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여진(餘震)
칼린이 그 자리에 간 것은, 단순히 감시병들이 일제히 어딘가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칼린이 그 얼음호수에 뛰어 든 것은, 단순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호수에 빠진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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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씨발, 생각 없는 새끼가!"
갤러한이 욕지거리를 날리며 호수를 가로 지르는 칼린을 보았다. 그는 옷조차 벗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호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미 돌아오라고 하는 것이 더 늦을 지경이었다.
"야, 륑게! 라드 불러와!"
"금방 갔다 올게!"
갤러한은 그렇게 소리치고서 급하게 옷을 벗었다. 살을 찢고 들어오는 듯한 추위에 그는 전신을 비비며 발을 동동 굴렀다. 곧 라드가 현장으로 왔다.
"무슨 일이지?"
"밧줄! 빨리!"
갤러한은 라드에게 감겨 있는 밧줄을 받아 그걸로 허리를 둘러맸다. 그리고 몸을 풀고서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뒤처리 준비는 하고 가라고, 병신아!"
그리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만인의 탄식이 섞여 들려 오기 시작했다.
둥둥 떠다니는 얼음이 살갗을 찢는다. 날씨도 날씨지만, 이 호수는 정말 빌어먹게 차가웠다. 발도 닿지 않는다. 이 곳에 왔을 때 까지만 해도 설마 이 호수에 몸을 들이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개새끼야!"
갤러한은 악에 받쳐 소리치며 칼린을 향해 헤엄쳤다. 칼린은 눈 앞에 얼음들을 부셔가며, 그가 낼 수 있는 모든 기운을 짜내서 앞으로 가고 있었다. 갤러한에게는 그게 만용으로 보였다.
곧 칼린은 물에 빠진 얼뜨기에게 도달했다. 그는 물에 빠진 자가 최대한 체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있는 힘껏 그 자를 끌어안았다. 그제서야 그는 양복을 입고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 체온 전달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돌아가기 위해 뭍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무서운 기세로 갤러한이 헤엄쳐 오고 있었다.
"이 병신아-!"
칼린은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갤러한을 향해 헤엄쳐 갔다.
"갤러한? 왜 들어오신 거예요!"
갤러한은 거기서 크게 당황했다. 설마 칼린이 그렇게 아무 대처도 없이, 가면까지 쓴 상태로 사람을 끌어안고 헤엄쳐 돌아올 수 있을 것 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안도감과 함께 밀려오는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는 뻘쭘함에 말을 잇지 못하다가, 그 감정을 무마하려는 듯 욕설을 섞었다.
"진짜, 좆같은 새끼야! 똑바로 준비 좀 하고 가라고! 둘 다 죽으면 어쩔 뻔한 거야!"
"네?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돌아가자!"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린 뒤, 갤러한은 칼린의 팔을 잡고 헤엄쳐 나갔다. 욕설이 난무했었지만, 칼린이 본 그의 얼굴에는 분명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칼린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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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물에 빠진 자를 구출해 내고 뭍으로 건져 올리고 나서야, 칼린은 그것이 누구였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물에 빠졌던 것은 소냐였다. 평소에도 그 붙임성 좋은 성격으로 모두와 친했던 것일까, 어느새 주변에 칼타코의 주민들이 몰려와서 불안한 웅성거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칼린은 기절한 그녀의 가슴 께를 풀어 헤치고 머리를 뒤로 젖힌 뒤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이세계에서도 나름의 구조는 잡혀져 있었지만, 그 누구도 칼린만큼 정확하고 규격화된 심폐소생술을 알지는 못했다. 일단 그는 전생에 응급처치 자격증도 따 뒀던 사람이니까.
모두의 탄식속에서, 처음보는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칼린을 말리려는 자는 없었다. 그가 소냐를 구하려 한다는 사실은 서서히 얼어붙어가는 그의 머리와 양복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기묘한 동작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었다.
7분이 지났다. 칼린의 검은 머리와 정장은 이미 하얗게 얼었고, 가면 안쪽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인공호흡을 위해 조금 들어올린 가면 뒤로 보이는 입술은 이미 보라색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옷에 붙은 서리까지 털어내며 그 반복동작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현대의 CPR은 보통 2분 정도 마다 교대해 가며 이루어 진다. 그러나 칼린은 다른 누군가에게 이 작업을 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악바리로 버텨가며 어금니를 물었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적과 아군을 잊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조차도 잊고, 지금만큼은 모두의 의식이 한점으로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소냐의 안전을 걱정했고, 누군가는 칼린의 헌신에 감탄했고, 누군가는 이 상황에서 잊었던 인류애라는 것을 재회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들 그의 성공을 애타고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10분이 지났을 때, 칼타코의 주민 한 명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모아 눈물을 흘렸다. 정적속에서, 그 자를 필두로 한 명씩 무릎을 꿇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자리에 있던 침묵은 곧 엄숙함으로 바뀌어 갔다. 회색 빛 하늘 아래에 퍼지는 것은 헌신을 접한 자들의 흐느낌 소리와 숨이 나갈 것처럼 헐떡이면서 카운팅을 하는 칼린의 목소리뿐이었다.
14분이 흘렀을 때, 모두가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려는 소리. 칼린은 그 소리에 기뻐할 틈도 없었다. 그는 소냐의 폐에 쇼크가 오지 않도록 그녀의 입가에 담요를 덮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 께에 귀를 대고 호흡을 확인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무릎 꿇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그런것을 눈치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위와 추위를 잘 못 느끼는 그 라고 해도 한계는 있었다. 손은 동상 때문에 파랗게 질렸고, 옷이 얼어붙어 움직일 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바노프씨."
그는 원래 큰 목소리를 내려 한 것이었다. 목이 완전히 쇠어 버려 그러지 못했을 뿐이다. 다행인 것은 그 현장의 분위기가 거룩할 정도로 조용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체온을 잃지 않도록 안아주세요. 얼른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뇌까리듯 그렇게 말하던 그는 이성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이 무거웠다.
"저는 옷이 얼어서 체온조저른모시켜ㄷㄹ-"
검게 변하는 이성 속에서, 그는 마지막 말을 뱉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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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는 그 모든 현장을 바라보며 눈조차 감을 수 없었다. 마침내 칼린이 쓰러진 그 순간에, 그녀는 속눈썹에 서리가 생길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적속에서 이바노프보다 발을 먼저 옮긴 것은 이리하였다.
"너네들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칼린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만져 보았다. 동사한 시체도 이것보다 차가워 질 수는 없으리라. 그녀는 쉬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네들은... 진짜로 이런 멍청이가... 너네들의 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온거냐...?"
칼린의 얼어붙은 가면 위로 이리하의 눈물이 떨어졌다.
"정말로 이런 멍청이가 너네들의 위험을 방관하고 있던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녀는 어깨까지 떨며 흐느꼈다. 교단도, 영주도, 부대도, 작전도,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감정과 말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오히려 우리 대신 죽을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죽을 애인데…”
울분에 차서 쥐어 진 주먹에는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천천히 쓰러진 칼린의 몸 아래쪽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다들 부끄러운 줄 알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칼린을 들어 올렸다. 물을 잔뜩 머금고 얼어버린 몸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그는 살아 있었다.
부드럽게 열리는 인파들 사이로, 이리하는 천천히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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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상민아."
전상민은 체육관의 객석에 앉아 있다. 그는 선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아, 광민이형. 08학번 전상ㅁ-"
"아, 됐고. 나 그런거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죄송합니다."
바로 인사하려는 그를 만류하며, 그의 선배인 김광민이 자리에 앉았다.
"너 이대로면 학점 C도 못 받아. 애가 멀쩡히 잘 하다가 왜 대련에서는 그렇게 쪽을 못써?"
"아, 그게..."
시험 대체로 치루는 대련과목에서, 전상민은 승리한 적이 없다. 덩치도 좋고 자세도 훌륭한 그가 매번 대련에서 패배만 하자, 교수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지난 학기에 F학점을 줬었다. 재수강으로 다시 하고 있는 지금도 그는 대련에서 이긴 경력이 없다.
"술 없으면 말 못하냐?"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전상민은 대련중인 선배들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대련하는게 무섭습니다."
광민은 그 말에 잠깐 골똘히 생각해 보다가 뒤로 등을 기댔다.
"너 나름 선배들 한테도 할 말 따박따박 하고 다니고 발표같은 것도 잘하길래 담이 큰 줄 알았는데. 의외다, 야."
"아, 그게 막, 실전이 떨려요, 같은 느낌은 아닙니다."
"엥? 상대한테 쫄려?"
"그것도 아니고, 그냥... 제가 누구 다치게 할까 봐 무섭습니다."
전상민은 부끄러운 듯 뒤통수를 긁었다. 광민은 그 말에 잠깐 멍하게 있다가, 그 뜻을 곱씹어 보고 웃었다.
"이야, 이 새끼 자신감 좆되네?"
"개 멋집니까?"
"물건이다, 씹새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상민의 등을 두들겼다.
"...뭐, 네가 말하는 게 그딴 게 아닌 건 알겠다."
여기서 전상민은 조금 당황했다. 그는 피하고 싶은 주제에는 일부러 진심을 농담처럼 말하고 넘기고는 했다.
"그.. 너 OT때 방에 지네 들어왔을 때... 다들 죽이라는 데 굳이 얼굴을 있는 데로 다 찡그리면서 잡아가지고 밖으로 풀어 줬었잖아. 그 때 존나 웃겼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 전상민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렸다.
"그런 거 보면 뻔하지 새끼야. 너 그냥 뭐든지 다치게 한다 던가 그런 게 쫄리는 거 아냐?"
정곡이었다.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덩치는 곰 만해가지고... 누가 너한테 시비 털면 어쩌려고 그렇게 사냐?"
"...형은 저한테 시비터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까?"
"만약에 말이다, 만약에! 개새끼, 한수를 안 져요."
상민은 그 말에 조금 생각해 보다가 대답했다.
"저, 맷집 좋으니까..."
광민은 다시 한 번 전상민의 뒤통수를 후렸다.
"자랑이다 새끼야, 넌 졸업할 때 꼭 나 불러라. 멍석말이 뒤지게 해 줄게."
실없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서 광민은 담배를 꺼냈다.
"나와봐. 한대 대 줄게."
"아, 감사합니다."
"그...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어떠냐?"
광민이 분위기를 바꾸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너 경호원 할 거 잖아. 맞아?"
"...네."
"더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 싸우는 거지. 다들 그러고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제일 티가 많이 날 뿐이야."
"제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때리는 건 때리는 거 아닙니까?"
"뭐, 되도록이면 직접 싸우는 일이 없는 게 제일이긴 하지."
잠깐 말없이 담배를 태우던 둘은 너나할 것 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을 날씨에 산들거리는 바람까지, 기분 좋은 날이었다.
"애초에 누구 때리지도 못 할 놈이 경호학과는 왜 왔냐?"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그런데?"
전상민은 조금 우물대다가 담배연기를 마시며 답했다.
"그... 원래 체대 쪽으로 갈 생각 없었는데... 담임 쌤 추천으로 2지망에 넣어만 두고 있던 겁니다. 근데 1지망 떨어지고, 왜 인지 입시 운동 연습도 안 했는데 붙어버려서..."
"...와, 씹. 진짜 말하기 좀 그런 거였네. 다른 선배님들 한테는 말하지 마라."
다시 침묵.
"아, 모르겠다. 사실 네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네?"
"아니, 엄밀히 따지고 보면 내가 사람을 쉽게 팰 수 있는 강의같은 걸 하려는 거 아니냐, 지금? 그냥... 너가 한심한 거긴 한데, 세상 사람 모두 너 같으면 참 평화로울 것 같다..."
"...감사합니다."
"뭐래, 씨발. 한심한 건 한심한 거야. 21살이나 먹은 게 뭐 해치는 게 무섭다고 이길 대련도 털리고 다녀? 어휴..."
광민은 그렇게 말하고서 꽁초를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전상민에게 한 개피를 더 꺼내 줬다.
"아, 선배 앞에서 줄담은 좀-"
"새끼야, 슨배가 주는 건 괜찮아. 그냥 펴."
기어이 상민에게 담배를 물리고서 그는 웃었다.
"새끼 진짜,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제가 좀 귀엽습니다."
"그 와꾸로 말하면 설득력이 있어요? 없어요?"
시시덕거리며 아무 일이 없어도 즐거운 이 기분이 왜인지 전상민은 참 오랜만이라고 느꼈다. 이 일상감이 그리웠다. 이상할 정도로 밝은 날에.
"뭐, 그래도 슬슬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상민아."
"갑자기 또 태세변환이십니까?"
"갑자기는 아니고. 너도 바뀌었잖냐."
"무슨... 저 형 만난지 1년됐습니다."
"아닐 껄?"
"아니라니..."
"손 봐봐."
깔리는 목소리. 전상민은 자신의 손을 본다. 젖어 있는 손에 붉게 물집이 터져 있다. 떠듬떠듬 붙어있는 것은 그의 손의 살점인지 다른 누군가의 살덩이인지 알 수 없다.
"앵간한 연쇄살인범보다 사람을 많이 죽여 댄 너한테 무슨 조언이 필요하겠어."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동시에 가까워지는 느낌도 든다. 더 이상 그의 선배의 목소리는 아니다. 점점 그를 감싸고 있던 환경이 바뀌는 것이 느껴진다.
익숙한 하늘. 매캐한 연기. 다시 시야를 정면으로 돌리면, 언젠가 봤던 풍경이다. 말 발굽에 찌그러져 눌린 시체들, 막대에 대충 휘감겨져 있는 적의 창자, 그 위에 꽂혀 있는 머리.
적의 호령에 실금해버린 신병, 팔에 괴사가 와서 썩는 냄새가 나고 있는 부상병, 여러가지 액체가 섞여서 불쾌하게 끈적거리는 참호, 그 어떤 존중도 허락받지 못한 채 처참하게 즐비해 있는 시신들.
"이제 익숙하잖아? 사람 죽이는 것 쯤은."
그의 옆에 있던 재떨이 위에는, 차다레마의 머리가 그를 노려보고 있다. 그 때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지 않는다.
"그냥 시끄럽다고 사람 목을 잘라버릴 정도로 성장했잖니."
선배는 더이상 없었다. 그 자리에는 언젠가 봤었던 미쉘의 종자가 앉아 있었다.
"너 내 이름은 아냐?"
그는 비웃으며 자신의 목을 긋는다. 곧 찐득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목이 떨어져 나가 흙바닥을 몇 바퀴정도 구른다.
"그렇게 망설임없이 모든지 해칠 수 있던 거면 난 왜 죽게 둔거야?"
어느새 전상민의 무릎 위에는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는 발이 없었다.
"왜? 괴물새끼라 괴물새끼들만 이뻐해 주는 거야?"
"...아니야."
어느새 그는 다시 칼린이 되었다. 그는 천천히 마리를 끌어안아보려 한다. 그러나 이미 그 품속에는 누구도 없다.
"오래 전~ 앤의 집에서는~ 돼지가 세 마리~"
웃음 섞인 동요소리. 비명소리. 패닉이 온 병사들이 이빨을 부딫히며 떠는 소리. 격정적으로. 그는 이 풍경을 기억한다.
"죽기 싫어요! 칼린씨! 죽기 싫었어요!"
"사실 알고 있었잖아? 우리 영주님은 무죄였다는 걸..."
"네가 그러고 있으면 너와 같이 싸우는 동료들까지 위험에 빠지게 돼."
칼린은 그 참상속에서, 굉음속에서, 악취 속에서 모든 감각을 닫는다. 눈을 감는다. 자신을 증오하는 자들에게 몸을 맡긴다. 그리고 천천히, 사지가 찢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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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구나."
눈을 뜨니 백색의 천장을 푸르스름한 빛이 비추고 있었다. 방 안의 불이 꺼져 있어 창밖으로 들어오는 약한 푸른 빛만이 눈 앞을 비춰준다. 그는 이런 분위기가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칼린은 조용히 천장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본다. 그의 침대 옆쪽에 이리하가 앉아 있다. 그녀의 은발은 이런 분위기에 딱 맞는 느낌이었다. 해가 덜 뜬 푸른빛 새벽에 아직 걸쳐져 있는 달처럼 보였다.
"발 끝부터 조금씩 움직여봐. 어때?"
"...소냐는 괜찮나요?"
"네가 구한 여자애 말하는 거면, 괜찮아. 열외시키고 지금은 쉬는 중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부드러워서 잠이 오게 만들었다. 그러나 칼린은 요즘 별로 자고 싶지 않았다. 그는 발 끝자락부터 움직이며 조금씩 몸을 풀었다.
"...몇 시죠? 제가 하루 종일 잠들었었나요?"
"그런 건 걱정 안 해도 돼. 이제 18시쯤이니까."
"아, 새벽이 아니었군요. 그러면 뭐... 한 4시간 기절했던 건가요?"
이리하는 말 없이 옆의 탁자에 있던 잔을 들었다.
"마셔. 조금 식었지만... 빅센마르크에서는 이것만 있으면 담요도 필요 없어진다더라고."
잔에서는 옅게 생강냄새가 났다. 칼린은 그 잔을 가까이로 끌어 한입 마셔 보았다. 달큰하게 그의 목 안쪽으로 스며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네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많아. 네 앞으로 선물도 많이 왔고 말야."
"...네?"
"부대원 모두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네가 눈을 뜨면 작게 파티라도 하려는 모양이야. 그래도 역시... 오늘은 다시 자자."
"잠깐만요, 이리하씨..."
이리하는 칼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기절한지 사흘이 지났어. 다리는 완공됐고, 넌 더 이상 외로울 필요 없어."
그녀가 평정을 가장하며 덤덤하게 뱉은 그 말은, 어딘가 슬프고 애환이 느껴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