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여진(餘震)
릴로는 자신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곧 그것이 회색 빛 하늘로 흩어지며 사라지자, 그녀는 아쉽다는 듯 한번 더 숨을 내뱉어 입김을 냈다. 갤러한은 그 장면을 보며 이해가 안간다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
"너 설마 아직도 입김 나오는 게 신기하냐?"
"난 이걸 적응하는 너네가 더 신기해... 담배도 없이 입에서 연기가 나온다니까?"
아무리 릴로가 4계절이 없는 카잔하크에서 왔다지만, 윌레인에 온지 8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입김을 신기해하는 것이다. 갤러한은 그런 그녀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뱉었다. 그의 한숨도 뽀얀 입김으로 흩어져 퍼져 나갔다.
날은 꽤 추워졌다. 4도. 바로 저 너머 국경선만 지나도 날씨가 2~3도씩 차이가 날 것이다. 확실히 빅센마르크의 땅이라는 것은 겨울을 빨리 불렀다. 그는 장갑을 올려 끼우고 자신의 한숨이 퍼져 나가는 것을 보았다. 정적인 분위기에 약간 멍 해진 머리가 뭔가를 떠올리게 한다.
'...리쿠르트가 입김의 원리가 뭔지 알려줬었는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릴로에게 설명하면서 자랑이나 해볼까 했다가, 도저히 머릿속에 떠오르지가 않아 포기했다. 결국 릴로 옆에서 가만히 입김이나 뱉어 대며 멍청히 서 있던 그에게 병사 하나가 다가왔다.
"갤러한님, 전부 모였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그럼."
그는 몸을 돌려 조금 발걸음을 옮겼다. 시리도록 잔잔한 호수 앞쪽으로 칼타코의 주민들이 전부 모여 있다. 전부 하나같이 거지같은 꼬라지를 하고 있지만, 그 땟국물에 저민듯한 주민들도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니 나름 장관이었다. 갤러한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손을 모아 외쳤다.
"자, 그러면 다리 공사를 시작합시다!"
기운차게 퍼진 갤러한의 목소리에, 주민들은 침묵으로 답했다. 갤러한은 굳이 화내거나 그들을 질타하지 않았다. 좋든 싫든, 의욕을 보이지 않아 다리 공사가 지연된다면 죽어 나가는 것은 저들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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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은 물끄러미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민들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감시가 필요하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일하는 주민들은 마치 자기들이 원해서 다리를 짓는 것으로도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일하고도 싶었지만, 요나는 소금부대의 노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감시와 주둔부대의 지원, 그리고 여러가지 상황 관리에 대한 것 만을 명령 받았다. 그녀 말로는 그들의 노역에 참가하는 것은 국격을 낮추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가 천천히 영혼까지 호수에 잠식되어 갈 때쯤, 청량한 종소리가 울렸다. 점심시간의 신호였다. 칼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칼타코의 주민들이 가질 점심식사를 보았다.
투구의 구멍에 철을 덧대 만든 냄비로 수프를 조리하고 있었다. 아니, 수프라고 해야 할까. 칼린은 그들이 조리하고 있는 음식에서 전생에 봤던 돼지 짬통을 연상해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 사이에서 역겹게 떠오르는 오색을 발하는 기름과 느글거리는 비늘을 뽐내는 물고기들이었다.
그 끓여낸 화장실같은 음식은 윌레인에서 보급식사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일 하는 중에 만큼은, 그들은 윌레인에서 제공한 보급 식품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전쟁 때 대량으로 생산되고 처리하지 못한 가공식품들을 그들의 식량으로 떠넘긴 것이었다. 마지막 양심인지 주둔병력들도 열외자들에게 까지 이 보급식을 강요하는 일은 없었다.
그 역겨운 내용물을 바라보고 있던 칼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백인대장 기욤의 목소리였다.
"칼린씨! 점심드세요!"
텐트 근처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 저쪽에는 제대로 찬합도 있고 음식도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물론 결국 군인 식품이고 이세계에서 온 칼린에게 맛있을 수준의 음식들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보면서 비위가 상하게 되는 음식은 아니었다.
"아... 전 평소처럼 따로 먹을 게요. 감사합니다."
"네? 평소에도 따로 드세요? 이거 따뜻할 때 드셔야 맛있는데..."
기욤은 주둔병력으로서 보통 점심을 소금부대원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 그녀가 칼린이 점심을 따로 먹고 다녔다는 것을 알고 제안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순수한 호의로 밥 먹을 시간이니 불렀을 뿐이다.
"그러지 마시고 지금 드세요! 오늘은 고기도 많이-"
"기욤씨."
다시 한번 칼린을 설득하려는 기욤의 어깨에 릴로의 손이 올라갔다. 가볍게 고개를 흔드는 릴로를 보고 기욤은 뒤늦게 미묘한 분위기를 파악했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천천히 오세요..."
라고 말을 남기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칼린은 조금 따뜻해 보이는 그 텐트를 바라보다가 곧 자리에 털썩하고 앉았다. 그리고 다시 호수를 바라보았다.
"왜 밥 안 먹는가?"
미묘한 말투, 카랑카랑한 목소리. 꽤 귀엽게 들을 수도 있는 소리이지만 칼린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요."
"형씨 찐따?"
전달하는 내용에 비해 거친 단어선택. 소냐였다. 그녀는 천천히 칼린을 향해 뒷짐을 지며 걸어왔다.
"...또 왜요?"
"살벌하긴. 그래서 찐따인 거 아닙니까?"
"일 없으면 가세요."
냉정하게 쳐내고 다시 턱을 괴는 칼린을 향해 소냐는 거침없이 걸어갔다.
"일이야 있지요."
"뭡니까?"
"담배줘."
칼린은 가만히 있다가 소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운을 뗐다.
"... 감시병 전원에게는 즉결 태형권이 있습니다. 규정된 사유는 있지만, 사실 이유는 크게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여러분 중 누군가를 해하고 싶다면 '상관 방해'라는 명목으로 태형을 실행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는 그녀 또래 아이들은 견디기 힘들 만한 압박감을 내보내며 딱 한마디만 덧붙였다.
"지금 당장 자리로 돌아가 식사 하십시요. 명령입니다."
차갑게 떨어지는 듯한 그 목소리. 강제로 내려 깔린 분위기 속에서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못생긴 가면 쓰고 후까시 잡으면 무섭겠나? 무리하지 마십쇼."
그녀의 신경은 어떻게 된 걸까. 소냐는 아랑곳하지 않고 칼린의 옆까지 걸어갔다. 칼린은 어이없어 하다가 곧 고개를 푹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은 그녀가 자신의 본질을 뚫어보고 있는 것 같아 경계하게 된다.
"...왜 계속 저한테 오는 거예요... 담배는 못 드려요."
"형씨 꽤 재밌으니까."
"뭐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호수로 고개를 돌렸다. 소냐는 옆에 완전히 자리잡고 앉아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왜 붕대 안 썼습니까?"
"붕대요? 아-"
칼린은 그녀가 자신에게 전달했던 붕대가 뒤늦게 떠올랐다.
"그 가면. 누런 붕대 둘둘 말고 있으면 기분 나쁘니까 바꾸라고 준거야."
그는 그 말에 자신의 가면 정가운데 즈음을 만져 보았다. 보풀이 올라와 꽤 푹신해 진 붕대의 감각이 손끝으로 느껴진다. 그는 잠깐 붕대를 매만지다가 놀라서 소냐를 바라보았다.
"...생각을 하고 준 물건이었다구요?"
"그 말투는 뭡니까?"
"아니, 깜짝 놀라서... 나름 생각하시면서 사는 군요, 소냐씨..."
비하의도가 없는 순수한 감동이 담긴 목소리. 소냐는 아무 말 없이 그런 칼린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알았으면 빨리 갈아 끼워입니다."
"... 네. 저녁에 꼭 갈아 끼울게요."
"지금 갈아 끼우는 건?"
"여러분 앞에서 가면을 벗을 거면 쓰고 다닐 이유가 있나요."
"그런가? 애초에 가면은 왜 끼고 다니는 겁니까?"
"말 안 해 드릴 겁니다."
"...뭐, 알았다."
싱거운 답변을 보아하니 별로 크게 신경이 쓰인 것은 아닌 듯했다. 칼린은 잠깐 입을 다물고 있다가, 곧 속주머니에서 자신의 담배곽을 꺼내 보았다. 5개피가 들어 있는 담배곽이 하나, 아직 뜯지 않은 담배곽이 하나 있었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 담배곽들을 전부 소냐에게 들이 밀었다.
"뭡니까?"
"...전부 가져가세요."
"오, 나이니 뭐니 하면서 쫌생이처럼 굴더니 뭔 변덕이지?"
"당신은 피지 마세요. 일하시는 분들 가져다 드리세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다들 고생하시니까."
"... 잘 전달할게. 감사."
그녀는 담배곽을 받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칼린은 불안한 듯 재차 약속을 받아냈다.
"절대 피지 마세요. 절대로."
"알았다니까. 끈질깁니다."
"그 담배들, 19살 이하가 피면 죽어요."
"내가 그런 거에 속을 나이 같습니까?"
조금 신경질 부리는 소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둘은 다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곧 칼린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저거..."
"아, 이바노프다."
이바노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둘은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칼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거 소냐씨를 찾는 거 아닌가요?"
"내버려 두십시요. 점심시간 반도 안 지났는데 너무 호들갑."
"뭐에요, 반항기?"
나름 능글 거리는 듯한 칼린의 질문에, 소냐는 잠깐 생각하며 단어를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 말고 이바노프 문제다. 이바노프는 그 뭐냐, 그 그..."
그는 한 손을 들어 올려 몇 번 손가락을 까딱거리다가, 곧 떠올랐는지 통쾌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기억났습니다! 이바노프는 딸 병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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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무엇인지 궁금하시다구요?"
고위 신도 한 명이 밥 먹던 손을 멈추고 바바라를 쳐다보았다.
상회측과 교단측은 미묘한 긴장감을 사이에 두고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칼타코의 지하통로에서 숨어 살면서 매번 상회가 숨겨오는 보급품으로 취식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둘 사이가 영 좋지만은 않았기에 서로 구역까지 나누고 떨어져 지내고 있었던 차에, 바바라가 궁금한 것이 있다며 교단 쪽 구역까지 와서 식사를 하게 된 것이었다.
"네. 아무래도 궁금해서 말이죠. 에테롬씨도 제대로 설명 못하셨거든요."
그는 기운차게 대답하며 수프를 한입 떠 먹었다. 그 수프는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먹는 것과 비견하면 왕실 요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 혹시 묻는 게 실례라던가-"
"아뇨! 그럴 리가 없습니다! 기쁘게 설명해 드릴 게요!"
신도는 흥분에 차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 놓았다.
"아, 이거... 어디에서 부터 설명 드려야 할지... 부끄럽습니다만 전도는 처음이라서 말이죠."
"하하! 천천히 부탁드립니다."
누그러진 분위기속에서 신도는 머릿속으로 말을 조금 정리해 보았다.
"그... 바바라씨는 우리 교단의 정식명칭이 뭔지 아시죠?"
"네. 디알테스트그롬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도 아시나요?"
바바라는 잠깐 생각해 보며 수프에 들어간 감자를 씹어보다가 곧 대답했다.
"떠오르는 게 없는 걸요?"
"당연한 겁니다. 그건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고어(古語)로 만들어진 이름이거든요."
"헤- 그런가요?"
"네. '가장 오래된 무덤' 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아직 반정도 남은 수프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바바라도 급하게 수프를 비우기 시작했다.
"왜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을까요?"
"... 글쎄요? 지성의 근원을 찾는다, 뭐 이런 의미 아닐까요?"
"대단하시네요! 꽤 근원에 가까운 대답이었어요!"
"하하! 너무 추켜세우지 말아주세요!"
뒤통수를 긁는 바바라에게 고위 신도가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아뇨, 보통 바로 그런 답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아무튼, 그렇죠. 우리 교단은 지식, 문명. 인간을 이루는 것. 그 근원이 되는 고위의 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학자이며 신도인 거예요. 그런데... 사실 이 '가장 오래된 무덤'이라는 것이 실존한다는 걸 아시나요?"
"뭐... 무덤이 있다면 최초의 무덤이라는 것이 있기는 했겠죠."
"그런 말이 아니라, 아직도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역사상 가장 오래 된 무덤이라는 것이."
거기까지 말 했을 때, 신도 한 명이 둘 사이에 차를 가지고 왔다. 바바라는 다 먹은 수프의 접시를 옆으로 치우며 찻잔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왔다.
"좋은 차로군요."
"전부 에테롬씨가 지원해 주신 거죠... 개인적으로 커피보다 좋아합니다."
둘은 그렇게 말하고 차를 홀짝였다. 한 모금으로 입술을 적신 바바라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그 무덤이 실존한다고요?"
"네. 윌레인에서 건너 건너 바다에 떠 있는 외딴 섬이 하나 있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 볼일 없는 무인 바위섬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신비를 탐구하는 자들에게는 성지로 여겨지는 섬입니다. '으헤로치아'라고 부르는 섬이죠."
"...헤에-."
"그 섬에 가장 오래된 무덤이 있습니다. 우리 교단은 그 성지의 이름을 따왔고, 신비를 탐구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행하는 모임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손을 모았다.
"우리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디알테스타만'님... 그 뜻은 '가장 오래된 자' 라는 뜻입니다. 지성의 시작을 이끄셨으며 모든 것을 관조하시고 계신 전능하신 분이죠."
"전능... 입니까."
바바라는 차를 홀짝거리며 입맛을 다시다가 떠오른 의문을 뱉었다.
"그...건 그 분이 엄청나게 다양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는 건가요?"
그 질문에 신도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바라를 쳐다보았다. 그 상태로 말을 멈추자, 바바라는 자신이 역린을 건드린 것인가 싶어 급하게 사과를 붙였다.
"이런, 제가 혹시 실례되는 말을 한 건가요? 죄송합니다..."
"아뇨, 그게 아닙니다. 다만... 저도 처음에 똑같은 질문을 했었거든요."
신도는 처음으로 그가 전도받았던 날을 떠올려 보았다. 그에게 좋은 뜻을 전달해 준 사람은, 여기보다 아래 계층에 숨어서 지내고 있는 교단의 선봉부대 대장 마키도였다.
"저에게 교단을 알려주신 분이 하셨던 말씀이 떠오르네요."
"뭐라고 하셨나요?"
"...설령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을 전부 사용할 수 있는 전능한 마법사가 있더라도, 그것은 그 어떤 능력도 없는 신보다 하등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애초에 인간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상위적인, 개념적인 존재이기에 신이며 경외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다가 몸을 낮추며, 큰 비밀이라도 되는 듯 손을 입가에 댔다.
"사실, 이거에 관해서 그 분이 말해주신 이론이 있습니다. 그분 말로는,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은 무조건 그 질문을 한번씩 하신다고 하더군요. '신이란 모든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인가?' 하고 말이죠."
"...흐음."
"그에 반해, 마법이 없는 일반 사람들은 이 신이라는 개념적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시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본 끝에 답을 찾으셨다고 하시더군요."
바바라도 고개를 숙였다. 신도는 그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마법의 성질 중에 다양성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마법을 사용하는 모두가 각자 다른 마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죠. 즉, 마법을 사용하는 자들은 기적적인 상황을 접했을 때,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마법으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즉, 신비를 경험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죠. 그는 마법을 신앙을 지우는 저주라고 설명했었습니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요."
"네. 능력으로 인한 경외심 또는 탐구심의 부재. 그건 인류의 평화로운 발전을 막아온 가장 큰 벽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발전하는 길에 마도 방식 같은 비인도적인 수단이 생겨났다는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잘 이해가 안 가네요. 경외심과 탐구심이 어떻게 인도적인 진화방식을 끌어내는 건가요?"
바바라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신도는 마지막 남은 차를 전부 들이마시고 입가를 닦았다.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오만해지고, 탐구하는 마음이 없다면 신비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신을 마주하기 위한 첫번째 발걸음은, 겸허하게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이해를 벗어난 신비를 접했을 때 일어나죠. 자신보다 상위의 존재가 기적을 일으켜 낸 것이라고 생각할 기회를 준다는 겁니다."
그 말이 끝날 때쯤 바바라도 찻잔을 비워냈다.
"경외할 대상이 생기면 알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그 상위의 존재 아래에는 신분도, 국경도, 인종도, 심지어 생물로서의 종 마저도 구분하는 데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이죠. 우리 모두 거룩하신 분의 이름 아래에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난다면 마침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화합하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계가 찾아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단이 소외된 자들을 모으는 겁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인 걸요."
"하하, 뭐. 한번에 이해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저 이 말을 기억해 주시고 자신만의 해석을 찾게 된다면 그게 신앙이 되는 겁니다."
둘은 잠깐 이어지는 침묵을 대화의 여운이라도 되는 듯 즐겼다. 곧 바바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일단 스스로 생각을 한번 거치는 게 맞을 것 같네요. 이야, 이거... 한 수 배우고 갑니다."
"아뇨, 저야 말로 경청해 주시는 자세를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바라씨."
바바라는 그 말에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형제님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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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은 가면의 붕대를 갈고서 평소와 같이 전화국으로 향했다. 평소와 같은 간단한 상황보고가 끝났다. 칼린이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였다.
'잠깐!'
꽤 다급하게 들리는 목소리. 칼린은 내려놓으려던 수화기를 다시 들어 올렸다.
"네, 요나님."
'아니, 난...'
갑자기 불러 놓고서 말을 멈추는 요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살짝 떨림이 있었다.
"... 무슨 일 있으신가요?"
요나는 어딘가 이상했다. 칼린이 그걸 느낀 것은 약 일주일 쯤 전 부터였다. 그 쯤부터 칼린은 요나의 언동에서 미묘한 어색함을 느꼈다. 평소와 비슷했지만, 정말 미묘한 점들에서 그런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굳이 걸고 넘어지자면 전화기 너머의 그녀는 평정을 가장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끝이 떨리는 목소리. 평소의 요나는 말을 할 때 떨지 않는다. 칼린은 전하기를 잡고 근처에서 의자를 끌고 왔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사적인 문제라도 괜찮으니까."
'... 아무 문제 없다.'
"저도 시간 많아요. 아무도 저를 찾지 않으니까... 별 문제없으시면 그냥 전화를 끊으시면 돼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서 가면을 들어 올렸다. 전화기 너머는 공했으나, 신호음이 울리지 않는 것은 그녀가 아직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알 지 모르겠지만 난 말하는 것이 서투르다.'
"알죠. 전 영주님의 종자인걸요."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에 돌아온 것은 다시 침묵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겁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린.'
"네."
'너는 날 떠나지 않을 것이다.'
꽤 이상한 말. 칼린은 대답하지 않는다.
'너는 내가 얼마나 추해져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네가 얼마나 더럽혀져도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에 중압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약하게 들려오는 소리지만, 무게감이 느껴진다.
'너는 내가 설령 끔찍한 전장의 개가 되더라도, 권력의 노비같은 꼴이 되더라도, 너를 실망시키더라도 나를 떠나지 않고, 나는 네가 설령 동정을 잃더라도, 추한 모습이 되더라도, 그 몸과 마음이 전부 부셔져 버리더라도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말은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것으로도 들렸다. 마치 묵묵하게 회고를 하는 것 같이도 들린다.
'나에게는... 나에게는 네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이정도로 간절하게 다가온 것이 없었단 말이다. 검도 명예도 권력도 심지어 이 목숨 마저도 너와 비견하면 하찮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요나-"
'칼린. 그러니까 지금은 딱 한마디만 해 다오. 딱 한마디면 미련없이 이 전화를 끊으마. 딱 한마디만 해준다면 난 용기를 낼 수 있다.'
간절한 목소리. 칼린조차 그녀의 그런 목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모든 상황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지금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날 두고 떠나지 말아 다오. 제발...'
그녀가 어떤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지 칼린은 모른다. 그녀의 진심을 알 방법따위, 칼린이 알 리가 없다. 그녀의 곁에 영원히 머무를 수도 없는 몸이다. 그에게 이 세계는 지옥이었다.
그러나, 단 한번, 한마디로 그녀를 도울 수 있다면, 그는 이 세계에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 준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 요나를 위해서 거짓 자백이라도 할 것이다.
"요나."
경칭까지 생략하며 그는 어쩌면 후회할 수도 있는 그 말을 뱉었다.
"이 세계에 있는 한, 저는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