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여진(餘震)
"...다들 가지가지 하는군."
이리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냐?"
"칼린하고 대화나 하려고. 넌 거기서 애새끼 마냥 뒷담이나 하고 있던가."
륑게에게 그렇게 말하고서, 이리하는 문을 나섰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니아가 갤러한을 찔렀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거야...?"
갤러한은 소니아의 말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대답을 피했다. 솔직히, 그조차도 잘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즐거웠던 술자리는, 모두가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린 것으로 조용히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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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
이리하는 달려가서 비척거리며 걷던 칼린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이리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괜찮을 리 없었다. 멍청한 질문이었지만, 나름 칼린에게는 도움되는 말이었다. 그는 가면을 들어 올렸다.
"참... 죄송해요. 잘 노시고 계셨는데 분위기를 망쳤네요."
"네가 사과할 게 아냐.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
이리하는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테니까... 그냥, 너무 상심하지 말아줬으면 해."
"이리하씨는 아세요?"
"나도 알고, 너도 알지. 우리는 알고 있어. 원하지도 않은 힘 때문에 죄인이 되어버리는 기분을 알고 있어. 아니야?"
칼린은 그 말에 명치를 찔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꽤나 정곡에 가까운 말처럼 들렸다.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선택지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지. 능력을 숨기며 어떻게든 평범해지고 싶어하거나, 능력을 밝히고 눈에 보이는 모든 자들을 적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그런 자들끼리 모이는 경우도 있어."
칼린이 걸어가려는 길. 그것을 이리하도 알고 있다. 모두와 섞이고 싶어서 애쓰지만, 끝까지 이기적일 수가 없어서 결국 몰락하는 경우. 그와 같은 길을 걷다가 무너진 자를 그녀는 이미 많이 봐왔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난 네가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 줄게."
"...왜죠?"
"난 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믿고 있거든."
"뭐를요?"
"선한자의 고뇌는 세상을 부드럽게 하고, 강한자의 고뇌는 세상을 이끌어 나갈 원동력이 되지. 넌 강하고 선한 자야."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으신 가요."
"내가 너를 만난 건 필연이니까. 내 대답들을 지금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언젠가 모든 걸 설명할게. 그 때 까지는 계속 고뇌하고, 네 답을 찾아줬으면 해."
이리하는 그렇게 말하고서 웃었다. 평소에 보이는 웃음과는 다른, 진짜 감정이 보이는 듯한 웃음이었다. 칼린은 그녀의 말을 곱씹다가 입을 열었다.
"참고로 묻는 건데... 이리하는 어떤 선택을 하셨나요."
이리하는 칼린의 손을 잡았다.
"전에 말했지. 우린 언젠가 동료가 될 거라고."
그녀는 칼린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흰색 눈과 머리가 그대로 비쳐 보일 정도의 깔끔한 흑색. 그 눈을 바라보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말했다.
"난 나와 같은 자들 사이에 들어가는 걸 선택했어. 너도 그래줬으면 좋겠고 말야."
시원할 정도의 말을 남기고, 이리하는 등을 돌렸다. 칼린은 가만히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시간의 밤거리는 가을 하늘만큼이나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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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은 가을비와 같이 지나갔다. 평소와 같이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요나는 명단을 전부 부른 후 모인 인원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보가 내려왔다. 이번 소금부대가 향할 곳은 빅센마르크의 접경지인 칼타코이다."
요나는 부대원들의 반응을 보았다. 일부는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다들 어디인지는 대충 아는 것 같군. 그래도 대충 설명하자면, 전에 빅센마르크 영지였고, 아직도 빅센마르크인이 대부분인 영지다. 지난번 있었던 윌레인 대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본 영지의 윌레인 대사관이 화재로 소실되고, 대사들 중 생존자도 발견하지 못했다. 귀관들의 임무는 그 곳에서 복구작업을 도우며 현지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과, 윌레인의 통제권을 되찾는 것이다."
작게 웅성임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목을 한번 가다듬는 것으로 그 소란을 잠재우고 이어서 말했다.
"현지에는 이미 윌레인의 병사가 대기되어 있다. 귀관들은 현지의 윌레인 병사들과 함께 그쪽 영지민들의 건강한 애국심 고취를 목표로 노력하도록. 질문받겠다."
대부분의 부대원이 손을 들었다. 요나는 먼저 갤러한의 질문을 받았다.
"그 병뚜껑 놈들이 대사관 불태운 건 아닙니까?"
병뚜껑이란 빅센마르크 제식 갑옷에서 유래된 비하 발언이었다. 그들의 투구가 납작한 형태를 띄고 있기에 나온 말이다.
"그들을 우리와 따로 분리하려고 하지 말아라. 이젠 모두 윌레인의 백성이다."
요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분명 윌레인에 반하려는 자들도 있겠지. 그런 자들을 색출하는 것도 '애국심 고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질문."
"릴로."
"그럼 반동분자로 판단되는 자는 전부 즉결 처형합니까?"
돌려서 대답한 말에 다시 직설적인 질문을 던지는 릴로를 보며, 요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 재량에 맡긴다. 윌레인은 어디까지나 인도적인 대우를 원하지만, 혼란한 시기를 틈타 국가의 안전에 위협을 가하려 하는 자들은 일벌백계로 다스리기를 원한다."
반동분자는 잡는 즉시 공개처형, 다만 그 의사는 윌레인 상부측의 의사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릴로는 적당히 납득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략 하려던 질문은 다들 비슷했나 보군. 더 질문이 없다면 오늘 임시모집은 이걸로 마치겠다. 출정은 다음주 내로 언제든 될 수 있으니 상시 대기를 하고 있도록. 그리고-"
그녀는 담배를 물고 속주머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귀관들은 이제부터 특수 우대권을 받는다. 부대 해산이 가까워짐에 따라, 귀관들이 무사히 명예제대 했을 경우 얻게 될 다양한 혜택들이 포함되어 있다. 다들 내용을 꼭 한번 읽어 봐주길 바란다. 나갈 때 한 장씩 가져가도록. 이상이다."
다시 술렁이는 부대원들 사이로, 요나는 라드와 눈을 마주했다. 라드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회의장을 나왔다.
"칼린, 난 자리에 남아서 처리할 것이 있다. 먼저 업무에 들어가 다오."
"네."
그걸로 칼린을 포함한 모든 부대원이 회의장을 나왔다. 5분정도가 지났을까, 빈 회의장에 라드가 다시 들어왔다.
"라드. 왜 불렀는지 알겠지."
"글쎄요. 노고를 치하하며 특별한 혜택이라도 주시렵니까?"
능청부리는 라드를 보며 요나는 입가를 끌어 올렸다.
"상회의 계획을 말해라."
라드는 크게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천천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영주를 막을 수 있을 만한 결정적인 무기가 있으나, 어떻게 쓰는지를 모른다. 그렇다고 영주에게 끌려 다니기만 해서는 상황이 절대로 좋아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번 임무도 실패한다면 라드의 누이는 그때야 말로 죽는다.
"상회에서는-"
물론 그는 영주에게 할 말을 미리 준비해 뒀다.
"이번에는 특별한 계획을 가지지 않은 듯 하던데요. 지난번 임무에서 우리가 살아남은 걸로 데버만의 영주와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답니다. 이번에는 한 수 참는다더군."
"...그렇게 말했다고?"
"음... 그리고 벼랑 끝이라고 자기만의 병력을 준비하고 있던데, 이름 깨나 날리던 범죄자들이나 실력자들을 모으고 있더라고."
라드의 말에 요나는 조금 생각해 보았다. 상회의 귀는 테이블 밑에도 달려있다, 그런 격언이 있다. 다임상회가 칼타코의 상황을 모를 리는 없을 것이고, 약간 비약해보면 소금부대의 다음 목적지가 칼타코라는 것도 예상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약의 경우였다. 당장 눈에 더 띄는 피해지역은 비나흐였고, 다임상회가 칼타코의 상황을 국가보다 자세히 알 확률도 적었다. 이런 전개도 충분히 있을 수는 있는 건가, 하고 요나는 조금 납득했다.
"...뭐, 상회에서 부대원을 모집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에테롬이 이번 임무에 대해 예상한 것은 따로 없었나?"
라드는 요나가 에테롬이 부대원을 모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경악을 감췄다. 확실히, 저년이라면 어떤 수단을 써서 어떻게든 알아냈겠지. 여기서 방법까지 묻는 것은 욕심이다. 그는 흘러나오는 식은땀을 눈앞의 요녀가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며 말했다.
"...비나흐에 갈거라면 '디알테스타만'을 경계하라 합디다."
"...디알테스타만?"
"그래. 이번 비나흐 열차폭발사건의 주범들이라더군. 상회와 협력관계에 있는 무장단체인데, 신념으로 움직이는 놈들이라서 적대하면 곤란하데요."
"...그들의 목표는."
걸렸다. 이번 칼타코의 임무에서 요나의 경계 시야를 상회에서 돌릴 수단. 동시에 상회가 교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칼타코에서 반군을 도울 수 있게 만들어줄 방법.
요나의 경계 시선을 교단으로 돌리게 한다.
"신분제와 마도방식 기술의 완전한 폐지. 랍니다."
아둔한 자라면 그냥 넘어갔겠지. 하지만 요나처럼 머리를 계속해서 굴리는 자에게 이 정보는 오히려 독이된다.
요나의 머리속에서는 이미 칼타코의 반군을 지원하는 '디알테스타만'이라는 조직이 그려지고 있었다.
"...나쁘지는 않은 정보로군. 그들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봐라."
라드는 자연스럽게 턱을 타고 흐르려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시간을 벌었다. 남은 것은 그 '이빨'에 대한 비밀을 찾아내서 요나에게서 완전한 우위를 잡아내는 것. 이번 임무를 성공시키고 요나의 약점까지 잡으면, 그와 누이는 완전한 자유가 된다. 에테롬은 개자식이지만, 그는 절대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놈들의 표식은 역십자고,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그... 사람이 아니라 뭔가 개념적인 걸 믿고 따르고 있소. 제정신이 아닌 것들이지."
그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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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대단한 걸... 이것 좀 봐, '직계 가족, 사촌 이하의 관계를 가진 모든 친지들까지 포함해 선택적으로 면죄 가능'이라니. 가족만 있었다면 정말 유용하게 썼을 것 같아. 게다가... 전과삭제라고? 하,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무법자처럼 하고 다녔을 텐데."
"그러게요."
갤러한은 리쿠르트를 잡고 명예제대자의 혜택에 대해 읽어주고 있었다. 리쿠르트도 생글거리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오! 주택지 선택에 우대권, 국방에 대한 세금 면제, 와, 씨발! 자영업계로 갈 경우 관련 업계 권위자에게 수업을 들을 수도 있다네! 소니아는 이거 보면 환장하겠다, 그지?"
"그러게요."
"게다가 이것 좀 봐! 기사시험에 지원할 경우 시험 없이 작위가 수여되고, 명예 귀족자리까지 생긴 다네! 결혼할 경우에는 배우자까지 명예 귀족의 성이 부여된데! 아, 그치만 자기는 이미 귀족이었던가?"
"그러게요."
"...화났어?"
계속 똑같은 답을 하는 리쿠르트의 눈치를 조금 보며 갤러한이 작게 물었다. 리쿠르트는 또 '그러게요'하고 답 할 뻔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을 끊었다.
"아, 그런 게 아니에요. 죄송해요."
"그럼 뭐야...? 혹시 내가 성급하게 이야기 꺼냈던 것 때문에..."
"아뇨! 진짜 그런 문제는 아니에요! 그냥..."
짐짓 말을 잘 꺼내지 못하는 모습에 갤러한에게 한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혹시, 칼린이나 영주문제야?"
리쿠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그 상태로 잠깐 숨을 고르고 말했다.
"...갤러한, 당신 말이 맞았어요. 요나는 정상이 아니었어요."
"...유감이야."
"그러게요. 전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신났었네요. 죄송해요. 당신 말이 전부 맞았어요."
갤러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알기를 바랐지만, 동시에 그녀는 이런 진상을 모르고 그냥 마음 편히 있다가 지나가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을까?"
"칼린의 상태가 이상했었죠. 또 저만 눈치채지 못했던 상황이었고. 나중에야 눈치채고 요나에게 따지니 본색을 드러내더군요."
그녀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분노 때문이 아닌 자책이 담긴 것이었다.
"...참 바보 같았죠. 아무것도 모르고 요나와 차나 마시면서..."
"진정해. 영주는 꽤 치밀하니까, 숨기려고 한다면 성 안에서 그런 걸 숨기는 건 일도 아니었어. 네 잘못이 아니야."
"아뇨, 제 잘못이에요. 멍청하게 속고 있었어요. 제 제자가 괴로워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이래서야 전 바뀐게 없네요."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정신을 차린 듯 갤러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요나가 저를 성으로 잡아 두려고 했던 이유. 그건 저를 칼린을 붙잡아 두려는 수단으로 쓰려던 거곘죠. 갤러한씨도 그걸 느껴서 칼린과 거리를 뒀던 거군요."
확실히 리쿠르트는 머리가 좋다. 갤러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바로 알아채는구나."
"...그게 해결책까지 바로 나온다는 뜻은 아니죠. 지금은 그냥... 너무 무기력해서..."
갤러한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종이를 옆으로 밀치고 바닥에 그대로 누웠다.
"...요나가 칼린을 잡을 수 있는 건, 둘 사이의 비밀 때문이야. 아직 그 내용은 모르겠지만 그걸 알면 완전히 칼린을 빼돌리는 것도 가능할지도 몰라."
그래, 그 비밀이 뭔지만 알아내면 상황은 급변할 수 있다.
"네가 전에 말한적 있었지. 칼린은 이런 곳에 묶여 있을 애가 아니라고. 내가 같이 부대 활동하면서 느낀 건, 애가 참 곱게 자랐다는 거랑, 지 고향을 존나게 그리워하고 있다는 거야..."
천장을 바라보며, 갤러한은 웃었다.
"... 점점 나락으로 가고 있거든. 아무래도 전장이 많이 힘든 가봐. 이러니 저러니 해도, 걔가 점점 이런 엿같은 상황들에 적응하고 있는 걸 보면 좀 씁쓸하단 말야."
그리고 리쿠르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금방 뭐라도 알아 올게. 그 전 까지는 괜한 짓 하지 말고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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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 때 즈음을 윌레인의 국민들은 가을이라고 칭한다. 이 다음에 오는 냉혹한 추위를 겨울이라고 칭한다. 겨울은 백색이다. 단순히 시각적인 것 만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다.
4계절이라는 것은 참 사람인생에 대입하기 좋은 것이다. 조용하고 삭막한, 건조하게 모든 것을 거두는 겨울은 인생으로 비유하자면 죽음이다. 그리고 이 곳, 그가 태어났으며, 그의 4계절을 전부 보낼 이 땅에는 겨울이 일찍 찾아온다.
벌써 살얼음이 지기 시작하는 광활히 펼쳐진 호수를 보며, 올가 이바노프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앙상하게 뻗은 나무가지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낚시줄에 입질이 걸려온다. 손목을 가볍게 휘두르면, 중독될 것 같은 손맛이 그의 전신을 타고 흐른다.
그가 건진 것은 잉어였다. 그것도 꽤 큰놈으로. 그는 두텁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 잉어를 바라보았다. 생선은 그저 무표정하게 몸을 팔딱이고 있다. 설령 저것들이 말을 할 수 있더라도 그에게 목숨 구걸은 하지 않으리라. 생선이라는 것들은 죽음이라는 개념을 모르니까.
이바노프는 그 잉어의 꼬리를 붙잡고 바닥에 강하게 내리쳤다. 잉어의 머리가 마치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그는 주머니의 칼로 터진 잉어의 머리를 끊어내고 대충 손질한 뒤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한 마리 잡을 때마다 이 짓을 하는 것은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지만, 반 정도는 그의 취미생활로 하는 일이었기에 그는 이 낭비까지 사랑했다.
죽음. 이 혹한의 땅에 사무치도록 가까운 것. 그러나 그렇기에, 이 땅의 전사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잉어와 그들의 차이점은 거기에 있었다. 죽음을 모르기에 겁이 없는 것, 죽음을 알기에 겁이 없는 것.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건 결코 그가 감상에 빠졌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다만 생리적인 반응이었을 뿐이다. 그가 눈을 비비며 느리게 뒤를 돌아보았다.
윌레인의 배부른 돼지새끼들이 잘 타고 있다. 기름이 너무 많아서 튀겨지지 않을까, 라는 농담을 했었는데, 그러지는 않는 것을 보면 튀김을 하는 데에는 다른 뭔가가 필요 했었을지도 모른다. 곧 그를 향해 무장한 남녀 한 쌍이 다가왔다.
"이바노프씨, 교주님에게서 연락입니다."
이바노프는 말없이 손을 뻗었다. 그들이 건낸 전화를 받자, 너머에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이바노프는 대답없이 그 말을 듣다가 전화를 끊었다.
"뭐라고 하십니까?"
교단에서 지원을 보낸 자들. 이바노프는 이 사람들이 퍽 싫지 않았다. 그는 낚싯대를 정리하며 짐을 챙겼다.
"상황을 확인할 부대가 올 거 랍니다. 상인의 병력들도 올 거고."
그는 담배를 꺼내 불타고 있는 윌레인의 대사였던 것들로 불을 붙였다.
"우리도 슬슬 준비하죠."
2미터가 넘어가는 그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털이 빠진 곰에 가까웠다. 그는 눈보라가 다가올 것을 느꼈다. 이번 겨울은 특히 더 일찍 올 듯했다.
"그러나 독립의 불길은 눈보라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리라."
비밀 결사의 대장, 올가 이바노프는 그렇게 혼잣말 하고서 도살용 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심문을 위해 단 한 명 살려 놓은, 죽음을 알기에 겁쟁이인 자를 만나러 갔다.
칼타코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그것이 북풍일지 변화일지는 아직 누구도 알 수 없다.