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0화 〉여진(餘震) (110/164)



〈 110화 〉여진(餘震)

시종들은 아침부터 꽤 비상이었다. 참 오랜만에 요나가 제대로 영주실을 나와 식사를 챙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조금 비틀대면서도 똑바로 걷고 있었다. 몇일간  때에도 입었던 갈아입지 않은 옷을 벗어 던지고 새 정장을 꺼내 입었으며, 여전히 지치고 괴로워 보였지만 움직임은 안정되었다. 그녀는 조금 탁해진 눈으로 자신의 시종 하나를 불러 세웠다.


"네! 영주님!"
"...필요한 게 있다. 준비해 다오."
그녀는  시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조금 떠듬대다가 입을 열었다.

"오로아나 상회와 클래프 상회에 연락을 돌려라. 오늘 점심에 만나고 싶다고."
영주실의 전화기가 아닌, 굳이 시종에게 그 말을 전한다는 것. 그것은 요나가 이번 만남을 '조용하게' 처리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부뚜막에 참새가 가족이 생겼다고 말하면   다 알아먹을 거다. 서두르거라."
"...네!"
시종은 서둘러 벨카의 전화국으로 향했다. 요나는 비척거리며 식탁으로 발을 옮겼다.

#


"이거야 원... 설마 클래프 상회 분까지 계실 줄은 몰랐는데요..."
약간 마르고 끝이 말린 콧수염을  남성이 뒤통수를 긁으며 옆에 있는 창백하고 외안경을 끼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외안경을 낀 남자도 조금 곤란하다는 듯 땀을 닦아냈다.


"갑자기 이렇게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둘은 서로의 존재에도 당황했지만, 가장 그들을 당황시킨 것은 못 본 사이 눈에 띄게 수척해진 요나의 안색이었다. 요나는 눈 앞에 놓인 케이크를 옆으로 밀어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두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름 윌레인에서 가장 잘나가는 상회들의 대표들을 불러서 부탁하는 것이라면, 분명 상당히 희소한 것을 찾고 있는 것이리라. 게다가 전후 복구부대의 지원으로 계속해서 몸집을 불리고 있는 둘이었다. 아마 요나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중 한쪽이 우세를 점하게 되는 요소가 되리라.

'...사람을 찾는 것이라면 우리 상회는 받지 않습니다."
"아뇨, 그런  아닙니다. 정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찾기 어려울 수도 있고, 어쨌든 빨리 구해야 하는 상품입니다. 들어 주시겠습니까?"
요나가 직접 부탁한 것이 아닌, 시종 하나가 '개인'으로서 전달한 부탁.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듣고 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손 털고 돌아갈 수 있는 안건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둘은 약간 긴장을 삼키며 몸을 숙였다.

"말해 보시죠."
먼저 입을 연 것은 클래프 상회의 대표였다. 오로아나 상회의 대표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아끼고 있다가, 곧 요나의 눈빛에 굴복하고 몸을 뒤로 뺐다.


"들어 봅시다."
요나는 둘의 말을 듣고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몸을 기울이고 말했다.


"'태양광'을 발하는 마법이 담긴 마정석이 필요합니다."
"...태양광이요?"
그녀의 말에 두 상회의 대표 모두 고개를 기울였다.

"그 말은... 발광은 발광인데, 태양 빛만큼 밝은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태양광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요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담배를 조금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성냥이 긁히는 소리가 조용히 응접실에 퍼졌다.

"특정한 성질을  마법을 담은 마정석이라..."
클래프상회의 대표가 창백한 턱을 긁으며 생각해 보았다. 요나는 담배를 들이 마시며 성냥을 흔들어 껐다.


"어렵습니까?"
"흠... 너무 특정된 종류의 마법이라서... 수요층이 없으니 그런 마법이 있는 지도 모르는 거니까요. 그리고 설령 그런 마법을 찾아내더라도 그게 태양빛인지는 어떻게 검증한단 말입니까?"
"그쪽은 걱정하지 마시길. 제게는 구분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뒤, 눈만 치켜 올리며 앞의 둘을 노려보았다.

"그러니 부디, 거짓말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상회 대표들은 침을 삼키며 머릿속에서 열심히 계산을 하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 후 요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덩이가 아닌, 여러개. 최대한 많이. 태양광을 담아내야 합니다. 가격은 부르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까."
마법이 담긴 마정석은 안의 마법이 무엇인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그것이 쓰잘데기 없는 마법일 경우, 오히려 아무것도 등록되지 않은 마정석보다  경우도 있다. 태양광이 담긴 마정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의 가치는 그냥 돌맹이와 별 다른 것이 없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그 가치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너무 좁은 범위'의 상품을 찾아내는 수고에 대한 문제였다.


"솔직히 말해서... 부탁하신 상품은 가격보다는 찾아내는 데 수고비를 더 받아내야 할  같습니다. 왜 그런 것을 찾으시는 지는 모르겠지만, 태양광을 담아낸 마정석이라니... 그런 거에 수요가 있을리 없습니다. 확실히 말해서 윌레인은 커녕 지구상에 없을 수도 있는 거구요."
"없다면 만들 방법이라도 찾겠습니다. 일단 찾아주세요."
"만약 우리가 못 찾더라도 비용은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것이..."
"저는 분명하게 제 부탁을 전달했습니다."
상회측에서는 낭패였다. 8영주의 부탁이니 거절하기는 힘들고, 무작정 찾아다니기도 힘들다.

"...일단 찾아보겠습니다만, 딱 3개월만 찾아보겠습니다. 대형 상회 두 곳  전국을 3개월간 뒤져봐도 나오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3개월은 너무 깁니다."
"...요나경, 죄송합니다만, 혹시 그런 것을 그냥  하고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3개월도 상당한 무리를 하는 겁니다."
그 말에 요나는 준비해둔 종이를 꺼내 그들에게 들이밀었다.

"최대 1개월. 빠르게 찾을 수록 더 큰 혜택을 드리겠습니다. 넘겨드린 종이에는 제가 제안하는 혜택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혜택을 주신다 해도..."
무리인 일은 무리인 거다, 그렇게 말을 끝냈어야 했다. 그러나  전에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 버렸다.

둘은 한참을  종이를 돌려 읽어 보다가, 너나 할 것 없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이게 가능하다고 보시는 겁니까?"
요나는 다시 담배를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깊게 어둠이 깔려 있었다. 믿기 힘든 것이 당연했다.

"...가능합니다. 전부 이뤄드릴 수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아무리 8귀족이시지만-"
"곧."
그녀는 조용히 말을 끊어냈다.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담뱃재를 털어내며, 그녀는 상회 대표들을 바라보았다.


"곧 윌레인 최고의 상회였던 다임상회가 무너질 겁니다."
상인 둘은 멍하게 요나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되는 말이지만, 그녀의 말에는 설득력이 넘쳤다.

"그리고 그 곳을 몰락시키는 것은 제가 될 겁니다. 그 과정에서 이권을 두분에게 분할시키는 것도 제게는 가능한 일입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러니까 부디... 의심하지 마시고 따라 주시길.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태양광을 담은 마정석을 찾아내면 되는 일입니다. 지금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그것을 우선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적. 그 셋 사이에는 창 밖으로 내려오는 햇빛이 있었다. 정적속에서 오로아나 상회의 대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지금부터 모두에게 지령을 내리겠습니다."
"그래주시죠."
오로아나 상회의 대표는 그렇게 말하고서 공손히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이제  안에는 클래프 상회의 대표와 요나, 둘만이 남게 되었다.


"요나경. 우리 상회는 지금 칼타코에 공사 물자를 운송하는 일도 겸하고 있습니다만..."
"네.  작업은 그대로 해주시면 됩니다."
"...그렇습니까."
요나의 눈은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새어 나오는 햇빛에 시선을 빼앗긴 듯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왜 일까, 어딘가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영주의 말에 의문을 제기한 것. 그만큼의 리스크를 걸고서 이런 질문을  것은, 상인으로서의 직감이  부탁에 담긴 비밀이 값진 것이라고 냄새를 맡았기 때문 일까.


요나는 화내지 않았다.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멍하게, 꿈속에 있는 것처럼, 마치 물었으니 대답한 다는 듯 당연한 감각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조한 자가 있습니다."
천천히 입을 여는 그녀는, 새어 나오는 약한 태양빛 아래에서도 찬란한 금발을 자랑했다.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왜 인지 소름 끼쳤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자를 잡아 둘 준비도 해야 하는 겁니다."

#


"도르베!"
의자에 앉아 주민들을 감시하던 도르베는 자신을 부르는 아스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핀과 낯선 여성이    있었다. 중년에 곱슬거리는 장발을 하고 있는 자였다.

"찾고 있었어!"
"...그 여자는?"
"응. 지금 소개해 주려고 데려 왔어."
아스타와 핀은 조금 긴장했기에 침을 삼켰다. 둘은 그녀를 소개하기 위해 도르베가 조금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이쪽은 세라에요. 그... 통역 관련으로 우리를 도와 주시고 계시거든요..."
핀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녀에 대한 말을 꺼냈다. 세라는 그런 그를 살짝 옆으로 치우며 앞으로 다가갔다. 곧 도르베와 그녀가 둘이 마주하는 형태가 되었다.

"반가워요. 세라라고 해요."
도르베는 그녀가 내민 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아스타와 핀이 황급하게 끼어들었다.


"아니, 도르베! 내가 이야기 해 보니까  좋은 사람이거든? 일단 그렇게 경계하지 말고..."
"네, 진짜 좋으신 분이거든요! 처음 알게 된 것도 제가 조금 곤란했을 때 먼저 다가와 주셨던 거예요!"
도르베는 세라가 아닌  둘을 바라보고서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라라고 했던가. 꽤 격식 있는 윌레인어구나. 다만 억양은 살아있지 않아."
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세라를 노려보았다.


"교과서적인 느낌이군. 어디에서 말을 배운 거지?"
도르베의 경계심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의문 자체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아스타와 핀이 너무 빨랐던 것이라고 판단하고 세라를 치우려  때였다.

세라가 도르베에게 달려들었다.


"무, 무슨-"
"이야, 젊다는 느낌이네요, 도르베씨는."
그녀는 도르베를 끌어안았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당황했다.


"놔라! 죽여 버릴 테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무심코..."
세라는 몸을 떼며 뒤통수를 긁었다.


"까칠한 것이 제 아들이 떠올라서 말이죠. 애가 18살이   까지는 어찌나 까칠하던지!"
"난 20살이다! 앞으로 또 그런 식으로 덤벼오면 베겠다!"
도르베는 크게 당황해서 몸을 뒤로 뻈다가, 곧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 진이 빠지는군. 자리로 돌아가라. 넘어가주마."
"그럼 우리 이제 친구 할까요?"
"...재수가 없으려니..."
"세라씨! 오늘은 이정도로 됐으니까!"
"그래! 일단 돌아가자! 응?"
계속해서 다가가려는 세라를 아스타와 핀이 붙잡았다. 멀어져 가는 셋을 보며 도르베는 조금 질린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


"헤츙!"
저녁을 먹는 중, 갑작스레 릴로가 해괴한 소리를 냈다. 모두의 안목이 집중되자 릴로는 조금 머쓱한 듯 코를 긁었다.


"뭐냐, 방금 거?"
"...그냥 재채기. 신경 쓰지마."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가, 곧 다시한번 세게 재채기를 했다. 핀이 그런 그녀에게 냅킨을 건내 줬다.

"아... 고맙다..."
"아뇨... 날이 추워 지기는 했죠."
웃으며 꺼낸 그 말이 대화의 화두가 되었다.


"확실히. 엄청 빨리 추워지더라. 내일 즈음이면 0도 찍을  같아."
"아직 다리는 반도  지었는데... 호수가 얼면 성가셔 지겠어."
"작업 효율도 떨어질 거고 말이야. 적어도 일주일 내로는 끝내 줬으면 한다고."
하나 둘 씩 그렇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내일부터는 저기 쟁여 뒀던 모포 두르고 하자. 확 추워질 테니까."
"머플러같은 건 없나?"
"모포 자르면 머플러지,  까다롭게 구냐."
"아니, 재질에 관련된 문제였다만."
"다른 것 보다도 방한모랑 장갑이 중요할 거라고. 열은 머리에서 다 빠져나가거든..."
"네가 뭘 안다고 깝치냐?"
"하하, 륑게... 내가 이런 상식을 어디에 썼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기분 나쁜 새끼."
여기저기 나오는 대화에 이리하는 조심스럽게 참가했다.


"그래서 말인데..."
"응?"
"주민들에게도 방한도구를 지급하는 게 좋지 않겠어?"
이리하의 말에 대화가 멈췄다. 그녀는 그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주민들 쪽이 우리보다 추울 테니까. 그쪽은 호수에 몸 담구면서 일하기도 하고, 사실 뭐가 어찌됐든 진짜 일하는 건 그 쪽 이잖아?"
자연스럽게 식사로 시선을 옮기며 이리하는 그들의 눈치를 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부대원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침묵을  것은 침을 뱉는 듯한 소리였다.

"풉..."
그 소리에 뒤이어, 마치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릴로가 참을 수 없다는  몸을 뒤로 제끼며 웃었다.


"하하! 하하하! 너 꽤 귀여운 면이 있구나, 이리하!"
"...왜?"
"하하하! 비웃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진짜! 나쁜 게 아니라, 다시 봤어! 이리하!"
릴로 다음은 갤러한이었다. 아스타도, 륑게도, 소니아도 전부 웃기 시작했다.

"나, 참... 일하는 사람들에게 방한 도구라니..."
"웃긴 말을 했던가?"
"그야 웃기지. 우리가 걔들한테 방한도구를 왜 지급 하겠어!"
"너무 그렇게 말하지는 말자! 좋은 마음으로 한 말일텐데!"
"뭐, 그래도... 반숙녀석한테는 하나 정도 꼬불쳐줄까?"
"그걸로 내기 걸고 한판 하면 딱이겠네."
그녀가 제안한 의견은 마치 처음부터 농담거리였다는 듯 재차 언급조차 되지 않고 넘어갔다. 고개를 떨군 이리하를 향해 도르베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리하. 취지는 좋다만 확실히 해두자고. 저놈들은 우리랑 동격의 국민들이 아니다. 패전국에서 팔아 넘긴 한심한 찌꺼기들일 뿐이다."
"야, 말이  심한  아니냐?"
"말이 그렇다는 거야.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저놈들은 우리 영토를 짓밟고 무차별적으로 살육을 저지른 것들의 편이었다고."
그는 무심하게 말하고서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 뭐. 그리고 솔직히 추운 곳 사는 애들인데 이정도 추위는 가볍지 않겠냐? 걔들도 지들 방한도구는 있을 거라고. 각자 알아서 챙기라 하면 되지. 맞지, 핀?"
"... 솔직히 생각해 본적 없었는데, 전 이리하씨가 하신 말씀도 맞다고 생각해요."
"야 너까지 왜 그러냐..."
"그야... 저 사람들도 똑같은 사람이잖아요."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본질은 전부 사람이란 말이예요!"
"한가한 소리 하지 마라! 여기는 적진 한가운데와 다름없다고!"
도르베와 핀의 목소리가 커졌다. 갤러한이 일어나 둘을 중제시켰다.

"야, 말도 안되는 안건가지고 목소리 키울 필요 없지 않냐..."
"말도 안되는 게 아니잖아요..."
핀은 그렇게 말하며 미묘한 듯 표정을 지었다.

"...칼린씨였다면 분명 방한용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하셨을 거예요."
"...걔 얘기는 또 왜 나오냐?"
"륑게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도르베, 어떻게 생각하시죠? 제 말이 틀렸나요?"
"... 지금 이야기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핀, 일단..."
"또 그렇게 빤히 보이게 칼린씨 주제는 피하는 거예요? 다들 계속 그렇게 유치하게 굴려는 겁니까?"
"왜 과몰입이야, 씨발 빡치게..."
"그리고 칼린 그 새끼였으면 먼저 지 영주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물어봤겠지. 안 봐도 뻔하다."
점점 과열되면서 이리저리 중구난방으로 퍼지는 이야기속에서, 이리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화두를 잘못 던졌던 것 같아. 미안."
"아니, 이리하씨..."
"핀. 그만하자. 내가 말실수를 했을 뿐인 일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먼저 그릇을 치웠다.

"먼저 일어나지. 다시 한 번 미안했다."


#

칼린은 평소와 같이 건물 옥상에 있었다. 묘한 불안감이 느껴지는 밤이었다. 요나는 꽤 불안정했던 마지막 전화를 끝으로 어제부터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제 몇 갑이나 더 남았을까. 한 4갑은  남았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발소리로 누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그 목소리가 이리하의 것임을 알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몸을 뺐다.

"제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아신 거예요?"
"어떻게 냐니. 기척이 느껴져."
이리하는 그렇게 말하며 칼린에게 다가갔다.

"그럴꺼면 숨는 의미가 있는 거야?"
"...나름 라드씨에게 한번 걸린 후에 숨겠다고 숨은 거였는데 말이죠."
그는 힘없이 웃었다. 이리하는 그의 옆에 앉았다.

"칼린."
"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지?"
칼린은 그 말에 잠깐 생각해 보다가 느리게 답했다.

"그렇...죠?"
"그렇지. 다리 공사 중에 이렇게 날이 추워 지다니 큰일이야."
이리하는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일하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변변찮은 방한용품조차 없어. 다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분명 몇명이 죽게 되겠지."
칼린은 이리하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서 은발이 어떤 식으로 취급 받는 지는 알지만, 그의 눈에는 아름다워 보였다.

"넌 어떻게 생각해?"
"뭐를요?"
"이 곳의 주민들에게 방한용품을 나눠 주는 일은 사치일까?"
이리하는 칼린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칼린은 조금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다.

"중요한 질문이야."
그녀에게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칼린은 그런 그녀를 쳐다보다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 어떻게 아신 거죠?"
"...뭐를?"
"아니, 지금 모르고 하신 말씀이신가요?"
미묘하게 중점이 어긋나는 대화. 이리하는 칼린에게 조금 더 몸을 기울여 얼굴을 가까이 댔다.

"무슨 말이야?"
칼린은 그녀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사실... 지휘관님이 어제부터 연락을 받지 않으셔서..."
칼린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제가, 그... 독단으로 물자를 옮겨 주시는 분들에게 부탁했거든요. 방한용품들을 가져와 달라고..."
이리하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칼린은 그 반응에 조금 불안한듯 눈을 치켜 떴다.


"안...되는 거였나요?"
그녀는 가만히 있다가, 곧 눈을 감고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왜,  그러세요..."
"하하하하! 하하!"
이리하는 웃으며 칼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얼마나 줬어."
"네?"
"상회 사람들 한테 얼마나 줬냐고."
"그게... 400생텀정도..."
"반은 내가 낼게."
그녀는 정말 기분 좋은 듯, 상쾌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칼린, 넌 역시 내 동료가  꺼야. 틀림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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