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정사5(봄날은 간다)
봄 날 은 간 다 . 1
많은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1996년 봄에 가난한 고
시생인 민도식은 또 한 번 낙방이라는 쓴 패배를 경험하고 말았
다. 그의 고시 실패의 원인 중에 일부는 하유미와 생긴 일 때문
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은 지독한 고시에 대한 매너
리즘 때문이라고 그는 지레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다
가는 폐인이 되고 말 것이다! 하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
다. 그의 늙으신 부모와 친척들이 지금쯤이면 민도식을 찾아서
수소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민도식은 고시 낙방이라는 쓴잔을 마신 후 곧바로 송정 고시원에
서 비교적 멀지 않은 대변이라는 곳에 당일치기로 품삯을 받으면
서 일을 하고 있다. 일당이 오만 오천 원이면 그리 적지 않은 돈
이지만 뱃일이라는 것이 웬만한 완력 가지고선 안돼는 힘든 일이
었기에 늘 젊은 사람의 일손이 달렸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그가 일을 좀 하자고 선장에게 말했을 땐 그는 단
번에 민도식이 꽁생원같이 생겼다고 손을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
는 곧장 배 위로 뛰어올라가 선원들이 그물을 끌어내리는 도왔
다. 그러자 생긴 것과는 달리 그가 힘 좀 쓰게 보이자 선장은 그
에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내주었다.
민도식이 이처럼 급전을 마련하려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응어
리진 한(恨) 같은 것을 풀어내기 위함이었다.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고 싶었다. 보름 가까이 쉬지 않고 일을 한 결과 그가
받은 돈은 근 육십 만원이나 되었다.
자신이 며칠간 몸살을 앓아 근처 여인숙에서 앓아 누운 날을 제
외하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뱃일을 해냈다. 그런 그를 보고 오랫
동안 뱃일을 하던 사람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야, 그러다간 오래 못 산데이! 살살 쉬어 감시로 해라!]
선장이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
그 후 보름 정도 더 거기서 일을 하고 뱃일을 그만두었다. 백만
원이 넘는 돈이 그의 수중에 들어왔는데 처음으로 만져 보는 큰
돈이었다. 그는 무작정 열차를 집어탔다. 가방에 든 것은 자신이
여행할 동안 갈아입을 옷가지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평소에 읽고 싶었던 추리소설도 서점에서 사서 집어넣었
다. 그 추리소설은 로빈쿡이 지은 <감염>이란 책이었다. 머리를
식힐 때면 민도식은 추리소설을 읽곤 했다. 추리소설은 다른 일
반 소설들에 비해읽는 맛이 있었다. 재미도 있었지만 몹시 피로
하거나 우울하거나 힘들 때면 다소나마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96년 화창한 봄날의 하루는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민도식이
탄 열차는 무궁화호로 서울까지 가게 되어 있었다.
노랗게 도색(塗色)된 무궁화호의 객차들 내벽은 색이 바래고 군
데군데 칠이 뜯겨진 곳도 있었다. 그리고 객차의 푸른 좌석은 절
반 가량 사람이 차 있었다. 하지만 부산역에서 출발한 서울행 무
궁화호가 점점 부산에서 멀어질수록 무궁화호엔 사람이 차기 시
작해서 어느 새 빈자리 하나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대구역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오르내린 후에는 아예 서서
가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어딜 가나 이렇게 사람들이 많았다. 부
산이건 서울이건 또, 자신이 살고 있는 해운대건 간에 어디서 나
온 사람들인지 모를 정도로 처음 보는 얼굴들로 붐볐다. 덜컹거
리면서달리는 열차의 좌석이 점점 굳어지는 것 같더니 앉은 자리
가 불편했다. 쿠션이 없는 밋밋한 좌석이었기 때문이다.
민도식은 창가 자리에서 오랫동안 밖으로 빠르게 밀려가는 외경
(外境)을 감상하곤 했다. 그러다가 눈을 감기도 했고 또 미리 준
비해 간 추리소설을 꺼내 읽기도 했다.
처음 그가 서점에 추리소설을 사러 갔을 때 그의 눈에 <감염>이
란 소설책의 제목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또 망설임 없이 그
책을 산 것이었다. <감염>이란 책제목에서 왠지 모를 동질감 같
은 것, 지금의 혼란한 자신의 마음과 비슷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
다.
로빈쿡이란 사람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단 한 번도 그의 책
을 읽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몰랐다. <감염>의 책표지엔 세 명의
여자가 붉은 색상으로 칠해져 발레인지 무용인지 리본을 돌리며
뛰어가는 모습을 도안해 놓았는데 그 오른쪽 밑 가장자리로 '어
느 날 느닷없이 도시 전역을 강타한 최악의 전염병 에보라출혈
열…….
감염에 대한 공포와 무서운 살상 음모' 라고 하는 타이틀이 적혀
있었다. 민도식은 그 글귀를 읽은 후 몇 분 동안 그 책의 그 글
귀에 시선을 박아 둔 채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감염! 어쩌면 자신의 지금 상황이 미지의 바이러스에, 그 추리
소설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전염병보다도 무서운 에보라출혈열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
났던 하유미가 생각났고 자신도 모르게
[여자는 고양이다…… 고양이……]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열차는 어느 새 천안역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까부터 열차 안을
오가던 철도청 직원이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 하고 외치고 다녔
는데 바로 그 천안역에 다다른 것이다.
천안역에 열차가 정지하자 보따리를 인 아낙들과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승강장으로 올라오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얼마 후에 회색 그을음을 끼익, 하는 기계음과 함께
뿜어 올린 서울행 무궁화호는 덜컹거리며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
아침에 탄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두 시가 되었을
때였다. 그 많은 행선지 중에 왜 하필 서울에 내렸는지는 민도식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화창한 서울의 봄날 속에서 민도식은 오
랜만에 와 보는 서울이 예전의 모습과 별로 변한 게 없음을 확인
하고 안도감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 같으면 서울 하면 패션이 가장 유행하는 곳이라고도 할 것
이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의 생활 수
준이 비슷비슷해 지면서 옷 입는 것이 시골이나 도시나 별반 차
이가 없어져 마치 부산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민도식은 지하철을 탔다. 수년 전 시골에서 처음 이곳으로 유학
을 왔을 때도 그는 지금 이 노선으로 자신의 자취방을 찾아 들어
갔었다. 그리고 고단한 유학 시절이 시작되었었고 밤잠을 설쳐
가며 고시 공부를 했던 것이다.
민도식은 신림동 고시촌으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예전에 자
신이 공부했던 집이 저만치 고시 학원 건물 뒤에 예전 모습과 똑
같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음식을 준비하는지 회색 연기가 지붕 위
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민도식은 그 곳 주인을 한 번 찾아 뵙고 싶었으나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용기가 없었다. 고시 준비생이 고시에 합격하
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주인 아주머니를 찾아뵈었을 때 겉으로야 괜찮다고, 다음에는 꼭
걸릴 거라고 위로를 하겠지만 속으로 머저리 같은 녀석! 하며 욕
이나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생겨서 결국 주인 뵙기를 포
기하고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어딜 가더라도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 줄 것 같지가 않았
다. 민도식은 신림동을 떠나 석촌호수로 갔다. 석촌호수에 당도
했을 때는 오후 여섯 시 가량되었을때였다. 석촌호수의 수면이
퇴색한 햇볕에 반짝이고 있었다.
민도식은 길다랗게 이어진 석촌호수 주변을 오랫동안 서성이며
걸었다. 그리고 그곳을 빠져 나온 것은 날이 어두워졌을 때였다.
열차에 오르면서 김밥을 먹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아서
허기가 졌다. 석촌호수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가락국수를 파
는 포장마차가 눈에 띄어 민도식은 그곳으로 갔다.
[한 그릇 말아 줘요.]
[네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민도식은 포장마차에 다가서자마자 그렇게 아주머니에게 주문을
했다. 가락국수는 몇 초 지나지 않아 금방 나왔다.
[빨리도 나오네요.]
[이 장사 오래 해 놔서 요령이 늘어서 그래요. 뜨끈한 국물하고
고춧가루, 간장만 좀 넣으면 되는데요 뭘.]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말했다.
[장사는 잘 돼요?]
[그럭저럭요. 하지만 하루 품팔아 하루 먹고사는 사람이 다 그
렇죠 뭐. 어떤 때는 하루종일 진치고 있어 봤댔자 마수도 못하는
날도 있는 걸요. 하지만 한달 평균 잡아서 애들 학교 보내고 끼
니 밥 거르지 않을 만큼은 돼요.]
[네에……]
포장마차 아주머니의 손은 갈퀴처럼 거칠었다. 겨울 내내 포장
마차를 끌고 다니느라 손이 다 튼 때문이리라. 가락국수를 후루
루 걷어 먹으면서 민도식은 자주 아주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꾸 자신을 쳐다보는 민도식을 보고는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가락국수 맛이 어때요?]
하고 그에게 불쑥 물었다. 손님과 겸연쩍은 분위기를 피하기 위
해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다.
[네. 맛있습니다.]
아주머니가 방금 던진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민도식은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얼마죠?]
[천 오백원요.]
민도식은 가락국수 값을 치르고 포장마차를 나왔다. 그가 나올
때 한 쌍의 연인이 그 포장마차로 들어오고 있었다. 민도식은 포
장마차 아주머니를 보면서 어쩌면 자신도 나중에 저런 신세가 돼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시 준비를
하고 있는데, 고시에 실패한 후유증은 꽤 오랜 기간 지속이 되며
만일 고시를 완전히 포기했을 땐 다른 일이 잘 손에 잡히지 않는
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이란 항시 희망을 품고 살게 마련이지만 그 희망이 무너졌을
땐 너무나 진부하고 평범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엔 저자 거리에서 하루하루 끼니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 지
도 모른다.
잠실에서 풍납동으로 이어지는 도로 위로 차들이 씽씽 달려가고
있었다. 이미 완전히 태양을 삼켜 버린 어둠 속에서 인위적인 불
빛들과 어둠 저편 하늘 위로 희미한 별빛들이 형체만 겨우 드러
낸 채 지상 위를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민도식은 올림픽 공원 근처에 있는 H아파트 단지 앞에서 버스를
집어탔다. 방금 자신이 걸어온 석촌호수로 해서 신천시장, 잠실
종합운동장 방향으로 가는 버스였다.
봄 날 은 간 다 . 2
민도식은 잠실 1단지에서 버스에서 내려 다시 지하철로 갈아탔
다. 2호선에서 다시 4호선 지하철로 갈아타고 그가 내린 곳은 강
남 고속버스터미널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동해 쪽으로 갈 수 있
는 고속버스를 집어탔다.
고속버스 안에서 그는 다시 <감염>이란 책을 집어들었다. 자신
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셀러리맨인 듯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
다. 그는 신문을 읽다가 곧 눈을 감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책을 펼쳐든 지 채 5분도 안되어 차장이 버스의 실
내 조명을 죄다 꺼 버리는 바람에 책을 볼 수 없어서 그만 덮고
말았다. 민도식은 추리 소설책을 가방 속에 도로 집어넣고 통로
쪽으로 허리를 틀어 눈을 감아 버렸다.
[이봐요, 아저씨 다 왔어요. 일어나세요!]
굵고 허스키한 남자가 자신을 깨우는 바람에 눈을 연신 비비며
민도식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자신을 깨운 사람은 버스 차
장이었다.
사람들이 죄다 버스에서 빠져나간 직후였다. 민도식은 가방을 챙
겨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봄이지만 새벽 공기는 한기가 느껴졌
다. 민도식은 옷깃을 여미고 대합실 쪽으로 걸어갔다.
대합실 앞엔 방금 자신과 함께 타고 온 고속 버스에서 내린 사
람들이 택시를 잡고 있었다. 택시들은 고속버스터미널 앞에 일자
로 늘어서서 손님들을 태우고 있었다. 손님을 태운 택시에서 탁,
탁, 문닫는 소리와 함께 엔진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속초! 속초!]
민도식이 육교 근처를 지나갈 때 중년의 택시 운전사가 그에게
소리쳤다. 민도식은 이 곳이 초행길이라서 택시를 타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분이나 걸립니까?]
[네네. 후딱 갑니다. 걱정 말고 타세요!]
하고 택시의 도어를 열어 제치면서 말했다. 민도식은 그 택시에
몸을 실었다.
[날씨가 좀 차죠? 하하.]
택시 운전사가 운전석에 엉덩이를 밀어 넣으면서 물었다.
[네.]
[바닷가가 근처라서 그렇습죠. 하지만 이곳만큼 공기 좋은 곳도
없어요. 난 여기서만 사십 년 넘게 살았는데 꼭 연어같다니까요.
연어 알죠? 연어! 산란기에 어김없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
온다는 물고기 말입니다. 하하.]
택시 운전사는 자신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듯 했다.
[물론 압니다.]
[꼭 그놈 같다니까요. 젊었을 때 딴에는 출세해 보려고 서울에
서 근 십 년 가까이 있어 보기도 했는데 서울이란 곳이 말이죠,
정말 사람 살 곳은 못 되더란 말입니다. 사람들 많이 사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성격인데도 서울에선 왠지 정나미가 떨어지더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재작년에 만사 다 팽개치고 마누라하고 자
식새끼들 데리고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거죠.]
택시 운전사가 쉴새 없이 입을 놀려댔다. 처음엔 네네, 하고 그
의 말을 들어주던 민도식은 쉴새없이 그가 말을 해대는 바람에
그 대답이 끊기고 말았다.
후딱 간다던 속초 바다에 택시가 도착한 것은 고속버스터미널에
서 근 20여분 만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속초 해변 근처에서 지
새워야 할 것 같았다. 민도식은 인적이 끊긴 속초 해변을 거닌
다음 허름한 여관에 투숙했다. 그 때 세상은 시커먼 어둠이 켜켜
이 앉아 있었지만 방안에 들어선 민도식이 스위치를 켜자 방안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고시원을 나선 지 나흘째 되던 날, 민도식은 지리산 중턱을 오
르고 있었다. 제대로 등산 장비를 구비하지 않고 산을 오르자 등
산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의아한 눈길로 그를 가끔 쳐다보곤 했
다. 그리고 며칠 동안 수염을 제대로 깍지 않은 민도식의 모습은
영락없는 산도깨비나 산적 같았다. 민도식이 집을 떠나 이렇게
장기간 혼자서 여행을 다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애초 그런 결심을 하고 나선 것이 오히려 다행인 듯 했
다. 낯선 사람들과 맑은 공기를 맡으면서 참으로 그 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세상이 얼마나 티끌 같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던가 하
고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낯선 곳으로 계속 장소를 옮겨 가면서
민도식은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응어리져 있던 것들이 한낱
인간의 허황된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지리산 노고단 산장에 도착했다. 저만치 발 아래를 내려다보니
굽이굽이 안개를 휘감고 크고 작은 산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
다. 그리고 희뿌연 안개들은 구름같이 몰려 있어 그 위로 걸어다
닐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다리 같기도 했다.
[아니 그 차림으로 정상까지 오른 거요?]
완벽한 등산 장비를 구비한 한 등산객이 팍팍하게 굳은 다리를
풀고 있는 민도식을 놀란 시선으로 보면서 물었다.
[아, 네…….]
[대단하구려. 나 같으면 그런 차림으로는 이런데 오질 않을 거
요. 보아하니 젊은이는 겁이 없는 사람 같구려.]
[급히 오느라, 미처 장비를 구비 못했습니다.]
[아무튼 내려갈 땐 조심하시오. 아직 이곳은 겨울이나 다름없
소. 산이란 항상 그런 거요. 그래서 항상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
으면 언젠가는 크게 당한 다오.]
훈계조의 말을 남기고 그 등산객이 사라진 후 민도식은 발걸음
을 다시 밑으로 옮겨갔다. 산은 올라올 때보다 내려갈 때가 확실
히 위험했다. 하산하면서 몇 차례나 바위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여지없이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리고 산아래 완전히 내려올
때까지 노고단 산장에서 등산객이 했던 말이 떠오르곤 했다.
인간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하다는 표현은 정말로 맞는 표현이었
다. 애초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 버릴 목적으로 떠나왔던 길인데
민도식의 행선지가 부산에 가까워 오자 앞으로 풀어야 할 게 산
적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됐다. 자신의 인생의 진로가 불투명함
을 느꼈고 다시 열병 같은 고시병이 돋기 시작했다. 왜일까? 기
분이 왜이리 엉망이지? 여행을 다녀오면 한결 정신이 맑아질 줄
알았는데 왜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불안해 지는 것일까?
동대구 역에서 부산역행 기차에 몸을 실은 민도식은 가슴 한 쪽
이 꽉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애써 그것을 떨쳐 보려 했
지만 잘 돼지 않았다. 손바닥에 땀이 배이고 또 하유미에 대한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르고 있었다.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을
때만 해도 그녀의 모습은 단지 실루엣처럼 아득했었는데 마치 하
유미가 지금 그의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것 봐요, 젊은 양반! 젊은 양반!]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민도식은 꿈에서 깨어났다.
[무슨 대낮에 잠꼬대가 그리 심허우. 쯔쯔 기가 허한 모양이로
군.]
예순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민도식을 보며 연신 혀를 찼
다.
[여, 여기가 어디죠?]
[부산역 다와 가요.]
부산역을 향해 질주해 가는 기차가 달리고 있는 곳은 낙동강 위
의 철교였다.
동대구역을 출발했던 무궁화호가 부산역에 도착했다. 근 보름
가까이 전국을 돌아다닌 민도식은 개찰구에서 철도 공무원에게
기차표를 반환하고 부산역 광장으로 빠져 나왔다. 오후 5시 30분
정도 된 시각이었다. 공중전화 부스 쪽을 돌아다보니 사람들이
공중전화 부스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
해운대로 가는 직행버스를 탄 민도식은 해운대에서 내려 그곳에
서 다시 송정으로 가는 일반 버스로 갈아탔다. 해운대 달맞이 길
가로는 만개한 개나리꽃들이 노랗게 물들어 있어 보기 좋았다.
그리고 달맞이 고개를 넘어가니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고시원 건물
이 보였다. 날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송정 버스터미널에서 내린
민도식은 송정 해변을 거닐면서 고시원으로 걸어갔다. 고시원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수평선 저 멀리로 멸치잡이 어선들이 줄지어
서서 수면 위로 불빛을 뿌리고 있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 아
마도 저 배들은 기장 마을 근처 대변에서 나온 어선들일 거였다.
민도식은 하늘과 바다가 구분이 안 되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걸
어갔다. 그리고 어느 새 그는 고시원 앞에 들어서고 있었다. 고
시원 지하 건물에서 손에 묻은 물기를 앞치마에 닦으면서 나오던
식당 아주머니가 민도식을 발견했다. 날이 어둡고 민도식이 수염
마저 깎지 않은채 고시원으로 들어서자 식당 아주머니는 흠칫 놀
라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곧 자기 앞에 선 사람이 바로 이곳
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민도식임을 알아차리고는
[휴우, 애 떨어질 뻔했잖아! 학생이었군.]
식당 아주머니가 민도식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말했다. 민도식
은 아무 말 없이 아주머니의 곁을 지나쳤다.
[이봐요, 학생!]
아주머니가 고시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민도식을 불러 세웠
다.
[몇 번이나 집에서 가족들이 찾아왔는지 몰라요. 학생 맘이사
이해하겠지만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라우. 얼른 부모님께 안부
전화 드려요. 부모님이 애타게 기다릴꺼우.]
[네, 아주머니.]
식당 아주머니에게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건물 안으로 발길을
돌렸을 때 아주머니가 다시 민도식을 불러 세웠다.
[참, 그리고 며칠전에 어떤 아가씨가 찾아왔었어요. 학생한테
이걸 전해 주라고 하더군요. 무슨 편지 같던데…… 하지만 속내
용은 안 뜯어봤으니 염려말우. 근데 그 여자 누구요? 학생 애인
이요? 꽤 인물값 할 여자 같던데……]
식당 아주머니가 편지를 건네주면서 덧붙였다. 민도식은 식당
아주머니가 말한 아가씨가 다름 아닌 하유미 일 것이라고 생각했
다. 편지를 받은 민도식은 곧바로 그의 방으로 한달음에 뛰어올
라 갔다.
'저를 완전히 잊기로 하셨나 보죠? 전화 기다릴께요. 743-1××
×나 011-525-3×××번으로 연락 주세요. 그럼…… 유미가' 편
지의 내용은 짤막하게 그렇게 적은 것이었다. 민도식은 그것을
읽는 순간 곧 바로 전화번호와 핸드폰 전화를 자신의 책장에 써
놓았다. 혹시나 편지를 잃어버릴까 해서였다. 그리고 가슴이 쿵
쾅거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끝난 것으로 생각했던 하유미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드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