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여진(餘震)
"슬슬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말이지..."
이리하는 눈가를 조금 찡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색 하늘에서 작고 하얀 것이, 산들하게 떨어져 내려온다. 칼린의 얼굴은 복잡 미묘하다. 반기면서도 걱정이 담긴 눈. 아름답긴 하지만, 이 상황 자체는 달가운 것이 아니다.
"눈이 온다."
칼타코는, 본연의 모습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소금부대원 전원이 주둔부대의 텐트로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허겁지겁 들어오는 릴로까지 확인하고서 기욤은 텐트의 문을 닫았다.
"아... 우려하던 일이 터졌네요. 결국 눈이 옵니다."
기욤은 그렇게 말하고서 뒤통수를 긁었다.
"곤란하네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와 버리고... 배려가 없다니까요, 이곳은."
"그 정도로 곤란한 거예요?"
릴로의 질문에 기욤은 담배를 꺼내며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엄청 곤란하다구요. 다리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는데, 눈은 내려오고... 이제부터 한 일주일은 온도가 계속 떨어질 테고, 운 나쁘면 호수까지 얼어버릴 거라구요. 포장로에 눈 쌓이면 안되니까 제설작업도 시켜야 하는데, 그걸로 인원 배분하면 또 다리공사가 연기 될 거고. 아, 진짜, 똑바로 좀 일해줬으면 한다구요. 다들 게을러 터져서는..."
그녀는 고개를 돌려 텐트 안에 걸린 종이를 보았다. 거기에는 몇 번이고 고쳐 쓰며 갱신된 '무사고 OO일 기념'이 걸려 있었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제쳐 두고, 저런 것을 달아 두는 것은 어느 세상이든 똑같구나, 하고 칼린은 생각했다.
"일단 최대한 최대한 효율 좋게 인원배분을 해야 할 텐데. 이대로면 여러분이 떠나시기 전까지 거주구 건설을 마치는 건 어떻게든 불가능할 것 같네요. 이거, 텐트에도 방한용품들을 주문해야 겠어요."
"조금 이른 것 아닙니까?"
"너무 늦은 거지."
아스타의 질문에 답한 것은 도르베였다.
"첫눈이 내렸다. 날은 금방 추워질 것이고, 눈은 얼마나 더 올지 모르지. 상황이 장기화 된다면 다음달 내로 찾아올 폭설도 맞이하게 될 것이고, 그 때까지도 거주지구가 완성되지 않는다면? 전략적 후퇴밖에 퇴로가 안 남게 되는 거다."
도르베의 말에 일동이 잠깐 조용해졌다. 곧 기욤이 떠듬떠듬 말을 꺼냈다.
"...정답이십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래서 백인대장님은 어떤 대처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것이..."
그녀는 뒤통수를 긁으며 답을 피했다. 잠깐 정적. 곧 칼린이 손을 들었다.
"저기... 제설은 주둔병력들과 우리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뭐 씨발?"
륑게가 목소리를 높였다. 기욤도 조금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 우리가 직접이요? 하지만 요나 지휘관님께서도 우리는 되도록 감시만 하라 하시지 않으셨나요?"
"특정 위기사태에 직면하게 될 경우에는 도우라고도 하셨어요."
"그거는 아마 그... 폭동 진압같은 경우를 말하시는 걸 텐데..."
기욤이 곤란하다는 듯 대답한 것에 갤러한이 조금 덧붙였다.
"그리고 주둔병력도 이미 일이 바빠. 감시가 개꿀이라서 부각되지는 않겠지만, 이분들도 지금 삼교대로 하시는 일이 많다고. 숲 개간이나 지형 측량같은 일 말이지."
칼린은 갤러한이 자신의 말에 대답한 것에 흠칫 놀랐다가 곧 고개를 떨궜다.
"죄송합니다..."
"아뇨, 일의 진척도를 생각하신다면 당연히 생각해 볼만한 일이죠!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는 손사레를 치며 칼린의 사과를 받고서 웃었다.
"지금은, 뭐. 일단 인부들을 빡쎄게 굴릴 수 밖에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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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이 바뀌었다. 열외자 선정 기준이 바뀌었고,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은 짧아졌고, 감시는 더 삼엄해 졌다. 이것들을 감안하고도 노동 환경 자체는 소금부대가 오기 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지만, 나날이 바뀌어 가는 혹독한 환경이 일을 더 힘들게 하고 있었다.
그래도 바뀐 정책은 효과가 있었던 걸까. 다리는 슬슬 그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돼."
이바노프는 그렇게 말하며 아래에서 건내 주는 망치를 잡았다.
"뭐가?"
소냐의 질문에, 이바노프는 못을 박으며 대답했다.
"다리가 완성되고 나면 우리가 쉴 수 있을 것 같나?"
소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바노프는 그런 그녀를 한번 바라보고 다시 망치질을 시작했다.
"이번 공사가 끝나면 바로 거주구 공사를 시킬 거다. 눈은 우리 예상보다 일찍 오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몇명이나 죽을 것 같아?"
"...구호부대가 오고 나서부터는 많이 편해 졌잖아. 누가 죽을 것 같으면 도우러 오지 않을까...?"
"아니. 돕지 않아. 저들의 상냥함을 바라면 안돼. 최악을 상정해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아래에 있는 인부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가 타고 있던 크레인이 천천히 내려갔다.
"세라와 푸르투가가 꽤 많은 것을 알아봐 줬어. 아마 내일 쯤, 신임 대사의 선별시험이 시작될 거라더군."
"...그래서 어쩌려는 건데."
"슬슬 훈련을 시작해야 되겠어. 오늘 저녁부터 지하실에서 독립군에게 총기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한다."
"땅굴은 어느정도 팠는데?"
"이미 신설 대사관과 지하통로를 연결해 놨어. 남은 건 전화국에만 연결하면 돼."
이바노프의 말에 소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칼린이 있는 쪽을 잠깐 바라보았다.
"교단의 협상조건 중에 그런 게 있었지. 소금부대원들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응."
"우리는 저들도 공격할 예정이다."
"...왜?"
"같이 일해보고 나서 느꼈다. 저들의 영향력을 알 수 있었어. 우리를 증오하던 그 백인대장도 설설 기더군.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바노프는 그렇게 말하고서 크레인에서 내려와 수레를 향해 걸어갔다.
"저 '상징성'을 부수는 것은 우리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아... 그런 건가. 그래도 괜찮겠어? 교단과의 협상조건을 어겨도..."
"이건 균형을 맞추는 일이기도 해."
"뭐?"
"상회측에서는 소금부대를 공격하라고 했었다."
소냐는 이바노프의 옆으로 다가가 수레를 같이 잡았다.
"그 라드라는 사람이 상회측 내통자 아니었어?"
"그래.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더군."
"버림패 라는 건가?"
"우리는 모르지. 일단 공격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래."
그들은 잠깐 말없이 수레를 끌었다. 비어 있던 수레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독립에 성공한다면..."
이바노프가 그렇게 운을 뗐다.
"그 때 세라는 술집을 차린다더군."
"...그래?"
"그래. 코비는 장인을 육성하는 학원을 세운다고 했고."
"코비가 사람을 가르친다고? 상상이 잘 안 가는데."
"나도 잘 안 떠오른다."
무뚝뚝하게 들리지만 웃음기를 띄고있다. 빈 수레는 계속 구른다.
"아가일은 학교를 차리고 싶다 하더군. 세라가 도와 주기로 했어."
"좋네. 그 아저씨, 되게 푸근해서 세라보다 선생님같은 느낌이었어."
"독트린은 마가렛에게 고백한다 더라고. 주례는 나에게 맡긴다고 하더군."
"하하, 아빠가 주례를 선다고? 엄숙하긴 하겠네!"
"놀리지 마라. 바바라에게 교단식 연설을 배우고 있거든. 너도 분명 깜짝 놀랄 거다."
활기를 띄는 대화. 수레가 멈추고, 이바노프와 소냐는 건설물자를 옮겨 넣는다.
"푸르투가는 하고 싶은 거 없대?"
"음... 따로 이야기를 안 해주던데, 아마 이번에야말로 고백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는 그 아저씨도 쫄보니까 말이야. 그런 극적인 상황이 아니면 말을 못 꺼내는 걸까?"
"그런 걸지도. 그래도 분명 좋은 남편이 될 거다."
"그건 인정해."
무거워져서 질질 끌리는 듯한 수레의 소리. 이바노프는 알게 몰게 소냐가 힘을 덜 주도록 그 수레를 끌었다.
"... 우리 모두 일상을 되찾을 거다, 소냐."
무거운 수레를 끌어당기며 이바노프는 드물게도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막하고 평온한 거리에서,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마시고, 다시 찾아온 철새들을 향해 모이를 던지고, 광장의 분수대에는 사랑하는 연인들이 모일 거다. 평화롭게 일상을 누리며 평일에는 거리를 사랑하고 주말에는 기도할거다. 우리 손자뻘의 아이들에게는 우리가 겪어온 모든 고통들을 한순간의 농담거리 정도로 생각할 정도로 행복한 삶을 선물할 것이다."
소냐는 가만히 이바노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뺨을 타고 흐른 땀방울들은 수염에 매달려 빛을 내며 얼어 있다.
"... 그 모든 것을 구가하면서, 우리는 절대로 네 이름을 잊지 않을 거야."
"... 말뿐이라도 고마워."
수레가 멈췄다. 다시 한 번 그들은 크레인의 앞에 섰다.
"... 이번에는 네가 올라가렴. 감시병들이 보고 있다."
"알았어.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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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오지 않고 있다. 그것은 다행이지만, 날은 계속 추워지고 있었다. 호수에 낀 살얼음이 평소보다도 그 풍경을 정적으로 비추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거대한 유리알처럼 빛나는 그 호수를 바라보며 이리하는 진심으로 인부들의 안전을 기원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라드가 다가왔다.
"왜?"
"지나가던 길이야. 그냥 호수나 보고 있으라고."
이리하도 굳이 동료들과 벽을 두지는 않는다. 라드라는 사람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지, 굳이 시비를 틀고 싶지는 않았다. 라드의 말 대로 그녀는 그를 무시하고 다시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물론 세상일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그녀는 그냥 못들은 척 라드의 말을 넘기려고 했다.
"넌 교단에게서 무슨 임무를 받고 이 부대에 들어와 있는 거지?"
그러나 라드는 무시할 수 없는 주제를 던졌다.
"... 교단?"
"이봐, 뻔하게 굴지 말자고."
라드는 이리하를 지나쳐 바닥에 대충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리하 쪽을 돌아보지 않으며 말했다.
"다른 7명은 의심할 건덕지도 없었지. 출처가 확실한 팀 원생텀 애들과 칼린은 제외, 참전용사에다가 요나에게 충성심이 높은 도르베도 제외. 아스타도 뭐, 팀 원생텀이 곁다리 느낌이기도 하고, 걔는 그런 두루뭉술한 걸 믿을 타입은 아니거든. 그런 건 감수성이 조금 필요하니까. 조사해 볼 대상은 핀하고 너 정도밖에 없었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 주머니에서 조약돌 두개를 꺼냈다. 초록색 돌과 하얀색 돌이었다.
"그리고... 네가 지난번에 식탁에서 꺼냈던 말. 그걸로 확신했지. 핀은 기본적으로 착한 놈이지만, 그걸 실현할 행동력은 없어. 딱 잘라 말해서 어떤 조직이든 첩자일같은 걸 맡길 타입은 아니었다 이거야. 소금부대 안에 있는 교단측 내통자, 너지?"
이리하는 입을 다물었다. 라드의 머리가 비상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교단이 첩자를 보낸 것까지 눈치채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다행인 것은 그가 지금 경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라드의 목을 잘라낼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경계 하지마. 딱히 그걸로 약점을 잡으려던 건 아니니까."
"...그럼?'
"난 상회측 내통자거든. 다임상회에서 파견됐지."
교주에게 상회에서 소금부대 안에 내통자를 풀었다는 사실은 이미 들은 것이었다. 다만 그녀는 그 내통자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왜 말하는 거지?"
"내 명줄이 간당간당하거든. 살아남으려면 어떤 정보라도 얻어서 이용해야 된단 말이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이뤄지는 대화. 어느 쪽도 상대를 완벽하게 신뢰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자, 말 해 보라구. 너도 이번 일에서 맡은 배역이 있을 거 아니야."
"그건 협상을 제안하는 거야?"
"네가 말해주면 상회쪽에서 너네에게 숨기는 것들을 말 해줄게."
"너네 뒤가 구린건 이미 알고 있어. 교주님도 거기까지는 파악했거든."
"자세히 알면 어떻게 떼어낼지 도움될 거 아니야?"
그녀는 그 말에 답하지 못했다. 파고들 기회라는 뜻이었다.
"먼저 말하지. 상회측은 지금 병력을 준비하고 있어. 에테롬은 자신만의 부대를 완성시켰고, 이번 독립작전이 성공하면 이 곳을 거점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나갈 생각을 하고 있어."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믿든 말든 자유야. 무슨 말인지 알지?"
이리하는 잠깐 생각해 보았다. 라드의 말이 완전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다가오는 요나의 압박에 다임상회는 몰락의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 그런 일을 꾸미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내 배역 말인가."
"그래."
"헤드헌팅이었지."
그 말에 라드는 어이가 없는 듯 웃음을 머금고 이리하를 돌아보았다.
"...뭐?"
"전후복구부대. 영웅이 될 수 있는 자리. 거기에서 유능한 인재를 뽑아 성장 가능성이 있는 자를 교단에 들여오려고 했었다."
애초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도 교단의 일이니까 지원하는 게 당연했고 말이지, 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하하... 그래서 누구 한 명 건졌나?"
"그것까지는 비밀이다."
"그래서, 그런 임무를 갖고 계셨던 거면 이번 독립작전에서는 무슨 일을 맡았는데?"
"관조(觀照)."
"농담하지 말자구."
"진짜야."
"진짜?"
"응."
평소와 같은 알 수 없는 표정. 라드는 상대하기 참 까다롭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미묘한 진심을 느꼈다.
"하하, 너네 조직은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돈냄새 따라 움직이는 뱀 따위가 이해할 리 없지."
"뭐라고 말하던."
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뭐... 교단 측에서는 상회에게 숨기고 있는 게 없는 건가?"
"우린 너네와 다르다. 숨기는 건 없어."
"난 곧 상회에게서 벗어날 거야. 그렇다 하더라도?"
"대답은 바뀌지 않아."
둘은 잠깐 서로를 노려보았다. 곧 라드가 웃으며 자리를 비켰다.
"싸울 생각은 없어. 넌 못이길 것 같거든."
"머리는 좋군."
"고마워라. 그럼 뭐, 나중에라도 떠오르는 게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그는 엉덩이를 털고서 발을 옮겼다.
"칼린에 대한 정보와 바꿔 줄 테니까 말야."
"뭐-"
허를 찌르는 말에 이리하가 놀라서 질문하려 할 때였다. 얼음이 깨지며 물이 첨벙거리는, 이런 날씨조건에서 들어서는 안될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호수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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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냐!"
이바노프는 그렇게 소리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삽시간에 현장의 분위기가 변하고 있었다. 당황한 사람들, 그걸 막아내는 감시병들에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모두가 이 방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소냐는 살얼음이 낀 호수 속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첨벙거리는 물 소리 사이에는 바삭거리며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칼타코의 호수에 빠진 자는 1분, 길어도 2분 안에 구해내지 않으면 보통 죽는다.
"지금 간다!"
옷을 벗으며 소리치는 이바노프를 누군가 막아 섰다. 기욤이었다.
"이런 씨발, 작업장 이탈하지 말고 다들 자리로 돌아가!"
"거기서 비켜라!"
"저기 들어가게? 너도 시체 되는 거야. 일 귀찮게 만들지 말고 자리에 앉아."
"내 딸이다!"
"하, 여기서 뒤진 놈들이 전부 누구 님 아들딸이지. 안 돌아가?"
기욤은 검을 빼 들었다. 이바노프는 혼란과 격정속에서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즉결 처형권'이라는 거 있긴 한데 쓸 일이 없었거든. 오늘 한번 써봐?"
주변에 기욤의 병사들도 검을 뽑아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기서 이바노프가 무기를 꺼낸다면 최악의 사태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이바노프의 손은 이미 그의 무기를 꺼내기 위해 허벅지로 향하고 있었다.
"뭘 봐 씨발, 구경 났어?! 다 돌아가!"
감시병들의 위압적인 외침. 첨벙거리는 물소리. 점점 잦아들어가는 소냐의 비명.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 대장님!"
"뭐! 나 바쁘다!"
"저기!"
부대원 하나가 경악을 담아 외쳤다. 기욤이 호수 쪽을 돌아봤고, 곧 첨벙, 하는 소리가 한번 더 울렸다.
"...이런 씨팔!"
기욤이 검을 버리며 앙상한 다리 난간에 기대 호수 쪽을 내려다보았다. 이바노프도 정신없이 그 옆으로 달려가 호수 쪽을 바라보았다.
속을 읽을 수 없었던, 이런 날씨에도 항상 가벼운 검은 정장만을 입고 있던 가면 쓴 남자. 그 자가 방금 호수의 살얼음을 깨기 위해 돌을 던졌다.
"칼린님! 제발 그냥 가만히 있으-"
그리고 기욤이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그 죽음의 호수를 향해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