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7화 〉독사 (137/164)



〈 137화 〉독사

누님이나 나나 오랜만에 보는 달빛도 너무 밝아서 눈을 한껏 찌푸리고 있었고, 누님은 이미 진이 다 빠져서  걸음만 걸으면 헐떡대는데. 그 상태로도 열심히 달렸지. 비틀거리면서 우리를 잡으려는 손처럼 뻗은 가지들 사이를 헤치면서.

멀리 가지는 못했어. 분명 눈에 훤했던 숲길이었는데.  상황이 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고. 마구잡이로 달리던 중에 지친 누나가 기절했고, 난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아서 울면서 아무나 도와 달라고 소리 질러댔지. 우물속으로 돌아가도 누님이 살아있으면 좋겠다 생각했거든. 멍청하긴...

곧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찾아왔지. 그 놈들 대장이었어. 얼굴은  적 없었지만, 목소리로 눈치챘지. 우물 밖에서  목소리가 들리면  것들이 침을 그만 뱉고는 했거든.

나더러 묻더라. 너가 보초 서던 새끼들 죽였냐고. 사실 대답은 필요 없었을 꺼야. 아무리 밤풍경이 어두웠어도, 내 피냄새는  숨겼거든. 일단 넙죽 엎드렸지. 그 때는 그것 밖에 할  몰랐어.

그러니까  대장이 날 세우고서 말하던데. 10살 전에 사람 죽이는 놈들은 천재라고.누이를 살려주겠다고. 키워주겠다고.

#

영주실은 시끄러웠다. 개판 난 내부를 고치기 위해 시종들과 인부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요나는 그녀의 방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영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요나는 그 소리에 펜을 멈추고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렸다.

"누구?"
'오로아나 상회에서 오셨답니다.'
"... 아, 그건가.  늦었군."
'어쩔까요.'
"객실에서 기다리라고 해 둬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펜을 놓고 겉옷을 챙기기 위해 일어났다.

"지금 나가보지."

#

객실에는 대표가 조금 불쾌한 듯 눈을 감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요나는 시종들에게 방을 떠나라고 신호를 준 뒤 테이블에 다가갔다. 테이블 옆에는 하얀색 강보가 하나 놓아져 있었다.

"조금 늦었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강보를 테이블 위로 끌어 올렸다. 대표는  모습에 조금  눈가를 찌푸렸다. 요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선물상자라도 되는 듯 강보를 열어 보았다. 불쾌한 냄새가 빠르게 객실 내로 퍼졌다.

"... 하지만 확실하네요."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얌전히 눈을 감고 있는 머리들. 하나는 언젠가 연락했었던 전화국의 직원. 둘은 칼타코에 갔었던 대사들. 그리고-

"... 요청하지 않은 머리가 들어있습니다만."
"... 전화국 직원분은 가족과 같이 살고 계셨더군요."
"아하."
노부부의 머리통과, 아직 앳된 티를 다 벗지 못한 청년의 머리가 하나. 흰색 강보 안에 들어있는 수급은 그렇게 총 6개였다.

"... 뭐, 어쩔 수 없으셨겠죠."
요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강보를 다시 덮어 테이블에서 내려 놓았다. 그리고  말없이 손수건으로 손을  번인가 닦아낸 후, 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걱정 마시죠. 보수는 추가된 세명분까지 확실하게 지불하겠습니다."
"... 부디."
대표는 딱히 비위가 약한 편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저 강보를 여기까지 직접 옮긴 것도 그이다. 하지만 식탁에서 저런 것을 확인하며 미소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맛가지는 않았다.

'... 역시 적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그는 그렇게 다시한번 다짐하고서, 최대한 초연하게 홍차를 들이마셨다.

#

"이봐, 이리하."
이리하는 화물칸 근처에서 자신을 불러 대는 라드를 보았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거리를 조금 두고 그에게 다가갔다.

"뭐야?"
"꽤 거리를 두는 군. 비밀이야기가 하고 싶은데 말이야."
"내가 널 돕는 일은 없을 거야."
"... 너나 나나 똑같은 배신자인데 말이지. 내가 죽으면서 뭔가 발설할 거라는 생각은  해봤나?"
"난 소금부대를 방해하기 위해 들어온 게 아니야. 오히려 구호라는 사명을 위해 들어온 거지. 칼타코에서도 교단은 소금부대와 접전을 반대했었어."
라드는 그 말에 천천히 웃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결과는 어땠지?"
"좋지 않았지. 원한다면 말하고 다녀도 좋아. 그런데 누가 믿을까? 증거는 있어?"
 말에 그는 재미가 없다는  얼굴을 조금 익살스럽게 구기고서,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굴리기 시작했다.

"똑똑해 졌군.  교주가 대처법이라도 알려줬나?"
"이정도는 나도 생각할 수 있거든. 할 말이 끝났다면..."
"기다려. 그런 말 하려던 게 아니니까. 그냥 너네가 믿는 그거. 거기에 대해 궁금한 게 생겨서 그래."
무시하고 떠나려던 이리하는 그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교리에 따라, 신앙에 관여된 질문이라면 신도는 그 답을 피해서는 안되었다. 그녀는 성가신  고개를 돌리고 눈을 조금 찡그렸다.

"말해."
"칼타코에서 말이지... 너네들이 말하고 다니는 걸 들었었단 말이야. 거기서 꽤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었어. 분명 그런 내용이었지. '믿음이 네 죄를 사하리라'."
이리하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불쾌해진 듯 눈가를 한껏 찌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드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계속 해봐라."
"별건 아니고 말이야. 한번 죽을 고비 겪고 나니까 나한테도 막... 느껴지데? 너네가 말하는  신님."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굴리던 금화를 슥 숨기는 듯 싶더니, 곧 손 틈에서 작은 역십자 조각을 꺼냈다.

"이걸로 내 죄는 사해진 건가?"
이리하는 조용히 그 역십자를 바라보다가, 가소로운 듯 팔짱을 끼고 라드를 내려다보았다.

"네 죄를 반성하고 있는 거야?"
"물론. 진심으로 반성중이라고..."
"그렇다면 벌을 감수해."
"뭐?"
"해석이 틀렸어. 네가 말한 구절은 그런 뜻이 아니야.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 자신의 죄를 이해하고 반성하는 데에서 죄가 사라진다는 거지. 그리고 반성한다면 마땅하게 벌을 받고 시작해야 하는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라드가 들고 있는 역십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믿음이 수단이 된다면 그것은 거짓됨이라'. 자신에게 부여된 벌을 피하려는 자에게 구원이 있을리가. 40분 후에 정거장에 도착해. 종점까지도 오늘 저녁이면 도착할 꺼고.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
그 역십자를 빼앗은 그녀는, 곧 악력으로 그걸 쥐어서 찌그러트렸다. 그리고 라드 근처로 대충 떨군 후 등을 돌렸다.

"기도는  줄게."
 듣기 싫다는 듯 이리하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가 자리를 떴다. 라드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할, 역시 안 먹히나."
그는 그 자리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느긋하게 피워 대다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천천히 일어났다.

"... 뭐, 구차하게 붙잡을 시간은 나도 없지."

#

"조금 똑바로 좀 하라고, 새끼야... 이 열차에서 실수하면 우리 전부 나가리 되는 거라고. 알지?"
"넵!"
"알면 씨발아 잘해야지!"
선임의 반짝거리는 장화가 다시 한번 행크의 배에 꽂혀 들어온다. 그는 잠깐 배를 부여잡고 자리에 쓰러졌다.

"곧 정거장 도착이니까,  토한  닦고 한바퀴 돌고 와. 씨발, 어쩌다 폐급 새끼가 들어와서..."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뜨는 선임의 등을 보면서, 행크는 천천히 벽에 몸을 문대며 일어났다. 몇번인가 셔츠로 입가를 닦아낸 그는 잠시 자신의 비참한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 그런 걸 곱씹고 있으면 더 맞게 될 것이었다. 그는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의자에 걸어 뒀던 자신의 직원복을 다시 걸쳤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숨기기 위해  번인가 제자리 걸음을  본  창고를 나섰다.

평소에도 아니꼬운 자신의 선배들이었지만, 국가 위인이 같이 타니 신경이 더더욱 곤두섰다. 좆같지만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도 떨어지면 그때는 정말 무직이 된다. 마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소꼽친구를 생각하며 그는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그 때였다.

'거기 누구 없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건조한 목소리에, 행크는 고개를 돌렸다. 소리는 화장실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나? 아무도 없나?'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신 가요?"
 목소리를 안다. 선배들이 목소리까지 외우라고  지랄을 했으니, 이제는 몸이 기억하는 수준이다.  삭막한 목소리는 분명 라드라는 사람의 것이다.

'어. 좀 도와 주쇼. 조금 부끄러운 일이 생겼어.'
"무슨 일이신가요?"
'그... 여기 변기 말이오. 밑바닥이 안 열리는데? 내가 고장 낸 건가?'
그 말에 행크는 자신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선배들에게 걸렸으면 또 서비스 부족이니 뭐니 하면서 맞았을 것이다.

열차의 변기는 밑바닥이 뚫린 양변기이다.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스위치를 당기면 밑바닥이 열리도록 되어 있는데, 생각보다 고장이 잦고 비위생적인 방식이라 현재 그런 방식으로 운용되는 변기는  화물열차 뿐이었다.

"... 봐 드리겠습니다.  좀 열어 주시겠어요?"
'아, 이거 부끄럽군. 부탁합니다.'
그런 목소리와 함께 화장실의 문이 열리며, 피폐하게 생긴 남자가 목을 들이 내민다.

"들어오시지."
행크가 화장실로 들어가자, 라드가 문을 닫는다. 냄새가 심해서 문을 열어 두라고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배출해낸 것을 모두에게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으리라. 그는 눈을 조금 찌푸리며 냄새의 근원이 되는 변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뚜껑이 깔끔하게 열려 빠르게 지나가고 있는 열차 밑 풍경을 보았다.

"어?"
그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행크의 바지 주머니에서 열차 연결기의 열쇠를 찾은 라드는 그대로 행크를 변기에 밀어 넣었다. 거꾸로 상반신이 껴서 버둥거리던 그의 다리는, 한번  아래로 눌리자 고기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뻣뻣해졌다. 라드는 그 시체를 그대로 변기에 끼워 두고서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빌려갈게."
라드는 빙그레 웃고서 화장실 문을 닫은 뒤, 안쪽 잠금 장치에 걸어  밧줄을 뽑아냈다. 그리고 조용히 대각선으로 둘러메고 있던 베낭에서 돌돌 말려 있는 종이를 꺼냈다.

"이게 맞아야 할 거다."
열차의 내부도. 왕도의 주술사에게 자신의 모든 소지품을 넘기고 힘들게 구한 것이었다. 그는  내부도를 보며 옆에 있는 배관을 확인해 보았다.

"... 들어 가려나."
그리고 적당히 자신의 몸을 갖다   후, 어찌저찌 들어가는 것을 확인해 보고 먼지투성이인 굴에 몸을 밀어 넣었다.

#

열차의 조종수는 생각보다 꽤 바쁘다. 특히 가격 절감을 위해 마도 방식만으로 운영되지 않는 이 열차는 할 일이 많았다. 그가 조금 쉬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의 수입에는 조금 과분한 은제 파이프담배를 꺼냈을 때였다.

파이프담배에, 자신의 뒤로 다가오는 괴한이 비쳐 보였다.

"씨ㅍ-"
라드는 그녀가 말을 끝낼 틈을 주지 않았다. 마치 돼지를 잡듯, 그는 기계적으로 기관사의 머리를 붙잡고 무릎을 차 뒤로 눕혔다. 그녀의 목을 붙잡은 상태로, 라드는 웃으며 그녀를 내려보고서 그녀의 파이프담배를 조심스럽게 집어갔다.

"안녕."
기관사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어갔다. 재투성이에 검댕을 가득 묻히고서 어디선가 튀어나온 남자.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을 자신의 파이프담배로 죽이려 하고 있었다.

라드가 담배의 스템 버튼 부분으로 그녀를 찍어 죽이려 할  였다.

"살려주세요!"

목을 붙잡히고도 힘차게 터져 나오는 목소리.  한마디가 라드의 가슴을 크게 요동치게만들었다. 지금까지 몇  번은 들었던 말. 물론 들어준 적은 별로 없었던 말.

"살려주세요! 자식이! 자식이 기다리고 있어요!"
라드의 망설임을 읽었던 걸까. 그 기관사는 눈물까지 흘리며 애원하기 시작한다. 라드는 자신의 손 끝이 떨리는 것을 느낀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어떤 행위로 이뤄지는 것인가. 그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저는,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하고 싶은 거 전부 하세요!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제발!"
공포에 질려 커다래진 눈. 그 눈에 비치는 것은, 추잡한 자신의 모습. 입가에 계획대로 일이 진행될 때 짓던 미소를 걸친 살인자의 초상.

라드의 높이 올랐던 손이 천천히 내려간다. 기관사의 눈에 희망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녀의 몸이 천천히 안도감에 무너지는 것이 라드에게는 느껴진다. 라드는 멍하게  눈을 쳐다보다가, 나즈막하게 말한다.

"미안해."
"네?"
그리고 내려간 파이프담배를 그녀의 부드러운 목젖에 꽂는다. 한번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곧 파이프담배의 구멍으로 피가 넘쳐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라드는 그걸  깊숙이 밀어 넣으며 한번 더, 뚜렷하게 말한다.

"미안해."
어쩌면 진심을 담아보는 것은 처음인  말. 절망감으로 젖어 들어가는 그 얼굴을 천천히 내리며, 라드는 조용히 기관사의 시체를 완전하게 눕혔다. 그리고 죽어가는 그녀를 두고 조종기에 다가갔다.

그는 구원받을 수 없다. 언제나 그랬듯, 그건 그가 제일 잘 아는 사실이다.

열차의 속도를 최대로 높이고서 브레이크를 부순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 멈추지 않고 피를 흘려대는 기관사의 입에 한  물려 준다.

"벌은 지옥에서 받지."
위대하신 디알테스타만 가라사대, 나쁜 놈은 죽어서 지옥이란 곳을 간단다. 거기서 영겁동안 고통받는다고 한다.

그럼 난 최대한 개새끼처럼 오래 살면서 버텨주마.

#

"... 열차."
칼린이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러고서 창 밖을 한번 보다가, 곧 자신이 느낀 위화감을 눈치채고 다시 입을 열었다.

"빨라지지 않았나요?"
"응? 몰라. 빨리 가고 싶은가 보지."
륑게가 별 일 아니라는  말했다. 그러나 칼린은 여전히 불안했다. 갤러한도 그 불안함을 느꼈다.

"이거 뭔가 심상치가 않은데. 안내방송 있었냐?"
"난 못 들었어."
릴로가 대답한다. 약간의 정적 후, 그들은 곧 모두 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 나랑 륑게, 릴로는 기관실로 간다. 칼린이랑 도르베는 화물실 쪽으로 가면서 라드 찾아봐. 도르베, 자리 지켜줘."
갤러한의 말에 인원이 빠르게 분산되었다. 자리에 남은 도르베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우연히 창 밖에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것을 발견하고 눈가를 찡그렸다.

"저건..."
열차를 따라서, 뭔가가 빠른 속도로 같이 이동하고 있었다.

"잠깐! 뭔가 벌어지고 있다! 창 밖을 봐라!"
도르베의 외침은 아직 멀리 가지 않은 동료 전원에게 닿았다. 창 밖을 본 인원 중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이 뭔지 눈치챈 것은 칼린이었다.

"저건...!"
그에게 가장 익숙한 것. 원래 자신의 세계에서 박물관에서나 보던 것. 사륜 바퀴를 달고 황무지를 거침없이 달리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자동차였다.

"숙여!"
이리하가 그렇게 외치고서 칼린의 머리를 잡고 누른다. 창이 깨지며돌이날아들어 온다. 전원 무기를 뽑고 교전에 준비한다.

"저쪽은 슬링으로 무장한 사람이 둘! 실력이 좋아!"
"빨리 화물칸으로 뛰어! 달려!"
이리하와 칼린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곧 화물칸 앞쪽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아니, 멈출  밖에 없었다.

"여."
라드가 화물칸 문 앞에 걸터앉아서 손을 들어 올린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열차 연결기의 열쇠였다.

화물칸이 그들이 있는 열차에서 떨어져 멀어지기 시작한다.

"라아아아드으으으!!"
칼린이 울부짖으며 뛰어넘어가려는 것을 이리하가 붙잡는다. 라드는 그저 그런 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다가, 곧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화물칸에 들어가 전달하려던 물품상자를 들었다.

"생각보다 가벼운 걸."
웃으며 그 화물을 팔을 둘러 허리에 끼우고, 그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자동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직 관성이 남아 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화물칸에 자동차가 가까이 붙는다.

"이런 물건은 어떻게 손에 넣은 거야!"
"생각보다  다루는 걸?! 너 가져!"
"진짜?! 야호!"
유스티스가 소리를 지르며 끼고 있던 고글을 위로 올린다. 그리고 라드에 가깝게 차의 속도를 맞춘다. 라드는 꽤 커다란 상자를 들고서 엉거주춤하게 차의 뒷좌석으로 점프해 들어간다.

"형씨가 라드지?!"
"반갑소! 댁이 유스티스의 도우미?!"
조수석에 앉은 것은 검은 칠이 되어 있는 안경을 쓴 금발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그 안경을 들어올리고서 라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반갑다! 우리한테 몸 대준다며!"
날카로운 눈. 그는 악수하려는 듯 손을 뻗나 싶더니, 그대로 라드의 가슴을 향해 손을 댔다. 그러고서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살 찌워 둬! 운동 접고! 이대로면 맛이 없거든!"
라드는 시끄럽게 울리는 엔진 속에서, 자신이 어디로 가든 나락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그러나 이것도 뭐, 그는 무효 시킬 수 있다. 시간만  생기면 다시 개새끼처럼 살아남을 수 있다.

"참고하지!"
열차는 계속 달리고 있고, 라드의 옆에는 소금부대의 중요 물품이 있다. 탈출에 성공했다.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그 외로워 보였던 황무지가 지금은 기회의 광야로 보인다. 열차가 뿜어 대는 매연을 맞으며, 라드는 웃었다.

"자 그럼- 전 정류장으로 가면 되지?!"
"부탁한다!"
차의 방향을 꺾으려는 유스티스를 향해 라드가 그렇게 답 할 동안, 조수석에 앉았던 여자가 선글라스를 다시 고쳐 쓰며 말했다.

"야 근데 저 매연 사이로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뭐?"
불안한 직감. 라드는 어느새 태양 빛을 먹구름처럼 가리는 매연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린다. 그녀의 말 대로, 진짜 매연 사이로 흰 연기가 섞여 나오고 있었다.

라드의 체감속도가 천천히 느려진다. 흰 연기는 서서히 뭉친다. 천천히 뭉치며 형체를 갖기 시작한다. 검정색 정장. 찬란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붉고 투명한장검. 그 장검이 유스티스의  턱을 깨끗하게 날려버린다. 조수석에 앉은 여성의 이마 위를 깔끔히 잘라낸다.

태양이 점점 눈 앞의 확실해지는 인영에 가려진다. 유스티스와 그 도우미의 시체들위로 그것이 안착한다. 라드를 내려다본다.

"...라드."
언젠가 들었던, 그게 자신을 향하게  날이 올 줄은 몰랐던 차가운 목소리. 라드의 몸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그래.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 것들. 인지를 벗어나서 절망을 안겨주는 것들. 그걸 뭐라고 부르더라.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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