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8화 〉독사 (138/164)



〈 138화 〉독사

그 때 부터, 난 이곳 저곳에 많이 쓰였지. 어린 애들을 어디에 쓰는지 궁금하겠지만, 나름   곳이 있거든. 자세히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줌마한테 팔려 가서 한 6개월정도 노리개로 쓰인 적도 있어.

누님은 몸이 많이 안 좋아졌어. 병 때문이었는데, 원래도 몸이 안 좋았던 양반이 그 지랄을 펼쳤으니. 눈을 감아버리고 한동안 뜨지도 못하고 있었지. 그러다가 정신 차리고 얼마 안돼서 눈치 챈거야. 동생이 10살 남짓한 나이부터 착실하게 인간을 포기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버렸어.


처음 몇일은 그냥 울었어. 내가 잘못한 건가 싶어서. 몇 달은 증오했지. 죽여버리고 싶었어. 근데 머리가 좀 커지고 나니까, 그냥 그립더라고. 우연히 세상에 내 편은  하나도 없다는  알게 됐거든.


17살 때  마법을 알게 된 후부터, 난 엄청 빠르게 성장했지. 아무튼 그냥 계속 일했단 말이야. 그러면서 조직에 누님 소식도 좀 물어보면서. 18살  내 실력을 조직이 인정해서 선물 받은 게 이 밧줄이야.


그 뒤로 또 내가 고참이 되고 간부가 되니까 조금 멀리까지도  풀어 주더라고. 그래서 은근슬쩍, 누님이 있는 곳으로 파견을 가겠다고 했지. 그 왕초 놈은 의심도 안하고 그러라고 했고. 그 날이 기억나. 벌어 모았던 돈과 예쁜 화분을 하나 쥐고 누님이 있다는 곳으로 찾아 갔었지. 죽은 동전쟁이 아빠가 귀족들과 연이 있어서 꽤 괜찮은 집에 머무르고 있었나 봐.

찬란하게 만개한 노란색 꽃. 얼마나 이뻤는  몰라. 품에 안고 있으니 코가 찔려서 간지러웠어. 깔끔하게 청소된 거리에 있는 작은 집.  앞에서 노크  번 정도 하고 나니,  누이가 힘겹게 문을 열더군.

그 때 그 초라한 꼬라지 하고는! 부자 놈들 배 좀 쑤셔 보니까 이제야 누님이 얼마나 가난해 보이는 지 알겠더라고. 내가 애매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누님도 당황해서 날 올려다봤지. 그러다, '아.' 소리를 내더니 얼굴을 찡그렸어. 하이드, 너니? 하고.


맞아 누님! 나야! 누님! 내가 돈을 잔뜩 벌었어! 엄청 벌고 있고, 난 이미 간부야! 병원도 못 가고 있던 거야? 내가 의원을 하나 붙여 줄게.  화분은 신경 쓰지마. 그냥 누님한테 어울려서 오는 길에 사왔어!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도 많았는데. 단 한마디도 못 꺼냈어. 문이 닫히더군. 닫힌 문 너머로 싸늘한 목소리가 돌아오더라.


'가족을 죽인 조직 밑에 들어가 사람 죽인 돈을 받으라는 거니.  동생은 우물에서 죽었어. 사람으로 죽었다.'
나 참, 이런 시대에 바보같을 정도로 정론이라 화가 나더군. 근데 할 말은 없더라고.


'넌 괴물이야, 하이드.'
누님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그거였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닫힌 문 너머에서,  그제서야 조금 더 빨리 왔어야 됐다고 느꼈고-


그래서 기지로 돌아가 대장을 죽였어. 그게 맑은 피 몰살의 전말이야. 하이드라는 이름도 그 때 버렸어.

난 괴물이 아니야, 유스티스. 난 나쁘지 않았어. 방법이 없었다고. 누님이 그렇게 싫어할 줄 몰랐단 말이야. 슬프게 하려던  아니었는데.

난 어디서부터 잘못한 거지?

#


열차가 얼마 안가서 멈추는 것이 보인다. 자동차의 시트 위에는 피와 뇌수, 분홍색 덩어리들이 흩어 뿌려져 있다.


이리저리 쓰러져 있는 두 시체는 머리 단면을 드러내고 철푸덕 널브러져 있다. 피가 흘러 흘러 라드의 발 끝을 적신다. 그는 앞 좌석 소파를 밀어내며 소금부대의 중요물품이라는 것을 더 세게 끌어안는다.

차에서 뒤로 구르듯 벗어난 그는 다시 한번 상자를 고쳐 쥐고서 허둥지둥 일어난다. 칼린은 그저 차에서 그런 그를 지켜보고 있다.


"아직 소포는 나에게 있어."
라드의 이마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억지로 멈춘 차량때문에 다친 것이었다. 이세계 최초의 교통사고 피해자가 된 것이었다.


"임무를 실패하고 싶지는 않겠지? 저쪽 주민들은 너네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는 지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최대한 몸의 밸런스를 유지하며, 저 멀리에서 다가오고 있는 다른 부대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더 가까이 오지 마! 부셔버릴 수 있다!"
악이 담긴 목소리. 달려오던 소금부대의 발걸음이 한순간 멈춘다. 라드는  상자를 더 세게 붙잡고 반대손으로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에테롬의 약속시간이 눈 앞이다. 조금만  도망치면 살 수 있다.

"저쪽 사람들 생활권이 달린 거라며... 내가 직접 저들에게 넘겨주도록 하지. 너넨 그냥 거기 서 있으라고."
"도망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오, 언제나 그랬듯이,  성공하지."
라드는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그리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몇  치다가, 원형으로 돌며 방향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걱정 말라고. 너네가 먼저 찾지 않는다면, 나도 너희들을 찾지 않겠어. 요나 그 년에게는 적당히 잡아 죽였다고 전해."
"하! 네가 들고 있는  뭔지는 알고 그러냐?"
"뭔지 몰라도 부술 수는 있거든."
륑게의 말에 그렇게 답하고서, 라드는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소금부대원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도 뽑은 검을 집어넣지 않는다.


"검 버려. 마지막 경고다. 혼자서는  죽는다고."
"... 라드. 넌 정말 배신자였던 거로구나."
도르베는 슬픈 듯 그렇게 말하고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부대원들이 산개하며 라드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 상자를 열어봐라."
라드는 펼쳐진 대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부대원들에게서 뒷걸음질 치며, 상자로 급하게 눈을 돌렸다. 처음 들었을 때도 생각했지만 이 상자, 역시 너무 가볍다. 그는 거리를 좁혀오는 소금부대원들과 상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라드는 될 대로 되라는 듯 상자에 힘차게 주먹을 꽂았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당황했구만, 저 새끼."
륑게가 조롱을 담은 목소리로 말한다. 라드는 그럴  없다는  바닥으로 아예 박스를 던져 본다. 박스의 한 면마다 하나씩 고정된 벽돌 6개. 그게 다였다. 그저 무게추 용으로 있는 벽돌 뿐이었다.


"... 라드'씨'. 소금부대는 이번에 그 어떤 임무도 하달 받지 않았습니다. 공식 석상에서 우리는 현재 각자 위치에서 대기중입니다."
허탈감에 무릎이 풀린다. 라드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부서진 상자 파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가. 에테롬의  뜻은 그거였나.

'그 화물속에 있는 것이 정말로 쓸모 있는 것이라면... 전 당신을 주저하지 않고 구하러 가겠습니다.'
그 돼지새끼, 내 한마디로 여기까지 예측해낸 건가.


"라드씨는 오늘 이 자리에서 '사고사' 하시는 겁니다."
칼린의 선포가, 무겁게 떨어진다.


#


라드는 가만히 황무지를 바라보았다. 멈춘 열차가 뿜어 대는 열기, 푸른 하늘, 모래빛 평야. 꿇려진 무릎에는 감각이 없다. 뭔가 더 생각해야 하는데. 뭐라도 떠올려야 하는데. 웃어야 하는데.

해가 점점 내려 앉는다. 곧 일몰이 시작되려 한다. 안돼. 다가오는 내일을 보고 싶다. 누님의 출산까지만 봐도 좋아. 그 아기에게 내 얼굴을 보일수만 있다면 그걸로 돼. 그 때는 더 욕심부리지 않을 것이다.

"영주님께서 건드려서는 안될 것을 건드려 이렇게 된 것이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저 무감정한 목소리. 뭐라고 하는 지 알아들을 수도 없는데, 주제에 가슴을 철렁 울려 댄다. 머리속이 녹는 기분이다. 식은땀이 목 뒤로 흐른다. 죽을 수 없어.


"... 려줘."
"뭐?"
"살려줘..."
이빨 틈새로 세어 나온 말에 라드 스스로도 깜짝 놀라 버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그가 가장 잘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벌어진 입이 멈추지 않았다. 커진 동공이 멈추지 않았다. 뜨거워진 숨이 토해져 나온다.

"누님... 누님이 임신했대. 내가 삼촌이 된다고... 지금은 죽을  없단 말이야..."
맙소사. 구질구질한 가족타령까지. 유언으로  만한 건 전부 내뱉어 대고 있군. 조금 더 똑똑한 수를 생각해내라. 살아야 되잖아.


"륑게!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그 조직을 없앤 것도 나다! 살려줘!"
륑게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릴로를 쳐다본다.

"릴로! 넌...  날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잖아! 살려고 한 짓이니까, 인정해  수도 있잖아! 우리 중에 깔끔하고 고상하기만 한 놈이 어디 있다고!"
녹는다. 머리속이, 생각이, 몸이, 뜨겁게 녹아 들어간다. 어지럽고 숨이차다.  앞이 번쩍거린다.


"갤러한! 우리 친구가 됐던  아니었나? 날 이렇게 죽게 내버려 둘 거야? 젠장, 핀이랑 소니아는 대체 어디야, 씨발!"
떨리는 눈으로 이곳 저곳을 휘저으며, 라드는 지금 인생에서 처음으로 패닉상태를 겪는 중이었다. 요나. 그년은 이런 내 모습이 보고 싶었는가. 그래서 그 사실을 말했구나. 죽일 생각이었으면서.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으면서.

"칼린! 네 상냥함! 상냥함을 보여다오! 나는 죽어도 되는 거냐? 네 위선적인 잣대로 나는 죽어도 되는 자식인 거냐?!"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시야 속으로, 부대원들이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라드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곱게  죽어...! 아니, 안 죽어! 난 살아남을 거야! 살아서 누님을 만날 꺼야!"
"그렇다면 기회를 주마."
"뭐?"
너무 자연스럽게 말을 건 것은 도르베였다. 다른 소금부대원들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도르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야 도르베, 무슨..."
"받아라, 라드."
그는 라드를 향해 걸쳐  검을 하나 던졌다. 라드는 엉겁결에 그걸 받아 들고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도르베를 쳐다보았다.

"... 이건?"
"선택지는 두개다. 그 검으로 자살하던가..."
도르베는 허리에 걸친 검을 꺼내 들고서, 주머니에서 나무 의지를 꺼내 손에 끼웠다.


"내 시체를 넘어가라."
"갑자기  지랄이야!"
"조용해라, 갤러한.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다."
그의 시선은 라드를 향해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라드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다가, 곧 검을 뽑아 들고서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겼다.

"... 내가 널 베면, 보내주는 건가?"
"내가 죽음에 가까울 정도로 다치면  같은  신경  여력이 없어지겠지."
"미친 새끼, 무슨 소리를..."
"다가오지 마라. 지금  싸움에 낀다면 전부 베어내겠다."
일갈하고서 도르베는 칼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칼린은 말없이 그런 도르베를 바라보다가, 곧 눈을 감고 근처 그루터기에 앉아 담배를 꺼내 들었다.


"도르베씨가 실패하면 제가 라드씨를 죽일 게요."
약간의 정적. 라드로서는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늘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도르베, 분명 강했지만, 어차피 풋내기다. 개떼들의 싸움을 따라잡지 못하는 도련님이다.


"... 후회하지 말라고."
아직 작다. 너무 작아서 최대한 머리를 들이 밀어야 하지만, 분명하게 숨구멍은 열렸다. 힘겹게 제정신을 잡고서, 라드는 웃었다.

#

몇번의 합이 지나고서, 라드는 조금 당황했다. 분명 도르베가 분노 때문에 그런 제안을 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감정에 치우친 자를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도르베는 기계처럼 정밀하게 합을 받아 치고 있었다. 그 뛰어난 실력을 가감없이 발휘해내고 있었다. 라드의 변칙적인 공격을 어느 정도 예상해 가며 제대로 따라잡는 중이었다.


벌써 5분을 넘게 싸우고 있었다. 라드의 이마에 상처는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이 대치상황을 이용해 슬슬 어떤 방식으로든 결착을 내야 했다. 그는 빠르게 상황을 읽고서 천천히 발을 옮겼다.

"도르베. 왜 나에게 이런 기회를  거지?"
그는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며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진짜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의도를 읽지 못하도록 던진 미끼였다.


도르베는 대답하지 않고 라드의 대칭점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의 눈은 아직도 차갑게 타오르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라드는 자신의 뒤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들키지 않게끔, 도르베에게 한번 더 말을 건다.

"설마 도련님이 기회를 줄 줄은 예상 못했거든. 아스타랑 친했으니까 말이지. 나만 그렇게 느꼈나?"
명백한 도발에도 도르베는 반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라드가 발을 멈추자 그저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양측 모두 움직이지 않는 대치상태에서, 라드는 조용히 주머니에 있던 조약돌을 망토 안쪽으로 띄워 뒀다. 그리고 도르베를 향해 웃었다.

"아무튼 고마워... 살아남게 된다면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태양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지."
도르베도 무표정하게 손을 움직인다. 마법을 준비하는 걸까, 그 손은 허리 근처로 내려가 있다.

"그러니까... 태양을 등지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라드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하고서 빠르게 망토를 벗어 던졌다. 붕 떠 오른 망토. 그리고 망토가 치워짐으로 도르베를 향해 직격으로 들어오는 태양빛. 지평선에 걸쳐진 그 빛은 한순간의 틈을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도르베가 뒷걸음질 친 것을 확인한 라드는 즉각 몸을 낮추고 그를 향해 달려들어갔다. 검을 잡고 조약돌을 날린다. 돌은 정강이에 맞춰내고, 시야를 놓친 도르베의 배를 찌르는 것이 목표였다. 어찌됐든 죽지는 않을 부상을 남기면, 버리기 힘들어질 테니까.

그의 몸이 도르베의 검간에 도달했을 때 였다.


도르베의 손이 빛나고 있었다.


"어?"
허리 근처에 있던 왼손을 높이 들어 올린 상태. 황금빛 의지가 태양빛을 반사하며 라드의 한 쪽뿐인 눈을 찔렀다. 본능이 그의 다리를 멈추게 만든다. 돌격 중에 큰 틈이 생긴다. 황급하게 뒷걸음질을 치지만, 이미 그는 도르베의 검간 안에 들어왔다.

"끝이다."
검이 라드를 향해 다가온다. 베는 것이 아닌 찌르기. 라드는 몸을 옆으로 돌리며 그 직선 공격을 피해보려 한다. 그러다가 곧 투명한 벽에 닿는다.


당황할 틈도 없었다. 도르베의 검이 중심을 잃은 라드의 몸 안을 헤집고 들어간다.

"... 네가 가르쳐준 그 속임수는... 언젠가 쓸 날이  거라고 생각했지."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며 검에서 손을 뗀다. 그리고 자신의 황금 의지를 빼내며 라드를 내려다본다.


"네가 졌다. 후회할 시간을 남겨주마."
라드는 자신에게 꽂힌 검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댄다. 피가 빠르게 흘러나온다. 비장에 맞은 것이었다.


그런가. 실패인가. 여기서 죽는 건가.


"난 네게 기회를 준  아니야. 아스타의 마침표는 직접 찍고 싶었을 뿐. 복수할 건 너 밖에 남지 않았었어."
도르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그는 그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고서 동료들을 향해 발을 옮겼다.

"고마웠다, 라드. 너를 동료라고 생각했었다."


#

라드는 천천히 눈을 끔뻑거리며 도르베가 꽂은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힘겹게 그것을 빼내고서, 그는 검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 앞이 돌고 있다. 출혈이 빠르다. 몇 걸음인가 더 걸은 그는 곧 앞으로 풀썩 넘어졌다. 그는 그 상태로 조금 기어서 바짝 메마른 나무에 등을 기대 앉았다.


죽는 건가. 피할 수 없는 자리가 되니 묘하게 침착해 진다. 그는 천천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소금부대원들을 바라본다.


"... 회복은... 시켜주지 않겠지."
륑게를 제외하면 다들 꽤나 침통한 표정이다. 저 새끼들,  돈 좀 벌겠군. 보험에 몇 생텀을 넣었더라. 조금 침착해지고 회상해보니 꽤 추태를 부렸다.

"... 마지막으로  말은 없나?"
갤러한이 라드에게 묻는다. 라드는 갤러한을 잠깐 올려다본다.


요나. 내가  짓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군. 나름 충실한 개로 활동했는데 말이지. 네가 갑자기 그렇게 흥분한 이유를  것도 같아.

그는 고개를 칼린에게로 돌린다. 그래. 너인가. 네가 그 원인이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머리는 점점  떠간다. 라드는 구멍 뚫린  위로 손을 얹고 고개를 들었다.

"갤러한...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
요나. 이번 게임은 네가 이겼다. 난  자리에서 누구도 찾지 않는 독사로서 죽는다.


"나한테?"
"그래... 가까이... 와봐."
처절하게도 살았다. 꿈틀대고 요동치며 바닥만을 기면서 살아왔고, 마지막에는  밑바닥에서 수렁을 헤엄칠 것이다.


"내 의안을 뽑아가라, 갤러한. 뒤쪽에 작은 마개가 달려있지. 코르크 따개로 열어서 안에 있는 쪽지를 읽어."
"...뭐?"
"그 쪽지의 내용을... 그 선생과 공유해. 퍼트리던가. 마음대로 해."
팔도 다리도 없는 무력한 뱀이다. 독기 하나로 여기까지 버티며 살아왔다. 무덤 하나 없이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요나, 네 목덜미를 물어 뜯어주지.


뱀의 독이란 건, 뱀이 죽는다고 없어지는  아니거든.

갤러한이 천천히 라드에게서 몸을 뗀다.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 너라면 분명 의안을 가져가겠지.


누님. 누님. 저는 이제 죽습니다. 라드는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한번도 사람같이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이 무덤에서 부터는 저를 하이드로만 봐주실 수는 없습니까. 누님과 그 남편, 그 아이에게 그저 무궁한 축복을 빕니다.


해가 지고 있습니다. 몸이 싸늘해 집니다. 누님은  죽음에 눈물 흘리실 건가요. 한방울이라도 흘려 주신다면 좋으련만.

"그럼... 지옥에서 다시 보자구."
유언은 이거면 되지. 멋들어진 말을 남길만한 생은 아니었거든.


#


6분. 해가 떨어져 으슬으슬하게 추워졌다. 남색의 하늘이 지평선 끝까지 뻗어 바람소리만 청량하게 흘러 나간다. 밝은 별들은 이미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동물 시체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이 황무지에, 방금 독사 하나가 죽었다. 그 눈은 죽어서도 감기지 않았다.

소금부대의 휴가 기간 중 비극적인 상황 발생. 부대원 라드, 실족사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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