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락 -->
"...흑운."
그가 읊조린 말에 윤 수찬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허나 그것이 곧 긍정이리라. 현은 무언가가 심장을 도려낸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을 그저 볼모로 삼기 위해 지옥으로 끌어들인 죄, 다른 여인을 생각하며 토해낸 욕정으로 회임시킨 죄, 정치적으로 이용하다 쓸모없어진 그녀를 차갑게 버린 죄. 또한, 죽어가는 여인의 마지막 청을 외면한 죄.
그 모든 것이 이루어낸 결과가 이것이었다. 그의 일부와도 같았기에 아낀다 생각해보지도 않은 사내의 죽음.
"이제 아시겠습니까. 제 기분을."
멀리서 울리는 윤 수찬의 목소리 속에서 더듬더듬 얼굴을 감싸 쥐고 탁자에 몸을 기대었다. 죽었어야 했다. 태후는 잘못 선택한 것이다. 다른 형제를 황제로 만들고 자신을 죽였어야 했다. 끝없는 자책과 분노, 슬픔, 원망이 뱀처럼 얽혔다가 허무하게 스러졌다.
"흑운이 네 가문을 살린 일은 몰랐겠지."
그대로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현이 중얼거렸다.
"윤 첩여가 후궁들을 사주해 황후에게 불임약을 먹이려 했다. 황후가 아직 귀비였을 적에. 그것을 누가 막았으리라 보는가."
전혀 알지 못하는 말이 현에게서 쏟아져 나오자 윤 수찬의 눈빛이 평정을 잃고 흔들렸다. 아무 일도 하지 마시라 일렀다. 늘 아비의 말을 국법보다 따르던 소유였기에, 그리 말하면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흑운이 그 후궁들을 막고 돌려보냈다. 만일 황후가 그것을 마셨다면. 혹은 내게 입을 다물어달라는 황후의 청을 그가 거절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대가 여기 앉아있을까. 그래, 그대는 흑운을 해치지 못했겠지. 이미 죽었을 터이니. 네 식솔 전부와."
"거짓입니다. 폐하께선 신에게 거짓을 말씀하십니다."
"그리 생각하여라. 그다지도 네 마음을 속이고 싶다면."
옥루에 젖은 눈동자가 긴 손가락 사이로 수찬을 쏘아보았다.
"가라."
한참을 그리 앉았던 현이 탁자를 짚어 비틀대는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늘 차갑던 얼굴마저 엉망으로 흐트러진 채.
"그 짐을 지고 평생을 살아라. 나와 같이 살아라. 밤마다, 죽은 이의 비명을 들으면서. 떠난 이를 부르면서! 원망도, 복수도! 모든 것이 너를 향할 것이다. 너 또한! 그리 지옥을 살란 말이다!"
한 마디 한 마디 피가 흐르는 황제의 절규가 시퍼런 칼날인 듯 윤 수찬을 난도질했다. 자그마한 몸으로 너무나 큰 용상에 인형처럼 앉았던 황제. 그는 십수 년의 고통 속에 미치광이가 되었다.
충신이라 자부했다. 황명을 한치 어김없이 따랐노라고. 허나 황제가 지옥을 살아가는 동안 신하로서 무엇을 하였던가. 권력에 눈이 멀어 형제들을 몰살시킨 수많은 어른 앞에서 덜덜 떨던 황제는, 고작 열두 살이었다.
황명을 받들었노라는 안도감 뒤에 숨어선, 몇 안 되는 중립인 그를 향해 도와달라 외치던 어린 황제의 눈빛을 외면하진 않았나. 그렇다면 하나뿐인 여식을 죽인 이는. 소유를 미쳐버린 황제의 그늘에 집어넣은 이는 결국 누구란 말인가.
황제가 떠나간 후, 빈방을 홀로 지키던 수찬은 천천히 칼을 빼어 목에 겨누었다. 허나 다시 내려놓았다. 지옥을 살아가라는 황명마저 받들기 위해서.
***
황궁 곳곳이 불에 타고 부서졌으나, 황제가 반란을 주도한 황자의 외숙을 직접 처형하였다는 포고로 반란군은 빠르게 흩어졌다. 그럼에도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귀족과 양민들은 가산을 몰수당하고 신분을 빼앗겨 평민이 되었으며 우매한 백성들은 그저 일상으로 돌아갔다. 너그럽기 그지없는 황제를 가리켜 세간은 또다시 성군이라 하였다. 참으로 지긋지긋하게도.
때마침 내린 눈에 온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으나 현은 정강이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산을 올랐다. 걷고 걸어 도착한 정상 부근에 단 한 군데, 마치 거기에만 이른 봄이 온 듯 눈이 덮히지 않은 곳이 있었다. 흑운은 바로 그곳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꽃잎처럼 피어난 연분홍빛 치마를 덮고서.
"좋으냐. 불충한 자 같으니."
그의 곁에 주저앉은 현이 퉁명스레 던졌다. 늘 단단히 다물려 있던 입가에 처음 보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으므로. 언젠가 단 한 번, 흑운이 이리 그의 앞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았더랬다. 그때는 하루도 안 되어 눈을 떴었는데.
현은 그가 당장이라도 다시 일어나 발치에 부복할 것만 같아 몇 번이나 작게 불러보았다. 흑운. 흑운. 허나 지나치는 바람에 밤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한 차례 흩날릴 따름이었다.
"모두가 한겨울인데, 너만은 봄에 사는구나."
굳게 닫힌 그의 눈꺼풀을 쓸고, 자신의 옷자락을 소중한 보물인 양 꽉 쥔 손등 위에다 가만히 손을 올려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봄이 오고 있었다. 흑운의 시신으로부터 산 너머까지, 점점이 찍힌 자그마한 발자국을 되밟으며.
"... 폐하?"
코끝이 빨개져선 산에 오른 화연은 은호의 손을 꼭 잡고 있었으나 현은 투기하지 않았다. 눈 쌓인 산에서 화연이 넘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손을 붙들어 준 은호에게 고마울 뿐.
"화연아."
"폐하!"
잡고 있던 손을 놓은 화연이 하늘하늘 날아와 앉았다. 그리곤 현을 한 번 보았다가, 흑운을 한 번 보았다가, 다시 현을 향해 속삭였다. 그 큰 눈에는 이미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이제 슬퍼해도 되나요? 폐하가 아닌 이유로."
"슬퍼하지 말라 하면 아니할 것이냐."
화연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슬퍼했다. 흑운이 덮은 제 치맛자락을 어루만지며 끝없이 울었다. 그녀의 곁에서 현도 울고, 은호도 울고, 현을 따라온 그림자들도 울었다.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가 통곡했다.
현은 난생 처음 연장을 쥐고 그림자들과 꽁꽁 언 땅을 파내었다. 흑운은 그 무덤에 묻혔다. 조금만 고개를 들면 황궁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의 정상에, 그의 봄이 피워낸 연분홍 꽃잎을 덮고서.
죽어서도 놓지 못하던 흑검은 함께 묻어주지 않았다. 혹여 그 검의 무게에 짓눌려 훌훌 털고 떠나지 못할까 봐. 이윽고 무덤이 완성되고, 현은 야트막한 봉분 위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마지막 명을 내렸다.
"고생 많았다. 이제 네 가고 싶은 곳으로 가거라."
"존명."
한 걸음 물러나 흑운을 배웅하던 화연이 멈칫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뒤에서 낮게 답하는 흑운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은데. 다시 앞을 보니 봉분을 바라보던 현 또한 같은 곳을 보고 있다. 잠시 그리 화연의 뒤편을 바라보던 현이 피식 웃으며 봉분을 두어 번 두드렸다.
"간다. 또 오마."
두 사람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황궁을 향해 돌렸다. 산 아래에서 황금색 지붕이 노을을 반사하며 장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