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6화 〉참수자 (146/164)



〈 146화 〉참수자

통신이 끊겼다. 저쪽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요나는 그걸 파악하자 마자 바로 영주실에서 튀어나왔다.

한달음으로 달려간 응접실에서, 그녀는 감정조절에 실패하고 문을 부수듯 차 열었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그저 격양되어 붉어진 눈으로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테이블 위로 허리를 굽힌 이리하가 칼린에게 바짝 붙어 있는 장면이었다.

#

"요나?"
누군가 오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요나일 줄은 몰랐다. 칼린은 조금 놀라 몸을 일으켰다. 요나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성큼성큼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요나, 대체 무슨 일-"
그리고 칼린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들고 있던 검으로 테이블을 내리 찍어 부셨다. 검집조차 뽑지 않은 상태였지만, 누군가를 죽이기에는 충분한 세기였다.

이리하는 빠르게 몸을 뒤로 빼서 피해냈다. 가만히 있었으면 분명하게 목을 향해 떨어졌을 공격이었다. 그러나 요나는  움직임까지 읽어내고 반토막난 테이블을 강하게 밀쳐냈다.

이리하가테이블과 함께 밀려나 뒷걸음질쳤다. 요나는 그런 그녀를 테이블채로 발로  벽으로 밀어붙였다.

올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대처할 수 없는 완벽한 공격이었다. 이리하는 목을 짓눌린 상태로 벽에  있었다.

"왜 감청기를 부셨지?"
"ㅇ-"
요나는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이리하의 목에 점점 힘을 줘가며, 그녀의 뺨에 주먹을 내다 꽂았다. 그녀의 얼굴이 크게 돌아간다.

"무슨 대화를  거지?"
"영주님. 그만하세요."
다시한번 치켜 올라간 요나의 팔을 칼린이 붙잡았다. 요나는 그런칼린의 팔을 강하게 뿌리치며 그를 노려보았다.

"둘이서 무슨 대화를 한 거냐."
"별 대화 안 했어요."
"별 대화를 안 해?"
그녀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주먹을 부르르 떨던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듯 이리하의 배에 한 방  내다 꽂았다. 반응은 할  있었지만 막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이리하가 짧게 숨을 토해내며 다리에 힘을 풀었다. 요나는 그제서야 그녀의 목을 잡고 있던 팔꿈치를 풀어내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칼린에게 말했다.

"저 년이 뭐라고 했느냐."
"제가 걱정돼서 왔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 다음은 그냥 일상대화만 했어요."
"그렇게 얼싸안고?"
"그런 게 아니예요."
"어련할까."
요나는 구둣발을 이리하의 머리 위로 올렸다.

"넌 몰라도 여기 미망인년은 어땠을  모르지. 말해. 감청기를 왜 부셨지?"
"... 감청기요?"
"넌 몰라도 된다, 칼린."
이리하는 꿈틀대며 헝클어진 머리를 치우고 요나를 올려다보았다.

"... 테이블 아래에 있던 걸 말하는 거라면... 실수였어요."
"실수?"
요나의 팔이 다시 올라갔다. 칼린은 어떻게든 그녀를 막아야 겠다는 생각에 몸을 움직였다.

"일단 진정하세요..."
그가 요나를 향해 큰소리를 칠 수는 없었기에, 일단 그녀를 뒤에서 힘껏 끌어안았다. 요나의 움직임이 멈추더니 곧 호흡이 점점 느려졌다.

"... 이리하.  성에서 나가라. 당장."
"영주님."
"칼린. 이건 양보할  없다."
그녀의 눈은 차가웠다. 칼린도 더 어떻게 할 생각이 들지 않아서 요나에게서  걸음 떨어지려 했다. 그러나 팔을 요나에게 붙들려 떨어질 수 없었다.

"나가라. 지금 당장."
이리하는 망신창이가 된 뺨을 한번 훑고서, 머리를 쓸어 올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방을 나섰다. 나가기 전, 그녀는 방문에 기대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질질 끄는 발소리가 멀어지자, 요나는 잡고 있던 칼린의 팔에서 조금 힘을 풀었다. 칼린은 슬그머니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저 미망인과 가까워지지 말라고 분명히 명령했었다."
칼린은 그 말에 흠칫 몸을 틩겼다. 요나는 그런 칼린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거칠게 부서진 탁자를 발로 밀어내며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겼다.

"... 오늘은 수업도 대련도 하지 않겠다. 식사 때 보자꾸나."

#

이리하는 비틀거리며 성을 나섰다. 전신에서 삐그덕 소리가 나고 있는  했다. 몇 대 맞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요나가 이 정도로 격분할 줄은 몰랐다. 역시 그런 자와 칼린을 함께 두는 것은 위험했다.

턱이 조금 덜그럭거리는  했다. 그녀는 거칠게 턱을 옆으로 밀어내 맞춘  바닥에 뭉친 피를 뱉어 냈다. 분하지만, 단순한 무력차이는 확연했다. 대응해서는 안되는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속도였다.

"... 전쟁이 끝났다고 물러지지는 않은 건가."
혼자말을 뱉으며 그녀는 허리를 쭉 펴 보았다. 아무래도 갈비뼈는 부서지지 않았다. 갑옷을 입었어야 했는데, 하고 그녀는 자조했다.

"... 그래도 분명하게 전했어."
입가를 한번  닦아 본다. 붉은 피가 입술을 지나친다. 특유의 쇠맛이 혀 끝을 자극한다. 뜨거워졌던 머리를 조금 식혀주는 익숙한 맛이다.

"소금부대 이리하씨 아니신가요?"
근처에서 조금 명랑한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리하가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여성이 한  서 있었다. 양갈래로 땋은 갈색머리, 화장기 없는 수수하고 깔끔한 얼굴. 페이크였다.

"다치신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그녀는 입가를 들어 올리며 천진하게 질문한다. 이리하는 그런 그녀를 쳐다보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가를 찡그려 올렸다. 당황 30, 놀라움 50, 기쁨이 20정도 되는 표정이었다.

"... 여기서 뭐하시고 계시죠?"
"저를 아시나요?"
페이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리하의 입가를 닦아준다. 이리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도 손수건을 치우고 이리하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그리고 등을 돌려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대화나 하죠! 어때요?"
"... 예."
이리하는 비틀거리며 페이크를 따라 갔다.둘이 향한 곳은 사람들의 시선이 별로 닿지 않는 거리의 골목 안쪽이었다.

"... 그래서, 진짜로 벨카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본거지가 들통났나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자매님."
페이크의 표정이 바뀐다.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가득해 보였던 얼굴이 급변하며 차분해진다.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벗었다. 동시에, 보라색 눈과 머리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드러난 모습은 교주 프레데리카의 것이었다.

"성자에 대한 일은 제게 맡기신다고..."
"그런 것도 아닙니다. 부디 진정해 주세요."
그녀는 자비롭게 웃으며 이리하의 헝클어진 머리를 조금 빗어주다가, 표정을 고치며 말했다.

"내일, 아마도 20시쯤, 상점가에 불이 날 겁니다."
"네?"
"네. 에테롬은 벨카를 공격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유감이지만, 아마 요나도 그걸 눈치채고 있고 준비를 끝내 놨을 겁니다. 상점가에 불은 요나가 교란을 위해 지르는 거니까요."
"무슨..."
"일단, 이리하 자매님은 평소처럼 숙소 안에 계시면 됩니다. 공장 폭파 임무 때 힘쓰셨으니까요."
교주는 그렇게 말하고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미리 상점가에 있는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상회의 퇴로를 막을 생각입니다."
"왜 직접 임무에 나서셨나요?"
"이유는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이리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교주는 목걸이를 다시 쓰며 그녀를 향해 웃었다.

"성자님을 직접 만나봤습니다."
"어땠나요."
"아직은 자격이없으십니다. 유감이지만, 그는 순수함 보다는 무지함에 가까운 인간이더군요."
이리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다. 교주는 살짝 웃으며 발을 돌린다.

"뭐, 그 분이 어떻게 바뀔지는 구주께서만 아시는 일이지요. 어쨌든, 운 나쁘게도 요나도 함께 만나버렸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저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아마 곧 이상한 걸 눈치챌 거예요. 벨카의 신문사에 페이크라는 인물이 없다는   눈치챌 겁니다. 이리하. 저와 함께 있는  들통나면 안되요. 부디골목의 반대쪽으로 나가 주시길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상황은 빠르게 종료될 겁니다. 그럼..."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리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가볍게 기도했다.

"허단 디알테스타만."
"허단디알테스타만. 조심하세요. 꽤 큰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

"여러분. 내일 있을 습격은 제 마지막 발악같은 게 아닙니다. 시대의 새로운 첫걸음이 될 겁니다."
에테롬은 그렇게 운을 띄우고서 자신의 앞에 모여 있는 병력들에게 손을 들어 올렸다.

"제 첫걸음은, 그래. 성조차 달려있지 않은 평민이, 자본으로 귀족을 이겨낸 다는 것. 그게 무슨 뜻일까요.  이상 시대가 신분으로 나눠지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자본으로 이뤄진 병력이 혈통으로 이뤄진 체제를 부수는 날이 되는 겁니다."
60정도는 모인 병력들. 그 병력들의 맨 앞에는, 네 명이 당당하게 서 있다. 그리고 에테롬의 뒤에는 송윤이 서서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앞당겨졌을 뿐이지요. 우리는 궁지에 몰린 쥐가 아닙니다. 당당히 불합리에 맞서 싸우는 합리주의자 입니다. 체제를 바꾸는 첫걸음은 우리가 밟게  것입니다."
연설문은 외주를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에테롬이 딱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승리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여러분. 이걸로 말을 마칩니다. 발각되면 곤란하니 함성은 참아 주시고, 이만 해산하세요."
병력들은 조용히 손을 들어올려 답하고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에테롬은 그런 자신의 병사들을 보다가 가장 앞에 선 4명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네 분은 남아주세요.'
각자의 의문을 보이며, 넷은 에테롬이 있는 단상으로 올라왔다. 에테롬은 의자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사람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네?"
"사람의 가치 말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열 시대에서는 모든 것에 가치를 매길 수 있어야 해요. 사람은 얼마가 나올까요?"
넷은 서로를 멀뚱하게 쳐다보다가 어색하게 답하기 시작했다.

"... 한... 300생텀정도 되지 않을까요?"
"호. 왜죠?"
"그야... 수가 많으니까요... 아무래도 조금  것 같은데."
"공급이 많아서 값이 싸다! 그런가요."
'도살자' 캘리건이 한 말이었다. 그 답다고 해야 할까, 수줍은 듯 그런 말을 하는 것이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다른 분들은? 의견 있나요?"
"... 실례지만, 사, 살아있는 사람에게 그... 가치를, 매길  있는 걸까요?"
'라미' 라모스가 한 말이었다. 그녀는 안절부절대며 에테롬의 반응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캘리건이  말에 조금 눈가를 찡그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 에테롬씨가 값을 책정하라잖냐, 아앙?"
"히- 히익!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뇨, 지성체에 값을 부여할 수는 없다... 윤리적인질문이에요. 나쁘지 않은 대답이죠. 나쁘지 않아요."
에테롬은 몇 번 껄껄대고서 담배연기를 들이마셨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치는 분명히 판단해낼 수 있는 것이며, 개개인마다 다르다, 라고."
"뭐냐, 돼지새끼가. 그걸 정답이라고 내는 거냐?"
"뭐, 송윤씨. 일단 들어 보세요.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은 비쌉니다. 주술사들이나 변태들이 사가니까요. 수요가 높아지거든요. 뭐라고 해야 할까... 건강한 '부품'에 대한 값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속하며, 수요와 공급 둘다 상당히 높지만, 시장에 내놓는 것이 어렵기에 가치가 올라갑니다.
특정 능력이 있는 사람도 비싸지요. 뭔가 일을 시킬 때 필요해지니까요. 이 경우에는 특정 수요층이 있고 공급도 낮습니다. 가장 비싸게 팔리는 경우에요. 하지만 무능한사람? 그런 건 최저가에요. 돼지보다도 가치가 낮죠."

에테롬은 간단하게 정리해서 말하고 시가의 재를 털어냈다.

"요컨데, 시장가치라는 건, 가치라는 건, 결코 단순하게 책정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마 한평생을 배척 받으며 살아왔을 여러분이지만, 제게 여러분의 가치는 당신들을 모욕하는 길거리 잡배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아요. 저는 당신들에게 아주 비싼 돈을 지불했습니다."
"... 그래서?"
"아무도 죽지 마십시요."
모두의 눈이 크게 떠진다. 송윤은 입가를 조금 들어 올렸고, 캘리건에 이르러서는 곧 눈물까지 흘릴 것 같은 모양이 되었다.

"여러분이 죽는 건 제 손실이 됩니다. 임무를 성공시키고 살아서 돌아오세요. 이건 계약입니다."
이것은 외주를 맡긴 대사 따위가 아니었다. 순수한 에테롬의 진심이었다. 적막속에서, 그는 눈을 감고 담배를 또 한번 들이마셨다.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해산하세요."

#

"애초에 너는... 너무 방심한다는 거다... 어?!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파악하란 말이다!"
"네, 죄송해요, 요ㄴ-"
"또 죄송하다 죄송하다! 말은 주구장창 잘하지! 행동으로 보이란 마리다!"
칼린은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그녀가 자신을 방으로 부르더니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술에 강한 그녀였지만, 위스키를 세병이나 비우고 나니 역시 그녀라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나도 다 참고 있는데... 나라고 이렇게 금욕적으로만 살고 싶은 게 아니란 말이다!"
"요나, 일단 진정하고 술 좀 그만 드시는 게..."
"놔라! 네가  안다고..."
칼린의 제 1원칙은 요나의 명령이다. 이런 상태라도 요나의 명령이라면 그는 아무 말없이 따른다. 그는 조금 딱딱하게 요나의 몸에서 손을 떼고 몸을 쭈그렸다.

"불가해주자다! 불가해주자가 어떤 건 줄 알아? 제 저주가 뭔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란 말이다! 너... 너가 그렇게 막 하다가, 막! 걔 저주가 뭔지도 모르잖아!"
"맞습니다."
"죽는단 말이다!"
갑자기 눈물까지 흘려 대는 요나를 바라보며 칼린은 당황해 손수건을 건냈다. 죽는다라. 솔직히  감흥이 생기지 않는다. 두려운 건, 죽고 나면 또 이상한 세계로가버리지 않을까 정도. 그에게 자신의 안전에 관한 두려움은 남아있지 않았다.

"... 뭔가 나쁜 생각을 했군."
"예?"
"이리 와라."
"요나..."
"오라고해따!"
그녀는 성화를 부리며 자신의 옆자리를 퉁퉁 쳐댔다. 칼린은 심히 망설이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옆에 몸을 쪼그리듯 앉았다.

"죽으면 뭐 어때, 이런 생각 했지?"
"아뇨, 전..."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따!'
"...네."
"약속했잖느냐... 이 세계에 있을 동안은 내 겨테 있겠다고..."
요나는 칼린의  어깨를 붙잡고 술냄새를 풍겨 대며 말했다. 칼린은 민감한 후각으로 그 술냄새를 전부 받아내며 힘들게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면... 죽으려 하지 마라. 살아서 곁에 있어다오... 난..."
급격하게 우울해지는 요나를 보며, 칼린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아니, 분명 그녀도 많이 무리를 하며 버텨 왔었으리라. 요나의 이런 약한 모습을 보는 것은 칼린에게는 꽤 큰 충격으로 들어왔다.

"어디 가지 않아요. 일단 진정하세요."
"아나줘라."
"예."
요나도 사람이었다. 완전무결한 요나가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그걸 알아챌 틈은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껏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는 꽤 감정적인 모습도 자주 보여왔었다. 그러나,  정도로 망가진 요나의 모습을 보니 칼린은 다시  번 깨달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품속에 안겨 있는 요나는, 자신의 전생한 모습보다도 조금 작은 사람일 뿐이었다.

"칼린..."
"네."
"계획은 거의 다 완성됐다..."
"네."
"그런데.. 너무 힘들구나. 모든 걸 억누르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
그녀의 몸은 살상병기에 근접한 것이었다. 결코 마르고 말랑하다, 그런 감상을 느낄 틈은 없었다. 품 속에 있는 동안도, 칼린은 전혀 그녀에게서육체적인 나약함은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순간, 칼린의 머리속에 그려져 있던 성벽과도 같은 요나의 이미지에 작게 금이 갔다.

"널 그저 생각할  없는 인형 따위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네가 생각하는 방식마저 좋은 거니까. 하지만... 너무 힘들어. 네게 다가오는 것들, 널 탐하는 것들, 그런 버러지들에게도 시선을 주는 너까지... 용서하는 게 너무 힘들단 말이다."
무너지는 듯 웅얼거리며 나오는 말은, 칼린이 듣기에는 너무 뭉게진 말들이었다. 그에게는 그저 옹알이같은 것들만 들릴 뿐이었다.

"이 품은 나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단 말이다... 모든 게 그거 하나 때문인데, 그거면  만족하는데!"
칼린을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칼린은 그 힘을 전부 받아내며 그저 망연하게 요나의 머리를 바라본다.

"내가 너를 어디까지 용서해야 할까..."
품속이 젖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칼린은 그녀가 뭐라 말하는 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저 그녀가 울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는 요나에게서 조금 떨어져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 제가 또 걱정시킨 걸까요."
"그래."
"죄송해요."
요나는 칼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고작 딜빛만 받으면서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그 눈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는 달이었다. 태양이 없으면 빛조차   없는 달이 되어야 한다.

"칼린."
"네."
"고맙다. 이걸로 더 참아낼 수 있어."
칼린은 요나의 흐트러진 금발을 조금 치워 주었다. 요나는 그런 칼린을 보며, 취기가 가득 섞였지만, 평소에 짓던 당당한 미소와 비슷한 것을 칼린에게 건냈다.

"널 용서하겠다. 하지만 또 그런 일은 없으면 좋겠어."
"...네."
"다 널 위한 거다. 우리를 위한 거야."
"네."
"내일 저녁에 일이 하나 있을 거다. 성 내 사용인들은 오늘 전부 성에서 나왔어. 내일까지, 성에는 나와 너, 집사대리. 세  뿐이다."
"그런가요?"
"그래."
그녀의 벽안이 평소보다도 푸르게 빛을 낸다. 불 꺼진 방 안에 서늘한 기류가 흐른다. 요나는 그녀의 격정적인 감정을 흘려내고 있었고, 칼린은  앞의 주인이  이상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요나의 눈시울이 젖는다. 달빛이 그 둘을 차분히 적시고, 그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철같은 인내심이 낮게 깔린 어둠과 함께 녹아 내리고 있었다.

"칼린..."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숨이뜨거워진 것을 느낀다. 몸과 몸이 닿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어떤 소란이 일어나도 조용히 넘어갈 이 방 안에서, 그녀의 눈동자가 그 마음만큼이나 격동한다. 이리하로 인해 터졌던 분노까지 삭혀졌던 뜨거운 열기이다. 그리고-

"... 야자타임이다!"
"네?"
그녀는 겁쟁이었다. 아니, 처음 겪어보는 이 감정에 대해서는 겁쟁이었다. 완벽주의자. 그녀에게 아직 이 상황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하룻밤의 격양된 감정 따위로 이 그림을 망가트릴 수는 없다. 스스로도 증오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녀의 자제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자! 내게 반말을 해 보거라!"
"아니, 하지만 요나..."
"내 명령에 하지만은 없어!"
지금은 이정도로만. 이 정도의 치기 어린 행동으로만 보상받자. 모든 게 끝나기 전까지, 그녀의 실수는 이정도면 족하다. 천천히 식어 가기 시작한 머리는 이미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아채게 해 주었다. 그렇다면 그 기세라도 빌려서,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아직은  정도라도 좋으니까. 칼린. 지금만이라도 좋으니 나를 동등한 이성으로 봐 다오. 그녀의 마지막 간절한 부탁같은 것이었다.

칼린의 입술이 떨리며, 당황한 눈이 시선을 잃는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던 그는 곧 요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 술은 충분히 마신  같지 않아?"
떠돌이들의 방언이 섞인, 그러면서도 최대한 단어선택을  듯한 상냥한 말. 요나의 얼굴에 빠르게 홍조가 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요나는 참을 수 없어 웃었다.

"하하, 아하하하하하하!"
그래. 이거면 됐다. 다시 더 참을 수 있다. 어차피 막바지다. 너와 내가 둘만이 성에 남게 되면,  때 부터 다시 시간을 들이면 된다. 둘만의 세계에서. 서로의 주종관계도, 적의도, 그 뭔지도 모를 이세계 따위도 잊고, 그저 칼린과 요나. 둘이서.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면 된다. 자신에게만 의지하며, 자신만을 바라보게 만들면 된다. 요나는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다.

칼린은 그렇게 웃는 요나를 바라보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라서 웃음지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속은 새로운 질문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를 몇번인가 봐왔음에도, 이제서야 그녀가 인간으로 보인 이유는 무엇인가. 대체 왜 갑자기 요나의 완전무결함이 무너졌는가.

그조차도 자신의 마음속에 생긴 틈을 아직 파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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