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여진(餘震)
"전부 모였나?"
"... 거의. 교단 쪽은 지금 오는 중이야."
지하실임에도 불구하고 건조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이곳은, 윌레인의 전임 대사들조차 파악해내지 못했던 지하 회의장이었다. 전쟁 때 원활한 물자 이동을 위해 가정집들 사이마다 만들어 뒀던 지하통로들을 이렇게 쓰게 될 줄은 5년 전 까지만 해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지하통로는 칼타코의 주민들조차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에, 각자 길에 대한 정보를 분할해서 파악하고 있었다.
꽤 넓은 그 지하 공간에는 많은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약 60을 조금 넘길 것 같은 그 모임 안에서 이바노프를 포함한 세명은 단상 위로 올라와 있었다.
"저기 왔네."
단상 위에 올라와 있던 자 중 하나인, 탁한 금발을 하고 있는 중년 여성이 턱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사방으로 뚫린 터널 중 한 곳에서 곧 마을 주민과 비슷하게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나왔다.
"휴, 지나올 때마다 놀라게 되네요. 정말 넓군요."
20명 정도의 인원들. 이바노프는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온 타이밍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그들은 대사관을 무너뜨리자 마자 전보 보다도 빠르게 칼타코에 도착해 있었다.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교단에서 온 지원병력 대표, 마키도가 단상위로 올라왔다. 완벽한 빅센마르크 억양. 그가 빅센마르크 인인지 언어를 배운 윌레인 인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교단의 인력 수준을 예상케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내일부터 노동이 시작될 것이고, 상회의 중계자는 일주일 후에야 온다고 하오. 그러면 상회 병력은 당연히 그 이후에야 부를 수 있겠지. 화폐 단위도 바뀔 것이고. 조금 행동을 이르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코비는 그렇게 말했지만 이바노프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지금 변화는 오히려 받아들이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머릿속에 막연하게 떠오른 것을 정리하기 힘들었다.
"워워, 진정해요, 형제님. 상황은 끝내 주게 유리해진 겁니다."
"유리해 졌다구요?"
"그래요. 이득이에요. 화폐 통일? 어차피 윌레인과 빅센마르크 사이에 있을 거면 양측의 화폐를 전부 사용하던가, 새로운 화폐단위를 만들어야 했어요. 윌레인의 건물을 위한 강제노역, 그것들은 전부 당신들이 독립하면 온전히 당신들만의 것이 됩니다. 윌레인의 자본으로 이 땅을 성장시킬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는 안 그래도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며 웃었다.
"오만한 자들에게 철퇴는 이익을 보고 나서 휘둘러도 늦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단은 행동을 늦추자는 입장이요?"
"당연하죠! 남는 게 시간이에요! 일단 노역을 행해야 합니다."
"지금 이 거리에 포장된 길을 만드는 데에는 이주일밖에 안 걸렸었지. 그 와중에 16명이 죽었소. 지금 그 정도 강도로 노역을 다시 하게 된다면, 날씨도 날씨니 두배는 죽을 거야. 그래도 말입니까?"
"어쩌겠습니까. 인내는 믿음의 기본 소양이며, 향신료랍니다. 뿌려 두지 않는다면 결과물이 맛이 없어요."
대표는 그렇게 말하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바노프는 그의 말에 내심 감탄하면서도 속내를 숨겼다.
"그리고 상회에 대해서 말인데... 그들을 너무 믿으면 안됩니다."
"...그건 왜죠?"
"그들의 목적은 세속적인 것이니까요. 그들에게는 붉게 타오르는 여러분의 독립의 불꽃보다 그 뒤에 있을 황금이 더 빛나 보이고 있을 겁니다. 이익을 보고 도우려는 자들에게 크게 의지하면 끝은 뻔해지지요. 결국 휘둘리게 될 겁니다."
"그건 댁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단상 위에 있는, 칼타코 반군 대표측의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남성이 그렇게 말했다.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체구를 한 그는 눈 구멍이 뚫린 마대자루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 교단은 우리의 입장을 공고히 하며 찾아왔었습니다만, 이해하기 힘든 것도 이해합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만 말씀해 드리죠. 우린 당신들이 창출해 낼 어떤 이익도 기대하지 않아요."
대표자 마키도는 그렇게 말하고서 손을 모았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신념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그분 아래에 모든 이는 평등하며, 감히 사람 사이에 층계가 있어서는 안된다. 여러분과 황녀님이 이 신념에 동의했기에 아낌없이 도울 뿐이구요."
"...흥."
거구의 남성은 코웃음 치고 고개를 돌렸다. 그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띈 얼굴을 유지하며 마키도는 질문했다.
"그러고보니, 아직도 황녀님을 만나 뵐 수는 없는 걸까요? 사실 오늘은 볼 수 있을 줄 알고 이렇게 찾아온건데..."
"... 일단 기다려 주십시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아시겠지만, 황녀님이 안 계신다고 해도 우리는 당신들을 도울 겁니다. 다만... 만약 황녀님이 계시지 않고 블러핑을 했을 뿐이라면, 우리에게 승률은 없다고 말씀하려던 것뿐이에요."
"댁 교주님이 직접 만났었으니 그 점은 걱정할 것 없소."
이바노프의 단호한 말에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 했다.
"그래서, 상회에게 의지하지 말라면 어떤 식으로 방침을 정해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그들을 인적자원으로 사용하지 말고, 그저 무력으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무슨...?"
"그들과의 정보 공유를 최저 한도로만 하라는 겁니다. 뭐, 우리에게도 황녀님을 보여주시지 않는 것을 보면 알아서 잘 하실 것 같긴 하지만..."
마키도는 그렇게 말하고 실례했다며 잠깐 웃은 후 말을 이었다.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이해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급적이면 우리의 병력이 미리 주둔해 있었다는 것도 비밀로 해주시길. 교주님은 상회분들을 그렇게 달갑게 여기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상회 측에서는 교단에서 병력을 보내지 않은 걸로 알고 넘어갈 텐데요. 계약 위반으로 보게 되는 것 아닙니까?"
"걱정 마세요. 상회측의 병력들에 섞어서 지원병이 더 오게 될 테니까. 다만 우리가 먼저 여기에 주둔해 있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하자는 겁니다."
"알겠소. 그러시기를 바란다면."
이바노프는 바로 그 의도를 알아챘다. 교단은 상회를 견제하고 있었다. 먼저 속을 떠 볼 생각이리라.
"그러면 다들 이렇게 모였는데 실례지만,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내일은 아침부터 노역이 시작될테고, 앞으로는 너무 오래 모이거나 자주 모이는 것도 삼가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요."
"동감이요."
"그렇다면 다음 회의는 구호부대의 예정도착일인 일주일 후로. 아마 그때면 상회의 대표자분도 오시겠지요. 부디 그 자리에는 저도 참가하고 싶습니다."
"...교단의 주둔 병력은 비밀인 것이?"
"네. 저는 그 자리에... 이바노프씨의 가드입장으로 참가하고 싶습니다. 괜찮을 까요?"
바로 뒤에서 자신을 지켜야 할 최종방어선으로 세워 달라는 것. 그건 분명 자신에 대한 신뢰도를 파악해 두려는 의도도 있으리라.
"...문제없지."
"허단 디알테스타만. 감사합니다.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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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과."
"네? 통과라뇨?"
그렇게 되묻는 칼타코의 여성을 보며, 기욤은 성가신듯 얼굴을 찌푸렸다.
"아, 씨발... 문제없으니까 일하러 가시라고."
"하지만, 분명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은 열외라고..."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으면 능력 검증한 거지. 수작부리지 말고 일하십쇼. 다 지들 좋으라고 해주는 건데도 뺄 생각만 해대니, 원..."
기욤은 더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여성은 잠깐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저, 저는 허리를 필 수도 없어요! 전임분들도 저는 열외시켜줬었는데-"
"아, 시발. 알겠어. 열외시켜드리지."
갑작스레 바뀐 태도에 여성이 놀랄 틈조차 주지 않고 기욤은 말을 이었다.
"대신, 당신과 당신 가족은 집에만 숨어있으라고. 그 누구도 집 밖으로 나가는 건 허락하지 않겠어. 요양해줄 사람이 있어야 할 것 아뇨? 일도 못할 정도로 나약하신 분인데. 당신네 가족 중 누구 하나라도 경제활동을 하려고 한다면 징계를 먹여주지."
"그건..."
"그게 싫으면 일하던가. 우리는 전임하던 분들과는 다르니까. 일할거면 저기서 노란 명패 가져가고."
노동자 전용의 노란 명패가 열외인원 선발소에 있다. 애초에 그들은 누군가를 열외 시켜줄 생각은 없었으리라. 여인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결국 명패를 챙겼다.
"그렇지. 엄살부리지 말고 일하쇼. 들어가면서 15시에는 내가 현장감독으로 나갈 거니까 알고 있으라고 전해두고."
떠나는 여인에게 그렇게 말을 던지고 기욤은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녀의 근처에 서 있던 병사들이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거, 너무 혹독한 거 아뇨?"
"웃음이라도 제대로 참으면서 말해라, 새끼들아."
"아니, 우리한테 혹독하다고, 이걸 보고 어떻게 웃음을 참습니까."
병사들은 그렇게 말하며 서로 하이파이브를 쳤다. 기욤도 웃으며 그걸 받아줬다.
"우리는 아무튼 위엄을 유지해야 된다고. 말했잖냐. 뭔가 냄새가 나. 저 새끼들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다니까?"
"대장님 감 믿어서 좋을 게 없었던 것 같은데... 2년전에 알렌토에서 전쟁 했었을 때도 대장님이 선택지 잘못골라서 전부 좆 될 뻔하지 않았었습니까?"
"야, 아무도 안 죽었으면 그게 신의 한수지. 그게 정답이었다니까?"
"됐고, 근거 없이는 못 믿겠수다."
"근거는 확실히 있지. 눈은 거짓말 안하거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전날 집합 때 주민들의 눈을 회상해 보았다.
"난 우리 전임자들이 바싹 잘 구워진게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껀덕지만 잡아 내면 여기 놈들 싸그리 청소하는게 안전한 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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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일해, 곰탱이들아!"
도착한 물자들을 나르는 사람들에게 병사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물자를 나르는 사람 중에는 노인도 섞여 있었다.
수레를 끌던 노인이 한 명 넘어졌다. 수레의 내용물이 쓰러지며 잘 유지되고 있던 진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곧바로 병사들이 그 자리로 모이기 시작했다.
"할망, 일이 편하고 쉽죠? 막 벌렁벌렁 드러눕네."
병사의 비꼬는 말에 대답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노인은 쇠약했다. 병사들도 사실 더 할말이 없긴 했다. 현장을 지배하려 할 때는 100마디의 말보다 효율적인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그대로 단봉을 꺼내 들었다.
"잠깐."
가래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불쾌한 목소리. 병사들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근육질 남성이 서 있었다. 그는 목소리만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좆같이도 생긴 낯짝이로군."
그의 얼굴에는 화상자국이 있었다. 반짝이 쭈글쭈글하게 찌그러진 그는 얼핏 보면 문둥이 환자로도 보였다. 그는 병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을 향해 걸어가 넘어진 수레를 일으켰다.
"내가 이인분을 하지. 대신 이자를 열외시켜 주시오."
병사들은 그의 말에 잠깐 서로를 바라보다가 곧 웃었다.
"영웅 납셨다, 야. 한번 해봐."
그 말을 기다린 듯, 그는 이 쪽으로 달려오며 내려놓았던 자신만한 지게로 다가가 다시 그것을 등에 둘러맸다. 그리고 수레를 일으켜 짐을 채운 뒤, 지게를 맨 상태로 그것을 끌기 시작했다. 당황한 병사들의 시선조차 신경쓰지 않고 그는 노인까지 수레에 태워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짧게 인사를 남기고 떠나는 그를 병사들은 가만히 쳐다보았다.
"야, 저거 이름 뭐냐?"
"...리스트 확인시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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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왜."
이바노프는 석회자루를 계속해서 쌓아 올리고 있었다. 수레에 쌓여 있는 석회더미들은 더이상 한번에 옮길 수 있어 보이지 않았다.
"나 진짜로 여기 가만히 있어도 돼?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구경만 하는건..."
"너가 일하면 방해야."
"아, 진짜. 좋은 말을 안 해."
소냐는 그렇게 말하며 볼을 부풀렸다.
"기술이 필요한 일도 아니고. 나도 돕겠다니까?"
"거기 있어. 병사들 올 때 즈음에 다시 움직이던가 해. 넌 막노동같은 거 하면 안돼."
"하지만..."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을 끊어버리고서, 이바노프는 그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수레가 바닥에 무거운 자국을 남기며 끌리기 시작했다.
"...그런가."
"뭐, 그런 거지. 아무리 타협하려 해도 타협할 수 없는 선은 있는 거 아니겠어?"
단상 위에 서 있던 자중 한 명, 탁한 금발의 중년 여성이 그렇게 말하며 소냐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세라도 일 안 해?"
"아니, 아줌마는 지금 쉬는 시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가슴깨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불을 붙였다.
"뭐야, 진짜 담배야? 어디서 주웠어?"
"윌레인 쭉정이들이 다발로 들고 있더라고. 갑 째로 훔쳤지. 너도 한 대 필래?"
"나 이런 담배는 펴 본적 없는데..."
"아줌마도 전쟁 때 이후로는 처음이야. 맛있는 건 나눠야지. 안 그래?"
그녀는 인자하게 웃고서 한 개피를 더 꺼내 소냐에게 넘겨주었다. 소냐는 눈을 반짝이며 그걸 받아 입에 물었다.
"...켁! 이게 무슨 담배야! 맛없어!"
"아직 젖내가 나긴 하네, 아가씨."
둘은 웃으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곧 이바노프가 빈 수레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뭐하냐, 세라."
"아가씨한테 담배 가르치고 있었지."
"소냐는 그런 거 몰라도 돼. 뱉어, 소냐."
"베- 그렇게 말하면 끝까지 다 펴야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맞지도 않는 담배를 억지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기침을 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와 웃음이 터져버린 세라를 보며 이바노프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애초에 너가 왜 여기로 온 거야. 네 관할은 여기가 아니잖아."
"쉬는 시간이라고, 쉬는 시간."
"...쭉정이 놈들이 쉬는 시간까지 줬다고?"
"안 주면 알아서 쉬어야지."
세라는 그렇게 말하고서 담배를 음미하듯 빨아들였다. 그녀의 눈주름이 기분 좋게 쳐졌다.
"...적당히 돌아가. 너 찾다가 이쪽으로 시선모이면 곤란하니까."
"하여간 팔불출이라니까. 그지, 소냐 아가씨?"
"팔불출도 아냐. 속이 꽉 막혔다니까? 그냥 근육이야."
둘이 시시덕대는 걸 보며 이바노프는 조금 어이없는 듯 세라를 노려보다가 다시 석회를 옮기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거 봐. 신경도 안 쓰고 또 일해. 사람이 아니라 근육이라니까?"
"아하하! 확실히 아가씨 말대로네... 어이쿠, 이런. 슬슬 시간인가."
"돌아가?"
"응. 자리로 가야지. 갑자기 인원체크같은 거라도 하면 일 나니까. 먼저 간다."
"응! 담배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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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테롬씨. 소금부대가 출발했답니다."
"이제서야? 조금 늦네요... 뭐, 그건 어쩔 수 없나."
에테롬은 조금 불만족스러운 듯 눈가를 찡그렸다. 하지만 아직은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다. 이제 교단에서 연락만 온다면 라드를 통해 그들의 병력도 같이 돌입시켜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번엔 잘 부탁드릴게요, 바바라."
그 말에 그의 앞에 있던 남성이 넥타이를 고쳐 쥐었다. 키 170중반정도의, 어딘가 특징을 잡기 힘든 완벽히 평범해 보이는 남성이었다. 앳된 티를 다 못 벗어낸 얼굴이었지만, 워낙 평범하게 생겼다 보니 나이조차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는 약간 갈색머리를 띄는 앞머리를 조금 매만지고 밝게 웃었다.
"실망시키지 않을 게요, 에테롬님!"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서 그는 깍듯하게 뒤로 돌아 문을 나섰다. 여러가지로 과장된 몸짓과 높은 텐션, 휙휙 바뀌는 표정까지 '신입'이라는 느낌이 강한 사람이었다.
"...에테롬씨, 안목을 의심하려는 건 아니지만... 저 분이 정말 에테롬님의 직속부대에 들어갈 정도의 실력자가 맞나요?"
할란이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서 걱정되는 듯 에테롬에게 묻자, 그는 그저 웃었다.
"할란, 바바라의 이명이 뭔 줄 압니까?"
"죄송합니다. 그 쪽은 잘..."
"그의 이명은 명안(明眼)이에요. 떠돌이의 이명은 보통 뭔가 업적을 세웠을 때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법이죠. 그의 이명이 언제 생겼을 것 같습니까?"
"... 전쟁 후... 일까요? 아직 그, 이쪽에 익숙한 느낌이 아니었는데..."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할란에게, 에테롬은 다시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라티아... 지금은 기계기술로 8도시의 위치까지 올라왔지만, 그 전에는 상당한 우범지역이었어요..양대로 분립된 범죄조직들끼리 매일 싸움을 벌였죠. 그 싸움의 막바지 즈음에 벌어진 일이예요.
범죄조직의 관리하에 운영되고 있던 집창촌을 다른 범죄조직이 습격했어요. 새벽에, 한창 바쁠 시간에 자객들이 몰려와 대놓고 사람들을 죽여대기 시작했죠. 바바라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는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자객 여섯을 젓가락 하나로 죽여버렸습니다. 그 때 부터 생긴 이명이에요."
할란은 그제서야 조금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범죄조직이 고용할 정도의 자객이면 별로 실력자는 아닌 것이다. 6명도 실력의 척도로 재기에는 애매하다.
"...젓가락이 아니라 검을 주신다면, 저라도 일반 범죄조직의 자객 여섯 정도는 어찌 저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엥? 진짜요?”
에테롬은 그 말에 놀란 눈으로 할란을 돌아봤다가, 곧 농담이라며 표정을 풀고 웃었다.
"알아요, 전투요원이 아닌 당신도 뭐, 그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죠."
"그러면 왜 그를 상회의 전투요원으로 세우신 겁니까?"
"그는 그 때 8살이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