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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화 〉활공(滑空) (157/164)



〈 157화 〉활공(滑空)

"죄송해요, 어떻게든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고 해서..."
"그랬겠지."
요나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으며 다리를 꼬고 턱을 괴었다. 칼린은 그녀의 맞은 편에 앉으며 곤란한 듯 손을 모았다.

"파티의 주인공인데 여기 있으시면 안 되잖아요?"
"무슨 대화를 한 거냐."
"리쿠르트에 대한 거랑, 뭐... 이것저것 말이죠."
"이것 저것, 인 거냐. 하!"
요나는 코웃음 치고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쾌했다. 머리는 이해했지만, 가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 흥이 깨져 버렸어. 이대로 먼저 잠드는 것도 좋지만, 너와 이렇게 '힘들게' 만났으니 뭐라도 해야겠지."
"하하..."
칼린은 요나의 말에 웃으며 허리를 곧추 세웠다. 그는  나름대로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 든 방금 한 대화 내용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떠올리려  수록 그가 잊어버렸던 것들이 다시 떠오르려 했기에.

"일어나라."
"아, 네."
요나가 먼저 일어나칼린의 손을 잡았다. 칼린은 에스코트 받는 위치의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 홀 가운데 쪽으로 이동했다.

"홀에서 춤추는 건 또 처음이던가.. 참 애석한 일이다."
"그것도 그러네요.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는데도 말이죠."
오케스트라의 음악에 맞춰서, 둘은 자연스럽게 인파 사이로 섞여 든다. 칼린은 이제 어느 정도 요나의 움직임에 맞춰 움직일 수 있다.

"많이 늘었구나. 더 이상 내 발을 밟지 않는군."
"마음에 두고 계셨군요."
"그럼. 얼마나 아팠는지. 발가락이 다음 날 점심먹을  까지 욱신거리는 느낌이었다."
요나의 기분도 조금 풀렸다. 그녀는 다시 얼굴에 웃음기를 찾아 가며 칼린을 리드했다.

"... 하지만 그래도 전 이전에 같이 춤 췄을 때가  좋았네요."
"내 발을  밟고 싶었 느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귀여운 것. 당황하기는."
요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여유로워 보였다.

"그 때, 왕성 테라스에서 말이죠."
"아... 그 때 인가.  때가 제일 좋았느냐?"
“여기에서 생긴 몇 없는 좋은 기억이죠."
칼린이 그렇게 말하고서  바퀴 몸을 돌린다. 요나는 돌았다가 자신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칼린을 잡아 끌고서 웃는다.

"뭐가 그렇게 좋았느냐."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일단 둘만 있었잖아요."
요나의 움직임이 멈췄다. 칼린은 굳어버린 요나를 보며 멍청하게 생긴 가면을 들이 밀었다.

"... 요나?"
요나의 얼굴은 귀 끝까지 붉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 상태로 한참을 굳어 있다가, 다른 귀족과 등을 부딪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칼린의 손을 풀었다.

"... 어디 가세요?"
"금방 돌아오마. 여기서 기다려."
당황해 가만 있는 칼린을 두고 요나는 성큼성큼 홀의 가외까지 빠져나와, 거칠게 테이블에 비치되어 있던 술병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몇 번인가 목을 울리며 그 술을 들이마셨다.

'요망한것요망한것요망한것...'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면 정말 위험할뻔했다. 칼린에게 자각이 없는 것이 질이 나쁘다. 그는 아마 제 딴에 '여유 있는 어른들끼리의 사교대화' 따위나 떠올린 것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요나는 칼린만큼 어른도 아니고 그만큼 이성에 대해 달관하지도 못했다. 그녀는 술로 올라온 열기를 정장 앞섬을 풀어 흔들며 빼냈다.

홧김에 조금 골려 주려고 했는데 자리를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 나와 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한심함을 자책하며,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누구라도 만나볼 걸 그랬다고 속으로 후회했다. 힘들게 방해요소들을 걷어내고 나니 남은 문제는 자신이었다.

"... 젠장. 조금  취해야 되나..."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먼저 들고 있던 술병을 비워냈다.   곧 발걸음을 서둘러서 다시 칼린을 향해 걸어갔다. 이런 곳 한가운데에 그를 혼자 두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단순히 그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그라면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요나... 갑자기 어디를 갔다 오신 거예요..."
그녀의 예상은 어느 정도 정답이었다. 칼린 스스로도 지금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있었기에, 그는 몸을 움츠리고 전방위를 경계하면서도 행여 몸이 먼저 움직일까 양 팔을 서로 붙잡고 있었다.

그는 요나를 향해 달려가다가, 그녀의 상태가 자신을 떠나가기 전보다 악화되어 있는 것을 눈치챘다. 딱히 그녀의 발걸음이 흔들리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잔뜩 붉어진 얼굴만 보면 불안하게 보였다. 칼린은 요나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요나... 술 드시고 오신 거예요?"
"... 칼린. 놔라. 춤추자."
"취하셨잖아요."
"부축 받을 정도는 아니야. 놔라. 춤추자."
칼린은 조금 불안했기에 최대한 천천히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그녀의 말 대로, 움직임이 흔들릴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는지 그녀는 자세를 유지했다. 그녀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열기를 띈 한숨을 길게 내뱉은 뒤, 칼린의 양 손을 잡아 끌었다.

"느는 내가 어려 보이느냐."
발은 꼬이지 않았으나 혀는 꼬인 모양이다. 요즘은 그녀가 취한 모습을 자주 보는 듯한 기분이다. 칼린은 요나의 스텝에 의식적으로 발을 맞추며 대답을 피했다.

"대다블 해라."
"... 그런 생각  해요. 굉장하신 걸요."
"더 나를 칭차내라."
"... 부끄러워요."
아무래도 공적인 자리다 보니 취했어도 지난번 처럼은 행동하지 못하는 걸까. 그녀는 혀가 꼬이고 얼굴은 벌개졌는데도 최대한 말을 똑바로 하려고 하며 근엄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칼린."
"예."
"만약... 만약에 네가 돌아갈 수 없다면..."
요나는 그를 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며 숨을 들이 마셨다.

"이 세계에서  나와 같이 있어주는 거지? 맞느냐?"
맨정신이었다면 이런 질문은 절대 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든 재확인해야 했다.

"아무리 증오스러운 세상이더라도, 내가 고쳐주마. 가만히 있으면 내가 하나씩 고쳐 나가마. 네 마음에 들도록 말이다.  라면도 연구 시키마.  옆에만 있으면 분명  세상도 마음에 들어질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발걸음이 서서히 멈춘다. 마침내, 춤추는 인파들 속에서, 그녀는 칼린을 붙잡고 가만히 서서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만약의 말이다. 만약의 말일  이다만, 나와 있으면 네가 세상을 좋아하게 만들어보마..."
"그 땐 영주님 성에서 죽겠습니다."
칼린은 그렇게 말했다. 요나는 한 순간 얼굴을 밝히다가, 곧  의미가 약간 중의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얼굴은 급격하게 어두워진다.

"... 죽는다는 건?"
"예."
그 단호함에는 요나마저 약간의 공포감을 느꼈다. 너무 극한까지 몰아넣었던 것이다. 적어도 라드를 죽이는 자리에서는 열외를 시켰어야 했다. 칼린은, 이미 정상적으로 사고하기에는 너무 먼 길을 떠나버렸다.

요나의 안색이 삽시간에 이리저리 변한다. 웃을 듯,  듯 하며 혼란스럽게 얼굴색을 바꾸던 그녀는 곧 울 듯이 웃으며 칼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런가."
"예."
"조금 기분 나쁜 질문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미안하다."
"아니요. 문제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녀는 눈을 감았다. 서로의 파트너를 바꾸는 구간이 왔지만, 칼린과 요나는 떨어지지 않았기에 그 주변에 약간의 혼란이 생겨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서 춤을 계속했다.

그저  자리를 돌며 서로를 바라본다. 활공하는 바람개비처럼.

#

축제는 아무 문제도 없이 조용히 끝났다. 나팔꽃이 밤에 그 꽃잎을 접듯, 선상의 고결한 파티 또한 그런 식으로 회장을 닫았다.

8영주들에게는 개인실이 만들어져 있다. 요나는  개인실의 침대 위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창가에 비친, 작은 책상 위에 얹어져 있는 초록색 죽통에 고정되어 있었다.

죽통의 안에는 덜컥거리는 무언가가 있다. 요나는 그것이 칼린의 문제에 대한 정답이라는 걸 알고,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는 지도 알고 있다. 그녀가 특별히 거짓말을 한  조차 아니다. 아무리 마법이라도 불가능 한 것은 있는 것이다.

요나는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그 죽통을 자신에게로 가져온다. 그리고 죽통을 열어  안에 종이를 꺼내 들었다.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칼린이 이 세게 대신에 죽음을 택했을 때, 요나는 확실히 느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또 자신이 실수한 것인가 하고 무수히 자신을 자책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기도 했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 그는 죽을 때까지 나의 곁이다.'
절대로 그가 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말했다. '죽을 때는 영주님의 성' 이라고. 최악의 흐름이 되겠지만, 그 때가 오면 칼린이랑 같이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취할 수 없다면 다른 그 누구도 취할  없어야 한다.'
이것이 그녀만의 추악한 욕망, 욕정. 이기심과 독점욕 등, 갖가지 솔직하게 담아내지 못할 추한 감정들이 만들어낸 역겨운 결론이었다. 칼린이 그녀를 선택하지 않는 것은 괜찮다. 그녀는 칼린이 자신의 곁에 있는 이상, 그를 언제든 바꿔낼 수 있다. 그녀는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는 프로다.

그러나 칼린이 다른 곳을 보거나 다른 자가 칼린을 탐하려 한다면. 칼린의 순수성을 해치는 자가 온다면. 그의 순결을 탐하는 자가 그녀보다 먼저 그를 취한다면.

그 때는  일에 연관된 자를 전부 죽여 없애고 그녀도 같이 따라가리라.

"... 이 작전은 폐기다."
그녀는 절대로 칼린이 죽어버리는 것이나, 불행해서 모든삶의 의욕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정도가 좋다. 그녀는 나름대로 자신이 칼린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 유약한 본성은 남아있지만 공격성이 생겼으며, 요나에게 충실하고, 가끔 환각/ 환청과 발작 증세를 보이지만 평소에는 제어가 가능하며,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워내려 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요나가 관리하기 쉬운 상태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편지를 읽어 보았다. 리쿠르트 논문의 전문이 적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요나가 원하던 내용은   장에 제대로 요약되어 있었다. 다른 세계로 갈 방법 따위는 없다고 확실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요나는 원래 이 사실을 내일 칼린에게 말해 줄 생각이었다. 약해진 칼린을 축제의 분위기로 녹여주며 위로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나 어림도 없었다. 무른 생각이었다. 내일  사실을 알려준다면 그는 비행선에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

"... 큰 실수를 할 뻔했군."
불붙은 성냥이 편지를 끝에서부터 태워 들어간다. 그녀는 편지가 잘 탈 수 있도록 불붙은 부분을 아래로 내리며 편지지가 타 들어가는 것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 안쪽에도 불이한가득이다.

중요한 것은 선 타기였다. 칼린이 포기하지 않을 정도의 선 타기를 하며 그를 유혹해야 한다. 이 세계도 나쁘지 않다고 설득할  까지 그를 계속 끌어줄 만한 짧고 단단한 목줄이 필요했다. 귀족들이 백성들을 다룰 때도 다루는 목줄이며, 귀족들은 그것을 '희망'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불붙은 편지로 밤배에 불을 붙인 뒤 그것을 그대로 쓰레기통 안에 집어넣어 버린다. 그리고 귀빈실에 특별 비치된 고급 음료를 그 위로 쏟아 부어 불을 끈다. 연기가  안을 가득 메우자, 그녀는 비행선의 창문을 열어 그 연기를 내보낸다.

창을 지나쳐 나오는 연기에 눈도 깜빡하지 않으며, 그저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

새벽달이 휘영청 구름을 적셔낸다. 비행정은 시린 밤공기를 갈라내며 어느새 협곡의 위를 지나가고 있다. 소금부대가 네크로맨서를 잡기 위해 지나간  중 하나이다. 정갈하게 내리 깎인 길무리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지만,  시간에 비행선 내부에서 깨어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 다들, 어떻게 저런  보면서 신을 부정할  있을까요."
프레데리카는 발 아래의 풍경에 매료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피로만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이리저리 얼굴을 움직여 대다가, 곧 침을 질질 흘리며 눈썹을 찌푸린다. 나름 성공적으로 그가 원하던 표정을 만들어냈다.

"표정이 많이 자연 스러워 지셨습니다."
"덕분입니다."
둘은 비행선 1층 바에 있었다. 바의 문 밖에는, 교단의 신도 두 명이 비행선의 근무원으로서 대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   안쪽은 완전한 그들의 장소라는 것이다.

"이리하는 좀 어떤가요? 점심 즈음 이후부터 보지를 못했네요."
"임무와 부가임무는 확실히 구분 중인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성자를 설득하는 작업을 도와줄 것 같지는 않군요."
"우리는 군대가 아니예요. 맞는 임무에 자원자만 골라서 부탁할 뿐. 그녀의 뜻도 그릇된 것은 하나도 없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올린다. 안에 있는 것은 술이 아닌 차이다.

"그러니 저도 그녀와는 별도로 착실히 포교 설득을 해야겠죠. 변동사항이 있었나요?"
"특별히 없습니다. 8영주들의 종자들도 아직 이상한 건  느낀  합니다."
"훌륭합니다. 마나 회복을 착실히  두세요."
"그리고 벨카 영주의 방에서 이런 것이 나왔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쓰레기통에서 가져온 잿더미  줌을 건냈다. 꽤 우스운 그림이었지만, 그들은 진지했다.

"... 이건."
"비행선 내의 귀족들은 어차피 전부 죽을 테니 따로 조사하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성자님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영주니 조금 신경 쓰여서..."
"… 불로 종이를 태운 거군요. 잘 했어요, 피로만. 앙겔라에게 건내 줘 보겠습니다."
"부디."
프레데리카는 그 잿더미가 담긴 작은 자루를 받아 허리춤에 집어넣고서 차를  모금 더 홀짝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발 아래를 내려다보며 즐거운 듯 웃는 것이다.

"순항이네요."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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