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8화 〉여진(餘震) (108/164)



〈 108화 〉여진(餘震)

"흠..."
이바노프의 친구이자 그의 푸줏간 맞은편 공방의 주인인 코비는 어렵다는  총의 이모저모를 훑어 보았다.


"잘 모르겠나?"
"흠...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 미안, 이런 걸 여기서 양산하는 건 무리야."
그는 천천히 분해된 총의 총구부분을 들어올려 눈을 가져다 댔다.

"뭐랄까... 일단 제련 수준이 장난 아니야. 역시 라티아, 라는 느낌이네.  총구 안쪽에 선 깎아 넣은 것 좀 봐... 나선형으로 깎아 냈잖아.  깎았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끝내 주게 멋있군."
그는 그렇게 말하며 총구 쪽을 이바노프에게 들이 밀었다.

"난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대단한 건가?"
"이런 걸 양산할 수 있는  대단한 거지. 뭐, 네가 이해하기는 힘들었으려나." 그는 몇  더 부품들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바노프를 향해 질문했다.


"응. 도저히 무리야. 그냥 외부에서 계속 구매 보급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이제 더이상 구할 수는 없다더군."
"뭐? 갑자기 왜?"
"다임상회와 라티아의 연결이 끊겨서 말야."
"그래? 유감이네."
코비는 그렇게 말하고서 총을 재조립했다.

"그래도 지금 보급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양이니까. 관리만 신경 쓰라고. 총알은 내가 만들  있으니까."
"그런가. 부탁하지."
"사실 이런 거는 마도방식 공장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데 말이지. 어때? 역시 독립에 성공하면 한  정도는-"
"코비."
이바노프는 그의 말을 끊어내고서 주머니에서 역십자 목걸이를 꺼냈다. 이것 또한 코비에게 부탁해서 받은 물건이었다.


"나도 마도방식은 좋아하지 않아. 그들과 약속했던 건 전부 지킬 거다."
무겁게 말하는 그를 보며 코비는 한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알고 있다고. 그냥   말이었어. 미안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번 털고 총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이제 빨리 돌아가봐야 되지 않겠어? 슬슬 집합시간이라고."

#

라드는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리쿠르트가 남겼던 메시지에 관한 것이었다. 벌써 일주일이 흘렀지만, 그는 아직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가장 먼저 생각해봐야  것은 어떻게 알았는가 이다. 그는 분명 흔적을 남기지 않았었다. 설령 다른 위병들이 그가 성에 들렀던 것을 보고했더라도 '화장품 통'에 손을 댄 것을 알아차리기는 힘들다.

두번째로 생각해봐야  것은 어떻게 '리쿠르트'가 알았느냐 였다. 단순히 요나의 경고를 전달한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요나가 전화국을 통해 직접 경고하는 것이  효과가 좋았을 것이다. 굳이 갤러한을 통한다는 위험한 방식을 고를 그녀가 아니다. 즉, 이중적인 함정 따위를 생각해둔 것이 아니라면 리쿠르트가 요나보다 먼저 자신을 지목했다는 것이 된다.

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사실을 내비침으로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두가지였다. 첫번째는 요나를 거치지 않는 소금부대 내부의 내통자. 아마 리쿠르트와 요나 사이에 불화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요나를 어떤 요소로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두번째 효과는 재촉.  삼자인 리쿠르트가 이렇게 빨리 깨달았다면, 그 후로 일주일이나 지난 지금은 분명 요나도 알고 있으리라. 그녀가 가만히 있는 것은 단순히 이쪽에서 먼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서 일 뿐이다. 그녀도 그 이빨조각만으로 뭔가를 파악해 내는 것이 어려울 것은 알 테니까.


"...똑똑하구만, 선생."
의도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리쿠르트가 라드에게서 요나 몰래 칼린에 대한 정보를 알아 두려는 것은 확실했다. 라드는 담배에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의자에 기대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제 스승도 정체를 모른다는 거냐... 성가시구만."
그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풀어야 할 문제가 많다. 교단의 내통자가 누구인지, 칼린은 무엇인지, 칼타코는 뭘 숨기고 있는 건지 밝힐 것이 많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그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사는게 쉽지가 않구만..."
그리고 웃으며 연기를 뱉어냈다.

#

칼린은  안에서 자신의 가방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안에 있는 작은 자루의 주둥이를 열어 보았다. 얼핏 봐도 많이 줄어들어 있는 유리병들이 보인다. 안에는 피가 가득 담겨 있다.

남은 병은 이제 6병이 채 되지 않았다. 직접 수렵 체혈을 하기 힘든 장소라서 최대한 많이 챙겨왔었는데, 아무래도 부족했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는 잠깐 생각해 보다가 앞으로 피는 이틀에서 사흘에 한번 섭취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대사들이 앞으로 이주일정도 후면 찾아온다고 했으니 그 정도면 충분했다.


몇 번 유리병을 흔들어 피가 굳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는 다시 자루에 유리병을 집어넣었다. 담긴 것을 신선하게 보존해 주는 일종의 주술 도구였다. 가방을 완전히 닫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꺼내 들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곧 기상용 종이 울릴 시간이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려 할 때였다. 방에 노크가 들려왔다.


칼린은 들고 있던 성냥까지 놓칠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는 급하게 성냥불을 발로 밟아 꺼낸 후 담배를 다시 집어넣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 대사관에 머무른 이후로 그의 방으로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다. 그리고 대사관에 소금부대원들만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 노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동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침을 한번 삼키고서 조금 위축된 모습으로 문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노크가 한번 더 울렸다.

"자, 잠시만요!"
방을 착각한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거울을 보며 조금 옷 매무새를 고쳤다. 그리고 혹시라도 눈물자국 같은 것이 남아있을까 싶어 급하게 눈을 비빈 후 서둘러서 문고리를 잡았다.

"무슨 일-"
함박 미소와 함께 문을 열자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이리하였다. 칼린의 미소가 사라져갔다.

"...기다리던 사람이라도 있던 거야?"
고개를 조금 돌리며 묻는 이리하를 보고, 칼린은 잠깐 멈춰 서있다가 문을 열어 잡았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죄송해요. 그런 반응 보여서..."
"아니, 나야말로 조금 미안해지네..."
둘은 미묘한 기류속에서 서로 사과했다. 잠깐 방 안에 고요가 흘렀다.


"...그래서 무슨일로..."
"응? 아, 그렇지. 미안."
이리하는 황급하게 칼린의 얼굴에서 눈을 떼며 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허리춤에 달고 있던 보자기에서 뭔가를 꺼내 칼린에게 건내 주었다.


"...이게 뭔가요?"
"나도 몰라."
"모른다구요?"
"응. 어제 내가 맡은 구역에서 일하던 여자애가 너한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준거야."
"네? 누가요?"
"그 왜, 너한테 자주 다가오는 그..."
"아..."
칼린은 다시 한번 받은 것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 특색도 없는 흰색 붕대였다.


"...왜 붕대?"
"글쎄... 어디 다쳤다고 생각한 거 아니야?"
그는 붕대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이리하는 조금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칼린."
"네?"
"너무 친해지는 건 안돼. 알지?"


그녀는 칼린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어디까지나 불만이 안 나올 정도로만 친근하게. 개개인하고 너무 가까워져서는 안돼. 알고 있는거지?"
그런 걱정은  필요 없었다. 적어도 칼린에게 지금 누군가와 더 관계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걱정 마세요. 잘 거리두고 있으니까."
"...그래. 그럼..."
이리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자세 그대로 칼린을 보며 말을 꺼냈다.


"그... 같이 나갈래?"
"아... 고마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도르베!'
도르베는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록이 가득한  숲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를 부르고 있다.

'도르베!'
옅게 메아리치는 듯한 목소리. 저 상록수들의 나이테에는 분명  나무들이 지내온 역사마저 기록되리라. 그렇다면 그가 지나쳐온 그 지옥 같던 나날이 나무에 고스란히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가. 그렇다면 지금 들리는 소리는 분명 그때의 기록이리라.

'도르베!'
여기는 어디 인가. 그는 왜 여기 있으며 영웅 행색을 하고 있는가. 어지럽다. 현기증이 일고 있다. 초록의 숲이 천천히 흰색으로 물들어간다. 그의 시야가 가장자리부터 점점 회색 빛으로 세상이 색을 잃어간다. 점점 그때의 색으로 바래진다.

"야! 도르베!"
"어? 아스타?"
큰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면 아스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잠깐 멍하게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곧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 무슨 일이냐? 여기까지..."
"너 괜찮냐? 감시병 하나가 네 상태가 묘하다고 하길래 잠깐 왔어."
"응? 내가? 아무 문제없다."
연신 눈을 비비며 주변을 다시 둘러보던 그는, 아직 색이 덜 돌아온  쪽에 다시 시선이 고정되었다.


"야, 임마!"
아스타가 그의 얼굴을 붙잡고 자신에게로 향한다. 그는 당황하다가, 곧 아스타를 마주보았다.


"괜찮아? 너 어디 피곤한 거 아니야?"
진심으로 걱정되는지 조금 얼굴을 찡그리며 묻는 아스타를 마주보며, 도르베는 천천히 세상의 색감이 돌아오는 것을 눈치챘다. 조금 칙칙한 하늘, 초록의 숲, 그리고 불타고 있는 것 같은 아스타의 머리와 눈. 느리게 색감을 되찾고 있는 세계속에서 그녀의 머리칼과 눈은 참 강렬하게도 색을 발하고 있었다.

"...문제가 있었을지도 몰라."
"뭐? 뭔데!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 줄게!"
그는 붉은 머리칼을 만져본다. 현실감을 느끼면서 천천히 현장감이 되살아난다. 안심해서 그런지 웃음이 나온다.

"사소한 거라 까먹었다."
아스타의 얼굴은 곧 그녀의 머리색만큼이나 붉어졌다. 도르베는 잠깐  머리를 매만지며 감각을 되찾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기지개를 피기 시작했다.


"...너 그런 거 막 하고 다니지 마라?"
"그런 거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도르베는 웃으며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버틸 수 있다. 아직 문제없다. 이번 임무도 무리없이 끝낼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실수할 것 같으면 이렇게 달려와 도와줄 사람들도 있다.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어 보았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이제 돌아가도 돼."
"똥개훈련도 아니고, 내가 알아서 돌아 갈 테니까 재촉하지 마."
그녀는 조금 뚱하게 대답하고 도르베의 옆에서 잠깐 머물렀다.


#

"...얕보지 마.  더러운 꿍꿍이속은 이미 다 읽고 있었어."
갤러한은 목소리를 내리깔며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담배곽을 꺼내 테이블 위로 얹었다.


"다들 속여넘겼겠지만, 나는  속이지. 이 바닥에서 살아서 버틴 연도가 두자리수면 감이라는 게 그렇게 허황된 게 아니라는 걸 알거든."
그는 담배곽을 앞으로 밀어낸 뒤 등을 기대며 맞은편의 상대를 노려보았다.

"난 나랑 딸려온 세명 하고도 짬바가 다르다는 말이다. 지금도 네가 수상한 이유를 다섯개는 댈 수 있어. 륑게는 널 필요 이상으로 믿고 있지만 말야."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은 푸르투가였다. 그는 갤러한에게 응대하듯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더 말 안 한다. 여기서 죽어. 그러면 전부 눈감아주지."
갤러한의 제안에, 푸르투가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서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천천히 말라붙은 입술을 열었다.

"... 너네들은 항상 말이 너무 많아."
"...뭐라고?"
"블러핑이 어색하다는 거다."
완벽한 윌레인어로 그렇게 말하고서 그는 자신의 담배곽을 앞으로 밀었다.


"정말 확실한 상황이면 말은 필요 없는 법이거든."
"...후회하지 마라."
둘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둘의 테이블 아래로 내려놓고 있던  손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적막속에서 서로의 약간 상기된 숨소리만이 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갤러한의 턱에 고인 땀방울이 테이블 위로 떨어진 것이 신호였다.

둘의 양 손이 누가 먼저라고 할  없이 테이블 위로 튀어나왔다.


"... 반숙이 또 이겼어... 말도 안돼."
"이런 씨발! 다시 봐봐!"
갤러한이 고함을 치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카드뭉치가 충격 때문에 바닥으로 흩어지며 떨어졌다.

"내가 말했지. 저 새끼한테는 행운이 따른다니까?"
륑게가 웃으며 갤러한의 머리를 눌렀다. 갤러한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패와 상대의 패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번갈아 보았다.

"말도 안돼! 한사람당 3판씩 돌아가면서 했으니까 총 12판을 한 거라고! 근데 조작없이 전승을 해?"
"난 운이 좋거든."
"운이 좋기는, 씨발! 무슨 수를 쓰고 있는 게 틀림없다니까, 저거!"
흥분한 갤러한에게는 유감이지만, 푸르투가는 정말로 그 어떤 수도 쓰지 않았다. 만약 무슨 수를 썼다면 륑게가 눈치채지 못 했을 리가 없다.


"진정해,  잃은 것도 아니면서 존나 흥분하기는..."
릴로가 보기 흉하다는 듯 갤러한을 보며 혀를 찼다. 푸르투가는 테이블 위에 얹어져 있던 갤러한의 담배곽을 가져가며 웃었다.

"용케도 마지막까지 올 인을 안 했군. 반만 잃었으니 다른 셋보다는 수완이 좋은 걸?"
그리고 갤러한에게서 뜯어낸 담배를 입에 물었다. 소니아가 옆에서 허리를 굽혀가며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하~이고 푸르투가 오라버님, 도박만 하면 연전 연승이시네! 그 혹시, 경마같은   때도 그런 행운이 따라 주시는지 궁금해서 그러는데..."
"해본 적 없어서 몰라."
"어이쿠! 그 좋은 걸 안 해 보셨다니 제가 자리 한번 내드려야 겠네용~"
손을 비벼가며 푸르투가에게 웃고 있는 소니아를 보던 갤러한은 의자에 드러눕듯이 등을 기댔다.

"하, 시발... 륑게가 좋아할 만한 운빨이구만."
"갤러한이라고 했던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푸르투가는 갤러한에게서 가져간 담배 한 개피를 그에게 들이밀었다. 갤러한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 담배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가까이 대고 담배를 물었다.


"왜 올인하지 않았었지? 네 동료 전원은 올인했었고, 내가 9연승 찍었을 때만 해도 다음판은 절대로  이길 거라는 분위기였잖나. 확률적으로도 그러는 게 당연했고 말이야."
푸르투가가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질문에 갤러한은 담배를 쥔 손으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이긴 새끼가 그런 걸 왜 물어."
"궁금했다."
"뭐, 간단해. 인생철학 같은 거지."
"...철학?"
푸르투가가 되묻자 륑게가 눈을 덮었다.

"야, 갤러한. 너 또 그 소리하려는 거면..."
"조용해. 궁금하시다잖냐. 그래, 뭐... 간단히 말하자면, 세상에 확률 같은  없다는 철학이지."
륑게의 탄식소리와 함께 푸르투가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갤러한을 바라보았다.


"말해봐."
"확률. 똑똑한 놈들은 그걸로 뭔가 하려고 하는데, 난 그런 걸 믿지 않아. 세상에 몇 퍼센트가 어디 있어. 40장의 카드 중에 원하는 카드를 뽑을 확률은 2.5퍼센트라고? 아니지. 뽑느냐  뽑느냐, 1/2  뿐이야."
"...너가 그래서 도박을 못 하는 거야, 이 병신새끼야..."
"조용하라고. 솔직히 내 덕 많이 봤잖아?"
갤러한은 즐거운 듯 웃으며 륑게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거창하게 확률같은  계산하면서 뭔가 하는 새끼들은 오히려 엉성해 진다는 거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고, 그래서 모든지 대비해야 된다는 거야... 확실히 도박할 때는  도움 안되지만, 떠돌이로 먹고 살때에는 이 버릇 덕분에 여러분 애들 살렸지."
"뭐, 이것 저것 다 챙기면서 대비하는 새끼 있으면 편하긴 해."
릴로가 맞장구 쳤다.

"그지? 그렇다니까..."
갤러한이 릴로에게 손가락을 향하며 웃어 보였다. 푸르투가도  말에 웃으며 담배연기를 뱉어 냈다.


"넌 어떻게 생각하나, 형씨."
"솔직히 멋있군. 윌레인 범생이들이 할 만한 생각이 아냐."
"빅센마르크 둔탱이들이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생각이기도 하지."
서로 악담을 한번씩 나눈 그들은  의자를 끌어 앉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슬슬 나갈까."
"뭐 전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었어?"
"아, 맞다. 전달사항."
자리에서 일어나던 갤러한은 그 말에 잠깐 멈추고 푸르투가를 보았다.

"어... 아마 내일쯤에 제대로 공지가 나올 텐데 미리 말해줄 게 하나 있어."
"뭐지?"
"너네  호수 있지?"
칼타코와  사이에 있는 거대한 호수. 이바노프와 자신이 낚시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다.

"그 호수에다가 다리를 지을 거거든. 별건 아니고, 대사님들 오기 편하도록 임시로 만들 다리야. 약식으로 대충 만들어  거니까 오히려 지금 거주구 짓는 일보다 쉬울지도 몰라."
"... 이 날씨에 호수에 다리를 만들겠다고?"
"이런, 거짓말은 안 통하나..."
대충 쉬운일로 넘기려고 했던 갤러한은 고개를 떨구고 담배를 비벼 껐다.

"미안하지만 결정 사항이니까. 이건 우리도 어떻게 못 도와줘. 대신  구역 주민들이랑 부대원들이 모여서 도와줄 예정이야. 최대한 빨리 끝낼 수 있도록 말이지."
"어? 우리도 도와야 돼?"
"...대충! 조용히 해, 소니아!"
소니아에게 작게 으름장을 놓고서 갤러한은 푸르투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린 이미 그... 야, 주둔병력 대장 이름이 뭐였더라?"
"한번에 좀 기억해라... 레베카잖아."
"맞아! 기억이 날락 말락 해서... 레베카경에게서 미리 들었거든. 내일 아침에 소집하면서 자세히 말해주실거야. 그럼 나간다."
그리고 넷을 우르르 몰려 그 집을 나섰다. 혼자 남은 푸르투가는 자신의 앞에 몰린 담배곽들을 내려다보며  개피를  꺼냈다.


"...백인대장 이름은 기욤이다, 병신들 같으니..."
그리고 불쾌함에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곧 겨울이 다가온다. 호수가 얼어붙기 전에 끝내는 것이 좋으리라. 저 불청객들은 설령 호수가 얼어붙어도 작업을 시킬 테니까.

#


요나는 아직도 머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근 일주일동안 인간으로서의 기본조건인 의식주 세가지를 전부 포기한 사람같이 살고 있었다. 먹기 않고 자지 않으며 제대로 씻지도 않고 있었다. 그저 방 안에서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가끔씩 흐느끼며 혼잣말을 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붙잡으며 쌓여 있는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마저도 전부 바닥에 흐트러 던져버렸던 것을 조금 전에 제정신을 되찾아 다시 쌓아 올린 것이었다. 가만히  서류를 바라보던 그녀는 다시 양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속이 찢어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반정도가 남은 술병을 집어 들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밟히며 나는 바삭한 소리가 들려왔다. 비틀거리며 옮긴 발걸음은 전화기 앞에서 멈췄다. 8영주의 전화는 따로 담당하는 전화국이 있다. 24시간중 어느 때에 걸더라도 연결이 가능하다. 잠깐 신호음이 들리고,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요나님, 안녕하십니까. 누구에게 연결할까요?"
"...정보부로 부탁드립니다."
새어 나오듯 나온 목소리는 그녀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건조한 것이었다. 잠시 후, 정보부의 익숙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요나경, 어제도 전화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미쉘이   말은 없습니까?"
'아무 말도 없는 상황입니다. 다만, 위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말에 들고 있던 술병을 입에 댔다. 그리고 목을 울려가며 그것을 한번에 전부 들이 마셨다. 잠깐의 정적 후에, 요나는 입가를 닦고 입을 열었다.

"... 저는 당신의 '최선' 따위를 기다린 게 아닙니다."
전화기 너머로는 답이 없다. 그녀는 들고 있던 술병을 벽으로 거칠게 던졌다.


"결과를! 결과를 내란 말이다!"
말도 안되는, 응석에 가까운 말. 요나가 제정신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생떼였다.


"팔이나 다리 하나를 잘라내든, 혀를 잘라내든,  얼굴에 염산을 들이붓든! 왕도의 자랑인 정보부가  마법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얼뜨기 하나의 자백을 받아내는데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거냐!"
그녀는 올라오는 울분에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년이 어떻게든 못 버티게 만들란 말이야..."
요나는 무너지듯 전화기를 잡고 무릎을 꿇었다. 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체결손을 만드는 것은 '벌'에 해당합니다. 아직 혐의가 완전하지 않은 이상, '벌'은 시행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꺼진 눈으로 전화기를 붙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좋은 소식이 생기면 이쪽에서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부디 마음 편히 기다리시길.'
요나는 그 말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바닥에 잘게 깔린 유리파편들이 아프게 그녀의 무릎을 찔러댔다.


"내가... 내가 잘못했다는거냐."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꽉 문 입술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내 선택이 틀렸던 거라고 하려는 것이냐...!'
미쉘을 만난지 7일, 요나는  어떤 방법도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망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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