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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72화 (72/152)

<-- 물은 여기에서 나오는데. -->

"헌데 안색이 어찌 그리 어두운 것이냐."

"내 정인께서 품었던 여인들이 그리 많은 것을 보았는데 밝을 리가 없지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정인이라 불러주어 가슴이 쿵쾅거리는데, 또 그 여인들이 많다 하니 할 말은 없고. 안절부절하던 현은 결국 본능이 시키는 대로 일단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 침상 위로 끌어당겼다.

"마음 붙일 곳이 없어 그리하였지. 네가 좀더 일찍 나타나지 그랬느냐."

"해서 죄다 출궁시켰습니다. 혹, 아쉬우면 말씀하세요. 다시 불러들일 터이니."

속이 뻔한 허세에 현이 큭큭 웃음을 터뜨리며 환관복의 매듭을 풀었다.

"다시 불러들여 무엇 하게?"

"그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폐하를 가질 거예요. 이제 내꺼다, 이 사내는 나의 사내다, 하고."

"그럼 다시 불러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걸."

화연은 벌써 속의대까지 풀어내고 슬슬 지분대는 현의 손길을 모른 척 했다.

"나는 결국 내 사내의 벗은 몸을 다른 여인들한테 보여줘야 하나요?"

"농이다. 원하는대로 백이건 천이건 모두 내치거라."

꼬리가 아홉개 아니라 열 대여섯개는 족히 넘어가는 것 같다. 어느 여우가 지금 품안에서 녹아내릴 듯 달콤한 말들을 속삭이는 이 여우에 비할까.

그를 알면서도 현은 또 여우의 젖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지친 옥체를 쉬었다. 이대로 간을 빼어가도 좋다 생각하며.

***

"감축드리옵니다, 첩여마마."

"성총이 어지간히 장하다더니, 참말이십니다. 이리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주시다니요."

오직 자신과 태중 용종만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 윤 첩여는 그 중심에서 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불과 몇달 전, 채녀로 입궁하고 아버님께서 관복 대신 갑옷차림으로 변방에 나가셨을 적에는 모두가 수군거리고 무시하지 않았던가. 허나 지금은 다르다. 권력이란 이다지도 아름답고 달콤한 것을 왜 몰랐을까.

"첩여마마, 감축드리옵니다."

처음 입궁할 당시 태후의 뒷배를 믿고 그토록 저를 비웃던 후궁들마저 저리 절절매는 꼬라지를 좀 보라지. 이제 폐하께서 와주시기만 한다면....

"황제 폐하 납시오!"

윤 첩여의 기대에 부응하는 환관의 외침에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 엎드렸다. 그 중 엎드리지 않은 이는 오직 윤 첩여, 단 한 사람. 그러나 어여쁘게도 웃던 그녀의 미소는 황제의 옆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나타난 여인에 의해 싸늘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첩여 윤씨가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후궁전에서 몇번 마주치긴 하였으나 늘 저를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하던 민씨였다. 그녀가 황후로 책봉된 것도 배가 아파 미칠 지경인데, 이리 연회까지 망치려 나타나다니.

본디 표정을 숨기는 일에 그다지 능숙하지 못한 윤 첩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그대로 내보이고도 그 사실을 몰랐다.

"축하하네. 내가 와 불편한 것은 아니겠지?"

"... 그럴 리 있겠사옵니까, 황후마마."

예를 갖추고 고개를 들어올린 윤 첩여와 그녀를 내려다보던 황후의 눈빛이 불꽃이라도 튀길 듯 맞부딪혔다. 두 사람 사이에 선 현은 감정적인 피곤함을 느꼈으나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그 기싸움은 종일 계속해서 이어져, 연회가 파할 즈음에는 객들이 대체 이곳에 무엇을 축하하러 모인 것인지 잊어버릴 정도가 되었다.

"이것을 좀 드시오. 꽤나 맛이 좋구려."

황제께서 옆에 앉은 황후의 접시에 음식을 올려놓자 알 수 없는 수군거림이 산들바람처럼 일어난다. 한쪽 입꼬리를 약간 올린 황후의 비웃음이 아주 잠깐 윤 첩여를 향했다가 다시 지워졌다.

"네가 불편하겠구나. 오기 전에 황후의 몸 상태를 보러 잠시 들렀는데, 워낙에 갑갑하다 하는 통에 그만."

어수선한 사이에서 황후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현이 윤 첩여를 향해 부드럽게 말을 건네었다. 천성이 나쁜 여인도 아니고, 자신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인 여인 또한 아니다.

허나 그런 것이 뭐 어떻단 말인가. 그녀의 존재가 화연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된다면 조금씩 잘라냄이 옳다. 그리고 현의 예상대로, 이 단순한 여인은 아주 쉽게 황후에게 적대감을 드러내 주었다. 이 소문은 연회에 모인 이들로 인해 뼈가 자라나고 살이 붙어 종내는 다시 소문의 근원지로 되돌아가겠지. 윤 첩여가 굳은 표정으로 막 입을 열려는 그 때.

"첩여마마, 미인 서씨 인사 올리옵니다."

미인 서씨. 소문으로만 돌던 새로운 후궁이 급작스레 나타나자 연회장이 술렁였다. 시집가다 가마째로 떨어져 죽었는데 기적같이 살아 돌아왔다는 여인. 물론 그녀를 둘러싼 소문이 그리 담백할 리 없다.

산적들에게 끌려가 여태 노리개 노릇을 하다 도망하였다더라, 이미 우승상의 자제와 초야를 치렀다더라. 온갖 더러운 추문들이 따가운 눈초리를 타고 화연을 긁어대었으나 그녀는 그저 곱게 미소를 지으며 꽃잎처럼 가만히 앉아 연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어찌 된 것이냐. 내 절대 다른 후궁들과 마주치지 말라 일렀거늘!"

연회가 어찌 끝났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현의 머릿속은 오직 화연을 무시하듯 내려다보는 황후와 윤 첩여, 수군대며 그녀를 배척하던 다른 후궁들의 모습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러나 정작 그를 분노하게 만든 것은 그 모든 수모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한 미소로 받아들이던 화연과, 온갖 정치적 이해관계로 얽힌 그 연회장에서 화연의 손목을 붙잡고 나오지 못하던 자신이었다.

"저를 황후로 만들어 주신다면서요."

"네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때의 이야기지. 헌데 그 새를 못 참아 이리 명을 어기다니!"

분노와 서글픔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화연을 똑바로 바라본다. 현이 꽉 쥐고 흔드는 어깨에서 아릿하게 통증이 느껴졌으나 화연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폐하."

현이 잠시 말을 멈춘 사이 화연이 천천히 현에게 팔을 감아왔다. 또렷하게 제 생각을 말하는 목소리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전 그저 이리 후궁으로 앉아 있어도 좋아요. 허나 폐하께선 제가 황후였으면 하시잖아요. 저는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 해드리고 싶어요. 폐하가 제게 해주시듯이."

"허니 그저 얌전히 있거라. 작금 황후보다 더 큰 세력을 지닌 이가 윤씨다. 내가 그들을 쳐낼 때까지 위험을 자초하지 말라, 이 말이다."

"저를 못 믿으세요?"

실망한 것은 자신인데 어찌 화연의 목소리에 실망이 깃들어 있는가. 혼란 속에서도 현은 지금까지 꽉 눌러 잡고 있던 어깨를 부드럽게 안았다. 이 와중에도, 어여쁘다. 어여뻐서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믿는다. 허나 너를 위험하도록 두고 싶지 않다."

"여기 앉아서 폐하께서 주시는 먹이만 받아먹지 않아요. 폐하께서 절더러 황후가 되어달라 하였으니, 저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거예요. 나라가, 황궁이 어찌 돌아가는지 배우고, 대신들의 지지를 얻고, 다른 후궁들이 우러를 수 있는 그런 황후가 될 거라구요."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는 여인. 현은 그 말에 기쁨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어쩌면 화연의 그릇에 담기에 자신은 너무나 작고 초라할지도 모른다는. 해서 화연이 세상에 눈을 뜨게 되면 자신에게 크게 실망한 나머지 마음이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저를 도와주세요, 폐하. 성군의 아내로서 부끄럽지 않은 여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지금 이 두려움조차도 졸렬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은 그녀를 믿었다. 믿어야만 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애써 불안감을 감추고 화연에게 전해졌다.

"네가 원한다면, 내 무엇이든."

**

"마마, 불편한 곳이 있으시옵니까?"

연회가 끝난 날부터 계속해서 잠을 설치는 윤 첩여에게 상궁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총애받고 있음을 모든 이들에게 알리는 연회를 그리 망쳐버렸는데. 뻔뻔하게 가장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비웃음을 흘리던 황후의 얼굴이 자다가도 문득문득 떠올라 이불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되었다. 가서, 심신을 안정시키는 차를 좀 달여오너라."

"예, 마마."

결국 윤 첩여는 오늘도 다시 잠드는 것을 포기하고 상궁이 내온 국화차 한 잔으로 심신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생각할수록 괘씸한 계집. 폐하께서 잠시 들른 차에 갑갑하다며 생떼를 피웠다 하였으니, 필경 제 연회가 샘나서 작정하고 망치고자 함이리라.

그리 이를 바득바득 갈며 밤을 꼴딱 새운 그녀에게 황후께서 모든 내명부를 소집하였으니 즉시 채비하여 황후궁으로 들라는, 전혀 반갑지 않은 전갈 하나가 날아들어왔다.

"내명부 소집? 이리 급작스럽게? 그간 단 한 차례도 없었던 일이 아니더냐?"

"소인은 그저 말씀을 전할 따름이옵니다."

말을 전하러 온 궁녀를 닦달해 보았으나 일개 궁녀가 무어라 할 일이 아니었다. 윤 첩여는 못마땅하게 인상을 구기면서도 다른 후궁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서둘러 치장을 하고, 그 풍경은 다른 후궁전에서도 똑같이 연출되었다.

한 시진 후, 정3품부터 정7품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인 후궁들은 품계대로 자리를 찾아 황후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급작스레 소집하였건만 이리 응해주어 고맙네."

황후 민씨가 짐짓 자애로운 목소리로 그녀들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허나 그 속은 구렁이 열 마리가 들어앉은지라, 어찌하면 제 자리를 위협하는 윤 첩여와 신경 거슬리는 서 미인을 제대로 쳐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소집이라 하여 거창한 것은 아니네. 내 회임하여 책봉식을 치른 터라, 그간 몸이 무겁다는 핑계로 내명부를 태후께 미루었지 않나. 태후의 자리가 공석인 고로 이제서야 제대로 내명부를 다스려 보려 함이니, 얼굴들이나 익혀 보자 이 말일세. 여봐라, 배 상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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