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여진(餘震)
일주일이 흘렀다. 축제 다음날의 하룻밤 휴일이 인정되고, 그 후부터는 다시 정상적으로 구역을 나눈 노동이 시작되었다.
상황은 축제 이전과 바뀐 것이 없었다. 여전히 배정된 노동량이 있었고, 지어야 할 건물은 많았고, 주민들에게 일상을 되찾을 여유같은 것은 없었다.
바뀐 것은 그들의 태도 뿐이었다.
미묘하게 이완된 분위기. 축제를 거친 주둔병사들은 전처럼 그들을 가혹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군기를 잡고 대했지만, 전과 같이 부당하게 체벌이 생기지는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서 구호부대가 오기 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일부는 그 때 죽은 자들을 추모하기도 했다.
축제 당일 대사관에서 기절해 버린 푸르투가는 결국 그 날 대사관으로 연결된 통로를 확인하지 못했었다. 그는 후에 따로 그 통로를 이용해 보았고, 문제없이 대사관 바닥을 열고 나와 제대로 길이 이어진 것을 확인했다. 그것을 확인한 이후로는 소금부대원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했다.
세라의 경우는 조금 특이했다.
"미안했다."
축제 다음날, 세라의 거처까지 찾아온 도르베의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아무 말 하지 않는 세라를 향해, 도르베는 고개를 숙였다.
"네 말을 듣고 하루 종일 생각했었다. 아직 감정이 따라오지는 못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네 말이 맞다. 전에는 서로가 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피해자만 둘이 남았군."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세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리고 부족해서 한심한 말을 해버렸고, 서로에게 상처만 되었다. 피차 용서는 힘들 것 같으니, 이만 자리를 떠보도록 하마. 일방적으로 사과하고 도망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내가 아직 부족해서 바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하지만 천천히 고쳐 나가마. 맹세하지."
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 앞의 청년에게서, 언젠가의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도르베가 그 침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등을 돌렸을 때였다.
"저는... 바뀌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을 지도 몰라요. 어쩌면 우리 모두가요.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문을 잡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떨림을 참으며 말했다.
"우리가... 첫걸음을 걸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날 이후, A구역의 삼인방은 종종 그녀의 집에 모이고는 했다. 진정한 화합을 위해 도르베도 과감한 선택을 했다.
칼린은 부쩍 주민들과 가까워졌다. 축제 이후 다시 일을 나온 칼린의 주변에는 항상 방해될 정도의 인파가 몰려들고는 했다. 최대한 그들과 벽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칼린이었지만, 숭배에 가깝게 그에게 헌신하기 시작하는 자들을 일일이 무시하는 것은 마음 약한 그에게는 다른 의미로 고행이었다.
그런 그들을 쫓아내 주는 것은 보통 이리하였다. 그녀는 칼린에게 모이는 자들을 흩어낼 때 마다 이바노프를 강한 적의를 담아 노려보고는 했다. 이바노프는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칼린이 매일마다 입는 코트를 보며 간간이 수염 뒤로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소냐는 칼린에게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에게 구해진 이후로 그녀는 평소처럼 거칠고 명랑하게 칼린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할 말을 신중히 선택하기 시작했고, 일하다가 검댕이라도 묻게 되는 날에는 아예 만나지 않는 경우도 생겼다. 뿐만 아니라 때때로 부대원들에게 빌려 피우던 담배까지 끊었다.
칼린은 그것이 자신이 한 실수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주민들에게 넌지시 그것에 대한 질문을 하고는 했다. 그럴 때 마다 마을 주민들은 살짝 미소 지으며, 소냐도 그럴 나이라고만 답하는 것이다.
요나는 아직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다른 부대원들은 8영주에게 큰일이 생기면 아직도 이렇게 잠잠할 리가 없다며 큰 일이 없을 것이라고 그를 안심시켰지만, 그 사실이 그를 안심시키지는 않았다. 그에게 행동 방향을 정하는 것은 요나여야만 했다. 그의 머리 깊숙이 에는 목줄 없는 괴물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전제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의 제약은 줄어들었는데도 행동범위까지 같이 줄어들게 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역할에 대한 고뇌를 하고 있는 것은 칼린 뿐 만이 아니었다.
"너네 그거 아냐?"
백인대장 기욤은 담배를 물고 그렇게 운을 뗐다.
"소금부대가 온 뒤로 딱 두 명 밖에 안 죽은거... 우리만 있었을 땐 일주일만에 아홉 명이 죽었었잖아."
"... 에이, 대장. 그건 그거죠. 우리가 쭉정이들 솎아낸 거죠."
부하 하나가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농담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이 밝아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요즘 미묘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 여기 왔을 때 까지만 해도 전부 찢어 죽이고 싶었던 놈들인데."
계기는 축제였다. 풀어진 분위기는 모두가 부정하던 사실을 되살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모두가 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 그게 모두의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었다.
"계속 누굴 증오하는 것도 힘든 일이구나..."
"... 대장?"
"아냐. 정신 차려야지."
기욤은 그렇게 말하고서 눈가를 가렸다.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대사들이 오고, 소금부대가 떠나면, 주둔부대의 일은 거기서 부터 시작이다. 이 땅은 벨카와 직통으로 이어지는 빅센마르크 접경의 군사지역이 될 것이며, 그들은 최초의 주둔병력으로서 이 땅의 측량을 전부 끝마쳐야 한다.
그리고 군사기지가 완공되면 기밀을 위해 공사에 동원된 전원을 죽여야만 한다. 쓸 만한 마법사들은 공장재가 될 것이다.
"방심하면 안되지..."
기욤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끝을 신경질적으로 씹으며 불을 붙였다.
독립군측은 상황이 순조로웠다.
전화국과 연결된 땅굴이 완성되었고, 일반 주민들도 총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계획은 점점 구체화되고 있었고, 이제 그들은 발화점만 기다리고 있었다.
윌레인의 군인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근본적인 생각의 차이 덕분이었다. 칼타코의 국민들에게, 자신들을 죽이고 있던 저들은 단 한번도 인외의 어떤 것으로 인식된 적이 없다.
혹한의 환경이 단련해낸 냉철한 이성은 그들을 인간으로서 인식하면서도 그것까지 감안하면서 작전을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철저한 군인의 정신은 군인이 아닌 자가 단련시킨 것이었다.
"저들을 단순하게 적으로만 이해하면 언젠가 힘들어질 때가 올 겁니다."
세라가 항상 말했던, 가장 경계해야 했던 일. 구 대사관이 막 신설되었을 때 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행동이 가까워진 지금은 알 수 있다. 반복적인 각오의 학습은 그들에게 정신적인 우위를 선사했다.
그런 그들에게 유일한 재고(再考)대상은 칼린 뿐이었다.
교단측은 최대한 소금부대와 대치하게 되는 일은 피하기를 바랬다. 상회는 최대한 그들에게 많은 빚을 지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칼타코 독립군은 양측의 요구사항들을 미묘하게 빗겨 나가는 계획을 독단으로 짜내고 있었다.
준비가 끝난 그들은 이제 조용히 다음 순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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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선발이 이제 끝났다구요?"
칼린이 전화를 붙잡고 어이가 없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전화 너머의 상대도 송구스러운 듯 목소리를 내리깔며 답했다.
'그게... 지원자도 없었거니와, 아무나 뽑을 수 있는 건도 아니었다 보니... 정말 죄송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벌써 예정일보다 몇일이나 뒤쳐진 건지 아시는 건가요?"
칼린도 이렇게 성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은 상당히 곤란했다. 요나는 연락을 받지 않고, 주민들은 곧잘 그에게 몰려들고, 피의 비축분은 바닥이 드러났다. 이제부터는 그에게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죄송합니다! 아무튼 최대한 빨리 보낼 테니, 어쨌든 3일정도 내에는 도착할 겁니다!"
"... 빅센마르크 쪽 대사도 그 시간 내에 맞출 수 있는 거죠?"
'네! 그쪽은 이미 대사 선출이 끝난 상태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보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정말로 송구한 듯한 목소리. 칼린은 그를 더 책망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를 더 갈궈 본다고 뭔가 상황이 바뀌지도 않는 것이다.
그는 머리를 감싸며 전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담배를 들고 잠깐 고민하다가, 다시 수화기를 들어 전화국에 연결했다.
"소금부대 칼린입니다. 벨카 영주 요나경에게 연결해 주세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직도 그는 전화국이 중간유통을 하는 전화형태가 익숙하지 않았다. 잠시 기다린 후, 대답은 몇일 전과 같은 것이었다.
'연락을 받지 못하시는 상황인 듯 합니다.'
"... 매번 수고하십니다."
소득 없는 전화가 끝났다. 그는 그제서야 담배 곽을 들었다. 마지막 남은 담배 곽. 안에는 담배 세 개피가 애처롭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서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동난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이며 전화국을 나섰다. 날은 이미 상당히 추워져 있었다.
코트의 주머니는 그의 손에 딱 맞았다. 대충 사이즈를 쟀다고는 했지만, 분명 섬세하게 입을 사람을 고려했으리라. 여러가지로 따뜻한 옷이었다.
"칼린."
밖으로 나와 손을 비비고 있으니, 라드가 다가왔다. 칼린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뭐래?"
"대사는 아직 3일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고..."
"그래? 성가시네."
라드는 그렇게 말하고서 빈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그에게 더이상 담배는 남아있지 않았다.
칼린은 그런 그를 가만히 보다가 질문한다.
"라드씨... 3일 남았잖아요."
"응? 응."
"담배 없이 버티실 건가요? 아니면..."
"아... 글쎄?"
라드는 잠깐 하늘을 보다가 입가를 가렸다.
"흠... 난 참을란다."
"그래요?"
"돈이 없거든. 걍 참았다가 뭐, 음..."
그는 턱을 긁다가 건조하게 웃으며 답했다.
"이번 일 끝나고 피는 담배는 분명 끝내 줄 것 같거든."
"...그런가요."
칼린은 반쯤 타 들어간 담배를 라드에게 건내 줬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가면을 다시 내렸다.
"그러면 저도 참을게요."
"엥? 굳이?"
"그러기로 했어요."
코트의 깃을 올린 뒤, 그는 라드를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5일정도는... 버텨 볼 수도 있잖아요? 무사히 임무를 끝내려면."
"5일?"
그리고 라드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라드는 그의 담배를 피우며 속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안에는 그의 이빨조각이 만져지고 있었다.
"... 둘 다 무사히 임무를 끝내는 건 힘들겠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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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가 오기 직전이다. 모든 작전이 중단되었고, 칼타코는 잠시 정상적으로 영지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이바노프는 묵묵히 가죽을 손질하고 있었다. 이런 작은 곳에서는 가죽을 담당하는 자와 육류를 담당하는 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바노프는 그의 가죽 가공 실력에 부끄러움은 없었다.
"...대사들, 늦네."
옆에서 지루한 듯 그 작업을 바라보던 소냐가 그렇게 말했다. 이바노프는 잠깐 가위질을 멈췄다가, 작업을 다시 시작하며 말했다.
"오히려 좋다. 너무 빠듯하다고도 생각했으니까."
"그렇구나..."
방 안에는 가죽이 쓰다듬어지는 소리만 들려왔다. 이바노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게 있으면 물어봐."
"응..."
소냐는 질문을 망설이다가 입술에 침을 바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칼린에 관한 거겠지. 틀렸나?"
그녀는 정곡을 찔려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그 하고는 적대하고 싶지 않아..."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분석했던, '알 수 없는 무언가' 때문이 아닌, 연민의 감정 때문이었다. 전날 그가 보여줬던 비명. 그것은 감정을 쉽게 읽었었던 소냐에게도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난 그에 대해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그에게 너무 잔혹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 그래서?"
"이바노프... 꼭 소금부대를 공격해야 하는 거야?"
이바노프라고 이름을 불렀을 때에는, '딸' 소냐로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염두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우리의 목표는 뭐지?"
"신분제가 없는 독립 도시 국가."
"빅센마르크와 윌레인의 접점에 껴 있는 우리가 그걸 이룰 수 있는 패는 뭐가 있지?"
"... 황녀의 존재."
소냐는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이바노프는 그 말에 잠깐 몸을 굳혔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어. 그건 단순히 독립을 위한 첫 단추일 뿐이지. 이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패가 필요해. 그 패의 이름이 뭘까."
"...뭔데?"
"증명."
이바노프는 칼을 테이블에 꽂았다. 그리고 소냐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독립국으로 있는 편이 양 국가가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를 건드리는 것이 손해가 될 것을, 우리는 이 작은 땅 안에서도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바노프..."
"우리가 윌레인 최대 규모의 상회와 교단의 지원을 받으면서 병력을 숨겨두고 있는 것은 전부 한번의 승리를 위해. 그 승리는 완전무결해야해."
그는 등 뒤에 걸린 역십자를 향해 눈을 돌렸다.
"교단 측에서는 구호부대를 적대적으로 보지 않으니 공격을 반대했지. 하지만, 이익을 위해서 공격할 때에는 대상이 꼭 '적'일 필요는 없는 거야. 오히려 여기서 우리가 소금부대를 건드리지 않고 칼타코를 점령해내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우리의 무력을 의심받겠지."
"그런거다. 무력을 증명하기에 네크로맨서를 잡아낸 그들만큼 좋은 것이 없지. 그래서 우리는 소금부대를 놓칠 수 없어."
그는 다시 칼을 집어 들어 가죽을 갈라냈다.
"그래도, 이득관계를 넘어서 널 구한 칼린 단 한명에게 경의를 표하며, 우리는 계획을 바꿨다. 소금부대원을 죽이는 일은 없을 거야."
"...그래?"
"그래. 무력으로 압도하고, 그들을 생포했다가 적당히 풀어 줄 거다. 이 정도면 상회와 교단의 요구사항의 중간 쯤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거면 불만 없겠지?"
소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바노프는 잘라낸 가죽을 들어 올렸다.
"불만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양보하지 못하는 게 있어. 소냐, 넌 우리의 심장이지만... 본질이 다르다. 우리의 적의는 윌레인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니까."
"...알았어."
"그럼. 들어가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가죽을 옮겼다. 행거로 걸어가는 그의 등을, 소냐는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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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흣... 많이 실력이 늘었네, 도르베..."
달뜬 숨을 몰아쉬며, 아스타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상체를 들썩이며 땀으로 번들거리는 몸을 손으로 훑었다.
"아, 아아... 이번에도 정말 좋았다, 아스타..."
도르베는 가볍게 떨며 젖은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뜨거운 열기를 뱉어대던 그는 곧 버티지 못하고 다리에 힘을 풀었다. 크게 지친 둘은 잠깐 그대로 거친 숨을 내쉬며 격한 운동 후 특유의 탈력감을 즐기고 있었다.
"너랑 하는 건 최고라니까..."
아스타는 야릇하게 웃으며 손을 하반신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끝없이 방심하거든!"
챙겨 뒀던 쇠 젓가락을 바지에서 꺼내 도르베에게 던졌다. 도르베는 다리가 무너진 상태로 재주 좋게 그것을 쳐낸 후 다리에 다시 힘을 줬다.
"쉬는 시간 아니었나?"
"응~ 난 아직 항복 안 했어~"
오랜만에 생긴 완전한 여유시간을 놓칠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몸에서 열기가 올라올 정도로 격하게 대련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 대충 네 수도 보인다. 어느정도는 읽어낼 수 있다고."
"하! 내가 보기엔 넌 아직 애송이야!"
둘의 승패 비율은 이제 50대 50에 가까워졌었다. 애초에 실력 자체는 도르베가 우위였으니, 이렇게 빠르게 격차가 좁아지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스타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오히려 도르베가 '지능적인' 수에 지나치게 약했다는 것이 증명되는 셈이었다.
이번에는 도르베의 승이었다. 다시 다리에 힘을 준 이후로, 그는 아스타에게 그대로 돌진했다. 뒷걸음질로 피하려던 아스타의 발 뒤에 베리어를 만들었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는 아스타를 덮쳐 목검으로 눌렀다.
"어때?"
"방금 껀 좋았는 걸?"
아스타는 도르베에게 깔린 채로 여유롭게 웃어 보인다. 그러다가 곧 서로 얼굴이 가까운 것을 알아채고 조금 얼굴을 붉혔다.
"그... 내가 졌으니까 좀 비켜라..."
"항복이라 말해라."
능글대며 웃는 도르베를 보며, 아스타는 아예 고개를 휙 저어버렸다.
"항복! 항복이니까 비켜!"
도르베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목검을 치우고 아스타에게서 떨어진다. 그는 비틀거리며 거리를 두고서 기분 좋은 듯 검을 집어넣었다.
"어떠냐. 말 했지? 손가락 몇개 없어진다고 난 약해지지 않는다고."
"아, 그래. 알아 알아."
"그럼 이제 너도 칼린을 용서하는 게 어떠냐?"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그를 보며, 아스타는 조금 불만스러운 듯 그를 노려본다.
"매번 대련해주는 건 난데 그놈에 칼린 칼린... 개새끼, 진짜 나한테 고맙기는 한거야?"
"물론이지. 네가 내 은인이다."
"이젠 막말한다니까..."
아스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도르베를 바라본다. 그는 요즘 다시 표정이 좋아졌다. 눈이 내려 백색으로 깔린 이 곳에서, 도르베의 푸른 눈과 머리는 아름다울 정도로 어울린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냐?"
도르베가 땀을 닦으며 물어본다. 아스타도 이제 슬슬 자신이 그에게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지 안다. 그에게 느끼는 것은 더 이상 정 따위가 아니었다.
"...안알랴줌."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 눈가를 찡그리면서도 환하게 웃는 도르베, 시야의 끝까지 눈이 쌓여 아름답게도 깔린 풍경을 배경으로, 그의 웃음은 시릴 정도로 깊게 들어온다.
그 풍경을 그녀는 가슴 한쪽에 되새긴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이 부대원이 아닌 때에, 도르베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니고 자신은 더 이상 범죄자가 아닐 때에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