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참수자
"온다!"
제퍼만이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인다. 피가 여기저기 갈래를 뻗으며 그를 덮쳐 온다. 라모스와 제퍼만은 양 옆으로 산개하며 그것들을 능숙하게 피해낸다.
공격이 멈추고, 양쪽 다 문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문 틈으로 빠져나왔던 안개가 서서히 뭉치기 시작한다. 곧 비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뭉쳐서, 천천히 사람의 형태를 띄게 된다. 마침내 드러난 것은 성 내에 깔린 어둠보다도 짙은 칠흑을 입은 자였다.
"나쁘지 않은 등장이다, '남창'."
제프는 웃으며 '그것'을 향해 말했다. '그것'은 어둠속에서 마치 얼굴만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실핏줄이 두드러질 정도로 창백하게 하얀 피부빛 때문이리라. 그것이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것.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현혹마법에 한없이 가까울 정도의 그것이다. 둘은 숙련된 전사 답게, 그것이 찬미할 것이 아닌 적대해야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제, 제프씨! 느끼셨겠지만...!"
"아, 저새끼... 나 다음으로 잘 생겼다."
"네? 네! 그것도요!"
사이에 그것을 끼고서 둘은 간단히 대화하고 검을 고쳐 쥐었다. 양 옆으로 공격하면 기회는 생긴다.
먼저 제퍼만이 달려간다. 오른 손으로 벽을 녹여 손을 파묻고서, 딱딱했던 벽을 마치 굳기 전의 시멘트처럼 집어 던진다. 칼린을 향해 그것을 날리며, 그는 왼손을 뻗어 굳힐 준비를 했다.
맞은 편에 있던 라모스는, 슬라이딩하듯 몸과 바닥의 접면을 만들고서 옆으로 구르며 검을 뽑았다. 하단을 완전히 잘라낼 정도의 검격이었다. 이제 그것에게는 두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는다. 몸을 올려 라모스의 하단 공격을 피해내고 제프의 공격에 맞을 것인가, 제프의 공격을 피해내고 라미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낼 것인가.
그것은,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저 선자리에서 몸을 웅크리고 팔을 아래로 떨궜을 뿐이었다.
"읏?!"
제퍼만은 그가 무슨 짓을 할 지 알 것 같았다. 그의 감은 그것의 다음 행동을 예측해냈지만, 머리는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고 부정하고 있었다. 아니, 머리를 쓸 싸움이 아니다. 그는 제프센스를 믿기로 했다. 녹여 둔 벽을 굳히지 않고서 그냥 날려 보낸 뒤, 급하게 허리를 꺾어 조금 무리해서 후진한다. 라미도 뭔가를 느꼈기에 검의 궤도를 억지로 틀어서 위로 올린다.
그것은 바닥으로 갖다 댄 손에서 길다랗게 붉은 봉을 만들어내 몸을 띄운다. 라모스의 검은 붉은 봉에 막혔고, 제퍼만의 공격은 낮춘 몸에 의해 피해졌다. 그것은 그 둘의 동시공격을 '중단 회피'라는 초유의 기술을 사용해 피해냈다.
감탄할 틈조차 없었다. 웅크린 그것은 한 팔로 봉 위에서 몸을 펼쳐내는 기예를 펼치더니, 자신의 다리를 베어냈다. 라모스는 그 모습에 빠지는 게 아니라 들어가는 것을 결심했다.
"제프!"
"알았다!"
몸을 낮추고 그것에게 달라붙는다. 제퍼만의 검은 아래쪽 하단부터 대각선 위로, 라모스의 검은 상단부터 대각선 아래로 찍혀 내려간다. 사이에 누군가가 없었더라면 둘의 대치로도 보이는 공격이었지만, 둘의 검의 궤도가 부딪친다는 것은 피할 곳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둘의 검이 맞부딪친다. 그것은 잔상처럼 흩어지기 시작하고, 안개가 된다. 제퍼만은 빠르게 오른손을 바닥에 대고 층계를 녹여낸다. 둘은 옷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가린 뒤 뚫린 바닥으로 떨어진다.
"제프, 이 거짓말쟁이! 이 사람 세잖아요!"
"본좌도 예상 밖이야! 라미!"
"... 예... 마법의 주문을 부탁드릴게요...!"
라모스는 뭔가 자포자기한 듯 머리를 쓸어 넘기고서 혀를 한번 훑었다. 제퍼만은 그녀를 향해 손을 모아 소리쳤다.
"라미, 네 어미는 창녀다!"
그녀의 몸이 한 번 크게 흔들린다. 거의 동시에, 그것이 그들을 따라 다시 형태를 만들어 낸다. 이번에는 라모스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 이 씨발, 다들 전투력 올리겠다고, 놀리고 자빠지고, 개씨팔!"
라모스의 검에 힘이 들어간다. 그녀는 몸을 낮추고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달리기 시작한다. 상대가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지금의 라미를 붙잡을 속도가 아니라는 걸 안다. 제프가 상대의 발 근처를 녹여 발을 고정시킨다.
"머리통 뿌셔버린다, 개년아!"
벽을 타고 날아오는 입체적인 공격. 덩치가 작고 근육이 밀집된 그녀는, 지상에서도 마치 수중에서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퍼포먼스가 가능했다. 요컨데, 입체적인 움직임이 가능하다.
첫 공격은 느리다고 생각한 움직임에 의해 막혔다. 공중에서 막힌 검은 그녀의 몸의 궤도를 크게 틀어냈다. 하지만 완전히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공중에서, 그녀는 검날을 잡아 손잡이로 상대의 머리통을 내려 부술 준비를 했다.
제프의 오른손도 그를 향해 다가온다. 방금 본 걸로 판단했을 때, 안개화에는 조금 시간이 걸린다. 둘의 기합이 성의복도에 울리고,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 이걸 막아?"
라미의 검은, 그것의 다리로부터 뻗어 나온 붉은 검에 의해 막혔다. 제프의 오른팔은 몸을 살짝 옆으로 틀은 것으로 피해냈다. 그것은 그대로 제프의 다리를 걸어 넘긴 후, 라모스의 머리를 붙잡았다.
"이거 놔, 이 씨발!"
얄상한 팔로 라미를 잡아 든 그것은, 그대로 팔을 높이 뻗어 올린다. 라미는 기사시절 배운 격투기를 전부 짜내서 그의 팔에 다리를 걸어 본다. 그러나 마치 기둥에 매달린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으그으.... 으아아아아!!"
붙잡힌 머리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쩌적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압박감에 구토가 밀려온다. 얼굴이 가려져 시야는 확보되지 않는다. 확실한 죽음의 비전이 보인다.
"멍청한 것!"
제프가 몸을 굴려 자세를 되찾고서 다시 그것을 향해 달려간다. 그것이 라모스를 마치 무기처럼 휘두르며 다가온다. 제프는 그 공격을 피하며 속으로 경악했다.
"아아아악!"
라모스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그녀는 집어 든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리에서 뻗어져 나온 붉은 검날로 그녀의 공격을 전부 쳐내고서, 그녀를 벽에 쳐 박았다. 벽이 무너지며 그녀의 경갑옷이 부셔진다.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제퍼만은, 그 모습에서 죽음을 떠 올렸다. 상대는 자신들과 맞서면서 표정조차 바꾸지 않았다. 아직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강한 전사였다. 그렇기에 수읽기에도 능했다. 역량파악도 뛰어나다.
마침내 나온 결론은, 혼자서는 무리라는 거였다.
"... 기억해 두마, 남창... 아니, '칼린'."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타깃을 바꿨다. 애초에 에테롬의 정보가 틀렸다. 저런 괴물이 상대일 것이라고는 듣지 못했다. 그는 바닥을 녹여내 본래의 목표를 찾아내기 위해 이동했다. 칼린은 그런 제퍼만을 바라보다가, 곧 벽에 쳐 박혀 쓰러져 있는 라모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임무는, 침입자의 '절멸'.
"...으... 으..아..."
라모스는 피를 줄줄 흘리며, 칼린을 분한 듯 노려보았다. 검은 부셔졌고, 아마 뼈도 전부 부셔졌다. 칼린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엿먹어..."
포기한 눈. 라드가 도르베에게 찔리고서 저런 눈을 했던가. 칼린의 발걸음이 멈춘다. 명령을 수행해야 할 몸이 안 움직이는 기분이다. 마음속에서 한 순간, 삐그덕 소리가 들렸다.
"죽여, 씨발새끼야... 존나, 구르기만 하다가 죽네, 씨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면서도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인격이 바뀌어 있는 영향도 컸지만, 어쨌든 썩어도 기사출신이다. 죽음을 두려워한 적은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상대의 그런 각오를 보아도, 칼린은 도저히 무기를 뽑아낼 수 없었다.
"... 살려드린다면."
"뭐?"
"살려드린다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세요."
그조차도 왜 자신이 그런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없었다. 뱉어 놓고서 후회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당신을 마을까지 모셔다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 준다면, 몸을 회복시키고, 오늘 있던 모든 일을 잊겠다고 약속하세요."
라모스는, 조금 어이없는 표정이다. 멍하게 칼린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곧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흐흐흐흐흐..."
어깨를 떨며 웃더니, 곧 뼈가 부서졌다는 것도 잊은 듯 호탕하게 웃으며 몸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아하! 아하하하하! 맙소사!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칼린은 아무 말 하지 않는다. 그녀의 생사여탈권은 그가 쥐고 있다. 망설임없이 죽일 수 있다. 죽일 수 있었다. 죽일 수 있었는데. 뭐지?
"내가 씨발 그렇게 말하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평생 비밀친구 합시다! 하면서 받아먹을 것 같아?"
라모스는 웃음을 섞으며 그렇게 말하고서, 고개를 조금 숙이고 유쾌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다.
"이런 병신이 그렇게 강하다니... 세상도 참 좆같구만."
"살 수 있는데도 죽으시겠다는 겁니까?"
"그렇지... 그런데 너한테는 안 죽을 거야. 병신한테 죽었다고 소문나면 쪽팔리거든."
입가에 함박미소를 걸치고, 그녀는 혀를 쭉 빼서 내민다. 혓바닥 위에는 작은 약이 한 알 얹어져 있다.
"흥이다, 씨발 새끼야."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리고서, 그녀는 그 알약을 씹었다. 몇 번인가 목을 울리며 삼켜낼 때 까지, 칼린은 그 어떤 짓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붉은색 거품을 뿜어내며 눈을 까뒤집고 쓰러질 때 까지 그저 바라보았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와 같았다. 약간의 위화감만이 남았을 뿐.
"... 두 명 남았던가."
그 위화감을, 칼린은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았다.
#
성 안이 꽤 소란스럽다. 아마 성 밖도 소란스러울 것이다. 슬슬 불을 질렀을 테니까. 요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다시 책에 집중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 였다.
패닉룸의 천장이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곧 구멍이 뚫리며, 조금 마른 남자가 떨어져 내려왔다. 요나는 그에게 굳이 시선을 주지 않고서 독서에 집중했다.
"문이라면 다른 곳에 있는데 말이야."
"카캇! 이 몸을 담을 수 있는 문은 없다!"
제퍼만은 그렇게 말하고서 옷에 묻은 흙먼지를 조금 털고, 책에 코를 박고 있는 영주를 향해 느리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반갑소. 어둠의 귀공자, 광미의 찬미자, 끔찍한 예술을 창조하는 조각가!제퍼만이외다... 아름다운 아가씨, 이런 날이 아니었다면 차라도 함께했을 텐데."
"자기 예술이 끔찍한 걸 알고 있군. 천장으로 들어온 사람 치고는 예의가 좋은 걸?"
"보아하니, 무방비. 비무장. 약하고 여린 아가씨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군..."
그는 같이 떨어진 돌덩이를 하나 주워서 녹여냈다. 그리고 천천히 요나가 앉아있는 의자를 향해다가왔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아. 댁이 기르던 그 괴물은 이미 따돌렸지."
"... 호오. 칼린을 말이지."
"그래. 용케도 저런 걸 기르고 있었어. 에테롬에게 넘기지 않으려던 게 이해가 간단 말이지. 하지만 여기서 끝이다. 먼지로 되돌려주지... 큭큭!"
과장된 웃음소리로, 가슴을 쫙 펼치고 요나를 향해 다가온다. 요나는 그제서야 읽던 책을 덮고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비무장이라... 마레가 그랬었지. 귀족의 무기는 검이 아니라, 책과 펜이라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 모서리를 제퍼만에게 향하며 웃었다.
"시험해 보도록 할까."
#
알레프는 걸으면서 몇 번인가 표정을 계속 움직여냈다. 오랜 시간 다른 사람의 얼굴로 있으면, 다시 원래 얼굴로 돌아왔을 때 적응기가 필요하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짓도 그런 행동의 일환이었다.
"... 수염이 그립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자신의 정장을 벗어내 몇 번인가 털어냈다. 팔에 박혀 있는 이빨, 묻어 있던 피 등이 털려 나간다. 캘리건, 전도가 유망한 꼬맹이었다. 싫지는 않았다. 병력들과 교란시켜 뒀으니, 나머지는 칼린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그는 벽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뒤, 바닥을 세번 발로 탭했다. 그리고 벽을 밀어냈다. 곧 벽에 가느다란 틈이 생기며 밀리기 시작했다. 그 문 뒤에 있던 것은,
"... 선객이 있었나요?"
"그래."
겉옷을 벗고, 셔츠의 팔을 걷어 올리고 있는 요나였다. 흰색 셔츠에는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었다. 난장판으로 패이고 깎이고 여기저기 뾰족하게 굳어버린 난장판 속에서, 요나는 누군가의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얼굴에 재킷이 덮인 상태로 피를 뿜어 대며 움찔거리고 있다.
"그분은 확실히... '조각가'로군요."
"그래. 강한 상대였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들고 있던 책의 책등으로 그 재킷을 덮어쓴 남자의 얼굴을 한번 더 내리 찍었다.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그는 곧 움찔거리던 움직임조차 멈추게 되었다.
"마레 말이 맞았어. 책과 펜은 무기로서 꽤 훌륭하군."
"아마도 그런 뜻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보다 자세가 상스럽습니다."
"네가 제대로 하지 않은탓이다. 나 참..."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꺼낸 뒤 읽던 책을 그대로 시체 위로 던져 놓았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냈다.
"알레프.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모든 상황을 종료 시키려고 한다."
"예, 주인님. 아마 칼린군도 슬슬 정리가 끝나지 않았을까요."
"겉옷을 하나 더 가져오거라. 1시간 쯤 후면 에테롬도 도착할 테니."
그녀는 셔츠의 앞섬을 열어재낀 후, 주머니에서 작은 가죽 안경집을 꺼내 들었다. 안에는 그녀가 상품화를 진행중인 선글라스가 들어 있었다. 나름 세련된 모양새였다. 그녀는 그걸 집어 들고 눈에 걸쳐 보았다. 마음에 들었다.
"바쁜 밤이로군. 나쁘지 않아."
#
에테롬은 그의 은신처에 있었다. 처음 연락이 끊어진 곳은 디마코/ 캘리건 쪽이었다. 다음은 제퍼만의 욕설이었다. 정보가 틀렸다느니 뭐니 하며 혼자 신나게 욕을 하더니, 곧 요나를 직접 죽이겠다고 하고서 연락이 끊겼다.
철수명령도 힘들어졌다. 후퇴하던 병사가 죽통으로 보낸 메시지에는, 급하게 휘갈긴 글씨로 ‘상점가에 불-‘ 까지만 적혀 있었다.
실패다. 완전한 실패다. 적의 역량을 잘못 계산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요나는 분명 강하지만, 그 넷과 한꺼번에 싸워 이길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단 그 성에는 40명이나 들어갔던 것이다.
"나, 참... 설마 칼린군이 전투에도 그렇게 뛰어날 줄은... 라드씨가 말한 것과는 조금 다른 걸요."
후회할 건 없다. 그는 자신의 패를 전부 사용했다. 그가 가진 자본. 인맥. 모든 걸 사용한 한방이었다. 계속되는 패배로 그도 그렇게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준비해야 할 것은, 새로운 드로우.
"송 윤 씨. 후방대기부대에 연락하세요. 카잔하크로 도망칩니다."
"네가 연락해라, 돼지."
"팔이 짧아서 전화기가 안 닿아요."
"농담이 늘었군."
송윤이 웃으며 그에게 전화기를 건내 준다. 에테롬은 그 전화기로 연락을 내건다. 곧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후방부대. 도망칠 겁니다. 퇴로를 준비해 주세요."
'아, 그게... 조금 힘들 것 같군요. 일이 꼬였네요.'
"...네?"
일이 꼬인 것 치고는, 전화 너머의 상대 목소리는 너무 평온하다. 에테롬은 뭔가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운송 마차, 병력. 전부 부셔지고 죽었네요. 재해를 만난 겁니다. 배신자에게 신벌(神罰)이 떨어졌어요.'
"... 누구시죠?"
'제 목소리를 잊으셨다고 하시는 건가요, 에테롬 형제님.'
에테롬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들고 있던 술잔에서 쩌적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으르렁대듯 말한다.
"... 프레데리카."
'정답.'
"왜죠?"
'신을 이용해 먹으려 해놓고서 그냥 넘어가려고 한 거냐, 이 빌어먹을 돼지새끼가.,, 징벌이다. 네가 이룬 모든 것을 재로 만들기 위해 찾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멱을 따고 창자를 갈아버리고 싶은데 말이야. 그건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평소 그녀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이런 대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에테롬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교단의 공격대의 행동대장이기도 한 것을.
"이 씨발년이... 내 직속부대도 몰랐던 후방부대 위치를 어떻게 알아낸 거냐."
'너네 구더기들은 사람을 거르지 않지. 신도들은 어디든지 섞일 수 있고... 지옥 길 선물로 알려준 거다. 얌전히 벌을 맞이해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빠직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에테롬은 그 전화기를 망연히 들고 있다가, 들고 있던 잔과 함께 벽에 갖다 던졌다.
"진정해라, 돼지."
"...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씨발, 지금 퇴로가 없어졌다구요!"
"내가 있다."
송윤은 그의 어깨를 잡고서 웃었다.
"얼라들 믿지 마. 나 혼자 충분하다. 카잔하크까지 안내하지."
"... 대가는?"
"뭘. 돈 듬뿍 받았고, 넌 꽤 추해서 웃기다. 한 번 공짜로 도와주지."
에테롬은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딘가의 달인이 된 사람들은 전부 고장나버리는 걸까. 그는 송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실력이 허세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짐이 필요한가?"
"... 그냥 가죠. 빠르게 움직여야 될 겁니다."
그는 의자에서 허둥지둥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이 은신처에 있는 부하들을 데리고 간다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문을 열려고 할 때 였다.
"... 잠깐 스답."
"예?"
송윤이 검으로 에테롬을 막아냈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올려 입술에 갖다 대고, 귀를 기울여 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문 너머에서, 뭔가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육중한 것이, 철덩이같은 것이 끌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묻히고 있지만, 작게 휘파람 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 이건...?"
"다가오고 있다."
송윤은 에테롬을 조금 뒤로 밀어내고서 검을 잡았다. 발도의 자세. 이 자세에 선 그녀의 검간에는 틈이 없다.
질질 끌리는 소리와 서툰 휘파람소리가 가까워진다. 마침내 그의 문 앞을 지난다. 그리고 발 소리가 멈춘다. 정적이 흐른다.
에테롬의 뺨에 땀이 한 방울 흐르고-
똑 똑 똑똑똑
노크소리가 방안에 무겁게 울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