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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130화 (130/152)

<-- [외전 특별편] -->

"갑자기 이리 오시면 어찌해요!"

시골 마을이지만 근방에 행궁이 있었기에 초라하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가장 큰 객잔 앞에 도달해서야 목하를 내려준 흑운에게 당황스러운 질책이 날아들었다.

"죄송합니다. 아, 그것은 안 벗으시는 게 낫습니다."

그는 말고삐를 마구간 지기에게 내어주며 급히 덧붙였다. 목하가 궁녀복이 보이지 않도록 머리에서부터 꽁꽁 덮은 무복을 벗어버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더워요."

"안에 들어가서 벗으십시오."

안에? 목하는 화들짝 놀라며 척 보기에도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객잔을 돌아보았다. 저 안에서 옷을 벗으라고? 이 사내는 지금 저를 아주 쉬운 여인으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제가 왜 여기서 흑운 님이랑 옷을 벗어요?"

"저는 안 벗습니다."

흑운은 알 수 없는 말에 갸웃하며 목하의 어깨를 감싸 안아 입구로 들어갔다. 미리 나와 기다리던 점소이가 두 사람을 구석진 방으로 안내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한, 자그맣고 정갈한 방. 두 사람분의 음식이 탁자에서 모락모락 김을 피워내고 있었다.

"필요하신 것은 따로 부르십쇼."

점소이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아, 여기서 겉옷을 벗으라는 말이었구나. 목하는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의자에 앉았다.

"이제 벗으십시오."

시키는 대로 주섬주섬 무복을 벗자 흑운이 그것을 받아 옆에 던졌다. 저거 개어놔야 하는데, 싶은 것을 보니 뼛속까지 궁녀인가보다. 그것에서 애써 눈을 돌린 목하가 흑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긴 왜 데려오셨어요? 황명?"

"예."

흑운이 작은 접시에 음식을 덜어 앞에 놓아주었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간질였으나 목하는 그것을 먹는 대신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왜 폐하께서 자꾸 이상한 명을 내리시는 거예요?"

왜, 라니. 황명만을 받들며 살아온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단어이다. 자연히 나오는 대답은 나무토막처럼 각이 져 있었다.

"황명의 연유를 따져서는 안 됩니다."

"그 명이 내려지기까지 과정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걸 말씀하시라고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흑운은 자신이 가진 어휘력의 한계를 실감하며 조용히 술잔을 채웠다.

"제 말, 듣고 계세요?"

"예."

"그럼 제발 말 좀 해요. 예, 아니오, 황명입니다. 이거 말고 말 좀 해!"

목하가 답답함에 버럭 목소리를 높이고는 앞에 있는 잔을 들어 쭉 마셨다. 그런데 물맛이 아니다. 달달하고 쌉싸름하고 속이 뜨거워지는 액체. 궁녀들 사이에서 도깨비 뜨물이라 불리는, 술이었다.

"많이는 드시지 마십시오."

다시 술잔을 채워주는 흑운의 무표정이 얄미워 죽을 것 같다. 폐하께서 귀비마마를 보실 적에는 용안에서 연모가 뚝뚝 떨어지시던데, 이 사내는 대체 뭐란 말인가. 목하는 그가 채워준 술잔을 다시 한 번에 비우고 탕,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좋아요. 일단 내 말부터 할게요. 흑운 님은 처음부터 황명을 받고 시작하셨나요?"

"시작, 이 정확...."

"그날, 월화궁에서. 제 가락지 주워주신 날. 황명이었냐구요."

"아닙니다."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목하가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명은 그다음이란 말이죠? 폐하께서 저와 정인 하라고 하셨고, 선물도 사 주시라고 하셨어요?"

"황명의 정확한 내용은……."

"맞네."

술이 들어가니 머리가 더 잘 돌아가는 것 같다. 목하는 자신을 흑운과 붙여주려 노력하던 귀비마마를 떠올렸다. 아주 찰떡처럼 꼭 맞아 떨어지는 두 분이시니, 폐하의 심중 또한 비슷하리라.

그제서야 앞뒤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이 모든 곡해가 저 사내의 쓸데없이 무거운 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도.

"황명 빼고, 흑운 님은 제게 마음이 있으신가요?"

"예."

"정확히 어떤 마음이?"

"어여쁩니다. 함께 있으면 좋습니다."

안돼. 내려가. 입꼬리 내려가. 목하는 눈치 없는 입꼬리와 무너진 자존심을 꾸짖으며 얼굴 근육을 굳히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한데 어찌하여 며칠이나 저를 못 본 척하셨어요?"

"못 본 척하지는 않았습니다."

"막 고개 돌리고 지나가고, 찾아오지도 않았잖아요."

흑운은 속으로 천천히 그 이유를 짚었다. 왜 그랬을까. 원인은 분명히 아는데, 애초에 감정을 잘 모르는 그에게 감정과 어휘를 매치하는 일은 너무나 큰 과제였다. 특히나 죄책감이나 수치스러움, 뭐 이런 것들은 더욱더.

"제가 항아님을 겁간한 일 때문입니다."

"겁간요? 언제?"

"오는 길에. 숲에서."

"그게 왜 겁간이에요."

목하의 얼굴이 눈에 띄게 빨개지긴 하였으나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흑운은 묘한 안도감과 부담감을 동시에 느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항아님이 중간에 혼절하셨습니다. 그때 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드디어 몹쓸 짓을 고백한 그는 타는 듯한 목마름에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술이 필요했다. 흑운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크게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던 목하가 약간 줄어든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제가 정신을 놓은 사이에…. 또…. 그러니까…. 지금 하셨다는 게."

"교합. 항아님의 동의가 없었으므로 겁간입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데 동시에 수치스럽고 실망감도 든다. 한편으론 그냥 모른 척하지 싶기도 하고.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으니 잡아떼면 그만인데, 며칠을 혼자 고민하다 저리 어렵게 말을 꺼내는 사내가 또 미련해 보이기도 하고. 헌데 또 징그럽기도 하고.

그 와중에 다시 술병을 입에 갖다 대는 모습은 어찌하여 멋있어 보이는지. 목 가운데 볼록 튀어나온 목젖은 어찌 또 색정적인지. 목하는 수없이 뒤섞이는 마음을 다시 한 잔 술에 흘려보내고 중얼거렸다.

"흑운 님이 그러실 줄은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괜찮아요."

괜찮아요. 흑운이 잠시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괜찮다, 가 죄를 묻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네. 그래도 흑운 님이 좋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러지 마세요."

홀로 속을 태우던 시간이 어이없게 느껴질 정도로, 목하는 쉽게 그를 용서했다. 그리곤 젓가락을 들어 작은 접시에 놓인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방금 나눈 대화를 되새기던 흑운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누가 보아도 웃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웃을 줄…. 아네요?"

"자주 웃었습니다."

늘 그렇듯, 흑운의 답은 진심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목하를 볼 때 늘 웃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그의 대답에 괜히 또 민망해진 목하는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거 먹어요. 왜 안 먹어. 맛있는데."

목하가 젓가락으로 미지근하게 식은 고기 한 점을 집어 흑운의 입가에 갖다대었다. 엉겁결에 벌어진 입안으로 젓가락이 냉큼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갔다.

"맛있죠?"

맛있다. 음식에서 맛이라는 것을 음미해본 적은 없지만 맛있었다. 지금까지 그저 황제를 호위하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만큼 먹는 식사와는 전혀 달랐다.

"맛있습니다."

"그럼 이제 말 좀 해요. 흑운 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 안 하면 나는 몰라요. 하면 잘 하면서, 왜 평소에는 말 안해?"

"무슨 말을 하면 됩니까?"

"지금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황명입니다, 이거는 웬만하면 빼고."

지금 느끼는 것. 흑운은 바로 앞에서 깜빡이는 속눈썹을 내려다보며 목하의 손을 잡아 제 왼쪽 가슴에 갖다 대었다.

"여기가 뜁니다. 아플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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