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4화 〉참수자 (144/164)



〈 144화 〉참수자

"야, 갤러한! 들었냐?!"
리쿠르트의 방 문을 박차며 릴로가 들어온다. 갤러한도 몸을 일으켜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륑게가 나가서 상황 묻는 중이야! 얼른 나갈 준비해!"
갤러한은 잠깐 망설이며 리쿠르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곤란한  말했다.

"아니, 기다려봐. 일단 상황을 파악해야..."
"무슨 한가한 소리야! 우리가 누군지 잊은 거야?"
"... 구호부대지. 이런 일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움직여야 하고. 그래, 알겠어.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일단..."
"뭔  씹소리야! 우린 팀 원생텀이야! 불구경, 싸움구경, 폭발구경 세 개는 놓치면 안되지! 소니아는 그렇다 쳐도 넌 필참이야! 나와!"
릴로는 그렇게 말하고서 문을 몇 번인가 퉁퉁 쳐댔다. 갤러한은 곤란한  리쿠르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리쿠르트는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 확실히. 폭음이 들렸는데 상황 확인도 안하고 있을 순 없군요. 같이 나가죠. 괜찮을까요?"
"구경꾼은 많을수록 좋아요! 빨리!"
리쿠르트도  말에 침대에서 일어나며 겉옷을 주워 걸쳤다. 그리고 갤러한을 지나치며 작게 말했다.

"...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니까...  이야기는 조금  시간을 갖고 이야기 해보죠."
"... 그래."

#


갤러한과 요나 둘은 21시가 넘어서야 성으로 돌아갔다. 꽤 늦은 시간. 더 이상 둘은 밤거리에 자수처럼 반짝이는 조명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 둘은 그 정도로 지쳐 있었다.

"감사했습니다. 그럼..."
칼린은 조용히 인사하고서 요나에게서 떨어졌다. 요나는 그런 칼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등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던 그녀는 곧 의자를 끌어 탁상에 다가갔다. 그리고 버튼을 눌러 벽장을 열어냈다.

벽장 뒤에는 그녀만의 성물(聖物)이 숨어있다. 그녀는 그 곳으로 다가가 꽤 유치한 디자인의 화장품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어보면, 악몽의  장면 같은 것이 드러난다.

요나는 그것을 보며 자신을 진정시킨다. 화장품 통을 들고서 천천히 탁상 앞으로 돌아간다. 이빨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안정시킨다. 아직 아니야. 진정하자. 아직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서는 안된다. 고지가 눈앞. 하지만 제리코까지 끌어들인 이상, 허점이나 오점을 보이면 모두가 참살 당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모든 감정을 절제하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완전무결. 그러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천천히 길게 뻗은 손가락을  이빨로 향한다.  송곳니를 만지고 있으면, 마치 칼린의 입 안을 더듬는 느낌을 받는다. 싫지 않다. 아니, 좋다. 오밀조밀하게 작게 있는 이빨들, 그러나 입을 조금 더 크게 벌리면 부끄러운  드러나는 송곳니가. 요나의 머리속은 이미 칼린의 턱을 잡고 그 입 속을 유린하는 망상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이딴 천박한 망상은 그녀의 몸을 뜨겁게 하면서도 동시에 자괴감을 일으켰다. 올라온 열기를 해소하고 나면 남는 것은 공허함과 초조함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점점 세어 나오려 하는 이 마음을 그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그와 관련된 모든 일이 그녀에게 민감하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그래. 오늘 그와 있던 일들은 그녀의 가슴 속을 불사 지르는 분노를 만들어냈다.

이 분노 또한 갈망하는 애욕으로 말미암았기에 그녀는 더 거칠게 송곳니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상기된 얼굴로 그 날카로운 감각이 자신의 민감해진 손가락을 긁는 감각을 음미한다. 동공에 점점 힘이 풀린다. 마침내 그녀가 손을 책상 아래로 떨굴 때 였다.

'영주님. 칼린씨가 방의 불을 끄셨습니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집사대리의 목소리. 요나는 자세를 고치지 않고 고개만 들어 올린다. 그녀는 잠깐 그 자세로 가만히 있다가, 다시 조금 부드럽게 그 송곳니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 아직 거기 있느냐."
'네, 영주님.'
"'전달사항'이 있다."
나즈막히 말하며, 그녀는 송곳니의 끝 쪽을 향해 손가락으로 쓰다듬듯 올린다.

"벨카의 신문사에, '페이크'라고 하는 기자가 하나 있다.20대 초반정도 되어 보이는 갈색머리다. 아마도 땋은 머리를 자주 하고 다닐 것이고, 키는 170을 조금 넘는  장신의 여성이다."
'...네.'
날카롭게 올라가있는 송곳니. 요나는  뾰족한 부분에 완전히 손가락을 올린다. 약간 소름이 돋아온다. 아찔한 감각에 입가를 살짝 들어 올린다.

"그녀는 내일 죽는다. 벨카 영지 밖에서. 무장한 괴한들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살해당한다. 토막쳐  시체도 찾지 못한다. 불쌍하게도."
손가락에 힘을 준다. 손가락 끝이 마치 과실이 무르익어 터지듯 피를 흘려 낸다.  피가, 송곳니를 끈적하게 적셔 내려간다. 요나는  상태로 조금 더 힘을 줘서 손가락 끝에 완전히 송곳니를 박아 넣는다.

"... 무슨 말인지 이해했느냐."
그녀의 표정은 황홀하게 퍼진다. 꺼진 동공은 이빨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지만, 약간 들어올려진 입가는 침착하게 집사 대리에게 '전달사항'을 전한다. 문 너머의 집사대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힘겹게 말을 꺼낸다.

'전달해 두겠습니다.'
분명 저 집사 대리는 왜 이런 '전달사항'을 받았는지 이해할  없을 것이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참담한 듯한 목소리에서도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반항은 할 수 없다. 의문조차 가질 수 없다. 그저 따를 뿐. 다른 모두가 그러는 것처럼.

"가거라.  이상 명령은 없다."
오늘은 더 이상 명령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뜻. 그러나  어투는 그런 고상한 것 보다는, 당장 방 앞에서 꺼지라는 뜻을 내포한 것이었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서 요나는 송곳니가 박힌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감히 철혈의 요나가 만들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다 댔다. 그녀의 얼굴만큼이나 상기된 혓바닥이 비져 나온다. 그 뒤로 이어진 행위들은 색정적이고, 고혹적이며,

역겨운 것이었다.

#

꺼진 방 안에서 칼린은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있다. 춥다. 너무 춥다. 이불을 둘둘 말고 있지만,  바람이 그대로 세어 들어오는 기분이다. 그는 이빨까지 부딪혀 대며 몸을 말았다.

그는 잠들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은 눈을 뜨고 버티는 것도 할  없었다. 오들오들 떨면서 이불을 자신의  가운데로 끌어 모은 그는 도저히 이 추위를 참을 수 없어 실눈을 떴다.

불 꺼진 그의 방 안에는 사람이 가득하다. 앉을 틈새도 없어 전원 서있다. 모두가 칼린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등을 돌리고 서 있다. 칼린은 시선을 창가 쪽으로 향해 본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 명이 아니다.  안의 전원이 칼린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칼린은 다시 몸을 움츠리고 눈을 감는다. 그러나 한번 들려 오기 시작한 것은 멈추지 않는다. 속삭인다. 속삭여온다. 저들이 그의 몸을 더듬기 시작한다. 그는 이불이 자신의 방어막이라도  듯이 최선을 다해 몸을 움츠려 보지만, 그 기분 나쁜 감각이 전신을 엄습해 온다.

눈을 꽉 틀어 막는다. 이렇게 뭔가가 많아진 이유는 간단하다. 리쿠르트와의 대화로 칼린의 '무언가'가 열리기 시작했다. 막혀 있고 가려져 있던 것이 열리려고 하고 있었다. 칼린은 그것을 어떻게든 부여잡고 다시 닫으려 한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더더욱 몸을 움츠린다.

"... 여긴 내 세계가 아니야."
나즈막 하게 말하면 천천히 말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난 내가 저지른 실수를 고쳤을 뿐이야."
둔탁하게 느껴지던 인기척들이 하나씩 사라져 간다. 생각이 하나씩 지워진다.

"전부 내 잘못이야."
꽉 움켜쥔 양 팔에서 붉게 피가 흘러 잠옷을 적셔간다. 질끈 감았던 두 눈에 점점 힘이 풀린다.

"...  세계에서 사라질 거야..."
어느새 방 안에는 다시 침묵만이 남는다. 그럼에도 칼린은 안심할  없다.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몰려들 것을 알고 있다. 움츠러든 몸은 다시 펴지는 일이 없었다. 그는 그저 그  마디만을 끝없이 되뇌이며 하루 밤을 지새었다. 별조차 구름에 가려진 밤이었다.

#

리쿠르트는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전날 저녁 폭발 현장을 구경간다는 계획은 금방 취소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폭발은 공장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했으며, 공장단지는 그들의 여관과 거리가 너무 멀었다. 가던 길 중간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모두와 함께
돌아 온 것이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보면, 주인장이 혼자서 술잔을 닦고 있는 것이 보였다. 리쿠르트는 가볍게 인사하고서 테이블에 앉았다. 아침식사를 주문하니, 주인장은 그녀가 주문한 식품에 가볍게 샐러드를 같이 건내 줬다.

"감사합니다!"
리쿠르트는 감사인사를 전하고서 가볍게 소금을   샐러드를 크게 한 입 물어보았다. 성에서 나오던 식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그녀가 샐러드를 먹고 있으니 주인장이 어딘가 외로운 듯 계단 위쪽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머무는 방 말이지, 실은 아스타라는 분이 쓰고 있던 방이에요."
리쿠르트가 식사를 잠시 멈추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한 세 달 전 쯤만 해도  곳은 아침에 북적였는데 말이야. 저녁에는 모두가 모여서 술잔치를 벌였고, 다음날 아침에는 그걸 뒷수습하겠다고  난리였지.  때는 말이예요, 무심코 귀찮다고 생각해 버렸소."
리쿠르트는 아스타를 잘 모른다. 그녀가 어떤 인간인지는 갤러한을 통해 들은 것이 전부였다. 분명 옛 동료였으며, 호탕하고 강한 여자라고 했었다.

"이제 술잔치도 없고, 늦잠자는 동료들을 깨워주던 청년도 없어. 하나는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를 않고, 둘은 평소처럼 지내지만 더이상 떠들썩하지 않고, 하나는 눈에 띄게 수척해 졌지. 남자친구가 갤러한씨 라고 했던 가요?"
"아, 네."
"갤러한씨도 말이죠, 이상해 졌거든. 평소와 같은 척을 하지만 경계심이 더 세 졌어. 원래부터 별걸 다 경계 했었지만... 아니, 내가 말 할 필요도 없지. 무슨 말인지는 이제부터 차차 알게 될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리쿠르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 아침부터 김새는 이야기를 했네요. 그냥, 이렇게 아침이 조용해지니까 서글퍼져서 말이지. 늙었나 봅니다."
"... 아뇨, 말씀 걸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가씨가 이렇게 나와주니 좋네요. 매일 이 시간에 일어나실 건가요?"
"네. 그러려고 하고 있어요."
"기특하구만. 선생 일 때문이지?"
선생인건가. 리쿠르트는 잠깐 답하기를 망설이다가, 포크를 내려놓고 웃었다.

"... 벨카 대학의 교수로 발령되었지만... 다음 해에 학생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연구원으로 일하게 될  같아요."
"연구원? 그래, 벨카 대학에서는 무슨 연구를 하는 겁니까?"
"알아보기로는 공간계열 마법학이랑 조명기술 쪽이었는데... 전 그쪽 전문가라서 뽑힌  아닌지라, 일찍 가서 공부해 보려고 해요."
"전문가도 아닌데 연구원을 지원하셨나요?"

주인장의 그 말에는 악의가 담겨있지 않았다. 순수한 궁금증이었고, 충분히 합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학자가 그렇게 까지 세분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상할 것은 없었다. 물론 그런 사정을 교육을 접할 기회조차 없었던 일개 여관 주인장이 알  없다. 그리고 리쿠르트도 그런 사정을 납득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지원한게 아니고, 뭐. 낙하산이죠."
주인장은 그 자조적인 발언에 리쿠르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어디까지나 올곧게 뻗어 있었다. 마치, 그 시선은 눈 앞의 상황에 머물러 있지 않은 듯한-

"즐거웠습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 볼 게요. 첫날인지라..."
그 말을 남기고서, 그녀는 동화 몇개를 테이블에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관을 떠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주인장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담배를 꺼내 들었다.

"... 뭐니뭐니 해도, 연인끼리는 닮는 건가..."

#

대학은 세련된 곳이었다. 신설된 곳이라서 그런지, 크기는 작아도 건물 자체는 왕도에 있는 대학보다도 시설이 좋아 보였다. 아마도 흰색 벽과 빛을 잘 반사시키는 맨들맨들한 대리석 바닥, 그리고 곳곳에 달려 있는 조명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리쿠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연구실은 두 분할이 되어 있었는데,  곳이 시공간 마법에 관한 곳이었고, 나머지  곳은 조명에 관한 곳이었다. 둘은 분위기가 상극이었다.

마법을 연구하는 연구소는 짧게 말해 도서관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학교 내에 도서관은 따로 있는 것을 감안하면 퍽 굉장한 것이었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조명이 책을 읽기에 좋게 비치되어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원탁이 놓여 있었다. 아마 요나가 8영주의 회의에서 원형을 본딴 듯 싶었다. 책을 읽고 서로 토의하라는 뜻이겠지. 그녀는 대충 어떻게 연구가 흘러갈지 보이기 시작했다.

반대로 조명 연구소는 지하에 있었는데, 등불 없이는 내려가지 못할 정도로 어두웠다. 사실 빛과 조명을 연구하는 것이니 어두운 곳에서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녀는 등불을 챙겨 내려가 시설을 살펴보았다.

빛이 없는 것은 전체적으로 칙칙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지만, 시설 자체는 상당히 훌륭했다. 지하에 있는데도 별로 습하지 않은 것부터 굉장했다. 수로, 분수 관련으로 독보적인 기술을 보여줬던 전임 영주의 기술을 차용한 것 일까.

교직원, 연구원들이 모여 위치를 배정받는 것은 분명 9시 대학 중앙 홀에서 였다. 아직 1시간정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리쿠르트는 가볍게 연구소를 둘러보다가, 가운데에 비치되어 있는 가장  구체의 물건을 발견했다. 마치 거대한 전구같이 생긴 것이었으며, 그 주변에는 와이어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리쿠르트는 그 와이어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고 있다. 그녀는  와이어를 하나 집어 들어 자신에 팔에 감아 마나를 흘려 넣어 보았다.

"...큿!"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강렬한 빛. 리쿠르트는 그 빛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넘어지며 눈을 감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은 터질 듯이 밝게 리쿠르트를 감쌌다. 뜨거운 열기가 그녀에게 전달된다. 그녀가 타 들어가는 듯한 시야를 감추며 더듬더듬 와이어를 풀어내려고  때였다.

"이 조명은 태양빛을 내는 마도구입니다. 이 연구소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게 될 기술이지요."
옆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안경을 끼고 사용하시면 됩니다. 여기..."
그 목소리의 주인이 리쿠르트의 얼굴을 향해 뭔가를 건내 주었다. 리쿠르트는 그 손을 더듬거리다가 그의 손에 잡혀 있는 안경형태의 물건을 받아 눈에 끼웠다. 어느정도 광원 차단 효과가 있는 검정 칠이 된 보안경이었다.

"'선글라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같이 연구하게 될 상품이니 이름은 외워 두도록 하세요."
높낮이 없는 저음. 리쿠르트는 잠깐 번쩍거리는 눈을 선글라스 너머로 비벼 대다가 시선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짧은 금발, 날카로운 눈매, 무표정하고 차가운 인상.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연구자 분 맞으시죠?  공학자 자격으로 라티아에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밝게 빛나는 광원을 옆에 두고도 그의 표정은 무심할 정도로 딱딱한 것이었다. 그는  얼굴을 이리저리 일그러트리다가,  침을 흘리며 입가를 힘겹게 들어 올렸다.

"이해해 주시길. 전 표정을 지어낼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아, 네. 문제없습니다. 폰 에스테리나 리쿠르트에요."
이제야 빛에 다시 눈을 적응시킨 리쿠르트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남자는 침을 닦아내며 반대손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피로만이라고 합니다. 성은 없습니다. 같은 학자로서 제가 예를 취하지 않아도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