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6화 〉여진(餘震) (106/164)



〈 106화 〉여진(餘震)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도르베는 건조한 눈을 비비며 이불을 치웠다. 천천히 날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키며 아침 공기를 맛보았지만, 이 불쾌한 땅은 아침공기조차 상쾌하지 않았다. 개운하고 깔끔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도르베에게는 그저 무미건조하고 차갑게만 느껴졌다.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전쟁에 나섰을 때에는 이 땅에 초록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이론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놀랍다는 느낌이었다. 그는 아스타가 두고 간 담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서랍장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옷을 한  씩 껴입기 시작했다.


그가 잠옷바지를 벗고 있을 때였다.


"야, 잠깐 들어간다."
아스타의 목소리였다. 그는 당황해서 바지에 다리가 걸려 버렸다.


"잠깐!  닫아라!"
"왜, 뭔ㄷ-"
아스타는 바지가 벗겨진 채로 넘어진 도르베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그 장면을 보다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도르베는 잠깐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렸다.





"...그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냐?"
"노크를 안  네 잘못이다. 이성의 방에 들어올 때는 제발 부탁인데 노크를 해라."
정좌한 아스타를 두고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며 끼고 있던 팔장을 풀었다.

"그래서 이런 아침에 무슨 일이냐?"
"그게..."
아스타는 말하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도르베를 직면했다.

"야, 난 진짜 네가 이해가 가거든?"
그렇게 운을 뗀 순간부터 도르베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딱히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주민들도 꽤나 협조적인 태도잖냐. 우리 임무가 확실히 반동분자의 색출도 있었지만... 그거만 시킬 거였으면 주둔병력들이 계속 맡았을 거라고. 굳이 윌레인의 '영웅'들을 보낸 거는 분명 관계증진을 노린 거란 말야. 넌 똑똑하니까 알 거 아냐."
아스타는 거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조금 숙였다.


"네가 아무리 전 군인 출신이라지만... 지금 네가 하는 짓은 조금 가혹해. 어제도 한 놈 두들겨 패서 이빨을 부셔 버렸잖아."
"수상한 짓을 했었다."
"그 사람은 신발끈을 매던 거라고..."
어이없다는 듯 그렇게 말한 그녀는 뒤통수를 조금 긁적이다가 일어났다.

"네가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지휘관에게 보고할 수밖에 없다고. 그러고 싶은 건 아니야. 그런데, 그... 너도 힘들 테니까 말이야. 제대로 잘 지내기 힘들면 차라리 열외 한번 당하는게-"
"알겠다."
"...뭐? 열외당할라고?!"
즉답에 당황한 아스타를 향해 도르베는 조금 힘겹게 웃었다.

"아니. 내 태도를 바꾸마."
잠깐  찐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조금 생각하다가 질문했다.

"...할 수 있겠어?"
"나도 내가 잘못하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 저들은 내 적이 아니라, 곧 우리의 국민이 될 자들이지. 너와 핀의 상냥함에 기대고 있었다. 미안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서 다시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보았다.


"봐라. 이 땅에도 저렇게 푸른빛이  수 있잖느냐. 또 새로운 것을 찾을 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중 이었어."
아스타는 창 밖과 도르베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조금 웃었다.


"힘들면 말해. 언제든 도와 줄게."
"고맙군. 먼저 나가 보거라. 곧 뒤따라가마."
"알았어. 준비되면 방앗간 쪽으로 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섰다. 도르베는 가만히 그런 그녀를 보다가 뺨을 몇번 톡톡 치고서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물끄러미 그 위에 얹어진 립스틱을 보았다.

그는 립스틱을 열고 거울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의 입가에 립스틱을 갖다 대 보았다. 곧 그는 그 립스틱으로 웃는 입모양을 그렸다.

"...넌 이런 기분이었나, 토프."
립스틱이 묻어 있는 거울을 한참 바라보던 그는 곧 허리를 곧추 세우고 겉옷을 걸쳤다.


#

"진짜 혼자서 괜찮겠어?"
"...그래, 너랑 나랑 붙어있어서 구역 분담도 잘 안되었었고 말이다. 가 있거라."
"그렇게 한번에 싹 바뀔 수 있겠냐고... 역시 아직은 같이 다니는 게-"
"괜찮다. 지금도 생각보다 괜찮은 느낌이야."
도르베는 만류하는 아스타에게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렸다. 아스타는 그런 그를 조금 바라보다가 자신이 맡은 구역으로 발을 옮겼다. 도르베는 자신의 구역에 도착해 적당한 그루터기를 찾아 앉았다. 자신이 오자 마자 경직되기 시작하는 현장의 분위기를 느낄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주변 주민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은 분명 자신을 붙잡았던 빅센마르크의 병사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곳은 하얗게 사방이 뒤덮인 숲도 아니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이곳은 윌레인의 여느 지역과 다른 것이 없었다.

평정을 되찾고 보면, 지금까지 그가 잘못한 것이다. 이들은 이제 빅센마르크의 국민이 아니고, 더 깊게 보자면 어디 소속된 군인조차 아니다. 적대를 표해도 의미 없는 짓이었다.

도르베는 주민들 사이에서 자신이 어제 강냉이를 털어버렸던 자를 찾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침 일을 멈추고 있던 그는 또 한번 다가올  같은 폭력에 대비하듯 몸을 움츠렸다.

"...미안했다."
"...네?"
그리고 상대에게서 튀어나온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과도하게 경계해서 미안했다. 필요한 만큼 금전으로 배상하마. 부서진 이빨을 때우는 것은 이런 곳에서는 무리겠지만... 의치라도 사고 남은 돈은 다른 데에 쓰거라."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고서 지폐 다발을 하나 꺼내 그에게 건냈다.

"돈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다. 싫다면 받지 않아도 좋다. 그냥 사죄의 표시일 뿐이야."
"아..."
그는 돈다발과 도르베를 번갈아 보다가 돈을 받았다. 그리고  지폐가 몇 장인지 확인해 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오늘 열외도 가능합니까?"
도르베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손을 그의 이마로 가져다 대보니, 열이 올라 있었다. 불어터진 입도 비참하게 고름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어제 부상으로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다.

"... 물론이다. 들어가 쉬거라. 열외자도 다시 선별하겠다."
"...감사합니다."
도르베는 그렇게 말하고서 일하는 주민들을 보았다. 조금 고민하던 그는 감시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일하고 있는 모든 주민들을 소집해 다오. 열외대상자를 다시 선별하겠다."
"...그러면 발전 속도가 늦어질 거고, 체류기간이 더 늘어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먼저다. 역병이라도 퍼지게 되면 죽도 밥도 아니게 되는 거다."
감시병들은 조금 불만이 있는 듯 했지만  순조롭게 주민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게 옳은 일이었다. 도르베는 이제는 이곳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볍게 숨을 들이마셔 보았다.

여전히 공기는 삭막하고 차가웠다. 눈을 감으면 으스스하게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는 빅센마르크의 군가까지 생생하게 들려온다. 살기 위해서 비참하게 떨었던 도르베의 목소리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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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한은 아무리 생각해도 리쿠르트의 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어려운 말을 써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의문인 것은 그녀가 편지에 동봉한 부탁이었다.


"....아, 이해가  가네..."
그는 그렇게 혼잣말하며 일하는 내내 끙끙대다가, 휴식시간이 찾아오자 허둥지둥 C구역을 향해 달려갔다. 그가 찾아간 것은 라드였다.


"뭐야, 아직 일할 시간이 아닌가?"
"몇개만 묻고 바로 돌아갈게... 너한테 묻고 싶은  있어."
"뭔데?"
라드의 말에 갤러한은 조금 숨을 고르고 진짜 알 수가 없다는 듯 그를 향해 질문했다.


"너 리쿠르트랑 아는 사이냐?"
"...리쿠르트?"
라드는 잠깐 생각해 보다가 곧  이름이 떠올랐다.

"분명... 네 여친에 칼린의 가정교사지. 그 정도는 아는데."
"뭐, 만난 적 있거나 서로 대화라도 해 본적이라도 있어?"
"아니, 전혀. 한번 만나보고는 싶다만, 기회가 없었어서 말이지..."
그는 자신이 성에 잠입했을 때를 떠올리며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갤러한은 더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진짜 이상하네, 이거..."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어? 아니... 하, 씨팔, 모르겠다. 리쿠르트가 바람  여자는 아니니까  일은 아니겠지."
그는 혼란스러운 듯 씹는 담배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오늘 리쿠르트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너한테 말을 전해 달라 더라."
"...나한테?"
"응. 너한테."
"뭐라고 하시던데?"
라드가 흥미를 보이며 웃자, 갤러한은 조금 불만스럽게 그를 쳐다보며 편지를 다시 펼쳐 보았다. 그리고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

"아니, 너더러 무슨... 화장품은 어떤 걸 사용했냐고 묻는데?"
갤러한은 혹시 자신이 잘못 읽은 건가 싶어 다시 한  글을 천천히 읽어 보았다. 아무리 읽어도 그런 내용이었다.

"...뭔가 사람을 헷갈린 건가? 너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
그는 웃으며 라드를 보았다. 라드는 번개라도 맞은 표정이었다.  정도로 눈을 크게 뜬 라드를 갤러한은 본 적이 없다.

"...라드?"
"...재미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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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왕도의 정치범 수감 감옥에 도착했다. 그녀는 들어가기 전에 물고 있던 담배를 전부 태우고서 발을 옮겼다.

꽤 건조해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 감옥은 습기를 잃지 않는다. 지하에 있는 그곳은 태양빛을 허락하지 않는다. 약간 눅진한 느낌의 검붉은 돌바닥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액체'들이 흘렀는지 숨기지 않고 보여준다. 찐득하게 발걸음을 붙잡는 느낌을 느끼며 그녀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점점 크게 울려오는 아비규환들. 이 수감소의 가장 잔혹하게 피는 꽃, 심문실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식같은 것이다. 이런 극한의 환경에서는 죄인은 물론이고 간수조차 버티기 힘들다. 이곳에 배정받은 근위병들은 보통 3개월정도만에 이직을 결심한다고 한다.

"이  끝입니다."
그녀를 안내한 근위병도  한계에 다다를  같았다. 그는 우울하게 요나에게 그렇게 전달하고서 마치 눈물을 삼키듯 발을 돌렸다. 요나는 천천히 미쉘의 심문실로 발을 옮겼다. 문을 열면 살풍경한 방이 드러난다.  넓어 보이는, 시야를 가득 매우는 용도를  수 없는, 하지만 그 생김새 만으로도 불길함을 내뱉어 대고 있는 물건들이 가득하다.


정치범의 심문실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나의 죄인에게도 성과 열을 다해 만들어진다. 최대한 장기적으로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부셔 내기 위해 만들어진 개인의 작업실이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심판관'들은 태생적인 사디스트가 아니면 불가능한 직업이다.


"아, 요나씨. 오셨습니까. 타이밍이 좋았네요. 하마터면 추한 모습을 보셨을지도 모릅니다."
감염을 막기 위한 의사와 비슷한 복장. 심지어 그가 끼고 있는 가면조차 의사의 그것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의사는 불길하게 번들거리는 검은색 앞치마를 입지는 않는다.

"미쉘은 어디 있나요?"
"이제 반말로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8영주가 되시는 건 이미 확정사항인 것 같던데요."
심판관은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날카로운 칼을 서로 긁어 댔다. 칼에 묻어 있던 기름과 피, 어디서 나온 것인지 정체를  수 없는 핑크색 살점덩어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지금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정신보다 육체가 먼저 무너지면 안되니까요."
자신의 머리 쪽을 톡톡 건드리며 그렇게 말하고서,  심판관은 '작업하는 장면을 보지 않으셔서 다행이네요'라고 덧붙였다. 사실 요나는 조금 실망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시에 찾아온 것은 그녀가 고문당하는 장면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그런데... 역시 8영주 출신이라서 그런지 정말 단단하네요. 아직도 단 한마디를 안 했어요."
그는 턱을 괴며 그렇게 말했다. 요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질문했다.


"치료가 끝나면 다시 이쪽으로 오는 겁니까?"
"반말 하셔도 된다니까... 에, 이쪽이 아니라 일단 수감실로 옮겨질 것 같은데요."
"그럼 수감실 쪽에 가 있겠습니다."
"아, 네. 따라가겠습니다."
"아뇨, 혼자면 됩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심판관을 막은 후 심문실 내부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만족스러웠다.




수감실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곧 미쉘이 수감실을 향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두꺼운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걸 걸치고 있는 상태에도 불구하고 전보다 더 실루엣이 얇아져 있었다.


"...죄인에게도 옷을 입혀주는 군요."
미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대신에 그녀를 잡고 있던 심판관이 대답했다.


"평소에 따뜻함을 아는 자가 추위를 알게 되는 법입니다. 고문이라는  그런 괴리감을 사용하는 거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니퍼를 꺼냈다. 그리고 미쉘의 입가에 그것을 가져다 댔다.


"즐거운 대화 하십시요."
미쉘의 입술은 굵은 철사로 꿰매져 있었다.  번 또각, 하는 소리가 조용한 수감실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입술에 걸린 철사를 모두 잘라낸 심판관은 곧  자리를 벗어났다.

"이런, 그 철사 어울렸습니다만."
요나의 비웃는 듯한 말에 미쉘은 조금 뻐끔거리다가 곧 그녀의 미소를 되찾았다.


"걱정 마시길... 당신이 가고 나면 새로운 걸 낄 예정입니다."
여기 오고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목소리는 듣기 애처로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 그러나 전혀 기죽지 않은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요나는 약간의 낭패감을 삼켜냈다.

"미쉘경... 아니, 이제는 그냥 미쉘이라고만 부르겠습니다. 거울을 본지는 얼마나 됐죠?"
"유감스럽게도 이 감옥 안에 거울이라는  없거든요."
"행운이네요. 지금 당신이 얼마나 꼴사나운지 모르시는 것 말이죠."
요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름다움을 숭상하던 미쉘, 당신이 이런 꼴로 있으니 제 가슴이 다 아파지네요."
"잔말이 느셨군요. 기분이 좋으셔서 그런 겁니까?"
"솔직히 그렇습니다."
요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담배를 꺼냈다.


"하나 어떠신가요?"
"죄송합니다만, 이제 담배는 꼴도 보기 싫군요."
"그러시다면야."
요나는 혼자 불을 붙이고서 몇  손을 털어 성냥을 완전히 껐다.

"아시다시피, 전 이제 8귀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론을 시작했다.

"그리고 8귀족으로서 첫 업적은, 그래. 나라를 좀먹는 벌레  마리를 잡는 것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당신이 여기에 와 계신 이유와도 밀접하게 관계된 벌레죠."
거기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미쉘이 풀썩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요나가 그런 그녀를 내려 보자 미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손을 흔들었다.

"실례, 이제 오래 서있을 수 있는 몸이 아니라서."
"하하, 그렇습니까."
요나는 다시 담배를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면, 저는 그 벌레를 잡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쉘씨의 자백이 필요해요.  한마디, 한마디면 되는 일이죠."
요나는 미쉘의 눈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았다.

"당신과 다임상회가 내통했다는  인정하는 딱 한마디면 된다는 겁니다. 그거면  피비린내 나는 곳을 벗어나실 수 있으세요. 죽음으로 벗어나는  아니라, 최저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보장받으며 나가실 수 있습니다."
그녀는 담배연기를 미쉘을 향해 뿜었다. 그녀의 얼굴에 나 있는 잔상처들에 담배연기가 따갑게 스며들어갔다.


"미쉘경은 여기 있으실 분이 아니잖습니까? 전장출신인 저를 시궁쥐라고 부르실 만큼 고귀하신 분인데 말이죠... 편해지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미쉘은 가만히 요나를 바라보다가, 참을 수 없다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요나는 그걸 협상의 여지로 보았다.

"계하나에 땅을 하나 드리죠. 작은 집과 밭이 딸려갈 겁니다. 그리고 평생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얌전하게만 사신다면 말이죠. 걱정 마세요. 시종도 몇명을 보내드리겠-"
"요나, 제 영지, 비나루크가 무엇을 담당했는지 기억이 안 나시는 겁니까?"
갑작스럽게 대화를 끊어내는 미쉘의 기세에 요나는 조금 불안함을 느꼈다.


"비나루크는 의학품, 위생품을 담당했습니다. 의학 관련이라면 윌레인 최고의 도시였지요."
그녀는 다 쉰 목소리로 즐겁게 말하기 시작했다.

"고문이랑 의학을  놓을 수가 있을까요. 사람의 몸에 구조를 모르는 자가 어떻게 고통을 줄까요. 요나, 제가 이곳에서 행해지는 모든 고문의 어머니입니다. 전 여기에서 전혀 기죽지 않아요."
"...무슨 말을 하시려는 겁니까."
"자백의 조건은 당신이 아니라 제가 정하는 거란 말입니다."
잠깐의 침묵. 조용한 수감실에서는 심문실의 비명소리가 가끔씩 얕게 울려 퍼진다.

"...말해 보시죠, 그럼."
요나는 낭패인 듯 담배 불을 비벼 껐다. 어느새 우위관계가 바뀌었다. 어쩔 수 없는 미쉘과 요나의 귀족으로서 격의 차이이기도 했다.


"먼저... 당신이 말했던 그 조건. 그건 꽤 괜찮아 보였으니 받아가도록 하죠. 거기에 조건을 하나  추가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미쉘은 눈을 감고 대답을 기다렸다. 요나는 굽혔던 무릎을 피며 미쉘을 내려다보았다.

"...듣고 판단하겠습니다."
"좋아요. 무리한 부탁은 아닐겁니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지만, 전 조건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미쉘에게는 그 난장판이 난 상태에서도 저항하기 힘든 요염함이 있었다. 그녀는 그 요염함을 한껏 품고 요나를 향해 조소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종자, 칼린과의 하룻밤. 그거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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