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락 -->
“죽지 마.”
“존명.”
처음에는 불편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뒤에서 항상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러나,
"아악! 형님!"
"괜찮으십니까, 주군."
한밤중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 흑운을 찾으면 그는 항상 그 곳에 있었다.
"... 괜찮다. 물 한잔 줘."
어린 현은 늘 잠을 자지 못했다. 자신을 향한 형제들의 절규가 목을 조여오는 날이면, 넓디넓은 침상 모퉁이에 웅크리고 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그러다 눈물이 터질 것 같으면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를 불렀다.
“흑운. 흑운. 거기 있는 것이냐?”
“예, 주군.”
누군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애써 현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는 낮은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버틸 수 없었으리라.가랑비에 옷 젖듯, 불행했던 현은 흑운에게 조금씩 곁을 내주었다. 정작 현은 그것을 몰랐음에도 그러했다.
"네 보기엔 어떠냐."
"보내소서. 위험한 여인입니다. 옥안을 가리고 발목을 붙잡을 것입니다."
묻는 말에는 무엇이든 사실대로 답했다. 그것이 현의 심기를 거스를 법한 내용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대부분 옳았다. 화연을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흑운에게만은 그 어떠한 죄도 물을 수 없었다.
"물은 제가, 입을 통해 먹여드렸습니다."
처음으로 흑운을 향해 분노했던 그 날, 자신도 모르게 화연이 말려주기를 바라며 부러 큰 소리로 칼을 뽑았다. 그 분노는 흑운을 향하지 않았다. 못난 현을 향했을 뿐.
"찾았습니다."
화연을 찾으러 갔다 돌아온 흑운이, 피투성이가 된 채 한 마디만을 남기고 쓰러졌을 때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정신을 잃은 그를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하던 화연의 침상에 눕히고 직접 상처를 돌보았다. 흑운이 사냥터에서 화연의 입술을 탐했다는 보고를 듣고도 그저 모른 척 눈을 감았다.
현이 마음을 내어준 이는 모두가 불행했기에 현 또한 불행했다. 그래서 화연만은 그 불행에 밀어넣지 않으려 발버둥쳤다. 흑운에게 마음 한켠을 의지하고 있던 것도 모르고선.
"죽지 마."
"존명."
흑운이 그리 대답했었기에 현은 그가 죽지 않으리라 믿었다. 존명. 흑운이 나직하게 내놓는 그 대답은, 현의 말이 틀림없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과도 같았으므로.
***
흑운은 수없이 짓쳐드는 칼날을 막고 적을 베며 이를 갈았다. 화연이 가마에서 나오면 호위는 흐트러질 수 밖에 없다. 가마 옆에 바짝 붙어 따라오면서 수없이 뒤를 돌아보고 주변을 살피던 그 상궁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크윽!"
흑운이 몸을 낮추며 칼을 휘두르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다리 하나가 펄떡펄떡 뛰었다. 가마꾼으로 위장한 그림자까지 이쪽은 모두 다섯. 그러나 적은 빌어먹게도 많았다. 마치 화연이 이 길로 달아나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처럼.
"뒤를 부탁한다."
이어서 두 명의 적을 한꺼번에 쓰러뜨린 흑운은 아직 싸우고 있는 세 명의 동료들을 남겨두고 등을 돌렸다. 한 명은 이미 바닥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섬뜩한 느낌에 뒤쪽을 향해 칼을 휘둘렀으나 왼쪽 어깨가 베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흑운이 마지막으로 베어낸 무사가 바닥으로 스르르 엎어졌다.
그러나 흑운에게는 그것을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그저 희미한 기척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그 끝에서 그가 목도한 장면은 섬뜩했다. 달빛 아래에서 이미 정신을 잃은 듯한 화연과,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상궁. 망설임없는 칼끝이 상궁을 베고 화연을 구했다.
"마마, 마마."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화연의 목을 만져본 흑운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살아 있었다. 고맙습니다. 흑운은 전해지지 않을 감사와 함께 그녀를 안아들고 나무 사이를 헤집으며 달렸다. 가득히 안긴 체온이 그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흑... 운?"
천천히 눈을 뜬 화연이 잠시 후 그를 불렀다. 입을 열어 그녀의 부름에 답하고 싶었으나 힘을 낭비할 수 없었기에 부러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깊게 베인 검상으로부터 천천히, 독이 번지고 있었다.
"흑운."
화연은 그를 다시 한번 부르며 늘어져 있던 팔을 들어 단단한 허리에 감았다. 그리고 곧 손바닥에 느껴진 끈적한 액체를 알아채고는 소스라쳤다.
"다쳤어요?"
늘 그랬듯, 그녀의 물음에는 답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후, 문득 멈추어 선 흑운이 화연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고 품에서 종이를 꺼내 펼쳤다.
"이 산만 넘으면 됩니다. 절대 샛길로 가시면 안 됩니다. 앞만 보고 길을 따라 가십시오. 이 지점에...."
손끝에 묻은 피가 지도 위에 붉은 점을 찍었다.
"은호공자가 있습니다. 그에게 몸을 의탁하십시오. 반란이 진압되고 나면 폐하께서 데리러 오실 겁니다."
"왜 그리 말해요, 함께 가지 않을 것처럼."
화연이 지도를 받아드는 대신 흑운의 손을 꽉 쥐었다. 그 손 또한 피에 물들어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곧 따라가겠습니다. 빨리 가십시오."
그때 화연은 알았다. 흑운이 두 번째로 그녀에게 거짓을 말했음을. 그는 자신의 손을 단호하게 잡아 빼고는 그 자리에 지도를 쥐어 주었다. 무겁다. 한낱 종이 한 장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겨진 마음은 너무나 무거웠다. 가슴에서 왈칵, 뜨거운 것이 솟아 속눈썹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마지막인데, 마지막일 텐데 보이지 않는다. 늘 굳게 입을 다물고 뒤를 지키던 흑운의 얼굴이. 그의 등 뒤에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달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흑운."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그를 부르자 돌아서려던 흑운이 멈칫하며 화연의 머리를 잡고 부드럽게 당겼다. 차가운 공기에도 불구하고 따스한 입술이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금세 떨어졌다.
"은애합니다."
늘 믿음직하던 저음은 그리 무거운 진정만을 꺼내놓고 멀어졌다. 화연이 손을 뻗어 잡은 옷자락이 부질없게도 빠져나가고, 이내 그가 사라진 방향에서 날카로운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쏟아지는 눈물을 닦을 틈도 없이 그녀는 달빛을 의지해 흑운이 말한 대로 곧장 앞을 향해 달렸다. 살아야만 했다. 비겁하게도, 흑운의 목숨을 밟고 살아야만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놓은 고백이 절대 뽑을 수 없는 화살로 심장에 박혔다.
***
"다쳤어요?"
대답 대신 봄을 더욱 강하게 고쳐안은 흑운은 계속해서 달렸다. 그림자 하나가 그리 맥없이 쓰러진 상황이 충분이 이해되었다. 칼날에 독을 바르는 일은 적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위험해지는 일이기에 검객들은 웬만해선 쓰지 않는 수법이었다. 그를 모를 리 없는 무관 출신의 병부상서가 칼에 바른 독은 깊은 원한이 되어 피 속으로 스며들었다.
남아있는 모든 힘을 봄을 안고 달리는 데에 집중하던 그는 곧 뒤에서 바짝 추격해오는 기척을 잡아내었다. 그림자들은 결국 그들을 모두 쓰러뜨리는 일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열의 무사가 하나의 그림자를 당해내지 못할 터이지만, 그것을 알고 독날을 가져온 적에게는 힘겨웠으리라.
하나, 둘, 셋. 적은 많지 않았으나 개중 틀림없는 강자 하나가 섞여 있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발을 멈춘 그는 조심스레 바닥에 봄을 내려놓았다.
"왜 그리 말해요. 함께 가지 않을 것처럼."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 그가 달을 등지고 서 있다는 사실이. 그렇기에 흑운은 봄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함께 가자 말하는 눈동자를 볼 수 있었고, 봄은 슬프게 웃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감정이라고는 모조리 베어버린 그림자로서의 삶.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흑운은 달그림자에 숨어 마음껏 웃었다.
"곧 따라가겠습니다. 빨리 가십시오."
봄은 아마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다. 그 큰 눈에 넘친 눈물이 달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으니. 언젠가 목욕간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말한 뒤로 처음 하는 거짓말이었다. 난생 처음 하는 거짓말도, 마지막으로 하는 거짓말도 봄을 향했다. 그 사소한 사실마저 흑운에게는 기쁨이었다.
"흑운."
고마웠다. 그를 불러 주어서.
"은애합니다."
살아서는 절대 내놓을 수 없던 고백이건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그녀에게 전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되었다. 봄이 부질없이 밤의 옷자락을 붙들었으나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른 입술에 온전히 닿았던 체온으로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나. 차디찬 마음에 피어난 봄꽃이 칼 끝에서 휘날리며 적을 맞았다.
"여기는 지나가지 못한다."
낮은 목소리와 함께 흑운이 검을 고쳐 쥐었다. 주군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검으로, 그는 주군이 목숨보다 귀히 여기는 여인을 지켰다. 칼날이 수없이 맞붙었다 떨어지며 살이 베이고 피가 튀었으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니 두 번째 무사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독한 새끼, 하고 욕을 내뱉은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하아, 하아."
베지 못한 세 번째 기척이 화연이 간 쪽이 아닌 황궁을 향해 멀어졌다. 그렇게 산이 고요에 잠겨들고 나서야 흑운은 지친 몸을 얼어붙은 바닥에 기댈 수 있었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을 더듬어 마지막으로 봄이 닿았던 옷자락을 움켜쥐어 본다. 피에 젖었음에도 따스함은 느낄 수 있었다.
"... 화연."
단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던 이름을 중얼거린 흑운의 눈동자에서 만월이 이지러졌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화연의 눈동자가 아닌, 어린 주군이 처음으로 그에게 내렸던 명이었다.
죽지 마. 지킬 수 없었던 단 하나의 명이, 평생을 그림자로 살다 간 사내에게는 마지막까지도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