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특별편] -->
“못 나가. 알잖아. 너 때문에.”
알아들을 리가 없지. 목하는 한숨을 쉬고 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간신히 틀어 침상 아래로 늘어뜨렸다. 신을 신지 않은 발끝에 바닥의 냉기가 그대로 스며들었다. 그때였다. 발목이 움찔하며 냉기를 피해 발끝을 살짝 들어 올린 것은.
“어…?”
“마님!”
목하도, 옆에서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벼리도 화들짝 놀랐다. 잠시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며 눈을 깜박이던 목하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작게 심호흡을 했다. 의원이 아무리 여기저기를 누르고 두드려도 반응하지 않던 다리였는데.
“벼리야.”
“예, 마님!”
“와서 내 무릎 밑에 두드려봐.”
여기, 여기. 치맛자락을 걷어 올린 목하가 친절하게 무릎 바로 아래 오목한 부분을 짚어주자 벼리가 조그만 주먹을 말아쥐고 그곳을 툭 때렸다.
“조금 더 세게.”
다시, 툭. 움찔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는 종아리를 보며 목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용기를 내어 발목에 힘을 주어 본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세 번.
다섯 번째 시도했을 때 발목에 힘이 들어가며 까딱, 위로 들어 올려졌다. 옆에서 침을 꼴딱꼴딱 삼키던 벼리가 벌떡 일어나며 환호성을 질렀다.
“마님! 마님, 움직여요, 마님!”
“쉿. 조용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가서 의원을 불러와. 내 무어라 언질 줄 적까지 절대 나으리께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왜요? 엄청 기뻐하실 텐데.”
딱딱한 주인 나으리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것을 보고 싶던 벼리가 약간 실망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실망하시면 어떡해. 그리고, 깜짝 놀라게 해 드리고 싶어.”
“아아.”
다녀올게요, 벼리가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빠져나갔다. 목하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계속해서 다리에 힘을 주어 보았다. 그리고 벼리가 의원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는 발목을 세 번 정도 연속해서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빨리, 빨리 봐 줘요.”
이 집에 들어와 쭉 목하를 돌봐온 의원이었다. 그의 팔목까지 붙들고 들어온 벼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잠시 다리 곳곳을 눌러보고 발목의 맥을 짚어본 의원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꽉 막혔던 기가 뚫리고 혈관이 넓어졌으며, 발목을 움직이는 신경과 힘줄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오늘부터 매일 들러 침을 놓고 지압을 해 드릴 것이니, 아침저녁으로 약초 찜질을 하고 걷는 연습도 하십시오. 하루 일각(15분)으로 시작하여 조금씩 늘려가면 됩니다.”
의원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꿈결처럼 들린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뺨을 두어 번 탁탁 쳐본 목하는 꿈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걸을 수 있다. 그 놀랍고 감사한 사실보다 그녀를 더욱 행복하게 하는 것은, 도운이 제 발로 걷는 그녀를 보며 누구보다 기쁘게 웃으리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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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께선?”
오늘도 퇴궐하자마자 들어서는 그 길로 목하를 찾는 도운에게 실망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곤하시어 일찍 주무십니다요.”
“벌써?”
도운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목하가 있을 송화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잠든 얼굴이라도 볼까. 그러다 혹시 깨면 잠을 설칠 것인데.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목하의 잠을 깨우지 않기로 하고 제 처소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욕간 준비는?”
“거의 다 되었으니 환복하고 나오십쇼, 나으리.”
고개를 한번 까딱하고 들어간 도운은 제일 먼저 칼을 풀어 벽에 걸었다. 관복의 먼지를 털고 개어놓으면서도, 상체를 드러낸 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서도 그의 미간에 그어진 미세한 주름은 펴질 줄을 몰랐다.
벌써 열흘이 훌쩍 넘었다. 목하가 전에 없이 일찍 잠들고 늦게 일어나는 것이. 푹 자고 잘 먹는 것이야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그에게 소홀해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 아예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뭘까. 갖가지 생각이 뇌리를 지배하다가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쌀쌀한 늦가을 공기에 뜨겁던 물이 미지근하게 식어갈 즈음에야 목욕간을 벗어난 그는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
벽에 걸린 칼을 내려 날의 예리함을 살피고, 기름 먹인 천으로 매끄럽게 닦아내던 도운이 별안간 손을 멈추었다. 칼날에 가볍게 스친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흘러 서안에 깔린 종이 위로 번져갔다.
“미쳤군.”
씁쓸한 혼잣말을 내뱉고 날을 닦아 칼집에 집어넣었다. 지금은 양지에 나왔다곤 하나 그림자의 수장이었던 무인이다. 헌데 칼을 손질하다가 피를 보다니. 아주 어린 훈련생이었던 시절에도 없던 일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정신이 해이해졌으면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는 와중에도 그는 머릿속을 떠도는 불안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목하의 관심이 멀어졌다. 그것이 도운의 결론이었다.
그리 잠을 설치고 다음 날, 그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곧장 입궐했다. 이런 문제를 의논할 단 한 사람이 그곳에 있는 까닭이었다.
“폐하. 위장군이 알현 청하옵니다.”
“위장군이? 들라 해라.”
도운이 먼저 알현을 청하다니. 금일 해가 서쪽에서 떠올랐다 해도 현은 놀라지 않았으리라. 그것도 조강이 채 시작하기 전인 이른 시각에.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절도 있는 인사는 언뜻 예전과 같았다. 바늘 끄트머리도 들어가지 않을 법한 차가운 표정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현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달라진 도운을 느낄 수 있었다.
현이 필두를 향해 눈짓하자 그를 둘러싸고 있던 궁인들이 파도에 쓸린 모래인 양 한꺼번에 물러갔다.
“뭐냐. 아침부터.”
“황공하오나, 긴히 논의를 드리려 합니다.”
“논의를?”
“신의 내자에 관한 일입니다.”
현의 얼굴 가득히 흥미가 떠올랐다. 논의라니. 저 도운이 여인 문제로 논의라니. 벌써 재미있기 시작한 그는 치솟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는 일에 간신히 성공하고 짐짓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느냐?”
"내자가 이상합니다."
"이상해? 몸이 안 좋으냐?"
“아닙니다. 평소에는 신이 늦게 퇴궐하여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근래는 조금만 늦어도 먼저 침수를 들어 버립니다. 또한, 일찍 퇴궐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도 그다지 기뻐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전에는 곧잘 안아달라 졸랐었는데 이제는 그마저 없습니다.”
그리 말하는 도운의 진지한 표정 때문에 현은 도저히 표정을 관리할 수가 없었다.
검은 구름이라는 본래의 명칭 대신 암암리에 귀신이라 불리던 자가 아닌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게 움직이며 칼을 뽑는 순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상대의 목숨을 거두어 가는. 그런 자가 지금 아침부터 찾아와 현에게 애정 전선을 털어놓는 중이었다.
“폐하?”
서안 위에 엎드려 얼굴을 감춰버린 현에게 의아한 물음이 돌아왔다. 고개를 들어 도운을 보고 또 얼굴을 감추었다가, 또 고개를 들었다가. 그리 세 번을 반복한 끝에야 현은 진지한 표정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칼만 휘두를 줄 알았지, 여인에 대해서라곤 한치도 모르는 자 같으니라고. 자신있게 지혜를 나눠주는 현의 콧대에서 뿌듯함이 흘러넘쳤다.
"화가 난 것이다.”
화라니. 도운의 얼굴에 길게 그어진 칼자국이 살짝 꿈틀했다.
“화가…. 났단 말입니까?”
“서 귀비가 화를 낼 적에 짐에게 눈길도 안 주지 않더냐. 게다가 곤하다는 핑계로 짐을 내쳐버리고, 좀 안으려 하면 온갖 난리를 치느니. 네 내자는 서 귀비보다는 둥글둥글한 성격이니 화난 것을 그리 표출하는 것이니라.”
듣고 보니 참으로 그럴싸한 말이었다. 도운은 역시 이리로 오길 잘했다 생각하며 재차 여쭈었다. 워낙 열중한 나머지 그의 몸이 약간 앞으로 나온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