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할 것 없어요...남편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그 어떤 집착 같은 것은 없으니까. 더군다나 이 나이에 그런 감정들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나이 들어도 여자는 여자고, 남자는 남자더군요...두 분은 안 그런가요?”
“후우~ 애초에 남편과 나는 남자와 여자로 만난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네요...아무튼 남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요 태복씨...호호...!”
주인여자의 확신에 찬 말이었지만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내 앞에서 알몸을 하고 있는 이 여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어보였다.
“하이고!~~ 다리가 후들거리네요....후우!~~”
바닥에 떨어진 팬티를 집어 들고 입으려던 주인여자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 모습은 섹시했지만 몸 개그가 따로 없을 정도로 코믹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를 잡아 주었고, 주인여자는 내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팬티를 입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태복씨...그나저나 이 녀석은 언제까지 이렇게 있는 거죠?”
내 자지는 여전히 발기한 채로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잘 여문 원숙미가 충만한 여자가 알몸으로 내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하고 싶어요?...”
“몸은 솔직하죠...제 몸이 인영씨를 또 원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몸은 솔직하군요, 하하...!...음...하지만 전 지금 무리에요...아직도 거기가 화끈거리고 다리에 힘도 없어요. 미안해요, 태복씨...”
“아닙니다. 참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가 침입해 들어온 작은 방으로 들어가 옷을 찾아들고 입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제 뭐하죠?”
내 말에 주인여자가 웃었다. 나도 그랬고 주인여자도 섹스 이후에 대한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섹스는 남녀가 즐길 수 있는 최상의 놀이었지만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섹스만으로 지속되는 남, 녀 관계는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머지 정서적인 관계를 채워주지 못한다면 그 관계는 유지되기 힘들 것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정서적인 관계만으로도 남녀관계가 지속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섹스는 어쩌면 남녀 관계에서 필요 없는 부분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 때가 바로 그런 일이었다.
“음...오늘 태복씨 일 없죠?”
“네...오늘까지 쉽니다.”
“그럼, 저랑 어디 좀 가요.”
어디를 가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주인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내가 작은 방에서 옷을 다 입고 거실로 나오자 주인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아보니 안방에 있었다. 팬티와 브래지어만을 한 채로 화장대에 앉아서 화장을 고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주인여자가 다르게 보였다.
“어때요? 저 괜찮아 보여요?”
“아름다워요...”
내 말에 환한 미소를 짓는 주인여자는 어린애처럼 보였다. 그녀는 들뜬 얼굴로 일어나 옷장에서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린 애처럼 들떠 있었다. 주인여자는 너무나 들떠있었다. 나로 인해 비로소 여자가 되었기 때문인가? 하지만 단순하게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여자이기 이전에 그녀는 사람이었다. 이제 정말로 주인여자는 사람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들뜰 수밖에 없었다. 싱그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던 지난 시간에 그녀는 분명 죽어 있었던 것이었다. 상기된 얼굴로 이 옷 저 옷을 고르는 주인여자를 보자 나도 기분이 업 되는 것을 느꼈다.
이런 식의 감정은 상인과의 관계에서도 있었지만 조금 다른 것이었다. 아니 다르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이것저것 분석하는 것도 귀찮았고, 병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녀 간에 분석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저 사랑하면 그뿐이었다. 지금 주인여자는 그걸 하고 있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은 채로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었다. 확실히 나는 이기적인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항상, 인간의 감정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리재고 저리재고를 반복했다. 그런 삶의 방식은 내 삶을 조금은 안전하게 만들었지만 재미는 없었다.
“태복씨 저 어때요?”
옷을 다 입은 주인여자가 내 앞에서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며 물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나는 말 대신 그녀를 안고 키스를 했다. 열정적으로 그녀의 입을 빨아댔고, 혀를 휘감고 움직였다. 한참동안 키스를 하다가 떨어져 주인여자를 바라보자 그녀는 눈을 감은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눈을 뜨면서 가볍게 내 어깨를 때렸다.
“립스틱을 다 먹어 버렸잖아요...!...”
주인여자가 자신의 차에 나를 태우고 달려간 곳은 문화 회관이었다. 그녀의 목적은‘염쟁이 유씨’라는 연극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연극은 인영과 보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그녀에게 차이면서 아직까지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 지역에서도 공연을 하고 있었다니 내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주인여자도 즉흥적인 면이 있는 것 같았다. 나와 그런 일이 생길 것이고 그 후에 연극을 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진 않았을 것이었다. 그냥 머리에 떠오른 것을 나와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주인여자가 더욱 귀엽게 느껴졌다. 나이 50이 넘은 여자라고는 믿겨지지 않았다. 나도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인영과 상인의 일을 겪으면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차에서 내려 회관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경쾌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맑은 표정이 가득했고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은 전혀 없어 보였다.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나이든 여자가 존재하다니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금방 소문이 돌 것이었는데 주인여자는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예상대로 연극은 너무나 재밌었다. 1인 15역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해내는 유순웅의 연기는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연극 초반에 유순웅은 한 대학생 남자를 시작으로 점점 관객들을 연극 속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재미있어 했지만 난 불안했다.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배우와 시선을 마주쳤지만 내 앞사람이 선택되어 한숨을 돌렸다. 이제는 우리 줄에서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주인여자만 아니었다면 나는 네 번째 줄에 앉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인데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되어버렸다. 내가 방심했는지 공교롭게도 나와 유순웅의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를 지목했고 주인여자와 나는 부부가 되어 연극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유순웅이 내게 지정해준 배역은 큰 아들이었고, 주인여자는 큰 며느리였다. 우리가 불려나온 뒤 다른 커플도 불려나와 각자 내 남동생과 여동생 역을 맡았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끔찍했지만 재밌어 하는 주인여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모든 것을 했다. 아무래도 유순웅은 연극을 끌어가면서 처음부터 나와 주인여자를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의 유연한 진행에 의해 나는 더욱 망가지기 시작했고, 관객들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고 주인여자는 재밌어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어느 순간부터는 완벽하게 즐기고 말았다.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너무 재밌었어요. 태복씨도 잘 하던데요? 하하하!~”
연극이 끝이 나 밖으로 나와 차 쪽으로 걸어가면서 주인여자가 행복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고 켰다.
“여보?...”
주인여자의 엉뚱한 말에 약간 놀라 내가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깔깔대고 크게 웃었다. 이 여자 그동안 내가 알던 여자가 아니었다. 어쨌든 나와 주인여자는 연극을 통해 부부가 된 사이였다. 참 엉뚱하면서도 재밌는 일이었다. 핸드폰이 켜지자 문자가 와 있었다. 스팸인가? 아무생각 없이 문자를 확인한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문자의 내용은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소식에 한기가 올라왔고 내 몸은 심하게 떨렸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겨우 통화버튼을 눌렀다. 주인여자는 내 반응에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볼 뿐 아마말도 하지 않았다.
“태복입니다 고모...”
[넌 뭐하는 놈인데 연락도 없고, 연락도 안 돼!]
고모는 날 싫어했다. 내 출생성분이 좋지 않아서도 그랬고, 동갑내기 고모의 아들보다 내가 뛰어나서 싫어했다. 성격이 단순해서 항상, 말이 먼저 나오는 타입인 고모로 인해 난 내 친부의 일을 알 수 있었다. 고모는 날 싫어했지만 항상, 어린 나를 잡고 별 얘기를 다했었다. 자신의 남편인 고모부 욕은 기본이었고, 아버지에 대한 불만도 많았다. 싫어하는 나를 데리고 그런 넋두리를 해대는 고모가 난 무척이나 불편했었다. 그래서 독립을 한 뒤 당연히 연락 따위는 하지 않고 살았지만 내가 이곳에 내려온 뒤로도 고모는 내게 전화해서 넋두리를 했었다.
[ 하이구!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널 두고 하는 말 아니냐? 어?...넌 아버지가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냐, 이 배은망덕한 놈아!]
“죄송합니다, 고모...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십년이 넘게 보지 않은 사이였다. 나는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한 번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었는데 막상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태복씨?...”
“... ...”
주인여자는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보다가 내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하고는 다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나를 보기만 할 뿐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집으로 가죠...”
시동을 켠 주인여자가 원룸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집에 도착해 내 차를 갖고 아버지에게로 갈 작정이었다. 온통 그 생각뿐이었지만 공포감이 엄습해 왔고 내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주인여자는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면서 오른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공포감이 잦아들었다.
원룸에 도착한 나는 집으로 들어가 검은 정장으로 갈아입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내 차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주인여자가 막아섰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주인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어딘가로 달려갔다. 무슨 일인가 생각해 보니 차의 방향은 고속도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태복씨가 운전하는 것은 무리에요.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아, 아닙니다. 제가 운전할 수 있어요...전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그렇게 떨고 있으면서!...내 말 들어요, 태복씨. 전 태복씨 아내잖아요?...”
그녀의 말에 난 포기하고 주인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주인여자의 말대로 난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를 보기는 싫었다. 아직은 ...아직은 아버지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10년이 지나서야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인지 몰랐지만 억울했다.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듣고 싶은 말도 많았다. 그런데 이젠 아버지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미칠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차가 너무나 막혀서 5시간을 넘게 달려서야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새벽 시간이어서 그런지 손님들은 뜸했다. 새엄마와는 딱 한번 본적이 있었지만 나도 그렇고 새엄마도 그렇고 서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많이 울어서 그런지 눈이 부어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이제 8살이 된 아버지의 친아들이 상주 복을 입고 서있었다. 녀석은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영특해 보였고 죽음에 대한 것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의젓하게 상주노릇을 하고 있었다.
나와 주인여자는 함께 올라가 아버지에게 절을 두 번했고, 돌아서서 상주와도 절을 했다.
“죄송합니다...이제야 왔습니다...”
“아, 아니다...왔으니 된 거야...”
새엄마는 내 뒤에 있는 주인여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와 주인여자는 빈소를 나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차려주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사실, 배가 무척이나 고팠다. 어제 점심으로 선짓국을 먹은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주인여자는 나를 바라보다가 소주를 따서 한잔을 건네주었다. 배가 고팠지만 나는 그녀가 주는 소주를 한 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술이 배속으로 들어갔는지 속이 찌릿했다. 나는 다시 소주병을 들어 한 잔을 더 따르며 연속해서 세잔을 마셨다. 주인여자는 그런 내게 뜨거운 국밥을 건넸고 나는 그것도 게걸스럽게 입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어느 새 국밥 한 그릇이 비워졌고 소주 세병이 내 배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하지만 전혀 취하지가 않았다.
아버지의 빈소를 보고 또 어린 상주를 보면서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에겐 뭐였을까? 내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나? 지금 상황처럼 난 그저 아버지에겐 손님일 뿐이었다. 손님으로 왔다가 손님으로 갈 뿐이었다. 아버지와는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 새엄마는 내가 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연락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주변사람들 모두를 적으로 간주하는 고모는 그것이 못 마땅해서 내게 연락한 모양이었다. 뭐가 뭔지 도무지 혼란스럽고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갈까요? ...”
주인여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일어나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훅 하고 뜨거운 열기가 내 온몸을 감싸고 들어왔고, 그래서 그런지 약간 취기가 올라왔다.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샤프한 남자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섰다. 주인여자가 남자를 보면서 당황했고, 그 남자는 내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엄마의 비서관이었다.
“인영씨 차에서 기다리세요...곧 갈 겁니다...오래 걸리지 않아요...”
내 말에 주인여자는 자신의 차 쪽으로 걸어갔고, 난 비서관을 따라서 엄마의 차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엄마 옆에 앉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운 기분이 들었다. 분명 빵빵한 에어컨 때문만은 아니었다.
“잘 지내셨어요...?”
“...바보 같은 놈!...”
항상, 느끼는 거지만 엄마는 이런 식으로 사람의 숨통을 조르는데 일각연이 있었다. 아무리 내가 친 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10년 만에 만나서 꺼낸 첫 마디가 ‘바보 같은 놈’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는 너무했다.
“...죄송합니다...”
“...그 소릴 듣자는 게 아니잖아...!...네가 상주가 되어야지, 왜 그 어린 놈이 상주 노릇을 하고 있는 거냐!”
“...아버지 친 아들입니다...당연한 거잖아요...”
“너도 아들이야! 아직도 네 아버지 호적엔 네가 큰 아들로 되어 있다!...”
아버지는 역시 아버지였다. 천성이 여린 남자가 재수 없게도 나와 연관되면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남자였다. 어떻게 그런 남자가 엄마와 결혼할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였다.
“... ...”
“...넌 어떻게 된 애가 자기 밥 그릇 하나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거냐? 저 여우같은 년이 네게 왜 연락도 하지 않은 것인지 이유를 모르겠어?”
“... ...”
유산 때문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까짓 것이 뭐가 대수인가?
“아버지가 부자여서 좋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엄마도 마찬가지구요...제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을 뿐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니!~~ 그 놈의 미술학원 때려치우라니까!”
“...그럴 겁니다...곧 때려 칠 겁니다...하지만 엄마가 바라는 대로 살 지는 않을 겁니다...”
“후우!~ 그만하자...!...너란 애는 정말이지...그게 10년 만에 만난 엄마에게 할 말이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엄마가 하고 있었다. 10년 만에 만나서 한 첫마디가 ‘바보 같은 놈’이었다. 엄마와 만나서 대화를 하다보면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오히려 엄마는 나 때문에 혼란스럽다고 해서 난 답답했다. 원래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나와 엄마가 그런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저 여잔 누구냐?”
“...제 마누라요...”
“뭐어!~ 너 정말!~~~”
“걱정 마세요, 엄마. 저 인생 막사는 거 아니니까요...하지만 정말로 전... 정치를 할 생각이 없어요. 미안해요.”
“니가 원하기만 하면 이 나라 전체를 움켜쥘 수 있는데도?...”
“...엄마의 마음도 ...아버지의 마음도 얻지 못한 놈입니다. 그런 놈이 무슨 나라를 움켜쥐겠어요?... 아시잖아요?...”
내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그래...아직은 네가 어려서 잘 모르겠지...후우!~ 하지만 이 엄마는 기다린다...22년을 기다렸는데 앞으로 몇 년을 더 못 기다리겠니...”
“... ...”
엄마는 아직도 내게 집착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사이에서도 아이가 없었고, 재혼을 해서도 아이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 분명 엄마는 내 성정으로는 정치판에서 견디지 못할 것을 잘 알면서도 끊임없이 내게 정치인이 되라고 요구했다. 도대체 엄마는 나의 어떤 면을 보고 저런 요구를 하는 것일까?
나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태복아...이 엄마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라...”
인사를 한 뒤 나는 문을 닫고 주인여자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엄마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엄마는 지금 여당에서 핵심 인물이었고, 이젠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되어 같은 당의 남성 후보들과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엄마가 뭐가 아쉬워서 내게 도움을 청하는 것일까?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꿈꾸고 있는 엄마가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차에 오르니 주인여자는 많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나도 이렇게 머리가 복잡한데 오죽하겠나 싶었다.
“...이렇게 오래 집을 비워도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남편하고는 통화가 됐으니까...태복씨야 말로 괜찮아요?”
“... ...복잡합니다...아버지의 죽음을 온전히 슬퍼할 수도 없어서 죄송하고...그러네요...”
내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주인여자는 지금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제 어떡하실 거죠?”
나도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떠나시는 아버지를 배웅해 드려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새엄마를 위해서 이곳을 떠나야 하는 것인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게 옳은 것인가?
“배웅은 해드려야죠...어떤 식으로든...안 그러면 사는 내내 죄스럽더군요...”
주인여자도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사연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나는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를 배웅해 드려야만 했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이 밀려와 답답했지만 아버지의 친 아들이 나를 대신했을 것이다. 고모나 엄마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만 아버지에겐 그것이 편했을 것이었다. 나를 보셨다면 그 여린 분이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
나는 고민을 하다가 천천히 네비게이션에 장소를 입력했고 주인여자는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력이 완료되고 청량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리자 주인여자가 내게 묻지도 않고 차를 몰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새벽길이라 길을 막히지 않아 좋았다. 이곳에 올라오면서 길이 너무 막혀서 거의 미치고 팔짝 뛸 뻔 했다. 주인여자는 정적이 불편했는지 라디오를 켰고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 시간에도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만큼의 고민들도 많았다.
장례식장에서 1시간 반 정도가 걸리는 곳으로 그곳엔 아버지의 어머니인 할머니가 묻혀있는 곳이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아버지는 화장을 해달라고 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바다에 뿌려 달라고 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과연 새엄마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버지의 형제들도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새엄마가 더욱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산소 근처에 있는 별장에서 밤을 보낸 뒤 아버지를 보내드릴 것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도...도련님!...”
최씨 아저씨가 별장 주변을 정리하다가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내 앞으로 뛰어와 인사를 했다.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면서도 함부로 하지 않고 항상, 이렇게 내게 깍듯하게 구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려선 듬직했던 그런 분이 이제는 살도 많이 빠져있었고 이마와 입 주위엔 깊게 주름이 잡혀있었다.
“아저씨...잘 지내셨죠?...연락도 못 드리고 죄송했습니다...”
“아이구!~ 별 소릴 다하세요!...혹시 몰라서 정리를 했는데...아무래도 도련님이 오시려고 그랬나 봐요 하하하!~~”
“이쪽으로 온다는 연락이 없었나요?...”
최씨 아저씨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뒤에 서있는 주인여자를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주인여자도 인사를 했다.
“...잠깐만요 아저씨...안 에 들어갔다가 나올게요...”
나는 인영을 별장 안으로 안내를 하고 함께 들어갔다. 별장 안은 최씨 아저씨의 손길이 닿아서 그런지 빈 집 같지가 않았다. 내 기억으로 아버지는 최씨 아저씨에게 형이라고 불렀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아버지 집 안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 방을 쓰시면 되고요...욕실은 저쪽입니다. 욕실 안에 필요한 물건들은 다 있을 거고... 그리고 냉장고는 이쪽에 있어요...”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태복씨...내 집처럼 지낼 수 있으니까요.”
주인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로 자기 집처럼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낮에 그렇게 서로의 몸을 보고 살을 섞었으면서도 나는 기분이 이상했는데 주인여자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신경쓸까봐 그런 것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밖으로 다시 나오니 최씨 아저씨는 팔각정 앞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 번도 최씨 아저씨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는데 확실히 세월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었다.
이제야 취기가 올라와 걷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아저씨 옆으로 다가가 앉자 그가 내게 담배를 권했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담배를 받아들고 불을 붙여 물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길게 연기를 빨아들인 뒤 그것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 내일 모두들 이곳으로 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도련님...”
내 예상이 맞았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죽어서도 자신이 원하던 자유를 얻지 못했다. 손이 귀한 집안에 유일한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뜻에 의해 강요된 삶을 살아야만 했던 불행한 남자...아버지에게 있어서 10년간의 재혼 생활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할머니에 의해 재혼을 했지만 대신 당신이 하고 싶었던 카센타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집 안의 대를 끊은 죄를 짓지 않아도 되었다. 근 60년의 삶에서 아버지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자동차를 몰고, 정비하는 일뿐이었다. 아니...나와는 다르게 당신의 혈육을 키우는 재미도 느끼셨을 것이었다. 죄송했지만 내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고모들이랑 새엄마랑 문제가 많죠?”
“...후우!~ 항상 그랬으니까요...이젠 저도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검사님도 떠나셨고...도련님도 이제 봤으니까요...”
아버지의 직업은 검사에서 변호사로 그리고 카센터 사장으로 변했지만 최씨 아저씨는 항상 검사님이라고 불렀다. 40년이 넘게 있던 곳이었다. 최씨 아저씨에겐 나보다 10살이 많은 두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은 변호사였고, 작은 아들은 회계사였다. 두 형제의 효심은 이 지역에선 자자해서 그렇게도 모시겠다고 했지만 최씨 아저씨의 고집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저씨가 이 집에서 가장 좋아했던 내가 먼저 떠났고 이젠 아버지가 떠났다. 최씨 아저씨의 떠난다는 말이 너무나 아프게 다가왔다.
“...후우!~ 어디로 가실 거죠?”
“...그냥 발 닿는 곳으로 여행을 다닐 참입니다...검사님도 이젠 말리지 않겠죠...”
아저씨는 아무래도 새벽에 떠날 모양이었다. 하긴 ...점점 허물어져만 가는 집구석을 바라보는 것도 고역일 테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최씨 아저씨는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인사를 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이 불안하고 무서웠다. 불시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지옥 같은 이 집에서 어린 내가 기댔던 유일한 내편이 떠나고 있었다.
나 자신이 누군가를 떠나긴 쉬웠는데 누군가가 나를 떠난다고 하니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도 엄마도 그랬을 것이었다. 그리고 최씨 아저씨도 내가 떠났을 때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오늘도 느끼는 것이지만 나란 놈은 그렇게 항상 이기적인 놈이었다. 내가 받는 상처만 크고 남들이 나를 통해서 받고 있는 상처엔 외면했다. 상처받기 싫어서 떠나려고만 했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내가 쓰레기일 수밖에 없는 것은 살인자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이런 내 성격 때문이란 것을 최씨 아저씨는 그렇게 알려주고 마지막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저씨!!~~”
최씨 아저씨가 내 고함소리에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여행하시다가 친구가 필요하시면 %%시에 오셔서 전화주세요!~~ 그땐요!~~ 그땐 말이에요, 아저씨! 그땐...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도련님 말고요! 태복이요! 태복이! 제 이름 아시죠?!~~”
아저씨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다가 밑으로 내려갔다. 이제 최씨 아저씨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내 심장은 이상하리만치 뛰고 있었다.
별장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여자는 샤워를 마치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 묻어 있어서 너무나 미안했다.
“샤워하세요, 태복씨...조금 있다가 아버지를 보내드려야죠.”
그녀의 말에 나도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몸에 닿자 술기운이 확 올라왔고 졸음이 미칠 것처럼 밀려왔다. 간단하게 샤워를 끝내고 나는 주인여자와 함께 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나도 모르게 주인여자의 품으로 안겼고 그녀는 나보다 훨씬 작았지만 품안은 너무나 아늑했다. 이런 아늑한 느낌은 어릴 적 장롱 속에 들어갔을 때에나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었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었다. 물컹한 주인여자의 몸에 내 몸이 반응했지만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주인여자가 깨워서 일어나 보니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몇 시간 자지 못했지만 10시간을 잔 것처럼 몸이 편했다. 이렇게 편하게 자 본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몸이 좋았다. 주인여자는 화장을 정성스럽게 하면서 나 보고 씻으라고 했다. 모든 것이 엉뚱한 상황이었지만 나와 주인여자는 너무나 태연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도 그랬지만 주인여자도 대단하긴 마찬가지였다.
모든 준비를 끝낸 뒤 나는 주인여자와 함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아버지의 빈소를 준비하는 일꾼들은 10시가 넘어서야 올 것이었고, 아버지를 태운 차는 그 후에 올 것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예를 다한 뒤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주인여자와 함께 아버지를 기다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 위에는 나와 최씨 아저씨만 아는 아늑한 장소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비밀장소는 아직도 그대로 있었고 최씨 아저씨의 손길이 있었는지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비를 걱정하지 않고 누워서 잠을 잘 수 있는 낮은 원두막 같은 것이 있었고 조그만 그네도 그대로 있었다. 이곳에서 난 최씨 아저씨에게 바둑과 장기를 배웠고 고스톱도 배웠다.
“와!~ 경치가 너무 좋아요!~ 뭔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정말 특별한 곳이네요...하하!...이곳에 대한 추억이 있는 것 같은데요?...”
글을 써서 그런가? 확실히 주인여자는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나와 섹스를 하지 않은 관계라면 그야말로 난 밀착취재를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여자가 어떤 소설을 구상하고 있는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또 다시 한국 문단에 벼락같은 충격을 던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저에게는 특별한 곳입니다...그 동안 이곳을 잊고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네요...”
정말로 특별한 곳이었다. 어릴 적 광주에서의 경험이 흑백사진이었다면 이곳에서의 일은 고화질의 영상이었다.
“태복씨는 정말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어요...엄마란 분...혹시 제가 알고 있는 그 분인가요?”
“... ...”
“곤란한 질문인가요?”
“...아닙니다...인영씨가 알고계신 그 분 맞습니다...한국 최초에 여성 대통령을 꿈꾸는 분이죠...”
“엄청나군요...저에 대해선 묻지 않던가요?”
“...제 마누라라고 했습니다...”
“네에?...맙소사!...엄청나게 놀라셨겠네요, 하하하!~”
“남산에 끌려 가실지도 모릅니다, 조심하세요...!”
내 말에 주인여자는 더욱 크게 웃었고 나도 피식 웃어버렸다.
“태복씨의 말과는 다르게 아버지란 분도 그렇고...엄마란 분도 그렇고...태복씨를 많이 필요로 하시는 것 같은데...아닌가요?...”
이 여자 불안할 정도로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혹시 엄마가 내게 원하는 것 까지도 알고 있는 것인가?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이런 이런...!...또, 또...또 저를 읽으려고 하는군요...”
“인영씨도 그런 것 같은데요?...저에 대해 많은 것을 읽고 계시고...”
“흐음...!...저와 태복씨는 비슷한 부류인 듯해요...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근데 우리보다 더한 애가 있어요.”
“애요?...제가 아는 앤가요?”
“음...이런 건 엄청난 정보라 공짜로는 안 되는데...”
무슨 얘기를 하려고 나에게 딜을 하는 것인가? 주인여자의 스타일상 별 볼일 없는 얘기는 아닌 것이 분명했고 그것은 또한 나와 관계된 어떤 사람임이 확실했다.
“말씀해 주시면 원하시는 부분에 대해 저도 실토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태복씨 먼저 제 질문에 답해주세요. 괜찮죠?”
이 여자는 분명히 엄마에 대한 얘기를 물어올 것 이 뻔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이미 주인여자의 얘기가 너무나 궁금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머님이 태복씨에게 원하는 것이 뭐죠?”
예상했던 질문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나는 엄마가 네게 원하는 것을 주인여자에게 말 해주었다. 어떤 일인지 모르겠지만 주인여자에게는 내 얘기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또 내가 먼저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내가 겪은 모든 것 그리고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을 얘기해 주고 싶어서 미칠 정도였다.
“흐음...전 태복씨 어머님 생각을 알 것 같은데 태복씨는 정말로 모르고 있는 것 같군요...”
내가 모르는 것을 주인여자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난 숲 속에 있었고 주인여자는 숲 밖에서 전체를 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애와 같군요...”
누구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초희요...초희 그 녀석도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부정하고 있더군요...태복씨처럼 말이에요...”
초희?...도대체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인여자는 초희에 대한 어떤 것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나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일까?
주인여자는 내가 무척이나 궁금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잔뜩 뜸을 들였다.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네에 몸을 싣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아!~ 이거 꽤 튼튼한데요? 제가 꽤나 무거운데...하하하!~”
약간 짜증이 밀려왔지만 주인여자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참았다. 나는 평상에서 일어나 주인여자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네를 잡고 천천히 앞으로 밀어주기를 반복했고 그녀는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도대체가 저승길로 떠나는 아버지를 보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우리는 소풍을 온 불륜 커플일 뿐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초희의 소설을 찾아보세요...아마 깜짝 놀랄걸요?”
초희가 소설적인 재능이 있다는 말인가? 그래봐야 이제 19살의 소녀일 뿐이었고 남 앞에서는 부끄러워서 말도 제대로 잘 못하는 여자 아이일 뿐이었다. 그런 애에게 그런 재능이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왜 초희를 도와주지 않았죠? ...”
“... ...”
내 물음에 주인여자의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주인여자의 벽을 깰 수 있는 가장 빨랐던 길은 내가 아니라 초희였기 때문이었고 주인여자를 치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치료제였다. 그런데...그런데 왜 주인여자는 모른 척 했을까?
“...그 아이의 글을 보고 질투를 느끼고 말았어요...하하...내가...아직까지도 베스트셀러에서 빠지지 않는 글을 쓴 내가 말이죠...”
소름이 돋았다. 주인여자는 붓을 꺾었다고 했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지난 시간동안 동생의 일 때문에 작업을 못 한 것이 아니라 그 작품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자신이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꽉 잡아요, 인영씨!”
내 말에 주인여자가 당황해 줄을 꽉 움켜잡았다. 나는 있는 힘껏 앞으로 밀었고 그녀는 놀라 당황한 목소리로 ‘잠깐만요!’를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늘을 날듯이 앞으로 나갔던 주인여자가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와 나는 더욱 큰 힘으로 밀어주었다. 그러자 주인여자가 비명을 내지르면서 두 손으로 더욱 줄을 꽉 움켜잡았다. 그렇게 몇 번을 계속 하자 주인여자는 어느새 크게 웃었고 그녀의 웃음소리와 내 웃음소리가 산속에 울려 퍼졌다.
아버지는 땅 속에 묻힐 때도 편하지 못했다. 장례식장에서 볼 수 없었던 고모와 삼촌부부가 따로 도착해서는 이런 저런 참견을 해서 새엄마와 신경전을 벌였다. 인부들은 작업이 중단 될 때마다 인상을 구기며 한쪽으로 가 담배를 피워댔다.
나는 위에서 아버지를 보내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려서도 그랬고 성장한 지금에서도 난 이 집안의 객일 뿐이었다. 주인여자는 어이없는 광경을 흥미롭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시가 조금 넘어서 주인여자의 차를 타고 출발을 했다. 오늘은 학원에 나가야 하는 날인데 시간을 계산해 보면 얼추 7시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가 죽었음에도 난 잘나빠진 일에 대한 책임감을 먼저 느끼고 있었다. 친 아버지였어도 그랬을까?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난 그 섬에 가고 싶다...”
주인여자는 국도를 달리면서 갑자기 짧은 시를 읊었다. 단 2행밖에 안 되는 짧은 시에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인지 정말이지 저 놈의 시를 볼 때마다 등짝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마치 억지로 발가벗겨진 채 나의 고독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들어나는 것 같아 너무나도 당황스럽게 만드는 그런 시였다.
“모두들 많이 외로워 보이네요. 친척 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어제 그 분도 그렇고...저도 그렇고...태복씨도 그래요...왜 그럴까요?”
“ ... ...”
왜 그런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나의 주변을 인식할 때부터 난 무섭고 외로웠으니까.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할 것 없이 살 수 있었던 아버지와 형제들은 왜 그렇게 외로움에 치를 떨었을까? 그리고 상위 1프로 안에 들 정도의 능력과 미모를 타고 태어난 엄마는 또 왜 그랬을까?
“...그런 것을 밝혀줘야 하는 것이 작가들이 할 일 아닌가요?...저 같은 범인들의 몫이 아닙니다...”
내 말에 주인여자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부담감 작렬이네요...후후...!”
장난스럽게 말하는 주인여자를 보면서 말처럼 부담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변했다. 이 여자는 이제 변했다.
“뭘 그렇게 쳐다봐요? 또 절 분석하려는 건가요?”
“인영씨가 달라 보여서요...십대 소녀처럼 들떠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흐음...그렇군요...그러네요...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긴 참 오랜 만이에요...”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은 적이 나도 있었다. 처음으로 인영이 내 자지를 자기 손으로 잡았을 때였다. 하지만 주인여자가 말하는 것 하고는 다른 것 같았다. 동기 중에 4수를 하고 들어온 효정이 누나가 있었다. 보통은 합격의 기쁨에 취해서 한 학기를 보내기 마련이었는데, 그 누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술을 마시면서 이상한 소리를 했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입시를 준비하고 또 시험을 치르면서는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분 좋은 긴장감에 빠졌었는데... 막상 합격을 하니 모든 것이 엉망이 돼버렸어...난 어디로 가버린 거지?]
난 학생시절을 보내면서 시험이란 것에 치여 본 적이 없었다. 어떤 과목이든 출제자들이 원하는 지점은 너무나 명확하고 뻔했기 때문이었지만 그것은 운이 좋게도 내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었지 일반적인 학생들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그리고 대학입시 4년을 그렇게 보낸 효정이 누나는 이미 시험을 보는 기계가 되어 있었고 오직 입시란 것에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효정이 누나는 지금 서울 본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유명 강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가끔씩 어울려 놀았는데 유명한 만큼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돈을 많이 버니 탐닉하는 쪽으로 생활이 굳어져 가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 누나의 잘 못이었다. 절대로 대학에 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잘 나빠진 서울대에 입학하는 정도였으니 애초부터 목표가 잘 못된 것이었다.
대학에 합격한 친구들 모두가 그렇게 새로운 목표를 정하지 못한 채로 방황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자신의 삶의 목표를 새로 정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뭘 하고 싶고 또 뭘 가장 잘 하는지를 확인하기 보다는 돈을 많이 버는 쪽으로 노선을 결정해 버렸다. 한 창 삶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시기에 습관대로 또 다른 입시체제에 편승해 버렸다.
광호도 그렇고 정 원장도 그렇고 요즘 20대들이 사회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질타했었지만 난 동의하지 않았다. 종석이처럼 부모 잘 만난 녀석들은 삶에 치일 일이 없기 때문에 사회 부조리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고, 한국처럼 어려운 가정에 태어난 사람들은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대해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중산층 부모 밑에서 자란 친구들은 여유가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들은 자신의 위에 있는 종석이 같은 친구들의 삶을 동경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과연 지금 20대들만의 잘 못일까?
“아무튼 고마워요 태복씨. 덕분에 은사님 말씀이 뭔지 알 수 있게 됐어요. 좀 더 빨리 이럴 수 있었으면...좋았을 텐데...정말 신기해요. 28살짜리 남자를 통해서 내 존재이유를 알았다니 말이에요...”
주인여자의 말엔 많은 아쉬움과 함께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과연 나를 통해 무엇을 느꼈다는 말인가?
“전 특별히 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후후...작가란 집을 짓는 다는 뜻이죠. 혼자서 집을 짓는 정도의 고통이 스며든 단어지만 전 그래서 그 한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이니까요.”
“... ...”
“...세상 모든 부조리를 먹고 ...그것을 삭여내고 또 삭여서 세상에 조금이라도 이로운 물질을 배설해줘야 하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집을 짓는다니 너무나 단순한 선택인 것 같아요.”
“그럼 뭐라고 부르죠?...지렁이?...”
내 말에 주인여자가 크게 웃었고 나도 웃었다. 주인여자의 말대로 작가란 단어가 단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가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명확하다면 작가란 단어가 그렇게 편협하지만은 않은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인영씨는 야설이란 거 본적 있어요?”
“흐음...네. 남편 때문에 소라란 곳을 알게 됐죠.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는데 나중엔 즐겨찾기를 해 놓고 들어가게 되더군요, 하하하!~”
“야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국가에서는 좋지 않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말이죠. 미성년들도 그곳에 들어오고...그들도 지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것이든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양쪽이 공존하기 마련이죠. 그런 면에서 야설이 일정부분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상상은 상상일 뿐이니까...애초에 있는 자지, 있는 보지를 없다고 하라고 강요하는 것 자체가 잘 못 된 거죠. 후후...”
주인여자의 말에 놀랐지만 웃음이 나왔다.
“인영씨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오니까 놀라운데요?”
“그곳의 소설을 모두 다 본 것은 아니지만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바라는 것을 알 수 있겠더군요.”
나는 주인여자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사실, 난 그동안 섹스에 대한 생각이 없었기 때문인지 야설이나 야동에도 특별하게 관심이 없었다. 희한한 것은 종석이었다. 원하기만 하면 어떤 여자들과도 침대에서든 차에서든 아니면 길바닥에서든 섹스를 할 수 있는 녀석이 야사, 야동, 야설에 빠져있었다. 내가 알기로 녀석이 섹파와 찍은 야사와 야동만 해도 1테라 바이트가 넘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