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계집보다 맛이 좋으시지요? -->
“남색이 유행이라더니, 이제 아주 대놓고 지랄을 떠는구먼?”
예까지도 괜찮았다. 현은 웬만해선 백성을 해치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예끼, 이 사람. 천자도 환관 똥구녕에 밤낮으로 양물 들이박는 판에 귀족이라고 대수인가.”
“천자는 무신! 불쌍한 백성 내팽개치고 환관놈 구녕 따먹는 재미로 사는 것이 천자여? 그 환관은 또 뭔 죄래, 나오라고 있는 구녕에다 뭔 짓이여.”
“박는 놈이나, 박히는 놈이나 고것이 고것이지. 요놈요놈 곱상하게도 생겼구먼, 엔간한 계집보다 구멍 맛도 쫄깃하것어?”
마지막 기회였다. 그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그러나 거나하게 오른 취기에 눈앞이 흐려진 사내들은 싸늘하게 노려보는 현의 시선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야 말았다.
“내 물건이 보통 실한 것이 아녀. 저 기생오라비보다는 훨 나은디, 거기 너. 나도 똥구녕 맛 한번 보게 해 주지?”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가 바지춤에 손을 집어넣고 남근을 주무르며 화연을 향해 던진 말은 도가 넘었다. 등골이 오싹해진 화연이 현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이미 늦었다.
“으아아아아악!”
현이 꺼내든 단도가 눈 깜짝할 사이 사내의 손을 뚫고 양물을 반쯤 잘라내었다. 고통으로 울부짖던 사내가 그대로 혼절하였으나 현은 멈추기는커녕, 남은 술을 사내의 얼굴에 들이붓고 그가 눈을 뜨는 순간 단도를 거칠게 돌리며 뽑아내었다.
“야이 미친놈아!”
일행인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가만히 엎드려 빌었다면 좋았을 것을, 술기운이 괜한 용기를 불어넣은 모양이었다.
"미친놈을 왜 건드리느냐."
현이 뽑아낸 단도가 그대로 용기있는 사내의 허벅지에 구멍을 뚫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앞다투어 객잔을 벗어나려 달렸으나 이미 모든 문은 그림자들에 의해 막힌 상태였다.
“처분을 내리십시오, 주군.”
어느 새 나타난 흑운이 현의 발치에 부복했다.
“여기 통째로 태워라.”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명을 내리는 현에게서 성군의 모습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가슴이 섬뜩해진 화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늙은 노인과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 처녀총각, 객잔의 일을 거드는 어린아이까지. 화연은 생각할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그들을 대신해 바닥에 엎드렸다.
“안 돼요. 살려주세요!”
“누가 널더러 엎드리라 했느냐.”
현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 화연이 다른 사람을 살려달라 하는 것이, 그들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만들었다. 귀족 가문의 고명딸이 대체 언제 바닥에 엎드려 보았을 것이냔 말이다. 그것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제발….”
그랬었지, 젠장. 현이 거칠게 화연을 잡아 일으켰다.
“입 단속시키고, 이 두 놈은 혀를 잘라 죽여라.”
"존명."
**
"꼭 이러고 자야 하나요?"
그 살벌하던 와중에도 현은 주문했던 팔찌를 챙겨가지고 왔다. 말없이 그것을 채우고 끈을 단단히 연결하는 그에게 화연이 작은 불만을 표시했으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반드시. 내가 잠든 사이 네가 사라지지 못하도록."
은애라기보단 광기에 가까운 눈빛이 깊은 만족감을 띠었다. 이렇게 제정신이 아닐 때의 현은 그냥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두는 편이 낫다는 것을, 화연은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불편함을 참기로 했다.
"익숙해... 지죠, 뭐."
윽. 현이 꽉 깨물어 버린 손가락에서 묵직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다시는."
손목을 타고 올라온 현의 치아가 새하얀 팔에 잘근잘근 잇자국을 만들었다.
"그 어디에서도 무릎을 꿇지 말아라. 내 이름이 새겨진 이상, 너는 곧 나다."
가슴 위로 동여맨 침의가 풀려나가며 이제 완전히 아물어 자리를 잡은 검은 글씨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을 보는 현의 입가에 삐뚤어진 웃음이 번지다가 이내 잔잔한 분노로 바뀌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그 객잔을 통째로 불태우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고 싶다. 현은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대신 커다란 손으로 화연의 목을 쥐었다.
"폐하...?"
목을 부러뜨린다면 다시는 다른 사람을 입에 담지 못할 터인데.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손에 힘을 주었으나 현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그가 자신을 해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것일까. 후자라면 화연의 생각이 맞았다.
현은 가늘게 내쉬는 숨이 멈추기 직전에 손을 떼어냈으니까. 그리고 그때, 어둠을 뚫고 나타난 흑운이 침상 아래 부복했다.
"처리했느냐."
현이 넓은 소매 뒤로 화연의 몸을 감추며 끌어안았다.
"한 명의 혀를 잘랐으나 죽지 않아 그냥 걸어 두었나이다."
"천천히 죽으면 더 좋지. 나머지 하나는?"
"폐하께서 직접 보셔야 할 듯 합니다."
현이 눈썹을 살짝 움직였다. 흑운이 이리 말하는 데는 틀림없이 연유가 있을 터. 그리고 그 연유를 현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흑운을 내려다보던 현은 제 팔찌에 연결된 끈을 풀어 침상 기둥에 단단히 매고 화연의 침의를 정돈한 후 이불을 덮어주었다.
"잠시 다녀오마. 네가 갈 곳이 아니다."
"또 외박하시면 안 돼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화연의 이마에 입을 맞춘 현이 침상에서 내려오자 흑운이 앞장섰다. 캄캄한 어둠을 뚫고 도착한 곳은 황궁 깊은 곳에 숨겨진 지하 감옥. 불길하게 타오르는 횃불의 그을음과 죽어가는 사내의 신음소리, 그리고 피비린내가 훅 끼쳐들어 현의 이마를 찌푸리게 만들었다.
"이거냐?"
입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천장에 매달려 있는 사내는 보지도 않은 채, 현이 의자 하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사내의 허벅지에 칼이 꽂혔던 자리가 선명하다. 옆에 서 있던 그림자 하나가 머리에 찬물을 쏟아붓자 번쩍 고개를 들고 앞을 본 사내는 현을 향해 정신없이 외치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십쇼, 폐하! 소인은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뭐래는거냐."
"아까부터 계속 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고문을 해 보았으나 폐하께 직접 말씀드리겠다며 입을 열지 않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황제의 모습은 사내에게 희망의 불꽃을 피워올렸다. 혜국의 태양, 불세출의 성군이 아닌가. 사실대로 말하면 분명 그를 살려줄 것이다.
"폐하, 소인의 말을 들어 주십쇼! 억울합니다!"
"말해라."
"소인은 그저 왈짜패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데...."
"본론만."
"예, 예. 어떤 사내가 찾아와 은전을 건네주며 황제에 대한 소문을 멀리 퍼뜨리라 시켰습니다요. 처음에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으나 시키는 대로 하면 돈을 주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겁박했습니다!"
아까부터 현을 찜찜하게 만들었던 근원이었다. 황궁의 소문이 일개 술주정뱅이의 입에 오르내리기까지의 시간이 너무나 짧고, 그 내용이 놀랄 정도로 구체적이었던 것.
"그는 얼마에 한 번씩 너에게 돈을 주었느냐."
"닷새에 한 번씩 은전을 주고 갑니다요. 그리고 내일이 바로 그 날입니다! 폐하, 부디 은혜를 베풀어 이놈 목숨만 살려주십쇼!"
"인상착의는."
"온통 검은 옷에 복면을 썼기에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예, 거기 무사 나으리랑 꼭 같은 차림이었습니다요. 검은 칼을 찬 것까지 똑같습니다요!"
현이 고개를 돌려 흑운을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에 얼굴을 가리는 복면, 그리고 검은 칼. 다음 순간, 현과 흑운의 발이 동시에 지하 감옥을 벗어나 침전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이미 텅 빈 침상에는 손목을 묶었던 가죽끈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