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2화 〉여진(餘震) (102/164)



〈 102화 〉여진(餘震)

"다시 인사드립니다. 소금부대에서 파견된 칼린, 이리하, 라드입니다. 앞으로 우리 셋이서 이 구역의 노동 관리와 치안관리를 맡게 될 거예요."
칼린은 그렇게 말하고서 이바노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는 빅센마르크어를 전혀 모르지만, 여기 라드씨는 조금 할 줄 아십니다. 혹시 질문사항이 생기신다면 통역병을 부르시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라드씨에게 질문해 주시면 돼요."
"맡겨봐."
라드가 빅센마르크어로 그렇게 말하자, 이바노프는 작게 소냐를 향해 고개를 숙여 말했다.

"저 미역머리랑 백발이   내통자라고?"
"... 응. 분명히 둘 다 내통자야."
이바노프는 이리하와 라드를 번갈아 보았다. 불가해주자의 경우는 속을 알 수 없는 느낌이었고, 미역머리는 속이 깜깜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건설 자재는 언제 도착합니까?"
이바노프의 빅센마르크 억양이 심한 윌레인어에 칼린은 조금 생각하다가  답했다.


"건설자재에 대한 질문이라면... 오늘 13시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자재 검수는 라드씨가 맡게 될테니 13시부터 14시까지는 라드씨가 마을 입구 쪽에서 대기하실 겁니다."
'그럼 저 라드라는 자가 상회측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역인가.'
이바노프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소냐를 내려다보았다.

"들어가 있거라, 소냐."
"응."
그는 문을 닫고서 셋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칼린을 노려보았다.

"따뜻한 지역에서 영웅대접 받으시는 귀공자님은 적응하기 힘들겠지만... 우리가 좀 추운 데에서 살아서 말야. 애들이 좀 건방지고 버르장머리 없을 수도 있어."
그리고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봐주실 텐가?"
칼린은 가만히  손을 내려다보다가 웃으며 붙잡았다.

"그 판단은 제가 하는 게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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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간지역 관리를 맡은 갤러한임다. 나머지 세명 이름은 굳이 외울 거 없고, 나한테만 잘보이면 편할 수 있을 검다."
"그게 뭐야, 씨발! 야, 번역기! 방금 꺼는 말하지 마!"
"네? 네?"
"야, 애 겁먹었잖냐... 살살  말해."
넷은 시작부터 조금씩 삐걱거렸다. 당황해서 말을 멈춘 통역병을 두고, 그들은 자기들끼리 말하기 시작했다.

"야, 솔직히 팀 원생텀 리더가 누구야. 나지? 그럼 맞는  아니냐?"
"엥? 네가 리더? 아닐껄? 아닌 것 같은데."
"뭐, 오더는 갤러한이 내리지만, 정신적인 지주하면 또 나 아니겠냐..."
"지금 그딴 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잖아!"
의미 없는 다툼이 지속되고 있었다.  갤러한이 모두의 타협안을 받아 적당히 말을 고치기로 했다.

"... 우리 넷이 너네들 관리작업을 하게 됐슴다. 순서대로 갤러한, 륑게, 소니아, 릴로임다. 여러분 전쟁에서 개털린 것도 서운할 텐데 억울하게 맞거나 하면 슬퍼서  버티겠죠? 서로 조심하면서 지냅시다."
통역병은 그 말에 잠깐 눈치를 보다가, 이번에는 번복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말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별 반응이 없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허, 시발. 화내는 놈도 없네."
갤러한은 작게 웃으며 혼잣말했다. 그도 나름 빅센마르크에는 좋은 감정이 없는 편이었다. 게다가 반동분자 색출 임무까지 떠맡은 이상, 이정도의 기싸움은 필요한 것이었다.

"잠깐."
그리고 군중속에서  사람이 뚜렷한 윌레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얼라리? 윌레인어 할 줄 알아?"
소니아의 질문에, 손을 든 사람 주변의 군중들이 비켜나갔다. 손을 든 것은 키는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남성이었다. 얼굴의 반을 흉한 화상자국이 뒤덮고 있었다.

"새로운 담당자에게 건의하고 싶은 것이 있소."
그는 뚜렷한 윌레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통역병도 당황한 그 순간에, 륑게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이거 물건이네... 말해봐."
"댁들이 건설현장의 감독까지 맡게 되는 거지?"
"그렇다면?"
"전임자들이 지키지 않은 약속이 있소."
통역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륑게는 그 말에 웃음을 머금고 갤러한을 바라보았다. 갤러한은 잠깐 생각하다가 질문했다.

"뭔데."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자들은 열외시켜 준다고 했던 약속. 처음 왔던 대사들이 열외시켰던 병자들까지 강제로 노동에 참가하는 중이요. 부디 새로 열외자들의 검사를 해 주셨으면 하오."
"무슨 씹... 그게 말이야 방구야."
"왜, 용기 있고 멋있구만. 릴로, 넌 어때?"
"웩, 난 추남은 별로..."
"...넌 그런 새끼였지. 소니아, 넌?"
"음... 잘은 몰라도... 약속은 지켜야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게 흐르는 분위기에 통역병이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나마 반대의견에 가까웠던 갤러한에게 호소했다.

"갤러한씨! 이건 그, 작업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야! 반숙!"
통역병의 말을 끊어내고서 륑게가 즐거운 듯 외쳤다.


"너, 이름 뭐냐?"
"... 푸르투가."
"좋아. 푸르투가 네가 우리 통역 맡아주면 재검사 그거, 함 해줄게. 어때?"
"륑게씨?"
"야, 그걸 우리가 결정하는게..."
"우리가 결정하는 거지. 저새끼 윌레인어 존나 잘하니까 맡겨보자고. 우리 이미지도 챙길 겸 말야."
만류하는 모두를 제치고, 륑게는 드물게도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불만있냐, 반숙?"
푸르투가는 잠깐 벙쪄서 서있었다. 말은 했었지만 설마 이렇게 간단히 받아들여질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당황은 곧 흥미로 이어졌다.

"...좋지!"
그는 흉측하게 쪼그라든 입가를 들어 올렸다. 그것이 웃는 것이라는 걸 눈치챈 사람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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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네들은 버려졌다."
도르베는 거친 빅센마르크 방언으로 말을 시작했다.


"여기서 10분만 걸으면 빅센마르크 국경선이 있지. 하지만 저기서 도움이 올 거라는 생각은 버려라. 너네들은 팔렸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빅센마르크 영토쪽을 보며 눈을 조금 찡그렸다.

"요컨데 너네는 가축이다. 국경선 근처에서 의심가게 알짱거리는 놈들은 전부 문답무용으로 죽이겠다. 일할 때 농땡이를 피우면 단봉으로 개 패듯 때리겠다. 이상, 질문은 받지 않겠다."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마치 이 자리를 참을  없는 듯 단상에서 내려왔다. 아스타는 냉랭해진 분위기속에서 급하게 통역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 뭐...  말처럼 그렇게 빡쎄게는 안 하니까... 가족같은 분위기로 일해 봅시다!... 질문 있는 사람?"
"아스타, 그런 거 받아주지 마라. 버릇이 나빠진다."
"도르베, 일단 임무 본분은 잊으면 안되지 않을까요...?"
"기억한다. 반동분자 색출. 그게 우리 임무다."
"아니, 그거 말고도 이제 우호 관계를 도모한다 던가, 그런 명령도 있었잖아요..."
"하! 잘 대해 준다고 뭐가 바뀌겠나. 저놈들은 그냥 털빠진 곰들이야. 서로 평생 이해 못할거다."
적대심을 숨기지 않는 그의 태도에 아스타는 질린  눈을 감았다. 핀도 도르베를 이해할 수는 있었기에 설득을 멈추고 고개를 떨궜다. 술렁거리는 군중 사이에서, 세라는 미묘한 표정으로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하, 시팔... 고생 좀 하겠네, 이거."
그녀의 혼잣말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당연하게도 질문을 한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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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좀 어떨 것 같아?"
이바노프와 푸르투가, 세라 셋이 원탁에 앉아 있다. 지하 통로 따위가 아닌 평범한 술집이다. 이바노프는 다른 누가 답하기 전에 증류주가 가득 담긴 잔을 들고 말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왕도쪽과 직접 연관된 감시자들이 오니 노동 강도는 확실히 줄어들 것 같고... 우리 쪽 감시자는 아직 파악이 다  끝났어.  중 둘이 협력자라고 드러나기도 했으니, 이쪽은 그렇게 힘들지 않을지도 몰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잔을 꺾어 들었다. 강도 높은 술이 향기롭게 스며든다. 그는 코로 터져 나오는 열기와 향을 음미하며 푸르투가를 보았다.

"...건의사항 전달에 성공했어. 우리 쪽도 융통성은 있어 보이더군. 떠돌이 출신이라 그런지 적대심도 옅어 보이고 말이야."
푸르투가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잔에 올라온 것을 유리막대로 조금 휘저었다. 알코올 도수가 낮은 사과주였다.


"세라, 넌 어떤데?"
그가 사과주를 조금 머금고  질문에, 세라는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는 듯 바닥에 퍼질러져 잔에 담긴 증류주를 흔들어 댔다.

"이쪽은 좆됐어... 오히려 감시가 심해질 것 같던데. 뭐, 빅센마르크 쪽으로는 기대고 있는  없는게 차라리 다행이 되었지."
잠깐 정적. 빈 잔을 노려보고 있던 그 세명에게 다시 술집 주인이 테이블로 찾아와 잔을 채워주었다.


"매번 고맙네."
"별말씀을. 자네들에게는 언제나 공짜지."
주인은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채워진 잔과 함께 기운을 찾았는지 이바노프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아마 내일, 상회와 교단의 병력들이 물자들과 함께 오게  거야. 각자 맡은 위치로 봤을 때 상회측 내통자는 그 라드라는 자 같아."
"미역머리쪽?"
"그래. 그쪽."
"뭐야, 그럼 불가해주자는 뭐하는 년이야?"
"...그걸 나도 모르겠다는 거지. 내 쪽에서 직접 물어볼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소냐가 내통자라고  거잖아? 먼저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어떤 관계가 있는 건지 모르니까. 일단 뭔가 알아내기 전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걸로 할거야."
그들은 몸을 숙였다.


"계속 사리라고. 감시자 놈들에게 걸리면 모든 문제가 왕도로 직결 전달되는 거니까."
"하, 나만 고생하게 생겼네."
"그래, 세라. 넌 좀 더 고생해야 돼. 우리 모두 그쪽하고 어떻게든 친목을 다져야 되니까."
"...노력은 할 건데, 확실히 성공은 장담 못한다?"
"그래. 노력이나 하라는 거야."
이바노프는 그렇게 말하고 잔을 꺾은 뒤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진짜 그거 꼭 해야겠어?"
세라의 질문에, 그는 짧게 답했다.


"난 꽤 마음에 들어. 넌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만."
"난 있지도 않은 거에 대고 말 건다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는  아니냐? 난 의지할 대상이 생기는 것만으로 꽤 마음에 들어."
푸르투가도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았다.


"아무튼 좆같이 흘러가는 상황속에서 의지할 대상이 생긴다는  꽤 편해지더라고."
그 말에는 세라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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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고 있어."
칼린은 대사관 옥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라도 바꿔. 감기 걸린다."
말을 건 것은 라드였다. 칼린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술은  드신 건가요?"
"아니, 잠깐 나온 거야."
아래층에서는 부대원들이 모여 술자리를 가지는 중이었다. 칼린은 전화국을 통해 요나에게 보고를 끝마치고 바로 옥상으로 올라온 것이었다.


"별 보던 거야?"
"네, 뭐."
라드의 질문에 대충 답하고서 칼린은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그리고 금화를 꺼냈다.

"역시 이거 돌려 드릴 게요, 라드씨. 제가 가지고 있어 봤자 쓸 곳이 없네요."
"왜, 가지고 있으면 좋잖아."
"...그냥 돌려 드릴 게요."
라드는 그가 건낸 금화를 돌려받고서 잠깐 칼린의 눈치를 보았다.

"들어가세요, 라드씨. 신경  줄  없어요. 라드씨도 제가 싫으시잖아요."
"내가 왜 널 싫어해야 하지?"
"그야..."
칼린은 그의 얼굴을 바라 보고서 자기 눈을 가리키고 실소했다.

"...뭐, 내 눈  짝이 없어지기는 했지."
라드는 웃으며 그의 옆쪽으로 다가갔다. 앉지는 않았다.


"그래도 별로 화나지는 않았어."
"...왜요?"
"난 마음이 넓거든."
그는 그렇게 말하며 품 속의 이빨조각을 만지작대면서 말을 어떻게 꺼내 볼지 생각해 보다가 칼린이 보던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라... 별자리라는  알아?"
"...잘은 몰라요."
"뭔지는 안다는 거네?"
"그렇죠."
"이 별자리가  신기하지. 지좆대로 그린 그림 같아 보이면서도, 전 세계적으로 그려낸 별자리들을 보면 대체로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 이거야. 하지만  대륙마다, 작게 보면 지역마다 다르게 보는 경우도 있어.  지역 풍토를 살린 그림이 나온다고 해야 되나?"
그는 그제서야 칼린의 옆에 앉았다.


"소니아한테 들었는데...  우리 지휘관이 숲에서 직접 거둔 애라면서. 벨카 출신은 아니지?"
칼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드는 최대한 칼린이 보는 곳에 시선을 맞추려 하면서 말을 이었다.


"한번만  터놓고 이야기해봐. 네가 살던 곳의 별자리는 어땠지?"
가면 뒤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것은 치명적이지만, 적어도 라드에게는 칼린의 침묵이 회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였다. 곧 칼린이 답했다.


"단 한번도 별자리같은 건 알아본 적이 없었어요. 별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왔거든요."
"...별이 잘 안보이는 곳?"
"네. 지금 생각하면 조금 후회되네요. 그런 걸 조금 알고 있었다면 지금 별을 볼 때 기분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라드는 그 말까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이미 그의 머리속에서는 별이 잘 안보이는 지방 등을 추려내는 중이었다.

"...그런가. 뭐, 태생이 떠돌이는 아니었다는 거군."
떠돌이들은 무조건적으로 별자리를 외워 둔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어디 출신이든 떠돌이출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평소에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다가 벨카 숲에 들어왔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영주와는 어떻게 만난거지? 괴물사냥이라도 하다가 마주쳤나?"
그는 방향을 바꿔서 조금 공격적인 질문을 했다. 흘리듯 한 질문에 답이 없자, 그는 고개를 칼린에게로 돌렸다. 붕대가 둘러진 더러운 가면의 뚫린 눈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죠?"
애초에 무감정하게 생긴 가면보다도, 그의 목소리가 더 차가웠다. 라드는 이 질문 자체가 역린이었을지, 괴물 사냥이라는 키워드가 역린이었을지 생각해 보며 말을 돌렸다.


"...단순히 흥미 본위였을 뿐이야. 소니아에게 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 흥미가 동해서 말이지. 떠돌이라는 건 호기심으로 먹고 살잖아?"
그는 웃으며 담배를 꺼냈다.


"민감한 질문이었다면 사과하지. 미안하군."
"...괜찮아요."
경계를 푼 걸까, 그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라드는 여기서 뭔가를 더 물어보는 것은 지뢰가 될  이라고 판단하고 성냥을 꺼냈다.


"사과의 표시로 뭐... 별이 좋다면, 윌레인 기준 별자리라도 알려줄까?"
"아뇨, 괜찮아요."
"왜. 알아 두면 좋잖아."
칼린은 라드의 말에 잠깐고개를 떨궜다가, 역시 됐다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더 이상...  이상 뭔가 알고 싶지 않아요."
미묘한 답. 뭐든지 처음 접하는 것처럼 행동하던 그가 말 할 줄은 몰랐던 대답이다.

"이곳에 더 적응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기에 라드는  수 있었다. 그의 답변이 그의 정체에 대한 핵심에 근접한 것이라고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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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아- 챠!"
바바라는 기합을 뱉어 내며 들고 있던 나무박스를 내려 놓았다. 상회측 인부들은 땀을 닦으며 웃었다.

"거, 도련님은 가만히 있어도 된다니까... 그렇게 같이 옮겨 주시면 우리 입장이 뭐가 됩니까?"
"에이, 제가 더 신참인걸요!"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나무박스를 열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아홉, 열! 이 박스도 문제없네요!"
박스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묘하게 생긴 막대였다. 철과 나무가 조합되어 있고 구멍이 뚫려 있으며, 쇠뇌에나 달려있을 법한 방아쇠가 달려 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하고 그는 다시 박스의 뚜껑을 덮었다.


"자! 마차에 올려 주세요!"
"오케이! 마지막 물량이다!"
쾌활하게 박스를 옮겨 넣는 인부를 보며, 바바라는 기분 좋게 손을 비볐다. 날이 조금 추워져서 손이 시려웠다. 하지만 고양된 기분 때문에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기분이 좋아요?"
"그럼요! 얼마나 기다리던 만남인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 관리실 쪽으로 발을 옮기며 인부들을 향해 소리치듯 말했다.


"그도 그럴게, 라드씨라니까요? '독뱀' 라드씨라구요? 그 분과 같이 일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하하... 글쎄, 난 그 형씨가 조금 소름 끼치던데..."
인부의 말에 바바라는 상쾌한 눈웃음으로 답했다.


"존경하던 분이거든요. 단 하룻밤만에 '맑은 피'를 단신으로 괴멸시켰잖아요? 진짜 대단해.  그런 건 못해요..."
"에이! 도련님도 사실 할 수 있는 거 아뇨? 이름값만 따지면 도련님이 더 높잖아!"
"아뇨! 전 운! 운이 좋았으니까!"
그는 부끄러운 듯 뒤통수를 긁으며 홍조를 띄웠다. 그리고 관리실 문을 열었다.

안에는 피떡이 된 시체들이 여기저기에 쳐 박혀 있었다. 각자 다른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을 봤을때, 하나의 무기에 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짙게 올라오는 피 냄새 사이를 걸으며 즐거운 듯 콧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관리실의 옷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그 옷장을 바라보던 그는, 콧노래를 이어 부르며 옷장에 다가갔다. 그리고 옷장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클래프상회의 옷들이 죽 걸려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들이 물자 보급을 맡고 있어야 했다. 그는 그 옷들을 하나씩 제치며 수량을 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스물 둘. 음, 충분하네! 그렇죠?"
제쳐낸 옷들 뒤에는, 몸을 웅크리고 파르르 떨고 있는 여성 한 명이 있다. 한껏 웅크린 품속에 생명줄이라도 되는  마냥 붙잡고 있는 것은 전화기였다. 옷 틈새로 보여온 바바라의 눈에 그녀는 참지 못하고 결국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 아아!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쉿! 다들 일하시잖아요!"
바바라는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의 손등으로 여성의 눈물이 따뜻하게 흘렀다.


"죽일 거였으면 벌써 죽였죠. 걱정마요, 당신은 살아남은 거예요."
그는 인자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의 인자한 웃음보다도 그 뒤에 펼쳐진 잔혹한 참상이 더 잘 보였다. 그녀는 그 참상이 만들어지던 순간을 벽장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에요. 에테롬씨 가라사대, 모든  공짜가 아니고, 사람 목숨은 가장 비싸고 고귀한 거라고 하셨어요!"
그는 천천히 그녀의 입을 막던 손을 내리며 그녀의 전화기를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의 얼굴에 들이 밀었다.


"...당신은 살았으니, 클래프상회의 보급에는 아무 문제없는거죠? 그렇죠?"
그 참상은 눈 앞의 이 남자 혼자서 만들어냈던 것이었다. 그녀는 눈물샘이 고장난듯이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참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서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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