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여진(餘震)
"들어 와!"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며 대사관의 문을 활짝 열었다가, 푸르투가의 옆에 있는 여성을 보고 약간 눈가를 찌푸렸다.
"분명 너만 오라고 했던 것 같단 말이지..."
"아, 그건 우리 쪽 손님이세요!"
안쪽에서 들려오는 외침. 핀의 목소리였다. 곧 아스타가 달려와 문에서 세라를 맞이했다.
"이쪽 손님이야. 말 안 했네, 깜빡했어. 미안!"
"... 누군데."
"세라입니다. 반갑습니다."
중년 여성이 그렇게 말하며 갤러한에게 손을 들이밀었다. 갤러한은 그녀가 윌레인어를 하는 것으로 대강 상황을 알아챘다.
"...뭐, 그쪽이 C구역에서 이것저것 도와준다던 사람인가. 진짜 윌레인어를 잘하는 군."
"과찬이죠."
"아니, 정말로. 여기 있는 둘은 조금 신기할 정도네... 일단 들어 오라구."
갤러한은 그렇게 말하고 문을 잡았다. 둘이 들어오자 그는 문을 닫고 그들을 가로질러 홀로 갔다.
"얘들아! 푸르투가 도착했다!"
"식당으로 불러! 게임 중이니까!"
푸르투가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세라를 향해 빅센마르크어로 말을 걸었다.
"먼저 가지."
"그래. 내일 보자구."
윌레인어를 말할 때와는 상당히 다른 어투로, 세라는 푸르투가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핀을 향해 천천히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저분들과는 따로 어울리는 건가요?"
"아... 저쪽에서 노시고 싶으시면 그래도 괜찮지만, 우리는 전부 게임을 잘 못해서 일찌감치 포기한 거란 말이죠... 먼저 식사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즐기다 오시겠어요?"
"아, 그런 거라면 도와야죠."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핀을 따라 주방을 향해 걸었다.
축제의 밤이 시작되었다.
#
푸르투가는 카드패를 보며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는 그가 이 대사관에 오게 된 이유부터 천천히 재회상하고 있었다.
륑게가 잃었던 돈을 전부 다시 따냈다. 그 미묘한 공적을 인정받아, 그들의 대사관 저녁 축제에 초대 권유를 받았다. 그는 대사관의 1층 대사 특실과 연결된 땅굴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 그것을 수락했다.
즉, 이 밤이 지새기 전에 무조건 한번은 대사 특실에 가봐야 한다. 지금 대사가 있는 것도 아니니, 확인해 보려면 지금 뿐이다. 설마 세라까지 올 줄은 몰랐지만, 그게 그가 할 일을 크게 바꾸지는 않는다.
"체크."
푸르투가는 그렇게 말하고서 식탁을 손가락으로 두 번 정도 두들겼다. 그러다가 곧, 평소에 모이던 인원보다 한 명이 부족하다는 것을 눈치챈다.
"이봐, 단발은 어디 있지?"
그의 질문에 소니아가 고개를 돌린다.
"응? 단발?"
"그래. 단발 여자. 그녀는 어디지?"
"아, 그게..."
"남자 꼬시러 나갔어. 내일 아침에 돌아올 것 같은데... 왜?"
갤러한의 질문에 푸르투가는 대충 대답하고서 들고 있던 잔을 기울인다. 아예 대사관 밖에 있다면 경게 대상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빈틈을 노리려던 때였다.
"야, 묻잖아."
갤러한이 카드를 내려놓고 푸르투가를 노려본다. 약간 경직된 분위기에서 푸르투가는 말을 멈춘다.
"또 뭐냐, 갤러한... 왜."
"이유를 물었잖아? 대답을 들어야 겠거든."
푸르투가는 저들과 어울리며 나름의 분석을 해왔다. 그의 판단 속에서 가장 안전한 것은 소니아였고, 가장 위험한 것이 갤러한이었다. 릴로는 가끔씩 보이는 동물에 가까운 감이 경계 대상이었고, 륑게는 속을 읽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일단 자신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 갤러한이라는 자는,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결코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일은 없었다.
"...평소 모인 인원이 아니라서 물어봤을 뿐이야. 혹시 내가 질문을 잘못한 건가?"
"왜 그렇게 바로 답하지 않았지?"
"이렇게 민감한 사안일줄은 몰랐다."
정적. 곧 갤러한은 들고 있던 손패를 쓸어 내리며 표정을 풀었다.
"아, 그래?"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웃으며 카드게임을 재개했다. 자리의 분위기는 마법처럼 돌아와서 다시 농담판이 열렸다.
"저 병신, 또 또 이상한 걸로 트집잡는다니까. 너 그거 병이라고."
"후까시 잡는 거야?"
그를 비웃으며 한마디씩 던지는 동료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가 분위기를 잡을 때에는 멈추지 않는다. 분명 푸르투가가 마주하는 4인방의 주축은 저 갤러한이라는 남자였다.
"미안, 미안. 제대로 믿고 있다고, 우리 반숙이. 너가 오늘 얼마나 큰일을 해준 건지 모르지?"
"그 말을 륑게가 아니라 네가 하는 건가."
"아니, 륑게만이 아니라, 륑게가 그 돈 잃으면 우리 전부 손해 볼 뻔 했다니까?"
갤러한은 호탕하게 웃으며 잠깐 들고 있던 카드패를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넀다.
"이걸 보면 조금 설명이 될 거야."
푸르투가가 그 종이를 보니, 부대원 개개인의 이름 옆에 숫자가 적혀 있었다. 모두의 숫자는 동일했으나, 라드의 이름 옆에만 '마정석'이라고 적혀 있고 더 작은 숫자가 기재되어 있었다.
"이게 뭔데?"
"우리끼리 하는 생명보험 같은 거지. 네크로맨서 잡을 때 시작했거든. 그 때 인당 250생텀씩 넣는걸로 시작해서, 지금은 인당 1000생텀씩 걸렸다니까? 이제는 한 놈 죽는 게 이득이야."
"갤러한, 네가 죽으면 그 돈으로 내 술집에 간판을 만들어 줄게."
"썅년."
푸르투가는 그 대화를 무시하며 종이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곧 갤러한에게 돌려주며 질문했다.
"그러면 뭐, 위험한 임무가 될 수록 돈을 많이 집어 넣겠군. 네크로맨서를 잡을 때에는 인당 얼마나 넣었지?"
"그 때는 인당... 400생텀 넣었었지."
"오호..."
그는 작게 감탄사를 날리고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들에게서 빼앗은 덕분에 담배는 혼자 피기에는 차고 넘칠 정도로 있었다.
"그러면 뭐... 이번 임무에도 돈을 걸었나?"
"당연하지. 되도록이면 매 임무마다 넣고 있단 말이야."
"호, 그래? 뭐, 한 50생텀은 들어갈 일이었나?"
"400생텀."
"...뭐?"
갤러한은 푸르투가를 똑바로 쳐다보며 웃었다.
"400생텀. 네크로맨서 때 랑 똑같이 걸었지."
#
"핀, 준비 끝났-"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며 주방에 들어갔다가 발을 멈추고 세라를 노려 보았다.
"...불청객도 있군. 부른다고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도르베씨! 저도 반갑습니다!"
도르베는 불쾌한듯 그대로 뒷걸음질 치다가 뒤따라온 아스타에게 부딪혔다.
"이쪽은 준비 끝났어."
"여기도 준비 끝났어요. 핀 씨가 재미있는 이야기도를 해주던걸요?"
"그래? 무슨 이야기 했는데?"
"이것저것. 빡쎄게 구르셨던 것 같던데요, 모두."
그녀는 재잘대며 웃고서 핀과 함께 음식을 날랐다.
"뭐, 이것 저것 힘든 일을 하기는 했었지."
아스타도 같이 웃으며 음식을 집었다. 몇 입 집어먹던 그녀는 곧 웃음기를 빼고 물어보았다.
"이거 누가 요리했어?"
"아, 그건 세라씨가..."
"아, 그래? 맛있어서! 맛있어서 말이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도르베의 귓가에 작게 말했다.
"이건 가져가는 길에 버릴게."
"...하하! 알았다."
도르베가 작게 웃자, 세라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웃을 수 있군요! 처음 보는 것 같아!"
"...날 뭐라 생각하는 지 모르겠군, 난 잘 웃는 편이다."
"에-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스타, 넌 누구 편이냐."
음식을 옮기며 가벼운 잡담. 그 정도 수준의 대화에서, 세라는 더 깊은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 모습을 투영 중이었다.
"세라?"
"네?"
"얼굴이..."
그러다가 곧, 자신의 표정이 굳어 있었단 것을 깨닫고 황급히 웃었다.
"하, 하하! 아니에요. 그냥..."
그녀는 대충 얼버무리고 식탁 세팅을 끝마쳤다. 아스타가 서빙하다가 '실수로' 엎어버린 세라의 요리 빼고는 모든 세팅이 완벽히 끝났다.
"뭐, 이정도면 여기에서는 호사식 아닌가?"
아스타가 나름 자신을 갖고 한 말에 세라는 다시 한번 옛날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도 모르게 농담을 섞어 작게 말해 버린 것이었다.
"전쟁 후 기준으로는 말이죠."
양측에서 금기로 다루던 그 단어. 전쟁. 도르베의 움직임이 멈췄다.
"...뭐라고?"
"도르베, 제발..."
핀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그를 막아섰다. 그러나 도르베는 굳이 핀을 치워내며 세라를 마주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의 살기 등등한 모습에 핀과 아스타는 상황을 이해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르베의 뒤에 서서 양 팔을 붙잡았다.
"...죄송해요. 말실수였습니다."
세라 본인은 그저 무덤덤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도르베는 그걸로 납득하지 못했다.
"네년이 전쟁을 논해?"
도르베는 자신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을 떨쳐내고 세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눈에 핏대까지 세우며 이를 악 물었다.
"전쟁 후 기준으로는? 그 기준으로는 잘 나왔다? 배가 부른거냐?"
"도르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었잖아요..."
"전쟁때 우리가 뭘 먹었는 지 알아?"
이 땅을 밟고 있으면 매 순간 떠오르는 것.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 당시에는 영원같았고, 그 순간을 지나친 지금에 와서도 아직도 그에게는 현재 진행중인 일.
"네놈들이 선전포고하고, 우리의 조국과 국민들을 짓밟았을 때 우리는 뭘 먹었는 줄 알아?"
"야, 도르베-"
"처음에는 너네들이 지금 쳐먹고 있는 보급식품이었다. 동상 걸린 손으로 얼음덩이같은 캔을 힘겹게 까내면, 원통형으로 꽝꽝 얼어버린 수프가 나왔지. 나중에 가서는 그것도 부족해서 동료 13명이서 그걸 다같이 햝아먹었어."
세라는 그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당황했지만 겁먹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도르베에게 적의를 느끼지도 않았다.
"그것마저 동떨어 졌을 때는 네놈들 주둔지를 털어서 나온 짬통을 긁어 먹었어. 냄비 바닥에 얼어붙어서 말 그대로 긁어야 떨어져 나왔단 말이다. 수렵용 나이프로 그걸 깨 부셔서 나눠 먹고도 배가 고파서 네놈들이 입고 있던 가죽 코트까지 씹어 먹었어."
붉어진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스타도 핀도 지금 이 순간이 일촉측발의 상황임을 눈치챘다.
"입김을 숨기기 위해 눈을 씹어 먹었고, 턱이 얼어붙을 까봐 신발 밑창을 씹으면서 버텼어! 식중독에 걸렸던 내 동료는 죽지 않기 위해 자기가 토한 것까지 집어먹었었다! 그런데 뭐? 이 식사가 전쟁 전에 챙겨 먹던 것보다 마음에 안 들었나?"
"도르베..."
"너네가 죽상으로 쳐먹고 있는 그 상한 보급식품이 부족해서 죽어 나갔단 말이다, 우리는!"
그는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냈다. 새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던 그는 세라를 노려보며 꽉 쥔 두 주먹을 떨었다.
"더럽게 추하게 순간을 버텨냈고, 살아남으려고 내 상식을 바꿨다! 전부 너네들을 싸그리 죽여 버리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그런데 이제는 너네를 죽여선 안되고, 오히려 국민으로 받아들인 다는군! 네 입으로 말해봐라, 넌 우리가 패전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랬었지? 내 동료들이 싸그리 추위속에 죽어 나가기를 얼마나 간절히 빌었었지? 아니면, 너도 직접 전쟁에 참전해 내 동료들의 목을 자르고 창자를 나무에 걸었나?!"
참고있던 것들의 분출. 단 한순간에, 그가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있던 화합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직도 나에게서 네 아들이 보이는가?!"
절규하듯 뱉은 마지막 말에 잠깐 정적이 이어졌다. 언제 칼부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분위기였지만, 아스타와 핀은 알고 있었다. 저 모든 것을 겪고도 군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그이기에, 여기서 검을 뽑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침묵하고 그저 도르베를 바라보았다.
곧 아스타가 움직였다. 그녀는 천천히 세라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오늘은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세라를 조금 끌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세라가 저항했다.
"...세라?"
"제 아들은 죽었습니다."
무덤덤한 한마디에, 아스타의 손에 들어가던 힘이 풀렸다.
"...뭐?"
"전 원래 선생이었습니다. 윌레인어를 가르쳤고, 그래서 전쟁 때 미운털이 박혔어요."
얼타는 도르베와 아스타를 두고, 그녀는 무미건조하게 닳고 닳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충성심을 증명하라는 명목으로 제 아들과 남편은 최전방에 끌려갔습니다. 그 때 아들은 15살이었어요."
"무슨-"
"남편은 언제 죽었는지도 몰라요. 나중에 그의 반 쯤 녹아버린 상반신만 뒤늦게 찾아냈거든요. 아들은 4개월만에 양팔이 사라진 채로 돌아왔고 2년뒤에 자살했습니다."
그녀의 말에는 떨림조차 없었다. 지어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끄러운 목소리였지만,
"전쟁은 윌레인 혼자 했던 것이 아닙니다."
붉어진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말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제 도르베씨에게 먼저 말 거는 것은 피하겠습니다. 그럼..."
그녀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서, 눈물을 닦고 굳건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도르베조차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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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리하. 이제 내려오냐."
"응. 방금 나가던 건 누구?"
"어? 누구 나갔어?"
어느새 식당에는 여섯 명이 있었다. 릴로를 제외한 팀 원생텀의 인원들, 푸르투가, 뒤늦게 합류한 라드에, 이제 막 합석한 이리하까지 여섯이었다.
"중년정도의 여자가-"
"세라가 먼저 나갔다고?"
"아... 저분은?"
푸르투가의 말에 이리하가 고개를 돌리고 륑게에게 질문했다.
"아, 여기서 사귄 새 친구야. 인사해."
"잠깐, 여기서 누구랑 친해지는 건-"
"잘 부탁한다."
이리하의 만류를 의도적으로 끊어내며 푸르투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리하는 잠깐 불만스러운 듯 그를 쳐다보다가 곧 손을 내밀었다.
"-안되는데 말이지..."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 이리하! 친목 도모하면 좋은 거지!"
갤러한이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 이리하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푸르투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속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이 순간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이쪽이 그 이리하야. 형씨 칼린에 대해 궁금하다 했지? 얘가 지금 칼린이랑 으쌰으쌰를 노리고 있거든."
"바보야, 무슨-"
"아니야? 맨날 붙어 다니면서!"
소니아가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리하는 조금 불쾌한 듯 눈가를 찡그렸다.
"아무튼, 이리하! 이 친구가 칼린을 만나보고 싶다 해서 말이야! 얘도 그, 칼린이 소...소라? 걔를 구한 거에 되게 감동했대!"
"소라가 아니라 소냐다. 그래서, 그 칼린이라는 자는 여기 없는 건가?"
이 말 만큼은 진심이었다. 푸르투가는 그 모습에 신성함에 가까울 정도의 감동을 느꼈었고, 그 칼린이라는 자와는 적이라는 위치를 잊고서 대화해 보고 싶었다. 혹시 뜻이 통할 자라면 설득할 의향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리하도 그 정도 속은 읽어낼 수 있었다.
"... 칼린은 지금 나갔어."
"엥? 낮에는 방에만 있는 것 같더니 이 시간에 어디로 갔대?"
그녀는 라드를 노려보았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저들과 소금부대원들이 친해지도록 가만 둔것에 대한 질타를 담은 눈이었다. 그러나 라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넘어갔다.
"...칼린은 지금 그 소냐를 만나러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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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살풍경한 정육점을 지나치면, 더 안쪽에는 그들의 집이 이어져 있다. 이층집에 다락방까지 딸린 전형적인 나무 오두막집의 형태. 칼린에게는 꽤나 낯설기도 한 구조이지만, 과거에 갔던 캠핑장을 연상시켜서 어딘가 그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식탁에 앉아서, 꽤 귀여운 모양의 앞치마를 입고 식탁을 준비하는 이바노프의 넓은 등짝을 보고 있었다. 이 순간도 기묘하지만, 더 기묘했던 것은 그가 이 집까지 들어오게 된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산책 겸이었다. 축제분위기로 꾸며낸 이 세계를 볼 겸, 소냐의 상태만 봐 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 이 집에 도착해 노크를 했을 때 였다.
이바노프가 문을 열고 나왔고,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칼린을 밀어서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조용히 앞치마를 꺼내 입고 저렇게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 칼린이 문을 노크했을 때 했던 인사말 이후로, 그들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없었다.
어색함 속에서 칼린이 조용히 이바노프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어... 무슨 요리를 하고 계시나요...?"
규칙적으로 울리는, 도마가 칼로 두들겨지는 소리. 그러나 이바노프의 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 소리 뿐이었다. 칼린은 다시 가만히 있다가, 결국 어색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한마디 더 꺼냈다.
"저기... 소냐는 괜찮나요?"
그제서야 칼소리가 멈췄다. 그는 도마에 얹어진, 잘린 재료들을 냄비에 집어넣고서 낮은 목소리로 짧게 답했다.
"멀쩡하오. 덕분이외다."
"아- 아하, 그런가요..."
다시 한번 어색한 침묵. 냄비속의 재료들이 끓는 소리가 들려온다. 칼린은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왜 여기서 저 거한이 만들어주는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곧, 그가 냄비를 들고 다가왔다.
"윌레인어가 익숙하지 않으니까, 간간이 대답이 없는 건 봐주면 좋겠군. 괜찮겠소?"
"아, 네! 문제 없죠, 그럼요..."
그는 화들짝 놀라며 조용히 그가 가져온 냄비의 속을 들여다보았다. 붉은 색 수프같은 것이 있었다. 꽤 끔찍한 비주얼에 비해 상당히 향기로운 냄새가 나고 있었다.
"걱정 마십쇼. 독은 없으니까."
"네? 그런 걱정은-"
"먹지."
"아..."
그가 만든 수프는 맛있었다. 그것도 상당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