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5화 〉참수자 (145/164)



〈 145화 〉참수자

"배정이 있을 겁니다... 에... 그게... 모두들 놓치지 말고 들어 주시면 좋겠어요..."
두꺼운 안경에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한 여성은 그렇게 말하고서 명단을 확인했다. 아마 그녀가 주임 연구원인 듯했다.

"근데 사실 뭐... 한 명 한 명 역할 고정되어서 들어 간다기 보다는... 그룹별로 교체해가면서 진행될 거라고는 해요... 말은... 말은 그렇게 되었네요..."
리쿠르트는 그녀의 말 끝을 늘어트리는 버릇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녀는 잠깐 모인 사람들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보았다. 그녀까지 포함해서 40명을 조금 넘기는 정도 일까.

"에... 그럼 먼저 공간학 연구원분부터..."
그녀는 두꺼운 안경을 들어올리고서 서류를 재차 확인해 보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리쿠르트..."
첫번째로 불린 건가. 그녀는 가볍게 답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주임연구원은 그 모습을 보고 서류에 작게 체크를 넣은 뒤 종이를 덮었다.

"네... 나머지는 전부 조명연구로 가시면 됩니다..."
"...네?"
"리쿠르트씨... 마법학 연구는 혼자 진행하시면 되어요..."
"잠시만요... 저 혼자서 연구실을 쓰라는 말이신 가요?"
"네. 부럽네요."
연구장은 그렇게 일갈하고서 해산을 외치려 했다. 그러나 리쿠르트는 순순히 납득할  없었다. 그녀는 연구장의 팔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뭘 연구해야 하는지 정도는..."
"하... 적당히 납득해 주시면 안될까요..."
"전 설명을 들어야 겠어요!"
그녀는 잠깐 머리를 부여잡더니 곧 한숨을 깊게 내쉬며 리쿠르트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 무슨..."
"설명이 듣고 싶으시다메요... 따라와요. 커피나 마시면서 말 하려니까."

#

"리쿠르트선생님, 당신은 요나경의 특별 추천으로 들어오신 겁니다. 아시죠?"
"... 네."
"혹시 뭐, 특별전형으로 들어와서 무시당하는  아닌가, 이런 걱정하고 게신 거라면 걱정하실 것 없어요... 요나경이 직접 추천한  의미가 커요. 연구원분들 모두 당신을 경계하고 있답니다. 어느 정도의 괴물인가, 하면서..."
그녀는 커피를 홀짝이며 서서히 일그러진 눈가를 풀었다.

"그런데  배치는 요나경이 직접 해 주신 거거든요. 그 의미가 뭐, 요나경이 리쿠르트씨를 좆같이 생각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리쿠르트씨 혼자서도 충분히 연구결과를 뽑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솔직히 중요하지 않습니다."
"요나가... 아니, 요나경이 직접 배치한 거라구요?"
"네. 초기 계획안에 보면 그런데, 뭐, 일단 계획안에는 매달 인원 변경이 있을 '수도' 있다고 되어 있네요..."
리쿠르트는 요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그녀의 연구에 제약을 두고, 동시에 공간연구를 소홀히 하려는 의도는 무엇인가. 쉽게 파악해내기 힘든 문제였다.

"... 공간마법학의 연구 목표는 뭐죠?"
"어디보자... 근데 사실 간단한 거라서, 리쿠르트씨 혼자서도 무리는 없을 것 같아요..."
"네?  길래요?"
"허무맹랑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영주님 개인이 궁금한 건지 뭔지, 재미있는 논문 하나 쓰신다고 생각하시면서 하세요."
연구장은 커피를 홀짝이며 그녀에게 연구목표가 담긴 종이를 건내 주었다. 리쿠르트는 그 종이를 받고서 읽고도 이해할 수 없어 눈가를 조금 찡그렸다.

'시공간을 거스른 이동마법이 불가능함에 대한 증명
가설 1. 본 세계와 아주 비슷하지만 다른 세계가 있다고 가정 (그 세계에는 마나라는 개념이 없음)
가설 2. 이동은 하되, 가상 세계와 이 세계의 육체가 다르다고 가정 (단순한 생김새가 아닌 종으로서의 근본이 다르다는 내용)
가설 3. 이동할 세계에 있는 육체는 이미 죽어 있다고 가정
가설 4. 가상세계의 환경은 마나를 제외하면  세계와 동일하다고 가정'

"... 이런 건 논문으로 써도 가치가 없어요. 그저 소설에 불과한 것 아닌가요?"
"뭐가 어찌되었든, 연구 주제는 그겁니다. 리쿠르트씨가 그 주제로 논문만 완성시키면 다음 연구를 시킨다고 했어요. 다음 연구 주제는... 글쎄요. 그 다음 목표는 뭐랬지? 수직 상승 이동 장치였나?"
연구장은 커피를 전부 마셨는지 잔의 벽면을 조금 햝짝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이게 중요한 점."
그리고 조금 똑바로 떠진 눈으로 리쿠르트를 쳐다보았다.

"요나경은 말이죠, 분명히 거기에 '불가능'을 증명하라고 하셨습니다."
"... 증명하라고 해도, 기초학만 배워도 이게 불가능한 것 쯤은 알  있잖아요."
"그러면 알아서 소설을 쓰든 복잡하게 늘리든 이론적으로 그걸 분석해내서 논문을 만드세요. 다 알고 계시니까 편하네."
"용납할 수 없어요. 이런 걸 학회에서도 받아 들일리가..."
"리쿠르트씨... 당신은 분명 소금부대원 '참수자' 칼린의 가정교사를 맡으셨죠?"
연구장은 커피를 옆으로 치우고 주머니에서 담배곽을 꺼냈다.

"당신은  업적 덕분에 여기 오신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여전히 '반역자의 딸'이예요."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서 경고하듯 한 음절 한 음절에 힘을 담아서 그렇게 말했다. 리쿠르트가 입을 다물자, 만족스러운 듯 그녀는 의자를 뒤로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회는 걱정 마세요. 요나가 연구를 지시한 주제입니다. 모든 학자분들이 리쿠르트씨처럼 강인하지는 않아요. 학회에서는 이미 그 논문을 승인할 준비가 끝났죠."
"... 그런가요."
"네. 안심하고 연구에 임하시길."
 이상 할말이 없다는  연구장이 등을 돌렸다. 리쿠르트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방을 나왔다.

그녀의 곁을 벗어났건만. 여전히 그녀의 손아귀 안이었다. 그녀는 느리게 발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숙인 고개 아래로 미소를 지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요나의 직접적인 감시선을 벗어난것. 그리고 뭔가를 확실히 숨기고 있는 대학으로 들어오게  것. 요나의 뒤통수를 후려 내려면 이만한 곳이 없었다. 그녀는 전투 준비가 끝나 있었다.

물론 요나를 후리려면 먼저 해야 할 것은 칼린의 정체 파악이다. 그녀의 비상한 머리가, 앞으로의 흐름을 잡아 보기 위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영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시종이 식사중인 칼린과 요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 손님? 오늘 누가 올 예정은 없을 텐데."
"예정없이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이리하씨가 찾아오셨습니다."
요나의 얼굴이 구겨졌다. 반면 칼린의 눈도 크게 떠진다.

"이리하가 찾아 오셨다구요?"
"칼린... 일단 진정해라."
요나는 그렇게 일갈하고서 식기를 내려 놓고 시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용건은 뭐라고 하더냐."
"칼린씨를 만나 뵙고 싶으시다고..."
빌어먹을 미망인이. 그녀는입모양으로만 그렇게 말하고서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톡톡 쳐 댔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 들어 칼린을 향해 말했다.

"칼린. 괜찮느냐?"
"일부러 와 주셨는 걸요. 전 괜찮아요."
"그런가."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식사를 조금 일찍 끝마쳤다. 그리고 한없이 연기만 들이마시다가, 담배불을 끄며칼린에게 말했다.

"먼저 잠깐 대화해도 괜찮을까?"
"네? 영주님이 이리하씨랑요?"
"그래. 내가 전에 심한 말을 했으니 사과할 겸 말이다."
언제였는가. 분명 네크로맨서를 죽인 후 갔었던 축제 때였던가. 칼린은 그 때를 떠올려 보고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러면 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방이 아니라 응접실로 가 있거라. 그럼."

-

이리하는 매번  때 마다 조금씩 사치스러워져 가는 성 내부를 보며 불쾌함을 참아냈다. 분명 가난한 민중의 영웅으로 불리던 요나가 이렇게 사치를 부리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유는 짐작이 간다. 예로부터 영웅을 몰락시키는 것은 색이라고 전해져 왔다. 그녀가 누구에게 빠져 있는 지는 뻔하다. 그리고  추악한 욕망이 칼린을 무너트리려 하고 있었다.

같이 행동해본 이리하로서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칼린은 전사도, 구원자도, 성자조차도 될  없다. 그는 스스로의 날개를 씹어 먹는 새였다. 더 이상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호기심으로 시작된 관심은 이제 하나의 감정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라드가 죽은 이후 그가 어디까지 망가졌는지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생각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자신이 갖고 있는 이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의 내릴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칼린을 만나야만 했다. 무슨 벽이 생기더라도.

"... 지휘관님."
"이리하. 앉아 있도록."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요나가 그녀의 앞에  있다. 그녀는 일단 적의를 숨기고 가져온 선물을 그녀에게 건내 주었다.

"... 이건 뭐지?"
"선물입니다. 부디 받아 주시길."
요나가 그걸 꺼내 보니, 정교하게 만들어진 유리 상어였다. 입이 열고 닫히는  보아 분명 꽤 비싼 값을 주고 것이리라. 그러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취미였다. 지느러미를 누르면 유리상어의 눈이 앞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 고맙군."
살짝 눈쌀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하고서, 요나는 그것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그래서... 갑자기 칼린은 무슨 일로 만나려 하는 거지?"
"걱정 되어서요."
"뭐가?"
"모르셔서 묻는 겁니까?"
"말조심해라, 미망인."
평화로운 분위기는 한순간에 파국이 되었다.

"지금 칼린이 다른 부대원들과 시시덕대는 걸로 안정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칼린이 부대원들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나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직접 만나 설득하겠습니다."
"허락하지 않는다."
"왜죠?"
"불가해주자 따위와 휙휙 만나게 해줄  같으냐."
"제 저주의 내용이 뭔지도 모르시는 것 아닙니까?"
"알 필요도 없다. 그리고 모르기에 더 경계하는 거지. 칼린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도 네 저주 때문이라고는 생각 안 해봤느냐."
"... 말이 심하시군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꺼져라. 칼린을 만나게 하지는 않는다."
요나의 뜻은 강경했다. 부대원들 중에서도 이 이리하라는 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칼린을 노리고 있다. 요나는 알 수 있었다.

"... 그러면 칼린과 절대로 만나게 해주시지 않을 거란 말이십니까."
"이해가 느리군."
둘은 서로의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시종들조차 나간  방에는 무거운 공기만이 흐르고 있었다.

"... 칼타코에 왔었던 빅센마르크 대사분들. 한 분은 현장에서 죽었었지요."
이리하가 주제를 바꿨다. 요나는  말에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  예상할 수 있었다.

"나머지 두 분은, 윌레인에 돌아오고 얼마 안가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 그래서."
"거리에는 소금부대가 얼마나 영웅적으로 칼타코 독립군과 싸웠는지 밖에  퍼져 있더군요. 제가 여기서 아무것도 못 느껴야 정상인 겁니까?"
"독립군이 아니라 반군이다. 그 혓바닥을 제대로 놀려라."
"질문에 대한 답은?"
"난 모른다. 더 해줄 말도 없어."
"어차피 조금 있으면 칼린과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제가 이 말을 칼린에게 해도 좋은 겁니까?"
"그땐  년을 돼지사료로 만들겠다."
"피차 귀찮은 일 만들지 말고 지금 한번만 만나게 해주세요."
요나의 한순간 평정을 잃은 발언이 빈틈을 만들었다. 그녀는 분노에 찬 눈으로 이리하를 노려보다가, 조용히 담배를 꺼냈다.

"네 앞에 앉아 있는 것이 8영주, 요나라는 사실을 잊은 게냐?"
"그런데도 여기까지 말하는 건 어느 정도 뒷배가 있다는 것 아닐까요."
"네 과거를 지울 정도의 뒷배는 있겠지. 하지만 내 뒷배는 국가요, 민중이다. 마음만 먹으면 널 도륙내고 왕도 한복판에 떨궈버려도 사고사처리 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굳이 사고사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라드에대한 것을 떠올리라는 의미였다. 요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서 이리하를 노려보았다.

"'내 것'에 너무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다. 이쪽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참아내고 있어."
"... 알겠습니다."
"냉큼 꺼져라. 면담시간은  15분을 주지. 칼린에게는 급한 일 때문에 빨리 가봐야 한다고 전하고, 나와는 전에 있던 문제를 해결했다고만 전해 둬라."
"지휘관님과 대화해서 영광이네요."
이리하는 그렇게 말하며 배낭을 짊어지고 방을 나섰다. 요나는 그녀가 떠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발걸음을 영주실로 옮겼다. 영주실에 도착한 그녀는 서랍에서 작은 원통형 물건을 꺼냈다. 소리를 전달해주는 마도구로, 응접실과 연결된 것이었다.

#

"어서 오세요, 이리하씨."
"아, 칼린..."
가면을 쓰고 있어 그 안색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목소리에서 그가 많이 지친 상태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가면 없이 면회는 절대 무리라고 하셔서..."
"둘 뿐이야. 벗어도 되지 않을까?"
"안되요. 영주님 명령인 걸요."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서 칼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하가 앉을 의자를 뒤로 끌어 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 오셨나요. 성으로 찾아 오시다니, 놀랐어요."
"갤러한은 자기 집처럼 들락거렸으니까 말이야. 나도 될까 하고 물어봤지."
"아... 그런가요."
"그렇지. 그래서, 요즘 어때?"
"뭐... 조금 평온하게 사는 중이죠."
이리하는 배낭을 뒤지며 의자에 앉아, 그에게 작은 소포를 건내 주었다. 칼린은 그걸 받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의심없이 그것을 뜯었다.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정교하게 조각된컵이었다. 뚜껑을 닫아 밀폐시킬 수 있었지만, 애초에 벽에 구멍이 나 있어 액체를 담을 수는 없었다.

"... 이게 뭐죠?"
"향로야. 카산하크 산이지. 같이 있는 향에 불을 붙이고 이 안에 넣어서 피우면 돼."
난해하다. 정말 난해하다. 칼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그... 향로가 필요했어요."
"정말? 어디에?"
"그게... 향로를 좋아해서요...?"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답하고서 그는 선물이 정말 마음에 든다는 듯 품에 한번 끌어안아 보이고서 그것을 테이블 아래로 내려놓았다. 이리하는 그 반응에 만족한 듯 조금 가슴을 보였다.

"오늘은 갑옷을 입고 계시지 않네요."
"항상 입고 다니는 게 아니야. 지난번에도 봤잖아?"
"벨카에서 갑옷을 벗은 모습은 처음인 것 같아서요."
이리하는  차려 입고 있었다. 이두 까지만 내려오는 크롭 케이프에 복사를 살짝 드러내 보이는 하이웨이스트  스커트.  다 꽤 두꺼운 재질인지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안정적으로 늘어져 있다.

패션에 대한 안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칼린의 눈에는 충분히 아름다워 보였다. 성적인 호감보다는, 군대 내무반에서 아이돌을 보던 것이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느느 오랜만에 꽤 낯부끄러운 생각을 했다고 생각하며 조금 웃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나요?"
"일 없으면 오면 안돼?"
"네? 아니, 그건 아니지만..."
"농담이야. 그냥, 걱정돼서 왔어. 그 날 이후로 그... 발작은  왔고?"
이리하는 상냥하게 웃으며 일부러 가볍게 질문했다. 칼린도  배려를 읽었기에 내색없이 가볍게 답했다.

"발작이라뇨, 참... 그런 게 아니예요. 괜찮아요. 영주님이 이것저것 신경 써 주고 계시거든요."
이리하에게 그건 전혀 괜찮게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걸 굳이 지금 짚지는 않았다.

"그런가... 다행인 걸. 네가 무척 괴로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었거든."
"네? 누구에게서요?"
"네 가정교사. 지금 우리 여관에 머무르고 있어."
칼린의 말문이 막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니예요. 그냥..."
그는 조금 머뭇대다가 역시 무리라는 듯 고개를 떨궜다.

"... 저도 모르겠네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그냥 더이상 리쿠르트 선생님을 뵐 수 없었어요.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닙니다."
"...  선생은 진심으로 너를 아꼈어. 그건 알고 있던 거지?"
"...네."
"그런가."
이리하는 테이블 아래로 시선을 잠깐 돌린 후, 다시 칼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금부대에 전역하면 뭘 하고 싶어?"
갑작스러운 주제전환. 칼린은 주제가 바뀐 것에 조금 감사하며 분위기를 돌렸다.

"영주님 옆에서 상황을 조금 진정시키고 고향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래?  고향에 대해서는 들은  없네."
"... 많이 멀거든요. 그것보다 이리하는 어떤가요? 전역하시면 뭘 하고 싶으신 가요?"
"딱히 다른목표를 갖고 이 부대에 들어온  아니라서 말이지. 구호 자체에 목적을 뒀었거든... 일하면서 새로운 목표가 한번 생겼었지만, 그것도 포기했고 말이야."
"네? 그런 게 있었나요?"
"궁금해?"
그녀는 꽤 짗궃게 웃으며 몸을 굽힌다. 그리고 천천히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는다.

그대로, 그녀는 테이블 아래에 붙어있던 원통형 마도구를 쥐어 부셨다.

"널 내가 하는 일에 끌어들이는 것."
"아..."
"걱정 마. 이젠 그럴 생각 없으니까. 이제 모든 걸 네 선택에 맡겨 보려고 해. 잔혹한 말이지만, 네가 겪어온 모든 일들이 너를 더 옳은 길로 이끌어 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이리하의 얼굴이 가깝다. 뭔가를 전하려는 듯 눈이 떨린다.

"내 전달방식이 지금까지 틀려왔었던  인정해. 나도 너를 이렇게 몰아넣은 사람 중 하나라는 것도. 하지만 네가 직접 생각하지 않으면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그녀는 또 칼린이 발작할 것까지 각오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칼린은 조용했다. 그는 얌전하게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곧 가면을 살짝 벗으며 말했다.

"... 분명, 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죠."
"그래."
"선생님도 그랬어요. 스스로 생각하라고. 이리하가 했던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었어요."
말투는 고급스러운 것이었지만, 하는 말 자체는 사춘기 소년이나 할 법한 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거의 찾기 힘들 정도로, 그는 망가져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리하에게는 느껴졌다. 누군가가 억지로 벌려 놓은 '틈'을 느낄 수 있었다.

"전 못 견뎌요. 제가 막고 있는 게 무엇이든, 그게 열렸을 때 견뎌낼 수 없어요. 이건 나 밖에 이해하지 못할 일이야. 제가 이상한 거니까요."
담담하게 읊듯 그렇게 말하고서, 칼린은 검은 눈동자로 이리하를 내려다본다.

"하지만, 제가 모든 것에 책임지지 않고 도망칠 수 있다는 선택지가 있다면. 그럼에도 제가 혼자서 그걸 감당해야만 하는 건가요?"
"틀렸어. 그런 말이 아니야."
 질문이 의미 그 자체다.  질문이야 말로 리쿠르트가 남겨둔 단검이요, 독이다.

"너 혼자 감당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당당하게 첫걸음을 떼고,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되, 그 상황만을 바라보며 자책하지 말아라. 감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섣불리 타인과의 교류를 멈추지 말아라. 누군가 네게 그것을 지양하라 한다면, 그 뜻을 막는 자가 네 적이다.'
오퀴테스의 '메기오티스'전에 나오는 말이지. 절대로. 절대로 상황에 좌절해서 머무르면 안돼. 그러면 발전이 없어."
이리하는 몸을 완전히 기울여 칼린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칼린. 스스로를 믿어. 널 믿는 사람들을 믿어. 네 생각처럼 세상은  적대하지 않을지도 몰라. 모든 것이 밝혀지고, 네 스스로가 한걸음을 내딛고, 그러고도 세상이 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세상을 바꿔.  때가 되었을 때 네가  불러준다면 기쁘게 돕겠어. 넌 혼자가 아니야.  이해자는 요나 뿐이 아니야."
칼린의 귀에 발소리가 들려온다. 이리하도 그 소리를 감지한 걸까. 그녀는 마지막으로 칼린을 끌어안았다. 당황한 칼린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리하는 그의 뒤통수를 붙잡고 귀에 빠르게 속삭였다.

"난... 난 네게 정말 큰 실수를 저질렀어. 너를 다그치는  아니었어. 너라면 분명 나와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 했겠지. 그러니까 네가 처음부터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야. 내 방식은 틀린 거였어.
혼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어느 정도로 피를 토하며 뼈를 깎아 냈을까. 나도 많은 생각을 했고, 지금의 결론에 도달했어. 금방 다시 만날 테지만, 이 말만큼은 이 자리에서 전하고 싶었어."
응접실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린다. 요나가 격분한 표정으로 문을 부실듯이 발로 차 열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 굉음 속에서도, 칼린의 귀를 찢어낼 듯이 확실하게 들어온 말소리가 있었다.

"널 사랑해. 날 믿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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