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정사6(가시 장미)
♣가 시 장 미 1♣
[얘, 유미야, 전화!]
[누군데?]
[글쎄?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야. 암튼 받어.]
[조금 이따가 다시 걸라구 해. 나 지금 바빠.]
[여보세요? 네…… 저기 한 10분 후에 다시 걸어주실래요? 지금
유미가 화장실에 있거든요.]
마담 유연실은 핑계를 대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동안 룸싸
롱 로즈도 많이 변했다. 장사가 잘돼 인테리어도 다시 바꿨다.
인테리어 내장재로는 가장 고급스런 재료를 사용해 로즈를 해운
대에서 최고의 유흥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호스티스로 일할
아가씨도 늘씬한 아가씨로 몇 명 더 고용했고 그 동안 손님들 사
이에서 서비스가 시원찮았다고 말이 나온 여자들은 모두 다른 업
소로 넘겼다. 그런 변화는 비단 로즈뿐만이 아니라 마담 유연실
이나 하유미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이제 하유미는 룸싸롱 로즈에
서 단순히 호스티스로 일하는 종업원의 입장이 아니었다. 유연실
못지 않은 입지가 되어 있었다.
우선 유연실의 변화의 경우를 보면 그녀가 일전에 종업원 이종
식을 자신의 빌라에 기거시킨 후로 그녀는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변했고 또 더욱 손님들에게 친절했다. 당연 그 이면에는 종업원
이종식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마담 유연실이 애초 이종식을 자신의 집안으로 들이면서 그녀가
계획했던 일이 차근차근 진행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유미에게 있어서의 변화는 경제적 변화였다. 지난겨울에 만난
히데오가 그녀에게 말한 대로 그녀에겐 적지 않은 돈이 주어졌
다. 그 돈으로 그녀는 스스로에게 과분할 정도의 빌라를 전세 냈
고 또한 다달이 히데오에게서 용돈씩으로 기천 만원씩 입금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담 유연실이 하유미를 단지 일개 호스
티스로 치부하지 못하는 것은 또 다른 이유 때문. 그것은 다름아
니라 히데오의 소개로 로즈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이었다.
예전에도 일본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긴 했지만 히데오가 물어다
주는 일본인들은 그야말로 전부 봉이었다. 한 사람 한사람이 로
즈에서 돈을 물쓰듯했기 때문에 매상은 곱절이나 뛰어올랐다. 그
리고 지금 하유미와 새로 물갈이한 호스티스들 중에 두 명이 밀
실에 들어가 있는데 그들 역시 히데오가 물어다 준 잿밥들이었
다. 사람들을 보낼 때 히데오가 가장 먼저 연락을 취하는 사람이
바로 하유미였고, 하유미는 그 소식을 마담에게 전했다. 그러니
당연 유연실이 하유미의 눈치를 봐야 할 형편이었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 값비싼 양주와 화채 그리고 갖가지 술안주
가 푸짐하게 차려진 폐쇄된 룸 안에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고 다리라도 꼬면 팬티가 적나라하게 보이는 옷을 차려입은
호스티스들을 일본인 세 사람이 끼고 앉아 희희덕거리고 있었다.
하유미 역시 이마가 벗겨진 나카지마라고 하는 일본인 옆에서 그
를 수발하고 있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은 모두 정장을 하고 있었
고 모두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히데오가 오늘 소개한 사람
들은 모두 히데오가 데리고 있는 꼬붕들이었다.
하유미의 파트너를 제외하고 두 명의 호스티스를 끼고 앉은 두
사람은 이치로와 모토오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치로
의 파트너는 미애라는 가명을, 모토오카의 파트너는 히데꼬라는
일본 이름을 가명으로 쓰고 있었다. 히데꼬라는 가명을 쓴 호스
티스는 스물 다섯 살의 나이었지만 전에 일본으로 자주 갔었고
일본어에도 능통한 편이었다.
[나카무라상? 세 사람 중에 누가 제일 오야붕이에요?]
히데꼬가 사과를 입안에 넣은 채 우물거리면서 물었다.
[오야붕?]
[네. 누가 세 사람 중에서 제일 우두머리냐고요?]
히데꼬의 물음에 하유미를 껴안고 있던 나카무라가 벽에 손짓을 했다. 그의 손가락의 방향은 현해탄 너머를 가리킨 것이었다.
[우리 오야붕은 히데오상이야.]
모토오카가 나카무라 대신 말했다.
[히데오? 유미 언니 히데오란 사람 알아?]
히데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두 호스티스였다. 그들
뿐만 아니라 그와 하유미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여
기선 유연실과 하유미 둘 뿐이었다. 굳이 다른 한사람을 더 끼워
넣는다면 이종식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유미와 히데오의 관계는 지금 이곳에 있는 히데오의 부하들도
모르고 있었다. 단지 물 좋은 곳에서 사흘간 놀다 오라고 히데오
가 지시하는 바람에 이곳까지 날아온 것이다.
최근 일본인들에게 한국인 호스티스들은 최고의 인기가 있었다.
일본 여자들 보다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화대로 지불해야 하는
돈도 일본의 글라보(CLUB)에서 여자를 끼고 앉아 술을 마실 때보
다 저렴했고 더군다나 한국의 호스티스 아가씨들은 다음 날까지
어김없이 최고의 서비스로 무장하고 그들의 육체적 욕구를 채워
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두 명의
호스티스와 하유미는 각기 이치로, 모토오카, 나카무라와 질퍽한
섹스까지 책임을 지는 호스티스의 입장이었다.
[나도 잘 몰라.]
하유미가 잘라 말했다.
세 일본인과 한창 음담패설이 오갈 때 마담 유연실이 노크를 하
고 하유미를 불러냈다.
[전화야, 아까 그 사람인데……]
[아까 그 사람?]
[아, 알았어 언니.]
하유미는 자신의 블라우스 안에 손을 넣고 있던 나카지마의 손
을 빼내며 일어섰다.
[이름이 뭐래?]
룸의 문을 닫으면서 하유미가 물었다.
[뭐래드라? 민 뭐라고 했어.]
유연실의 말에 하유미는
[으응, 그 사람……]
하고 알겠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잘 아는 사이야?]
[아냐. 그, 그냥 좀……]
하유미는 카운터 위에 길게 전홧줄을 늘어뜨리고 놓여져 있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네. 하유미에요. 저, 나중에 따로 연락드릴께요. 미안해요.]
수화기를 집어든 그녀의 통화내용 치곤 너무 간단했다. 일방적
으로 전화를 끊은 하유미는 곁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유연실
에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군데?]
[아무 것도 아니래두!]
[…….]
그 말을 남기고 하유미는 다시 룸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참, 언니!]
하유미가 문고리를 틀어 열면서 불렀다. 카운터에서 담배를 집
어들던 유연실이 하유미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혹시 다시 전화 오거들랑 나 바꾸지마!]
[그래. 알았어.]
의아한 눈길로 유연실이 대답할 때 쾅, 하고 하유미는 룸의 문
을 닫고는 들어가 버렸다.
여행에서 돌아와 고시원에서 식당 아주머니에게서 하유미의 편
지를 받았을 때 만해도 민도식은 다소 들떠 있었다. 그리고 그녀
가 편지에 남겨 놓은 전화번호를 보고 고시원 1층에 마련된 공중
전화로 그녀와 통화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은 냉담하
다 못해 얼음장같았던 것이다. 민도식은 다시 전화를 걸 엄두를
못 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그녀가 일하고 있는 곳이 어딜까? 민도식은 그녀가 전화를 집어
들 때까지 떠들썩하게 들려 오는 남녀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
었고 그말속에는 분명 일본말이 섞여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하
유미가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말한 바는 없었지만 그녀가 유흥업소
에서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녀
의 직업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가르쳐 준 전화번호를 확인해 보면 그녀의 직업을 알아
맞힐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겐 하유미의 직
업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왜 자신의 전
화를 성의 없이, 아주 쌀쌀맞게 단 한 마디의 말만 일방적으로
던지고 끊어 버렸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유미에 대한 복잡한 생각으로 수화기를 내려다보고 있자니까
불현듯 부모님 생각이 났다. 백원 짜리 동전을 집어넣어 버튼을
꾹꾹 누르고 얼마있으니까 목이 잠긴 목소리가 그의 귓속으로 파
고들었다.
[접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그 동안 연락 못 드려서.]
온다 간다 말 한마디 없이 한달 이상 행방불명된 자식의 전화를
받은 그의 어머니의 목소리는 금세 울먹거렸고 뒤이어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 온 아버지의 목소리는 노기를 띄고 있었다.
[내일 뵈러 가겠습니다. 네…… 아무 일 없습니다. 걱정 마세
요, 아버지.]
수화기를 다시 내려놓았을 땐 민도식의 마음 한구석이 미어지는
듯했다.
아침에 민도식은 그의 집으로 갔다. 그 전에 집 근처 목욕탕으
로 가서 자신의 몸을 씻고 길게 자라난 수염도 면도날로 밀어냈
다. 그리고 이발도 했다. 초라한 몰골 그대로 부모님에게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용모를 챙기고 부모님을
뵈었지만 그들은 민도식의 속마음을 먼저 헤아렸다.
[때가 있을 거야. 너무 걱정 말아라.]
비록 육체적으로는 힘이 없고 노쇠하신 민도식의 어머니였지만
그의 어머니의 그 한 마디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닿았고 민도
식은 당신 앞에서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
역시 혹시나 자식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장성한 자식, 민도식의 어깨를 토닥거
리며 힘을 북돋웠다.
♣가 시 장 미 2♣
[넌 남자야, 쿨럭쿨럭…… 남자는 가볍게 울어선 안 된다. 살아
가노라면 울 일이 많겠지만 그래도 남자는 눈물을 함부로 보여선
안돼는 거다.]
민도식의 아버지가 갈퀴 같은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
켰을 때는 죄스럽고 송구스런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끝까
지 믿어 주는 그들이 고맙기도 했다.
[그래, 그깟 고시 반드시 합격하고 말겠다! 사법시험도 결국 사
람이 만든 시험인데 나 같은 재원이 시험에 계속 떨어진다는 것
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그의 어머니가 챙겨 준 음식물을 든 가방을 들고 다시 송정 고
시원으로 돌아오는 민도식의 마음엔 다시 한번 결의의 눈빛을 번
뜩였다. 그리고 다시는 하유미란 여자로 인해 흔들리는 일이 없
게 하리라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고시원으로 돌아온 민도식은 자신의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우선 하유미의 전화번호를 찢어 없애고 또 따로 책장에 썼었던
것도 뜯어내어 파기시켰다.
[넌 애초에 나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어. 그저 유흥업소 종
업원에 불과하고 또 더러운 여자야! 그래. 넌 내 상대가 아냐.
처음부터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
그는 마음속으로 수십 번도 더 그렇게 소리쳤다. 민도식은 학습
계획표를 다시 작성했다. 그 학습 계획표는 신중하게 검토되었고
그 동안 자신에게 결함으로 인식된 고시에 대한 매너리즘을 최대
한 없애 나가는데 역점을 많이 두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고시에
만 매달려 이것저것 많은 책을 보아 온 것이 오히려 분산된 지식
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과목별로 단권화 하기로 했다.
단권화란 이를테면, 일반 교과서가 있으면 그 교과서 안에 내용
과 관련된 사항을 참고서나 문제지 등에서 발췌하여 메모해 놓는
작업을 말한다. 민도식은 학습 계획표를 거의 반나절 동안이나
세세하게 짜고 나서 한숨 여유를 돌릴 수가 있었다. 휴식을 취하
면서 각종 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도 했다.
일단 마음의 결심을 굳히고 학업에 매진한지 일주일 가량 지났
다. 일주일 가량 공부에 열중하니 예전의 몸 컨디션으로 돌아왔
고 매일 아침 약수터에 가서 1리터 콜라병에 물을 떠오는 것 외
에는 두문 불출했다. 그리고 그의 부모님에게 안부전화를 가끔드
리기도 했다. 체력 안배에도 신경을 쓰기 위해 가급적이면 규칙
적인 생활로 신체의 리듬이 깨지지 않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자
정이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이렇게 나간다면 생각보다 빨
리, 시험이 임박하기 몇 개월 전에 모든 준비가 끝날 것이란 생
각이 들었다.
하루의 공부를 마감하고 간단한 양치질과 세면을 하러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은 세면을 겸할 수 있도록 된 곳이었는데 이 송정
고시원이 새건물이라 퇴색하지 않은 타일로 다섯 평 남짓한 세면
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중간쯤에서 움푹들어간 럭키치약을 엄
지 손가락으로 꾹 누르니 하얀 치약이 뱀이 똬리를 치는 것 처럼
치약 용기에서 빠져나왔다. 그것을 칫솔로 찍어내어 이빨을 닦으
면서 세면장의 오른쪽 벽면을 가득 채운 두꺼운 유리창 밖을 내
다보았다.
고시원 건물 절반 정도를 크고 검은 산 하나가 가로막고 있었고
그 왼편 저 쪽으로 해운대 바닷가가 보였다. 그리고 고시원 건물
처마에 매달린 불빛을 머금은 유리창문을 통해서 민도식의 얼굴
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밝게 빛나고 있었고 어느 때보
다 정신이 맑아있었다.
자의든 타의든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란 것이 때로는 얼마나 위
험하고 불행을 야기하는 것인가. 이런 민도식에게 처음부터 하유
미란 여자의 존재는 참으로 위험하고도 위태로운 여자일 것일 거
였다. 마치 서커스의 곡예사가 외줄을 타고 위험한 곡예를 펼칠
때처럼.
보름 정도 지났을 때 하유미가 그의 고시원 방문을 두드렸다.
뜻밖이었다. 민도식이 자신의 방문을 노크하는 사람이 하유미라
는 것을 알았을 때 민도식은 그녀에게 두 번 다시는 자기를 찾아
오지 말아 달라고 말하기로 작정 했다. 모든 여자가 다 그런 것
은 아니지만 고시생에게 있어서 여자는 필요악이요 악마다. 더군
다나 하유미 같은 정갈하지 못한 여자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군요.]
민도식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유미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그 때 제가 너무 바빠서 그만……]
하유미의 말에 민도식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침묵했다.
[잠깐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옷을 좀 갈아입겠습니다.]
민도식은 그녀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자신의 방문을 닫아 버렸
다. 그것은 지금 기분이 어떠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그녀에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민도식이 방문을 열었을 때 하유미의
안색이 확실히 변해 있었다. 민도식은 그런 그녀를 흘깃 본 후
고시원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화가 많이 나셨나 보죠?]
고시원 밖으로 나왔을 때 그녀가 물었다.
[……]
민도식은 그녀의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보다 몇 걸음 앞
서서 걸어갔다.
[저 쪽에 약수터가 있습니다. 거기로 가죠.]
약수터는 고시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청소년 연수원
건물 안에 약수터가 있었는데, 약수터는 항시 개방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선 송정 바다는 물론 저 멀리 오륙도와 대마도까지
보였다. 물론 날씨가 화창한 날일 경우에 그랬다.
산 속 어딘 가에서 풀벌레 소리가 찌륵찌륵 울려 퍼졌다. 두 사
람은 멀리 바다를 바라다보면서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한동안 민
도식은 저 멀리 어둠을 삼키고 있는 바다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런 민도식을 하유미가 자주 쳐다보았지만 민도식은 애
써 그녀를 외면했다.
[왜 절 한 번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고…….]
하유미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제야 민도식은 그녀를 돌아
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전처럼 하유미에 대한 열정이 없
었다. 오히려 열정보단 경계의 눈빛이었다.
[얼마 전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혼자 보름 가까
이 여행을 했죠. 여행하면서 많은 걸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 속
에 유미씨도 끼어 있었고요. 유미씨……]
민도식이 말끝을 흐리면서 불렀다.
[네, 듣고 있어요.]
방금 민도식의 경계하는 눈빛에 다소 실망한 듯 냉정한 하유미
의 대답이었다.
[지금 전 벼랑 끝에 몰린 것 같은 심정입니다. 나이는 들대로
들었고, 또 올해 안으로 고시 시험에 승부를 내야만 합니다. 사
실 저의 부모님이 의지할 사람은 저뿐입니다. 두 분 다 연로하셔
서 몸이 편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해서 모든 것이 당장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시험에 걸리더라도
일정 기간 연수원 생활을 해야 하고 그곳에서 어느 정도 우수한
성적을 따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저의 출세에
지장이 있게 되죠.]
[결론적으로 말해서 도식씨 공부에 지장이 되니까 앞으로 찾아
오지 말란 말 아니에요? 그 말을 왜 그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죠?]
하유미가 민도식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섭섭하네요. 뭔가 도식 씨가 저에 대해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
데, 오늘 제가 도식 씨를 찾아온 것은 단지 위로나 해드릴 겸 찾
아온 거란 말예요.]
민도식은 그녀의 말에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민도식이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도식씨 알고 보니 참 재밌는 사람이로군요. 남의 인생을 마치
자기 사고방식대로만 미루어 짐작하는 심각한 버릇도 있고 말이
죠.]
하유미가 입가엔 희미한 미소를 물면서 빈정거렸다. 민도식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제 알겠어요, 도식씨 마음! 아무래도 제가 얌전하게 공부 잘
하고 있는 도식 씨에게 혼란만 가져다 준 것 같네요. 그만 가 볼
께요. 밤늦게 찾아와서 미안해요.]
하유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참, 도식 씨도 짐작했겠지만 저 해운대에서 일하고 있어요. 언
제 시간 나면 한 번 들르세요. 그 때 정중히 모시죠. 물론 호주
머니에 돈이 좀 실려야 할 거예요. 그럼…….]
하유미가 저만치 걸어내려가고 있을 때 민도식은 하유미가 건넨
명함을 보았다. 명함에는 붉은 장미꽃 한 송이가 좌측 상단에 새
겨져 있었고, 그 장미꽃 아래에 상호는 나타나지 않은 채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 밑으로 일본어 가
타카나로 하유미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뒷면을 살펴보니 가게
상호가 '로즈(ROSE)'라고 되어 있었고 가게의 약도도 그려져 있
었다. 그 약도대로 라면 로즈는 파라다이스 호텔 근처, 그러니까
해변으로 통하는 사거리에서 컬러 사진 현상소로부터 그다지 멀
지 않은 곳에 위치한 가게였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군…….]
자신의 빌라로 돌아온 하유미는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
리고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맞으면서 비누를 자신
의 몸에 칠했고 그 비누 거품이 물줄기에서 흘러 내리는 것을 걷
어올리면서 자신의 가슴을 쓸어 만졌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
밤에 있었던 민도식의 냉담한 반응이 자꾸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
랐다.
[흥, 출세에 지장이 있다구!]
자신의 허벅지를 쓰다듬던 하유미가 소리쳤다. 적어도 그에게
갔을 때 하유미는 민도식이 전처럼 자신에게 정열적으로 구애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방문에 노크했을 때 하유미의
몸은 흥분된 상태였었다. 그런데 민도식이 예전같지 않게 태도를
바꾸고 냉담하게 대하는 바람에 하유미의 달아오른 몸은 순식간
에 식어버리고 만 것이다.
사실, 민도식이 자신에게 매달릴 때가 기분이 좋았다. 그가 매
달릴때는 마치 신하가 왕비를 대하듯 존경심과 경애감으로 자신
을 우러러보는 것 같았고 자신이 아니면 죽음이라도 불사할 것
같은 눈빛으로 사랑을 애원했을땐 전신에서 짜릿한 전율감까지
느꼈던 것이다.
[병신같은 새끼!]
민도식의 태도에 괘씸한 마음이 들었는지 하유미는 투명한 비누
를 신경질적으로 욕조 바닥에 내팽개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