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7화 〉여진(餘震) (127/164)



〈 127화 〉여진(餘震)

만약 제가 처음 소금부대에 합류하게 된 날에 아스타가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더라면,  아스타와  가까워지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거리를 벌렸을 까요.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드네요. 솔직히 실감이 가지 않아요. 그야, 아스타는 정말 강했는 걸요.


전 지금  머리가 복잡해요. 동료들과 거리를 벌려 두고 이 고통을 다시는 겪지 않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이렇게 후회하지 않도록 모두와  한 가족처럼 지내야 하는 걸 까요. 당신은 왜 제가 다 포기하고 떠나가고 싶을  이렇게 폭탄을 던지시는 거죠?

그때. 그 날이 기억나요. 라무르 마을에서. 눈앞의 참상은 다시 그려 내기도 끔찍한 것이었지만, 그 날의 하늘은  투명했죠. 피에 젖지 않은 땅은  연마된 기타의 표면같이 부드러운 갈색을 띄고 있었고, 바람에 스치는 밀은 부드럽게 흔들려서 졸린 분위기였어요.


저는 그 때, 모두가 조금만 대화를 해보면 안되냐고 했었죠. 모두가 다그쳤지만 전 해냈어요. 아스타, 제가 그 자리에서 성공한 게 첫번째 원흉이었던  같아요. 당신들은 제가 얼마나 웃겼을 까요. 이젠 이해가 가요. 전 정말 세상을 몰랐던 거죠.


아.  포기를 못해서 여기까지 왔네요. 이바노프씨와 소냐, 상냥한 주민들을 보고 저는 아무 의심조차 하지 못 했었네요. 사실, 아스타의 죽음보다도 제가 힘들어하는 건, 그 주동자가 이바노프씨였다는 것일지도 몰라요. 알아요. 제가 정말 개새끼인 걸.


아직도 저는 믿을  없어요. 당신은 강했고, 이바노프는 상냥했거든요. 봐요, 코트가 이렇게나 따뜻한데.

근데, 아스타, 당신도 정말 잔인하네요.

당신이 죽었다는 건, 굳이 반토막 나고 바싹 불타버린 시체가 되어서 알려주지 않아도 됐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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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시. 칼타코 독립군은 잠들 수 없었다. 사주 경계를 하며 전원 총기로 무장한 병력들은 언제 누가 와도 농성을 펼칠  있었다. 저들이 다짜고짜 병력으로 밀어버릴 가능성도 생각을 해 둬야 한다.


아침 9시까지만 버티면 독립국을 위한 첫걸음을 밟을  있다. 그래. 버티기만 하면 된다. 마키도의 결계 안에서 총으로 무장한 그들을 하룻밤만에 준비한 병력으로 이길 순 없다. 이미 상황은 다 끝난 것이라 봐도 좋았다.

"소보코비냐 황녀님. 주무셔도 됩니다."
이바노프가 정중하게 소냐에게 말한다. 소냐는 하품을 끊어내고 졸린 눈을 비비며 이바노프를 향해 웃는다.

"내가 잠들 수는 없지. 다들 고생하고 있지 않느냐..."
그녀는 피곤했다. 하지만 잠들 수는 없었다. 그것은 독립군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남아있는 죄책감이 그녀를 끝없이 찔러 대서 이기도 했다.

사고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병력에 손해가  많다. 다만 어린 소냐가 상황과 사람을 그렇게 대국적으로만 판단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이바노프는 그녀의 복잡한 마음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타인의 마음을 읽는 자라면 당연히 그에 대한 죄책감이 더 클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총을 매고 자신의 위치로 발을 옮겼다.

"이바노프씨... 이거 한번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동쪽 경계를 맡고 있던 병사가 그를 부른다. 이바노프가 다가오자, 그는 말없이 망원경을 건내 줬다.


"... 이건..."
검정 정장 위에 갈색 가죽 코트를 입은, 비무장한 장신의 남성. 어떻게 봐도 칼린이었다. 그는 무너진 대사관 잔해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뭔가를 들고 있었다. 까맣게 타버린 사람 몸통 정도 크기의 숯덩이를 들고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저 숯덩이를 찾은 후로  20분째 저 자리에서 가만히 있습니다. 저건 역시..."
"... 그런 것 같군."
이바노프는 망원경을 치우고 눈을 비볐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약식으로 기도했다. 제발 그가 여기로 오지 않기를. 그를 적대하고 싶지 않다. 만약 온다면, 부디 우리의 회유를 받아들이러 온 것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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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타. 도르베가 그런 말을 했었어요. 당신은 명예를 모른다고. 죽음을 너무 두려워한다고. 어쩌면 우리 중에서 가장 겁쟁이라고. 험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도르베는 웃었어요. 웃으면서 그런 당신에게 조금은 배워야 될 것 같다고 그랬어요.


그런 당신이 이렇게 비참한 꼴로 잠들었네요. 질 나쁜 농담인가요. 그토록 살고싶어하던 당신은, 대사관을 폭발 시키기 전에 어느 만큼 고민했을 까요. 당신의 선택에 후회는 하지 않았을 까요. 전 궁금해요.

저는.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르겠어요.  이런 농담을 재치 있게 받아 칠 정도로 유쾌한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여기서  해야 되나요, 아스타씨.

제가 고리를 끊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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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노프씨... 칼린씨가 움직입니다."
"어디로?"
"여기로 오고 있습니다..."
이바노프는 작게 혀를 찬다. 그리고 병사를 시켜 확성기를 가져오라고 한다. 병사가 확성기를 가져오자, 이바노프는 창을 열고 얼굴을 꺼내 칼린을 향해 말했다.


"... 칼린. 거기서 발을 멈추시오. 말하고 싶은  있어."
어느새 결계 바로 앞까지 다가온 칼린에게, 이바노프는 그렇게 말한다. 칼린은 발걸음을 멈추고 눈 앞의 결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학대되었는지 알 것이요.  독립은 우리의 정당한 항의요. 새로운 시대를 위해,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위한 첫걸음이 될 꺼야. 당신은 마음 속 깊이 우리를 같은 인간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어."
이바노프는 화려한 언변술은 없다. 그의 연설문도 결국 세라와 마키도가 밤을 세서 같이 머리를 싸매며 적어줬던 것이었다. 그래서 적어도 그는 진실만을 담아 호소하기로 했다.

"우리의 첫걸음에는 당신같은 정신이 필요해. 당신같은 선인이 필요하오. 대사에서 죽은 당신의 동료의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우린 당신을 존중해 당신의 동료들을 죽이지 않기로 결심했었소. 불운한 사고지."
칼린은 그저 가만히 있는다. 지금 보니 그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같다. 병사가 망원경으로 그것을 확인해 보고 상황에 맞지 않게 감탄사를 뱉었다가,  숨을 멈춘다.


"당신이 우리에게 와 준다면, 당신의 동료들까지 같이 숨겨 주겠어. 우리가 책임지고 윌레인이 추적하지 못할 곳으로 보내주지. 칼린, 당신은 새로운 민주도시, 캄뷰로에서 귀빈 취급을 받으며 우리를 도와 주시면 되는 겁니다. 당신은 군인을 할 인물이 아냐!"
이바노프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칼린을 내려다보았다. 기분 탓일까, 그의 주변으로 붉은 빛이 일렁이는 듯하다. 정확히는 눈에서 세어 나오는 듯한-

칼린이 손을 들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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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노프씨. 당신에게는 그런 목적이 처음부터 있으셨던 거군요.

당신은 우리를 받아들일 생각 따위, 처음부터 없던 거군요.


왜 저에게 상냥하셨던 거죠?

처음 봤을 때 그 태도만 유지했어도 됐는데. 다들 그저 저를 적으로 보고 욕하고 침을 뱉으면 됐는데.

 그렇게 자상하셨던 거죠? 저를 부수고 싶었던 겁니까?

저란 놈은 얼마나 멍청한 지. 몇 번이나 더 발이 걸려 넘어져야 정신을 차릴지. 경계랍시고 해  것을 당신들은 너무나도 간단히 허물어버리고, 제 등에 칼을 꽂아 버리시네요.

어지럽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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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이 결계를 내리치기 시작한다. 크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칼린의 손이 튕겨 나간다.


"... 소용없소.  결계를 부수려면 공성병기정도는 가져와야 할 겁니다."
이바노프는 그렇게 말하고서 눈가를 찌푸렸다. 아쉬움이 컸다. 그는 결코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만약 아스타라는 자가 죽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어쩌면 캄뷰로에서 자신과 소냐 둘이서 그를 초대해 저녁식사를 가질지도 몰랐다. 가장 운이 좋을 경우의 이야기지만.

그는 실망감과 죄책감을 삼키며 아래층 중앙에 선 마키도를 내려다보았다. 마키도는 여전히 평온하게 결계를 유지해내고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경고는 끝났소. 칼린. 당신에게 총 18개의 총구가 향해 있다는 것을 아시오. 감정이 휘둘려 헛되게 목숨을 버리지 말고, 동료들과 함께 살아 남으시오. 대사도 두 명이 남아 있으니 심한 벌은 받지 않겠지."
그러나 이바노프의 말에도 칼린은 쉬지 않고 결계를 때린다. 망원경으로 보니, 이미 그의 손은 터져버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결계에 묻은 피가 하릴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바노프는 그가 이성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파악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결단을 빠르게 내려야 했다. 그는 눈가를 내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사격해라."
장전음이 울리는 소리. 총성. 그리고 정적-

이 아니었다. 쿵쿵대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이바노프가 눈을 뜨고 자신의 앞에 있던 병사를 내려다보았다.  병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떨고 있었다.


"...뭐냐."
"이바노프씨... 총알이란 거... 베어낼  있던 겁니까?"
"뭐?"
제대로 듣기도 전에, 1층의 마키도가 비명을 질렀다.


"결계가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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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전 어린애도 아닌데. 사실 이바노프씨, 당신과 비슷한 나이인데. 몰랐고, 모르겠습니다. 제 잘못일 까요. 사실  잘못이 아니잖아요. 당신은 왜 저에게 이런 잔인한 짓을 하셨 나요. 전 그냥 숨고 싶어요. 미쳐버리고 싶어요. 차라리 정신을 놓아 버리고 싶어요. 내 잘못인 걸 아는데. 이바노프, 당신은 그저 내가 이용하기 쉬웠을 뿐이겠지. 멍청하게 그걸 받아들인 건  잘못이 맞는데. 내가 누군가를 믿어버린 것이 잘못인데.  요나도, 내 동료도 아니었는데. 이걸 믿은 내가 병신이지. 당신을 증오해. 찢어 죽이겠어. 아스타의 복수를 갚겠어. 망설임없이 전부 베어 가르겠어.

하지만 그 코트는 따뜻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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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정조준!"
비무장이었던 칼린의 손에는 어느새 무기가 들려 있었다. 투명한 붉은색의 장검. 평소 그가 무장할  사용하던 쌍수도의 형태를 띄고 있다.

"무너집니다! 더  버텨요!"
마키도가 비명을 내지른다. 깨지는 소리와 함께, 결계가 부셔진다. 모든 병사들이 1층으로 내려와 그가 들어올 정문을 향해 조준한다.


문 너머로 들리는 발소리. 그런 것이 들릴  없었지만, 예상치도 못한 초유의 사태에 바짝 긴장한 전원이 다가오는 자의 발걸음 소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곧 문이 열린다. 일제히 조준  총구가 움직인다. 2층에 저격조와 3층의 그물 대기조가 몸을 움츠린다. 정중하게 열린 문에서 달빛이 바시게 세어 나온다. 그리고 그 달빛을 받으며, 붉은 안광을 뿜어내면서 들어온 것은-

"...칼린."
즉각적인 사격이 불가능 했던 것은, 종족이 다르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외견과, 이 장소에 이질적일 정도로 빛나는 얼굴. 기품. 그리고 본능에서 찾아오는 두려움. 아니, 그것은 경외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래에서, 그는 이 땅의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모두의 총구를 천천히 둘러본 칼린은, 그저 조용히 평소처럼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붉게 타오르는 눈가에서 분노를 느낀다. 조준된 총구들은 목표를 잃고 그저 떨고 있다. 전의를 상실하고 주기도문을 외기 시작한 병사도 있었다. 그러나 이바노프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사격! 사격!!!"
그의 함성에 병사들이 서서히 정신을 차린다.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불굴의 각오를 안고 이 전투에 임한 자들이다. 다시한번 망설임이 떠오르기 전에, 하나  씩 방아쇠를 당긴다.


칼린은 자신의 피로 만들어진 검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다가간다. 막히고 베인 총알들이 뒤로 맥없이 날아가고 떨어진다. 그 모습에 경악할 틈조차 없었다. 병사들은 서둘러 총알을 장전하기 위해 대형을 바꾸려 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은 없었다.

"히익!"
첫번째 대열과 두번째 대열이 자리를 바꾸는 그 짧은 틈.  틈에 칼린은 날아가듯 그들을 향해 돌입했다. 긴 검 날이 한바퀴 돌면, 붉은 반원이 그 주변에 있던 자들의 목에서 터져 나온다.

아수라장. 돌입 된 적을 막기 위해 총구들이 서로를 향한다. 서로를 쏘는 총성과 함께, 아비규환이 벌어진다. 칼린의 검은 멈추지 않는다. 저 뒤에 있는 이바노프를 향한 눈은 움직이지 않는다.

"젠장할!"
이바노프는 욕지거리를 뱉어 내고서 황급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소냐가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소냐!"
"이바노프? 도대체  일이 터진 거야?!"
"이 안에 숨어있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지 마! 몸을 숨겨! 숨을 참아!"
"지금 팔에 묻은 거 피-"
"소냐!"
이바노프가 소리쳐 당황한 소냐를 다잡는다. 그는 소냐의 양 어깨를 붙잡고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요. 하지만 지금 잡담  시간이 아닙니다."
"... 큰일인 게냐?"
그녀의 말투가 돌아온다. 이바노프는 이마에 뭍은 피를 닦아내고서 수염 뒤로도 드러날 수 있도록 크게 웃는다.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그래."
소냐는 황급하게  넓은 방 안에서 숨을 곳을 찾기 시작한다. 적당히 숨을 곳을 찾은 그녀는 이바노프에게 소리쳤다.

"무사히 돌아와서 꺼내 줘야 한다! 황명이다!"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조용히 답하고서 이바노프는 그 방의 불을 끈다. 그리고 문을 닫으며 혼자 웃는다. 멍청한 딸 같으니. 캄뷰로에 신분제는 없다.

"... 진짜 딸처럼 생각했다. 네 이름이 올가 소냐였으면 했다."
 앞에서 작게 중얼거리던 이바노프는 곧 자신의 무기를 들었다. 그리고 비명소리가 새벽 종소리처럼 울려 대고 있는 장소로 발을 옮겼다.


멀리에 칼린이 보인다. 그는 눈에 보이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내고 있었다. 검과 총알을 틩겨내며 현란하게 검을 움직이는 그는, 마치 춤을 추는 것 처럼도 보였다.

"그물을 던져라!"
이바노프의 호령에 3층에서 그물이 떨어진다. 잡아 들어 올리는 데에만 12명의 손이 필요한, 빅센마르크 본토의 극점에 가까운 바다에서 낚시할  사용하는 그물. 단단히 엮어진 밧줄은 배의 밑바닥을 이빨로 으깨 버리는 바다의 괴수들 에게도 찢어지지 않는다.


무게추를 제거하고도 이 무게이다. 한순간의 틈을 만들어 주기에는 충분했다. 검으로 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저 깔리기만 해도 치명상이다.


칼린은 이바노프의 말에 거의 즉각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물은 이미 난간에 걸쳐져 있었다. 아무리 칼린이라도 저것을 베어낼 자신은 없었다. 아니, 사실 그에게는 지금  정도의 판단을  여유 따위가 없었다.

즉각적으로 피하려는 칼린의 몸을 독립군들이 몸을 던져 막아낸다. 그의 경이로운 신체능력보다도 신념이 강했다. 각자 믿고 있는 미래를 위해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 목이 잘린 후에도 칼린에게 매달려 있었다. 곧 발걸음이 멈춰진 칼린을 향해 그물이 떨어져 왔다.


위에서 내려오는 그물을 보고 있을 때- 시끄러운 소리가 차단된다. 안 그래도 느리게 보였던 시야가 천천히 정지된다. 인지하기에는 너무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 칼린의 몸도 시야도 고정된다. 눈 앞에 언젠가 봤던 무대가 떠오른다. 그 무대는 그물이 떨어지는 곳으로부터, 마치 칼린을 덮어내 듯 떨어진다.


시야 속, 버건디색의 커튼. 아직도 칼린의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커튼은 기분 나쁘게 꿈틀대다가 곧 흐느끼는 소리를 흘려 내기 시작한다. 어느새  사이에서, 매끄럽고 하얀, 길게 뻗은 손이 나온다. 손가락을 두개 피고 있다.

'2막은 괴물의 상실. 주변 모두의 시야를 흐리면서 손에 잡히지 않고 사라진다. 모두의 시야를 흐린다. 네가 곧 보석이요, 전설이요, 희곡이다.'
부드럽고 낮은, 잠들 것 같은 목소리. 칼린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과장하며 멋을 내는 듯한 목소리이다.

'그러니 나는 너를, 안개라고 부르겠다.'
그 말과 함께 손가락이 하나 접힌다. 이제 펴져 있는 손가락은 단  개이다.

'다음이 종막이야. 부디 즐거운 경험이 되기를... 푸하하!'
그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다가, 말이 끝날 때쯤 엔 결국 웃음을 참아내지 못하고 터트려 버린다. 그리고 곧 그 손은 커튼을 잡아 열어 젖힌다. 천천히 열리던 그 커튼은-


"...!"
곧 빠르게, 주변의 시야를 회복시키며 사라졌다. 무대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다시 그물이 그의 위를 덮치는 시야가 돌아왔다.


육중한 것이 떨어질 때 나는 진동음. 퍼지는 먼지에 주변에 있던 자들이 작게 기침을 한다. 모래먼지 속에서, 독립군은 지금이야 말로 기회인 것을 알기에 총을 장전한다. 그리고 모래 색 안개 속을 겨누며 발사 준비를 끝마쳤다.


서서히 선명해지는 시야 속에서, 그물 안에는 칼린을 잡고 있던 병사들 뿐 이었다. 몇몇은 죽어 있었고, 몇몇은 그물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토막이 났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칼린은 보이지 않았다.


"대장!  새끼 안보입니다!"
더이상 그들에게 칼린은 '씨'를 붙일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괴물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이바노프는 혼란 속에서 총구를 겨눌 곳을 잃은 병사들을 진정시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물 위에, 자욱하게 안개가 져 있었다.

"...안개?"
병사들의 혼란이 가중된다. 그러나 전장을 격어  이바노프는 느끼고 있었다. 저것은 위험한 것이라고,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전부 떨어져!!!"
평정을 잃은 이바노프의 목소리도 너무 늦은 것이었다. 시작은 근처에 있던 병사였다.


"우- 우워으- 컥-"
갑자기 무기를 내리고 고개를 숙이며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갑옷까지 벗어 던지고 자신의 목을 긁어 댔다. 얼굴은 파랗게 변하다가,  하얀색으로 바뀌며 눈이 위로 뒤집어 졌다. 거품을 물며 기절한 그의  안에서 나오던 것은, 하얗고 단정하게 가느다란 손이었다.

"안개에서 떨어져!! 경계해!"
움직이는 안개. 아비규환이 펼쳐진다. 그 안개 속에서, 용맹한 독립군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죽어나간다. 잔혹하고 끔찍한, 악몽에서도 볼  없을 법한 광경이다. 침통한 표정으로  참상을 바라보던 이바노프의  앞에, 안개가 모이기 시작하더니 뭉쳐진다. 곧 그것은 칼린이 되었다.

칼린은 말끔한 모습이다. 상처 하나조차 나 있지 않다. 코트는 언제 벗은 건지, 왼팔에 깔끔하게 접어 걸어 두고 있다. 그리고 붉게 타오르는 눈으로 그저 이바노프를 노려본다. 마치 선고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끝났다고, 캄뷰로는 실패했다고 비웃는 것처럼. 눈 앞의 저것은 실패였다.

이바노프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무기를 쥐었다. 그리고 먼저 죽어간 동료들을 따라가기 위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함성을 질렀다.

#

이바노프, 당신을 증오해. 쓰잘데기 없는 코트. 당신이 나에게 보낸 마음을 증오해. 이 영지를 증오해. 나를 향해 웃어 줬던 너네들 전부를 증오해. 죽을 만큼 싫어. 죽일만큼 싫어.

이바노프씨,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행복하고 싶은 건데. 저랑  주변만 행복하면 되는 건데. 제가 욕심이 과한 건가요. 여러분은 전부 이런 살이 애워지는 고통속에서 살아 가시나요. 다들 그렇게 살고 계시는 건가요.

당신을 이렇게 찔러 대는 내 꼬라지를 보면, 소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마지막 쯤에 갑자기 서먹해 져서 말이야. 하하, 아직도  때 제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몰라요. 알려주세요, 이바노프씨. 제가 무슨 실수를  건가요. 제 실수는 어디서부터 였나요.

왜 당신들은 저를 죽일  없었나요. 왜 이 사건으로 제가 미칠  없나요. 제가 미치게 해주세요. 죽게 해주세요. 너무 무서워서 스스로는 못 하겠어요. 그런데 이 일을 벌이고 볼 아침 해가 더 무서워요.


추워요. 여긴 너무 추워요. 빌어먹을.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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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이 전화국에 들어간지 40분이 흘렀다.


전화국의 안은 조용하다. 뭔가가 흐르는 소리.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안쪽은 완전한 난장판이다. 여기저기 찢겨 나간 시체들이 걸려있다. 깔끔하게 잘려 나간 목들은 이리저리 정처없이 떨어져 있다. 세라는  위가 사라졌다. 마키도는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이바노프는 코트에 덮인 채로 수없이 찔려서 죽었다. 발걸음 소리가 축축하다. 철퍽거리며, 칼린은 자신의 모든 감각을 개방해 순간을 바라본다.


목이 마르다. 먹을 것이 많다. 하지만 안되지. 내 흡혈에 목격자가 있으면 안되지. 영주님이 그러셨어. 영주님은 날 이해하시지. 영주님은 내게 거짓말 안 해. 그는 조용히 요나의 이름을 되뇌이며 곧 발걸음을 멈춘다.

꽤 넓은 방. 통제실로 사용되던 곳 일까. 그 방의 문 앞에는 커다란 나무 역십자가 매달려 있다. 칼린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는다. 역시 이딴 세계에 신은 필요 없다. 있어서는 안된다.

문을 열면, 그저 고요만이 가득하다. 다만 건물 전체에 차오른  때문에 걸음걸이마다 습기찬 소리가 날 뿐. 찰박, 찰박. 비 내린 후의 거리를 걷는 소리가 난다. 칼린의 마음은 미묘하게 편하다.


그는  방에서, 지나치게  찬장을 발견한다. 안에서 뒤늦게 숨을 찾아도 소용없다. 그는 이미 방 밖에서 소리를 듣고 들어온 거니까. 그는 찬장을 거칠게 열어 재낀다.

"꺅...!"
비명을 지르며, 흰색 드레스를 입은 소냐가 굴러 나온다. 그녀는 파들파들 떨면서 피 칠갑이 된 바닥에 구른다. 하얬던 드레스가 곧 붉게 젖는다. 두려움에 얼굴이 일그러진다.


"소냐... 당신도 여기 있었군요. 당신마저 한패였군요."
"칼린... 전부 당신이 한 겁니까?"
윌레인 어로 격식을 차려보려 애쓰지만 애매한 것이 되어 버렸다. 소냐는 눈물을 닦으려 손을 올렸지만, 잠깐 땅에 닿은 것으로 손은 피로 흠뻑 젖어버린다.


"있잖아요. 담배는  피셨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당신이  걸어주는 게 좋았을지도 몰라요. 저  때 외로웠거든요."
"당신이 한 거냐고 물었습니다!"
소냐는 두려움에 얼굴이 파랗게 질린 상태에서도 할 말을 해냈다. 이 모든 참상. 모두가 죽었으리라. 이빨이 바득바득 떨리면서도 태도를 낮추지 않는 것이 그녀가   있는 캄뷰로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

"... 소리치지 마세요, 소냐. 너무 시끄러워요."
칼린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뻔했다. 굳이 그의 자백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소냐는 구역질과 서러움을 참고 그를 향해 거칠게 눈빛을 쏘아냈다.

"괴물...!"
어떤 반응도 없던 칼린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문 뒤에서 들어오는 달빛이 역광을 만들어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실루엣이 바뀔 정도로 그의 표정은 한순간에 다양하게 변하고 있었다. 곧, 그가 발걸음을 한걸음 옮긴다.

"... 맞아요, 소냐.  괴물이예요."
소냐는 엉덩방아를 찧은 상태로 뒷걸음질 친다. 죽고 싶지 않다. 눈 앞의 저것의 정체를 알 수 없다. 칼린. 상냥하고 유약한 칼린. 가면을 벗으려 하지 않았던 칼린. 시린 과거가 있는 칼린.


"전 모두를 갉아먹는 괴물이랍니다."
즐거운 듯 흐느끼는 목소리. 아직 미쳐버리지 못한 자가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어서 쥐어짜내는 흐느낌. 칼린. 뭔가를 숨기던 칼린. 안에 뭔가가 숨어있던 칼린.

"... 그리고 저는 배가 고파요... 아아, 소냐... 배가 고프답니다."
달빛에 끝없이 반짝이던 것은,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인가, 그의 입가를 타고 흐르는 침인가. 소냐의 하얗고 약한 살결이 찢어져 나간다. 그녀의 목에 깊숙하게 이빨이 박혀 들어간다.

그녀의 의식이 꺼져간다.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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