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에필로그
"소금부대에게 더 이상 활동하는 임무는 없다고 봐도 된다. 이제 대외적으로 얼굴만 보이고 다니면 돼. 그래도 나가려는 건가?"
요나는 마지막 확인이라는 듯 되묻는다. 그러나 도르베의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그저 그렇게 말하고서, 표정을 굳히고 요나를 바라본다. 그녀는 잠깐 도르베를 바라보다가, 담배를 꺼내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어깨에 손을 얹으며 아쉬운 듯 말했다.
"자네는 뛰어난 군인이었네, 도르베. 누가 뭐라고 해도 군은 언제나 최선을 다 해 줬어. 아직도 자네가 보였던 기개를 잊지 않았지. 이런 선택을 한 것이 유감일 뿐이야."
"감사합니다."
"정규 전역이 아니니 혜택을 지원할 수는 없다만... 내 개인이 자네를 지원하도록 하지. 왕도의 제피 은행에 군 명의의 통장을 만들어 두겠다. 부디 내킬 때 사용하도록."
"아뇨, 저는..."
"받기 싫다면 안 받으면 그만인 거다. 다만 만들어 두겠다는 뜻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불붙은 담배를 테이블에 살짝 걸쳐 두고, 도르베를 향해 경례했다.
"수고 많았네, 도르베. 자네가 가려는 길에 국왕저하의 보살핌이 있기를."
"감사합니다. 지휘관님도 부디."
도르베는 그대로 발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남은 질문 하나가 그의 가슴 속에 응어리져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요나는 발을 멈춘 도르베를 보며 담배를 들었다.
"잊은 거라도?"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 질문을 하지 않고서는 그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돌려 요나를 바라보았다.
"지휘관님,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언제든지."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요나의 손 끝이 잠깐 멈춘다. 정적속에서, 도르베는 요나를 바라본다. 이 질문이 무슨 뜻일지, 요나 당신은 알겠지.
"... 도르베."
"예."
"내가 하는 말을 군은 진실로 들을 수 있을까?"
도르베의 눈가가 조금 찡그려진다.
"내가 뭐라고 말하던, 자네는 그걸 진실로 들을 수 있나?"
던져진 요나의 질문에 도르베의 주먹이 살짝 떨렸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서 몸을 떨다가, 곧 한번 심호흡 하고서 고개를 조금 숙였다.
"가보겠습니다, 지휘관님."
"다시 한번, 수고 많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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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가시는 건가요?"
핀이 조심스럽게 묻자, 도르베는 가볍게 웃으며 답한다.
"돈도 많이 모였다. 이 돈을 들고 윌레인 여행이나 한번 떠나 보려 한다. 내 동생들을 찾아 야지."
"하지만... 곧 있으면 전역인데..."
"그러니 조금 미리 나가도 안 잡히는 거지. 안 그래?"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모인 부대원들을 둘러본다. 그런가. 이제는 7명만 남았는가.
"...이해한다."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고서 도르베를 끌어안는다. 도르베는 웃으며 등을 몇 번인가 톡톡 쳐준다.
"극성은..."
다들 표정이 좋지 않다. 핀은 다크 서클이 진해져서 판다처럼 되었고, 소니아는 라드가 배신자임이 밝혀진 날 이후로 방에만 쳐 박혀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조심스레 얼굴을 드러낸 것이었다.
갤러한은 라드가 죽은 후부터 방에만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리쿠르트조차 만나지 않고 뭔가를 경계하듯 성을 피했다. 릴로나 륑게가 걱정하면, '늙었나 보다' 같은 말을 하며 가볍게 넘기고는 했다. 그러나 그 표정은 풀리는 일이 없었다.
륑게와 이리하는 특별히 변한 것은 없었다. 다만 이리하는 기념품을 사오는 것을 그만뒀다.
"내 보험금은 너네들에게 맡기마. 그런 푼돈, 필요 없어."
"... 이제 꽤 큰 돈이 된 것 같지만 말이야."
소니아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한다. 도르베는 그 말에 잠깐 힘겹게 웃다가, 곧 고개를 돌린다.
"아무튼. 먼저 떠나도록 하지. 모두들... 알아서 조심들 하겠지만, 적당히 살아남아 주길 바래."
"많이 컸구나, 도르베. 그런 말도 하고."
"누구한테 배웠으니까 말이다."
도르베는 대충 그렇게 말하고서 여관을 나왔다. 부대원 전원과 여관 주인까지 나와 그를 배웅했다. 몇 번인가 대충 손을 흔들고서, 그는 웃음을 지으며 마차에 들어갔다. 그리고 푸르스름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참 성가시지. 우리 부대는 뭐가 그렇게 꼬였는지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 들이밀어진, 바깥 풍경보다도 창백하게 빛나는 검을 향해 눈을 내렸다.
"그렇지 않나, 칼린?"
"도르베. 부대에 복귀하세요."
칼린은 도르베의 목에 갖다댄 검을 들이밀며 말했다. 도르베는 말 없이 그 검을 보며 조소하다가, 칼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부는?"
"말 돌리지 마세요, 도르베. 부대에 복귀 하시지 않으실 거라면, 이 자리에서 죽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 내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던가?"
"당신이 자진해서 나오면 부대의 이미지에 타격이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하, 그런가..."
도르베는 눈을 감고 칼의 차가운 냉기를 목으로 느껴 보았다. 그리고 뇌까리듯 말했다.
"... 억지로라도 나를 붙잡으면 쓸 데는 있고?"
"당신은 태생이 군인이에요. 어차피 해산이 눈 앞인데, 이렇게 급하게 떠날 이유도 없잖아요."
"태생이 군인... 태생이 군인이라..."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칼린의 검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칼린."
"네."
"이 세상에 희망이라곤 없다."
"... 네?"
"나라는 국민을 돕지 않고, 동료들은 죽을 거고, 믿고 있던 자는 배신하지. 이 세상에, 적어도 이 나라에는 희망 따위 존재하지 않아."
도르베는 마침내 눈을 뜨고 칼린을 쳐다본다. 빛이 들지 않는 죽어버린 눈. 아마 지금은 그 자신도 그런 눈을 하고 있으리라.
"난 저들의 희망이 되어 줄 수 없다. 전부 나락이고 심연이야. 이 세상은 미쳐 돌아가고, 우리는 가장 중요한 변화에는 무력해 진다."
"도르베, 그게 무슨-"
"모르겠느냐. 우린 모두 천천히 죽어갈 거야. 시대의 종말이 다가온다."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 얼굴색은 이미 많이 변했다. 도르베는 그 모습이 안타깝다. 안타깝고 시리다.
"너... 너와 꼭 대화를 하고 싶었어. 가기 전에 너와 꼭 대화를 해야 했어. 칼린. 말해봐. 네가 아직도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저는..."
"한번 더 라무르 마을에 가면, 그 짧은 시간동안 일으켰던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그의 눈이 조금 붉어진다. 칼린은 조금 당황해 검을 낮췄다.
"네크로맨서를 살려 둘 수 있었을까? 지금, 지금 돌아간다면 넌 네가 보였던 상냥함을 그대로 보일 수 있느냐?"
도르베는 그 내려가던 검을 잡아 자신의 목으로 가져다 댄다.
"말해라. 넌 이 모든 길을 걷고도 저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거냐?"
긴 침묵. 칼린은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헤엄치는 검은 눈을 보며, 도르베는 단념한듯 눈가를 닦고 웃었다. 세상을 향한 조소. 라드의 웃음과 퍽 닮은 것이었다.
"... 이걸... 이걸 봐라. 우리들의 꼴을 봐라. 난 내 동료였던 자를 그자에게서 배운 기술로 죽였고, 넌 이제 자신을 잃고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었어. 이런 우리가 어떻게 누군가의 희망이 된단 말이냐..."
"하지만... 하지만 상징적인 영웅이..."
"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검으로 내 목을 긋거라."
도르베는 칼린의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의 손에서 조금 피가 세어 나온다.
"죽여다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칼린은 그저 슬픈 듯 가만히 검을 잡고 있다가, 느리게 검의 손잡이에서 힘을 풀었다. 도르베가 검을 안정적으로 잡은 것을 확인하고서, 칼린은 힘없이 팔을 떨궜다.
"도르베. 가지 마세요."
"미안하다. 난 더 버틸 수 없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칼린의 검을 반대로 잡아 칼린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손에 붕대처럼 둘렀다.
"... 처음 만났을 때, 반말을 사용해 달라고 했었지."
칼린은 도르베에게서 받은 검을 착검하고서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고서 지치고 찢어진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지막은 반말로 보내줄 수 있을까. 친구처럼 말이야."
칼린은 몽울 져 올라오는 현기증을 참아내며 가만히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문을 열었다. 그저 고개만 돌려 작게 말했다.
"수고 많았어, 씹새끼."
그리고 대답도 듣지 않고서 훌쩍 떠나갔다. 도르베는 그런 칼린의 뒷모습을 잠깐 보았다. 눈 앞이 부옇게 흐려져 안보이게될 때 까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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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드는 확실히 뒈졌어."
경박하게 울리는 목소리. 에테롬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답한다.
"예상대로 아직 세간에 알리지는 않네요."
"안 까발리쇼?"
"왜 그걸 우리가 밝힙니까. 아직은 상황을 봐야죠."
"아이 씨발! 뭐가 이렇게 어려워!"
"뭐... 조금 진정해요."
그는 눈 앞의 천박한 사내를 진정시키며 자신의 입술을 햝았다.
"늦어도 이번 주 안에는 움직이게 해 드릴 테니까."
그리고 가만히 자신의 병력들을 재차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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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식사를 끝마치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근처에 앉은 칼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칼린은 기계적으로 그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연기를 한번 들이마시고서 입을 열었다.
"이번 비공식 임무에 참가해줘서 고맙구나. 네게는 특히 힘든 일이었을텐데."
"아닙니다. 해야할 일이었으니까요."
무감정하게 뱉은 그 말에 칼린 스스로가 조금 아려왔다. 도르베와 아침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서 였다.
"우리는 지금이 시대의 태양이 되어 주고 있어. 배신자가 있다는 건 백성들에게 큰 패닉을 전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모두를 위해서. 더 나은 세계를 위해서 한 일이야."
"이해합니다."
"도르베가 나간 것은 상당한 유감이지만 말이다... 네가 설득하면 돌아와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가 부족했습니다."
"아니. 넌 요즘 나날이 훌륭해지고 있단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다리를 꼬았다. 잘 다린 정장의 바지가 눈에 띈다.
"네 한계를 깨닫는 것... 그건 정말 좋은 일이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전부 나에게 맡기렴."
칼린은 그 말에 고개를 숙인다. 잠깐 눈 앞의 식기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의기소침하게 말을 꺼냈다.
"... 전 좋게 바뀌고 있는 겁니까?"
"그럼."
"저는 이제 망설임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결단력이 생긴 거란다."
"눈물이 말라버렸어요."
"시대에 적응한 거지."
"사람을 믿을 수 없어요."
"영리해졌구나."
"... 진짜로 저는, 좋아진 겁니까...?"
요나는 길게 뻗은 담뱃재를 유리잔에 털었다. 그리고 칼린을 향해 의자를 끌어 다가갔다.
"내가 그렇다고 말했다. 믿기에 부족한 게냐?"
"하지만-"
"네 감성은 이 나라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었지. 네 상냥함은 무른 것이라고 말했었고. 지금의 넌, 네 유약함이 저지른 실수를 다시는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요나는 무표정하게 칼린을 바라보았다. 칼린은 그 표정에 왠지 모르게 위축되어 몸을 움츠린다.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것도 없어. 애초에 사람조차 아니지. 네가 뭘 알 수 있다고 섣불리 판단을 하는 것이지?"
"죄송, 합니다..."
"너조차도 네 성질이나 마법도 파악하지 못하는 중이다. 널 지금 가장 잘 아는 것은 네가 아니야. 바로 이 나이다. 이 세계에서 너를 가장 아껴주고 보살펴주고 이해해 주는 것은 나다. 아니, 완전히 이해해 주는 것은 나 밖에 없어. 다른 누가 널 이해할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네 동료들? 리쿠르트? 모두가 네 정체를 알고도 전과 같이 대할까? 잊지 마라, 칼린. 넌이방인이고 괴물이야. 나만이 너를 이해할 수 있다. 보살펴 줄 수 있다."
요나는 고개를 낮춘 칼린의 얼굴을 부여잡는다. 그리고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얼굴을 가까이 댄다.
"지금 이 말 마저도 전부 너 만을 위한 거니까... 지금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너 만을 위한 것이니까. 넌 나에게 그 짐을 벗어 던지거라. 네 책임을 넘겨라. 따르거라."
서로의 앞머리가 간지럽게 닿을 거리. 묘하게 상기된 요나의 얼굴을, 칼린은 조금 두려운 듯 바라본다.
"죄송합니다..."
잠깐 그 얼굴을 쳐다본 요나는 칼린의 뒤통수를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의 가슴으로 밀었다.
"불쌍하고, 어리석고, 또 기특하구나. 맹세하마. 네가 나 만을 봐준다면... 이 세상 전체가 네 적이 되어도 난 네 옆에 있을 것이다."
"... 어째서 저 같은 거에게 그렇게 까지 해주시나요. 전 이방인이고 괴물인데…"
"어리석은 질문이다."
널 사랑하니까.
네 아름다움이 좋다. 네 무너질 듯한 불안함이 좋다. 네 끝을 알 수 없는 검정빛을 띈 눈이 좋다. 네 상냥함이 좋다. 네 유약함이 좋다. 네가 가끔 보이는 강한 면모가 좋다. 네 고상함이 좋다. 네 지혜가 좋다. 네 욕심 없는 점이 좋다. 네 애연습관이 좋다. 네 속이 깊은 점을 좋아한다. 네 조금 낮은 음계의 미성이 좋다. 네 탐구심이 좋다. 네 청결한 점이 좋다.
네 길고 가느다랗게 뻗은 손가락이 좋다. 네 가끔 극단적이 되어 버리는 무모함이 좋다. 네가 모의전에서 가끔 보이는 움직임 습관이 좋다. 네 소극적인 견제가 좋다. 네 적극적인 공세가 좋다. 네 엉뚱함이 좋다. 네가 가끔 나른할 때 짓는 귀여운 표정이 좋다. 자기평가가 지나치게 낮은 것도 좋다.
가끔 드러나는 무방비한 모습이 좋다. 셔츠만 입어서 그 속에 비쳐 보이는 하얀 살갗이 좋다. 매일 하는 목욕이 끝나고 나는 비누향이 좋다. 너에게서는 같은 비누향도 다르게 나는 것 같아 좋다. 꽤 깊게 파인 쇄골이 드러나 보일 때 좋다. 다리를 자주 꼬아 대는 것이 관능적이다. 그걸 또 자각하지 못하는 것도 좋다. 가끔 흡혈을 끝마치고 습관처럼 그 붉은 입술을 살짝 핥아 낼 때에는 이성을 붙잡는 것조차 힘들다.
네 하얀 이빨이 좋다. 네 피가 좋다. 네 피 냄새를 좋아한다. 묘하게 달콤한 향기가 나는 듯해. 네 감성이 좋다. 네가 책을 보고 눈물 흘렸을 때에는 참을 수 없이 심장이 뛰었다. 네 예민함이 좋다. 독한 향이 나는 술을 줬을 때 조금 찡그려 올라가는 콧잔등이 또 귀엽다. 차를 마실 때 무심코 들어올리는 새끼손가락을 좋아한다. 숨을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뱉는 습관마저 좋다. 매번 새롭게 좋아하는 점을 찾을 수 있는 점이 좋다.
가끔 거울을 보고 우울한 표정을 지을 때, 방에서 혼자 흐느껴 울던 그 때, 임무가 끝나고 정신이 무너져 죽은 눈으로 내게 쓰러져올 때, 나의 피를 마실 때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눈가가 일그러질 때, 동료들에게 찾아갈 수 없어서 서러운데도 나에게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 할 때, 그런 모습들을 볼 때면 나도 견딜 수 없이 괴로워서 가슴을 끌어 않아 보지만 동시에 그게 좋고 또 좋아서 심장이 뛴다. 그런 모습까지도 너무나도 좋아한다.
네가 나에게 종속될 때를 좋아한다. 네가 나의 곁에 있다는 걸 알아낼 때가 좋다. 네가 나만의 것이라는 걸 알 때가 좋다. 네가 나 만을 의지할 때 좋다. 내 손아귀 위에서 그저 찬란히 춤추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나만이 너를 구할 수 있을 테니까."
요나는 그렇게, 짧게 답했다. 그 대답만으로 충분했다. 지금은.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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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로는 다시 한번 쪽지를 확인해 보고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조용히 문에 두어 번 노크를 한다.
'나가요-.'
남자의 목소리. 곧 문이 열리며 심한 곱슬머리를 한 남자가 나온다. 비쩍 마른 것을 보니 특출 난 마법이 있는 게 아니면 약해 보인다.
"아, 안녕하세요... 그, 프롤라인씨를 만나 뵈러 왔는데... 지금 안 계시나요?"
남자의 눈이 조금 커진다. 그리고 곧 눈가를 찡그리며 조심스럽게 질문해온다.
"제가 프롤라인의 남편입니다만..."
"아, 디미트리씨시죠? 잘됐네. 이야기는 같이 들으셔야 할 것 같거든요."
"네? 저도요?"
"일단 들어가도 될까요?"
릴로는 그렇게 말하고서 이빨을 보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디미트리는 잠깐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곧 어딘가에서 얼굴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닿았다. 잠깐 출처를 떠올려 보던 그는 곧 그 기시감이 공중 광고물에서 비롯된 것임을 떠올려냈다.
"호, 혹시, 그... 소금부대원이십니까?"
"아이코, 이거. 조용히 오려고 했는데..."
"몰라 뵈었네요! 죄송합니다! 얼른 들어오세요!"
유약한 남자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릴로는 집에 발을 들이며 대충 내부를 확인했다. 햇빛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집이다. 세피아톤이 잘 어울리는 따뜻한 분위기. 침대에는 라드의 누님이 누워 있었고, 디미트리는 그 누이를 그리다가 나온 듯 했다. 침대 앞에 놓여진 캔버스에서 그걸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영웅님 께서 이런 곳에는 무슨 일로...?"
아무래도 조금 불안한지 그는 손가락을 쉴 새없이 꼼지락 댔다. 용케도 이런 남자에게 누이를 맡긴 건가, 싶어서 릴로는 조금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프롤라인씨도 잠에서 깨워 주시겠어요? 이 이야기는 같이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아, 네."
디미트리는 프롤라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귓속말로 그녀를 깨웠다. 느리게 일어난 그녀는 눈을 뜨니 분위기가 퍽 라드를 닮아 있었다. 역시 남매는 남매인 건가, 하고 납득할 정도의 외모였다.
"... 이런, 손님이 오셨네. 남편분의 친구이신가요?"
"아, 아뇨. 전해드릴 소식이 있어서..."
"여보, 전에 내가 말했던 부대 있지? 구호부대... 저분도 거기 일원이셔."
"어머, 정말? 귀하신 손님이 오셨네. 기다려요. 금방 차를..."
"아니요! 아닙니다! 진짜 용건만 전달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손사레를 치며 제안을 거절하고서, 릴로는 또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급하게 통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에게 내밀었다.
"... 이건 뭐죠?"
"일단 열어 보시죠."
그 통장 안에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평생동안 볼 수도 없는 금액이었다. 조금 성공한 상인조차 쥐기 힘든 돈의 액수가 적혀 있었다.
"이, 이건 무슨..."
"그거랑... 이것도 받으세요. 집문서입니다."
"집문서요?"
"네. 네르바에 있는 3층집에 대한 문서입니다."
"그걸 왜..."
"전부 당신들 껍니다."
릴로의 말에 둘의 얼굴이 사색으로 질린다. 놀란 표정이 같은 것이 꽤 웃기다.
"아, 아니, 왜 우리에게 이런 걸 주시죠?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디미트리가 그렇게 소리쳤다. 프롤라인은 현기증이 생겼는지 침대에 다시 기댔다. 디미트리는 그런 프롤라인을 잡아 올리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놀라움과 기쁨보다는 당혹감이 더 컸다.
"아... 저는 그냥 배달 왔을 뿐이에요. 이 선물들의 출처는..."
릴로는 조금 눈치를 보다가 프롤라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라드입니다."
프롤라인의 표정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당황한 디미트리를 살포시 밀쳐내고서, 그녀는 받았던 모든 것들을 접어 릴로에게 되 밀었다.
"받지 않겠습니다."
"뭐?"
"뭐요?"
"받지 않겠습니다. 외도를 걸으며 얻은 재물따위 받지 않습니다."
강경하게 말하고서 손을 떼는 그녀를 보며, 릴로는 왜 라드가 이 돈과 재물들을 모으기만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금 골치 아픈듯 생각해보다가, 곧 그 문서와 통장을 다시 들이 밀었다.
"... 부정으로 얻어낸 돈이 아니예요."
"그럼 뭘로 이렇게 큰 돈을 벌어내죠?"
"댁 동생은 저와 같은 구호부대에 있었습니다."
"...네?"
"같은 구호부대원이었고, 나라를 위해 힘써주며 그 돈을 모았을 뿐이에요. 이번에 이걸 건내 주게 된 건, 그러니까..."
잠깐의 침묵. 릴로는 말을 최대한 말을 골라보았다.
"라드가... 이번 휴가기간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죽었어요."
"... 뭐라구요?"
"그건 그의 유산입니다. 더러운 돈이 아니라, 나라에서 인정된 돈이에요."
그런 것 치고는 액수가 많지만. 라드 자식, 이중첩자질 하면서 돈 좀 만졌나 보다.
프롤라인은 큰 충격을 받은 듯 잠깐 멍하게 앉아있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 죽었나요?"
"1주일 정도 됐습니다."
"유서같은 건 없었나요?"
"네."
"소금부대에서 그는 어땠나요?"
"... 좋은 전우였습니다."
얼굴을 가리려는 듯,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창 밖 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디미트리도 분위기를 읽고 프롤라인의 손을 잡았다.
"라드는 사람을 많이 구했나요?"
"그럼요."
"그가 죽인 사람보다도?"
"얼마나 죽였는지는 모르지만, 구호부대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며 임무에 임했습니다."
정적. 프롤라인은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여보, 창문은..."
"괜찮아. 바람 좀 쐬고 싶어."
침착하게 말하고서, 프롤라인은 바람을 맞으며 잠깐 심호흡을 했다.
"그 아이 이름은 라드가 아닙니다. 하이드에요."
릴로의 눈에는 분명하게 보였다. 그녀의 뺨에 햇빛을 받아 번쩍인 것이 있었다.
"... 무덤에서 다시 요람까지 기어 올라온, 저의 소중한 남동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