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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두 얼굴-69화 (69/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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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 여 씨는 사특한 계교로 선황제의 그림자를 빼돌려 짐의 안전을 위협해온 바, 역모의 죄로 다스려 신분을 천민으로 하고 능지처참에 처한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본디 황제의 교지란 대승상이 읽어야 하는 일이나, 그간 그 일을 대신해오던 우승상마저 구금된 지금은 읽을 사람이 없다. 현은 그 사실을 무척이나 흡족하게 생각하며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교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간 살아남은 선황제의 그림자 역시 능지처참하여 그 시신을 짐승들의 먹이로 던진다. 뼛조각 하나 온전히 보전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황족을 능지처참하는 일은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허나 세력의 주축이던 우승상의 모가지가 달랑거리는 판에 그 누가 선뜻 반대표를 던지고 나서겠는가.

대신들은 그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며 허리를 더욱 깊숙히 수그림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우승상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자들은 더욱 더.

현은 잠시 여유로운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흑룡포를 탁 털고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그 낯짝들 한번씩 봐 주어야지. 연도 마다하고 지하감옥으로 향하는 걸음이 전에 없이 가벼웠다.

"아주 혈색이 좋아 보이십니다, 마마. 아, 이제 마마가 아닌가. 죄인 여 씨."

거슬리는 감옥 냄새에 입을 가린 현이 이죽거리자 고왔던 자태를 잃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여 씨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노려보았다. 과연 독사 중의 독사라, 범인이었다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눈빛이었다.

"내 죽어서도 네놈을 저주할 것이다. 감히 어찌...!"

"그림자와 붙어 처먹던 창기년 주제에 누굴 저주하느냐."

그저 몰래 사내를 끌어들이거나 정신빠진 벼슬아치를 불러들인 줄 알았는데, 그간 태후궁에서 느낀 정사의 흔적은 다름아닌 그림자의 것이었다. 그 사실이 문득문득 떠오를 적마다 화연과 흑운이 연상되어 현의 불쾌감을 자아낸다. 그는 여유롭던 미소를 지우고 옆방에 묶인 제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곱게 죽을거라 생각하진 않겠지. 능지처참이다. 너희 둘 다, 아주 천천히 포를 떠서 죽여주마."

"꽤나 자비롭군. 한날 한시에 보내주겠다니."

제운이 거칠게 비아냥거렸으나 그 정도에 눈 하나 깜짝할 현이 아니다. 허세를 부려 보았자 눈앞에서 정인이 아주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제정신을 챙길 수 있진 않을 터이니. 허나 건방짐에 대한 벌은 주어야겠지.

"저 새끼, 혓바닥 잘라서 여씨 사식으로 넣어줘라."

마지막 명을 내리고 퀴퀴한 지하를 벗어난 현은 천천히 햇살 아래를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황후 민씨와 첩여 윤씨를 어찌할 것인가. 샌님으로부터 건네받은 명부에 민씨의 양부가 수결을 남겼으니 그녀를 쳐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진데, 그리 되면 병부상서 파에서 얼씨구나 하고 윤 첩여를 황후로 밀 것이고.

이리저리 경우의 수를 가늠하다 보니 어느 새 향하고 있는 곳은 가려고 했던 집무실이 아닌 침전이다. 이왕 예까지 온 김에 화연이 얼굴이나 한번 더 보고 가야지, 하고 혼자 씩 웃던 그는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 자리에 멈추었다.

"폐하!"

"몸도 무거울 터인데 어찌 예까지 왔느냐."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주시던 황제께서 걸음을 뚝 끊으신 지가 벌써 여러 날이다. 필시 태후의 일로 몸과 마음이 뒤숭숭하여 그러하시리라, 그리 생각하던 윤 첩여는 결국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혹여나 마주칠까 침전 부근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녀를 보는 용안에는 더 이상 따스함이 없었다.

"적당히 움직이는 쪽이 순산에 도움이 된다 하여...."

말꼬리를 흐리며 눈치부터 살피는 윤 첩여의 모습이 편안할 리가 없다. 허나 침전을 바로 코앞이니 이러다 화연이 나와 보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오싹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방 사건으로 아주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녀가 아닌가.

현은 금방이라도 화연이 나와 냉기를 풀풀 쏟아낼 것만 같은 느낌에 재빨리 윤 첩여의 어깨를 끌어당겨 자연스럽게 발길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가자. 처소에 데려다 주마."

더없이 바쁘실 터인데 처소까지 바래다 주신다니. 윤 첩여는 지금 가는 이 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으나 홀로 올 적에 멀기만 하던 그녀의 처소는 아쉬울 정도로 가까웠다. 애초에 아주 작은 보폭으로 소리도 나지 않게 걷는 윤 첩여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현의 속도가 비슷할 리 없으니.

지금 잔뜩 아쉬워하는 윤 첩여는, 그가 마음에 둔 여인과 걸을 적에는 무척이나 천천히 걷는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무어 할 말이 있느냐?"

처소 앞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거리던 윤 첩여에게 반가운 하문이 내려왔다.

"저어, 보름 후에 있을 연회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연회?"

까맣게 잊고 있었다. 윤 첩여의 가족을 초청하여 작은 연회를 열어 주기로 한 일. 모든 것을 예부에 일임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던 터이니,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것이 더욱 이상한 일이리라.

"예. 신첩에게 내려주신 연회가 보름 후이옵니다."

"아아... 좋을 대로 하여라. 초청하고 싶은 이들을 초청하고 필요한 것은 예부에 말하도록."

"외람된 청이오나, 혹여 폐하께서 용안을 비춰주실 수 있으시온지...."

윤 첩여는 힘겹게 말을 꺼내놓고도 안절부절 황제의 눈치를 살핀다. 고작 후궁에게 따로이 연회를 열어 준 일만 하여도 감지덕지인데, 용안까지 비춰주실까. 잠시 그 부탁을 곱씹던 현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며 계산을 마쳤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미소와 함께 다정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지. 함께 차라도 들고 싶으나 정무가 바빠 그리할 수가 없겠구나. 들어가 쉬거라."

현은 금세 얼굴이 환해진 윤 첩여의 인사를 뒤로하고 집무실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시각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화연이를 한번 들여다 보고 가기는 틀린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집무실에서 다시 나왔을 때는, 이미 기다리던 궁인들의 발치에 긴 달그림자가 드리워진 후였다.

***

"욕간을 준비하오리까, 폐하?"

"아니, 조금 있다가."

거의 달리듯 침전으로 돌아온 현은 피곤도 잊고 욕간도 마다한 채 화연이 하루종일 처박혀 있던 쪽방의 문부터 열어젖혔다. 얌전히 앉아 서책을 읽고 있던 그녀는 아주 완벽한 예법으로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하고 인사를 올렸으나 그뿐. 이내 아무것도 못본 듯 다시 자리에 앉아 서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우리 화연이, 석수라 드시었나?"

"예. 먹었습니다."

"산보 나갈까?"

"곤하옵니다."

"단 것을 좀 들이라 할까?"

"체기가 있사옵니다."

"저런. 손을 주물러 주마."

"방금 다 나았사옵니다."

모든 방패를 뚫는 창과 모든 창을 막아내는 방패의 싸움은 방패의 승리였다. 괜히 옆에서 알짱알짱 말을 붙여보던 현은 결국 입을 닫고 화연이 넘기는 서책을 부럽게 바라볼 도리밖에 없었다.

그래도 곱다. 야무진 머리통도 곱고, 하나로 묶어 늘어뜨린 머리칼 아래 힐끗 보이는 새하얀 목덜미도 곱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어깨도 곱고. 저 옷 속에 숨겨진 엉덩이는 또 얼마나 동그랗고 고운지. 아, 못 참겠다. 당장 그 엉덩이를 벗겨놓고....

"뭐 하시옵니까?"

고드름마냥 콕 찌르는 목소리가 현의 정신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어느 틈에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와 뽀얀 목덜미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고 있던 그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화연의 옆에 붙어앉았다.

"무슨 서책을 그리 읽나, 싶어서."

"폐하께서 주신 서책이옵니다."

새침하게 대답하는 입술은 또 얼마나 고운지. 현은 결국 의자에 앉아 있던 화연을 번쩍 들어올려선 침상 위로 옮기고 이불로 돌돌 말았다. 졸지에 새하얀 누에고치가 되어버린 그녀가 힘껏 바둥거렸으나 팔다리 하나 꼼짝할 수가 없다.

누에고치나마 가득히 품에 끌어안으니 조금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내가 잘못하였다, 응? 화연아."

잘못하였다면서 어찌 입술은 지분지분 보드라운 귓바퀴를 씹는 것인지. 허나 돌아오는 것은 정말 죽일 듯 그를 노려보는 눈빛과 싸늘한 대꾸였다.

"천자께서 무얼 하시어 잘못이겠습니까. 그런 말씀 마소서."

"미안하다니까. 다시는 기방이고 뭐고 근처에도 가지 않으마. 사직에 대고 맹세할 수도 있다."

이 말에는 화연도 설핏 웃음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기뻐서가 아닌, 너무 어이가 없어서. 고작 기방에 가지 않겠다는 맹세를 나라의 근간인 사직에 대고 하는 이 사내를 세간에서는 성군이라 칭한다지.

그런 그녀의 속도 모르는 현은 실낱같은 미소만으로도 신이 난 듯 대놓고 이마부터 내려와 오똑한 콧날, 짙은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 볼살이 쫄깃한 뺨에 차례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물론 입술까지 가서는 아주 세게 입을 깨물려 버리기는 하였지만서도.

"아, 이건 아픈데."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어 입술에 묻은 타액을 핥은 현이 다시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대체 어찌하면 마음이 풀어지겠느냐?"

"어찌 천한 소녀가 감히 폐하께 마음을 드리겠나이까."

"그러지 말고. 내가 너 때문에 아주 밥술이 넘어가질 않는다."

"... 무엇이든 들어 주시옵니까?"

"그럼. 내 그 샌님까지 살려주지 않았더냐."

새침하던 눈매가 드디어 현을 똑바로 향했다. 그 눈빛이 빨리 둘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이불을 걷어내고 안에 들어가고 싶은 현의 마음에 불을 질렀으나, 빨리 말해보라며 보채는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아주 뜻밖의 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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