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참수자
"인정하라구. 이제 당신들은 퇴물이야."
조금 짙은 구릿빛 피부. 카산하크 출신의 범죄 왕, 로물란은 그렇게말하며 자신의 코코넛주를 들어 올렸다.
"내 말은, 이제 와서 다임상회를 무서워할 이유가 뭐가 있냐 이거지. 당신들은 이제 8영주와의 커넥션도 잃었고, 요나가 당신들에게 적의까지 보였다고. 게다가 아직 확실하지는 않은 찌라시 지만, 8영주중 미쉘경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문이 있어. 지금 그 자리를 메꿀 만한 유력 후보 중엔 누가 있을까? 그 요나 경이시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품에 끼고 있는 여자의 가슴을 주물러 댔다. 할란은 그 천박함에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아직도 전처럼 영향력을 부리려고 하면 말이야, 어이가 없다고! 주제를 알란 말이야! 언제 까지고 우리가 고개 숙이고 있을 것 같아? 이 영지 안에서는 내가 법이야!"
할란은 잠깐 그를 노려보다가, 곧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확실히, 일개 범죄조직 주제에 상당히 무장이 잘 되어있다. 저것들도 전부 다임상회의 지원으로 커진 것이면서. 은혜를 모른다.
"그러면... 병력 동원에 불참하시겠다는 걸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이해해도 되게쒭눼꽤~ 이제 아무도 다임상회는 안 무서워한다고! 그래도 뭐, 조합에서 나갈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 말고. 꼬우면 알지?"
그는 끼고 있는 여자들과 같이 낄낄대다가 고개를 숙이며 할란을 노려보았다.
"싸울거면 이 영지는 피하는 게 좋을 거다... 이 영지에서는 영주도 나 못 이겨."
전쟁이 길었긴 길었는가. 이런 일개 양아치가 기회를 잡는 다니, 말세다. 할란은 그렇게 생각하고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에테롬씨에게는 그대로 전해 드려도 문제없는 거겠지요."
"아아. 살 좀 빼라고도 전해주라. 그 영감 그러다가 무릎 무너져서 죽을라!"
신나서 지껄여 대는 로물란을 등지고 할란은 그 아지트를 나섰다. 천박하고 영양가 없는 대화였다. 그에게 남은 감상은 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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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테롬씨."
'아, 할란. 일이 끝나셨나요?'
전화국에서, 할란은 잠깐 목을 가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로물란씨는 총동원 계획에 참가하지 않겠답니다. 다임상회는 이제 무서울 것이 없다고... 그리고 에테롬씨에게 살 좀 빼라십니다."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진다. 그리고 곧 에테롬의 조금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대체 왜 다들 제게 살을 빼라고 하는 거죠? 그렇게 살이 쪘나요? 할란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보기 좋으십니다."
'부끄럽네요, 하하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웃음소리에서, 할란은 직감한다. 이 영지는 오늘로 끝이다.
'할란. 일단 다음 지역으로 가시죠. 내일 쯤 제가 사람들을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체크리스트에 로물란씨도 제대로 넣어 두시죠. 그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분명 총동원령에 참가할 거랍니다.'
"확인했습니다."
전화는 그걸로 끊어졌다. 할란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빠르게 이 곳을 떠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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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다. 그는 잠드는 것을 포기했다. 정신적인 피로감은 계속해서 중첩됐지만, 의외로 몸은 버틸 만 했다.
'요즘 살 맛 나지?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라드가 문에 기대서 칼린에게 말을 건다. 칼린은 침대에 앉아 가만히 라드를 노려보다가 입을 연다.
"라드씨. 저는 평생 당신이 배신했던 이유를 알 수 없겠죠?"
'배신? 아니지... 난 애초에 너네 편이 아니었는 걸.'
라드는 어깨를 으쓱 하고서 눈썹을 치켜 올린다. 그리고 칼린에게 언제나 처럼 삭막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냥 네가 멋대로 믿은 거잖아. 요나가 네 동료들 중에 첩자가 있다고 경고를 했었는데도. 좋다고 믿었으니까 배신을 당한 거지. 난 배신한 게 아니야.'
칼린은 가만히 그 말을 듣는다. 그리고 고개를 푹 떨구다가, 곧 머리를 들어 올려 벽걸이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다. 06시 20분. 슬슬 아침이 시작될 때 이다.
'오히려 배신은 내가 당했지. 고상하고 상냥하신 칼린님이 설마 나한테 그렇게 가차없이 굴 줄은... 이봐. 내가 매달리는 걸 봤을 때 기분이 어땠어? 좋았나? 모두의 복수를 하는 것 같아 즐거웠어?'
칼린은 느리게 일어나 잠옷을 벗는다. 아직 많이 어두운 시간. 그러나 칼린은 굳이 불을 키지 않는다. 킬 필요도 없고, 별로 키고 싶지도 않다. 그는 기계적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도르베가 내 배를 뚫어버렸을 때 무슨 기분이었지? 동료들끼리 싸우게 하면서 구경했잖아. 죽어가는 날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나? 네가 죽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나? 칼린... 대답 좀 해봐.'
라드가 천천히 칼린을 향해 다가온다. 칼린은 가만히 셔츠의 단추를 끝까지 잠궈 올린다. 라드가 칼린을 향해 고개를 들이 민다.
"이젠 뭔가 이상하다는 것도 못 느끼겠지?"
뚜렷하게 들려온 말. 칼린은 한번 몸을 흠칫 떤다. 정신을 차려 보니 눈 앞에 라드는 사라져 있다. 칼린은 잠깐 허공만 쳐다보다가, 곧 넥타이를 꺼내 들었다.
아침이다. 꾸역꾸역 아침해가 떠오른다. 언젠가 두려워했던 그것이다. 칼린은 겉옷을 한번 두들겨 털고 그것을 몸에 걸쳐 입는다.
"... 곧 전부 끝나니까."
그는 천천히 방 밖으로 발을 옮긴다. 문 앞쪽에 깨져버린 거울 파편들이 칼린의 발에 박힌다. 발바닥에 피가 붉게 흘러나온다. 칼린은 별 신경 쓰지 않고 방 밖을 나섰다.
"금방이니까."
그는 자신이 신발을 신지 않은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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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르트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자신의 함을 어루만졌다. 요즘 들어 갤러한은 찾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아직 세간에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라드가 죽었다. 라드는 유언으로 갤러한에게 무언가를 남겼다고, 리쿠르트와 함께 보라는 말을 했다.
갤러한은 그 무언가가 뭔지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그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뭔가를 찾아내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리쿠르트는, 라드가 남긴 것이 무엇일지 대강 예상이 가능했다.
칼린의 정체. 분명 라드는 뭔가를 알고 있었던 거겠지. 그런 그를 굳이 소금부대를 사용해 처리한 것은 꽤 소름 끼치는 일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느새 부쩍 멀어진 자신의 제자가 들어온다. 처음에 비해 훨씬 깔끔해 진 옷차림. 군더더기 없는 예의를 갖춘 움직임. 그는 점점 완벽해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리쿠르트는 점점 그가 사람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었다.
"선생님?"
"네?"
"수업 시작하시죠."
그의 말에는 이제 음정이 없다. 발음도 발성도 흠잡을 데가 없지만, 마치 관공서의 안내 목소리 같아 졌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감정을 닫아 버렸다.
"... 칼린.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대화를 나눠 보죠."
이미 너무 미룬 것일수도 있다. 그래도 리쿠르트는 어떻게든 칼린과 대화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 대화요?"
"안될까요?"
칼린은 조금 망설이다가 리쿠르트의 맞은 편에 머뭇거리며 앉는다. 그리고 책상을 사이에 두고서 올곧게 허리를 핀다.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그 말. 예상치 못한 변수에 자신의 탓을 기반으로 두는 행위. 리쿠르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잠깐 눈을 감고 머리속을 정리했다.그리고 더 전에 말했어야 할 말을 꺼냈다.
"칼린."
"네."
"자신을 너무 내몰고 있지는 않나요?"
칼린은그 말에 그 어떤변동도 없이 그저 서 있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곧 칼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전혀요."
"제게도 거짓말을 할 셈인가요?"
"거짓말이 아니예요."
정적은 곧 긴장감이 되었다. 리쿠르트는 죽어버린 칼린의 눈을 바라보다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라드씨가 죽었어요."
"알아요."
"소금부대가 죽였죠. 전 그것도 알고 있어요."
리쿠르트는 그렇게 말하고서 잠깐 칼린의 반응을 본다. 칼린은 여전히 목석처럼 그저 서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신다구요?"
"당연한 거니까요."
"뭐가요?"
"배신자가 죽는 건 당연한 거니까요."
"... 칼타코에서는. 칼타코에서 당신은 나름 2개월정도를 같이 지냈던 사람들이 배신을 했었고, 한번에 몰살당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느낀 게 없나요?"
"단 한순간도 그들을 믿은 적 없어요. 전부 적이었습니다."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리쿠르트는 그런 칼린을 바라보다가 곧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펼쳐 놓았던 책을 덮었다.
"... 칼린. 사람을 죽여서는 안되는 이유는 뭘 까요."
칼린은 그 질문에 잠깐 고개를 숙였다. 처음으로 보인 동요였다. 그는 잠깐 고개를 떨군 상태로 있다가, 곧 다시 그 머리를 들어 올리며 답했다.
"이 시대에도...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 건가요?"
그랬나. 그거였나. 리쿠르트는 어느 정도 칼린의 생각을 파악해냈다. 잠깐 그 대답에 고민하던 그녀는 곧 머리를 뒤로 묶었다.
"그러면... 질문을 바꿀 게요. 칼린,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 이유에는 뭐가 있을까요."
"... 그 사람도 살고 싶을 테니까."
"또?"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또?"
더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리속이 어지럽다. 뿌옇다. 칼린은 그렇게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답을 바꿔서, 사람을 죽여도 되는 이유는 뭐가 있을까요."
"뭔가를 지켜야 하니까."
"또?"
"... 죽이지 않으면 죽으니까."
"또?"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
"또?"
"그게 당연한 상황도 있으니까."
"그만하면됐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칼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올곧게 뻗은 시선. 왜 인지 몰라도 지금의 칼린에게 그것은 무서운 것이었다.
"당신은 사람을 죽여도 되는 이유를 더 많이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군요."
"저는..."
"비난하려는 게 아니예요. 언제나 딜레마가 되는 내용이죠. 당신에게는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합니다."
리쿠르트는 둘 사이에 있던 과자를 옆으로 밀어냈다. 이제 둘 사이에는 책상 뿐이었다.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 이유... 그건 답이 명확히 결정된 것도 아니고, 모두가 같은 답을 가진 것도 아니예요. 각자가 각자의 답을 짊어지는 것이기도 하며, 개개인의 윤리의식. 사회의 인식. 그 차이에 의해 시대마다 다른 양상을 띄기도 하는 질문이죠."
칼린은 리쿠르트가 갑자기 이런 장황한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어지러운 머리속에 선생의 말을 어떻게든 담아보려 노력했다.
"이런 질문 뿐 아니라, 더 넓게 보자면. 시대, 사회 인식 등이 바뀌는 것에 따라 어떤 행위가 정당화가 될 수도 있겠죠. 우리가 터부시 여기는 것을 다른 문화나 시대에서는 자연스럽게 행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명확한 선과 악은 없는 걸까요? 그저 시대에 맞는 윤리의식만을 지키며 살아가면 될까요?"
"그건..."
당연한 게 아닌가. 칼린은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님이 원하는 답변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오퀴테스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진화하는 것은 문화와 기술 뿐이 아니다. 이 말은 사상과 윤리의식 또한 시대가 향유하는 문화수준에 걸맞게 진화한다는 뜻 이예요."
올곧은 눈. 계속 쳐다보고 있기 무섭다. 무리다.
"절 보세요, 칼린."
리쿠르트는 그렇게 일갈하고서 칼린의 고개를 잡아 돌렸다. 그리고 똑바로 눈을 보며 말했다.
"당신은 저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사람을 죽여도 되는 이유를 제시할 수 있었나요?"
"전 군인이에요.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비극이 일어나요."
"당신은 저를 처음 만났을 때도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 이유를 그것 밖에 제시하지 못했을까요?"
"그런 걸 생각하고 다닌 적은 없어요."
"정말로? 제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을 제자로 받고서 교육을 시작했을 때. 저는 당신의 윤리의식에 감탄했었습니다. 당신의 정신만큼은 스승인 저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것이었어요. 매일마다 당신의 총명함에 새로움을 느꼈습니다."
"제가 본분을 포기하고 혼자서만 고매하게 지내라는 말씀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논점을 흐리지 마세요. 제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닙니다."
드물게도 단호한 모습. 언젠가, 자신을 탈출 시키기로 결행했을 때의 목소리. 칼린은 현기증이 심해져 눈 앞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총명함은 어디로 갔죠? 왜 스스로에게 질문을 멈춘 거죠? 칼린. 왜 생각하는 걸 멈추신 거죠?"
"선생님, 그만... 머리가..."
"그건 당신의 윤리의식과 시대의 괴리감때문에. 그저 모든 걸 당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시대에 맞추는 쪽이 더 편하니까. 그게 더 맞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지금 당신의 총명함을 억지로 깎아내리고 계신 것 아닙니까?"
리쿠르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격정적으로, 방 안에 목소리가 울린다.
"왜 있지도 않은 잘못을 만들어서 까지 스스로를 구속하려는 겁니까!"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 할 테니까!"
칼린도 따라 소리치기 시작한다. 조금 당황한 리쿠르트의 머리를 잡고서, 그도 격정적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이해할 수 없어! 이 세계는 미쳤어! 그런 세상에서 내가 내 유일한 이해자를 믿는 게 뭐가 나쁜데!"
"유일한 이해자...?"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당신이 뭘 알지? 시대에 나를 맞추는 게 뭐가 나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지친단 말이야! 무서워!"
그의 얼굴이 서서히 분노에서 슬픔으로 일그러지며 바뀐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좆같은 곳을 뜰 거야! 이곳에서 사라져 버릴 거야...! 더는 못 버텨... 못 버틴다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곧, 그는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리쿠르트의 손을 치워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리쿠르트를 내려다보았다.
"진보된 윤리의식이라니, 전 그런 건 모르겠어요. 전 단 한순간도 온전히 선한 사람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침착해진 목소리. 그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릴 수 없다.
"나가보겠습니다. 대화 즐거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의 문이 닫혔다. 교실에는 그저 말없이 닫힌 문을 바라보는 리쿠르트만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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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물란님! 긴급상황입니다!"
그의 침소에 여성 한 명이 급하게 뛰어 들어온다. 로물란은 침대에서 일어나며 눈을 비빈다.
"뭐야, 씹... 금방 잠들었는데."
"불, 불이 났습니다!"
"그럼 꺼. 사람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이 저택에 난 게 아닙니다!"
"... 뭐?"
하얗게 질린 그녀의 표정을 보고서, 로물란은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그는 급하게 실크 로브를 대충 걸치고서 속옷만 입고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무슨, 씨발..."
창 밖이 마치 대낮 같다. 태양빛처럼 밝게 빛나는 바깥은 어디에 불이 난 건지는 몰라도 아주 큰 불이라는 건 알 수 있게 해 줬다. 이 영지는 거의 로물란의 것이다. 꼭두각시 영주가 아무리 무능하다지만, 이정도 상황이 벌어졌는데 가만히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저택 안에 있는 애들 다 깨워. 전부 저택 밖으로 나오라 해."
"예!"
로물란은 그렇게 말하고서 저택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기가 막힌 풍경에 눈을 의심했다.
"말도 안돼..."
그의 저택. 오로지 그의 저택만을 남겨두고, 주변의 모든 집이 불타고 있었다. 영지 내에서 그의 저택만이 온건하게 남아 있었다. 대피한 주민들은 유일하게 안전한 로물란의 저택 근처로 모여서 무슨 일인지 떠들어 대고 있었다.
"로물란씨! 전부 나왔어요!"
부하들이 뛰쳐나오고서 곧 로물란과 같은 표정을 짓게 되었다. 로물란은 부하들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못하고 그저 유일하게 남은 자신의 저택을 보며 무슨 일인지 필사적으로 파악해 보려 했다. 일단 인명피해는 없는 건가, 영지민들 대부분이 그의 저택 앞으로 모여 있다. 약 140명은 되어 보인다.
"... 맙소사, 이게 무슨 난리람."
"새벽에 어디서 갑자기 불이 올라왔나 봐요!"
웅성대는 영지민들. 로물란은 상황을 파악해 보기 위해 그 소리들에 집중해 본다.
"어디서 시작된 불이길래 이렇게 다 불타?"
"로물란씨 저택만 무사한 거 보면 모르겠냐? 누가 일부러 불지른 것 같아!"
"이런 씨발, 누가 갑자기 남에 집에 불을 붙인 거야!"
"분명 다 뒈져가는 돼지같은 새끼겠지!"
그런데, 영지민들의 대화가 어딘가 이상하다.
"로물란씨가 다임 상회를 적대 했나봐!"
"그런 건가? 그래서 불이 난 거라고? 저 저택만 피해서?"
"아이고... 우리는 다 무슨 잘못이야..."
그 분위기를, 그의 부하들도 전부 파악해냈다. 부하들은 서서히 로물란 근처로 모이며 원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엄포를 놓으려 할 때 였다. 그 때, 그들은 전부 눈치채 버렸다.
그들을 둘러싼 주민들 전원이 로물란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그것을 눈치챈 순간, 주민들 전원이 조용해졌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멈추고, 그 자리에는 집들이 타 들어 가는 소리만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다임상회는 건드리면 안되겠네, 그지?"
"아직 죽지 않은 것 같아. 응. 그런 것 같아."
"그렇다면 되도록 이번 소집령에 참가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갑자기 한 사람씩, 겹치지 않게 들려오는 대화소리. 로물란은 혼절할 것 같았다. 그 주민들은 전부 일제히 로물란을 쳐다보고서 입을 열었다.
""""""기회는 줬다."""""""
모두가 한꺼번에 합을 맞춰서 낸 목소리. 지금 다시 보니, 그들은 전부 생소한 얼굴들이었다. 마을의 주민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주민들은?
로물란과 그 부하들을 감싸고 있던 자들은 하나씩 불길 사이로 사라져 들어갔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던 마지막 눈까지 사라지고 나서야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건물들이 타 들어가는 소리 속에서 잔잔하게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속옷이 젖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