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6화 〉독사 (136/164)



〈 136화 〉독사

누님의 헌신은 이상했어. 다들 그걸 순수한 선의라고 불렀지만, 난 그걸 광기라고 생각했지. 관계라는 건 결국 형평성에서 시작되거든. 이정도로 은헤를 받은 내가 어떻게 그걸 전부 갚아내겠어.


내말은... 상상이 가? 13살짜리가 9살 짜리를 등에 짊어지고 우물을 기어 올라갔다니까. 그건, 그건 신체능력으로 되는 선이 아니야. 우리 누님은 아직 마나 운용도 못하던 때였으니까. 그냥 깡과 악바리로 해낸 거라고.

다 뽑혀버린 손톱에 아파할 여유조차 없었지. 나오자 마자 우리 누님이 본 건  씹새끼들 이었거든. 누님에게는 비명지를 틈조차 없었어.

그래도 어찌 저찌 탈출은 성공했지. 우리 누님의 마음에 드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말야, 나한테는 보였단 말이야. 누님한테 정신이 팔려서, 비쩍 마른 진흙 투성이 애새끼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는  건달패 놈들의 뒤통수. 그리고 달밤에 빛나고 있는 집기 좋은 망치.

결국 건달패라는 건 그렇지. 걔들은 방심하거든. 틈만 이용하면 두 놈 정도는 애새끼라도 죽일  있어.

#

간단한 운송임무라서 그런 걸까. 이번 임무는 인파조차 모이지 않았다. 요나는 칼린이 탄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 까지 확인하고 나서 발걸음을 돌려 영주실로 향했다.

반 정도 남아있는 위스키. 그 독한 향을 즐기며 그녀는 오랜만에 시가담배를 꺼내 들었다. 계획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잘 풀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조커카드. 그러나 그것 마저도 가만히 있으면 그녀를 향해 찾아올 것이었다.

'요나'
바로 지금처럼.

요나는 영주실 뒤에서 들려오는 사포에 갈린 듯한 저음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다. 그리고 시가의 끝을 잘라내고 불을 붙이며 검을 뽑는다.


"누구냐."
'알고 있을 텐데.'
그 저음의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고서  익살스럽게 노크를 해 온다. 똑  똑똑똑. 특유의 리듬을 살려 넣은 노크소리. 보통 문 너머에서 이 노크소리를 들은 자들은 죽었다. 요나는 테이블에서 살짝 옆으로 빠지며 연기를 빨아들였다.

"내가 아는 자라면 그냥 들어오시지 그래."
'... 거기서 평생 버틸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 '초대'해주는 게 좋을  같은데 말이지.'
영주실의 보안을 위한, 특수 중첩되어 있는 합금 문. 그 거대한 문 뒤로 뭔가의 존재감이 무겁게 다가온다. 요나는 긴장감을 지우기 위해 이를 보이며 도발적으로 웃었다.


"그렇다면 불러주지. 들어와라, 제리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경직 시키고 문을 바라 보았다. 정적. 그저 정적만이 흐른다. 그리고 곧 두꺼운 문이 세차게 요나를 향해 날아온다.

요나는 의자에서 훌쩍 뛰어오르며 그 문을 피해냈다. 뿌옇게 올라오는 먼지속에서 거대한 인영이 조금씩 가까이 온다.


"요나. 꽤 오랜만이군. 안그래?"
"난 조금  조용한 만남을 선호한 다만."
"농담도 잘해. 요즘 최고로 시끄러우신 양반이 말이야."
190을 넘기는 키. 거대한 체구. 부랑자같은 옷차림에, 외팔이. 무장조차 하지 않고 8영주의 영주실을 흙발로 범한 것은 제리코였다. 그는 무두쇠같은 발걸음을 천천히 요나를 향해 옮겼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면 믿어  텐가?"
"영광이긴 한데, 간식은 필요 없어."
요나는 검을 더 굳세게 고쳐 쥐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그를 향해 통하지 않을 제안을 보냈다.

"일단 대화를 좀-"
그러나 말을 채 끝마칠 수도 없었다. 한순간 요나의 시야에서 사라진 그는 바로 다음 순간 요나의 앞에서 발을 뻗고 있었다. 다급하게 검으로 대응한 요나였지만,  그의 발길질에 검과 함께 날아가 영주실 벽에 쳐 박혔다.


"카악-"
그녀의 폐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한껏 숨을 토해내던 그녀에게 다가간 제리코는 그대로 다시 발길질해 요나의 검을 부셔버렸다. 그리고 검붉은 피를 뱉어 내기 시작한 요나의 얼굴을 붙잡고 그대로 들어올렸다.

"큭... 컥... 제리- 제리코... 말을 들어라..."
"미쉘이 죽었지. 넌 욕심이 과하고. 행동으로 드러난단 말이야. 네가 이제 윌레인에 도움될 것 같지는 않군."
왼팔 하나만으로 요나의 목을 잡고 들어올린 그는 짐승을 연상시키는 눈으로 요나를 노려보았다.

"넌 그릇이 못 돼. 경고는 지난번에 끝났지. 오늘은 시행하러 온 거야."
"기... 다려... 제안이 있어...!"
"문답무용. 넌 지금 죽는다."
그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요나는 흐려져 가는 정신 속에서 필사적으로 단어를 조합해 내며 그의 손목을 붙잡는다.

"... 다... 임상회... 무너트릴 계획이..."
가만히 요나의 눈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바라보던 제리코는,  무신경하게 손의 힘을 풀었다. 잠깐 기절해 자리에 쓰러지듯 무너진 요나의 배를 가볍게 차고서, 제리코는 그녀의 머리를 잡아 들었다.

"이야기는 한번 들어보지."


#

폐허가 된 영주실 안에서, 바들바들 떨며 시종 하나가 둘 사이에 간식을 두고 간다. 그리고 곧 도망치듯 뚫려버린 문을 향해 달려갔다. 제리코는 그런 시종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쥐어 부수듯 쿠키를 집아 먹었다. 그리고 요나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뭐해. 안 먹어?"
"쿠키는 입에 맞나?"
"조금 짜. 대화주제 돌리지 말고. 그러다 죽어, 너."
요나는 그 말에 자신의 목을 어루만진다. 방금 제리코는 분명히 자신을 죽이려 했었다.  발길질도 검으로 막지 않았다면 내장파열로 죽었을 것이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당황하고 만다.


"... 다임상회를 무너트리려 하고 있다."
"누가 그걸 모르냐?"
"그런 초대형 상회가 갑자기 사라지면 곤란하니까, 너조차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다임상회는 남겨두면서 부패한 상회를 개혁시킬 계획이 있다."
제리코는 그 말에 과자를 집어먹던 손을 멈추고 손가락을 햝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지를 한번 햝은 후 입맛을 다셨다.

"지껄여."
"네 도움이 필요한 계획이다만..."

-

"흠..."
요나가 계획에 대해 전부 설명하자, 제리코는 가볍게 목을 풀어보고서 생각했다. 그리고 곧 요나의 술병을 들어 술을  모금 들이켰다.

"약속하지. 내가 말한대로만 하면 가능하다."
"꽤 치밀하게 준비했구만. 뭐, 나쁘지 않아. 흠잡을 데 없어. 합격점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요나를 향해 손가락을 가위모양으로 내밀었다. 요나는 그 손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곧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담배 한 개피를 꺼내 그에게 건내 주었다.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릇을 보여줄  있겠군. 지금 네 부적격사유를 전부 충족시키게 되니까 말야."
"다짜고짜 날 죽이러  자에게 듣기에는 과분한 칭찬이로군."
"근데 마음에 안 드는 것도 하나 있네?"
그는 성냥을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고서 성냥불을 손으로 쥐어 껐다. 그리고 담배를 들이마시며 요나를 내려다보았다.


"네 계획.  처음부터 내가 끼는 게 상정돼 있냐?"
그의 손이 조용하게 테이블 위로 올라간다. 뿌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손 모양 그대로 눌리기 시작한다.

"나도 꼭두각시로 써 볼라고?"
신경질적으로  안에 퍼져 나가는 나무가 압축되는 소리. 제리코와 요나는 그 소리 속에서 길게 눈을 마주했다. 곧 요나가 입을 열었다.

"아. 그래."
가벼울 정도로 쉽게 나온 인정. 제리코는 눈가를 약간 찌푸리며 요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요나의 표정은 눈썹 끝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태연자약하게 피던 시가담배의 끝을 잘라내며 제리코를 향해 웃었다.


"그래서. 거절할 텐가?"
정적 속에서, 먼저 포기한 것은 제리코였다. 그는 테이블에서 손을 치우며 흥을 잃은 듯 눈가를 돌렸다.


"나 참. 건방져 져서는..."
"유능해진 거지."
"같은 의미다, 멍청아."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난장판난 영주실에서 거칠게 발을 옮겼다.

"갑자기 이렇게 들쑤시고 다니는 이유는 뭔데?"
"사랑이다."
"하! 염병도..."
제리코는 웃으며 요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곧 눈을 크게 뜨며 조금 뒷걸음질쳤다.


"씨발, 왜 진짜지?"
"네가 뭘 알겠느냐, 야만인 같으니."
"진짜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지랄을 하고 다닌다고? 미친 거냐?"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곧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렸다.

"아, 썅. 그럴 수도 있지."
그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요나는 혼자 남은 방에서 난장판을 바라보며 시가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리고 술잔에 위스키를 반 잔정도 따라낸  담배연기를 들이마셨다. 생각보다 적은 피해량. 나쁘지 않은 결과다. 이걸로 완성이다.

"미친건가..."
요나는 제리코가 남기고 간 질문에 대해 자문해 본다. 그리고 시가를 몇 번인가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다가 웃었다.


"나쁘지는 않군."
이것이 비정상적인 것이든, 미친 것이든, 어찌되든 상관없다.  불타오르는 감정이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 되어 주고 있다. 그녀의 인생에서 이정도로 격렬한 감정을 가져 본 적이 있던가. 더욱 세차게 불타올라 그 몸을 태워 버려도 미련은 남지 않는다.


그녀는 눈을 감고 위스키의 잔향을 느끼며 콧노래를 부른다. 망가진 영주실 안에서 그저 불어오는 바람을 즐긴다. 눈을 감으면 칼린이 선명하게 보인다. 감긴 눈 뒤로 보이는 그녀만의 풍경. 그것을 잠시 즐기던 요나는 곧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가늘게 눈을 떴다.

"또 뭔가 도울 거라도?"
"지랄을 해라, 아주... 쿠키나  줘, 가면서 먹을라니까. 먹다 보니 중독되네."


#


출발한  나흘째. 부대원 전원 열차에 탑승을 끝마친 상태였다. 내부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적어도 라드는 그렇게 느꼈다.


"식사가 나왔습니다."
열차 안에는 부대원들과 직원들 뿐. 화물은 이미 화물칸에 적치되어 있다. 급조된 승객실 안에서, 그들은 조용히 안내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먹냐, 라드?"
륑게가 객실칸에서 나가며 라드를 향해 웃는다.


"이해가 안 가네. 여기 음식 맛있는데 말이지."
"...  내가 가져온 거로만 먹겠다고 했을 텐데."
"그냥 권유야. 싫으면 뭐. 어쩔 수 없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라드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 나간다. 라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베낭에서 음식을 찾아 꺼낸다. 통으로 딱딱하게 굳은 육포. 칼로 그것을 얇게 베어내고서 포도주와 함께 억지로 씹어 넘긴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던 도르베가 천천히 라드에게 다가왔다.


"제대로 음식을 먹어라."
"... 별로  땡겨서 그러는 건데 말이지. 내 자유 아닌가?"
"왜. 독이라도 들어있을 것 같은가?"
"짐작가는 거라도 있나봐, 도련님?"
육포를 씹으며 웃는 라드를 내려보던 도르베는,  식당칸으로 발을 옮겼다. 잠시 뒤 그는 쟁반 하나와 함께 객실칸으로 돌아왔다.

도르베는 그 쟁반에 담긴 음식을 한 입 집어먹었다. 그리고 라드의 옆에 그 쟁반을 내려놓고서 말했다.

"먹어라."
"... 왜?"
"컨디션을 유지해."
그의 시선은 처음 만났을 때 보다도 더 한기를 띄고 있었다. 먹지 않으면 지금 베어버리겠다는 의지까지 담겨 있는 듯 했다. 라드는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숟가락을 들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맛있었다.


도르베는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가 자리를 비켰다. 라드는 그가 떠난 것을 확인하고서 숟가락을 잠시 내려놓고 노트를 꺼내 들었다.

"다다음 정류장이 종점..."
화물이 기밀 유지가 필요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면, 적어도 이 화물이 전달되기 전에 라드를 죽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드가 예상하는 저들의 공격 타이밍은, 본 열차의 종점역, 케니스에 도착했을 때. 아마 목격자가 없는 황야에서 자신을 처리하고 일을 끝낼 생각이리라.


라드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황야. 초라하게  있는 선인장들. 누런빛 평지. 최소한의 관리만이 이뤄지고 있는 버려진 땅. 이 곳으로는 범죄자조차 오지 않는다. 그저 좌천된 공무원들이 남은 여생을 버리는 곳이다.

이 황무지에 회전초 마냥 버려져 있는 자신의 시체를 상상해 본다. 이젠 두렵다. 언제나 상정하던 것이 이제 와서 무섭다.

"... 아무 일 없을 꺼야."
그는 입가를 억지로 들어 올린다. 할  있으니까. 살아남을 계획은  있으니까. 조심할 것은 단 하나.


그 괴물새끼만 조심하면 돼.


#


칼린은 식사를 끝마치고 화물칸으로 가서 창문을 열었다. 열차의 경적소리가 시끄러웠기에, 객실칸에서 창문을 열면 다른 동료들에게 민폐가 갈 것 같아 그런 것이었다.


그는 요즘 머리속이 뿌연  같아 아무래도 생각을 잘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황 하나하나에 총명함을 기울이기에는 너무 지쳐버린 상태였다. 꾸겨진 담배를 들고서, 그는 창 밖의 풍경에 그저 집중했다.


옛날에 보던 서부극 배경이 이랬었지. 그저 고요하고 삭막한 풍경. 주인공이 보안관인  보다는 무법자인 것을 더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나름대로 세상이 밝기만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주인공을 좋아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유치한 보안관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그런 그에게 다가온 것은 이리하였다. 칼린은 살짝 시선만 돌려 그녀를 쳐다보고서 말했다.

"시끄러울까 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적소리가 또 한번 길게 울려 퍼진다. 이리하는 칼린의 옆으로 다가가 창을 열었다. 이곳도 밤공기는 꽤나 쌀쌀했다.

"칼린."
"네."
"네 잘못이 아니야."
칼린은 살짝 고개를 돌려 이리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킨 상태로 바람에 머리를 휘날리고 있었다. 은발은 마치 달빛처럼 광채를 뿜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너를 봐."
천천히 이리하가 고개를 돌려 칼린을 바라본다. 그녀의 머릿결 만큼이나 빛나는 은빛 눈이 슬픈듯 일그러져 있다.


"이미  망가지고 상처투성이가 됐는데..."
"전 다치지 않았어요."
"넌 다쳤어. 다쳐왔고. 그렇다고 그걸 전부 짊어지고   있을 정도로 강한 사람조차 아니야."
"무슨-"
이리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칼린을 향해 다가간다. 그리고 칼린의 가면을 잡는다.

"잠깐만요, 지금 벗기지 마-"
"가만히 있어."
조금 억지로 칼린의 가면을 벗겨낸다. 이리하는 칼린의  얼굴을 보고서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 트린다.

"왜... 왜 무리해서 이번 임무에 참가한 거니?"
"... 이리하?"
"너도 괴로웠을 텐데... 아니, 분명 누구보다도 괴로운 상황일 텐데..."
칼린은 당황하며 이리하를 잡는다. 눈을 끔뻑거리며, 그는 이리하에게 눈을 맞춘다.


"전 괜찮아요. 이리하. 제가 라드를 용서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게 아니야...  라드를 용서하지 못해서 여기 참가한  아니야..."
젖은 눈동자. 낮게 깔려 들어오는 달빛에 조명조차 없는 화물칸 속에서 서로의 눈만이 반짝인다.

"네가 용서 못하는 건 누군가를 믿었던 자기 자신 뿐이야."
경적소리. 시끄럽게 퍼지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한 걸음  다가간다.

"넌 모든 걸 들은 지금조차도 라드를 원망하지 못하고 있어. 또 한번 생각하는 걸 포기하려 하고 있어."
"... 그만."
"모든 일을 네 잘못으로 끌어들이고서. 누가 뭐라고 해도 넌 자책을 멈출 수 없겠지."
"이리하. 제발."
"칼린, 요나는 널 조종하고 있어. 네 그런 마음을 조종하고 있다고..."
"그만."
칼린은 한걸음 뒷걸음질쳤다. 갑작스레 뭔가가 올라온다. 감정이. 뭔가 막아 뒀던 것이. 잠궈 둔 것이. 이리하의 말로 올라온다. 어지럽다.

"그만해요, 이리하... 그만해 주세요..."
몸이 떨린다. 이리하의 표정도 삽시간에 하얗게 질린다. 그녀는 급하게 칼린을 향해 다가간다. 칼린은 몸을 움츠린다.

"난... 이리하, 영주님은 단 한번도 틀린 적이 없어요... 언제나 저만 제멋대로 굴어서 누가 죽어요... 이리하, 전 18살도 안된 어린애의 목을 찢었답니다."
그의 말이 빨라진다. 발작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리하는 그저 칼린을 끌어안는다. 칼린의 몸이 점점 세차게 떨린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표정은 점점 사라져 간다.

"내가처음부터잘했으면다막을수있었어요.내가아니라영주님이었으면전부막았을텐데.아무도안죽었는데.항상멍청한건나지.내잘못입니까.내게총을겨눈그손은전날저에게꽃을주곤했답니다.마리는절공주님이라불렀답니다."
빠르게 중얼대기 시작하던 그는 곧 눈을 크게 뜨고서 이리하를 밀어냈다. 그리고 격하게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내장까지 쥐어 짜내듯 토해낸 것은, 내용물도 없는 위액 뿐이었다.

그의 표정이 다시 조금 편해졌다. 조금 진정한 걸까.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은 후, 자신이 토해낸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맙소사... 칼린, 난..."
"아뇨. 괜찮아요. 가끔 이래."
그는 조금 입가를 들어 올렸다. 억지로 만들어진 미소에 반해, 눈은 밑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죽어버린 상태 그대로였다.

"이 세상은 전부 빌어먹을 가짜인 걸요. 이리하. 대걸레 좀 갖다 주실래요?"
"넌... 넌 이대로면 안돼. 이렇게 괴로워해선 안된다고..."
"대걸레좀 갖다주실래요?"
칼린의 표정은 바뀌지 않는다. 이리하의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언젠가 다 같이 술자리를 갖고 다음날 청소하던 때의 그를 떠올리게 한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장면.

이리하는  어떤 말도 떠올릴 수 없었다. 경적소리조차 멈춰버려, 화물칸은 그저 침묵과 어둠만이 짙게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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