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구름 -->
"이건 붓겠는데."
현이 혀를 내밀어 입술에 맺힌 피를 할짝이며 웃었다.
"폐하도 붓고 아프잖아. 피 나잖아요. 남들은 손가락 하나만 대도 죽이려고 하면서, 폐하는 왜 저한테 이런 식으로 대하세요?"
"내 것이지 않느냐. 나는 때려도 되고, 베어도 된다. 물론 너 또한 내게 그리해도 되고."
이 미친놈과 이야기를 할 때는 늘 긴장해야 한다. 생각이 다른 이들과 다른 것도 위험한데, 그 생각이 당연하다고 철썩같이 믿는 놈이니. 정인이란 그런 뜻이 아님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지금 제대로 이해시키지 않으면 가까운 미래에 또 같은 꼴을 당하게 되리라는 사실이 불 보듯 뻔하였다.
"폐하. 내 것이 아니라 정인이라고 해야지요. 그리고 정인은 물건이 아니예요. 이름 써놓거나 마음대로 때리면 안 돼요."
말하다 보니 영락없는 어머니다. 화연이 어릴 적에 어머니는 이런 식으로 왜 하면 안 되는지 알려주곤 하였다. 현은 아마도, 그리 당연한 가르침 대신 제왕학을 배웠으리라.
"그 말이 그 말이지. 이름도 내가 썼으니 괜찮다. 너 또한 쓰지 않았느냐."
화연의 옆에 딱 붙어 머리를 괴고 누운 현이 새하얀 가슴에 선명한 제 이름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보면 볼수록 잘 썼단 말이지. 어릴 적에는 글씨연습이 그리도 싫었는데, 이리 보기 좋게 새겨놓은 글씨를 보면 그때 연습하길 잘 하였다 생각이 든다. 그리 홀로 만족하던 현의 너른 가슴은 또 무자비하게 꼬집혀 시뻘건 피멍이 올라왔다.
"읏."
"봐요. 아프잖아요. 아프게 해도 안 돼요. 자꾸 아프게 하면 정인이 무서워할수도 있어요."
"너는 그다지 안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그리 답하는 현의 눈에는 아직도 광기가 떨어지는데 이질적으로 순수하다. 아홉 살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나비의 날개를 잡아뜯고 잠자리의 꼬리에 실을 매달아 갖고 다니고, 어머니의 눈길을 붙잡아 놓기 위해 부러 말썽을 골라 피우는 아홉 살. 문제는 그 나비도, 잠자리도, 어머니도 화연이라는 점이었다.
"아까는 정말 무서웠어요."
"무서워하면 나를 싫어하게 되느냐?"
이 질문에는 답을 망설였다. 싫어하게 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면 또 얼마나 눈이 뒤집히려고. 그러나 닥쳐올 그 순간보다, 광기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상처받은 눈빛이 더 두려웠다. 고민하던 화연은 겁박 비슷한 다른 답변을 내밀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하면 다시는 폐하랑 안 잘거예요."
"어째서? 너는 나를 은애하는데."
야이 미친 새끼야. 목젖까지 올라오는 욕설을 꾹꾹 밀어넣은 화연이 현을 밀치고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인내심을 갖고 설명해도 제자리걸음이다. 생각해 보면 늘 이런 식이었다. 저 듣고 싶은 내용만 듣고, 다른 사람의 기분은 생각하지도 않고.
"다시는 이런 식으로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청이에요. 뭐든 들어주신다 하셨잖아요."
"청이라면... 어쩔 수 없지."
현이 약간 시무룩해져선 다시 뽀얀 젖가슴에 안겨들었다. 이리 또 화연이 단단히 화를 내야 겨우 눈치를 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반복. 만일 아기를 낳게 되더라도 절대 현이 무언가 가르치지 못하게 하리라.
허나 지금 작은 목소리로 시중 들어줄 궁녀를 부르는 화연은, 그 아기가 뱃속에서 열심히 제가 살 집을 짓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
자신이 사주한 후궁들이 시도도 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는 소식은 윤 첩여의 심기를 어지럽히기에 충분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그녀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다. 혹여 회임이라도 하여 그나마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단 하나를 침범할까 두려웠을 뿐.
"첩여마마, 서 귀비께서 월화궁에 드시라 전갈을 보내시었습니다."
놀란 가슴이 철렁 떨어지며 윤 첩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언가 눈치를 챈 것일까. 고민해봐야 소용없을 것을 알기에 그녀는 침착하게 알았노라 답하였다.
아무리 총애받는 후궁이라 하여도 회임을 한 자신을 건드리지는 못하리라. 게다가 자신의 뒤에는 아버님께서 떡하니 버티고 있지 않은가. 아무런 뒷배도 없는 서 귀비야 성총 떨어지면 그야말로 끈 떨어진 연이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몽골몽골 피어나는 불안함을 애써 감춘 걸음이 사뿐사뿐 월화궁으로 들어섰다.
"첩여 윤씨가 귀비마마를 뵈옵니다."
얼마 전만 하여도 예를 갖추는 것은 귀비 쪽이었는데. 윤 첩여는 씁쓸한 표정으로 곱게 허리를 숙였다가 다시 약간 들었다.
"모두 멀리 물러가라."
제법 위엄있는 목소리에 궁인들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화연이 미리 준비한 차를 윤 첩여의 잔에 직접 따라주었으나 그녀는 감읍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여 보일 뿐 찻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어찌 드시지 않습니까, 윤 첩여?"
"송구합니다. 황손께서 먹을 것을 좀 가리시는지라...."
"이 사람이 무엇을 탔을까, 걱정됨이 아니시구요."
명백히 날이 선 말이었다. 움찔한 윤 첩여가 화연의 표정을 살폈으나 그녀에게선 그 무엇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흔한 투기심이나 적대감마저도.
"이 사람에 대한 폐하의 총애가 얼마나 깊은지 아십니까?"
"지금 성총을 자랑하시고자 저를 찾으셨습니까? 폐하 또한 사내입니다. 사내란 결국 제 핏줄 가진 여인에게 돌아가는 법이지요."
약간 턱을 치켜든 윤 첩여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부른 배를 어루만졌다.
"해서 그리하였습니까? 내 용종마저 잉태할까봐, 그리 되면 영영 용안 한번 뵙지 못하고 잊혀질까봐?"
"귀비마마!"
화연은 사색이 된 윤 첩여를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상의를 벗었다. 대체 저것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이맛살을 구기며 그녀를 바라보던 윤 첩여의 입이 눈앞에 놓인 찻잔만큼이나 크게 벌어졌다. 지금 눈앞에 있는 귀비의 몸에 선명하게 새겨진 황제의 이름. 그리고 그것이 새겨진 곳은....
"용종을 잉태하였으니 아시겠지요. 옥체에, 같은 곳에 무엇이 새겨져 있는지."
"마... 말도 안 돼."
저도 모르게 그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더듬더듬 뻗어온 윤 첩여의 손을 찰싹 쳐낸 화연이 다시 옷고름을 고쳐 매었다.
"그 글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진 않으리라 믿겠습니다. 폐하의 성총은 용종의 유무로 이리저리 휘둘리지 아니한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탁자에 놓인 두 개의 찻잔은 이제 더 이상 더운 김을 피워올리지 않았다. 화연은 제 것이 아닌, 윤 첩여의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단번에 마셔버렸다. 나는 너처럼 얄팍한 수를 쓰지 아니한다, 이리 말하듯. 지켜보던 윤 첩여는 습관처럼 배를 감싸며 굴욕감에 고개를 돌렸다.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한 번만 더 이 사람을 건드렸다가는 윤 첩여께서 단명하십니다. 태중 용종마저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할 것입니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윤 첩여가 발끈하였으나 화연의 말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녀를 몰아붙였다.
"내가 폐하께 이 사실을 고하였다면 첩여는 물론이요, 첩여의 가족들조차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폐하께서 급작스레 폐태후의 집안을 통째로 쓸어버리고, 황후를 그 지경으로 만드셨는지 모르시겠습니까?"
"그들이... 모반을 꾀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틀렸습니다. 폐태후는 이 사람을 납치하여 폐하를 겁박하다가 그리 되었고, 황후는 아시다시피 이 몸에 회초리를 대었다는 연유로 그 꼴을 당했습니다. 헌데 불임약이요?"
증좌라도 있습니까. 그리 반박하려던 윤 첩여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 머리나쁜 여인은 아니었으니까. 증좌도, 증인도 차고 넘칠 뿐 아니라 설사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서 귀비의 말 한마디면 황제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번만입니다. 그대의 태중 용종을 생각하여 넘어가겠습니다. 제발, 폐하께서 제 핏줄을 가진 여인과 황손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도록 해 주세요. 그저 얌전히만 살아준다면 성총은 얻지 못할망정, 평생을 황궁에서 안온하게 사실 수 있습니다."
"... 참입니까? 저와 황손을 해하지 않으실 것입니까?"
"과욕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치밀어오는 굴욕감에 입술을 깨물어 보지만, 윤 첩여 스스로 알고 있었다. 서 귀비가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의 집안, 뱃속에서 꼬물대는 아이의 목숨까지 구명해 주었음을.
"그만 가 보세요. 오래 머물러 좋을 일이 없습니다."
========== 작품 후기 ==========
연참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