아드리안은 천식 외 수많은 지병을 앓고 있어 저 시대 의학 기술로는 낫기는커녕 통증을 완화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나을 수 없는 병인 걸 서로 알면서도 힐다는 진심으로 그렇게 빌었고, 아드리안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게임 안인데도 후광이 비칠 정도로 수려한 외모에다, 살인자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해 보였다.

★아드리안 : 고마워, 나가 봐.

★힐다 : 네, 도련님. 편히 쉬세요.

끼이익. 힐다가 나가자 천사 같던 웃음이 씻겨져 나갔다. 표정 하나 없이 테이블 앞으로 걸어간 그는, 약봉지를 쥔 채 창밖을 살폈다.

★아드리안 : 후……. 보는 눈이 많으니 움직이기도 쉽지 않군.

★아드리안 : 하지만 괜찮아. 이 몸이라면 설마 살인했으리라곤 의심도 받지 않을 테니까.

그는 병약한 몸이 못마땅한 듯했으나, 그 몸이 주는 이점은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백작가가 거대한 만큼 지켜보는 눈도 많았다. 아드리안의 수발을 드는 데 집중하는 이들을 피해 살인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거 게임 난도가 헬이라서 망겜이라고 한 거구나.”

몇 명 죽이기는 했는데 하나 죽일 때마다 시간이 꽤 걸렸다.

어쩌면 사탄은 아드리안의 몸에 빙의한 채 늙어 죽게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게임 내에서 아드리안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의자에 깊숙이 앉았다.

무성의하게 클릭하다가 시나리오도 읽어 보고, 듀얼 모니터에 위키를 띄워 공략집을 쭉 읽어 보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새 졸린 눈으로 게임을 다시 돌아봤다.

살인에 실패하고 돌아온 아드리안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서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이 보이도록 화면을 돌려 확대했다.

“뭐…… 잘생기긴 했네.”

뒤늦게 술기운이 올라온 건지 게임 속 캐릭터의 얼굴을 보고 감탄하고 있다.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진하고 곧은 눈썹과 단정한 이목구비, 적당히 불그스름한 입술, 웃으면 길어지는 눈꼬리와 순한 인상까지.

“이제 자야겠네.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머리로는 일어나 씻고 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물먹은 솜처럼 의자에 눌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쩐지, 아드리안이 화면을 보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임에도, 살아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나 보다…….

갑자기 눈앞이 핑 돌면서 어지러워졌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눈꺼풀이 쇳덩이처럼 무거워지고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엄청난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아, 씨……. 그러게 술 좀 적당히 먹고 일찍 잤어야 했는데. 이래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니까. 나는 뻑뻑한 눈을 비비면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근데 지금 몇 시지? 출근해야 하는데.

“핸드폰, 핸드폰…….”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더듬거리던 나는 곧 잡혀야 할 핸드폰이 잡히지 않자 몸을 한 번 뒤집어 팔을 더 쭉 뻗었다. 분명 침대에 핸드폰을 두고 잤을 텐데. 내 침대는 그렇게 크지 않으니 이쯤 되면 핸드폰이 만져져야 정상이었다.

근데 핸드폰이 없었다. 아니, 핸드폰이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여긴 내 방이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어제 뭘 하다가, 어디서 잤더라? 외박했었나? 아닌데, 분명 술 사서 집에 왔었는데. 게임도 했고.

잠에서 덜 깬 정신으로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공중에 웬 하얀 글자가 떠올랐다.

「레벨 1. 스킬 없음.」

「레벨 5가 되면 ‘감지’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돌아 버린 건가, 내가. 헛것이 보이고, 자꾸…….”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양이다. 고개를 한번 크게 털고 다시 눈을 뜨자 글자는 사라졌지만, 낯선 방 안은 그대로였다. 나는 흐릿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뭐지? 여기 어디야? 내가 어제 VR 게임을 하다 잤었나? 나 출근해야 하는데.

그때였다. 쿵쿵쿵. 누군가 문을 마구 두드렸다.

“얘, 힐다! 힐다! 어서 일어나지 못해!”

“……?”

“힐다! 또 늦잠 자는 거야! 어서 아드리안 도련님께 약을 가져다드려야지!”

어디서 분명 보고 들은 것 같은 대사였다.

근데 어디서 봤는지 잘 기억이…….

“힐다, 이 구제 불능 같으니라고. 대체 언제까지 내가 직접 와서 깨워 줘야 일어날 거야?”

문이 벌컥 열리며 성난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나는 이미 몇 번이나 돌아본 방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없는데?

“힐다요? ……저요?”

걔는 어제 한 게임에 나오던 하인인데. 나는 멍청하게 나 스스로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문을 열고 한심하게 나를 바라보는 저 여자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현실이 아니라 게임에서 말이다.

“그럼 네가 아니면 누구겠어? 허튼소리 그만하고 얼른 일어나지 못해!”

“…….”

“어휴, 멀쩡하게 생긴 걸 뽑아 놓으면 죄다 이렇게 굼뜨니, 원! 믿을 만한 놈이 하나도 없어, 하나도!”

레티샤? 진짜 레티샤였다. 그녀는 특유의 앙칼진 목소리로 잔소리를 늘어놓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 오늘 출근해서 보고서 내야 하는데. 안 그럼 또 과장한테 닦일 텐데.

닫힌 문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힐다, 너 또 늦잠 잔 거야? 레티샤 님께서 잔뜩 화가 나셨던데.”

문이 다시 열리고, 조금 전 레티샤와 비슷한 얼굴을 한 여자가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녀 또한 어젯밤에 하던 게임에서 봐서 친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멍하니 입술만 움직였다.

“에미…… 에밀리?”

“왜 그렇게 낯설게 불러? 어디 아픈 거야?”

“이게 도대체……?”

“힐다 너 아직 꿈에서 덜 깼구나. 어서 일어나서 준비해. 레티샤 님이 다시 돌아오셨을 때도 그 꼴이면 정말 많이 혼날지도 몰라.”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나를 보고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던 그녀가 옷장에서 무언가를 꺼내 침대로 던졌다. 적당히 두꺼운 면으로 만들어진 회색 치마, 그리고 치마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두르는 낡은 앞치마였다. 게임에서 하인들이 죄다 이런 옷을 입고 있긴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 나는 몇 번인가 입을 열었다 닫다가 옷을 툭 내려놓았다.

“와, 이거 정말 실감 나는 꿈이네. 진짜 현실 같잖아. 내가 힐다라고?”

“힐다, 어서 일어나서 옷 갈아입고……. 아니, 안 되겠다. 아드리안 도련님께 약은 내가 가져다드릴게.”

“내가……?”

“휴……. 오늘은 정말 레티샤 님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어. 안 그래도 요새 하인들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단단히 벼르고 계시거든.”

에밀리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눈길로 응시하고는, “레티샤 님이 너무 화를 내시면 안 될 텐데.”라고 중얼거리며 문을 닫고 사라졌다.

“뭐지? 이거 뭐지?”

반도 하지 못하긴 했지만, 힐다 캐릭터가 아드리안에게 약을 가져다주는 장면이 게임의 처음이었던 건 분명 기억났다.

“내가 게임 속에 들어온 거야?”

미친 게 아니고서야…….

나는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다가 스스로 뺨을 때려 봤다.

귀가 얼얼하도록 때렸는데 깨질 않았다. 거기다 이 생생한 아픔과 촉감하며…… 창문을 통통 쳐 대는 바람 소리와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꿈이라면 이럴 수가 없다.

“진짜야?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니냐고!”

게임에 들어오다니, 아니, 그것도 살인이 난무하는 공포게임 속에!

이왕 들어오려거든 미남자들이 득시글대는 연애 시뮬레이션이었으면 좋았잖아!

들어와도 하필이면 공포게임…….

“그렇지, 로그아웃! 로그아웃!”

여기가 진짜 게임 속이라면 로그아웃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설마 인생에서 로그아웃되는 건 아니겠지?

조금 떨리는 손으로, 시야 오른쪽 상단에 작게 쓰인 Menu를 눌렀다. 그러자 허공에 New Game, Exit가 순서대로 떠올랐다. 로그아웃이라는 게 없네? 그럼 Exit를 눌러 보면?

나는 조금 긴장한 채 Exit 버튼을 눌러 보았다. 그러자 내 눈앞에 나타난 건…….

「게임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와, 이 게임 감옥이었네?”

맥이 탁 풀려 침대에 주저앉았다. 실제로 컴퓨터에서 할 때도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제공된 메뉴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없단 소리였다.

New Game은 쓸 일이 있을까? 이것도 동작 안 하는 거 아냐?

살며시 손을 들어 눌러 보려는 순간이었다.

“힐다! 내려오라는 소리 못 들었어! 대체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 하니!”

부서지도록 문이 열리며 노한 레티샤가 또 보였다. 당장이라도 뛰어와서 등짝을 수십 대는 후려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메뉴를 닫고 잔뜩 긴장했다. 메뉴가 그들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기상 시간을 어긴 데다 도련님 약 가져다드리는 일까지 빼먹어? 그러고도 아직 옷도 안 갈아입고 있어? 아주 온종일 그러고 있을 생각인가 보지? 머리는 또 그게 무슨 꼴이고!”

“어, 아…… 죄송…….”

“도저히 못 참겠다. 전부 다 집합해! 이것들이 정신이 다 빠져서!”

레티샤가 고함치며 사라지자 그새 아드리안의 방에 다녀온 에밀리가 조르르 뛰어 들어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그녀가 재촉하는 대로 옷을 주워 입고 그 뒤를 따랐다.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 반 전체가 기합받던 때가 떠올랐다. 진짜 죽도록 뺑뺑이 돌렸는데, 설마 여기서도 그러진 않겠지?

에밀리가 이끄는 대로 뛰어 내려가다 때아닌 감탄이 터졌다. 베르사유의 궁전을 연상케 하는 거대하고 화려한 정원이 시야를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와, 게임 영상으로 볼 때보다 이렇게 실제로 보는 게 훨씬 더 으리으리하잖아.

“거기 멀거니 서서 뭐 하는 거야! 빨리 이리 안 와!”

“힐다, 힐다.”

에밀리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나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총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잰걸음으로 가서 뒤쪽에 섰다.

“탓할 것 없어! 누구 하나 때문만이 아니라 요즘 다들 기강이 해이해진 것 같아서 불러낸 거니까! 오늘은 다 같이 힘을 합쳐 정원을 정돈하는 거다!”

“하아…….”

사방에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원 청소는 뭐, 1년에 한 번씩 하는 대청소 같은 개념인 모양이다. 하긴, 이렇게 큰 정원이면 이 많은 인원이 바삐 움직여도 하루 종일 걸릴 것 같았다.

“조용! 조용들 하지 못해!”

레티샤의 윽박에 다들 입을 합 다물었다. 아까보다 열 배는 더 화난 얼굴이었다. 하, 조졌다. 이것들 기합 한번 안 받아 본 모양이지.

원래 처음 시켰을 때 잘해야 쉽게 쉽게 넘어가는 건데……. 하기 싫다고 뻗댈수록 일의 양은 비례해서 증가하는 법이다.

“정신들 못 차리지! 이참에 뒤뜰도 같이 청소하도록 해!”

이것 보라지. 내 말이 맞잖아.

그런데도 정신 못 차린 몇몇이 투덜거리며 정원 도구들을 챙겼지만, 다행히 레티샤는 백작님이 오셨다며 조르르 사라진 후였다.

백작이라면 아드리안의 아버지일 텐데. 내가 진행한 부분까지 아버지는 등장할 일이 없어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다. 게임 캐릭터가 소개되어 있던 위키 좀 자세히 읽을걸, 술에 취해서 읽는 둥 마는 둥 기억나는 것도 없다.

“어휴, 오늘 예감이 영 안 좋더라니.”

아침부터 혼나니 마니 예측했던 에밀리조차 한숨이었다. 나는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며―왜 NPC 눈치를 봐야 하는 걸까?―잡초 제거용 칼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잡초가 무성한 근처로 가서 풀을 잡아 올린 뒤 칼로 잘랐다. 쓱싹하는 소리와 함께 잡초가 잘리는 순간이었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알림이 깜박하며 시야 아래쪽에 ‘+1’이 하얗고 빛나는 글씨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오, 이거 뭐지?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또 한 번 잡초를 잘랐더니 아래에 ‘+1’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러니까 잡초를 두 개 제거한 거로 경험치 2를 얻은 것이다. 왼쪽 아래를 자세히 살펴보니 실제 온라인 게임처럼 경험치 상태바가 있었고, 방금 올린 2로 게이지가 조금 찬 것이 보였다.

와……. MMORPG가 따로 없다. 이렇게 실감 나게 할 수 있는 게임이라니. 실제로 출시했으면 대박 났을 퀄리티였다.

경험치가 올라가면 뭐가 좋지? 설마 스킬 같은 것도 있나?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오른쪽 상단에서 ‘스킬’을 발견하고 눌러 보았다.

「레벨 1. 스킬 없음」

「레벨 5. ‘감지’」

「레벨 10. (잠금)」

「레벨 15. (잠금)」

…….

세상에, 진짜였잖아? 스킬도 쓸 수 있다니. 감지라면 뭘 감지한다는 걸까? 일단 레벨 5를 만들어 볼까? 근데 내가 스킬 쓸 일이 있을까?

“맙소사, 힐다! 잡초를 그렇게 자르면 어떡해! 뿌리까지 뽑아내야지!”

“어? 어어, 그렇지.”

“뒤돌아서면 자라는 게 잡초인데, 이렇게 잘라 낸다고 없어지지 않는다고……. 근데 오늘 너 정말 이상하다. 알아?”

에밀리가 내 손에 어정쩡하게 들린 잡초제거기를 낚아채더니 땅에 푹 박았다. 그러고는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내가 허접하게 잘라 놓은 풀떼기를 뿌리째 덜어 냈다.

저렇게 하는 거구나……. 나는 조금 민망하고 머쓱한 기분으로 잡초제거기를 받아 들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아파트나 원룸 빌라 등에서 살아온 내가 내 손으로 잡초 제거를 해 본 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게임에선 잡초만 클릭하면 캐릭터가 알아서 제거해 줬는걸.

“미안해. 아직 잠이 덜 깼나 봐. 여기, 저기, 저어기는 내가 다 정리해 놓을 테니까 너는 저어쪽 넘어가서 해도 돼.”

“정말? 여기를 다? 혼자 하기는 너무 넓은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에밀리가 깜짝 놀라며 내가 가리킨 곳들을 보고 물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지루한 일터가 아닌 경험치 밭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저 경험치는 전부 내 거야!

나는 걱정스러워하는 에밀리를 달래 멀리 쫓아낸 다음, 잡초제거기를 불끈 쥐었다.

일단 레벨부터 올려 보자. 게임에선 레벨이 깡패잖아. 만렙을 찍으면 이 게임에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까 에밀리가 어떻게 했더라. 이걸 분명 이렇게…….”

잡초를 잡아당기고, 제거기를 뿌리 근처까지 쑤셔 넣어 들어 올리고. 수월하게 해냈던 에밀리에 비해 서툰 솜씨였지만, 게다가 뿌리는 반쯤 흙 속에 남겨 두긴 했지만 어쨌든 뽑긴 뽑았다. 나는 아래쪽에 또 차오르는 게이지를 보며 뿌듯해했다. 노가다 해서 레벨업하는 게 RPG의 묘미지.

그래, 뭐라도 해 보자.

나는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인 뒤 잡초를 뽑아 대기 시작했다. 처음엔 느렸던 손이 차츰 빨라졌고, 뽑아낸 잡초무더기가 옆에 무덤처럼 쌓여 갔다. 얼마나 열성적이었냐면, 에밀리가 걱정하며 다가오고, 우연히 주변을 지나가던 하인들이 보며 쑥덕거릴 정도였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레벨 2로 올랐습니다. (칭호 : 하찮은 일꾼)」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잡초를 제거하여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내가 미친 듯이 잡초를 뽑아 대자 경험치 알림창은 꺼질 줄 모르고 갱신되었다. 그와 동시에 내 경험치 게이지도 충실하게 차올랐다. 좋아, 이대로라면 레벨 5까지 올려서 스킬을 얻는 건 일도 아니겠다.

반나절 넘게 웅크린 채 잡초를 뽑았으나 놀라울 정도로 몸이 멀쩡했다. 정신은 나였지만, 이 몸의 주인은 원래 하인이자 일꾼인 힐다여서 그런 걸까. 현실에서의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체력과 근력이 뛰어났다. 원래의 내가 이 정도 일했으면 바로 앓아누웠을 텐데.

타고난 일꾼의 몸이라고 감탄하는 동시에 눈물이 나왔다. 나 여기서 막노동만 하다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아니, 돌아갈 수나 있나?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어느새 레벨 3이 다 됐을 때였다. 여느 게임이 그렇듯 레벨이 올라갈수록 필요한 경험치가 많아졌는데, 문제는 그 차이였다. 레벨 2로 올리는 데 필요한 경험치가 100이었다면 레벨 3으로 올리는 데 필요한 경험치는 200이었다. 경험치 100 차이라면 유저 입장에선 그리 크지 않았지만, 한낱 일꾼인 나에게는 잡초 100개 차이였다.

그럼 레벨 4는? 레벨 5는?

스킬 하나 얻으려면 일주일 내내 잡초를 뽑아도 부족할 것 같았다. 기계적으로 잡초를 뽑아 대고는 있었지만, 앞길이 막막해졌다.

잡초 뽑기 말고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다못해 일일퀘스트라도, 주간퀘스트나 월간퀘스트, 업적 같은 거라도…….

“맙소사, 힐다! 너 지금 뭘 뽑은 거니!”

옆에서 경악하는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뭘 뽑고 있긴, 평범한 잡초잖아.

「팔츠그라프 백작이 아끼는 칼랑코에를 뽑아 경험치 5를 얻었습니다.」

아주 친절하고도 상세한 안내문에 입이 떡 벌어졌다. 팔츠그라프 백작이, 아끼는, 칼랑코에……? 아니, 근데 고작 경험치 5밖에 안 줘? 이 게임 퀘스트 효율에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죄송해요, 레티샤 님! 오늘 힐다가 많이 아파서……!”

아침부터 뒤치다꺼리하느라 바쁜, 불쌍한 에밀리가 급하게 뛰어와 날 감쌌다.

“도대체 어디가 아프길래. 머리가 어떻게 된 거니? 백작님께서 매일 아침 들여다보는 칼랑코에를, 어떻게 저걸 건드릴 수가 있어!”

“다행히 뿌리는 상하지 않게 들어냈으니 다시 심어 둘게요! 백작님께서도 알아보시지 못할 정도로 깔끔하게요!”

에밀리가 급하게 내 손을 탁탁 쳐 댔다. 아, 다시 심으라고 했지. 나는 잔뜩 겁먹은 척 칼랑코에를 다시 넣고 주변에 흩어진 흙을 모아 꾹꾹 다졌다. 하지만 이 귀해 보이는 핫핑크 꽃은 바깥바람 좀 쐬었다고 그새 시들어서 축 늘어져 있었다. 에밀리는 물을 주면 금세 되살아날 거라며 급하게 변명해 댔으나, 나는 다른 이유로 긴장해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설마 다시 심었다고 경험치 5 회수해 가진 않겠지?

“여기 칼랑코에 말고도 잡초가 아닌 것들을 마구 뽑아 놨구나!”

내 옆의 산더미 같은 잡초를 뒤지더니 레티샤가 외쳤다. 이번만큼은 에밀리도 어떻게 막아 줄 순 없었던지 할 말을 잃고 한숨만 푹 쉬었다.

음, 회수 알림은 뜨지 않는군.

개발자가 양심은 있네. 내 작고 소중한 경험치 5…….

“이것들 모두 네 일급에서 깔 테니 그리 알아!”

“레티샤 님! 잘못했어요! 그것만은…… 용서해 주세요!”

“힐다는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온종일 저리 멍한데 왜 네가 나서서 난리야?”

레티샤는 그렇게 말하면서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날 쏘아보았다. 오, 용서를 구하면 봐주는 건가?

“죄…….”

“됐다! 엎드려 절 받기지! 이 난장판이나 어서 수습하도록 해! 나머지도 전부!”

용서를 구하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해 놓고 막상 빌려니 휙 돌아가 버렸다. 에밀리도 이번만큼은 한숨 섞인 눈으로 날 바라봤지만, 나는 여전히 현실감 없이 여기 존재할 뿐이었다.

‘저것들’이 아무리 사람 얼굴을 하고 내게 말을 걸어도, 실제로는 인간이 아니니까. 저것들은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에 누가 그려 놓은 도트 쪼가리를 씌어 놓은 것뿐이었다. 뺨을 스치는 바람도, 따스한 햇볕도 죄다 소름 끼치게 실감 넘치긴 하지만, 결국 도트 쪼가리다. 그러니 어떤 인간적인 감정이 들 리가. 게임을 하면서 NPC에게 미안하거나, 죽는다고 슬퍼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래도 에밀리에게는 좀 미안하긴 했다.

차츰 흩어지는 하인들의 눈총을 받으며, 그리고 에밀리의 위로를 받으며 엉망이 된 잡초더미를 정리했다.

온종일 경험치 타령하며 뛰어다닌 결과, 나는 레벨 4까지는 턱걸이로 올릴 수 있었다. 그사이 하나 알아낸 게 있다면, 이 세상에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서 난이도에 따라 경험치로 매겨진다는 거다.

오늘은 노동으로 얻었지만, 조금 더 넓게 생각해 보면 누군가와 대화하고 동행하는 것도 모두 경험치로 환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랜덤 보상을 까는 것처럼 은근히 설렜다. 이게 진짜 게임이라면 더 신났을 텐데!

“힐다, 들어가서 푹 쉬어.”

착한 에밀리는 오늘 내가 크게 상심했을 거로 생각했는지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이런 친절함마저 저 캐릭터에 모두 프로그래밍 돼 있는 거겠지? 그녀가 날 보는 눈빛, 호의도 전부.

“에밀리.”

“응?”

에밀리가 돌아서 나를 보았다. 마음이 앞서는 바람에 나는 할 말을 뒤늦게 만들어 냈다.

“저, 오늘 미안.”

“…….”

“여러모로 폐만 끼친 것 같아서.”

NPC한테 사과라니. 왠지 복잡한 기분이 들어 이마를 긁었다. 가만히 날 바라보던 에밀리가 상냥하게 웃었다.

“괜찮아. 우리 사이에 뭘. 푹 자고 내일 보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서 다시 복도를 걸어갔다. NPC지만 정말 착하긴 했다.

나는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마주쳤던 방. 넓게 쳐줘도 7평 정도인 방 안에 작은 옷장과 서랍장, 한 사람이 누울 만한 침대, 책상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차 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알림이 떴다.

「일급이 들어왔습니다.」

「골드 +30G」

오, 일급도 있었어? 위를 슬쩍 보니 금색 동전 옆에 ‘330G’라고 숫자가 작게 떠 있었다. 그 전까지 전 재산은 300골드였단 뜻인가…….

그때였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글자가 허공에서 반짝거렸다.

「정원을 망쳐서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골드 -250G」

하얗게 떠 있던 ‘330G’가 ‘80G’로 줄어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상태창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 몹쓸 현실감. 쥐꼬리만 한 월급이 들어왔다 카드값으로 홀라당 다 나가 버리던 내 통장과 똑같았다.

칼랑코에 그거 몇 개 뽑았다고 전 재산이 홀랑 날아가 버리다니. 그깟 꽃송이 몇 개가 오늘 온종일 일한 노동 값보다 비싸단 뜻이었다.

설마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야 해? 어딘지 모를 곳에 갇혀 일하고, 제대로 된 보수도 못 받고, 심지어 핸드폰도 없는 이 세상에!

난이도 설정을 어떻게 해 둔 건지 레벨은 잘 올라가지도 않고, 쓸 수 있는 스킬은 아무것도 없다. 만렙이 되면 나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오늘 하루 올려 본 속도라면 쉰 살쯤에나 만렙이 가능할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만렙이면 나갈 수 있다는 것도 불확실하잖아?

“진짜, 나 좀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눈이 반쯤 돌아간 채로 메뉴 여기저기를 눌러 보았지만, 로그아웃과 비슷해 보이는 건 ‘Exit’ 하나뿐이었다.

“제발! 나 돌아가고 싶다고!”

누를 때마다 사용할 수 없는 메뉴라는 경고창이 떴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눌렀다. 어떤 게임에서는 이렇게 비활성화된 버튼을 수십, 수백 번 누르다 보면 활성화되는 버그가 있기도 했으니까. 모든 게임에는 버그가 있기 마련이고 그걸 발견해 이용하는 건 어디까지나 유저 역량이었다.

“제발 좀 눌리라고, 제발.”

거의 울 것처럼 중얼거리며 Exit를 눌러 봤으나 여전히 경고창만 뜬다. 뭐야, 진짜 작동 안 하는 거야? 그럼 나 집엔 어떻게 가라고?

실의에 빠진 채 Exit를 연타하고 있는데 그 순간 손이 삐끗했다. Exit 대신 New Game을 눌렀다는 건, 이전과는 다르게 메뉴가 환하게 눌리고 나서야 알았다. 글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어두운 방 안을 환하게 감쌌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서, 설마.

“어, 안, 안 돼…….”

내 가냘픈 중얼거림은 말 그대로 가냘프게 사라져 버렸다. 눈 안쪽이 아프도록 환했던 빛이 사라지자 가장 먼저 들리는 건 아침 새소리였다. 짹, 짹짹.

나는 입을 헤 벌리고 시선을 돌렸다. 어두웠던 방이 화창한 아침 햇살로 가득했다. 게임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봤던 광경 그대로다. 슬쩍 아래로 눈을 내려 보자 잡초를 제거하느라 더러워졌던 옷도 새것처럼 깨끗하고 빳빳해져 있었다.

아니, 아닐 거야. 설마, 설마…….

나는 로또 마지막 번호를 확인하듯이 경험치 상태바를 보았고 그대로 주저앉았고 말았다.

“안 돼, 안 돼. 내…… 내 경험치.”

개고생해서 얻은 내 레벨 4짜리 경험치가 다 사라지고…… 하찮은 칭호 ‘하찮은 일꾼’도 없는 레벨 1로 변해 있었다. 허탈하고 어처구니없어 입만 벙긋거리던 나는 레티샤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얘, 힐다! 힐다! 어서 일어나지 못해!”

오늘 아침으로 돌아간 하루가 다시 시작하는 소리였다. 맙소사.

“힐다! 또 늦잠 자는 거야! 어서 아드리안 도련님께 약을 가져다드려야지!”

“이, 일어났어요.”

쩌렁쩌렁한 고함에 반사적으로 외쳤다. 계단을 올라오던 성난 발걸음이 도로 내려갔다. 신기루가 되어 버린 이전의 아침과 달리 레티샤는 내 방문을 열어젖히고 화내지 않았다. 그럼 징글맞은 잡초 뽑기 또한 안 해도 된다는 뜻일까.

나는 다소 지친 눈으로 상태바를 바라보았다. 사물은 물론이고 인체의 시간까지 오늘 아침으로 돌아가서인지 옷도 깨끗하고 육체적 피로는 하나도 없었지만, 정신적 피로는 풀리지 않은 채 여전했다.

잠 한숨 자지 못하고 하루를 더 보내야 하다니……. 그래도 딱 하나 좋은 게 있다면 칼랑코에 몇 개 때문에 날아갔던 전 재산이 돌아왔다는 거였다.

전 재산 300골드……. 눈물 나는 액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있는 게 낫겠지.

“힐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다시 레티샤가 올라올 것 같아서 나는 헐레벌떡 부엌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래도 게임을 조금은 하다 돌아온 덕에 저택 구조는 익숙했다. 널따랗고 깨끗한 부엌에서 백작가 전속 요리사들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고, 레티샤는…….

“힐다!”

습관처럼 날 닦달하고 있었다. 저러다 득음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죄송한 척 반성하는 척 쭈뼛쭈뼛 다가서자 그녀는 구제 불능을 보는 눈으로 한숨을 쉬었다.

달그락. 약그릇을 비롯해 여러 그릇이 올려진 쟁반을 그녀가 떠밀었다.

“자, 도련님께 갖다드리렴.”

“네?”

“뭐 그리 화들짝 놀라? 항상 네가 하는 거였잖니.”

나는 왜 하필 힐다일까. 악마가 깃든 살인마에게 매일 약을 가져다주는 힐다……. 게임 속에서 아드리안은 돌아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간간이 발작도 나고 힘도 약하다지만, 악마가 깃들어 있는 만큼 방심은 금물이었다. 매일 규칙적으로 약을 가져다주는 하인처럼 죽이기 쉬운 존재가 또 있을까?

“에그, 우리 아드리안 도련님……. 불쌍하기도 하지. 밖에 잘 나다니지도 못하시고,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병이라니. 요즘 아무리 밖이 흉흉하대도 또래들처럼 자유롭지 못한 건 참 안되셨어.”

레티샤가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밖이 흉흉해요?”

“소식 못 들었니? 이 앞에서 칼을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더구나. 실제로 누군가 찔렸다는 소문도 있어. 아니, 근데 너 아직도 아드리안 도련님께 안 간 거야? 어서 가지 못해!”

“아, 아야야. 다 챙겼어요. 가요, 가!”

이번에 안 가고 뭉개고 있으면 귀라도 잡을 기세라, 나는 얼른 쟁반을 들고 도망치듯 부엌을 나왔다. 떠넘길 사람도 없고, 어쨌든 갖다주긴 갖다줘야겠지. 약을 어딘가 내버리기라도 하면 레티샤가 정말 날 목 졸라 죽일지도 몰라.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긴 복도를 지나 널따랗고 화려한 홀에 이르렀다. 아드리안의 방은 4층, 남쪽의 가장 볕이 잘 들어오고 정원도 잘 보이는 큰 방이었다. 긴장된 숨을 내리쉬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갔다. 아드리안에게 약을 가져다주는 일을 어떻게든 회피할 수 없을까 머리를 굴리면서.

“후…….”

느린 걸음이었지만, 4층까지 순식간에 다다른 것 같다. 아드리안의 방. 커다란 문 앞에 멈춰서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안에 누가 있는지 알기 때문인지 두드려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악마가 지내는 방 아니랄까 봐, 볕이 가장 잘 드는 방향인데도 음침하고 스산했다. 사방이 새하얀 벽인데도 문틈 사이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 같았다.

무, 무서워.

쟁반을 든 손이 점차 떨리며 그릇이 딱딱 부딪쳤다. 내가 그날 술김에 하다 자서 그렇지, 평소엔 절대 하지 않는 장르가 공포게임이다. 거기다 잔인하고 마이너한 감성, 하지만 완벽한 작품성으로 유명한 A컴즈 작품이라면 더더욱 기피 대상이었다.

공포게임 마니아도 실제로 공포 테마 방탈출을 하면 오줌 지리는 판에, 공포물이라곤 못 보는 제가 공포게임 안에 있다고요?

난 못 해. 절대 못 해.

게임 속 장면을 단 하나라도 눈앞에서 보게 된다면 심장이 멎어 버릴 거다.

“도련님.”

속삭이듯 그를 불렀다. 누군가 옆에 있어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라 안에서 대답할 리가 없었다.

“도련님, 혹시 안 계세요?”

숨소리에 가까운 목소리가 두 번이라고 들릴 리 없었다.

“도련님께서 산책하러 가셨나 보지? 흐음, 그럼 약은 어쩔 수 없이…… 이 앞에 두고 가야겠네.”

좋아. 아무 대답 없었지? 나는 계시냐고 분명 여쭤봤어. 한낱 하인이 주인의 허락도 없이 빈방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나중에 레티샤가 추궁해도 할 말이 있는 거라고.

보는 눈이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한 나는, 쟁반을 문 앞에 살며시 내려놓고 그대로 줄행랑쳤다. 아드리안의 약을 부엌부터 문 앞까지 옮겨서 얻은 경험치 1은 덤이었다.

그렇게 사나흘이 지나갔다. 매일 기상 시각을 철저하게 지키니 잡초 뽑는 벌을 받지 않아도 되었고, 아침마다 아드리안의 방문 앞에 쟁반만 놓고 오니 그와 직접 마주치는 일이 없어서 좋았다. 우리 하인들이 조식 후 홀에 모여 간단한 조례―레티샤의 잔소리―를 치르는 것처럼 아드리안의 하루 또한 매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규칙적이라 적당히 그를 피해 다닐 수 있었다.

쟁반을 문 앞에 놓고 가는 것도 딱히 거슬리는 일이 아니었던지 잠잠했다. 만약 도련님의 심기를 언짢게 했다면 일찌감치 레티샤가 뒤집어엎었을 테니까. 이 저택에서 누가 죽어 나간다든지, 아드리안이 악마적 힘을 되찾아 간다든지 하는 끔찍한 일도 아직 없었다.

직접 해 봤듯이 이 게임 난도가 헬이라,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고 살인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반대로 내게는 무척 잘된 일이지. 힐다 캐릭터의 임무는 그대로 수행하면서, 현실로 돌아갈 방법을 조용히 알아볼 수 있으니까.

비록 며칠간 실마리조차 찾질 못했지만…….

나는 잠깐 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눈앞엔 어김없이 경험치 알림이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양파 까기로 경험치 1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느려서야 어느 세월에 스킬을 얻는담. 나는 다소 우울한 눈으로 빈약한 경험치 상태바를 보았다.

잡초 뽑기로 하루 만에 레벨 4까지 올렸었는데, 초기화된 다음엔 의욕을 잃은 탓인지 성장이 더뎠다. 특별한 일 없이 반복되는 하인의 일상으로는 경험치를 많이 모을 수 없었고, 칭찬받는 기분으로 일부러 행동하는 것도 금방 질렸다. 경험치는 원래 메인 퀘스트를 뚫을 때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는데, 이 게임은 퀘스트창도 뭐도 보이질 않으니.

스킬을 하나라도 얻어 놔야 할 텐데. 그래야 스킬이 뭔지도 알고, 현실로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인지도 알 텐데. 지금은 비교할 수 없이 쪼렙이라 스킬창을 봐도 어떤 스킬들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현실이 이 모양이니 아무 일 없이 평화롭게 일상이 굴러가도 불안하지.

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다가 슬쩍 옆을 보았다. 오늘 굳이 일찍 일어나, 안 해도 될 양파 까기를 해 가면서 부엌에 들어앉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아…….”

바로 카타리나.

에밀리의 친언니인 그녀는 아침에 양파 까는 일을 무척 힘겨워한다고 전해 들었다. 저번에 양파 까는 일을 다른 일과 바꿔 보려고 다른 하인들에게 얘기하고 다녔다던데, 결국 바꿀 사람을 구하지 못해 돌아왔다고 했다.

“언니, 양파 까는 거 정말 힘들어 보인다. 이리 줘.”

“으, 으응. 고마워…….”

“매일 이렇게 양파 까는 거 힘들지 않아? 걱정돼서 물어보는 거야.”

콧물을 훌쩍거리는 그녀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응.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너무 힘들고…….”

“그러게. 아침마다 눈물범벅으로 나오는 언니 때문에 안쓰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음,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치?”

“응. 그럼 정말 너무 좋을 텐데, 없으니 문제야.”

힘없이 대답하며 그녀가 새로운 양파를 집어 들었다. 새빨개진 코를 훌쩍거리면서.

“저, 그럼 언니. 내가 대신해도 될까?”

“으응? 네가? 전에는 하기 싫다고 딱 잘라 거절했었잖아.”

“그으…… 게…… 생각해 보니 내 적성에 맞아서. 아침만 되면 막 양파를 까고 싶어지는 거 있지? 오늘도 봐. 언니보다 먼저 와서 양파 까고 있었잖아. 그래서 말인데 언니, 내 일이랑 바꾸는 게 어때?”

“무슨 일?”

“아드리안 도련님께 약을 가져다드리는 일 말이야. 그거랑 바꾸는 게 어때?”

“정말? 그래도 되겠어?”

그녀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되물었다. 하긴 나 같아도 이상하게 여겼을 거다. 매일 아침 양파 수십 개를 까는 일보다 아드리안에게 약 갖다주는 일이 훨씬 수월하니까. 아드리안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럴 것이다.

“응. 언니가 힘들어하는 모습 보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나만 편한 일 하나 싶어서 밤잠도 못 이뤘다니까. 나는 아침에 잘 일어나고 양파도 손쉽게 까니까 마음 편히 넘겨도 돼!”

됐다! 이제 아침마다 마음 졸이지 않아도 돼!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은 채, 희망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카타리나는 흔쾌히 수락할 듯 입을 열었다가, 돌연 눈을 굴리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아냐, 그건 안 돼.”

“왜!”

나도 모르게 양파까지 집어 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카타리나가 깜짝 놀라 올려다보았으나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 왜 안 되는 건데! 양파 까는 거 힘들잖아? 그 힘든 일을 내가 해 주겠다는데 왜……!”

“힐다. 아드리안 도련님께서 너한테 직접 시키신 일인데, 어떻게 우리끼리 업무를 맞바꾸겠어?”

“어, 어?”

“그래, 역시 안 돼. 아드리안 도련님께서 크게 실망하실 거야.”

카타리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양파를 던져 놓고 새로운 양파를 집어 들었다.

그사이 나는 새로 습득한 정보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힐다한테 직접 시킨 일이라고? 어째서? 둘이 친했나? 게임에서 그런 설명은 못 봤는데.

“마침 약 가져다드릴 시간이네. 빨리 가져다드려. 더 늦으면 찾으시겠다.”

코를 훔치며 카타리나가 눈짓했다. 나는 망연하게 가만히 서 있다가, 언제나 그렇듯 똑같은 쟁반에 아침 요깃거리와 약을 담고 다소 우울하게 부엌을 나섰다.

조졌다. 아드리안이 직접 나를 지명한 거라면, 본인이 철회하지 않는 이상 이 일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내가 안 하겠다고 직접 말할 수도 없고.

“이러다 마주치면 죽는 건가.”

침울한 기분으로 터덜터덜 계단을 올랐다. 4층에 이르러 굳게 닫힌 문을 보자 또 조금 마음이 풀어지는 것도 같았다. 쟁반을 문 앞에 두고 돌아가기만 하면 아드리안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사나흘 그렇게 했는데도 문제없었으니 앞으로도 별일 없을 거다.

사람이 꼭 죽으란 법은 없지.

“도련님, 계세요?”

며칠간 그랬듯 나는 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속삭였다.

“오늘도 안 계시죠? 아니면 주무시고 계신 거죠? 약이랑 식사는 문 앞에 두고 물러가요.”

안은 대답 없이 조용했다. 창밖에 부는 바람 소리가 내 목소리보다 컸으니 들릴 리가 없지.

그래,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자. 매일 이렇게 조용히 살아가면 되는 거야. 나는 긴장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억누르면서 허리를 굽혔다.

탁. 쟁반이 바닥에 놓이는, 아주 작은 소리가 났을 때였다. 벌컥 소리와 함께 앞이 훤해졌다.

“힐다.”

“…….”

“나 불렀어?”

귀에 녹아들듯 부드러운 미성이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아드리안과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입이 헤 벌어지고 뒤늦게 가슴이 내려앉았다. 눈앞이 번쩍거리며 게임 인트로에서 마주했던 악마 아드리안이 그 위에 덧씌워졌다.

“으아…… 으아앗!”

와장창! 쨍그랑!

너무 놀란 나머지 주저앉으면서 쟁반을 엎어 버리고 말았다. 쟁반 위에 있던 유리그릇이 산산조각 나 대리석 바닥 위에 흩어지고, 죽은 걸쭉하게 흩어졌다. 알약 여섯 개는 바닥에 흩어져 구르고, 그 위로 음료가 쏟아져서 난장판이었다.

“죄, 죄송해요, 도련님. 제, 제가 너무 놀라서.”

“힐다. 괜찮은 거야?”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나는 서둘러 몸을 가누고는 흩어진 유리 조각을 쟁반에 도로 담기 시작했다.

아드리안…… 진짜 아드리안이었다. 세상에, 내가 온 걸 어떻게 알고…….

이빨이 딱딱 부딪힐 정도로 턱이 떨렸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탓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위에서 그는 대체 무슨 눈빛으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을까. 그에게는 나도 한낱 먹잇감으로 보일 뿐이겠지?

불행하게도 지금 복도에는 보는 눈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악마의 힘을 되찾는 데 필요한 건 살인. 살인의 조건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행하는 것. 다시 말해, 보는 눈이 없고 하나쯤 사라져도 아무 문제 없는 하인과 함께 있는 지금이 살인하기 좋은 순간이었다.

나 여기서 죽는 거야? 진짜? 현실로 돌아갈 실마리도 찾지 못하고 이렇게?

너무나 압도적인 공포와 두려움에 다리를 잡고 매달려 빌고 싶어졌다. 다 됐고 나 죽이지 마! 난 조용히 사라져 줄게. 난 이 게임 캐릭터도 아니고, 그냥 A컴즈 게임을 샀다가 갇혀 버린 불쌍한 유저일 뿐이라고!

“힐다, 진정해.”

“죄송, 죄송해요. 죄송…….”

제발 나 좀 살려 주라.

“힐다, 괜찮아.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지?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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