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정사4(음지와 양지)
음지(陰地)와 양지(陽地)
민도식(閔道植)은 민법총론(民法總論)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채 책장을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좀체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는지 넘겼던 책장을 되넘겨 보곤 했
다. 민도식은 안되겠다 싶어 두 팔을 책상 모서리에 잡은 채 의
자를 뒤로 밀어 버리고 말았다.
[휴우……]
그는 몹시 심각한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한숨을 몰아쉬
었다.'시험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이게무슨 꼴이람.' 그의 한
숨 속엔 그런 말이 숨어 있었다. 민도식은 의자를 밀어 놓고 책
상 옆 옷장에 걸어둔 오리털 파카를 꺼내 입고 한 평밖엔 안돼는
고시원 방문을 열고 나갔다.
민도식은 다른 사람들이 공부하고 있는데 되도록 방해를 주지 않
게 발걸음을 조심조심 옮겨갔다. 고시원밖으로 나오자 싸늘하고
매운 바람이 휘잉 불어와 그의 얼굴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민도
식은 콧잔등 밑으로 흘러내린 검은 뿔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치켜
올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끼룩, 끼룩……]
고시원 앞 저만치 펼쳐진 송정 바닷가에서 갈매기들의 울음소리
가 들려 왔다. 송정 고시원은 송정 바닷가와 바로 지척에 붙어
있어 민도식이 잡념이 들 때면 그 바닷가를 거닐 곤 했다. 이 송
정 고시원에서 벌써 2년째 사법고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학교를 마친 건 벌써 오래 전의 일이고 3년간 신림동
고시촌에서 고시 준비를 했었던 그였다. 하지만 매번 시험 때마
다 민도식은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학교 다닐 땐 꽤나 총
명하단 소릴 들었던 그였다. 친구들 중 몇몇은 벌써 대구나 서울
에서 현역 판검사가 되어 일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재학 당
시엔 학교에서 그가 최고의 실력자였다.
모의 시험에선 늘 일 이등을 다투었기 때문이다. 시험에 운이 없
었을까. 아니면 아직 그가 판검사에 대한 자질이 부족하다고 하
늘에서 그를 방해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튼 낙방의 고배를 매년
마신 그는 마음이 늘 우울했다.
고시생들에게 신림동은 고시 준비의 최고의 환경을 지원해 준다.
그 환경이 주거환경이 좋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야말로 고시준비
를 위한 실한 정보나 참고서들 그리고 수많은 고시 전문 학원들
이 그곳에 형성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다른데 보단 방세가 갑절이 비싸도 그곳이 고시를 준비하
는데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
에겐, 특히 고시 준비 당사자가 따로 돈을 벌지 않거나 벌어 놓
은 돈이 없고 오로지 집에서 보내 오는 돈으로만 공부를 하는 경
우라면 장기간의 학습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고시 준비생들 중에는 대입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르바이
트를 하거나 편의점 등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보
충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일 이년이어야 되지 민도식처럼 가난한 유학생이
장기간 서울에서 고시 준비를 한 경우엔우선 경제적으로 집안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일용직근로자인 아버지와 시장에서 행상을 하
는 어머니에게서 나오는 돈이란 뻔할 뻔 자였다.
대학 들어가서 몇 년간은 민도식은 그 집안에서 동네에 자랑거리
였지만 수년 째 시험에 낙방하자 집안의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리
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민도식은 부모님과 상의한 후 궁여지책
으로 집 근처의 이송정 고시원을 잡게 되었다.
민도식이 송정으로 왔을 때 이 곳의 경치가 너무 좋은 것이 우선
그의 마음에 흡족했다. 고시원도 신축건물이고 식사 때 나오는
밥도 서울에 비해 훨씬 영양가가 있었다.'청사포(靑沙浦)'란 마
을이 송정 고시원에서 오른쪽으로 저만치, 철길이 거의 끝날 듯
한 위치에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 왼편으로 송정 바다
가 망망대해 펼쳐져 있었다.
송정도 인근 해운대처럼 관광지이긴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해
운대는 알아도 이곳 송정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그러나 진짜 바
다의 맛을 아는 이라면 수많은 유흥업소와 호텔들이 들어서 있는
해운대보다는 인간들에 의해 덜 파손된 송정바다를 찾을 거였다.
해운대 바닷가가 옛 자취를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지만 관광객들
의 범람으로 인해 생겨난 인공적인 건축물들로 인해 그 자취와
영광은 많이 퇴색한 것은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연은 인
간의 손이 닿지 않을 때라야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니까.
민도식은 고시원 옆 밭을 가로질러 내려갔다. 얼마쯤 내려가니
송정역으로 향해 놓여 있는 녹슨 철길이 나왔고 그것을 훌쩍 뛰
어넘어 가니 곧바로 모래사장이 그의 발 밑에 소복소복 밟히었
다. 며칠전엔 참으로 오랜만에 눈다운 눈을 구경 할 수 있었다.
부산에 온 이후로는 서울에서 공부할 때만큼이나 함박눈이 내리
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며칠 전 눈은 폭설이었다. 폭설
이 내렸을 때 이곳 송정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밖으
로 나와 오랜만에 진짜 눈 구경을 했던 것이다. 아직 아무도 고
시원 앞 해변을 찾지 않은 듯 모래사장은 발자국 하나 없이 바둑
판처럼 반듯했다. 민도식은 그 모래사장을 가장 먼저 밟는다는
생각에 왠지 기분 좋았다.
[사그락, 사그락……]
한 발씩 천천히 모래사장 위를 걸어가는 그의 발 아래에서 그렇
게 솜사탕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의 발자
국만 모래사장 위에 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발자국은 아니었지만 그곳엔 이미 무엇인가가 모래사장에
또렷한 발자국을 길게 남기고 있었다. 그것은 한 두 개가 아니었
다. 자세히 보니 갈매기들의 발자국 같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저
만치 멀리로 은빛 갈매기들 여러 마리가 꼬리를 쫑긋거리며 모래
사장 위로 조그만 발자국들을 아로새기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민도식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해변 위에 그려진 갈매
기 발자국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쯤 걸어가다가
갈매기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고 다시 바둑판처럼 반듯한 모래사
장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쯤에서 갈매기들이 날개를 치고 하늘로
날아오른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얼마쯤 걸어가니 갈매기 발자국은 또 나타났다. 이
번에는 민도식은 그 발자국들의 수효를 헤아려 보고 있었다. 그
러나 수 백 개까지 발자국의 수효를 헤아리고 있던 그의 마음속
엔 어느새 그 생각은까마득하게 잊혀졌고 대신에 아까 자신의 방
에서 한숨 내뱉었던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한 아리따
운 아가씨와의 만남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당시, 민도식은 거의 매일 밤 악몽에 시달
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닷가를 찾는 일이 잦은 때이기도 했다.
평소에 고시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해서는 안될 금기 사항'
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이겨 나가
야 했다.
몸살이 날 때면 자신의 이마를 뜨겁게 태우는 몸 속의 열기를 감
내 해야 했고, 악몽에 시달리고 난 다음엔 어김없이 그의 이부자
리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에게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4월은 민도식을 정신적 공허감
과 심각한 매너리즘에 휩싸이게 만듦은 물론 육체적인 피로감도
가중시켰던 달이기도 했다. 공부는 진척이 없었고 진도는 물론,
책이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다.
포말을 섞으며 하얗게 해변을 부수어 대는 파도의 끝자락을 슬
리퍼로 밟아 가며 걸어가고 있는 그의 시선 앞 저만치 머리카락
을 바닷바람에 흩날리며 수평선을 아득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 주위엔 송정 마을에서 나온 아이들 몇
명이서 모래성을 만들며 놀고 있었다.
민도식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와 가까워질 수록 그녀의
옆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지만 그녀는 민도식이 가까이 오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그저 수평선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자의 옆모습은 무척 고왔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었는데도
입술이 빨갰다. 민도식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가슴이 약
간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냉큼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그녀 앞을 지나치며 걸어갔다.
말을 걸어 볼까…… 아냐, 말을 걸어 본다 한들 뭐 하겠어. 그냥
가자…… 그냥……. 하지만 그녀를 지나친 후에도 자꾸만 그녀의
투명한 얼굴이 생각나 돌아보곤 했다. 뭐 어때, 되면 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손해 볼 건 없잖아.
이봐, 민도식, 자네 참 한심한 녀석이군. 지금 저 여잔 혼자잖
아. 봐, 둘러보라구! 그녀와 함께 온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민
도식이 계속 해변을 걸어갈 때 그의 마음속에선 그런 말들이
계속 그를 부추기고 있었다. 민도식은 모래사장이 끝나는 곳에서
발길을 다시 그녀 쪽으로 돌렸다.
그녀는 아까 와는 달리 모래사장에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
다. 그렇게 앉아선 조그마한 조가비나 돌멩이를 바닷속에 던져
대고 있었다. 민도식이 다시 그녀와 가까워질수록 그는 혼잣말로
두 가지 질문이 그의 머릿속을 붙잡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햄릿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하고 외쳐
댄 대사처럼 절실한 마음속의 질문이었다. 민도식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 보는 것으로마음을 굳히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다시 조그만 돌멩이를 찾아 그것을 바닷물에 던지려던 손길을 멈
추고 자기 앞에 우뚝 선 민도식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
았다.
[?……]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말벗이나 했으면 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정작 용기를 내서 입을 연 민도식이었지만 갑자기 입이 꽁꽁 얼
어붙은 것 같았다. 그리고 방금 입 밖으로 낸자신의 말이 그렇
게 어색할 수 없었다.
[호호호호……]
여자가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민도
식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장래 법관 지망생의 행동 치곤 참으로 어색하고 서투르다는 생
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미안해요, 내가 좀 짓궂게 웃었죠? 앉으세요. 안 그래도 심심하
던 차였어요.]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처음 만난 그녀……. 두 사람은 모래사장 위에 나
란히 앉아 멀리 푸른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이야기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민도식은 얘기를 나누면서 자기 옆에 있는 여자가 왠
지 처음 대하는 여자 같지 않다고 느꼈다.
오래 전에 이미 알았던 사람처럼 느껴졌고, 또 자신이 중학교 시
절 짝사랑했던 음악 선생님과도 일부분 닮아 있었다. 그녀가 자
신의 이름을 밝혔는데, 하유미라고 했다. 다소 이국적인 이름이
었다.
그리고 외모는 이국적이었다. 게다가 키는 자신보다 훨씬 커 보
였다. 그녀가 평범한 신발을 신었는데도 자신보다 큰데 하이힐을
신는 다면 자신 보다 머리 하나는 더 올 듯 싶었다. 민도식은 키
가 작달막했기 때문이다.
[고시 준비요?]
한참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민도식은 지금 자신이 사법고
시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했다.
[네. 하지만 번번이 낙방해서……]
[뭐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죠, 뭐. 언젠가 때가 되면 다 되겠
죠.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근데 이 근방 사세요?]
[네. 저기 저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 보이죠? 저기서 공부해요.
]
민도식이 송정 고시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머, 집이 참 예쁘네요. 저기가 고시원이란 말예요?]
[네.]
[꼭 그림 속에 나오는 집 같아요.]
그녀가 감탄한 듯 말했다.
[겉모습만 그렇지 실상 제 방에 들어가 보면 엉망이에요. 작기
도 하고. 한 평밖엔 안돼요.]
[한 평요?]
[네. 방안엔 책상 하나와 몸만 겨우 누울 자리밖엔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선 여기 바다가 완전히 다 내려다보이겠는걸요?]
[그렇긴 하죠. 제 방이 고시원에서 개중 전망이 좋은 방이에요.]
[우와, 부럽다! 그럼 제게 방 좀 구경시켜 주면 안되겠어요?]
[네? 아, 근데 그건 좀……]
민도식은 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왜요? 뭐 숨겨 놓은 애인이라도 있어요? 호호. 괜찮아요, 사실
전 공부 잘 하는 사람이 제일 부러웠어요. 그래서 도대체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보는 책은 어떤 책일까 궁금해서 말이죠, 괜찮
겠죠? 좀 봐도.]
민도식은 하유미가 보채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허락했다. 처음
보는 낯선 여자에게 방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하긴 했
지만 그녀의 부탁에 심한 거부감 까진 없었다.
민도식이 고시원으로 가서 자신의 방문을 열었을 때 민도식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하유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
안으로 들어와 민도식이 높게 쌓아 놓은 일련의 고시 준비용 서
적들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리고 창가에서 두 사람은 송정바다를 나란히 내려다보면서 담
소하다가 그 방에서 나왔다. 하유미가 자신이 살 테니 식사를 함
께 하자고 했다.
두 사람은 해변을 걸어 송정 마을까지 가서 한 횟집엘 찾아 들어
갔다. 식사를 할 동안 붉은 노을이 송정 바다의 수평선 귀퉁이에
가득 몰리면서 번지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가끔 들러도 되죠? 방해만 되지 않는 다면.]
민도식은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녀는 약속이
있어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녀와 헤어진 후 민도식은 그녀와 관
계가 오래 지속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민도식의
예감은 적중하기 시작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불같은 사랑이 민도식에게 시작
된 것은 바닷가에서 그녀를 만난 지 닷새 만이었다. 새벽 4시
경, 그의 고시원으로 누군가가 크게 방문을 쿵쿵 두들기기 시작
했다.
방문을 열어 보니 한 여자가 서 있었는데 그녀는 다름 아닌 하유
미였다. 민도식은 한편으론 놀랍고 한편으로 반갑기도 해서 그녀
를 방안으로 들였다.
하지만 몇 사람이 새벽에 난데없는 소란에 나왔다가 의아한 눈길
로 하유미를 보았지만 민도식은 그녀를 재빨리 방으로 들인 후
방문을 걸어 잠갔다. 하유미는 몹시 취해 있었다. 입에서 술 냄
새가 풍겨 왔고 눈은 반쯤 풀려 있었다.
[미안해요, 이런…… 모습 보여 드리는 게…… 끅…… 정말, 미
안해요……]
민도식은 안되겠다 싶어 방에 자리를 깔고 그녀를 눕혔다.
[좀 누우세요. 많이 취하셨네요. 좀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겁니
다.]
민도식은 책을 덮고 불을 꺼서 하유미 옆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이내 잠이 들
었다.
자다가 가끔 속이 안 좋은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깨어나지는 않
았다. 하유미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화장을 짙
게 해서 다른 사람 같기도 했다. 하지만 화장을 한 그녀의 모습
이 달빛을 받아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불을 걷어 내며 몸을 뒤척일 때 그녀의 탄력 있고 늘씬한 다리
가 고스란히 그의 시선을 붙잡아 왔다.
민도식은 그녀의 늘씬한 다리를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
나 오래된 금욕과 인내심으로 그것을 애써 자제하고 있었다.
하유미, 이 여잔 대체 뭐 하는 여자일까? 지금 이 시각에 술을
이렇게나 정신없이 마시고 날 찾아온 것을 보면…… 그리고 화려
하고 야한 이 여자의 의상을 보면 평범한 여자는 아닌 것 같다.
그래, 어쩌면 이 여잔 유흥업소에서 일을 하는 여자일지도 모르
겠군. 그렇지 않다면 이런 옷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할 여자란 없
을 테니까. 어둠 속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는 그녀를 보는 민도식
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깨어난 것은 오전 11시경이었다. 민도식은 그 때 그녀
옆에서 벽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하유미는 민도식이 자신을
밤새 지켜 준 것에 감동했다. 민도식이 깨어난 것은 하유미가 깨
어난 후 몇 분 지나서였다. 민도식은 하유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며 벽에서 몸을 떼어 냈
다.
[아, 이거…… 잘 잤어요? 유미씨.]
[네. 덕분에. 근데 밤새껏 저 때문에 잠을 못 잤군요! 미안해서
어쩌죠?]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런데 간밤에는 술에 많이 취하신 것 같
던데……]
[아, 그거요. 네, 조금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
게 여기까지 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네요.]
하유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은 그날 오후 내내 함께 있었다. 그리고 오후 여섯 시경
에 그녀는 가 봐야 한다고 했고 해운대 방향으로 택시를 황급히
타고 갔다. 민도식과 하유미가 처음 육체 관계를 맺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의 일이었다.
그 때도 하유미는 약간 술에 취해 있긴 했지만 정신을 가누지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해변으로 나
가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걸었다.
그 날 하유미는 외롭다는 말을 그에게 자주하며 자꾸 민도식의
팔짱을 껴 왔다.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는 무척 외로워 보였고 민
도식은 그녀의 고독을 달래 줄 방법을 생각해 평소에 하지 않던
우스갯소리 같은 것을 그녀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바닷가를 거닐면서 하유미가 자꾸 몸을 밀착시켜 오는 바
람에 민도식은 서서히 육체적 욕망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 두 사람 모두 뜨거운 눈길을 주고받으면서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었다. 하지만 둘이서 육체적 관계를 맺기에는 송정
해변은 너무나 공개된 자리였다.
더군다나 그날 따라 해변을 찾은 사람이 더러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상기된 얼굴로 근처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 허겁지겁 옷을 벗어 내렸고 두
사람은 사랑의 행위를 허름한 여관방에서 나누었다.
침대가 낡아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섹스
를 하는 동안 하유미가 신음 소리를 크게 질러댔지만 누가 듣던
말던 그것은 오로지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고 있던 두 사람의 몫
이었다.
하유미는 처녀가 아니었다. 애초 그런 것을 기대하고 민도식이
그녀와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으나 하유미가 처녀가 아니란 것
이 민도식의 기분에 켕기긴 했다.
그런 한편 비교적 세상에 대해 관대하고 사람에 대해 관대한 민
도식 스스로가 그러한 자신의 사고방식이 보수적이라고 생각했고
'내 여자만은 순결한 여자'이길 은연중 바라기도 했지만, 아무튼
하유미는 처음이 아니었고 오히려 섹스 할 때 줄곧 자신을 리드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민도식이 그 동안 지탱해 오던 금욕의 벽은 한순간에 하유미로
인해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민도식
스스로가 인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민도식은 하유미를 사랑한다
고 믿게되었고 하유미 역시 민도식을 깊이 사랑한다고 거듭 말했
다.
하유미와 사귄 지 2개월 가량 지났을 때 민도식은 그녀의 사적
인 것을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유미는 민도식이
그런 질문을 던질 때면 대답을 회피하거나 다른 말로 돌리곤 했
다.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는 의미였으나 민도식은 그렇
다고 피할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유미와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결혼하자! 오빠가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앞으
로 널 행복하게 해 줄 자신 있어. 유미야, 우리 결혼하자!]
민도식은 애절한 심정과 진심 어린 표정으로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하지만 하유미는 그의 청혼을 단호히 거절했다.
[왜 안 된다는 거지? 왜? 난 널 사랑해. 정말 사랑한다고!]
민도식이 그의 어깨를 잡고 간절하게 청혼해 오는 것을 하유미
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민도식에게서 도망가듯 택시를 집어타고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떠난 이후로 하유미는 그에게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
다. 민도식이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그녀는 끝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
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 곁에 있어준 것은 정말 하늘에 두고 감사해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단 한번의 청혼으로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그녀가 떠난 후로 민도식의 손엔 책이 잡히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은 두 사람의 만남이었지만 민도식의 가슴 깊은 곳
에 하유미란 여자의 얼굴이 쿡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개월이 흘러 지금 민도식은 송정 해변에 서 있는 것이다.
과연 시간의 힘이란 것은 위대한 것이다. 하유미가 떠난 후 몇
개월을 지내면서 그녀에 대한 열정도 다소 사그라지고 있었기 때
문이다. 불과 한달 전만 해도 민도식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에 불
면의 밤을 지새워야 했다.
포말을 부수어 대는 파도 속에 던진 시선을 거두면서 민도식은
천천히 다시 송정 고시원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해변 위로 은빛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다니던 갈매기들도 이젠 자신의 시야 저 멀
리 수평선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모래알이 그의 슬리퍼 안 발바닥 밑으로 파고드는 것을 털털 털
어내는 걸음걸이로 그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미래의
법관을 꿈꾸는 그가 공부하는 송정 고시원으로.
화려한 정사4(육식동물)
포 식 동 물 1
이종식은 마담 유연실이 지시 한대로 영업을 마친 후에 혼자 업
소 안에 남아 있었다. 이종식은 가난한 부모들의 잦은 싸움과 폭
력으로 인해 가출한, 이른바 가출 소년이었다.
그의 나이는 열 아홉 살로 약간 마른 편이지만 미남형이었다. 하
지만 성격은 내성적이고 말수는 적은 편이었다. 무작정 집을 나
와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이 부산역이었는데 이종식은 바다가 보
고 싶어서 해운대로 직행버스를 타고 와서 해운대 바닷가를 하릴
없이 거닐었었다.
그 때 우연히 만난 여자가 바로 이 업소의 마담인 유연실이었다.
벌써 1개월 전의 이야기다.
[오늘 고생 많았어.]
유연실이 싸늘한 바깥 날씨에 얼굴이 새파래져 들어오면서 말했
다.
[많이 춥죠?]
[어유, 날씨가 많이 싸늘해졌어. 그런데 이 안은 또 왜 이렇게
추워?]
유연실이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제가 히터를 껐어요.]
[얘는, 지금 벌써 끄면 어떡하니? 아직 집에 갈 시간도 아닌데!]
유연실이 히터를 다시 켰다.
[댁에 안 들어가실 거예요?]
[그래! 오늘 종식이랑 오랜만에 술 한잔 할려구.]
유연실이 이종식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왜? 싫어? 나랑 술 먹는 게?]
[…….]
[싫은 가보구나? 아무 대답도 없는 게.]
[아뇨,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뭐? 괜찮아 누가 널 잡아먹겠다니? 늙은 년이랑
놀기 싫다는 거야?]
유연실이 이종식을 쏘아보며 말했다. 이종식이 그녀의 서슬프런
눈빛에 몸을 움츠리자 유연실은 금방 표정을 바꾸며 이종식에게
다가갔다.
[종식아 이 누나하고 오늘 술 한 잔 하자, 응! 괜찮겠지?]
이종식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진작 그럴 것이지.]
유연실은 비로소 표정이 완전히 풀리면서 이종식을 테이블로 이
끌어 앉혔다.
[좋아,오늘밤은 내가 종식이한테 단단히 한턱 내지! 최고급 양
주로 말야!]
유연실이 그렇게 소리치며 양주를 가지고 왔다. 이종식이 유연
실을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유연실이 이종식의 어깨를
가만히 눌렀다. 그리고
[괜찮아, 누나가 다 한데잖니!]
하면서 이종식이 거들려는 것을 사양했다. 그리고 이윽고 테이
블 가득 술상이 차려졌다. 손님들에게 팔면 백만 원도 더 받을
술과 안주였다.
이종식과 유연실은 테이블을 가운데로 하고 마주 앉았다. 유연
실이 영업 마치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을 땐 그녀에게서 호된
꾸지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종식은 유연실의 호들갑스런
행동에 당황하고 있었다. 유연실의 성격이 앙칼진 부분이 있어서
약간 두렵기도 했었다. 하지만 유연실이 함께 술을 마시자는 말
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유연실이 이종식의 술잔에 집게로 얼음 조각을 몇 개 넣은 후
양주를 알맞게 따랐다. 이종식은 양주를 건네 받아 유연실의 술
잔에도 양주를 가득 채웠다.
갈색의 투명한 술 색깔이 약간 어두운 조명 빛에 엷은 그림자를
테이블 위에 만들어 놓고 있었다.
[자, 건배하자!]
유연실이 잔을 들며 말했다. 건배를 한 후 이종식은 술잔에 입
만 약간 댄 후 잔을 내려놓았다.
[얘! 첫잔은 비우는 거야! 이렇게!]
유연실이 시범을 보이듯 독한 양주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녀가 빈 술잔을 테이블 위로 놓았을 땐 술잔 안에 담겨 있던 얼
음 조각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종식은 눈을 질끈 감
고 단숨에 양주를 목구멍 안으로 꿀꺽 삼켰다.
이종식은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그가 술을 배운 것도 집을 가
출해서 이 업소에서 배운 게 처음이고 또 조금이라도 술을 마실
때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호호. 어머, 얘 봐라! 한 잔 마시고도 얼굴이 홍당무 같네!]
유연실이 재밌다는 듯 배를 잡고 웃어젖혔다. 그러면서 또 양주
를 그의 빈 잔에 가득 채워 넣었다.
[얘,그래가지구 어떻게 이 가게에서 일할래! 여기서 일한 지 한
달이나 됐음 술이 꽤 늘었을 텐데 말야. 넌 손님들 술 한잔씩 안
받아먹었어?]
[마시는 척 하고 휴지통에 버렸어요.]
이종식이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그래. 넌 남자야, 남자는 술이 한강이래두 다 마시고
도 끄떡없어야 한다구. 좋아, 오늘 이 누나 앞에서 술 마시는 법
좀 배워 둬!]
[네…….]
[좋아, 오랜만에 종식이가 마음에 든다. 자!]
유연실은 이빨을 드러내어 웃으며 파인애플 조각을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종식은 마다하지 않고 그녀가 건넨 파인애플을
받아먹었다. 하지만 테이블이 커서 유연실이 그에게 파인애플을
집어 줄 때 허리를 많이 굽혀야 했다.
[안되겠어, 너한테 본격적으로 먹여 주려면 자리를 좀 옮겨야겠
어.]
그러면서 유연실은 이종식이 앉아 있는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
다. 이종식은 그녀가 너무 가까이 다가와 앉자 약간 거북해 의자
를 들어 옮기려 했다. 그 때 이종식의 손을 유연실이 먼저 잡아
이끌었다.
[누나한테도 안주하나 집어 주지 않을래?]
이종식은 할 수 없이 유연실과 바짝 붙어 앉아 있어야 했다. 이
종식은 체리를 포크로 찍어 그녀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종식이가 주니까 너무 맛있다. 하나 더 줘!]
유연실이 체리를 씹어먹으면서 말했다. 이종식은 그녀가 말 한
대로 다시 체리 한 개를 포크로 찍어그녀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베리 굿이야. 자, 우리 술 한잔하자!]
유연실이 이종식의 팔짱을 껴 오며 잔을 집어들었다. 그 때 이
종식의 팔에 유연실의 젖가슴이 부딪혔다. 이종식은 깜짝 놀라
술잔을 집어들면서 곁눈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원피스였기 때문에 젖가슴의 명암은
조명빛을 받아 그녀의 옷 속에 뚜렷이 그려져 있었고 또 금방이
라도 옷이 터져버릴 만큼 그녀의 젖가슴은 팽팽했다.
유연실이 따라주는 술을 연거푸 비우자 어느 새 이종식의 얼굴
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유연실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별로 술 취한 사람 같지 않아 보였다.
처음엔 말수가 적었던 이종식이었지만 이젠 유연실의 물음에 곧
잘 말대답도 했다. 유연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지만 실상은
자신의 신세타령 일변도였다.
[종식아, 너도 빨리 돈 많이 벌어야 해. 돈 없음 자식도 팔아먹
을 세상이야! 알겠어? 우리 어머닌 그놈의 돈 때문에 남자를 몇
명이나 바꿨는지 몰라, 그리고 그게 유전인지 나까지도 이 지경
이니! 빌어먹을……]
[누님 괜찮을 거예요, 누님은 능력이 있잖아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고맙다 얘! 사실 이 유연실 능력은 웬
만한 사람이면 다 안다구! 지금 내가 사는 빌라 몇 년만에 산 건
지 알아?]
이종식은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포 식 동 물 2
[불과 1년만에 그 집을 산 거야! 그게 싯가루 얼마나 나가는지
나 아니? 3억이야, 3억!]
유연실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1년에 3억이라면 하루에 얼마를
벌었다는 말인가? 이종식은 그녀의 말에 입이 쩍 벌어졌다. 대구
에 계시는 자신의 부모님이 평생토록 뭐 빠지게 고생해서 남은
결과가 겨우 전셋집인데 유연실은 1년만에 3억 짜리 빌라를 샀다
니 정말 놀랄 일이었다.
[대단하시군요, 누님!]
이종식이 감탄한 듯 말했다.
[그게 다 요령이라구, 요령! 특히 이런 곳에 있으면 그런 요령
안 가지고 있음 성공 못해. 알겠어?]
이종식은 유연실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 요령이라는 것이 궁금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종식아, 사실 말이지 이 유흥업소란 게 여자들이 잘만 하면 괜
찮은 곳이다! 왠지 아니? 여자는 몸을 팔 수 있어도 남자는 몸을
팔 수 없거든.]
[하지만 호스트 바 같은데도 있다던데요?]
[있지. 하지만 그건 극소수잖니? 남자가 아무 유흥업소에 가서
몸 팔겠다고 하면 누가 받아 준다니? 겨우 해 봤댔자 웨이터뿐이
잖니? 너만 해도 그렇잖아, 너 지금 하는 일이 뭐니 여기서? 웨
이터잖아? 그치만 여잔 달라. 얼굴이 아무리 못생겨도 술 따르고
몸팔겠다고 하면 유흥업소 업주 치고 쌍손 들고 안 받아 줄 사람
이 누가 있겠어? 안 그래?]
유연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글쎄 너 정도라면 호스트 바에서 써 줄지도 모르겠구나.]
유연실이 웃으면서 말했다. 유연실이 아까보다는 취기가 든 모
양, 자세가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구 참, 요 앞전에 나 호스트 바엘 갔었단다.]
[정말요?]
[그래. 정분이 있지? P여전 다니는.]
유연실이 말하는 정분이란 임정분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르바이
트 삼아 이 업소에서 손님 술 상대를 하는 아가씨였는데 눈웃음
이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네. 알아요.]
[걔하고 저번 달에, 음…… 그러니까 너랑 만나기 전이구나! 그
때 정분이 따라 함께 갔었는데 꽤 괜찮았어.]
[정말 그런 데가 있긴 있어요?]
[얘 봐라, 순진한 척 하기는. 당연하게 있지! 약간 비싼 게 흠
이지만……]
유연실이 그 때를 생각하는 듯 턱을 괸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 때 내 파트너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심란해진다.]
유연실이 턱 괸 손을 떼어 술잔을 집어들며 말했다.
[그건 왜요?]
[글쎄 네가 지금 내 말을 이해할 지 모르겠구나? 넌 아직 어리
잖아.]
이종식은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연실이 방금 자신의 말이
무슨 말인지 설명을 하듯 물었다.
[너 여자 경험해 봤니?]
[…….]
[후후, 이런 숙맥! 한참 힘 좋을 나이에…… 꼭 너처럼 생긴 애
하고 파트너였는데 그 때 난생처음 그걸 느꼈거든!]
[…….]
이종식은 그녀의 말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유연실은 상기된
눈으로 이종식을 보더니 얇은 미소를 물었다. 그리고는 이종식의
손을 잡아 자신의 젖가슴으로 이끌었다.
[안돼요, 이러시면……]
이종식이 반사적으로 말했으나 그 역시 몸이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처음 만져 보는 여자의 젖가슴…….
그리고 연거푸 마셔 댄 술 때문인지 이종식은 그녀의 젖가슴을
잡은 손을 떼어놓지 못했다. 손에 만져지는 젖가슴의 감촉이 이
상하게 자신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고 손바닥의 한 정점에 머물
러 있는 유연실의 도드라진 유두의 감촉은 금방이라도 손등을 뚫
고 나올 것만 같았다.
이종식은 조심스럽게 유연실을 바라보며 그녀의 유두를 만지작거
렸다. 그 때 만일 유연실이 눈을 뜨고 있었더라면 그런 대담한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인데 다행히 유연실이 신음 소릴 내지르며
눈을 가늘게 감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유연실은 흥분이 되는지 몸을 비틀어 댔다. 사방에 드리운 흐린
조명 불빛에 유연실의 전신의 굴곡이 선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유연실이 비록 30대 중반의 나이라고는 하지만 몸매는 나무랄 데
가 없는 완벽한 몸이었다.
단지 그녀의 몸에서 약간 흠이라면 그녀의 가슴이 자신의 몸에
비해 훨씬 커 보이는 점이었다. 두 사람은 삽시간에 엉겨붙었다.
마치 조그만 불씨 하나가 산 전체를 완전히 불태워 버리듯 두 사
람은 뜨겁게 포개졌다.
유연실은 쾌감이 전신에 퍼지자 자신의 옷을 스스로 찢어 버리며
그를 받아들였고, 이종식은 처음 대하는 여자의 육체에 대한 신
비로운 경외감과 더불어 야릇한 자극을 동시에 느끼면서 유연실
을 테이블 밑으로 쓰러뜨렸다.
유연실은 홀 바닥에서 섹스에 미숙한 이종식을 자신의 성감대를
계속 자극하도록 종용했고 이종식은 그녀의 쾌감을 절정에 이르
게 했다.
남자든 여자든 성년이 되어 육체적인 경험을 한차례 치르고 나
면 정신적인 연령이 성장하는 것일까. 이미 육체적 관계의 즐거
움을 익히 알고 있는 유연실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성(城)에 이종
식을 들여놓았다.
이종식은 이제 그녀만의 성(城)에 출입시킨 수없이 많은 사람 중
에 한 사람이었지만 꽤 쓸만한 녀석 같았다. 잘만 하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는데 더할나위 없는 심복으로 키울 만한 녀석 같
았다.
한편, 그녀와 한차례 격정적인 섹스를 치른 이종식은 하늘같은
마담의 존재가 이젠 더 이상 하늘같지 않았다. 왠지 자신과 오래
전에 아주 친밀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더군다나 방금 그녀의
몸 속에 어쩌면 자신의 아이를 낳게 할 수도 있는 다량의 정액을
뿌려 놓은 것이다.
[이리 와 봐!]
유연실이 무릎을 홀 바닥 위에서 끌며 이종식에게 다가갔다.
[후후, 넌 귀여운 구석이 있어!]
유연실이 이종식의 귓불을 만져 주면서 말했다. 이종식은 자신
의 몸을 누르고 있는 유연실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와 섹스를 치
른 뒤라 허탈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다. 취기는 있었
지만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이 과연 자신의 본모습이었는지 의심스
러울 정도였다.
[일어 날래요.]
이종식은 두 손으로 그녀를 밀어냈다.
[그래, 알았어.]
유연실도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하지만 자기가 입
고 있던 옷이 찢어져 버려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유연실
은 여벌로 갖다 둔 옷을 입기 위해 탈의실로 쓰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종식은 그날 밤, 유연실을 따라나섰다. 평소에 이종식은 유연
실이 몰고 다니는 차 문을 열어 주기만 했을 뿐 정작 타 본적은
없었다. 그 차에 유연실과 나란히 탔다. 실내는 고급 차답게 널
찍했고 자리는 편했다.
[우리 노래 들을까? 요즘 이 곡이 너희들 또래에선 유행이라며?]
이종식은 유연실이 집어든 시디 타이틀을 보았다. 최신 10대들
에게 유행하는 시디 타이틀이었다.
[아니, 누님도 그런 노랠 좋아하세요?]
[후후. 이래뵈두, 누나 마음은 아직도 십대란다.]
그러면서 유연실은 캐비닛에서 꺼낸 시디 타이틀을 시디 플레이
어에 밀어 넣었다. 빠른 랩 풍의 곡이 차안에 퍼지는 가운데 세
단은 출발했고 노래 두 곡(曲)이 거의 끝나 갈 때 한 빌라 앞에
서 세단은 멈추어 섰다.
포 식 동 물 3
[다 왔어.]
차의 시동을 끄면서 유연실이 말했다. 유연실이 말한 싯가 3억
짜리 빌라였다. 전체 이층으로 된 건물 외벽은 붉은 벽돌을 높이
쌓아 있었고 그 모서리에 감시 카메라가 작동되고 있었다. 그리
고 정원수의 대부분은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고 있었다. 이종식은
빌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멈칫거렸다.
[안 들어오고 뭐 하니? 어서 들어와.]
유연실이 따라 들어오지 않고 머뭇거리는 이종식을 보면서 말했
다.
[들, 들어가도 돼요?]
이종식이 물었다.
[후후, 들어와. 오늘부터 넌 나와 함께 살 거야.]
[네?]
이종식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 이제 이 누나랑 함께 있잔 말이야. 너 셋방살이한다며?
객지 나와서 그게 무슨 고생이니? 누난 괜찮으니까 아무런 걱정
말고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도록 해. 알겠니?]
유연실이 너그러운 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이종식에게 다가가 그
의 손을 잡아 빌라 안으로 이끌었다. 이종식은 그녀의 말에 눈물
이 핑 돌았다. 평소에 앙칼져 보이고 표독스럽기까지 하던 유연
실인데 갑자기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종식의 착각이었다. 유연실이 그를 자신의 집으
로 들이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유연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
빌라 안은 유연실이 1년여만에 사들였다는 빌라 치곤 으리으리
했다. 이종식이 생전에 살아보지 못한 방이었다. 영화나 텔레비
전 드라마에서나 보았음직한 실내장식이 그녀의 빌라 안에 재현
되어 있었다.
거실 가운데엔 진짜 호랑이 가죽이 무서운 이빨을 쩍 벌리며 두
눈을 번뜩이고 있었고 그 호랑이 가죽 주위로 검은 색 가죽 소파
가 육중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왼쪽 벽으로 일본의 막부
시대에 일본 장수가 썼음직한 고풍스런 투구와 일본도가 엇갈린
채 장식되어 있었다.
또, 그녀의 방안에 있는 가구나 전자 제품은 SONY나 HITACHI등
일본 제품 일색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방에서 이종식의 시선을
유난히 잡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유연실이 키모노를 입고
서 한 중년 사내와 정다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유연실은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의 모습인 것 같았
다. 지금도 그녀의 미모는 상당한 수준이지만 그녀가 젊었을 땐
더욱 그럴듯했다. 지금처럼 몸에 살도 많지 않고 늘씬했다.
이종식이 그 사진을 넋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
있을 때 유연실이 희고 투명한 슬립 가운을 걸치고 그 앞에 나타
났다.
[누나 젊었을 때 미인이지? 안 그래?]
[네. 상당히…….]
[그래, 지금은 그 때에 비하자면 많이 삭았지. 저 사진 지금부
터 10년 전에 찍은 사진이야. 누나가 간직하고 있는 사진 중에
가장 아끼는 사진이기도 하고.]
[저분은 누구예요?]
이종식이 물었다. 그러자 유연실은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일 교포야. 엄밀히 말해 일본 사람이기도 하지. 부모님이 일
제시대 때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안주하게 되었는데 일
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야.]
[네……]
[하지만 그 이야긴 그만 하자, 언젠가 때가 되면 저 사람과 나
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날이 있을 테니까.]
유연실이 지금은 별로 그 사람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했다.
[참, 네가 지낼 방을 잡아 줘야지!]
유연실이 생각난 듯 말했다.
[음…… 그래, 저 방이 좋겠다.]
그녀가 말한 방은 출입문 바로 옆에 있는 방이었다. 그 방안에
들어섰을 때 이종식의 눈에 띤 것은 수많은 석고상이었다. 그리
고 이젤과 캔버스가 방구석에 가지런히 정돈이 되어 있었고 벽면
에는 액자들이 걸려 있었는데 그 그림들은 단순히 그녀가 구입한
것 같진 않았다.
[누나, 저 그림 직접 그리신 거예요?]
이종식이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사람이 그린 거야. 내 주제에 무슨 그림이니? 나중에 알
게 될 거야.]
아까부터 그녀가 나중에 알게 된다는 말이 계속 이종식의 뇌리
속에 자리잡아 갔다. 어떤 면으로 보면 유연실이 무척 비밀이 많
은 사람 같기도 하고 또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말할 때면 유연실
의 얼굴 표정은 약간 어두워 보이기까지 했다.
필시 무슨 사연이 그녀에게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종식은 그 비밀이 사진 속에 있던 중년 남자와 관련된 것이라
고 미루어 짐작했다.
유연실이 쓰라고 말한 방은 세 명이 자도 될만큼 넓은 방이었
다.
[내일 네가 사용할 침대를 들일 테니 오늘은 누나랑 함께 자자.
]
유연실이 말했다. 이종식은 그 방에서 나왔다. 유연실이 자신의
방으로 가더니 가운을 가지고 나왔다.
[이건 저 사람이 쓰던 건데 오늘부터 네가 입으렴.]
[…….]
[저 사람은 당분간 여기 안 올 거야. 지금 일본에 있어. 참, 너
한테 한 가지 당부해 둘 말이 있어.]
이종식은 유연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앞으로 여기로 전화 오면 절대 받지 마. 또, 혹시 누가 물으면
그냥 내 친 동생이라고 해야 해. 알겠지?]
[네.]
이종식은 고분고분 대답했다. 이종식은 유연실이 건네준 가운을
걸쳐 보았다. 소매가 다소 길었지만 품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어머, 어쩜! 꼭 맞춘 것 같네? 거울 한 번 들여다봐.]
유연실이 이종식의 손을 잡아 거울 앞으로 이끌었다. 보라색 가
운이었는데 밝은 조명을 받아 제법 귀티가 나보였다. 가운의 소
재는 비단인 듯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고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이 피부를 부드럽게 누르고 있었다. 거울 앞에서 이종식은 완
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유연실이 그런 이종식 뒤에 바짝 몸을
밀착시켜 왔다.
[완전히 새 사람 같아.]
유연실이 거울 속을 그의 뒤에 서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서
이종식의 허리를 그녀가 두 팔로 감아 왔다.
[?……]
마치 자신의 등뒤에서 유연실이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것처
럼 그녀의 살결이 느껴졌다. 이종식의 허리 앞으로 뻗어 나온 그
녀의 두 손이 이종식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고요한 적막감과 더불어 정적이 맴돌았고 후우후우, 하는 거친
숨결이 그녀의 입 밖으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유연실의 손이
계속 이종식의 몸을 자극하면서 그의 실체로 이동했다.
그녀의 손이 닿자 처음엔 풀 죽은 채 가랑이 사이로 기어 들어가
있던 그것이 서서히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마음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발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음……]
거울 속의 유연실은 눈을 감고 있었다. 이종식을 유연실이 밀어
붙이는 바람에 자세가 불편했지만 그는 자세를 고치지 못하고 구
부정한 자세로 그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유연실의 손이 그의 보라색 가운을 천천히 벗겨 내리면
서 혀를 내밀어 그의 등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
의 입김이 등 줄기를 타고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포 식 동 물 4
유연실은 자신의 혀를 이종식의 허리에 내몰다가 희고 투명한 자
신의 슬립 가운을 벗어 던졌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단
지 자그마한 팬티만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그를 더듬던 유연실이 무릎을 꿇고 그의 앞으로 기어왔다. 그리
고 이종식의 발기한 실체를 보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흐릿한 미
소를 물었다. 이종식은 그녀가 자신의 실체를 입안에 머금을 때
눈을 찔끔 감았다.
도저히 눈뜨고는 그 해괴한 유연실의 행동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
다. 그리고 천장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던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대형 액자 사진이었다.
중년 남자와 유연실이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 속에서
이목구비가 뚜렷한 중년 남자가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이종식
은 사진 속의 중년 남자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자신의 실체를 머
금고 있는 유연실을 내려다보았다. 그 때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
가락이 그의 가슴을 살짝 짓눌렀다.
거울 앞에서 두 사람은 땀을 흠뻑 쏟아 댔다. 주위가 너무나 조
용해 유연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
까 이종식은 조심스럽기도 했지만 빌라의 사방 벽은 튼튼해서 쥐
꼬리만큼도 그 소리가 새어나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커튼 사이로 내비치는 밖은 대낮처럼 불을 밝힌 빌라 안
과는 달리 시커먼 어둠이 켜켜이 내려앉아 있을 뿐이었다.
비슷한 시각, 파라다이스 호텔의 한 객실 방안에서 히데오와 하
유미 역시 격정적으로 몸을 섞은 후였다.
섹스가 끝난 후, 두 사람은 함께 욕실로 들어가 서로의 땀을 씻
어 내려 주었고 나란히 욕실 밖으로 나왔다.
[이대로 그냥 떠나면 우리 귀여운 유미쨩을 또 언제 보지?]
소파에 앉아 다리를 포개앉으며 히데오가 말했다.
[꼭 내일 가셔야 하는 거예요?]
하유미가 머리의 물기를 타월로 털어 내며 되물었다.
[그래. 펼쳐 놓은 일이 한 두 가지라야 말이지.]
히데오가 자신이 일본으로 돌아가는 이유를 말했다.
[무슨 일을 그렇게 많이 펼치시는데 그래요?]
[이것저것 돈 되는 것은 뭐든지.]
일본의 야쿠자…… 일본의 최고의 지하조직 야쿠자. 그러면서도
엄연한 거대 기업체로서 일본 전역에 '야쿠자'란 이름을 드높이
고 있는 지하 조직. 실제로 일본에선 젊은이들이 야쿠자의 일원
이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취업을 희망하기도 한다.
매춘이나 빠찡코나 카지노 같은 도박 사업, 그리고 마약 유통
등, 각종 이권에 개입하여 어마어마한 자본을 축적하고 있다. 그
거대 조직체의 중간 보스 중의 한 사람이 바로 하유미와 함께 있
는 히데오였다.
하유미는 작달막한 이 사나이가 얼마만큼 파워를 가지고 있는 사
람인지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마담 유연실의 말마따나 큰 물건은
물건이라는 것 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벌써 이틀 동안
하유미는 이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그에게 자신의 몸을 과감히
허락했고 또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래서인지 자신을 바라보는 히데오의 눈빛이 첫날과는 많이 달
라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 기회에 닷지(일본인 현지처)로 나서
던가 아니면 그의 말마따나 그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면 최소한
자신의 앞날은 돈걱정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망설여졌다. 여자에게 있어서 사랑은 무엇인가? 하
유미는 생전 처음 정말이지 진실 되어 보이는 남자에게서 청혼
받은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가난한 고시생 민도식…….
젖은 머리카락을 타월로 털어 내면서 하유미는 히데오의 옆모습
을 흘낏 쳐다보았다. 히데오의 얼굴에서 민도식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 하지만 하유미는 그 얼굴을 애써 지워
버리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히데오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두 팔을 소파 위에 올려놓은 채
기분 좋게 앉아 있었다.
[이번 3월달에 다시 올 거야. 그 때 일본에 갈 건지 결정해 둬.]
히데오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의 말은 진지했다.
[알았어요.]
하유미가 옷걸이에 걸어 둔 노란 색 가운을 걸치면서 말했다.
하유미는 히데오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내일 일본 돌아가면 돈을 좀 보내줄테니 그것으로 아파
트 한 채 구입해. 돈이 남으면 헬스클럽에도 좀 가고.]
히데오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의 말에 하유미는 가
슴이 쿵쾅거렸다.
[정말요? 정말 아파트 사 주시는 거예요?]
하유미가 못 믿겠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앞으로 나 이외에는 아무도 사귀면 안돼.]
히데오가 말했다.
[알,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하유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그와 약속했다. 평생 동안
사글세방을 전전하던 하유미였다. 히데오가 아파트를 사준다니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을 해 버린 것이다. 히데
오가 눈을 감은 채 하유미의 어깨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
다.
이튿날 히데오는 마담 유연실의 세단으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
다. 마담 유연실은 전날 밤에 히데오와의 일을 그녀에게서 듣고
싶어했다.
[히데오가 아파트 사줄 돈을 붙여 준 대요.]
공항에서 해운대로 돌아오는 길에 유연실의 차안에서 하유미가
그렇게 말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유연실이 깜짝 놀란 표정으
로
[그래?]
하고 되물었다.
[네……]
[너 히데오상 단단히 물었구나! 그것도 단 이틀 밤만에 말야.]
유연실이 감탄한 듯 말했다.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이틀만에 선뜻 그런 제안
을 할 수 있는 건지? 참, 언니, 저 히데오란 사람 돈이 많긴 많
나 보죠?]
하유미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그랬잖아, 잘 해주라구! 내가 달리 너한
테 그런 말했겠어! 암튼 용타 너. 이틀만에 히데오의 마음을 사
로잡아버렸으니깐 말야.]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한 듯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줬는데 저렇게 안달이지? 아까도 봤는데 히데
오가 너랑 잠시도 헤어지기 싫은 눈치더라구.]
[글쎄, 히데오상이 내가 좋긴 좋나 봐요.]
[야, 좋은 정도가 아닌 가 보더라. 그리고 너, 이럴 때일수록
좀 비싸게 굴어, 알겠니? 무조건 네네 하면 금세 정나미가 떨어
지는 법이니까 튕길 땐 과감하게 튕겨야 한다구. 그래야 여자다
운 매력이 있는 거구. 네가 그래야 우리 가게 매상도 많이 오를
거 아냐? 암튼 잘 됐네! 네 덕분에 이 언니도 짭짤한 돈 구경 좀
할 수 있겠지?]
유연실이 말했다.
[물, 물론이에요.]
[너희 집에서도 좋아할 거야. 물론 일본 남자하고 살면 처음엔
똥 묻은 개처럼 대하겠지만 결국 돈 때문에라도 널 훌륭한 딸자
식으로 생각할 거야.]
유연실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유연실이 모는 세단이 공항으
로 가는 김해(金海)지역을 빠져나가는 동안 하유미는 차창 밖으
로 밀려 나가는 마을들에 시선을 박아둔 채 침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